第百章 ― 결초보은(結草報恩)
혹자는 말한다.
무림이란 낭만과 멋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라고.
호사가들은 말한다.
무림이란 사랑과 증오, 우정과 오해로 점철된 하나의 경극이라고.
하지만 한때 청월루의 파락호 대장이었으며, 현 무림맹주의 호법이기도 한 철우는 그딴 말을 지껄인 놈들이 눈앞에 있으면 그의 솥뚜껑만 한 손으로 머리를 꽉 붙들고 외쳐 주고 싶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아라!’라고 말이다.
무림은 참 지랄맞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자들이 참 더럽고 이기적이다.
예전부터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전에 어떤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마도(魔道) 쪽으로 확 행보를 바꿔서 주제파악 못하는 노친네들을 싹 뒤집어 쓸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도대체 왜 반대한답니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다고 했는데도 목소리에 살기가 실리고 말았다.
찻잔이 쩍! 하고 갈라진다.
갈라진 찻잔에서 새어 나온 찻물이 다탁에 놓여 있던 서찰을 다갈빛으로 적시고 있었다.
“기득권을 지닌 기존 세력의 불안감이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더러운 늙은이들. 자기 문파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니까 심통이라도 났답니까?”
“허어, 자네. 진정하게.”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현재 정파무림을 돕는 유일무이한 아군을……. 그 덕분에 삼호방을 상대하며 피를 흘릴 희생자들이 얼마나 줄어든 건지도 모르고!!”
드드드드―
쩌적!!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다탁이 진동하다가 결국 강대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다탁 위의 찻잔이 여덟 조각으로 쩍하니 쪼개져 버리고 말았다.
쿵, 쿵, 쿵!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암습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처소 전체를 무너뜨릴 만큼 강대한 기세가 넘실거리자 주변을 지키던 호위무사들이 대경하여 맹주의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괜찮소.”
“하나…….”
“별일 아니오. 호법께서 잠시 감정이 격해지신 것뿐이니 신경들 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
“허어, 비켜 주지 않을 것이오?”
백상일이 단호하게 말했으나, 호위무사들은 어찌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방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번 맹주는 특이하게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호위의 중요성도 더욱 클 터.
게다가 방금 맹주의 호법이 드러낸 기세는 분명히 살기인만큼, 맹주를 인질로 잡고 거짓말을 시킨 것일 수도 있으니 그냥 돌아가기가 찝찝했던 것이다.
“이 불손한 것들, 감히 맹주께서 말씀하시는데 불복하는 것이냐?”
오싹!
맹주의 방문 앞에 모여 있던 십여 명의 초일류고수들이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거구의 육신.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밤송이처럼 삐죽하게 돋아 있는 수염. 거기에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철우가 고개만 돌려 뒤를 노려보자 그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릴 듯한 압박감을 느낀 것이다.
“매, 맹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혹시 무, 무슨 일이 생기면 지체 말고 불러 주십시오.”
맹주의 처소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말을 더듬거리면서 문을 닫고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끝까지 맹주님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말한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한 것들입니다. 맹주의 명이 내려졌음에도 우물쭈물거리지를 않나, 거기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확실히 알아보든가. 살기를 좀 내비쳤다고 움찔 떨면서 물러서는 꼬락서니라니.”
철우가 탐탁지 않다는 듯 중얼거리자 백상일이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자네의 살기가 어디 보통 살기던가.”
“이 정도도 못 버텨 내면 무림맹주의 호위를 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나름 구파에서 고르고 골랐다는 자들이 저따위라니……!”
“몸을 낮추고 황실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이지. 경험이 부족한 걸세. 능력만큼은 출중하니 곧 나아지겠지.”
무림맹을 자진 해체한 뒤 정도의 문파들은 각자 내실을 다질 뿐, 분란을 일으켜 눈에 띄는 것을 경계하며 꺼려했다.
철우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무림맹주의 호위라기엔 너무 부족해 보였다.
“그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구파에서 일부러 경험도 없는 초짜 놈들을 보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 면도 분명 있을 걸세. 무림맹주의 호위로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낼 게 빤한 자리에 문파 최고수를 보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저딴 놈들보단…… 철우파 녀석들이 훨씬 나았습니다.”
철우의 눈에 아련한 그리움이 스쳤다.
청월루에서 지내던 시절. 비록 부족한 면은 많지만, 그의 명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정도로 충성스럽고 강인한 수하들이 때때로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네, 이제 그 시절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 않나.”
백상일은 처음으로 표정을 조금 굳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마 무림맹의 중진들은 자네가 내 곁을 항상 지켜 주기 때문에 호위에 대해 신경을 덜 쓴 면도 있을 걸세. 무림십대고수인 자네가 내 곁에 붙어 있는데 누가 감히 암습을 시도할 수나 있겠나.”
무림십대고수.
그 말을 들은 철우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철우는 항주 금선로에서 비밀스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던 가명이었다.
그의 진짜 이름은 가면철왕(假面鐵王) 항우.
초패왕의 환생이라 불렸던 역발산기개세의 초절정 고수가 바로 그의 진정한 정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진짜 이름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항우가 진짜인가?
아니면 철우가 진짜인가?
그로서는 최근에 지내 온 철우가 오히려 진짜 자신의 모습 같았다.
“맹주, 저는 때때로 혼란스럽습니다. 가면철왕이라 불리던 시절의 제가 진짜인지, 청월루에서 보내던 호쾌한 시절이 진짜인지.”
“자네……!”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건 아마 제 그릇이 맹주처럼 크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친우라고 생각했던 장 객주가 곤란에 처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철우의 눈빛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저는 이미 예전에 한 번 그와의 약속을 못 지킨 적이 있습니다.”
“청풍객잔과 싸움이 났을 때의 이야기인가…….”
“예. 그때는 청월루의 철우로서 했던 약속이고, 대의가 걸려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저는 가면철왕 항우로서 약속했습니다.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림맹이 장 객주의 뒤를 지켜 줄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자네…….”
“…….”
“그래, 그 정도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백상일 또한 이런 식으로 일처리가 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다만 무림맹의 창설 초기부터 크게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 처세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무림의 중진들 중 모두가 반대한 것은 아닐세. 소림과 무당에선 무쌍귀와 귀마대로 불리는 그들을 포용하고 돕자고 말했어. 다만 화산과 종남에서 그것을 반대하고 나섰네. 정체도 모르고 대면해 본 적도 없는 자들을 무림맹에서 나서서 보호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야.”
“…….”
“그렇게 화난 표정만 짓지 말게. 그쪽도 완전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들 입장에선 안 그래도 여력이 별로 없는데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돕기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을 테지.”
철우는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사람의 도리라는 게 있는 겁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삼호방을 상대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자들을 내버려 두다니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 싸웠다는 것…… 사람들은 아직 그 기본적인 전제조차 믿지 못하고 있네.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지. 하나는 장 객주의 세력이 사실은 삼호방과 한편인데 무림맹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삼호방을 없앤 척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호방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약해서 당했다는 걸세.”
“그런 쳐 죽일……!”
“어허, 흥분하지 말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은 그래도 삼호방의 세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는 자들일세. 그들의 입장에선 그렇게나 강한 삼호방이 하루아침에 듣도 보도 못한 자들에게 당해 멸문당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 것이지. 그러니 장 객주의 세력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작전의 일환으로 납득을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나.”
“끄응…….”
철우는 분을 참기가 힘들어서 자꾸만 커다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도대체 발전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북천맹한테 당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아직도 오만함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고질병이지. 아마 평생 고쳐지지 않을 걸세.”
철우는 치솟는 분노에 다시 한 번 마도(魔道)로 전향할까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정명정진해야 하는 정파의 사람일세.”
“……끄응, 알겠습니다.”
하나 백상일은 그런 철우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고, 철우는 그 유혹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해야 하겠지.”
“설득이라면……?”
“사실 이미 소림 방장이신 각로 대사께서 중재안을 내놓은 상태네. 아직 제대로 확인한 것은 하나도 없이 소문으로만 정보를 듣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태가 생기는 것이니, 각파에서 진상을 규명할 사람을 보내 확실히 확인해 보자고 하셨네.”
“뒷말을 없애겠다…… 는 겁니까?”
“그렇지. 각로 대사께선 정말로 혜안을 지니신 분일세.”
소림 방장 각로 대사.
현 무림을 실질적으로 영도하는 수장의 자리는 역시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됐습니다. 각파에서도 정말로 강서성의 모든 흑도 문파들이 당했고, 삼호방이 완전히 멸문당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장 객주를 돕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으음…….”
“맹주께서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일만 확실히 확인되고 나면 더 이상의 방해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제가 가면을 쓰고 다시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가면을 쓰고 나선다.
즉, 초패왕의 가면을 쓰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네, 진심으로 마음을 정했군.’
철우는 사실 호걸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여우보다도 더 민활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설령 조사대를 보낸다고 해도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단언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확고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장 객주는…… 지나치게 뛰어나지. 조사대로 간 자들이 그걸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는 걱정이네.’
무림맹주 백상일은 착잡한 심중으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 ☆ ☆
정신을 차린 왕욱(王旭)은 자신이 농가의 창고로 보이는 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초 특유의 쌉쌀한 냄새와 함께 푹신하면서도 거칠거칠한 감촉이 등 뒤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아직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대들보 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은 가축을 먹이기 위해 말리고 있는 보릿대일 게 분명했다.
‘이건, 아우의 집에서 자주 맡았던 냄새가 아닌가.’
우수한 학자들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기이하게도 농사와 이재(理財)에 집착하던 것이 바로 그의 아우 왕분이었다.
가끔 항주에 있는 왕분의 집에 찾아가면 자랑스럽게 보여 주던 농토와 곳간에선 항상 이런 냄새가 났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끄응, 여긴……?”
왕욱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눕혔다.
두툼한 뱃살을 접으며 일어나려던 순간, 왼쪽 어깨부근에서 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끄오오오―!”
왕욱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남자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평생 글과 학문만을 벗삼아 살아온 왕욱이 언제 이렇게 육체적인 고통을 느껴 보았겠는가.
그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극렬한 고통에 혼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시 머리가 하얗게 된 채로 몸을 비틀고 있자니, 너무나 차분해서 도리어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그 말과 함께 상처가 난 왼쪽 어깨 부근에서 무언가가 꾹꾹 누르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는데, 신기하게도 그러자 고통이 조금 완화되면서 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고, 공 부장!”
“정신이 드십니까?”
“이게 어찌 된…… 어흑!”
왕욱은 당황하며 몸을 다시 일으키려다가 왼쪽 어깨를 손으로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고통이 완화되기에 괜찮을 줄 알았더니, 움직이려 하자마자 아까보다 오히려 더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다시 한 번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며 이번엔 어깨와 가슴 부근까지 꾹꾹 누르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시 후, 왕욱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쉴 수 있을만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당황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고, 공 부장이야말로 괜찮은 겁니까? 그쪽이 도리어 더 크게 다친 모습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는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금의위 부장 공보하.
황군에 소속된 무재(武才)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금의위에서 최연소로 부장의 자리에 오른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인재가 공보하다.
얼마 전에 있은 항주 지부대인 문표의 역모 사건 때도 그가 앞장서서 난을 진압했다던 이야기는 유명했다. 공보하는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왕욱조차 명성을 들었을 만큼 유명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공보하가 지금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의는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항상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흘러내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깨와 가슴, 허벅지와 옆구리에 각각 큰 상처를 입은 듯 보였는데, 내의를 길게 찢어 상처 주위를 감아두었으나 넘쳐흐른 피 때문에 붕대삼아 감아 둔 천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공 부장……!”
괴로울 것이다.
고작 어깨에 칼 좀 찔린 것만 해도 이렇게나 아픈데, 저렇게 많은 곳을 길게 베였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신음 소리 한 번 안 내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은 기억이 나십니까?”
왕욱은 공보하의 질문에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다.
“예.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흑화보의 살수들이 덮쳤고…… 마차가 전복된 뒤에 공 부장이 나서서 싸웠지요. 그 뒤로…… 제가 어깨에 부상을 입으면서 기절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공보하가 파리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부족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왕욱은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서 혈투를 벌이면서까지 제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부족하다니요. 오히려 제가 은공으로 모셔도 부족합니다!”
왕욱은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은(恩)과 예(禮)를 크게 중시하는 것은 왕씨 집안의 가풍이었다.
그가 기절하기 직전까지 무려 십여 명이나 되는 살수들을 상대로 공보하가 사투를 벌이던 것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텐데 어찌 그를 탓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건 어차피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공 부장, 그건…… 아니, 지금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좀 더 몸을 아끼십시오. 더 이상 다쳐선 안 될 일이 아닙니까?”
“……예.”
공보하는 대답을 하긴 했으나 납득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마 그가 보기엔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더욱 험난해 보이기에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입고 있던 금의의 밑단을 찢어 상처를 다시 한 번 감은 뒤, 입을 열었다.
“왕 학사님,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예,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남경에 있는 원회 장군의 군부대에 도착할 때까지는 고통을 참고 철저히 제 지시에 따라 움직이셔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공 부장은 저를 부하라 생각하고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공보하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왕욱을 응시했다.
“남경까지는 아직 거리가 삼분지 일이 남았습니다. 말을 타고 한나절은 더 가야 도착한다는 뜻입니다.”
“도보로는…… 사흘은 걸리겠군요.”
“왕 학사님의 부상 상태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욱 느려질 것입니다.”
왕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상의 정도만으로는 공보하가 더 심해 보였으나, 고작 어깨에 입은 상처 하나 때문에 그가 짐이 된다니 남자로서 부끄러웠던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그런 기색을 느낀 건지 공보하가 양해를 구했다.
“아, 아닙니다. 사실인데 어쩌겠습니까. 하하, 평소에 몸을 단련해 놓지 않은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살수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마차가 전복된 지 이틀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실에서 조사에 착수하고 가족들에게도 연락이 갔을 것입니다.”
“자, 잠깐. 이틀이라고요?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공보하의 차분한 대답에 왕욱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틀이라니.
어깨에 칼을 맞고 쓰러진 지 이틀 동안이나 그는 꼬박 누워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짐덩이도 이런 짐덩이가 없다.
왕욱은 미안해서 차마 공보하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살수들의 습격이 세 번 있었습니다.”
“세번이나?! 괘, 괜찮았습니까?”
공보하는 천으로 칭칭 감아 놓은 자신의 상체를 한 번 흘깃 쳐다본 뒤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끄응.”
저런 큰 상처를 몇 개씩이나 입고도 별거 아니라 말한다.
왕욱은 오히려 부담감이 커져 버렸다.
“그런데 황실에서 조사대가 벌써 올 거라는 게 사실입니까? 겨우 이틀인데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왕 학사님께선 황실에서 직접 보낸 연락책이십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더군다나 최근엔 흑화보를 통한 암살이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금의위와 동창에서 황실의 특명을 받은 관리분들을 특별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
왕욱은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황실 금의위의 부장인 공보하가 그에게 호위로 붙은 것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 시대가 너무나 수상하기에 금의위의 부장을 붙여 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준 것이다.
“반나절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연락이 가지 않으면 경고, 위기, 사건순으로 상황이 변하고, 사건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조사대가 파견됩니다. 아마 지금쯤 제 동료들이 현장을 샅샅이 살핀 뒤 뒤를 따르고 있을 겁니다.”
“그럼 다 잘된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살수들의 추적을 피해 이동하다 보니 그들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식을 남겨 두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곳도…… 살수들이 더 빨리 찾아낼지, 아니면 금의위의 동료들이 먼저 찾아낼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
“만약 살수들이 먼저 찾아낸다면 상황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이쪽은 큰 부상을 입은 공보하에 움직일 수도 없는 짐덩어리가 하나 있다.
상황을 인식한 왕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그렇게 서로 딴곳만 바라보며 침묵이 흐르길 잠시. 갑자기 공보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왕 학사님.”
“예?”
“움직이지 마십시오. 절대로 이곳을 벗어나셔서는 안 됩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씀…….”
“적입니다.”
적.
간략한 그 설명에 왕욱의 눈에도 경악이 흘렀다.
“그렇다면 살수가……!”
“쉿! 삼 장 이내입니다. 이제부턴 입을 열지 말아 주십시오.”
“……!!”
왕욱은 그 말대로 입을 다물었으나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공보하에게 보냈다.
공보하는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곳곳에 중한 상처가 새겨져 있음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공보하에게선 일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유엽도를 살짝 감아 쥐고 몸을 낮추는 모습이 너무나도 능숙했다.
스윽―
육 척 장신의 몸으로 예기(銳氣)를 극도로 끌어 올린 공보하. 그의 주변으로 마치 서리가 낀 것 같은 냉기가 흘렀다.
긴장된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공보하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결국 참지 못한 공보하가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자 어느 농가의 창고 앞, 흑의로 온통 몸을 감싼 다섯 명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섯은 모두 따로따로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셋은 마당에서 제각각 다른 방향을 보며 쓰러져 있었고, 하나는 담 위에 마치 빨래를 널어놓듯 걸려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창고의 지붕 위로 올라가려고 한 듯, 지붕에 상체를 걸친 채 고개를 푹 꺾고 있었다.
‘대단한…… 광경…… 이다.’
공보하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다섯은 모두 흑화보의 살수들로, 그들의 은밀하고 집요한 힘은 직접 겪어 본 공보하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흑화보 살수들이 상대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일반적으로 당했다.
사인(死因)은 모두 심장을 찔린 일점살(一點殺).
살수들을 상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습을 가해 일격으로 죽이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는 광경이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였기에……? 살수의 신이라도 되는 건가?”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공보하가 한 말이기에 더욱 의미가 큰 말이다.
공보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이런 살행을 저지른 사람이 혹시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았나 찾기 위해서였다.
공보하는 그 뒤로 이각이나 더 시간을 들여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아니나 다를까,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나 은밀히 우리를 지켜 준단 말인가?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실력은 또 어떻게 된 거고?’
공보하는 깊은 의문을 간직한 채 창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고, 걱정하고 있던 왕욱에게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왕욱은 더없이 잘된 일이라며 허공에다 대고 고맙다는 말을 십여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공보하와 왕욱은 인근 농가에서 노새와 수레를 구입한 뒤 남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정상이지!’
어두운 그림자 속의 사신(死神).
야조탑주는 손끝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감촉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만난 무쌍귀가 너무나 막강하여 자신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강했다.
흑화보의 일급 살수가 다섯이나 있었으나, 은밀히 다가가 심장을 꿰뚫는 그 순간까지 그의 기척을 알아낸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마지막 놈이 죽는 순간까지 자신들이 습격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이 중요하다.
야조탑주는 짜릿함을 느꼈다.
살수들끼리 목숨을 걸고 서로 암습을 하는 경우는 살수 문파끼리 세력전을 할 때를 제외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그런 일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똑같이 은신술을 사용하는 상대에게 더 높은 경지의 은신술로 감쪽같이 다가가는 그 희열!
내가 너보다 낫다는, 정당한 무인이 비무를 통해 승리를 했을 때와 같은, 평상시엔 살수로 살기 때문에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충족감!
야조탑주는 등골이 자르르 울리는 기쁨을 느끼면서 이런 일을 하게 만든 무쌍귀에게 도리어 고마워질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야조탑이 흑화보보다 위라는 이야기가 세상에 떠돌게 되겠지.’
여러모로 그에게는 이득이 되는 이야기다.
‘이참에 애들도 불러야겠군. 사태를 알고 나면 흑화보에서도 힘을 쓸 테니,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겠어.’
그가 대들보 위에 팔짱을 끼고 누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그가 지키고 있던 왕욱이라는 학사가 허공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누구신지, 또한 어떤 이유에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 학사는 무려 다섯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혹시 못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건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대니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큭, 사람 죽이는 걸로 감사하단 소리도 들어 보고. 재미있구만.’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뜨는 야조탑주다.
이날 이후로 야조탑은 살수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강호에서 유일무이한 암중보표의 문파로 거듭나게 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일.
왕욱과 공보하는 덜컥거리는 노새와 수레를 타고 남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왕욱을 지켜 주기로 약속한 사흘 뒤, 왕분의 자택으로 장기린이 찾아오자 왕분은 먹던 식사도 미루고 정신없이 뛰어 나와 장기린을 맞이했다.
그의 체구와 평소 식성을 생각하면 그가 장기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장기린은 괜찮다고 했으나, 부득불 권해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왕분은 장기린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는 오체투지의 예였다.
“이러지 마시오.”
장기린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일부러 이런 과한 은원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건만, 어째 날이 갈수록 왕분이 보여 주는 공경심은 더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았다.
“저의 목숨뿐만 아니라 형님의 목숨까지 구해 주셨으니 어찌 대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은공께서는 저희 가문의 은인이십니다.”
“……왕 대인, 전에 이야기했다시피 그건 서로 간의 도움으로 상쇄하기로 한 것 아니오? 그러니 은공도 아니고, 은혜로 생각할 것도 없소.”
“이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는데 어찌 그런 것으로 상쇄가 된다 하겠습니까? 은공께선 영원히 이 왕분의 은인이실 것입니다.”
“…….”
“그런데 한 가지…… 어떻게 하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뭘 어떻게 했다는 말이오?”
“저희 형님께서 남경의 부대에 도착하신 뒤에 직접 서찰을 보내셨는데…… 거기에서 말씀하시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주는 대단한 고수가 있어 이후 단 한 번도 습격을 당하지 않은 채 부대까지 도착했다고 하였습니다. 형님의 말로는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김없이 마당엔 살수들의 시신이 짐짝처럼 쌓여 있었으며, 그 뒤로도 시시때때로 습격을 가하려던 살수들이 이미 죽어 있어서 깜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왕분은 그 점이 매우 궁금했던 모양이다.
‘야조탑주. 잘해 주고 있었군.’
이야기만 들어도 얼마나 완벽하게 철통방어를 해냈는지 상상이 간다.
장기린은 야조탑주의 대단한 은신술과 무공 실력을 떠올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분명 대륙 전체를 뒤져도 상대할 자가 몇 없을 것이다.
“그의 대단함에 대해선 함께하고 있던 금의위의 부장도 인정했으며, 몰려드는 살수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심장을 찔러 죽인 것을 보면 공경과 감사함 이전에 두려움이 느껴진다고도 하였습니다.”
“…….”
“대체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찾아내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아니오.”
장기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야조탑이라고 혹시 알고 있소?”
“야조탑……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호북에서 유명한 살수 문파라고 하더군요.”
의외로 왕분은 야조탑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형님께서 관직에 계시다 보니 살수에 대한 것은 꽤나 경계를 하는 편입니다. 원래 관직이라는 자리가 살수들과 연관이 깊다고 하시더군요.”
“음, 알고 있다니 이야기는 더욱 쉽겠소. 그 야조탑이 나를 노리고 있었는데, 탑주를 ‘설득’해서 왕 대인의 형님을 지켜 주도록 만들었을 뿐이오.”
“아! 그럼 그 야조탑이라는 살수 문파가 형님을 지켜 주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는 그들의 이권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일이니 아마 목숨을 걸고서라도 형님분을 지켜 줄 것이니, 앞으로는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과연……! 대단합니다, 은공. 과연 은공이십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왕분에게선 경탄과 공경이 묻어났다.
“으음…….”
그런 왕분의 태도가 장기린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런 식의 공경을 받기 위한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그로서도 쌀 삼천 석을 제공받기 위한 대가로서 일했을 뿐인 것이다.
“은공, 부디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런 장기린의 기색을 느꼈는지 왕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말했다.
“이것은 저의 태도일 뿐, 앞으로도 제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은공께 부탁드릴 것입니다.”
장기린의 미간이 지그시 좁혀졌다가 결국 다시 풀어지고 말았다.
왕분은 장기린이 무슨 말을 해도 고집을 꺾을 위인이 아니다.
더군다나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로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부탁도 하지 않을 터. 결국 그는 계속해서 장기린을 은공으로 대할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사람의 인연은 마치 아무렇게나 엉킨 매듭과도 같아서, 한 번 매이기 시작하면 나중엔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지 못할 만큼 질기게 엉키는 법이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그것이 검선에게 받은 가르침이며,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청명경 일천 자에 새겨져 있던 공통적인 내용이었다.
“쌀은…… 준비가 되었소?”
“아……!”
왕분이 감격하여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장기린의 그 말은 단순히 쌀이 준비되었냐고 묻는 말이 아니었다.
좀 더 깊은, 내면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었다.
드디어 장기린이 그가 은혜를 갚는 것을 용인한 것이다. 보답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만큼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는 뜻.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보답에 대해 말을 꺼냈으니, 이는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 놓여 있던 커다란 벽 하나가 허물어졌다는 의미였다.
“물론입니다! 쌀 삼천 석! 거기에 상하지 않을 건육삼백 포대도 함께 준비해 두었습니다!”
“건육은…….”
장기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아니, 알겠소. 고맙게 받겠소.”
“형님의 목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장기린은 쌀을 삼천 석이나 챙겨 주는 걸로도 모자라 건육까지 함께 준비해 둔 왕분에게서 진한 인정(人情)을 느꼈다.
한 번, 아니, 이번 일까지 합하면 두 번의 생명을 구해 준 일이 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장기린은 왕분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에 답하듯 더더욱 고개를 숙이는 왕분.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