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一章 ― 무림조우(武林遭遇)
“대체 어떤 사람일까?”
다 같이 걸음을 옮기던 이십여 명의 인원 중 가장 앞서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 청년은 헌앙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잘생기고 귀티가 흐르는 공자였는데, 옅은 노란색으로 테를 둘러놓은 흰색 비단 장포가 그렇게나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다만 날카로운 눈매와 꽉 다문 입술이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는 게 흠이었으나, 그나마도 잘생긴 얼굴과 조합되자 사내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난폭한 사람이 아닐까요?”
“난폭해? 어째서 그렇지?”
“무쌍귀는 전장에서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에요. 당연히 난폭하겠죠. 게다가 삼호방을 상대로 전투를 할 당시에 싸웠던 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무섭다’라고 표현했어요.”
청년과 똑같은 형태의 비단 장포를 입은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한눈에 봐도 청년과 남매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선이 가늘고 피부가 고운데다 눈, 코, 입의 형태가 선명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사내라면 한 번 쳐다보면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만약 그녀가 지체 높은 ‘모용세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아마 매일같이 치근덕거리는 남자들로 북새통을 이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흠, 소희야. 삼호방 무인들의 눈엔 상대가 고수라면 누구든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삼호방 정도 되면 흑도에서 거친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요? 그런 자들이 무섭다고 표현하려면…… 글쎄요, 무림십대고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으음…….”
모용세가의 딸, 모용소희의 말은 다 옳았으나, 그녀의 오라비인 모용소진은 납득을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듣기론 무쌍귀의 나이는 아직 이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즉, 후지기수라고 불려야 할 나이라는 뜻이다.
그런 자들 중에 무림십대고수 수준의 강자가 나왔다는 것이…… 모용소진으로서는 인정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거야 당연히 호사가들의 과장일 게 틀림없지 않소!”
“……육 소협.”
앞으로 나선 것은 화산파의 도복을 걸친 장신의 젊은이였다.
한눈에 검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긴 팔과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으며, 우렁찬 목소리와 부리부리한 두 눈에는 강한 무공을 짐작케 하는 정광이 가득했다.
당대 화산파 최고의 후지기수인 매화검수. 오행매화검(五行梅花劍)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하여 오매검협(五梅劍俠)이라 불리는 육모담이 바로 그의 정체였다.
육모담은 다음 대의 매화신검은 바로 그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 만큼 무공 재질이 뛰어났으나, 단 하나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자신감이 과하다는 것!
뛰어난 인재들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세상의 무인들을 모두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지금은 그보다 훨씬 강한 노고수를 만나더라도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내 발 밑에 엎드릴 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육모담이었다.
좋게 말하면 패기(覇氣)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傲慢)이다.
육모담은 그 성품 그대로, 절대로 무쌍귀라는 소문 속의 강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필부들의 전장일 뿐이오. 한낱 평범한 농민들에게 창을 잡게 하고 싸움을 시키는 곳이 전장인데 거기서 강해져 봤자 뭘 얼마나 강해졌겠소?”
“으음…….”
오만한 발언이다.
중원의 무림강호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보는 현재 구파의 지도자들의 성품을 육모담은 그대로 빼닮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한 문제는 함께 있던 모용세가의 장남 모용소진과 무당파에서 파견된 후기지수 명진 도장마저 그에 동조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심산유곡에 은거해 일평생 비전의 무공만 수련해 온 은거기인이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솔직히 전쟁터에서 익힌 무공이라는 게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전쟁터에서 누구나 절세무공을 익히고 강해질 수 있다면, 중원무림에 구파니, 육대세가니 하는 그런 명문이 왜 필요하겠는가.
누구나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고수가 된다면 무공을 익힐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지. 과장일 것이다.’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많이 있다. 젊은 나이에 무림십대고수의 수준이라거나, 또는 맹호도를 불과 삼 초식 만에 패퇴시켰다고 하는…….’
‘삼호방이 생각보다 약했을 뿐이야. 그 명성은 부풀어진 게 분명하다.’
육모담, 모용소진, 명진 도장은 모두 제각각 비슷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무림의 소문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상세하게 그 무위를 표현하고 있어요. 정보제일문이라는 개방에서도 그에 대한 소문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했구요.”
모용소희는 두뇌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오죽하면 모용세가에서 그녀를 보고 제갈 성씨를 타고났어야 하는데 천신의 실수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니냐고 했겠는가.
하나,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내들에겐 그녀의 영롱한 목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평생을 가문과 무림에서 떠받들어지며 살아오던 사내들인만큼 고집도 쇠심줄만큼이나 질겼다.
“난 인정할 수 없소. 직접 만나 보면 다 알게 될 일이지만, 삼호방이라는 흑도 문파도 사실은 삼류 문파였을 거요. 그러니 무쌍귀라는 자에게 그렇게나 쉽게 당했을 테지.”
특히 육모담은 절대로 무쌍귀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자만심이 너무 강하구나.’
적당한 자신감은 무인에게 득이 되지만, 자만심은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아 큰 해를 입히는 법이다.
만약 삼호방주가 별것 아니었다면, 똑같이 오왕이라 불리던 나머지 사왕들 때문에 지금 구대문파가 밀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북천맹이 바보일까?
삼호방주가 능력도 안 되는 삼류 무인이었다면 북천맹에서 그를 무림십대고수 이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나머지 사왕들과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일행이 되어 함께 가고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화산의 육모담과 화산 무인 다섯 명.
무당의 명진 도장과 다섯 명의 무당 검수.
심지어는 모용세가에서 함께 온 다섯 명의 무인 또한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림맹의 어르신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굳이 인근의 거파들 중에서, 그것도 인솔하는 이 없이 젊은이들만을 보낸 것인지.
특히 마지막에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소림 방장 각 로 대사를 떠올리며, 무림에서 지다화(智多花)라고 불리는 그녀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허허, 지금의 무림은 문제가 있다네. 한데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동량들마저 같은 문제를 품고 있어서야 안 될 말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 기회에 많이 보고, 많이 깨우치고 오게나. 그중에는 소림에서 가장 승려 같지 않은 아이도 끼어 있을 테니, 지다화의 역할이 가장 클 터. 부디 무림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고생해 주게.”
‘대체 그게 무슨 뜻이셨는지……. 이번에 뭘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는 걸까?’
모용소희의 시선이 일행의 한쪽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승려들에게로 향했다.
‘그나마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건…… 소림뿐인가?’
소림의 승려들은 이쪽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손에 든 염주만을 굴리고 있었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젊은 승려가 눈에 들어왔다.
계원 스님.
십오 세라는 어린 나이에 소림삼십육방을 모두 통과하고 당당히 나한전에 입성했으며, 그 뒤에도 불과 오 년 만에 나한승이 배워야 할 무공들을 모두 극성으로 익히고, 내년 즈음엔 소림 방장을 호위한다는 팔대호원(八大護院)에 들어간다는 불세출의 기재가 바로 그였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럴까.
계원의 인상은 쉽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목에 걸고 있는 붉은 빛깔의 굵은 염주만이 조금 특이했는데, 나머지는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승려 같기도 하고, 어딘가 범상치 않은 무승 같기도 했다.
그와 함께 온 나한전의 승려들 역시도 이쪽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걸음만을 옮기고 있었다.
모용소희의 얼굴에 찬탄의 빛이 어렸다.
비록 승려라고는 하나 다들 이립이 넘지 않은 젊은 나이다.
피가 끓을 만도 하건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소림의 마음공부가 얼마나 깊은지를 절로 느끼게 해 주었다.
‘계원 스님은 승려답지 않게 상당히 날카롭고 호전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도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다니. 과연 소림이야.’
자고로 진정으로 마음이 강한 자는 미리 앞으로 나서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기에 천천히, 차분하게, 상대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섣불리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강자의 기본 요건이다.
‘이번 일…… 쉽지 않겠어.’
무쌍귀의 명성을 믿지 못하고 자만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앞으로의 여정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모용소희의 걱정과는 달리, 무림맹 일행에게 남경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강서성에 도착한 모용소희 일행은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성도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힘겹게 짐을 나르는 하인도, 막 장사를 재개해 활기를 띠는 시전의 상인들도, 모두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매달고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네요?”
모용소희의 목소리는 떨떠름하게 굳어져 있었다.
강서성은 분명 삼호방에게 장악당해 그들이 부리는 온갖 패악을 감당해야 했으며, 관군도, 무림인들도 돕지 못하다보니 깊은 절망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가?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들이 모두 함박웃음을 매달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있는가?
‘무쌍귀야. 무쌍귀와 귀마대가 이들을 해방시킨 거야.’
함께 온 나머지 문파들 역시도 그런 점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모용소진, 육모담, 명진 도장.
세 사람 모두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저기, 말씀 좀 물을게요.”
“골라! 골라! 아무거나…… 예? 어어…… 아,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시전에서 곡식과 건육을 팔고 있던 젊은 상인이 모용소희를 보고는 잠시 멍하니 굳어 있다가 황급히 대답했다.
“여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밝아 보이는 거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게…….”
이미 모용소희의 미모에 혹해 있던 젊은 상인은 곧바로 대답하려고 했으나, 그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며 그를 응시하고 있는 많은 수의 무인을 보자 어깨가 움츠러들고 말았다.
모용소희는 슬쩍 한 걸음 앞으로 옮겨 상인에게 더욱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오면 그만큼 뒤쪽의 시야를 가릴 수 있는 법. 상인의 입장에선 뒤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아니나 다를까,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상인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아, 그게…… 그 쳐 죽일 삼호방 놈들이 다 죽거나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천군(天軍) 덕분에 포악을 부리던 놈들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다들 기뻐하는 것이지요.”
어째선지 상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말했다.
“천군? 혹시 무쌍귀와 귀마대 말인가요?”
모용소희가 그 말을 꺼내자 상인의 얼굴색이 급변했다.
“쉿! 소, 소저,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저야 소저가 나쁜 뜻이 없으니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이 날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죠?”
“강서성 사람들에겐 천군이 은공입니다. 오죽하면 하늘이 내린 군대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귀신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죠.”
“아…….”
모용소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아, 아뇨. 별말씀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모용소희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상인의 얼굴이 더더욱 시뻘개졌다.
“그럼 그 무쌍…… 아니, 천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어, 그게, 이건 비밀인데…… 얼마 전까지는 강서성주님의 저택에 머무셨는데…… 최근에는 남경 쪽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남경…… 이요?”
“예! 하하, 아마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저는 마침 천군분들께 곡식이랑 건포를 판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젊은 상인은 씩 웃으면서 뽐내듯이 가슴을 폈다.
“아, 그럼 저는 행운이네요.”
“하하, 크흠. 저, 저야말로 행운이지요.”
“후후, 고마워요. 그럼 많이 파세요.”
“아…… 예, 조, 조심히 가십시오.”
젊은 상인은 몽롱한 눈빛으로 모용소희의 뒷모습을 쫓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모용소희는 다시 일행의 곁으로 돌아와 옆에 있던 모용소진에게 말했다.
“들었죠?”
“……그래.”
“인망이 대단해요. 무림에선 별호에 귀(鬼) 자가 붙었는데, 여기선 천군이래요. 하늘이 내린 군대라니, 황상을 지키는 어림군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모용소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대세가의 후계자로서 이런 민초들의 신망이야말로 문파의 성세로 직결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모용소진이다.
한편, 화산의 매화검수인 육모담은 여전히 부정적인 듯했다.
“모용 소저, 무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민초들로서는 강호무인들 전부가 선인이나 선녀로 보일 것이오. 그리 대단하게 생각할 것은 없지 않겠소?”
“운이 좋았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시류가 잘 맞아서 칭송을 듣긴 했으나, 그걸로 실력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오.”
육모담의 당당한 발언에 직접 말은 안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무당의 명진 도장과 다른 무인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도 문파 인근에선 도인이나 선인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직 이 정도로는 무쌍귀와 귀마대의 능력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용소진 역시도 마찬가지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계원 스님과 나한승들을 제외하면, 일행 중에 모용소희만이 무쌍귀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당신들…… 어느새 무쌍귀와 귀마대를 자신의 문파와 동급으로 두고 생각하고 있네요. 그건 눈치채지 못했나요?’
모용소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과다하게 부풀려진 강호의 뜬소문 정도로 취급하던 무쌍귀를, 그들은 어느새 구대문파인 자신들과 동급으로 두고 비교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의적절하게 나타나 힘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민초들은 바보가 아니야. 만약 무쌍귀와 귀마대가 민초들에게 밉보이는 짓을 했다면 절대로 천군이라는 호칭을 쓸 리가 없어. 즉, 정파보다 더 정파다웠다는 건데…… 힘이 있는데다 정의롭기까지 하니, 만약 일이 꼬여서 서로 적이 된다면 정말로 힘든 상대가 될 거야.’
모용소희는 근심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 평판이나 민심이 중요한지 아는가?
그 평판과 민심이 문파의 존속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힘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서성에서 어떤 문파가 무쌍귀와 귀마대를 습격해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민초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하늘이 내린 군대를 괴롭히는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럼 그러한 인식이 널리 퍼지고 무림에 흘러 들어가면, 언제나 의로운 일에 나서서 힘을 쓰고 싶어 하는 무림인들이 그 문파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럼 곧바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아니면 그 다음 번에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힐 경우 주변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파의 입장에선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야.’
평판이 안 좋아지는 것.
그건 모든 정파들의 악몽이나 다름없다.
“흠, 삼호방이란 자들, 어째서 그렇게 쉽게 당해 버린 것이지? 그자들이 섬서로 왔다면 내가 베어 버렸을 텐데!”
육모담은 모용소희를 슬쩍 바라보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화산의 오매검협이 나서면 삼호방주야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안타깝군요. 삼호방주는 무쌍귀한테 걸릴 게 아니라 저희 화산에 걸렸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 딴엔 모용소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짓이겠지만, 육모담과 화산파 무인들의 이야기를 듣자 모용소희는 속으로 혀를 차게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화산파…… 녹림에 당해 혼쭐이 났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요. 매화신검이 광살부마와 평수를 이루고 혼쭐이 난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어떻게 광살부마와 같은 급으로 평가받은 삼호방주를 무시할 수가 있는 건가요?’
모용소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모용소진과 계원에게 말했다.
“가시죠. 남경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만날 수 있겠죠.”
모용소희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무림맹의 명을 받았기에 한시라도 빨리 무쌍귀와 귀마대를 만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들은 걸음을 빨리해 강서성의 시내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유심히 살펴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누가 움직였나?”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 중 남쪽에 위치한 네 곳입니다. 모용세가, 무당파, 화산파, 그리고…… 소림이 움직였습니다.”
“숫자는 얼마나 되지?”
“스물다섯 명입니다. 각파에서 여섯 명씩 보냈는데 모용세가에선 한 명이 더 왔습니다.”
“얼마 안 되는군.”
“하지만 각 문파의 후계자 급 인물들을 보냈으니 그들을 잃게 되면 무림맹의 관심이 상당수 이쪽으로 쏠릴 것입니다.”
“상대의 병력을 분산시키자는 건가?”
“예. 관심이 쏠리는 만큼 현재 오왕…… 아니, 사왕이 적대시하고 있는 세력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삼호방…… 안타깝군. 그들만 건재했어도 싸움이 훨씬 수월해졌을 텐데.”
“그렇습니다만, 상대가 ‘그들’이라면 아무래도 어쩔 수 없겠지요.”
“…….”
“어떻게 할까요, 장군?”
장군이라 불린 자.
장대한 체구에 각진 외모, 왼쪽 눈에서부터 턱 선에 이르기까지 얼굴을 비스듬히 가른 흉터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가 바로 푸른 하늘의 늑대라고 불리는 초원 최강의 전사, 텐챠이.
현재는 남경을 제압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천맹주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삿갓을 쓰고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청년, 하시르였다.
그들은 남경 황궁의 대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텐챠이는 높은 계단 위, 본래 태사의가 있던 자리에 앉아 있으며, 하시르는 계단의 한 칸 아래에서 서 있는 채였다.
“현재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텐챠이의 목소리는 거암처럼 묵직하면서 호수처럼 고요했다.
“현재 섬서와 사천 쪽에는 사혈방과 녹림이 잘 싸워 주고 있습니다. 녹림은 제멋대로 싸우는 편이지만 워낙 숫자가 많고 거칠다 보니 무림맹 쪽에서 상대하기 껄끄러워하고 있고, 사혈방에선 녹림의 막무가내식 싸움을 이용하며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녹림을 이용하면서 싸운다?”
“예. 사혈방주는 상당히 영리한 사람입니다. 뒤로 빠져 있는 건 아니면서도 피해는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녹림에서 불만이 생길 텐데?”
“그래서 자이혼이 그쪽으로 나가 있습니다. 녹림에 머리가 없으니 전술을 좀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군요.”
“음, 탁월한 선택이다.”
텐챠이는 고개를 끄덕여 흡족함을 드러냈다.
하시르, 자이혼, 우르칸.
세 사람은 각자 일만 이상의 병력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다.
비록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하고, 혼자 나서서 싸우는 걸 즐긴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장군으로서 전술적인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 자이혼이 녹림에 갔으니, 아마 녹림의 전투력은 이제부터 두 배로 상승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덕분에 섬서 쪽에 있는 화산과 종남, 사천 쪽에 있는 아미, 청성, 점창, 당문은 교착상태가 이어져 싸움이 길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점창은 원래 괴멸된 거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 운남 쪽에서 발호한 칠성태극교 때문입니다. 칠성태극교와의 충돌로 전력이 급감한 점창파는 최근엔 구파에서도 축출될 위기라고 하더군요.”
“칠성태극교…… 최근에 이름이 자주 들려오는군. 지난번엔 맹의 가입을 거절했다고?”
“예. 교리상 다른 문파와의 연합은 불가하다고 하더군요. 도리어 저희 북천맹에게 칠성태극의 진리에 대해 배워 보지 않겠냐며 권유를 받았습니다.”
“재밌는 곳이군.”
“예. 하지만 저희와는 갈 길이 다른 듯했습니다.”
텐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敎)라는 곳은 신을 모시고, 그에 대한 교리를 민초들에게 전파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무력을 숭상하고 무력을 통한 지배를 꿈꾸는 북천맹과는 맞지 않을 터였다.
“고수의 숫자에서 조금 밀리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각 문파에서 진짜 아끼는 전력은 꺼내놓지를 않으니 싸움에선 오히려 녹림과 사혈방이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꽤나 큰 싸움을 한 번 벌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기대되는군.”
“다음은 하북과 섬서 쪽의 흑화보인데…… 이곳은 철저히 숨는 자와 찾는 자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양세가의 힘은 과연 천하제일세가라 불릴 만큼 강력하더군요. 가주인 구양천과 비룡진천대가 나서자 사흘 만에 흑화보의 지부 절반이 붕괴되고 숨어 있던 본단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사흘 만에? 본단이 드러나려면 최소한 이십 일 이상은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예. 분명 그랬습니다만, 드러난 구양세가의 저력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도처에 뻗어 있는 정보망은 개방과 하오문 수준이고, 앞으로 나선 구양천의 무력은 무림오존 급이라고 하더군요.”
“무림오존이라…… 항상 궁금했던 자들이다. 그들을 하시르, 너와 비교하면 어떻지?”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
지지는 않는다.
즉, 이기지 못하지만 지지는 않으니, 평수보다 조금 아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다고 봐야 한다, 하시르.”
“…….”
“이곳의 무인들은 가진 힘의 일부를 항상 감춘다. 드러난 능력 이상이 있다고 봐야 할 테지.”
“저도…… 모든 걸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하시르가 약간 볼멘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동수. 싸움이 길어지면 내력의 차이로 인해 패색이 짙어질 것이다.”
스으으―
육중한 기세와 함께 텐챠이의 눈에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눈빛이 번뜩였다.
하시르는 그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제왕이 되길 스스로 포기했다고는 하나, 그는 이미 제왕의 길을 걷고 있는 남자였다.
하여 날이 갈수록 사람으로서의 그릇과 존재감이 커져 가고 있었다.
거기에 두뇌마저 점점 민활해지니 텐챠이는 하시르의 실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 뒤에 이어질 싸움의 향방마저 예측한 것이다.
뛰어난 두뇌와 영매로서의 직감까지 갖춘 하시르지만, 텐챠이의 그러한 냉정한 판단에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했다.
“그래서 흑화보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아, 예. 흑화보는 어차피 지역을 지키는 싸움을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본단에 숨은 채로 산발적으로 살수들을 보내 구양세가와 팽가를 괴롭힐 것입니다.”
“한두 번이야 통하겠지만 나중엔 잘 안 통하지 않겠나?”
“살수행을 하면서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대규모의 화기를 동원했다고 하더군요. 그 덕분에 동창과 금의위는 물론, 구양세가마저 행보를 멈췄다고 합니다.”
“호오, 화기를 준비해 두었다?”
“흑화보주는 대초원 출신입니다. 아마 북천맹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대사(大事)를 도모해 볼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는 진정한 초원의 전사다.”
텐챠이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에서 살수 문파를 운영하며 대규모의 화기를 모았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북경에 있을 천자를 노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세력을 넓히기는 힘들겠군.”
“예. 그래서 조만간 남경을 포위한 군대를 없애고, 지원군을 보내 줄 생각입니다.”
“그러도록.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는 흑화보가 맡은 지역이 가장 중요하다.”
흑화보가 맡은 북경.
만약 남경에 이어 북쪽의 수도마저 북천맹이 장악하게 된다면 이미 명 나라의 운명은 끝난 거라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시르는 곧바로 다음 지역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안휘성입니다. 황산파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무당과 남궁세가, 두 곳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삼호방이 도왔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무너지는 바람에 예상 이상의 부담이 황산파에게 가 버렸습니다.”
“무당…… 확실히 지닌바 저력이 소림과 동급이라고 했지.”
“예. 거기다 최근에 남궁세가의 힘이 하나로 결집되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황산파에 고수가 많다지만, 무당과 남궁세가를 동시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텐챠이는 지그시 하시르를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그 말투를 보아하니 이미 대책을 시행했군.”
“역시, 장군은 속일 수가 없군요. 우르칸이 수호대 이백을 이끌고 황산파로 향했습니다.”
“우르칸에 수호대 이백이라…….”
그 정도라면 아무리 무당이 강하다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르칸의 강대한 육신은 어느 경지 이하의 공격은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즉, 무당에서도 장문인 급의 고수가 나서지 않는 한 우르칸에겐 티끌만 한 상처조차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방심하진 말라고 해라. 무당은 저력이 있다고 들었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시르는 그렇게 답한 뒤 쓰고 있던 삿갓을 살짝 뒤로 젖히고 하시르를 응시했다.
“그럼 장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전황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회귀할 차례다.
현재 남경으로 접근 중인 일단의 무리를 어찌할 것인가?
“흐음.”
텐챠이는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흑도의 방법을 쓰지.”
“아……!”
그 말만으로도 하시르는 텐챠이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들어왔으니 뭔가 활약을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예,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숫자는 넉넉히 편성하도록. 잊지 마라. 이것은 연병(練兵)이다.”
연병(練兵)!
실전을 겪게 함으로써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말함이다.
텐챠이의 눈빛은 도저히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예, 장군.”
하시르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점점 더 강해져 가는 그의 장군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이 싸움의 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행운을 기원했다.
☆ ☆ ☆
하늘은 맑고 날씨는 화창했다.
이제 슬슬 여름으로 접어드는 날씨지만 아직까지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푸른 하늘 아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뒷목을 스칠 때면 도리어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덜컹덜컹.
장기린은 쌀 삼천 석이 실린 거대한 수레들 중 하나에 올라탄 채 뒤따라오는 삼천 명의 병사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단지 걸을 뿐이다.
하지만 그 ‘걸을 뿐’인 일이 막상 무기를 들고 갑주를 입은 채 등 뒤에 여러 가지 봇짐을 메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습관에 민감한 생물이다.
평소의 몸무게에 단 열 근만 더해져도 몸은 이상을 느끼고 피곤을 호소한다. 평소 매일같이 걷던 길에 어느 날 돌부리가 하나 튀어나와 있다면 걸려 넘어지게 되고, 항상 다루던 물건의 무게가 조금만 달라져도 그걸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하던 나태한 도독부의 병사들에게 지금의 행군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걷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룡기마대의 간부들이 나서서 각각 오백에서 천 명 사이를 이끌고 중간중간에 앞열과 뒷열을 바꾸는 연습을 한다든가, 진형을 바로잡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행군이 곧 훈련이다.
남경으로 가는 여정 중에 적룡기마대는 새로이 얻은 삼천 명의 병사를 정병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운화.”
“예, 대형.”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명마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 같은 건장한 전마를 타고 있던 부운화가 곧바로 대답했다.
“남궁세가와는 계속 연락을 하고 있지?”
“예.”
장기린은 쌀 포대에 등을 기댄 채 슬쩍 고개만 돌려 부운화를 쳐다봤다.
“얼마나 자주?”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계속 서신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상대는 남궁연이고?”
“……예.”
항상 차분하던 부운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오문에서는 우생에게 정보를 보내는 것 같던데, 왜 남궁연은 굳이 운화, 너한테 서신을 보내는 거지?”
“……우생은 할 일이 많으니, 제가 분담을 좀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흐음…….”
장기린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어차피 모든 정보는 결국 우생에게 전해져야 한다. 부대의 군사 역을 맡고 있는 만큼 새로운 정보를 항상 취득하고 그걸 토대로 부대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면 남궁세가의 정보도 곧바로 우생에게 전해지는 것이 좋을 터.
운화에게 전해진다면, 그 정보를 취득한 운화가 우생에게 전해 주는 데까지 또 다른 시간이 소요되지 않겠는가.
‘그걸 남궁연이 모를 리가 없지.’
가주의 혈통이라는 혈연을 등에 업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뇌안각을 총괄하는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남궁연이다.
그녀가 굳이 운화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대형?”
운화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기린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뭐, 그것도 괜찮겠지.”
“……뭐가 말입니까?”
“남궁연은 똑똑한 여인이야. 성품도 시원시원하고. 안살림을 맡게 되도 잘 관리하겠지.”
“혀, 형님!”
“하하! 운화, 너도 말을 더듬을 때가 있구나!”
운화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항상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모습만 보아 오다가 이런 태도를 보니 장기린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오, 그럼 조만간 형수님이 생기는 겁니까?”
“어떤 분이우? 예, 예쁜가?”
“이봐, 둘째 형님. 그런 거 빨리빨리 말하고 그래야지. 이거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어느새 다들 이야기를 들었는지 진구, 대석, 추룡순으로 다가와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벌게진 얼굴로 당황한 것은 잠시뿐이다.
곧 운화의 눈빛이 한겨울에 얼어붙은 연못보다도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단체 훈련 좀 해 볼까? 아니, 꼭 해야겠군. 그러고 보니 그동안 너무 나태했어. 일단 개인 체력 단련부터 시작해서 단체 진법 수련까지 차례대로…….”
“으악! 잘못했수! 내가 잘못했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둘째 형님!”
대석과 진구가 체면불구하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개인 체력 단련은 비무라는 형식을 빌려서 한 사람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고문이고, 단체 진법 수련은 부운화의 지시에 맞춰 적룡기마대 전원이 호흡을 딱딱 맞춰 같은 동작을 해야 하는 훈련이다.
함께 생사를 넘나든 적룡기마대원들끼리 하더라도 힘이 드는 그 훈련을 삼천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옥을 넘나드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 빤하니, 두 사람은 일단 무조건 빌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미리 옆에서 앞서 나가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일단 혼자서 하도록 내버려 둬라.”
“……대형, 대형은 언제부터 그런 쪽으로 해박해지신 겁니까?”
“그런 쪽? 그런 쪽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냐?”
“…….”
장기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부운화는 어떤 일이든 금방 배우고 익히는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있지만, 장기린에겐 부운화가 배우지 못한 많은 것을 익힐 수 있었던 항주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있었다.
“끄응…….”
운화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에 있던 적룡기마대원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에이, 부대주. 축하합니다.”
“이참에 거하게 술 한 번 사시죠?”
“경사났네! 경사났어!”
하지만 오랜 시간 서로를 보아 온 적룡기마대원들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떤 연유로 그들에게 갑자기 일을 시키는지 잘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하게 씩 웃으며 너도나도 덕담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하하!”
장기린은 웃었다.
또 하나의 유쾌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대형, 후방에 추적자입니다.”
다음 날 아침, 잠자리를 정돈하고 피웠던 모닥불의 흔적들을 한곳으로 깔끔하게 몰아 둘 때쯤 후방을 지키던 진구가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숫자는?”
“스물여섯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흐음…….”
스물여섯이라니, 굉장히 애매한 숫자였다.
그건 무언가 서찰을 전하기 위한 사자로서는 너무 많고, 뭔가 일을 도모하기엔 너무 적은 숫자였다.
장기린의 머릿속이 민활하게 돌아갔다.
즉, 의사를 전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며, 큰일을 도모하진 못하지만, 따로 다른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조사단인가.”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사실 슬슬 무림맹 쪽에서 반응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검선은 무림맹의 중진들은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대단히 민감하다고 했다.
기득권층이 으레 그렇듯,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만한 세력이 나타나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정도 이상으로 세력이 커지지 않도록 견제한다는 것이다.
장기린이 그럼 정파가 세력 싸움에 열을 올리는 흑도 문파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묻자, 검선은 그들은 그래도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인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소림과 무당을 제외하면 나머진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했지.’
장기린은 검선에게 들은 것들을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열의 후미를 쫓아온다던 그 ‘추적자’들은 이제 장기린의 시야에도 들어오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스물여섯명. 한눈에 네 개의 편으로 갈려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각자 개성이 강한 자들이었다.
가장 앞서 있는 것은 붉은 빛깔의 매화 문양이 새겨진 무복을 입고 있는 자들이고, 그 뒤를 푸른빛이 감도는 도복에 허리춤에 나무 검집을 착용한 도사들과 노란빛 테를 두른 흰색 비단옷을 걸친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열의 후미에선 황색 가사 자락을 걸친 승려들이 손에 든 붉은색 염주를 굴리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느긋한 걸음걸이에 비해 속도만큼은 앞의 사람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맨 뒤는 소림. 그 앞은…… 무당인가? 가장 앞의 매화 문양은 화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군.’
장기린도 강호무림에 대한 상식을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음, 무림인들이군요.”
그때, 부운화가 옆으로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화산파입니다. 도가검문(道家劍門)이며 매화향이 피어나는 섬세하고 격렬한 검술로 유명합니다. 그 뒤에서 도복을 입고 따르는 자들은…… 무당입니다. 송문패검이라고 해서 저 나무 검집은 무당의 상징이나 다름없습니다.
“무당이라면…… 운화, 네가 몸담았던 곳 아니냐?”
“예, 맞습니다.”
“그럼 사형제들인데, 저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나?”
“아니요.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입니다. 고작 십 년 남짓인데 젊은 층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 아, 한 명은 알겠습니다. 저 눈매, 저 분위기. 제 아래 항렬에서 꽤나 주목받던 명진이란 아이 같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서…… 그저 먼발치에서 봤던 정도의 기억뿐이라 저 아이는 아마 저를 모를 겁니다.”
“……그래?”
“예,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 옆에 비단 장포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모용세가입니다. 천진과 요령 쪽, 그리고 북경의 동쪽 지역을 제패하고 있는 거대 세가입니다. 육대세가 중에 무력만으로는 남궁세가를 추월했다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흐음, 그래?”
“예.”
장기린은 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홍일점(紅一點)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 뒤는 소림?”
“예. 대형께서도 소림은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워낙 유명하니까. 어때? 저들은 강할까?”
“연배로 봐서는…… 아마 계 자 항렬 정도로 생각되는군요. 소림삼십육방을 통과한 이들일 테니 분명 강할 것입니다.”
장기린은 부운화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뒤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주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정말로 강했다면 네가 먼저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말했겠지. 그렇게 말하지 않은 건 위협은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부운화에게는 버릇이 있다.
정말로 강한 상대는 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적대할 것을 대비해 미리 상대는 별로 강하지 않다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하, 대형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한데 지금의 대형께 위협이 되는 자가 있기는 합니까?”
“장난치지 말고.”
“본래 ‘천천히, 단단하게, 확실한 무력’을 만드는 게 소림의 기본 이념이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같은 항렬이라도 그 무공 수준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계 자 항렬이라면 저보다 한 항렬이 아래입니다만, 강한 자가 나와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겁니다.”
“그래, 알겠어.”
“구대문파의 무학은…… 깊이가 있습니다. 혹시 상대하게 되면 유념해 주십시오. 물론, 지금의 대형께 비하면 별거 아니겠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으려다 보면 의외로 까다로운 일면을 발견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 명심하지.”
장기린은 소림의 무승들 중 특히 붉은 빛깔의 굵은 염주를 목에 걸고 있는 젊은 승려를 유심히 바라봤다.
‘왠지 눈에 들어오는군.’
멀리서까지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모용세가의 홍일점과 비등한 정도로 사람의 그릇이 큰 자였다.
장기린은 솔직히 구대문파의 무학이라는 것을 견식해 보고 싶었다.
무공이라는 것을 익힌 뒤에 생긴 욕심이다.
검선조차 소림의 무공을 익힌 공화존을 높이 평가했으니, 과연 얼마나 강한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큰형! 아니, 대주님! 제가 나가 볼까요!!”
그때, 무림맹에서 온 자들이 가까워지자 막내 진구가 패기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가면? 일부러 싸움이라도 걸려고?”
“으헛! 그걸 어찌 아시고?!”
“아서라. 죽이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는 자들이야.”
“으으, 강해 보이는데요.”
무(武)의 높낮이를 따지는 진구의 안목은 상당히 날카로운 편이다.
거기다 호승심이 강해서 웬만큼 강하다 싶으면 덮어 놓고 달려드는 성격이니, 마치 묶어 놓은 맹견처럼 함부로 풀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지.”
장기린은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무림맹의 사절단은 후미에 있던 삼천 명 병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가득 받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삼천 명의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면 기가 죽을 만도 하건만, 그들은 애써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항상 당당하라고 교육이라도 받은 것인지 도리어 어깨를 쫙 펴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 가장 앞에 서서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산파의 검수가 눈에 띄었다.
척.
그들은 장기린의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장기린의 존재감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내다.
그들은 그런 느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쪽이 무쌍귀?”
팔이 길고 손가락도 길쭉길쭉해서 척 봐도 검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 강한 힘이 담긴 눈빛과 우렁찬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드러나는 그는 바로 화산파의 후기지수, 오매검협 육모담이었다.
“…….”
장기린의 미간이 지그시 좁혀졌다.
말이 짧다.
그리고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시선 또한 매우 거슬린다.
더불어 그를 부르는 호칭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슥―
운화를 쳐다보자 난감한 표정으로 웃는다. 다시 시선을 돌려 어느새 옆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섭우생을 바라보자 그 또한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두 사람은 장기린이 현재 무림강호에서 어떤 별호와 명성을 얻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붉은 악귀라는 별명도 좋아하지 않던 장기린이기에 귀(鬼) 자가 붙은 별호를 선뜻 말해 주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형도 알게 되시는군.’
‘이거,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나요?’
부운화와 섭우생이 난감해하는 가운데, 대충 사태를 짐작한 장기린은 육모담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무쌍귀라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마 당신들이 찾아온 사람은 내가 맞을 것이다.”
“……말이 좀 짧은데?”
“너야말로 말이 짧군. 화산에서 그리 가르쳤나?”
평소에 불같은 다혈질에 오만무쌍한 성품으로 충돌이 잦던 육모담이다.
게다가 현재 장기린의 모습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드러나질 않고 있으니, 육모담은 눈을 부릅뜨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출수를 할 것만 같았다.
“육 소협.”
그런 그를 말린 것은 육모담에게 가려져 있던 모용소희였다.
그녀가 만류하자 육모담은 코끝을 씰룩거리다 못 이기는 척 옆으로 몸을 비틀어 모용소희에게 길을 내주었다.
“처음 뵙겠어요. 무림맹에서 사절단의 자격으로 온 모용소희라고 합니다.”
모용소희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장기린을 살피며 정중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게 포권을 취했다.
“장기린이오. 그리고 사절단치고는 무례한 자를 섞어서 보냈군.”
빠드득!
옆에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물론, 장기린은 그런 것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매검협이라 불리는 육 소협께서는 본래 혈기가 넘치는 분이세요. 특별히 적대한 것은 아니니 부디 이해해 주세요.”
오매검협이라는 위명을 내세워 상대방의 내심을 떠보는 형태.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적룡기마대 중 그 정도에 동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운화나 섭우생은 그 정도의 위명으론 놀라지도 않았을뿐더러, 장기린은 애초에 그런 이름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검선에게 들은 이름도 무림오존과 십대고수, 그리고 각 대문파의 장문인 정도에 불과했다.
“본래 그런 성품이라고 해서 상대에게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소. 사절단이라면 상대와의 우호적 관계에 힘쓰는 직책이 아니던가?”
“……!”
모용소희는 놀라면서도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기린이 전쟁터의 한낱 무부(武夫)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그녀로서는 장기린이 마치 고위 관료처럼 명석하고 정확한 사리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의외일 터였다.
“그건…….”
모용소희는 뭔가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했으나, 장기린은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됐소. 일단 따라오시오. 이곳은 이야기하기에 좋지 않은 듯하군.”
장기린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모용소희와 나머지 사절단들은 당연히 따라올 거라는 듯한 태도를 느끼게 해 주었다.
“큭……!”
모용소희와 각 문파의 대표들은 이를 악물고 침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했어……!’
장기린은 핵심을 짚었다.
무림맹에서 그들에게 사절단이라는 이름을 주고 무쌍귀와 귀마대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오라는 명을 내린 이상, 그들은 절대로 장기린에게 막 대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무림맹이 다른 임무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절단의 명성과 사문이 범상치 않은 만큼, 어딜 가나 대우받고 오히려 쩔쩔매는 듯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이번에도 그런 대우를 받으며 당당하게 임무를 완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완전한 오판.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내가 잘못 봤어.’
지혜로움이 끝이 없다고 해서 지다화라고 불리면 뭐 하는가.
그래 봤자 겨우 사람의 진면목 하나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것을.
모용소희는 장기린의 얼굴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렸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 청정한 기세.
잘 균형 잡힌 체구에 건장한 팔뚝.
특히 야성적으로 질끈 묶은 머리와 거친 삶을 살아왔다는 듯 잔뜩 뭉개진 귀가 인상적이었다.
‘분명히 관직에 있던 사람이야. 안 그러면 이렇게 권력 싸움에 능할 리가 없어.’
모용소희가 문득 든 생각에 묘한 확신을 가질 그 때, 옆에서 육모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드득―
“이노옴! 때려눕혀 버릴 테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그를 모용소희가 다시 말렸다.
“육 소협!”
“모용 소저, 왜 그러시오? 저 건방 떠는 놈을 나는 지금 당장……!”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지적에 육모담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차분하고 부드럽기만 했지, 이제껏 그녀가 그를 향해 이렇게 사나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던 탓이다.
모용소희를 향해 시선이 모여들었다.
남매인 모용소진, 무당의 명진 도장, 소림의 계원.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모용소희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장기린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좋아, 이제 방심하지 않겠어.’
무림의 인물들과 조우하게 된 장기린.
그 첫 기세 싸움은 장기린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