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05화 (86/686)

第百二章 ― 오만무도(傲慢無道)

“앉으시오.”

장기린은 자리를 권했으나, 사실 무림맹 사절단의 입장에선 앉을 만한 곳도 없었다.

애초에 행군 중이었던 사람들이 거창한 자리를 마련해 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바닥에 거적때기 한 장 깔아 놓은 것이 접대의 전부이니 이제껏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사절단의 사람들은 모두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털썩.

그런데 그들 중 모용소희가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오랜 시간 사용해 온 듯 너덜너덜한 거적때기였으나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자리가 좋네요.”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였다.

“행군 중이라 자리를 마련할 틈이 없었소. 이해해 주시오.”

“어쩔 수 없죠. 이해해요.”

모용소희는 조금 전과 아예 다른 사람이 된 듯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한창 외모에 신경을 쓸 젊은 여인답지 않게 바닥에 앉아 옷에 때가 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조금 전의 일로 느낀 게 있었다는 건가?’

장기린은 모용소희를 지그시 응시했다.

“커험!”

하지만 조금 전의 일로도 변함이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화산의 육모담이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바닥에 깔린 거적때기를 탐탁치않은 듯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거지도 아니고, 이딴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 나는 그냥 서 있겠소.”

턱을 치켜든 그 모습에선 고고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바닥엔 그나마 거적때기도 딱 여섯 개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각 무리의 지도자 급만 앉으라는 뜻이었는데, 무당의 명진 도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택했고, 모용소진 또한 머뭇거리다가 모용소희의 등 뒤에 시립하는 것으로 태도를 정한 듯 보였다.

털썩.

“어?”

“어……?”

다만 한 사람.

황색 가사를 입고 있는 젊은 승려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용소희의 옆에 놓인 거적때기에 앉았다.

계원.

소림의 모든 무승이 기대를 보내고 있는 기재가 땅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 앉은 것이다. 주변의 모두가 기함하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계원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묵묵히 손안에서 염주알만을 굴렸다.

“육 소협, 그럼 저는 거지인가요?”

모용소희는 여전히 시선을 장기린에게 향한 채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큭, 그게 아니라…….”

“무림맹의 사절단으로서 우호를 위해 온 자리입니다. 조금만 더 진중해 주세요.”

“……알겠소.”

대답을 하긴 했으나, 불만이 가득 쌓인 표정이었다.

모용소희는 장기린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태를 보였습니다.”

“개의치 않소.”

“사과를 하고 싶으나, 무림맹의 대표로서 온 자리이기에 함부로 사과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장기린은 당당하게 그를 마주 보는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권문세족의 영애처럼 고고한 태도를 보이던 여인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꾼다?

그게 가능한지 안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어찌 보면 뻔뻔한 태도였다. 그녀가 처음에 어떻게 했는지를 빤히 아는데도 당당하게 다른 모습을 연기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재밌는 여자로군.’

장기린은 주변의 다른 자들도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제법 강하지만, 이 여인과 소림 승려를 제외하면 별로 특별하진 않다.’

만약 육모담과 모용소진 등이 들었다면 발끈했을 생각이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문파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니 눈에 안 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기린의 눈에는 적룡기마대의 간부들보다 못해 보일 뿐이었다.

“이곳까지 온 것, 이유가 있지 않소?”

“아, 네.”

모용소희는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장기린을 응시하다 황급히 대답했다.

“삼호방을 쓰러뜨린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그게 질문이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모용소희는 앞으로도 질문이 몇 개나 있을 거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유야 많지. 삼호방은 주변의 죄없는 백성들에게 패악을 끼치던 악인들의 무리였으며, 역모를 행하고 있는 북천맹의 일익이오. 힘이 있다면 오히려 쓰러뜨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오?”

“그런…… 가요?”

모용소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무림인이신가요, 아니면 관인이신가요?”

“…….”

“대답해 주세요.”

장기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무림인이오.”

모용소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무림인인데 관군을 삼천이나 이끌고 있다……. 이건 이상하지 않나요?”

“역천을 바로잡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 뿐이오.”

장기린의 대답은 담담했다.

“국법상 허락받지 않고 군을 움직이면 역모로 처리되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이 군대, 관의 허가를 받고 움직이는 건가요?”

“그게 그렇게 못 미더우면 이 병사들을 내준 강서성 도독부에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니오?”

“네?”

“도독부의 군장이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허가받지 않은 병사들을 무단으로 내놓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소? 그 부분이 굳이 의심스럽다면 강서성 도독부에 찾아가면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말이오.”

모용소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즉, 이 군대는 모두 정식으로 관의 허가를 받았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소.”

장기린은 당당했다.

실제로 부운화는 대장군의 부관인 행군사마의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행군사마는 대장군의 재가가 없이도 오천의 병력을 마음껏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단, 여기에는 제한이 있었는데, 행군사마가 군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장(戰場)에만 국한된다는 점이었다.

지금 그들이 움직이는 곳은 전장일까?

아니면 국경 내부의 보통 땅일까?

그 부분은 논란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장기린은 자신이 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북천맹이 남경을 빼앗은 그 순간부터 내전은 이미 발발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

내전이 벌어졌다면 온 국토가 전장이다.

그러니 대장군의 행군사마인 부운화가 군을 운용하는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테지.’

장기린이 당금의 황제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으음…….”

한편, 모용소희는 그런 장기린을 보며 사실을 말하는 자 특유의 확고함을 느꼈다.

‘그럼 관에도 연줄이 닿아 있다는 뜻인데…… 이 사람, 혹시 생각보다 거물일까?’

단지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갑작스레 나타난 신생 세력이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은가, 라고 모용소희는 생각했다.

척 보기에도 이 무리는 훈련이 잘되어 있을뿐더러, 한 사람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뭉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똘똘 뭉치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까?

오랜 시간 함께하며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생기는 충성심이다.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하실 거죠? 이 일이 끝난 후 무림에서의 계획이 있나요?”

그 질문엔 모용소진은 물론이고, 육모담, 명진 도장, 거기에 항상 다른 데 신경을 쏟고 있던 계원까지 눈을 뜨고 대답에 집중했다.

사실 모용소희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쌍귀와 귀마대가 앞으로 무림에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그 계획에 따라 무림맹의 대처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런 것 없소.”

“……네?”

“무림에서의 계획 같은 것은 없소.”

모용소희가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 노한 음성이 버럭 터져 나왔다.

“장난치나, 지금! 우릴 놀리는 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 육모담이다.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사내였다.

“왜 말이 안 되지?”

장기린은 그런 그에게 반문했다.

“뭐?”

“나는 무림에 뜻이 없다. 오로지 북천맹을 없애는 것만이 목표일 뿐, 그것이 끝나면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다.”

“……!!”

“그러니 계획 따윈 없다. 우린 이번 싸움이 끝나면 무림을 떠날 것이다.”

육모담은 잠시 코끝을 씰룩거리다가 모용소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모용 소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삼천 명의 병사를 지닌데다 삼호방을 없앴다는 무명까지 쌓았으면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 조용히 살고 싶다? 순진한 애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소!”

모용소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육모담의 말 또한 맞는 것이었다.

강호의 은원이란 마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슬 같아서, 아무리 그로부터 도망치려 해도 결국은 발목이 칭칭 감겨 주저앉고 마는 법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정말로 그러고 싶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심산유곡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야 한다.

마부, 기녀, 상인, 거지.

하오문이나 개방에서 모으는 정보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순간, 그 정보는 무림에 흘러 들어가게 되고, 명성을 얻기 위해, 혹은 지난날의 은원을 되갚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에 의해 평범한 삶은 산산조각 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나?”

장기린은 육모담에게 물었다. 육모담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난 앞으로도 무공을 단련해 최고가 될 것이다. 어째서 평범한 삶 따위를 원해야 하지?”

“그런가.”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모용소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소저는 어떻소?”

“네……?”

“평범한 삶을 꿈꿔 본 적이 없소?”

모용소희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평범한 삶을 꿈꿔 본 적?

있다.

물론 너무 가난한 집은 안 된다.

하지만 적당히 부유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한 사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

어릴 적엔 물론이고, 지금도 가끔 그런 것을 꿈꾼다.

‘하지만…….’

잠시 흔들리던 모용소희의 눈빛이 차분하게 굳어졌다.

“저는 제 가문과 제 책임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족함없이 자랐으며,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먹으며 훌륭한 무공을 배웠다.

명 제국의 국민 중 구 할이 부러워할 삶이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의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온다.

그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평범한 삶을 꿈꾸는 그런 비정상적인 환상은 미리 포기했다.

“바라지 않는다…… 즉, 꿈을 꾸긴 했다는 소리군.”

장기린은 그녀의 대답에서 그와 같은 것을 바라는 자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용소희는 눈길을 피했다.

마치 그쪽으론 바라지도, 바라서도 안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이뤄지는 것도 없소. 잊지 마시오. 그것이 세상의 진리니까.”

“……!”

장기린의 담담한 말에 모용소희의 눈빛이 변했다.

놀란 듯한 모습.

크게 뜬 봉목에는 혼란과 당황만이 가득했다.

“다른 질문은 더 없소?”

“없…… 어요.”

“돌아가고 싶다면 배웅은 않겠소. 더 있고 싶다면 있어도 좋으나, 곧 있을 전투를 위해 정신이 없어 특별한 배려는 해 줄 수 없을 것이오.”

얼핏 냉정하게도 들리는 그 말에 육모담이 앞으로 나섰다.

“이까짓 곳, 남아 달라고 절을 해도 안 있…….”

“이곳에 남겠어요.”

“모용 소저!”

육모담이 깜짝 놀라 외쳤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희는 저희의 일을 할 뿐이니 장 대협께서는 평소대로 지내시면 될 거예요. 특별한 배려는 필요없습니다.”

“……알겠소.”

장기린은 모용소희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적룡기마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이런……!”

육모담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을 씰룩이다가 모용소희를 보며 꾹 다물었다.

혼자였다면 욕지거리라도 내뱉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여러모로 꼿꼿하고 청정한 화산의 도사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소희야.”

“네, 오라버니.”

“과했구나.”

모용소진은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지다화라는 별호로 불리는 동생의 현명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문세가의 자제에겐 그 나름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소림의 각로 대사가 그녀를 사절단의 책임자로 정했다지만, 그녀는 정파의 배분으로 따지자면 사절단에서 가장 어린 막내에 불과했다.

그녀가 가진 뛰어난 두뇌로 현명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역할이지, 명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명진 도장과 계원 스님, 육 소협이 있고, 또한 네 오라비인 나도 있다. 이곳에 남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혼자서 그걸 결정하는 건 너무 과한 처사지.”

모용소진은 자존심을 상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동생의 능력은 인정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까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상황이 너무 급해서 그만…….”

“아무리 급해도 여기 계신 분들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상의하는 척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게 명문정파의 예법이고 도리야.”

가문의 예법을 논하는 모용소진에게선 명문가 장자로서의 자부심과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명진 도장과 육모담도 말은 안 했지만 옆에서 모용소진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모용소희는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사죄였지만, 아래를 향하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다른 분들의 체면이 아니라 오라버니의 체면 때문이겠죠.’

모용소진은 평소엔 그녀를 잘 보조해 주는 좋은 오라버니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듯한 경우엔 태도가 돌변해 그녀를 공격하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너무 주목을 받았기에 그렇다.

모용소진도 평범 이상의 수재이지만, 항상 천재 취급을 받았던 그녀에게 묻혀 아버지의 사랑과 주변의 환호를 빼앗겨 왔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때때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며 동생에게 적개심을 드러낼 때가 종종 있었다.

가족이라면 무조건 같은 편이 되어 주어야 하건만…….

모용소희는 그런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게 내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이유 중에 하나야.’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방금 장기린에게 들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렸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이뤄지는 것도 없다.

그 말이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왜일까?

“커험! 뭐, 난 괜찮소. 모용 소저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쪽으로 결정했을까. 난 모용 소저를 믿소.”

“그렇습니다. 지다화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옳은 일이겠지요. 저는 괜찮으니 모용 소협께선 노화를 푸십시오.”

육모담과 명진 도장은 각자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 모용소진을 달랬다.

굳은 표정으로 모용소희를 응시하던 모용소진이었으나, 두 사람이 계속해서 달래자 못 이기는 척 표정을 풀었다.

“계원 스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아미타불. 저는 애초에 개의치 않았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계원의 목소리에선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화나지 않았으며 화낼 것도 없으니 괜한 일을 벌이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니, 모용소진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렵군.’

그는 무림맹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 젊은 승려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사람을 똑바로 상대하지 않는달까.

아마 지금쯤엔 함께 온 모두가 느끼고 있을 테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계원은 상대를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대화가 무엇인가?

대할 대(對)에 말씀 화(話)다.

서로를 진심으로 마주 보며 말을 나눠야 하거늘, 자신의 속을 철저히 감추고 상대를 대하니 마치 두터운 벽이 앞에 있는 듯해서 영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좋게 말하자면 승려로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세계가 따로 있으니 너희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오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태도에선 오만함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따지기도 어렵고…….’

모용소진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그의 입장에선 차라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육모담이 계원보다는 나았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럼 이제 슬슬 날도 저무는데, 지낼 곳을 찾도록 하죠. 야숙을 해야겠지만, 괜찮겠죠?”

모용소희가 살짝 절제된 미소를 지을 때면 친오라비인 모용소진이 봐도 가끔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러니 한창 혈기왕성한 다른 청년들은 어떻겠는가.

이미 표정이 오뉴월 햇볕에 고드름이 녹 듯이 사르르 풀린 육모담은 말할 것도 없고, 도인인 명진 도장도 얼굴이 붉어진 채 모용소희에게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연히 괜찮소! 이 육모담,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런 사소한 불편함쯤은 감소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남자요!”

가슴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외치는 육모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적때기 위에도 못 앉겠다고 깔끔을 떨던 사내가 할 말이 아니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명진 도장은 여전히 모용소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렇게 말했고, 계원 스님은 조용히 불호를 외며 그렇게 하자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럼 인근에 좋은 자리가 있는지 한 번 알아보죠.”

이번에도 역시 육모담이 자리를 찾아보겠다며 화산파의 무인들을 이끌고 뛰쳐나갔다.

모용소희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장기린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확실히 알아내고 말겠어.’

호기심과 결의가 뒤섞인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문제는 바로 다음 날부터 벌어졌다.

익숙지 않은 잠자리에 괴로워하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킬 때쯤, 이제 막 동이 트는 시간임에도 벌써부터 병사들의 발소리가 박자를 맞춰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쿵, 쿵!

처음에 모용소희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인근에서 동시에 발을 내딛는 삼천 명의 발소리는 그렇게나 컸다.

“여러분! 일어나세요! 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어요!”

모용소희가 깨우려고 하자 인근 바닥에 피풍의를 몇 겹이나 깔아 놓고 자고 있던 육모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모용 소저, 저들이 삼천 명이나 이끌고 어딜 도망갈 수 있겠소? 급하게 따라갈 이유는 없지 않소?”

“……도망가는 걸 쫓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저들이 병사들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지 알아 둬야 하지 않겠어요?”

“난 어제 직접 만나 보고 한눈에 알았소. 저자는…… 별것 없는 자요. 느껴지는 무공도 미약하고, 단지 성질이 드러워서 우두머리를 하고 있는 것 같더이다.”

육모담은 모용소희의 앞만 아니었다면 ‘쥐뿔도 없는 자’라고 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모용소희는 황당함을 느꼈다.

장기린의 무위는 제쳐 두더라도, 그가 보유한 병력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반드시 알아 둬야 할 정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겠어요.”

모용소희는 굳이 그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장기린이라는 사람과 그 휘하의 삼천 명의 병력을 우습게 보고 있다.

무인도 사람이거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들이 죽이겠다고 악을 쓰고 달려들면 백이고 이백이고 다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숫자가 많으면 당해 낼 수 없어. 내공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초절정의 고수가 아닌 다음에야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해.’

하지만 일반적인 무림인들의 인식이 그랬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쓸 수 있다는 이유로 자만심에 빠져서, 천이든 만이든 다 상대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직접 깨닫기 전에는 옆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고쳐지지 않는 법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모용소희는 함께 온 일행들을 쭉 둘러보았다.

모두가 아직 잠에 빠져있었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새벽, 게다가 어제는 익숙지 않은 잠자리 때문에 다들 밤잠을 설쳤으니 괴로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육모담과 화산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명진 도장과 무당의 무인들, 그리고 혈육인 모용소진과 세가의 무인들마저 잠에 빠져 있었다.

더더욱 장기린 쪽의 병사들과 비교가 되었다.

저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부지런한데,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냔 말이다.

‘소림은 깨어 있긴 하지만…….’

항상 일찍 일어나야 하는 절의 규율 때문일까, 소림의 계원과 나한전의 승려들은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으나,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어느 한쪽을 보며 조용히 염불을 외우는 중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손에 든 염주알을 하나씩 손으로 헤아리는 모습이 너무나 경건해서, 모용소희는 함부로 그들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하지? 그래, 차라리 내가 혼자 가겠어.’

파라락―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모용세가 비전의 부약표(負約票)가 펼쳐지며 그녀의 몸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운 움직임을 보였다.

노란색 테를 두른 흰빛의 비단 장포가 날개처럼 펄럭였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모용소희.

그녀의 몸이 점점 멀어지는 병사들의 뒤를 쫓았다.

☆ ☆ ☆

“그 여인은 어땠습니까?”

쿵, 쿵, 쿵!

삼천 명의 걸음 소리로 주변이 부산스러운 가운데, 부대주로서 여유가 좀 있던 부운화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땠냐니?”

장기린은 쌀 포대에 등을 기댄 채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시야에 담으며 되물었다.

“모용세가의 여인 말입니다.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무림맹 사절단의 책임자 자리를 가장 나이가 어린 모용세가의 지다화가 맡았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머리가 좋은 여인입니까?”

“글쎄, 머리가 좋은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임기응변이 뛰어나긴 했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건 판단이 빠르다는 뜻이니, 마음이 강한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더군.”

“다만 정파의 특성상 어린 사람이 지도자를 맡으려고 하면 웬만해선 파탄이 날 텐데…… 걱정스럽군요.”

장기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지다화(智多花).

확실히 그 별호에 어울리게 눈이 재지(才智)로 반짝이는 재기발랄한 여인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사람들을 제압하는 강렬한 존재감이 없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지도자로서는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지도자는 다수의 사람을 이끄는 자리이고, 사람들을 이끌려면 그들에게 무언가 확신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따르면 잘못되지 않겠다.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이 사람을 따라야만 한다’라는, 그런 신앙과도 같은 위압감과 신념을 주지 않는 한 사람들은 지도자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럼 모용소희에게 그런 점이 있는가?

아니다. 그녀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면 아랫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나서서 제멋대로 구는, 어제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겠지.’

마지막에 이곳에 남겠다고 했던 그 당찬 결정은 암만 봐도 주변의 동의를 얻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지도자로서의 존재감이 없는 상태에서 독단적인 결정까지 내렸다.

그럼 수하들이 그 말을 순순히 따를까?

“걱정해 주시는군요.”

장기린은 조금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운화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에게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아직 판별이 안 된 사람들이니, 너무 예쁘게만 보셔도 곤란합니다.”

“……누가 예쁘게 봤다는 거야?”

“대형, 제가 대형과 함께한 지 근 십 년입니다. 제가 대형이 마음에 들어 한 사람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구별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부드럽게 웃는 부운화의 표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장기린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표정만 보고도 그의 속마음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휘연을 제외하곤 부운화뿐이었던 것이다.

‘휘연…….’

문득 떠오르는 얼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장기린은 대오각성을 하듯 자신이 이렇게 처음 만난 여인을 걱정해 주는 원인을 깨달았다.

“노란색 때문이다……!”

노란색.

그것도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밝은 노란색!!

“노란색이요……?”

부운화는 아직 알아채지 못한 듯하지만, 장기린으로서는 이마를 탁! 하고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이 깊어지는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형?”

“모르면 됐어. 그냥 그런 게 있다.”

장기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휘연에 대한 그리움이 이젠 병의 수준에 올라선 모양이다.

처음 본 여인이 휘연과 비슷한 색깔의 옷을 좀 입었다고 정을 느끼다니.

‘아니, 아니지. 옷 때문만은 아니야.’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옷의 색깔이 계기는 되었을지 몰라도 휘연과 연관 시킨 것은 좀 더 다른 것이다.

‘자신이 바뀌어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고, 마지막 결단을 내릴 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나서는 모습이…… 대담했지.’

그 용기가, 그 당당함이 강렬하게 기억된 거다.

마치 금선로에서 침모 일을 자신이 하겠다며 마차에서 뛰어내린 휘연처럼.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문곡직 이 자리에 남겠다고 선언하던 모용소희의 모습이 그에게 큰 감흥을 준 것이다.

‘휘연이 죽은 것도 아닌데…….’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다. 죽은 사람을 대하듯 그리워해서야 말이 안 된다.

“대형……?”

부운화는 옆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기린이 뭔가를 떠올리는 듯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부운화에겐 낯설었던 것이리라.

“큰형! 아니, 대주님!”

그렇게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각기 다른 생각들을 하는 사이, 적룡기마대원 몇 명을 데리고 정찰을 나갔던 진구가 말에 올라탄 채로 황급히 달려왔다.

“동북 방향으로 몰래 산길을 타고 오던 무리를 발견했어요! 군대 같지는 않고, 그…… 무인들 같던데요?”

진구의 말에서는 진한 전장의 향기가 느껴졌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장기린과, 그런 장기린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운화의 눈빛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숫자는?”

“복색이 어땠지?”

진구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숫자는…… 대략 백오십에서 이백 사이예요. 복색은 각양각색이고, 대열도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어요.”

장기린은 부운화를 쳐다봤다. 부운화도 동시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장기린을 마주 보고 있었다.

“동북에서 오는 거라면…….”

“남경 쪽에서 오는 거겠군.”

지금 적룡기마대의 행군로는 동북쪽으로 향해 있었다.

동북쪽에 남경과, 남경을 포위하고 있는 파강장군 원회의 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남경 쪽에서 오는 무인들이라면 북천맹일 텐데…… 그럼 흑도의 무인들인가? 그런데 그들이 왜 이쪽 길로 오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군. 우리를 노리는 거라면 옆을 몰래 지나갈 게 아니라 앞쪽에서 매복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장기린은 거기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백오십에서 이백 사이…… 숫자도 애매하군. 방향도 다르고. 이건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니야.”

장기린이 그렇게 말하자 부운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우리 적이 아니에요?!”

“우리를 노린 거였다면 좀 더 앞쪽에서 매복하며 기다렸겠지.”

“아니, 그치만. 우리한테 안 들킬 자신이 있다면 옆이나 뒤로 돌아가서 공격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어. 우리에게 매복으로 제대로 피해를 주려면 최소한 오백 이상이 필요하다.”

물론 적룡기마대 급의 이백이라면 상황이 또 달라질 테지만, 진구의 보고상으로는 자신들이 추적당하는 줄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무인들만 있다고 했다.

‘진구의 정탐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나 무방비하다는 건…… 단체전에 대해 무지한 거라 봐도 되겠지.’

단체전에는 무지하다. 그런데 우르르 몰려서 급하게 앞을 다퉈 뛰어갔다고 한다.

마치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에 대해 전해 들은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하자 장기린은 한 가지 결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목표는…… 무림맹이군.”

“네에?!”

놀란 것은 진구뿐이었다.

부운화는 이미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진중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대형, 진군의 방향을 바꾸시겠습니까?”

“…….”

장기린으로부터 대답이 없자 부운화는 진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구야, 그 무인들이 지나간 게 언제지?”

“일각 정도 됐어요. 그 속도라면 한…… 십 리는 갔겠는데요?”

“그럼 앞으로 반 각만 더 가면 사절단을 발견하겠구나.”

“네. 적룡기마대만 데리고 돌아가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겠는데요…….”

진구는 그 말을 하며 슬쩍 장기린의 눈치를 살폈지만, 깊이를 잴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는 묵묵히 행군하는 병사들만 쳐다볼 뿐이었다.

“으음, 으음……! 숫자가 많았는데요……. 그 사람들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요?”

진구가 싸움에 대한 열망을 은근하게 드러냈지만, 그래도 장기린은 요지부동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수레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말발굽 소리만 들려오기를 잠시.

장기린은 시선을 위로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행군 방향은 바꾸지 않는다.”

“네에?! 크, 큰형, 아니, 대주님. 그러면 저쪽이…….”

“행군. 방향은. 바꾸지. 않는다.”

딱딱 끊어서 말하는 장기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네, 네에.”

진구는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고, 부운화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 후 말 머리를 돌려 옆으로 가 버렸다. 근처의 적룡기마대에게도 같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흐음.”

장기린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서히 동이 터오는 하늘은 타는 것처럼 붉었다. 마치 지금 그의 마음처럼 뜨겁고 황량한 모습으로.

“……어차피 필요도 없을 거란 말이다.”

장기린이 중얼거리는 말은 이미 자리에 없는 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조금 전에 봤던 여인의 얼굴.

“후우…….”

장기린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 버렸다.

마치, 무언가로부터의 집착을 애써 끊어 내듯이.

☆ ☆ ☆

“적입니다.”

모용소희가 사라진 후 모두가 다시 잠에 빠져들어 고요해진 그때, 밤새 피워 놓은 모닥불이 하얗게 식어 가는 주변으로 나직하면서 청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음……?”

“음……?!”

그 목소리는 신기하게도 깊은 잠에 빠져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던 화산의 육모담마저도 대번에 깨워 버릴 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혜광심어(慧光心語).

불문의 깨달음을 전하는 비전절학이 계원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된 것이다.

“적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계원 스님?”

모용소진이 아직 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상체를 일으켜 계원을 쳐다봤다.

“이쪽을 향해 적의를 가진 자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리 대비를 해야 할 것 같군요.”

“……!!”

모용소진은 눈을 크게 뜨며 일어나 주변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육모담이 있는 화산과 명진 도장의 무당파도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귀를 기울여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겐 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실례지만, 계원 스님께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본승은 귀가 밝은 편이라 그런 것에 예민합니다.”

“기척을 귀로 느끼셨단 말입니까?”

“예.”

계원의 담담한 대답에 모용소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야생동물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흑도나 하오문 쪽에 천리지청술만 전문으로 익히는 괴짜들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설마 소림의 나한승이 그런 잡학을 익혔으리라 생각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원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껏 겪어 본 계원의 성격상 그는 이런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즉, 지금 그의 말은 진실이라는 이야기인데, 어째 그냥 믿어 버리자니 찝찝한 기분이었다.

“호영대(護影隊) 여러분.”

“예, 공자!”

“주변을 경계해 주십시오. 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옛!”

호영대라 불린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다섯 명 중 네 명이 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고, 한 사람은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섰다.

“호오……?”

“흐음……!”

육모담과 명진 도장의 얼굴에서 감탄이 떠올랐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모용소진과 그 명을 충실히 이행하여 능숙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에서 현재 모용세가가 가진 힘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모용세가.’

‘최근에 많은 싸움을 겪으며 인근 지역을 재패하고 있다는 소문값을 하는군.’

그사이, 화산파와 무당파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매검당(梅劍堂)의 무인들이 반원 형태를 그리며 육모담 주위로 포진했고, 무당의 오검(五劍)이라 불리는 검사들이 각자 검을 빼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소림뿐이다.

그들은 계원을 중심으로 뭉쳐 서서 가만히 서 있을 뿐,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

“발견했습니까?”

나무 위로 올라갔던 호영대의 무인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 내려와 모용소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모용소진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모두에게 그 말을 전했다.

“동북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모습으로 보아 이백 명가량이 될 거라는 군요.”

“이백이라…….”

명진 도장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이백이라면…… 지금 그들의 인원에 여덟 배라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소희는? 소희는 어디에 있지!”

모용소진이 그제야 눈치챈 듯 소리쳤으나, 모용세가의 무인들 역시도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기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다화께선 아까 홀로 어딘가로 떠나셨습니다.”

“홀로……! 잠깐, 그걸 아시면서 그냥 두고 본 것입니까?!”

“병사들을 따라간 것일 테지요. 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차분한 태도에 냉정한 목소리였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유지하는 그 모습은 지극히 승려다우면서도 또한 승려답지 않았다.

결국 모용소진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긴 하지만, 딱히 트집을 잡을 구석은 없는 것이었다.

“호영대! 싸움을 준비합니다!”

“옛! 공자님!”

다섯 명의 호영대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준비하는 그때, 옆에서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명진 도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우실 겁니까?”

“예? 당연히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직 적이 우리라고 판별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해 가는 것 또한 중도(中道)일 것입니다.”

간만에 도문(道門)의 도사다운 이야기를 꺼내는 명진 도장은 차분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명진 도장과 함께 온 오검도 마찬가지였다. 전투 직전의 긴장감은 있으나 그 눈빛만큼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극무상(太極無常).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순리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무당의 교리였다. 그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 그렇게 안 봤는데, 무당파는 원래 그리 겁이 많은가?”

“……육 소협.”

무당의 명진 도장이 도인다운 모습을 보여 줬다면, 이번엔 육모담이 그와는 정반대로 전혀 도사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 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던 탓인지 명진 도장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원래 조금 고집스러운 얼굴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얼굴의 인상이 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렇잖소? 덤벼 오면 싸우면 되는 거고, 저쪽이 먼저 피하면 그런가 보다 하며 봐주면 되는 거 아니오? 뭘 미리부터 겁을 내느냐, 이거요.”

“누가 겁을 냈다는 겁니까?”

“미리부터 싸울 건지 안 싸울 건지 전전긍긍하는 게 그럼 겁내는 거 아니오? 그런 짓은 시전의 힘없는 노인들이나 하는 거요.”

명진 도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무당파를 시전의 힘없는 노인 취급하다니.

그런 말을 웃어넘기기엔 명진 도장과 오검들은 아직 너무 젊었고 혈기가 넘쳤다. 대열을 갖추고 있던 오검 중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례하다! 무당은 어떤 적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럼 그런 모습을 보이라 이거요! 이 육모담이 있는 화산이야말로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는 호걸들뿐이니까!”

다혈질이고 도사답지 않은 모습일지언정, 육모담의 성격은 무인으로서는 호탕해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런 성격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매검당에는 육모담의 성품에 매료된 자들만 모이는 것인지, 뒤쪽에 늘어서 있던 화산의 무인들은 육모담의 말이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조금 전 앞으로 나섰던 오검 중 한 사람이 뭐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명진 도장이 그를 제지했다.

“됐습니다.”

“명진 사형!”

“지금은 같은 무림맹의 일원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일단…… 이 문제는 미뤄 두지요.”

명진 도장은 일단은 참고 넘어가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짚었다.

하얀 낯빛에 고집스런 인상을 지닌 명진 도장이 사납게 기세를 끌어 올리자 주변의 공기 전체가 싸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무당의 오검이 육모담을 노려보고, 그런 육모담의 뒤에 있는 매검당의 무인들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흥, 나중으로 미루는 건가?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드는군.”

거기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며 사납게 눈을 부릅뜨는 육모담은 상황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오악(五嶽)의 하나이며, 대륙제일검문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화산파로서는 소림과 함께 무림의 태산북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당파가 장애물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가 검문으로서 개파한 뒤 쌓이고 쌓인 몇 십 년의 감정.

지금까진 도문(道門)으로서의 체면과 같은 정파라는 울타리 때문에 억눌려 있었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후대에 이어지다가 결국 육모담과 같은 다혈질의 후기지수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러한 적대감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된 것이다.

“정파인으로서의 품위도 없는 자들……!”

“이름만 유명한 겁쟁이들이……!”

마치 중얼거리는 것처럼 서로를 향한 비난들이 쏟아졌다.

중간에 모용소진이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지기만 했을 것이다.

“지금 여러분, 뭘 하시는 겁니까? 이백 명입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면 위험하단 말입니다!”

화산파와 무당파는 그제야 서로에게 시선을 떼고 등을 돌렸다.

서로 쳐다보는 방향도 각자 동쪽과 서쪽이다.

싸울 때마저도 서로 쳐다보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 그것도 좋겠지. 서로 감정은 안 좋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하니까. 온전히 등을 맡길 수 있을 거다.’

모용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화산의 육모담, 무당의 명진, 그리고 소림의 계원.

모두가 각 문파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로서 각광받는 인물들이다.

채챙! 챙!

“공자님! 습격입니다! 이자들은 무림맹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때, 앞쪽으로 정찰 나갔던 호영대의 무인들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결국 적이었는가……!”

“핫! 이럴 줄 알았다! 북천맹 놈들이 이딴 잔수를 쓸 줄 알고 있었다고!”

육모담이 붉은빛 매화 문양이 새겨진 장검을 뽑아 들고 위세등등하게 외쳤다.

두두두두―

이백여 무인들이 내는 발소리는 땅을 쿵쿵 울리고 있었다. 거센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눈에 선명히 보이고, 이쪽을 노리는 것이 분명한 살기와 투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채채챙!

“와아아―!”

“내가 먼저다!”

“오매검협! 오매검협이 어떤 놈이냐!”

“모용소진이라는 놈도 있다던데!”

“지다화는! 지다화는 어디에 있지?!”

흑도에는 흑도의 방식이 있다.

뜨거운 의리나 목숨을 넘어서는 우정 따위는 없지만, 돈에 대한 집착과 이름을 떨치고 싶은 명예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우르르 몰려드는 흑도의 무인들은 제각각 손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파기가 들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대량으로 그려서 건네준 듯, 섬세하지 못한 그림이지만 특징만큼은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 실물과 비교해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듯보였다.

“과연, 그렇게 나왔다는 건가……!”

흑도 무인들의 그런 태도에서 무림맹 사절단들은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북천맹은 저 용모파기들을 나눠 주면서 포상금을 내건 거다.

이 사람을 잡으면 얼마, 저 사람을 잡으면 얼마라는 식으로.

“좋다! 와 봐라, 흑도의 멍청이들아!”

육모담이 화포 소리 같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쏘아지고, 매검당의 무인들도 그 옆과 뒤를 받치듯 뛰쳐나갔다.

채채챙!

“으와악―!”

여덟 배가 넘는 숫자가 순식간에 해일처럼 몰려들어 무림맹 사절단의 주변을 포위해 버렸다.

숫자상 열세라는 것은 가벼운 사안이 아닐 터.

일인당 여덟 명.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한 손이 열 손을 막아 낼 수는 없듯이, 여덟 명이 동시에 달려들면 상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다가 실수를 해서 한 명, 두 명 쓰러지다 보면 스무 명만 남게 되고, 그럼 순식간에 병력 차는 열 배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거기서 순식간에 우열이 갈리면서 전멸당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

숫자상의 열세라는 것은 그렇게나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차하앗―!”

“타하앗―!”

각자의 함성 소리와 함께 싸움의 열기는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 ☆ ☆

“저기요, 당신이 이곳의 부책임자이시죠?”

등 뒤에서 들리는 이질적일 만큼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에 부운화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몸을 돌린 그는, 눈앞에서 당당하게 허리에 척하니 손을 얹고 있는 하얗고 노란 비단 무복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무례하시네요.”

모용소희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하아……?’라니.

이제껏 그녀를 보며 이렇게나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사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흐음…….”

모용소희는 정중히 사죄하는 부운화를 자세히 살폈다.

귀한 집 도련님처럼 멀끔한 외모에 차분한 분위기, 그리고 이지적인 눈빛을 지녔다.

게다가 움직임과 말투에선 명문에서 교육받은 절도와 기품이 느껴졌다.

‘이 사람, 정체가 뭐지?’

그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무쌍귀와 귀마대라 불리며 야만스런 무뢰배처럼 생각했던 군대의 느낌이 한결 사라지는 듯했던 것이다.

“왜 그러셨던 거죠?”

“예?”

“저를 보고 놀라셨잖아요. 왜 놀라신 거냐구요.”

부운화는 놀랐던 심정을 차츰 가라앉히고 평소의 차분함을 회복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지. 그보다…….’

부운화는 말 위에 앉은 채로 모용소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보다, 어제와는 다르시군요.”

“……뭐가 말이죠?”

“어제 저희 대주님께 대했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제의 정중하면서 당당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약간의 왈가닥 느낌까지 드는 것이다. 하지만 모용소희는 그런 지적에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상대가 다르면 그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는 법이죠.”

“…….”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놀라셨는지 이제 말씀해 주실래요?”

부운화는 그제야 장기린이 어째서 모용소희를 만나고 나서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닮았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듯하지만, 단 한 가지 닮은 점이 있었다.

당당함.

부운화가 직접 진휘연이라는 여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때 그녀가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굉장히 당당하고 멋진 성품을 유지하고 있는 여인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 대형은 아직 모르지.’

그가 진휘연이라는 여인과 대화를 나눴던 것.

그건 아직 장기린은 모르는 일이다.

‘이 여인에게선…… 진 소저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물론, 다른 점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단 하나, 어떤 상대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당당함을 유지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진휘연을 떠올리게 해 준다.

부운화는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뭐죠, 그 눈빛?”

“예?”

“어제, 무쌍…… 아니, 장 대협도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왜 그러는 거죠?”

모용소희는 둔한 여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다화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좋고 사태 파악이 빠른 여인이다.

게다가 ‘여인의 본능’으로, 그녀는 어제의 장기린과 오늘의 부운화가 모두 특이한 눈빛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한 눈빛은 아니다.

다만, 마치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느낌이 드니 물어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잠시 누가 생각나서…….”

“그게 누군데요?”

“……그보다, 왜 제가 놀랐느냐를 물으셨죠.”

노골적인 화제 전환에 모용소희의 눈매가 꿈틀했지만, 그 이상 재촉하진 않았다.

왠지 이 일은 깊게 캐물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저희 정찰대가 조금 전에 수상한 자들의 이동을 발견했습니다. 동북향에서 오는 자들이였고, 숫자는 약 이백 명. 구심점은 없는 듯했고, 다만 흑도의 낭인들로 보였다는 정보입니다.”

“동북향…… 흑도의 낭인들…….”

모용소희는 부운화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안…… 놀라십니까?”

“아뇨, 놀랐어요. 동북향이면 북천맹. 그리고 흑도의 낭인들이라는 건…… 소속된 무인들을 보낸 게 아니라 현상금을 걸어 별로 중요치 않은 자들을 선동했다는 것이군요. 역시 북천맹…… 그런 점에서 상당히 교활해요.”

부운화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지다화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상황을 다 알아내시는군요.”

“그 정도는 해 줘야겠죠.”

모용소희는 겸손한 말을 하는 것도 없이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걱정은 안 되십니까? 무림맹의 사절단을 노리는 게 분명할 텐데요.”

“저희 사절단은 약하지 않아요.”

“그건 압니다만,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면 희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희생…… 아마 큰 피해 없이 물러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모용소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장 대협은 딱 한 번 봤는데도 그걸 잘 아시는 것 같네요.”

“예?”

“저희 사절단엔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였어요. 즉, 대문파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 키워 낸 인재들이라는 뜻이죠.”

“강하다…… 라는 겁니까?”

“저로서는 조금 그 오만함이 꺾였으면 하지만 말이죠.”

모용소희의 시선이 멀리, 병사들이 행군을 하는 반대쪽을 향하자 부운화의 시선도 같은 쪽을 향했다.

멀리 떨어진 남서 방향.

그곳의 하늘은 아무런 근심도 없이 푸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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