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三章 ― 적룡재천(赤龍在天)
모용소희가 부대로 찾아오고 두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무림맹의 사절단은 초췌한 몰골이 된 채 여전히 같은 속도로 행군 중이던 장기린의 부대를 찾아왔다.
그들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주변의 병사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오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리한 추격전을 피해 몸을 의탁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개는 여전히 뻣뻣했던 것이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소식을 들은 모용소희가 찾아왔을 때는 잠시 행군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라 무림맹 사절단도 다들 근처 땅바닥에 앉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희, 너는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왼쪽 어깻죽지에 긴 상처를 입고 있던 모용소진이 벌떡 일어나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제가 분명히 병사들의 모습을 보러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넌 우리 사절단의 책임자야. 그럼 책임자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사절단을 내버려 둬선 안 되는 것 아닌가?”
“…….”
모용소희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한곳에 모여 있는 무림맹 사절단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꽤 큰 부상을 입은 사람도 있고,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험, 모용 소저, 그렇다고 혼자서 가 버린 건 너무하셨소.”
“조금 기다려 주셨어도 괜찮은 일 아니겠습니까?”
육모담과 명진 도장도 슬쩍 책망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나참…….’
모용소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다들 후기지수랍시고 문파에서 너무 많은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그러니 이렇게 명문의 제자답지 못하게 철이 없고 공사 구분을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절단이 제가 없다고 해서 이런 꼴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할 말이 없네요.”
“뭐……?”
“저는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저희 사절단은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고,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분들이라면……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정중히 사과하는 모용소희를 보며 사절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용소희는 내가 없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못하느냐는 말을 간접적으로 돌려서 한 것이다.
“큭……!”
육모담이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여기선 어떤 말을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결과뿐이다.
결국 그들은 입을 다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괜…… 찮소.”
“어쩔 수 없지요.”
육모담과 명진 도장이 인정하자 모용소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다행히 피해는 없었네요. 육 소협,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실래요?”
“커험, 그러겠소. 문제는 북천맹의 조무래기들이 우릴 몰래 습격하면서 일어났소. 그때…….”
육모담의 우렁찬 목소리는 사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모용소희는 그중에 핵심만을 골라 들으며 사태를 파악했다.
“……다 해서 절반밖에 쓰러뜨리지 못하다니, 이 육모담의 수치요. 여건만 좀 더 받쳐 주었으면 더 많이 베었을 텐데…….”
“쓰러진 자들의 사분지 일만 화산이 벤 것 아닙니까? 똑같은 숫자를 우리 무당이 벴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허공에서 육모담과 명진 도장의 눈빛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총 이백 명의 인원 중 절반의 사분지 일.
대략 스물다섯 명이다.
단 여섯 명의 숫자로 그만한 숫자를 베었다는 것이니, 사실 탈출 과정에서의 성과라고 보기엔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가장 많은 타격을 입힌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런 말은 좀 뻔뻔한 것 아닙니까?”
“…….”
이번엔 천하의 육모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힐끗 뒤쪽에서 묵묵히 따라오는 황색 가사의 무리를 바라봤다.
‘대단했지. 과연 소림이다.’
무당의 명진 도장 또한 계원을 쳐다봤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가 한 번 움직임을 시작하자 주변을 노도처럼 휩쓸던 그 모습……. 나한승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실제로 쓰러진 자들의 절반가량은 소림의 공적이었다. 백 명 중 절반, 즉 오십 명가량은 소림의 나한승 여섯이 쓰러뜨렸다는 뜻이다. 일인당 열 명 가까이를 쓰러뜨렸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달그락― 달그락―
사절단의 사람들이 각자 어떤 생각을 하든 계원과 다섯 명의 나한승은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염주알을 손에서 굴릴 뿐이었다.
“……흐음.”
모용소희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무엇을 말이냐?”
대답하는 모용소진의 목소리는 곱지 않았다.
“북천맹이 저희를 노리고 있어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무쌍귀와 귀마대…… 아니, 장 대협의 군대에 잔류하는 것을 반대하셨던 분들이니만큼 제가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거예요.”
모용소진, 육모담, 명진 도장.
세 사람의 얼굴이 각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긴, 그녀는 이미 귀마대와 함께 있자고 주장하고 있었지. 설마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던 건가?’
‘역시 지다화! 어떤 일이든 다 이유가 있구나.’
그들은 새삼 모용소희의 지혜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병사들 틈에 숨어 있기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이대로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삼천 명의 병사들 속에 숨어 있는다면 분명 들개처럼 집요한 흑도 무인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겁을 먹고 굴속에 숨은 토끼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구파의 정예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도록 만들고 있었다.
“크흠, 말씀은 알겠지만, 그건 좀…….”
“그렇습니다. 병사들의 틈에 몸을 숨겨서야 대무림맹의 이름이 울 것입니다.”
“그래, 이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야.”
육모담, 명진 도장, 모용소진.
세 사람 모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들은 상처를 좀 치료하고 피로가 풀리는 대로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조금만 더 있죠.”
“모용 소저?”
하지만 모용소희는 이미 그들의 그런 반응도 예상하고 있던 듯, 거침없이 의견을 내놓았다.
“한낱 자존심 때문에 어려움을 자처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지금은 장 대협의 군대와 함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구요.”
“모용 소저, 하지만 화산은…….”
“육 소협은 ‘아마 화산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려 하시겠죠. 하지만 그러다가 피해라도 나온다면? 희생자라도 생기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죠? 한낱 자존심 때문에 그런 피해를 감수할 건가요?”
“……!”
실제로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육모담은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모용소희는 곧바로 명진 도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명진 도장님, 무당오검 중에 한 사람이라도 무의미하게 희생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명진 도장님 한 사람의 자존심은 무당 제자의 목숨보다 중요한가요?”
“……!!”
명진 도장 역시도 단번에 침묵하고 말았다.
지다화라는 별호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모용소희는 이미 두 사람의 성격을 다 파악하고, 어떤 말을 해야 효과적일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만난 자들은 그저 흑도의 낭인들에 불과해요. 북천맹주나 삼호법, 또는 사왕의 정예들은 그들보다 몇 배나 강하고 집요할 겁니다. 만약 그들이 직접 나선다면 우리도 오늘처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주변이 모두 침묵하고 있었지만, 모용소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겠죠.’
이들의 자존심은 너무나 높다. 머리로는 알아들은 척을 할 테지만, 직접 맞서서 처참하게 깨지지 않는 한 이들은 절대로 진심으로 깨닫지 못할 터였다.
“장 대협의 병사들은…… 사실 관군과 무림인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요. 지금도 그 위치가 불분명하죠. 하지만 정식으로 관군에 도착해 합류하게 되는 순간, 이들은 관의 인물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림인으로서 이들이 남경에 도착해 관군과 합류할 때까지만 경계하면 될 거예요.”
“남경에 도착할 때까지만…… 지켜보자는 뜻입니까?”
“네. 거기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아닐까요?”
상식적으로 타당한 이야기였기에 명진 도장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육모담 역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고, 모용소진도 탐탁지는 않아 보였으나 동의를 표했다.
“계원 스님? 스님도 제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예, 동의합니다.”
계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모용소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이 무리에 소속되었어요. 여러분 모두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가능한 한 병사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피해 주세요.”
모두가 반발하지 않고 묵묵히 수긍했으나, 모용소희는 솔직히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이들의 자존심과 오만함을 받아들여 주기엔 장기린이라는 사내와 그 주변의 인물들이 만만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별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그녀의 걱정은 마음속에서만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웃고…… 있었던가?”
눈을 뜨자 캄캄한 밤하늘이 장기린을 맞이했다. 오른손으로 목덜미 근처를 더듬자 축축한 습기가 묻어나왔다.
덥다. 아니, 춥다.
한서(寒暑)를 느껴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은 분명히 그 두 가지를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누워 있은 뒤에야 지금 자신이 쌀이 잔뜩 실린 수레 위에 있으며 삼천 명의 병사들에 둘러싸인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으음…….”
기억이 돌아오자 지금의 상황도 좀 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불쾌했다. 주먹을 쥐자 손이 미끈거렸다.
마치 지독한 겨울감기에라도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팠던 적이 언제였을까?
네 살? 다섯 살?
기억도 잘 안 나는 오랜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 당시의 아픔과 무력한 느낌만큼은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아니지. 이건 아프다기보다…… 악몽을 꾼 건가?’
휘연이 나온 꿈을 악몽이라고 하면 안 될 테지만, 그 꿈을 꾼 당사자가 너무나 큰 괴로움을 느끼고 있으니 결국 악몽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동시에, 깨어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웃었…… 지.’
아직도 휘연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유언 비슷한 말을 하면서 웃던 진휘연.
장기린은 시간이 지나가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그 상황, 그 장소에서…… 보통 웃음이 나올까?
입장을 바꿔서 장기린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면 그녀처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지. 그렇게는 못해.’
그 웃음은…… 자기 자신보다 상대를 더 아낄 때에나 가능한 웃음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상대에게 짐이 될까 봐.
자신의 부재가 상대에게 슬픔을 줄까 봐 걱정했기에, 목숨을 잃는다는 공포보다도 상대가 슬퍼하는 게 더 싫었기에 가능한…… 그런 특별한 행동이었다.
“보고 싶네.”
장기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밤중에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한 말이다.
딱히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바람과도 같은 말이었다.
스르륵―
“음?”
장기린은 그 순간, 자신의 몸 위를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려서 주름진 외피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휘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싸늘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장기린은 그와는 다른 이유로 몸을 한차례 떨었다.
모포라니.
그는 그런 것을 덮고 자지 않는다.
아마 부운화가 장기린이 잠에 든 모습을 보고 덮어 준 모양.
그런데 그렇다면 그로서는 더욱 큰일이었다.
‘모포를 덮어 줬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건가? 이거, 너무 긴장이 풀렸군. 적룡기마대주 실격이야.’
만약 부운화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수나 적이었다면 그대로 죽임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마음을 다시 가다듬자. 이래서야…… 휘연을 살리는 건 요원한 일이야.”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덮고 있던 모포를 팡팡, 소리가 나도록 허공에다 대고 털었다.
휘연에 대한 그리움은 이 먼지와도 같다.
털어 내고 또 털어 내도, 다음날이 되면 다시 붙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털어 내는 일을 게을리하면 어느새 손쓸 도리도 없이 새카맣게 변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간직하되, 꿀벌이 꿀을 쫓듯 계속해서 그 잔향을 쫓아서는 안 된다.
지금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북천맹 타도!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할 만한 여유도, 그럴 이유도 없을 터.
‘그 여인 때문에 심경이 흔들린 듯한데…… 그래선 안 된다. 모든 걸 털어 버리자. 처음, 지하에서 나왔을 때처럼.’
장기린은 검선에게 배운 청명경 일천 자를 마음속으로 암송했고, 그러자 잠시 살기와 번뇌로 들끓던 그의 눈빛이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히히힝―!
수레에 묶여 있던 짐말이 한차례 울음을 터뜨렸다.
말 울음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고요한 밤.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장기린의 뒷모습에선 청정한 도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동이 터올 무렵이면 장기린과 적룡기마대의 간부들은 진영의 중심에 모여 회의를 한다. 진군을 하기 직전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해 두고 병사들의 상태와 훈련 진행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고?”
장기린은 처음에 그 말을 꺼낸 부운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예, 대형.”
“어떤 문제……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나. 무림맹 사절단 때문이겠지?”
“……예.”
장기린은 무림맹 사절단이 우르르 몰려드는 흑도 무인들을 피해 그들에게로 도망쳐 왔다는 것을 이미 보고로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뭔가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냄새를 맡았던 장기린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에 올라온 첫 보고엔 어김없이 그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밤중에 병사들이 주변을 정찰하다가 작은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엔 단순한 말다툼이었는데 시비가 커져서 싸움이 있었고, 병사들 십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내가 맞춰 볼까? 화산파였지?”
“예.”
듣기만 해도 다혈질에 폭급한 성격이 느껴지는 사건이다. 굳이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사건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상상이 되었다.
부운화가 대답하자마자 진구가 벌떡 일어나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큰형! 그 사람들 좀 이상하다고요! 내가 이야기 들어 보니까 별로 잘못한 것도 없던데,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부상당한 병사들이 진구의 소대였나?”
“네!! 정찰대는 다 제 소관이니까요!”
진구는 원래 자신의 것에 애착이 많은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십여 명이나 부상을 당한 게 억울한지 눈빛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톡. 톡.
장기린은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말다툼이 시작이라고 했지? 싸움의 원인이 뭐였지?”
“그게…… 그 사람들이 모닥불을 세 개나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제 병사들이 안 그래도 부대랑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이렇게 모닥불을 세 개나 피워 놓으면 눈에 띈다고…… 습격당할 수도 있으니 하나만 피워 놓으라고 했대요.”
“저쪽은 상관하지 말라면서 화를 냈고?”
“네! 바로 그거예요!”
진구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겠느냐며 가슴을 두드렸다.
마치 그 자리에서 함께 억울한 일을 당한 병사라도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겠지?”
“네?”
장기린은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게는 허실을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 굳이 저쪽 편을 들려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장기린은 이쪽에도 과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정찰병들이 정찰해야 할 범위가 넓어진 이유가 무림맹 사절단이 찾아왔기 때문이야. 맞지?”
“……네. 그 사람들 때문에 이상한 자들이 많이 기웃거리게 됐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경계 범위가 넓어졌어요.”
“병사들이 그에 대해 불만이 없었을 리가 없어. 갑자기 일거리가 늘어났는데 좋아할 리가 없지. 거기다가 모닥불을 세 개나 피워 놓은 장면을 보니까 마침 잘 걸렸다 싶어서 시비를 걸었을 거고.”
“그, 그렇지만……!!”
“저쪽이 잘했다는 건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든 이쪽의 병사들을 때려눕힌 것은 우리를 우습게 본 처사다. 하지만 이쪽에서 시비를 건 게 먼저라면, 그건 이쪽이 수하 관리를 못한 탓이기도 하지.”
“……!!”
진구는 얼굴이 벌게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장기린은 그런 진구를 지그시 바라봤다.
원래 자식은 부모를 닮듯,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을 닮는 법이었다.
진구가 훈련시키고 있는 병사들은 진구를 닮았을 것이다. 호탕하고, 쾌활하고, 힘이 넘치고, 전투적인.
그런 성격을 지닌 병사들이니 평소에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무림맹의 사절단들이 얼마나 고깝게 보였을까.
그런 삐딱한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시비가 이렇게 커졌을 터였다.
“운화.”
“예, 대형.”
“병사들은 얼마나 다쳤지?”
“타박상에 골절 정도입니다.”
“신체의 일부가 잘리거나 불구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나으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걸을 수는 있나?”
“예. 하루 이틀만 정양하면 걷고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장기린은 진구에게 가라앉은 시선을 보냈다. 진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구, 내가 분명히 그들과는 상대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얼마 안 있다가 떠나갈 사람들이니 없는 사람처럼 대하라고. 그렇게 말했을 텐데?”
“죄, 죄송해요, 큰형.”
“수하의 잘못은 주군의 잘못이기도 하지. 네 수하들의 잘못은 너의 잘못이고, 너의 잘못은 곧 내 잘못이라는 뜻이야.”
“…….”
“억울한 마음이 들겠지만, 이번 일엔 분명히 이쪽 과실도 있다. 일방적으로 따지기엔 모양새가 안 좋아. 저쪽이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비를 걸었다는 건 싸우자고 머리를 들이민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함께 자리하고 있던 추룡, 대석, 섭우생.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머리로는 장기린의 말이 백번 옳다고 납득하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부대의 병사들이 얻어맞았다는 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음?”
“흐음?”
바로 그때, 한데 모여 있던 적룡기마대 간부들의 귀에 사뿐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녘의 어스름한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병사들 사이를 사뿐사뿐 걸어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여인.
화사한 노란색 테가 둘러져 있는 흰색 비단 무복을 입고 얼굴엔 차분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북극성처럼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지다화 모용소희.
그녀는 곧바로 장기린의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또 안 좋은 일로 찾아뵙게 되었네요.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는 이미 안면이 있는 부운화에게조차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장기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하시오.”
“음, 옆에 계신 분들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알겠어요. 그냥 여기서 말할게요.”
“…….”
“밤중에 있었던 일은 들으셨죠?”
“들었소.”
모용소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취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든 간에 병사들을 상하게 한 것은 이쪽이 자제하지 못한 탓. 저희 사절단원이 행한 무례와 잘못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
“사과. 받아 주지 않으실 건가요?”
당당함 속에 진지함이 있고, 진지함 속에 장난스런 애교가 있다.
모용소희는 여전히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할게요.”
“이쪽의 과실도 있다고 들었소. 병사들이 무례했던 점을 나도 사과하겠소.”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허리까진 굽히지 않았지만 상당한 예다.
모용소희 역시도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뇨. 어쨌든 무공을 익히지 못한 병사들을 상대로 저희가 과했어요. 저희의 실책입니다.”
“아니오.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만약 병사들이 아니라 내 동생들이 상대였다면 무림맹 사절단이 다치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나 역시도 수하를 관리하지 못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
모용소희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그런…… 가요?”
“그렇소. 그러니 이번 일은 서로의 잘못으로 치고 없던 걸로 하는 것이 좋겠소.”
“…….”
그녀는 장기린과의 첫 만남에서 마치 관리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던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장기린은 절대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도 큰일로 번지지 않아서 운이 좋다는 건지, 아니면 상대가 자신의 동생들이 아니라 운이 좋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도록 교묘한 언변을 구사하지 않는가.
‘이 남자…… 세력 싸움이나 기 싸움에 능해!’
실제로 그 동생들이 구대문파 최고의 후기지수들만큼이나 강한지는 둘째치더라도, 장기린의 이러한 언변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었다.
모용소희는 장기린의 정체에 대해 한층 더 궁금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다가 불쑥 무림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일까?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동생’이라는 사람들은 또 뭐고?
이들은 정확히 어느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다만…….”
장기린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내 수하를 상처 입히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이번뿐일 것이오. 다음번에도 만약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장기린의 새카만 눈동자가 깊고도 깊은 빛을 발했다.
“그때는 이번처럼 쉽게 넘어가진 않겠소.”
화아악―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막대한 양의 존재감이 그 영역을 넓혔다.
흘러넘치고, 흘러넘쳐서…….
결국 주변을 가득 채우고 만다.
“아아…….”
자연, 그 자체를 마주한 것 같은 경이로움도 잠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던 모용소희는 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듯, 어느 순간 주변을 압도하던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탁 트인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이 허탈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떠도, 눈앞에 남은 것은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장기린이라는 한 사람뿐이었다.
‘이게 대체……?’
모용소희는 전율했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그녀는 무극의 경지에 이른 존재감을 직접 체감했던 것이다.
‘아버님과 동급…… 아니, 그 이상……!’
한 지역의 패주를 차지하고 천하를 논하는 그녀의 아버지, 당당히 육대세가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모용세가의 가주보다도 더욱 강대한 힘을 느낀 모용소희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그동안 반신반의하고 있던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기린.
무쌍귀라고 불리는 그는 이미 천하를 논할 만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 ☆ ☆
쥐는 어느 곳에나 있다.
항상 어두운 곳에만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생물이 살아가는 모든 지역에는 쥐가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떤 환경도 쥐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대륙 곳곳.
심지어 인간이 살기 힘든 오지에서조차 종류만 조금 다를 뿐, 많은 수의 쥐가 살고 있다.
쥐는 식량의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육식에 가깝지만, 그래도 배가 고플 때는 나무줄기나 풀잎도 먹을 수 있는 잡식성이고, 적은 음식으로 오랜 시간 버티며 움직일 수 있는 생존력을 가지고 있다.
포식자냐, 피식자냐를 따진다면 피식자에 가깝다.
고양이, 들개, 솔개나 올빼미 같은 맹금류.
야생의 세계에선 보편화된 식량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대부분의 중소형 육식동물들이 모두 쥐를 잡아먹는다. 그런데도 쥐가 대륙 어느 곳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극대화된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쥐는 태어난 뒤에 다 자라서 번식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는다. 새끼를 밴 쥐 한 마리가 집 안에 들어오면 불과 석 달 만에 백여 마리로 증식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위기에서의 탈출 능력도 뛰어나다.
겉으로 보기엔 주먹만 한 크기라도, 척추가 유연하고 몸에 탄력이 있어서 손가락 두 개나 될까 말까 한 틈바구니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것이 쥐인 것이다.
극대화된 생명력과 빠른 도주 능력.
그 두 가지야말로 쥐의 생존력을 만들어 주는 무기인 것이다.
하남 지역에 혈서검마(血鼠劍魔)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온갖 종류의 청부를 받아서 그 일을 해결하고 살아가는 낭인이었는데, 어떤 더러운 일도 가격만 맞으면 맡아서 해결하는 악종 중의 악종이었다.
살인, 강간, 약탈.
어떤 것이든 가리는 것이 없다.
불쌍한 화전민촌에 쳐들어가 어린아이들을 학살하는 일이라도 가격만 잘 쳐주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혈서검마였다.
무공 수준은 절정의 끝자락.
대문파에서도 고수의 반열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원래는 단순한 시정잡배였으나, 이름이 알려질수록 오래 살기 힘든 흑도 바닥에서 물경 이십 년이 넘게 이름을 떨치며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이 그에게 그런 강함을 안겨 주었다.
그가 강해진 원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임무 중에 뛰어난 고수의 비급을 우연히 얻었다느니, 틈틈이 번 돈으로 무공을 사서 배웠다느니…….
하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소문은 소림사의 무공을 훔쳤다는 것이다.
대체 어쩌다 소림사의 무공이 악종 중의 악종에게 흘러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실제로 혈서검마의 검법은 소림사의 절기인 대원도법(大元刀法)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 때문에 소림사에서 나한승들을 파견했으나, 지하 굴에 숨어 일 년간 쥐만 잡아먹으며 버텨서 결국 소림도 손을 털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무림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그 일 이후로 그는 혈서라는 별호를 얻었다.
피 혈(血)에 쥐 서(鼠).
피가 묻은 쥐라는 뜻이다.
일 년간 쥐를 잡아먹으며 생활한 부작용일까.
혈서검마는 그 일이 있은 뒤로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문둥병 환자마냥 피부의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고, 입이 툭 튀어나오면서 얼굴형이 뾰족해졌으며, 더러워 보이는 수염이 얼굴 전체에서 나기 시작했다.
별호 그대로 쥐와 같은 외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로 혈서검마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
검은 천으로 둘둘 감았음에도 드러나는 뾰족한 얼굴형, 세모꼴로 쭉 찢어진 눈매만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무공만큼은 점점 강해져서, 이젠 하남성에서도 소림사의 장로 급이 나서지 않는 한 상대하기가 껄끄러울 정도의 거마(巨磨)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런 그가 남경으로 향하는 무림맹의 사절단을 노리게 된 것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한 젊은 무인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을 죽여 주십시오.”
묘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별빛처럼 영롱하면서도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탁하다.
혈서검마는 소림 나한들에게 쫓겨 지하 굴에 숨었던 이래로 가장 큰 위협을 느꼈다. 퇴로만 있었다면 절벽에서 몸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자와는 상종을 해선 안 된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삿갓을 벗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이 사람들을 죽이고 북천맹의 간부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거나.”
“…….”
“어찌하시겠습니까?”
무림십대고수가 찾아오더라도 한 번 싸워나 보자는 생각을 했을 텐데, 삿갓의 사내에겐 그런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쥐는 가장 본능에 충실한 동물 중의 하나다.
혈서검마는 그 순간 그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선택을 했다.
“대인, 대인.”
혈서검마는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 그늘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무림맹 사절단을 노리고 찾아온 흑도 낭인들 중에 손꼽히는 강자 몇 명이 그를 찾아와 쭈뼛거리고 있었다.
“칫, 뭐냐…….”
혈서검마는 코와 입이 연결되어 있는 언청이라 말을 할 때마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게, 저기…….”
“이제 슬슬 무림맹 놈들을 치시는 게 어떨지…….”
“함께 온 자들이 불만이 꽤 쌓여서요…….”
그들이 쭈뼛거리면서 찾아온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그래도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뜻일 것이다.
흑도 낭인들 이백여 명이 모여들었을 때 혈서검마는 먼저 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아직 실력이 변변찮은 낭인들 눈에는 애송이 스무 명 정도는 개미를 손으로 눌러 죽이는 것만큼이나 쉬워 보였고, 그들은 결국 혈서검마의 말을 무시한 채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무려 반수나 당해 버리는 대패를 당하고 돌아왔다.
“왜? 이번에도…… 칫, 그냥 무시하고 가 보지? 칫.”
안 그래도 쭈뼛거리던 사내들의 몸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이번에는 대인의 말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무조건!”
혈서검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아직 안 돼. 칫, 좀 더 기다려라.”
사내들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감시는 계속해라. 칫,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칫.”
혈서검마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삿갓사내로부터 들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되새겼다.
“아마, 일반적인 흑도 낭인들로는 무리일 겁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는 것도 아니니 퇴로를 확실히 막을 수 있는 오백이 모이지 않는 한 절대로 먼저 공격하지 마십시오. 무림맹 사절단은 대문파가 전력을 다해 키워 낸 정예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잡으려면…… 낭인들 말고 다른 도구가 필요합니다.”
‘살수들이 타격을 준 뒤에 기회를 노려라…… 였나?’
혈서검마는 북천맹 삼호법 중 하나라던 삿갓사내의 말을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새겼다.
‘그나저나 그런 놈이 셋, 아니, 맹주까지 생각하면 넷이나 된다니…… 굉장하군. 북천맹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혈서검마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조용히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사냥을 할 시간이 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만 했다.
☆ ☆ ☆
“젠장, 기분이 더럽군.”
화산파의 기대주.
오매검협 육모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왔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였으나, 상당히 어두침침한 곳까지 나왔음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최근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북천맹 놈들.
차라리 화끈하게 덤벼 올 것이지, 계속해서 멀찍이 떨어진 채 시선만 깔짝깔짝 보내오는데, 웬만해서 참는 걸 못하는 육모담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눈앞에 보였다면 바로 매화검으로 베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비겁하게도 절대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산파 비전의 암향표를 극성으로 전개한다고 해도 놓칠 수밖에 없는 거리에서 은밀히 시선을 보내오는 게 전부였다.
‘그딴 게 더 화가 난단 말이다!’
육모담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의를 애써 억누르며, 멀리서는 볼 수 없을 어두운 곳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커다란 전나무 두 개가 연이어서 자라고 있는 곳이다.
전나무와 전나무 사이에 서서 일을 보면…… 아무리 눈이 좋은 놈도 절대로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소변을 보기엔 이 이상 좋은 자리도 없을 듯했다.
“아아, 좋구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서 해방된데다, 꽤나 오랜시간 억누르고 있었던 배출의 욕구를 해소하자 잔뜩 예민해져 있던 그의 신경도 어느 정도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는 노곤한 얼굴로 그동안 쌓인 불만을 혼자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를 이곳으로 보낸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사부인 천백강이었고, 그 뒤론 고작 병사 몇 명을 때려눕혔다고 학을 떼며 다그치던 모용소희였다.
“그깟 병사 놈들 몇 명 때려눕힌 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관군도 아니고 의용병이나 마찬가진데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쯧, 얼굴은 정말 예쁜데, 성격이 너무 드세단 말이야.”
그가 무림맹 사절단에 따라오게 된 것도 팔 할은 모용소희 때문이었는데, 계속해서 배척을 받다 보니 최근엔 마음이 변하려 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잘해 줄 때는 너무 좋지만……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따박따박 따질 때는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문득문득 있었다.
“젠장, 확 섬서로 돌아가 버릴까?”
화산파가 위치한 섬서 땅엔 그를 신처럼 떠받들어 주는 장소가 적어도 십 단위를 넘는다. 그는 화산파 제일의 기대주인만큼 화려한 장소에서 많은 여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왜 굳이 이런 척박한 곳에서 험한 꼴을 보이며 지내야 하는지, 육모담은 솔직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모용소희 때문에 참는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돌아가고도 남았을…….”
쒸이이익―!
육모담은 경악했다. 아무런 기척도 못 느끼던 곳. 지독하게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것도 소변을 보느라 양손이 하반신에 묶여 있는 그 순간에 머리를 쪼갤 듯이 검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찌이익―!
“큭……!”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젖혀서 치명상은 피했으나, 왼쪽 목덜미부터 어깨까지를 비스듬히 긋는 상처가 생겨나고 말았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피가 옷을 축축하게 적실 만큼은 되었다.
육모담은 양손을 하반신에서 떼어 내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 때문에 국부가 여과없이 드러났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목숨이 위험하다.
방심에서 시작된 암습을 허용한 뒤로 계속해서 연이어 날아오는 검격은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아앙!!
“차핫!”
육모담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황망한 상태에서 내지른 주먹이지만 그 안엔 매화권(梅花拳)과 천응조(天鷹爪)의 묘리가 자연스레 녹아 있어서 살수의 검격을 쳐 내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혈질에 싸움을 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육모담이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이기에 더더욱 강한 재능을 필요로 했다.
구대문파의 수위를 다퉈 온 화산파에서 육모담을 대제자이자 후기지수로 삼은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육모담은 화산의 무학을 하나로 녹여 낼 수 있는 인재.
그의 손으로부터 난화수(亂花手)와 매화오품지(梅花五品指) 같은 무공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며 상대를 압박해 갔다.
따앙! 따다당! 퍼어엉!
날아오는 검격을 매화권으로 쳐 낸 뒤, 되돌아가려는 검끝을 난화수로 화려하게 감싸 안는다. 그리고 암향표를 전개해 잠시 주춤하는 상대를 쫓아가 사방에 산화무영수(散花無影手)의 꽃잎을 흩뿌리는 것이다.
육모담의 양손 그림자가 퇴로를 차단하자, 암습을 가한 상대는 당황하며 잠시 갈 길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잡았구나!”
육모담은 호탕하게 외쳤다.
그가 비틀거리는 암습자를 향해 한층 기세를 끌어 올려 압박하려는 순간, 갑자기 등 뒤의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푸화아악―!
“크악……!!”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날아온 공격이었다.
등 뒤의 사각지대.
땅을 뒤집어엎는 것처럼 바닥에서 솟구치며 날아온 일격이다.
‘설마 하나가 더 있을 줄이야!!’
육모담은 다 잡아 가던 살수를 놓친 채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지 못하고 앞으로 굴렀다.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고통과 함께 목구멍을 통해 비릿한 쇠맛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등 뒤.
척추 인근을 비스듬하게 그어 낸 상처다.
육모담은 입속에 들어온 흙을 퉤! 하고 뱉어 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 윽……!”
몸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허리 부근에서 극통이 느껴졌다.
신경이나 감각이 다치진 않았으나, 근육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어떠한 움직임도 무리. 한참 동안 한곳에서 요양하지 않으면 회복되기 힘들 중상이었다.
“이, 이놈들……!”
스릉―
육모담은 그제야 검을 빼 들 틈을 찾을 수 있었으나, 검을 쥔 양손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불시에 입은 상처가 너무 컸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겨우 살수 두 명에게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육모담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육 소협! 무슨 일이 있나요!”
바로 그때, 마치 하늘의 구원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맑고 영롱하면서도 기품을 간직한 목소리.
그가 좋아하는 지다화 모용소희였다. 게다가 그녀 혼자만이 아닌 듯 화산파 무인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사형? 사형! 무슨 일입니까!”
가까이 와서 이변을 눈치챈 화산파 무인들도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살수 두 사람은 아쉬운 듯 머뭇거렸으나,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화산의 무인들이 도착한 것과 육모담이 바닥에 무릎을 꿍, 하고 꿇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살수들이 사라지자마자 긴장이 풀린 육모담이 주저앉고 만 것이다.
“사형!”
화산파 매검당의 무인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육모담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살수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노려보았다.
“젠장……!”
그리고 육모담은 의식을 잃었다.
☆ ☆ ☆
그와 같은 시각. 장기린은 부운화와 함께 행군로를 가로막은 거대한 통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행군할 경로를 미리 점검하던 정찰병들이 발견한 것이었는데, 인근에서 자생하는 나무들을 무작위로 베어서 길을 넓게 틀어막아 버린 모양새였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일부러 한 거겠지?”
“예,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행군을 하려면 꼼짝없이 이 통나무들을 치워야 하게 생겼군.”
장기린은 길을 틀어막고 있는 통나무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적게 잡아도 오십 개.
물론 그들에겐 삼천 명의 병사들이 있으니 치우는 거야 어렵지 않을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과 힘을 쓸데없이 소모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은 없지?”
“예. 굳이 방법을 찾자면 숲 쪽으로 우회하는 것인데…… 흩어져서 지나가야 하는 그쪽 길을 택하는 것보다는 통나무를 치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동감이다.”
장기린은 병사들에게 통나무를 치우도록 지시를 내린 뒤, 부운화에게도 밀명을 전달했다.
“진구에게 부탁해서 정찰을 해 봐. 이런 짓을 한 놈들이 누군지. 분명히 근처에 흔적이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부운화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장기린은 팔짱을 낀 채 병사들 오백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통나무를 치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북천맹이긴 할 텐데…… 도대체 어떤 놈이냐? 원하는 게 뭐지?’
장기린의 시선이 통나무들 너머를 향했다.
그곳에서 이쪽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을 의문의 적을 떠올리며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고 있었다.
☆ ☆ ☆
통나무들을 다 치우고 다시 행군을 재개할 때 즈음, 장기린은 급히 찾아온 모용소희에게서 육모담이 암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암습자는 둘.
육모담이 당한 걸로 봐선 최소한 일류 이상의 고급 살수라는 정보였다.
현재 육모담은 등허리가 베여 쉽게 몸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같은 화산파 동문들의 들것에 실려서 움직이는 중이라고 했다.
‘살수가 습격을 하고, 통나무로 길을 가로막는다. 두 가지 일이 하루 만에 동시에 일어났으니 같은 자의 소행일 테지.’
고개를 돌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섭우생과 부운화를 보자, 두 사람 다 장기린과 생각이 일치하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대열의 앞쪽에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이다! 적이다!”
“산적입니다! 숫자는 오십!”
장기린은 병사들이 소리치고 있는 전열로 다가갔다.
길은 서서히 좁아져서 협곡을 통과하는 애로(隘路)에 접어들고 있었다. 좁다고는 하나 한 번에 삼십여 명이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이기에 행군을 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로의 양옆으로 늘어선 협곡 위에 오십여 명의 산적들이 늘어서 있었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사냥꾼들이 쓰는 듯한 목궁을 들고 있는 그들은 멀리서 봐도 확연히 보일 만큼 잔뜩 긴장한 채 굳어져 있었다.
‘고작 오십 명으로, 게다가 저렇게 긴장할 거면 왜 나온 거지?’
조용히 잠자코 있었다면 장기린과 병사들이 산적들을 굳이 찾아서 토벌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왔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앞으로 나서 있는 모습에서 장기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장기린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부운화와 섭우생도, 얼떨결에 함께 있게 된 모용소희도 다들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 대장이 나와라!!”
산적 두목으로 보이는 호한의 목소리는 제법 우렁찼으나, 그 속에는 맥이 빠질 만큼 패기가 없었다.
누가 봐도 겁을 먹은 듯한 모습에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니 잠시 긴장해 있던 전열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야유가 터져 나왔다.
“네들이 뭔데 대장님을 나오라 하는 거냐!”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제정신이 아니구만! 산적 따위가 어디서 나서는 거야!”
우우우―
병사들이 야유를 보내자 산적 두목은 더더욱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자, 장난하는 게 아니다! 빨리 대장을 불러라!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산적 두목의 얼굴은 뭔가 모르게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글쎄, 산적을 만나러 나올 대장님은 없다니까!”
“빨리 꺼져! 안 꺼지면 산채까지 다 불태워 버린다!!”
산적 두목은 그 말에 안색이 허옇게 질렸으나, 그럼에도 끈질기게 외쳤다.
“빠, 빨리 대장을 불러라! 중요한 일이다! 너희들이 모두 전멸당할 수도 있다!”
전멸.
그 과격한 단어에 전열에서 야유를 퍼붓던 병사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뭐라는 거냐, 저놈이?”
“전멸이라고? 진짜 미친놈인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있을 수조차 없는 일.
마침내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분노하게 된 병사들이 눈에서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운화, 우생.”
“예, 대형.”
“네, 말씀하십시오.”
부운화와 섭우생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해, 저거?”
“뭔가 내막이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스스로의 뜻으로 나온 것 같진 않아.”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앞으로 나섰다.
“진구와 추룡을 불러.”
“옛!”
섭우생은 곧바로 대답하고 뒤쪽으로 말을 몰아 뛰어갔다.
후미의 대열을 관리하고 있던 진구와 추룡은 반 각도 되기 전에 장기린 앞으로 뛰어왔다. 장기린이 부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일을 다 제쳐 놓고 뛰어와서 그렇다.
“추룡, 진구.”
“예, 대형.”
“네, 큰형!”
두 사람은 오는 동안 섭우생으로부터 대충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여전히 대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는 산적 두목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저놈, 잡아와라.”
“예!”
“아싸! 갑니다아―!!”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구가 먼저 튀어나가고, 그다음엔 추룡이 질 수 없다는 듯이 앞으로 쏘아졌다.
싸움을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사람의 출격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협곡 위를 향해 말을 내달리는 두 사람.
얼떨결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모용소희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놀라 봉목을 크게 떴다.
하늘에 살던 적룡이 땅에 내려앉듯.
적룡기마대의 본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경사가 상당한 협곡을 말을 타고 질주해 오십여 명의 산적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리고 산적 두목을 잡아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일각.
놀라운 실력을 보여 준 두 사람은 차 한 잔이 식기도 전에 다시 장기린의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