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四章 ― 내자불선(來者不善)
산적 두목이 벌벌 떨면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에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화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그, 그렇습니다, 대인! 아니, 대협! 그런데 그놈들이 저희 산채에도 화탄을 설치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크흑, 나서지 않으면 저희를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터라 저희로선 방법이……!”
산적 두목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마치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민처럼 절절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운화, 어떻게 생각해?”
“……만약 정말로 애로에 화탄이 설치되어 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사들을 데리고 지나가는 사이 폭발해서 산사태라도 일어난다면 그 피해는 막심할 것입니다.”
장기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지만 정말로 화탄이 묻혀 있다는 보장은 없지.”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협곡을 무너뜨릴 정도로 많은 화탄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거짓된 정보일 확률이 더 높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아가기엔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그렇긴 하지. 만약 돌아간다면 방법은 있어?”
“마지막 갈림길로 돌아가서 대로 쪽으로 향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사흘은 더 지체되는데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운화는 미리 생각해 본 문제인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엔 부대의 두뇌인 섭우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생, 너는 어떻게 생각해?”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나의 실수가 대계를 망칠 수도 있는 법이니 가능하면 안전한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만, 일단은 그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촤악―!
섭우생의 철섭선이 펼쳐졌다.
“그게 뭔데?”
“대형, 제가 잠시 산적들의 산채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산채에? 아, 그렇군. 좋아, 다녀오도록 해.”
장기린은 섭우생의 속뜻을 짐작하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형님께선 폭약을 설치했다는 그 ‘괴한’에 대해 좀 알아봐 주시는 게 어떨지요?”
“알았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섭우생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산적들 중 한 명을 자신의 등 뒤에 태운 채 말을 달려 숲 쪽으로 사라져 갔다.
“……몇 가지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산적 두목 앞으로 나선 부운화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 말씀하십시오.”
산적 두목은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을 찾아온 자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 젊은 자였습니다. 피부는 까무잡잡했고, 말투는 평범한데…… 뭐랄까, 기묘한 느낌이 들고…… 저기, 듣고만 있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목소리랄까…….”
그 순간, 부운화와 장기린의 눈빛이 동시에 번뜩였다.
“혹시 삿갓을 쓰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 예! 예! 그랬습니다. 어, 어떻게 아십니까?”
“……뭐,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혼자 왔습니까?”
“아, 아니요. 험상궂은 인상의 사람들 십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삿갓을 쓴 사람은 곧바로 말을 타고 돌아가 버리고, 나머지 사람들만 산채에 남아 뭔가를 파묻었습니다.”
산적 두목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기억을 끄집어냈다.
마치 그것만이 지금의 괴로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아직 안 돌아갔습니까?”
“아뇨. 바, 반나절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그게 어제입니다.”
“어제라…… 그런데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파묻은 걸 도로 꺼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함부로 꺼내면 폭발할 거라고…… 시험 삼아 보여 주겠다면서 한 명한테 땅을 파 보라고 했는데, 곧바로 폭발해서 그놈이 죽어 버렸습니다.”
산적 두목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몸을 움찔 떨었다.
“천둥벼락이 치는 듯했습니다. 그런 게 애로에 묻혀있으면 분명히 산사태가 일어날 겁니다.”
“…….”
산적 두목은 그 뒤에도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지만, 그 이상 쓸모있는 내용은 없었다.
“대단한 한 수로군.”
“그렇습니다. 이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군요.”
장기린과 부운화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과연 하시르다’라는 말이 입천장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옆에서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외부인의 시선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가짜예요.”
똘망똘망한 시선을 가진 여인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렇게 단언했다.
“애로를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을 내려면 화탄이 적어도 백 관 이상 있어야 해요. 그걸 사려면 황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시나요? 그런데 그 비싼 화약을 협곡에 설치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산채에까지 설치한다구요? 화약이 남아도나요?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네요.”
지다화 모용소희는 이미 매설된 화약이 가짜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추측만으로 돌파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부운화가 우려를 보였으나 모용소희는 그마저도 가치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에요. 게다가 그만한 화약을 투자했다면 그 작전은 아무도 모르게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해요. 그래야 천금을 들인 화약이 아깝지 않죠.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했죠? 산적들을 이용해서 오히려 협곡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다는 정보를 전해 줬어요. 왜 그랬을까요? 만약 그랬다가 이쪽에서 행군 경로를 바꿔 버리면요? 그럼 협곡에 설치한 화약은 그야말로 땅에 묻어 버린 셈이 된다구요. 전혀 쓸모없는 일에 황금을 써 버린 격이에요.”
모용소희의 말은 정확히 핵심을 짚고 있었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타당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즉, 저쪽의 의도는 간단해요. 거짓된 정보로 이쪽의 발을 묶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 이쪽의 일정을 늦추는 게 목적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
“저 협곡은 그냥 통과해도 돼요. 제가 보증할게요.”
지다화의 보증이라면 그게 사실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장기린도, 부운화도 그녀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시르.
북쪽 초원에서 이름을 떨친 책사가 이곳에 손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리 간단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시르의 책략은 일반적인 상식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기괴한 무언가가 있었다.
비단 머리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쪽으로 당연히 가야 할 상황에 동쪽으로 펄쩍 뛰어간다든지, 격렬한 싸움 도중에 갑자기 임시 화평을 맺으러 찾아온다든지 하는 예측불허의 행동을 구사하는 것이 바로 하시르였다.
명 제국 최고의 두뇌라는 현백도, 머릿속에 일만 가지 책략을 넣어 두고 있다는 섭우생도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하시르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극히 상식적인 모용소희의 지적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두 사람의 본심이었던 것이다.
“제 말이…… 안 믿기시나요?”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의 망설임을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느낀 듯, 모용소희의 눈빛은 조금 샐쭉해져 있었다.
“그런 게 아니오. 다만…… 산채로 간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 결과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순서상 옳은 일 같소.”
“……그래요, 그렇네요. 하지만 분명히 제 말이 맞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모용소희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폈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모습이다.
사절단의 다른 자들보다는 확실히 낫지만…… 그녀 역시도 아직은 많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테지. 적어도 상대를 인정할 줄은 아는 여인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오만무도한 다른 사절단의 인물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장기린이 그렇게 모용소희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이, 누군가가 장기린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파라락―
소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온다.
빠른 속도.
경신술의 공부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자였다.
순간적으로 후미로 돌아간 진구가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푸른빛의 도포를 입은 무당파의 인물이었다.
“흐음.”
장기린이 옆에 서 있는 부운화를 힐끗 쳐다봤지만, 부운화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다.
“모용 소저!”
무당파의 인물은 곧바로 모용소희에게로 달려와 입을 열었다.
“큰일입니다! 사절단이 함정에 빠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혈서검마, 혈서검마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 살수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당한데다, 흑도 무인들이 시비를 걸었을 때 모용 공자께서 육 소협의 원수를 갚겠다며 나섰다가…… 그만,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오라버니가요?”
“예!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싼 흑도 낭인들에게 포위되어 퇴로가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용소희는 그 말을 듣자 정말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자존심 강한 무당의 오검이 도움을 요청한다.
그 정도라면 사태는 정말로 심각할 터였다.
“대형.”
“……돕고 싶어?”
“예. 발길을 끊은 지 오래라고는 하나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사문.
무당은 부운화에게 있어서 사문이다.
비록 친분도 없고 아직 어색하기만 한 사이라도, 같은 무당파의 출신인 이상 위험하게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발길을 끊었다뇨? 혹시 저희 사절단 중 한 곳과 인연이 있으세요?”
모용소희의 눈빛이 반짝거리며 질문을 던진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허투루 놓치는 경우가 없는 여인이다.
부운화는 그에 대꾸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장기린만을 응시하며 결정을 기다렸다.
“함께 간다.”
장기린의 결정은 부운화의 예상대로였다.
“대형,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아니, 숫자가 많다면 혼자선 힘들 테지. 적룡기마대나 병사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둘이서 처리한다.”
“……예, 알겠습니다.”
“추룡과 대석을 불러. 두 사람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우리 둘이 나서는 게 좋겠어.”
“예, 대형.”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한 뒤 각자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무당의 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단 두 사람이 뭘 하겠다는 건가.
지금 그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살수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당한데다 백 명이 넘는 흑도 낭인들한테 포위당해서 퇴로가 막힌 총체적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겨우 두 사람의 도움이라면, 그런 도움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이보십시오. 제가 도움을 요청드린 건 두 분의 도움이 아니라 병사들의…….”
“아뇨, 도사님. 됐어요. 저 두 분이면 충분해요.”
“모용 소저……?”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이 일은 무사히 해결이 될 테니까.”
모용소희의 말에 무당의 검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다화가 하는 말이 틀린 적은 없다.
이번에도 그저 믿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일.
한편, 모용소희는 두 사람의 진짜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장기린이 내뿜던 절대적인 존재감의 일부를 직접 느낀 적이 있었다.
모용세가의 가주 이상.
소문대로 무림십대고수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이젠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가시죠.”
양 허리엔 한 쌍의 장군검을 차고, 무릎과 팔꿈치에 각반을 댄 전투적인 차림으로 부운화가 말했다. 그 옆을 보자 장기린은 평소 복장 그대로에 이상한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을 거야, 이들이라면.’
모용소희는 기이한 기대로 부푸는 가슴을 안고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 ☆ ☆
채애앵! 푸쉭―
“큭……!”
모용소진은 휘두르던 검을 놓치고는 황급히 손목에 난 상처를 왼손으로 지혈하며 뒤로 물러섰다.
혈관이라도 건드렸는지 피가 흐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안 그래도 초반에 살수에게 당한 상처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렸는데, 지금 또 한 번 적지 않은 출혈을 하게 되자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칫칫칫.”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는 모용소진의 앞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새카만 천으로 칭칭 감았음에도 드러나는 기괴한 생김새의 얼굴형.
쭉 찢어져서 세모꼴이 되어 있는 살벌한 눈매.
모용소진의 상대는 혈서검마였다. 기괴한 생김새나 흑도의 잡배라는 명성은 둘째 치고, 절정의 끝자락에 올라 있는 고수인만큼 모용소진에게는 애초부터 무리인 상대였다.
아무리 모용소진이 정도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라지만 치열한 흑도에서 오랜 시간 버텨 온 거마를 상대하기엔 아직 한참이나 이른 것이다.
그나마 삼십 합이나 버텼으니 실력에 비해 잘했다고 칭찬을 받아 마땅할 정도였다.
“모용세가의 검술도 별거 없구나. 칫, 하남에 있지 말고 요령 쪽으로 나가 볼 것을 그랬어.”
“이노옴……!”
아무리 아직 그의 무공이 부족하더라도 가문이 무시당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평소에 흑도라고 깔보던 상대에게 도리어 무시당하자 모용소진은 크게 분노했다. 방금 검을 들고도 상대가 안 되었다는 것을 잊고 왼 주먹을 힘차게 앞으로 내질렀다.
후우웅―
혈서검마는 허리를 옆으로 쭉 잡아 늘린 듯한 동작으로 주먹을 피해 냈다. 모용소진은 주먹이 빗나간 순간 무게중심을 완전히 오른발로 옮겼다.
그러자 몸이 자연스레 제자리에서 반 바퀴 더 회전하고, 그 회전력을 전부 실어서 다시금 반 바퀴를 회전하며 몸을 띄웠다.
“차핫!!”
허공에 몸을 띄워 발로 걷어차는 원앙각이다.
모용소진으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부터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고,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내지른 왼발은 상대의 사각지대를 파고드는 절묘한 지점을 타점으로 노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혈서검마도 그 왼발은 생각하지 못한 듯 모용소진의 발차기가 혈서검마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툭, 하고.
마치 하늘하늘 떨어진 낙엽이 어깨에 달라붙듯 미세한 감촉과 함께 발끝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통했……!!’
‘다’라고 속으로 말하기도 전에 모용소진은 눈을 부릅뜨고 경악해야만 했다.
혈서검마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뒤통수가 날개뼈에 붙을 정도로 목을 뒤로 꺾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쥐는 유연하게 꺾이는 척추를 이용해 위기를 회피한다.
혈서검마는 이미 쥐의 습성을 스스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모용소진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목을 직각으로 꺾을 수가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이 저 정도로 목을 꺾으면 그 순간 목뼈가 부러지고 기도가 찢어져서 죽는다.
그런데 혈서검마는 저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사람의 상식을 벗어난 자.
그렇기에 지닌바 실력보다 더욱 강한 자가 바로 혈서검마였다.
후우웅―!
모용소진의 발은 혈서검마의 코앞을 불과 반 치만 남겨 둔 채 스쳐 지나갔다.
혈서검마의 움직임은 야생의 짐승 같았다.
발이 코앞을 지나가자마자 뒤로 꺾었던 목을 다시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축이 되는 오른쪽 다리를 뒤쪽으로 퍽! 하고 걷어차 버렸다.
모용소진은 공중에서 세 바퀴나 회전한 뒤 개구리를 집어 던진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큭……!”
신음을 흘리는 모용소진의 목에 혈서검마의 검이 척하니 겨눠졌다.
흑색 천 조각 사이로 세모꼴의 눈동자가 사이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칫칫, 못난 놈이 주제 파악도 못하는구나.”
“이놈…… 죽여라!”
“오냐, 죽여 주지.”
혈서검마는 살인에 대한 저항감이나 도덕심이 전혀 없는 자였다.
휙 들어 올리는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모용소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제 목이 베어지고, 분노한 모용세가는 혈서검마를 원수로 생각하며 끝까지 쫓게 되리라.
“멈추어라!”
채애앵!
그때,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모용소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목을 내려치려던 혈서검마의 장검이 옆에서 뛰어든 누군가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푸른색 도포가 휘날린다.
가벼운 발놀림은 마치 구름을 밟는 듯이 자유롭고, 허공을 수놓는 투박한 송문고검에는 세상만사를 아우르는 태극의 이치가 담겼다.
“명진 도장!”
모용소진이 반가움과 감사함을 담아 외쳤으나, 명진 도장에겐 그 인사에 대꾸해 줄 여유가 없었다.
모용소진의 위기를 보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명진 도장은 옆구리 쪽에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이번 싸움은 지난번과는 달리 위험한 요소 투성이었다.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살수들이 몰래 목숨을 노리고, 우르르 몰려드는 흑도 낭인들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절정고수들도 서너 명이나 존재했다.
아무리 무림맹 사절단이 제각각 문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강해진 후기지수들이라도 절정고수를 상대로는 방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혈서검마라는 적은 쉽게 만날 수 없는 대적이다.
그가 익힌 것이 정말로 소림의 대원도법을 변형시킨 것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지금 모용소진을 바닥에 눕힌 무공은 소문 이상으로 고강했던 것이다.
“네놈은 무당의 말코인가!”
혈서검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곧바로 검을 날려 왔다.
무려 이십 년이나 무림을 종횡한 혈서검마와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명진 도장.
배분이 높을수록 함부로 출수를 꺼리는 것이 상식이건만 혈서검마에겐 그런 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곧바로 노려 오는 부위가 목젖, 아니면 미간이다.
날리는 공격은 모두 지독한 살수뿐.
아직 실전의 경험이 많지 않은 명진 도장으로서는 사량발천근의 묘리가 섞인 태극검으로도 흘려 내기가 버거웠다.
째앵!!
“읏……!”
명진 도장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당의 깊이있는 검술로 우위를 점하려고 해도, 검이 부딪칠 때마다 혈서검마의 막강한 내력이 손목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렇게 충격이 쌓이고 쌓여서 손목이 저릿저릿해지는 순간, 혈서검마의 두 눈이 번쩍 빛나면서 한순간 검의 속도가 빨라졌다.
“치잇―!”
쉬이이익―!
대원도법.
본래 사마를 척결하기 위해 창안된 무공이 혈서검마의 손에서 펼쳐지자 사이한 살기로 충만한 기괴한 검법이 되어 있었다.
무공의 깊이는 그대로, 하지만 살기과 기세만큼은 종전보다 배나 강해진 공격인지라 명진 도장으로서는 일시 상대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채채챙!
“큽……!”
손이 어지러워지고, 명진 도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 번 기세를 잃자 모든 것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제운종의 신법도, 모든 흐름을 잡아 낼 수 있는 사상류검도 맥이 끊겨 펼쳐지지 않았다.
핏―!
결국 어깻죽지에 검상이 새겨지며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명진 도장은 이를 악물었다. 모용소진은 아직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상세가 회복되지 않았다. 무림맹 사절단의 다른 일행들은 제각각 많은 수의 적을 만나 다른 곳에 도움을 줄 여력이 없다.
즉, 지금의 위기는 그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할 수 있을까……?’
명진 도장은 자신만만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겨우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문파에서 아무리 극찬을 받던 기재라도 무림강호에 나오면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한다.
혈서검마라니.
무림십대고수나 구대문파, 육대세가의 명숙들도 아니고, 겨우 흑도에서 이름 좀 날린 마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채채챙!
“큭……!”
명진 도장은 젖먹던 힘을 다해 싸워 보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흑도에서 이미 온갖 사선을 넘어온 절정고수.
지닌바 저력의 크기가 남달랐다.
잠시 위기가 오더라도 여유롭게 흘려보내고, 기괴한 신체 능력과 짐작도 할 수 없는 술수로 우세한 상황을 다시 만들어 냈다.
쩌엉!!
“……!”
피슛―!
명진 도장의 손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모용소진이 당했던 것과 같은 위치, 같은 깊이의 상처다.
생명의 위기까진 아니지만, 깊은 출혈로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까다로운 위치였다.
명진 도장은 자신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웃, 후웃…….”
혈서검마는 숨소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그는 지금 꼴사납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고 있다.
“무당의 말코, 죽어랏……!”
쉬이익―!
대원도법.
커다란 근본을 찾아가는 도법이라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명진 도장은 빠르게 목을 노려오는 공격을 응시하며 이제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뻘건 강기가 혈서검마의 검에 강하게 서려 있었다.
막을 수 없다.
지금 그의 몸 상태와 무공 수준으로는 막을 만한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마음에서부터 싸움을 포기한 명진 도장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 순간,
[검을 들어라! 중단을 겨눠! 소청검(少淸劍)의 일초를 정면에 흩뿌려!]
채애앵!!
“……!!”
명진 도장은 자신도 모르게 기본 중의 기본인 소청검의 일초를 정면으로 흩뿌렸고, 당당하게 목을 노려오던 혈서검마의 검초가 허공에서 가로막히며 위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환청……?’
아마 다시 한 번 전음이 날아오지 않았다면 죽음을 목전에 둔 탓에 들린 환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혈서검마는 크게 분노하고 당황한 상태였다.
당연히 목이 잘릴 거라 생각했던 공격이 허무하게 위로 날아가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그것도 특별한 비기 같은 게 아니라 기본 중의 기본 같은 단순한 검초에 막혔으니 말이다.
“죽엇!!”
다시금 날아오는 혈서검마의 검초는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강맹한 공격이었다.
내리찍는 검격은 마치 도끼질을 하는 듯한 패기와 패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금 어찌 막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명진 도장에게 의문의 전음이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앞으로 반보! 좌궁보! 후에 유운검(流雲劍) 삼초식을 우측으로 차분하게!]
“읏……!”
명진 도장은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이미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전음이 말해 준 내용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반보.
내리찍어 오던 공격의 타점이 미간에서 정수리로 변했다.
거기서 좌궁보.
왼쪽 다리가 일자로 쫙 펴지는 순간, 정수리를 노려오던 공격이 몸에 닿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유운검 삼초식을 차분히.
부드러운 구름을 찌르는 듯한 섬격이 혈서검마의 손목을 노리게 되자 혈서검마는 화들짝 놀라 왼쪽으로 몸을 피했고, 자연스레 이어진 유운검의 삼초식은 마치 그 뒤를 쫓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서 결국 혈서검마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이, 이, 이런……!”
혈서검마는 자신이 뒤로 물러섰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세모꼴의 눈을 부릅 뜨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명진 도장이었다.
그가 익힌 온갖 절기들을 다 쏟아 내도 이길 수 없던 상대인데, 어째서 이런 기본 중의 기본공만으로도 그를 물러서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이해하자면 그것이다.
어떤 무공이든 간에 자세히 살펴보면 특유의 쓸모가 있다는 것.
무공이란 상대의 무공에 맞춰서 가장 적절한 것을 쓰기만 하면 어떤 신공절학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것.
명진 도장은 바로 그 점들을 배웠다.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그 작은 차이가 그가 평생 익혀 온 무공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한 대사건이었다.
파라락―
바로 그 순간, 명진 도장의 눈앞으로 검은색 무복을 입은 잘생긴 청년이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내려앉았다.
잔뜩 긴장해 있던 명진 도장은 뭔가가 떨어지자마자 본능적으로 칼로 베어 버릴 뻔했으나, 간신히 상대가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가 내려설 때의 발놀림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발끝으로 사뿐히 딛는 듯한 몸놀림, 주변의 기류를 타고 흐르는 듯한 발목의 움직임.
뭔가 자신의 것과는 다르지만, 그 연원만큼은 자신의 사문과 같은 종류의 것이 분명했다.
“제운종……?”
그 말에 대답하듯 흑색 무복의 사내는 명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명진, 물러서라.”
“누구…… 시기에?”
“이자와 상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기본으로 돌아가 소청과 태청의 진의부터 다시금 파악해라.”
사문의 어른으로서 말하는 듯한 준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은 명진 도장과 연배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청년인 바, 명진 도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게…… 무슨……?”
더군다나 소청과 태청의 진의라니.
태청검법은 몰라도 소청검법은 무당에 입문한 열 살짜리 꼬마에게도 가르치는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던가.
나름 무당의 기대주로서 승승장구하던 명진은 분명 소청검법을 여덟 살 때 모두 익혔다.
‘나보고 기본부터 다시 배우라는 뜻인가?’
만약 그런 의미라면 크나큰 모욕을 받았다고 해야 할 터.
그런데 명진 도장은 막상 자신을 쳐다보는 흑의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그런 불만을 토해 낼 수가 없었다.
‘뭔가가…… 달라.’
사람으로서의 그릇.
무(武)의 크기가 차원이 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자신에게 전음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사내일 것이다.
그는 기본 검법인 소청검법과 유운검법만으로도 자신이 혈서검마를 막아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아마 본산의 장로님들만큼이나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일 터.
‘게다가…… 생명의 은인이 아니던가.’
명진 도장은 일단 예를 표하며 물러서기로 했다. 그리고 자꾸 보고 있자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마냥 익숙함이 느껴졌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는 명진을 보며 흑의사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은 또 뭐냐?”
혈서검마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갑작스레 나타난 부운화를 응시했다.
그는 또다시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삿갓사내가 그를 찾아왔을 때처럼.
당장에라도 퇴로를 찾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네 적이다.”
“칫, 그걸 말이라고…….”
“운기할 시간을 주면 좋겠는가? 마지막이 될 테니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뭣……!”
흑도의 거마인 혈서검마가 언제 이런 말을 들어봤겠는가.
말의 내용만 보면 오만함을 넘어 자존광대하다고 비웃어야 마땅할 태도건만, 그런데 직접 눈앞에서 상대를 하며 그 말을 들으니 당당한 일세의 영웅처럼 느껴졌다.
‘이놈! 밝은 놈이다……!’
정파를 돕기 위해 나타났으니 이미 짐작은 했지만, 태생적으로 빛이 나는 놈일 게 분명했다.
반대로 혈서검마는 태생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다.
그는 부운화와 같은 자들이 부럽기도 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밉기도 했다.
‘도망치려고 했는데…….’
혈서검마는 마음을 바꿨다.
딱 한 번만.
딱 일격만 섞어 본 다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라고.
“시간을 오래 끌면 네놈이 불리할 텐데? 저 애송이들이 다 죽어도 좋은가 보지?”
“무림맹 사절단 말인가?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나보다 더 막강한 분이 상대해 줄 테니까.”
“뭐……?”
믿기지 않는 말에 대한 놀람도 잠시.
실제로 화약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연신 들려오자 혈서검마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한창 혈전이 벌어지던 외곽 쪽.
소림사와 화산파가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그곳에 긴 지팡이를 든 사내가 나타나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지팡이를 휘두르는데, 일격을 채 받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무기로 받으면 무기가 박살 나고, 육신으로 막으면 육신이 박살 났다.
파죽지세라는 말이 그 이상 어울릴 수가 없다.
혈서검마는 자신이 저걸 막을 수 있을까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운기를 할 건가, 말 건가?”
부운화의 말에 혈서검마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이 몸께서 네놈 따위를 상대하는 데 운기가 필요할 것 같나?”
“그럼 곧바로 하겠는가?”
“물론이다!”
혈서검마는 양손으로 검병을 쥐고 자세를 낮췄다.
이때까지 무림맹 사절단을 상대로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진중한 모습이었다.
진짜로 목숨을 건 싸움은 그리 흔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시야와 숨구멍을 막은 검은 천까지도 벗어 던졌다.
언청이에 피부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뾰족하게 몰린 구강 구조에 기이한 털로 덮여 있는 기괴한 몰골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까진 세상에 숨기려 했던 외모지만, 목숨이 걸린 싸움보다 체면이 중요할 리 없는 것이다.
“치이잇……!”
혈서검마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힘을 모았다.
대원(大元).
신체의 가장 큰 근원을 찾는 것이 그가 익힌 무공의 시작이다.
그는 세간의 추측대로 대원도법을 익혔다.
우연히 괴도(怪盜)라 불리는 노괴를 죽이는 임무를 맡았다가 그의 비밀 창고에서 얻게 된 무공인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래 비급만 가지고 익히는 무공엔 한계가 있는 법이지만, 대원도법이 원래 소림의 무공답지 않게 살기가 과한 무공인 덕분에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고오오오―!
혈서검마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그의 검에서 새빨간 강기가 뾰족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강기가 붉은빛이 얇게 서려져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번엔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게 실체화된 강기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주변의 싸움이 일제히 멈추고 모든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럴 수가……!”
명진 도장의 입에서도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절정의 끝자락에 있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혈서검마가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정도의 강기라면 초절정고수조차도 긴장해야 할 것이다.
만약 혈서검마가 자신을 상대로 처음부터 저런 무공을 사용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일격을 받아 내지 못하고 양단됐을 수도 있었다.
“훔친 무공으로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무공의 재능엔 선악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부운화는 강력한 강기를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인물들이 언제 저 강기가 날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태였다.
“캬아앗―!”
혈서검마가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새빨간 강기가 반월형으로 휘어지며 크게 세 번의 칼질을 했다.
큰 대(大) 자를 닮은 검로.
한데 막상 공격을 막으려고 하자 수평으로 한 번의 검격이 더해져서 원(元) 자를 만들어 낸다.
쉬이이익―!!
강력한 힘이 응축되자 공기가 일그러졌다.
절정고수의 힘이다.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이면 십여 명 이상의 무인이 뭉쳐 있어도 막아 낼 수 없을 터.
스윽!
부운화가 움직인 것은 대원도법을 시전한 혈서검마의 검이 거의 목전에 다가왔을 때였다.
왼발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간다.
오른발은 건실하게 뒤를 받치고, 한 치의 군더더기없이 부드럽게 원을 그린 왼팔이 오른쪽 허리에서 장군검을 뽑아 들었다.
쓰아앙!
발검과 동시에 일격.
유려한 반원을 그린 장군검이 허공을 덮쳐 오는 붉은색 강기의 중심을 후려쳤다.
쩌어어엉!!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의 순간, 부운화의 몸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왼쪽 허리에서 장군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의 왼쪽 발검이 아래쪽에서 솟아오르는 반원을 그렸다면, 이번의 오른쪽 발검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커다란 반원을 그려 냈다.
쓰아앙!!
다시 한 번 공기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유려한 반원을 그려 낸 검로는 허공에 새겨진 붉은색 강기를 산산조각 내며 부수고 지나갔다.
후우웅―
두 가지 동작이었으나 실제로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 두 번의 발검은 동시에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공격의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격타했다는 느낌이었다.
아래쪽 반원과 위쪽 반원.
음과 양.
곤과 건.
두 개가 합쳐지니 완전한 태극이다.
푸화악―!
전력을 다한 필사의 일격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혈서검마는 그 일격의 교환만으로 오른팔이 어깻죽지까지 날아가 버렸다.
핏물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 순간, 혈서검마의 얼굴에 새겨진 표정은 고통이라기보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불신(不信)이었다.
“이럴…… 수가……!”
무림십대고수랑 싸우더라도 오십 합은 능히 싸울 수 있다고 자신했거늘.
그런데 일 초식 만에 부서지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혈서검마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없어진 오른팔에서 극통이 밀려왔다.
혈서검마는 그 순간, 역시 본능이 말해 주던 대로 따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퇴로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은 온통 사지(死地)였다.
정면에서 무시무시할 만큼 고요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청년은 천지 사방을 장악한 듯 빈틈을 절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차분하게 걸어오는데, 사신이 다가오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마냥 공포가 밀려들었다.
저벅저벅.
“치이잇……!”
절제절명의 순간, 혈서검마는 본능의 이끌림으로 회귀했다.
상대는 포식자다. 이길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도망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파아앗!!
혈서검마는 무작정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무둥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오래된 죽은 나무 밑.
썩으면서 텅 비어 버린 공간은 고작 어린아이 하나가 몸을 숨길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혈서검마는 척추를 잡아 늘리고 몸을 우그러뜨리면서까지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 남은 왼팔을 미친 듯이 움직여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둔공(地遯功)이다.
혹시 몰라 익혀 두었고, 과거에 소림승들에게 쫓겨 지하 굴로 숨어들었을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무공이었다.
파파파팟!
혈서검마의 지둔공 성취는 놀라웠다.
한 팔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굴을 만들어 냈다. 왼팔로 흙을 파내고 양다리로 그 흙을 뒤로 밀어낸다.
‘살아날 수 있어!’
그렇기에 혈서검마는 몰랐다.
지금 그의 바로 머리 위에서 사신이 손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이잉―
부운화는 손에 든 장군검의 떨림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그의 바로 한 걸음 앞에는 혈서검마가 파고 들어간 썩은 나무둥치가 있었다. 어찌나 땅을 잘 파는지 벌써 나무둥치 사이로 보려고 해도 혈서검마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심원태극(深苑太極) 일률무상(一律無常) 혜원원유(慧遠遠遊)…….’
부운화는 조용히 진결을 읊으며 단전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거대한 기운을 온몸으로 끌어 올렸다.
태극혜검(太極慧劍)은 만공(晩功)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검에 삼라만상의 이치를 담고 그 무상한 힘을 현실로 재현하는 힘을 가졌다.
양다리를 넓게 벌린 채 부운화의 왼쪽 장군검이 수평으로 이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노인들이 하는 양신공만큼이나 느려 보였지만 그 위력만큼은 상상을 초월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썩은 나무둥치가 깔끔하게 잘려서 베어졌다.
성인 남성 두 사람이 끌어안아도 부족해 보이는 아름드리나무가 한낱 검에 베어졌다는 뜻이다.
쿠구궁―!
베어지는 소리는 예리하고 작았건만, 오히려 잘려 나간 나무둥치가 옆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주변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랬다.
지이잉―!
다시 한 번 울리는 검명(劍鳴).
그리고, 이번엔 수직으로 내려쳐진 검이 나무둥치를 정확하게 절반으로 가르며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사아악―!
가르고, 가르고, 가른다.
눈에 직접 비춰지진 않지만, 부운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땅을 파고 있는 혈서검마의 기척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무둥치를 다 갈라 낸 부운화의 장군검이 땅속을 파고들고…….
“찍……!”
마치 쥐의 비명과도 같은 나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지면 아래는 침묵에 잠겼다.
☆ ☆ ☆
“태극혜검……! 대환검(大幻劍)……!”
부운화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명진 도장은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처음에 혈서검마의 대원도법을 부숴 버린 것은 대환검이었고, 그다음 나무둥치 아래로 숨으려 하던 혈서검마를 마무리한 것은 무당 비전 천하제일의 검술인 태극혜검이었다.
그러니 명진 도장이 어찌 격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극혜검은 물론이고, 대환검 역시 무당의 일부 장로들에게만 전해지는 비전 검술이다.
게다가 익히기 또한 극히 까다로워서 둘 중 하나만 익히는 데도 평생이 걸린다는 절학이거늘.
갑작스레 그의 눈앞에 그 두 가지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는 젊은 검사가 나타난 것이다.
“무당의…… 문인이십니까?”
천천히 장군검을 다시 허리에 착검하고 있는 부운화를 대하는 명진 도장의 태도는 극도의 공경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
“어느 사승을 이으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
침묵이 길어지자 명진은 조심스레 부운화의 눈치를 살폈다.
“태허가 스승님의 도호이시다.”
“태허! 그럼 쌍절진인의……!”
명진 도장의 머릿속에서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문무(文武) 양도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쌍절진인이 과거 태종이 제위에 오를 때 쓴소리를 내뱉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하나뿐인 제자를 전쟁터에 종군시켜야 했다던 일화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쌍절진인이 더 이상 무당의 일에 관여치 않은 것은 제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며, 그 제자는 본래 쌍절진인 이상으로 큰 동량이 될 거라 기대받던 인재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즉, 명진 도장 이전의 후기지수였다는 소리다.
그 제자의 이름은 바로…….
“운현 사숙……!”
부운화는 복잡한 눈빛이 되어 버렸다.
근 십 년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다.
사문에 들렀을 때도 사부인 태허 진인만 살짝 만나고 나왔기에 몰랐지만, 이렇게 ‘사숙’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곳에 소속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사숙께서 이렇게 젊은 분인 줄 몰랐기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명진 도장의 얼굴에선 당혹과 반가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괜찮다. 그보다, 사부님께선 잘 계시느냐?”
“평소에 오적암에만 계셔서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제가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탈히 지내시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명진은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무당 제일의 인재를 만나자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전쟁터는 어땠는지.
현재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무공이 강해질 수 있었는지.
‘잠깐, 그러고 보니…….’
명진 도장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쌍절진인의 제자는 전쟁터에 종군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무쌍귀의 군대도 원래 군에서 온 거라고 들었다.
지금 부운화의 겉모습에선 무당의 도인이란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검은색 무복, 팔꿈치와 무릎에 찬 각반. 어딜 봐도 귀향 병사나 낭인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증거는…….
무림십대고수의 수준이라고 소문 난 무쌍귀와 수호귀. 그중 수호귀라는 자가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한 쌍의 장군검이라는 사실이다.
“설마…… 수호귀가……?”
명진 도장은 말을 내뱉자마자 경솔했던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부운화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래, 그게 나다.”
“죄, 죄송합니다, 운현 사숙. 제가 경박하였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그게 나니까. 하지만 명진아, 내가 사실 무당의 문하라는 것은 당분간 비밀로 되어 있었으면 좋겠구나.”
“어째서…… 입니까?”
“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대형의 곁에서 대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지금도 남경을 탈환하기 위해 싸우러 가는 것이지. 그런데 그 싸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사문의 명예를 실추시킬 가능성은 남겨 두고 싶지 않구나.”
“아……!”
명진 도장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역시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기에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전쟁터에 있겠다는 것은 피를 보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피를 보게 되면, 적이든 아군이든 원망이 쌓이는 법이다.
지금만 해도 부운화가 대단한 무력을 선보였지만, 세상이 그에게 준 별호엔 귀(鬼) 자가 붙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무당파를 향한 질타가 없으리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무당파로는……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까?”
명진 도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본래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 사숙이니 호승심이 일어야 할 테지만…… 워낙 무공의 차이가 크게 나다 보니 그러한 호승심보다는 같은 사문에 계속 있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컸다.
부운화의 표정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사문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 또한 부운화로서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짐이었다.
“돌아가야지……. 남은 일이 다 마무리되면…….”
“아…… 예.”
부운화의 눈빛은 침중했다.
돌아간다고 말은 했지만, 남아 있다는 그 일이 언제 끝날 건지, 또한 어떻게 돼야 끝나는 건지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명진 도장 또한 부운화의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 이상 묻는 것은 큰 실례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명진 도장은 부상을 당한 무당오검이 있는 쪽에 가 보겠다며 멀어졌다.
부운화는 장기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반수 이상의 흑도 무인들이 바닥에 쓰러졌고, 남은 자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지리멸렬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장기린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적군은 물론이고, 아군인 정파의 사람들조차도 근처에 다가가지 못했다.
함부로 다가가기엔 그가 보여 준 모습이 너무나도 강력하고 압도적이었던 탓이다.
부운화는 마치 그 부분만 칼로 잘라 낸 듯 텅 비어 있는 장기린의 주변을 보며 고독함을 느꼈다.
저 사람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운객잔이라는 곳에서 즐겁고 평범한 생활을 보내던 ‘장 객주’와 같은 사람이라니.
부운화는 텅 빈 공간에서 무표정하게 창을 들고 있는 장기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저릿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대형, 빨리 이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이 난다면…… 대형도, 저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테지요.’
진휘연이라는 여인이 깨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눈을 뜰 수 없게 될지.
아직 미래의 일이니만큼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결과가 나오는 순간 장기린은 이 싸움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운화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순간까지 장기린을 보좌하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야말로 부운화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일 터였다.
“대형!”
부운화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장기린이 그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무심했던 시선에 깃드는 한줄기 따뜻한 빛.
그게 바로 장기린이 일정한 선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눈빛이다.
부운화는 수고하셨다고 치하의 말을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공간.
텅 비어 있는 원형 안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