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五章 ― 회자정리(會者定離)
지글지글 불타는 땅. 매캐한 냄새와 함께 피어오르는 새카만 연기는 정복의 증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괴에는 반드시 불이 함께한다.
어째서일까 생각해 보면, 아마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멸시키는 데 불만큼 간편한 도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에 타고 나면 모든 것이 재가 되어 버린다.
버린 것은 다시 주우면 되고, 물에 젖은 것은 말리면 되지만, 한 번 불에 탄 것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옥황상제가 아니고서야 새하얀 재가 되어 버린 것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불이라는 것은 고래(古來)로부터 파괴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도, 동탁이 낙양을 불태운 사건에서도 모두 불이 사용되었다.
불태운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것은 파괴되었다.
다시 재건할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 하나의 엄포나 다름없다.
진시황이 정말로 세상의 모든 유학서를 불태울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학자라는 인종이 얼마나 끈질긴 자들인데 숨겨 둔 필사본이 하나도 안 남았겠는가.
하지만 진시황이 ‘대부분’의 유학서를 태움으로써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유학자들은 겁을 먹고 그 유학서들을 조심해서 다루며 내놓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실제로 지금 세대에 와서는 제대로 남은 유학서가 별로 없게 되어 버렸다.
불이란 그런 효능을 가진다.
상대에게 겁을 집어먹게 하는 공포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선 불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파삭!
제법 튼튼하게 지어 둔 막사였으나, 한 번 불에 타고 난 뒤에는 가볍게 툭 건드린 것만으로도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렸다.
텐챠이는 막사의 천을 걷어 낸 뒤 아직 타지 않은 서류들을 몇 번 뒤적거려 보다가 신기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새 중요한 건 다 빼 갔군.”
인근의 지도라던가 군사 명부 같은 건 남아 있지만, 정작 중요한 지령서나 장군령 같은 것은 빠짐없이 챙겨 간 듯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으니 이젠 이골이 났을 겁니다.”
텐챠이의 옆으로 다가온 하시르가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텐챠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항상 생각하는 점이지만, 그는 지금 상대하고 있는 명군의 장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망치는 데 익숙해지다니. 그럴 바엔 자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하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시르는 텐챠이가 뒤적거렸던 서류 더미를 몇 번 건드려 보았으나 역시나 중요한 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에겐 각자의 개성이 있는 법입니다. 아마 파강장군 원회라는 자는 도망치는 것 자체는 수치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군요.”
“도망치는 게 수치가 아니라니, 그럼 뭐가 수치가 될 수 있지?”
“글쎄요. 아마 저희에게 사로잡히는 것…… 아닐까요?”
텐챠이는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찼다.
“하시르, 나는 이 원회라는 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빨리 잡아서 끝냈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의외로 끈질긴 탓에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군요. 이제 병력은 채 오천도 남지 않았을 텐데요.”
“……끈질기다는 점에서는 나도 인정해 줄 수 있다. 하나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까지 끈질기니 답답한 노릇이지만.”
텐챠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본래 육만에 다다르던 남경 공략군은 이제 그 십분지 일인 오천도 채 남지 않았다.
원회는 본래 보급과 수비를 전문으로 하던 장수고, 하시르는 상대가 예측을 불허하게 만드는 기상천외한 책략을 자주 사용하는 군략가다.
애초에 상성에서부터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던 두 사람은, 하시르가 철저히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책략을 써서 괴롭힘으로써 우열이 확실하게 갈려 버렸다.
싸움의 초반, 원회는 육만의 병력으로 토성을 지어 성벽을 넘으려고 했는데, 하시르는 정작 토성이 완성되어 갈 때쯤, 성문을 활짝 열고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본래 수성을 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지형적인 이점을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지만, 하시르는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사실 텐챠이와 텐챠이 수호대는 본래 평원을 내달릴 때 더욱 강한 군대였다.
성문을 열고 돌진한 그들은 상대를 박살 내며 더욱 기세를 올려 끝없이 질주했고, 원회가 있던 사령부를 단번에 몰살시킨 뒤, 수뇌부가 없어져서 지리멸렬하는 병사들을 뒤쫓아 절반 이상의 피해를 입히며 싸움을 결론지어 버렸다.
힘이면 힘, 책략이면 책략.
어느 쪽이든 너무나 차이가 심한 싸움이었다.
원회의 입장에선 전광석화처럼 승리를 빼앗겨 버린 기분이었을 테지만, 하시르가 보기엔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첫 싸움에서 원회가 살아남은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일까.
‘그 뒤에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긴 하지만…… 솔직히 이 싸움은 막혀 있다. 적당히 포기하고 돌아가면 좋을 텐데.’
돌아가 봤자 대패한 책임을 지고 죽을 운명이라면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끈질긴 걸 떠나서 귀찮을 따름이다.
이미 북천맹의 힘은 다음 목표인 북경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서 일만도 안 되는 남경 공략군의 잔당 따위가 귀찮게 날뛰는 것은…… 그야말로 멋지게 마무리 지었던 첫 전투의 사족(蛇足)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냥 전력을 투자해서 몰살시켜 버려?’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숫자가 불어나고 있는 북천맹의 병력은 이제 팔만에 다다르고 있다.
오천도 안 되는 원회의 군대 따위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안 돼. 요새 황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어림군과 팔기군을 모으고 있다고 했고, 허점을 보였다간 의외로 반격당할 수도 있어. 이제 보급이 떨어질 때가 되어 갈 테니…… 보급로 쪽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기다려 보자. 미끼를 무는 순간 몰살시키면 돼.’
하시르는 싱긋 웃으며 마음을 정했다.
“그보다, 장군.”
“왜 그러지?”
텐챠이는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땅을 거닐고 있었다.
“무림맹 사절단을 없애는 건 실패했습니다.”
“흐음, 그건 원래 확률이 반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화약을 매설했다는 거짓 정보로 시간을 끄는 것엔 성공했지만, 무림맹 사절단이 생각보다 오만하지 않아서 실패한 듯합니다.”
“원래 사람의 성격이란 유동적인 것이지. 그런 것에 기대어 일을 도모하면 실패하는 법이다.”
“예. 더욱 명심하겠습니다.”
작전에 실패했으나 하시르에게선 전혀 아쉬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무림맹 사절단에게 적룡기마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이미 충분히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계획이 뭐라고 했지? 너무 강한 힘은 분열을 가져온다…… 였나?”
“예. 무림맹의 성격상 적룡기마대가 지나치게 강하다고 판단되면 돕는 것을 망설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돕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정파라는 자들은 평판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하지만 망설이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그 작은 차이가 제가 원하는 틈을 만들 테니 말이죠.”
삿갓으로 가려져 있으나, 텐챠이는 하시르의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하시르는 이런 전략을 짤 때는 정말로 요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난스럽고 잔인한 책략을 잘 짠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하시르의 눈빛은 요망하게 빛나기 마련이었다.
“아주 작은 틈이 포위망에 분열을 만들 것이고, 그러면 사왕의 힘이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생기게 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제가 계획했던, 강력한 한 수를 둘 수만 있다면…… 명 제국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텐챠이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가만히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을 대로 해 봐라.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하시르는 대답한 뒤 슬쩍 텐챠이의 안색을 살폈다.
“……장군, 왠지 힘이 좀 빠지신 듯합니다만.”
“힘이? 아니지, 힘이 빠진 게 아니라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거다.”
텐챠이의 눈빛이 강해졌다.
“참기가 힘들다. 어서 싸움의 때가 왔으면 좋겠다. 내 안에서 쌓이고 쌓인 힘이 이젠 넘쳐흐르기 직전까지 와 있다.”
“장군……!”
“이날을 기다려 왔지. 대륙을 차지할 전략이나 책략은 모두 하시르 너에게 맡기겠다. 나는…… 곧 있을 싸움에만 전력을 다할 것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그다음이다.”
곧 있을 싸움.
즉, 앞으로 열흘 안에 남경에 도착할 장기린의 군대를 말함이다.
텐챠이는 최근에 오로지 장기린과의 싸움만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쌓여 온 호승심과 원한은 대해처럼 깊다. 잠을 잘 때를 빼 놓고는 오로지 무공의 수련과 싸움을 위한 묵상만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집중된 모습과 태산과도 같은 기도는, 천하의 하시르조차 가끔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예, 장군. 맡겨 주십시오.”
깊이 고개를 숙이는 하시르의 눈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악귀…….’
하시르는 확신했다.
붉은 악귀가 남경에 도착하는 날?
그날이 곧 붉은 악귀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 ☆ ☆
콰과광!!
“우왓?!”
진구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협곡을 지나는 길, 갑자기 화약이 폭발하며 위에서 뿌연 흙먼지와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내린 것이다.
물론 떨어져 내리는 돌 조각들 중엔 꽤나 위험한 것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머리 근처에 오기도 전에 이미 박살 나서 흩어져 버렸다.
적룡기마대원들의 공적이다. 그들은 수레 하나에 나무를 깎아 만든 단창을 쌓아 두고 있다가 폭발이 일어나면 곧바로 단창을 던져서 위험한 조각들을 쳐 내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다시 진군을 시작한 첫날.
그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미 산적들의 산채에서 화약을 매설했다는 게 거짓으로 드러났는데, 그들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해서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시 하시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의 허를 찌르는 데는 타고난 자였다.
“화약은 없는 게 확실하다고, 장담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 그게…….”
협곡에 매설된 화약은 그들을 고생시켰지만, 장기린은 그 덕분에 지다화 모용소희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약 때문에 병사들의 행군은 무려 반나절이나 늦어졌다.
혹시 주변에서 폭파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은 없는지, 또는 그들이 가는 길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다면 위험한 지형은 없는지 미리 살펴봐야만 했던 것이다.
반나절 동안 적룡기마대원 전원이 동원되어 인근 지역을 샅샅이 훑은 결과, 위험한 곳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시르가 매설한 화약은 소량이었다.
깜짝 놀라서 진군을 늦추게 하기 위한, 딱 그 정도의 화약만 매설해 둔 것이다.
물론 가끔 돌덩이가 머리 위로 떨어지면 위험할 테지만, 그 정도 위협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후 반나절가량의 진군 후, 그들은 협곡을 빠져나와 이제 본격적으로 남경까지 이어지는 대로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부터 정확히 사흘을 진군하면 남경에 도착하게 된다.
마지막 결전.
텐챠이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히히힝―!
“잠깐.”
장기린은 병사들의 행군을 멈춰 세웠다. 주변의 의아한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장기린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수레에서 내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전열의 병사들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마치 주변의 풍경과 하나가 된 것마냥 쌍두마차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다.
장기린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체투지의 예.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존재감만으로 알 수 있었다.
“신 장기린이 명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덜컥.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여전히 태양과도 같은 눈빛을 지닌 채 위풍당당한 기세를 뿜어내는 이 시대의 절대자.
영락제, 태종은 그 예에 대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장기린의 눈이 번쩍 빛나도록 만들었다.
“기린, 어림군과 금군, 그리고 팔기군을 맡아 다오.”
<1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