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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百六章 ― 북풍래래(北風來來)
몽고의 초원은 광활하다.
가장 높은 언덕에 앉아 두 눈 가득 들어오는 푸른 초원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왼쪽 지평선 끝에서부터 오른쪽 지평선 끝까지 목을 아무리 쭉 빼고 둘러보아도 인위적인 존재라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평원뿐인 것이다.
그 가슴까지 시려오는 푸른빛을 보고 감동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중원은…… 복잡하군.”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문(山門)을 넘으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거구의 사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내는 황색의 품이 넓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거구라서 눈에 띄기는 하지만 황색 옷에 삿갓을 쓰고 있는데다 등에는 붉은색의 봇짐까지 메고 있었다.
원래 불사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른 인근의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그를 승려라 생각하고 길을 피해 주었다.
그중 몇 명은 허리를 굽혀 공경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거구의 사내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편이 더 좋았던 것이다.
‘역시 하시르의 말을 따르기 잘했군.’
사내가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리자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와 함께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인상이 강한 얼굴이 나타났다.
텐챠이.
현재 명성이 대륙을 떨쳐 울리고 있는 북천맹주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텐챠이는 공경을 표하며 길을 터 주는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그리 넓지 않은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산길은 정성스레 다듬어져 있었다. 발길이 닿는 곳엔 작은 돌멩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비가 오면서 생긴 웅덩이라거나 발길이 오래 닿아 울퉁불퉁하게 깎인 곳엔 새로운 흙으로 잘 보수되어 있었다.
이 산 위에 사는 자들이 얼마나 주변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숭산이라…….’
텐챠이는 고개를 좌측 끝까지 돌렸다가 다시 우측 끝까지로 돌렸다.
초원에서 생긴 습관이었다. 그는 자고로 좋은 풍경은 시야에 가득 담겨 사람을 압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숭산…… 불문의 성지라던데, 그저 황량한 산일 뿐이지 않은가.’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산맥의 웅장한 모습은 나름대로 봐줄 만하지만…… 그가 초원의 자식이라서일까, 텐챠이는 숭산의 모습을 보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텐챠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숭산 초입에서 소림의 산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쭉 잘 다듬어진 오르막길을 오르자 오랜 세월의 풍치가 느껴지는 목재 솟대가 나타난 것이다.
낡을 대로 낡은 목재 솟대 사이엔 정갈하면서 웅혼한 필체로 소림사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산문 앞에는 젊어 보이는 승려 두 사람이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게 단련된 체구와 강렬한 눈빛은 불법을 따르는 승려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그들의 태도만큼은 정중해서 소림의 산문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미타불. 사탑(寺塔)을 돌러 오셨습니까?”
소림승은 당연히 텐챠이도 승려라고 생각한 듯 불법에 관한 것을 먼저 물었다.
소림 방장인 각로 대사는 항상 소림은 무파이기 이전에 사찰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소림사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크게 문호를 개방했고, 최근엔 불법을 전해 듣고 탑돌이를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승려들도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다 보니 숭산을 찾아오는 사람이 황색옷에 삿갓을 쓰고 있다면 십중팔구는 승려라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다른 사찰의 승려였다면 이쯤에서 소림에 대한 예를 표하며 목적을 밝힐 터.
하지만 텐챠이의 행동은 산문을 지키던 승려들의 기대를 벗어났다.
“소림 방장을 만나러 왔다.”
텐챠이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요?”
산문을 지키던 소림승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으나, 무턱대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마음 수양이 깊이 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방장을 만나 직접 말하겠다.”
“죄송하지만, 신상을 밝히지 못하시는 분을 방장께 안내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텐챠이는 한 손으로 삿갓을 붙잡은 채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양새.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찾고 있던 무언가를 찾은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안내할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
쿵!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텐챠이.
단지 한 걸음뿐인데도 마치 태산이 덮쳐 누르듯 강대한 존재감이 확 쏟아져 내렸다.
“……!!”
산사태가 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심정이 이러할까?
소림 무승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
‘이 사람……!’
‘대단한 고수다……!’
텐챠이의 강력함을 알게 된 소림 무승 두 사람은 동시에 합장을 하였다.
소림 무공의 팔 할은 합장에서 시작된다. 합장이 곧 무공을 시작하는 기수식인 셈이다.
두 사람의 눈에는 강대한 무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용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소림을 무시하는 처사이십니다.”
소림에 존중을 표하지 않고 반말로 방장을 찾는다.
이 정도면 ‘적(敵)’이라고 판단해도 좋지 않겠는가.
원래 무파의 입구는 아무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문파를 상징하는 얼굴이며, 그에 걸맞은 무위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산문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도 삼십육방을 통과하고, 현재의 나한승 중에서 출중한 무력을 가진 무인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림에 나가면 절정고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텐챠이라는 상대를 맞아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이 감히 출수조차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이라니!
‘그런 위험한 인물을 방장께 안내할 수는 없다.’
‘이자는 분명 흑도의 인물이다!’
두 사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림을 존중하지 않는 자라면 사마외도의 무리나 황실밖에 없다.
하지만 황실의 관리라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처리할 리가 없으니 십중팔구 흑도의 인물일 터.
그런데 흑도의 인물들 중에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자가 나왔단 말인가.
스으윽―
소림 무승 두 사람이 반야신공의 능력을 있는 힘껏 끌어 올렸으나 텐챠이는 요지부동이다.
텐챠이는 마치 상대의 진기를 잡아먹고 몸을 불리는 괴물 같았다.
소림 무승 두 사람이 힘을 끌어 올리면 올릴수록 그들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점점 커져 갔다. 강할수록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두 사람의 눈에 비친 텐챠이의 모습은 태산과도 같았다.
‘이런…… 괴물같은……!’
처음엔 그래도 호승심이 생겼으나, 이젠 완전히 압도당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두 사람.
쿵!
마침내 텐챠이가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그 압박감은 두 배로 강해졌다.
“크윽……!”
“큭……!”
소림 무승 두 사람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평생 마보로 단련해 온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기분을 버텨 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심장이 얼음덩어리로 바뀐 것마냥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져서 움직여지질 않는다.
천 근 바위에 짓눌려 있었다는 손오공이 이러했을까.
주먹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했는데 미리부터 이런 패배감을 느끼다니…….
그들로서는 생전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물러서라.”
텐챠이의 나직한 한마디에 그들은 결국 한 걸음을 더 물러서고 말았다.
“크윽…….”
두 사람은 주먹을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그들의 몸은 끝까지 주인의 의사를 배반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텐챠이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두 사람은 패배감에 몸을 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텐챠이는 산문을 지나 계속해서 걸어갔다.
안쪽에서 수십 명이 동시에 내는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산문을 지나 사방이 탁 트인 소림사의 경내가 나오고 긴 싸리비로 바닥을 쓸던 승려 몇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텐챠이를 쳐다볼 때 즈음, 뒤쪽에서 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경계심과 절박함이 어우러진, 우렁찬 목소리는 산문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바닥을 쓸던 싸리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안쪽으로부터 은은히 들려오던 기합 소리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긴장감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태연히 움직이는 것은 오직 텐챠이 한 사람뿐이다.
“멈춰라!”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지객당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한 중 가장 젊은 항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척! 척! 척!
그들은 지극히 절도있는 움직임으로 텐챠이의 사방을 포위하고 각자 들고 있던 일 장 길이의 목곤을 수직으로 세워 들었다.
다 합해서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아직은 완성되지 못한 젊은 십팔나한.
그중 절반은 목곤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권법을 연마한 튼튼한 양손으로 각자 반장의 예를 취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체를 밝히고 목적을 말하십시오.”
십팔나한 중 한 명이 나서서 입을 열자 마치 부동명왕이 말하는 것처럼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내용이라도 산문을 지키던 자들과는 분위기부터가 전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십팔나한은 모두 완전히 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경계심과 적의가 가득했다. 품이 넓은 황색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구의 육신에 삿갓을 쓴 텐챠이를, 마치 거대한 야생맹수를 둘러싼 사냥꾼들처럼 잔뜩 경계한 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습군.”
텐챠이는 큭, 웃음을 터뜨렸다.
“소림은 불문의 성지이자 정도무림제일의 종파라고 하던데, 겨우 이런 애송이들밖에 내보낼 사람이 없는 건가?”
텐챠이의 말은 완연한 도발이었다.
앞으로 나서서 텐챠이를 맞았던 십팔나한의 수좌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버렸다.
“무례하다! 감히 소림을 업신여기는 건가!”
“무례?”
텐챠이는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태산과도 같은 기백!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던 소림 나한이 순식간에 창백한 안색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났다.
텐챠이의 존재감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대하는 듯, 거대하고 육중한 기세가 손쓸 수도 없이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
“비켜라.”
스윽―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림 나한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삿갓으로 가려진 탓에 소림 나한들은 아직 텐챠이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가만히 서서 내뱉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자를 이 자리에서 막을 수 있을까?’
나한들의 수장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오기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큭, 나한진! 발진!”
“……오오!”
이미 텐챠이의 거대한 존재감을 느낀 나한들이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으나, 수백 번이 넘게 훈련한 대로 일정한 방위를 점하고 움직임을 시작했다.
소림에는 수많은 무공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진법만큼은 단 하나만이 존재했다.
백팔나한진.
백팔 명의 소림 나한들이 만들어 내는 장대한 진법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상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는 절진이었다.
소림의 무승들이 사용하는 진법은 모두 백팔나한진을 축소하거나 살짝 변형시킨 것들뿐이었다.
삼십육나한진. 그리고 십팔나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것을 갖고 있는데 어째서 다른 것이 필요하겠는가.
백팔나한진의 완성도는 진을 지탱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더라도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불호를 외는 소리가 들려오고 무승들의 움직임이 일정한 방향으로 정교하게 맞물리자 주변의 대기가 크게 울렁였다.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
텐챠이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허리에 차고 있던 푸른빛의 대도(大刀)를 뽑아 들었다.
스릉!
섬뜩한 예기가 피어오르는 명도였다. 칼날의 길이만 해도 오 척은 되고 너비도 한 뼘이 넘는다.
텐챠이는 그런 대도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기이한 일이다.
딱히 특별한 동작을 하는 것도, 특별한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닌데, 대도를 크게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쭉 내리긋는 그 단순한 동작이 마치 숨을 쉬고 뱉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이 이러할까.
칼의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흔한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진법에서 가장 선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십팔나한의 수장은 잠시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자신의 목에 칼날이 닿아 있는 것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엇?!”
목 밑이 서늘하다.
새파란 예기를 흩뿌리는 칼날이 목 밑에 대어져 있자 침도 함부로 삼킬 수가 없었다.
“이, 이런……!”
십팔나한의 수장이 제압당한 사이에도 진법은 계속해서 움직여 텐챠이의 운신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수장이 제압당하기는 했으나, 무림에 명성을 떨친 십팔나한진은 겨우 한 사람 때문에 무너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쉬이익―!!
좌우와 뒤쪽에서 불호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다섯 개의 목곤이 퇴로를 점하고 쏘아져 왔다.
공격을 하기에 앞서 불호를 외우는 것은 암습을 금지하는 정파의 문규 때문이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목곤들 사이로, 네 명의 소림 무승이 각자 군더더기없는 몸놀림으로 파고들며 권각을 날려왔다.
두 사람은 발끝으로 하단을 노리는 질채각을, 나머지 두 사람은 상박과 머리를 노리고 정권을 날렸다.
파앙! 파팡!
그 움직임만으로도 파공음이 들려오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스윽―!
텐챠이는 오른발을 미끄러지듯이 뒤로 끌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하체, 허리, 어깨 순으로 회전하고, 빙글 돌아간 오른손이 대도의 예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반원이 허공에 그려졌다.
퍽! 하는 충격음과 함께 뒤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소림 무승들.
한꺼번에 내찌른 다섯 개의 목곤도 일제히 중간이 잘려 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후와아앙―!
“……!!”
마치 태풍이라도 불어닥친 듯한 소음은 그다음에야 터져 나왔다.
“쿨럭……!”
“크흑……!”
튕겨 나간 네 사람이 울컥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고, 목곤이 절반이나 잘려 나간 다섯 사람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경악에 가득 찬 공간.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처음 목에 칼이 드리워진 십팔나한의 수장이었다.
일순간에 주변을 휩쓸어 버리며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린 텐챠이의 칼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그의 목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이 무슨……!’
칼이 닿아 있던 곳에서 피가 한 방울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그제야 무시무시한 고수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몰려드는 소림승 아홉 명의 공격을 일격에 물리쳐 놓고, 정작 그 당사자는 마치 아무 짓도 안 한 것처럼 처음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정체가……?”
삿갓을 쓰고 나타난 이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곳에 모여 있는 열여덟 명의 나한은 동시에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뭐지? 이걸로 끝인가?”
텐챠이는 왼손으로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움직임을 멈춘 승려들을 쭉 한 번 둘러보더니, 도발하는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로 웃었다.
“소림도 별것 아니군. 겨우 이 정도라면 비켜라. 일격도 버티지 못하는 자들과 축제를 벌일 생각은 없다.”
대초원에서 싸움은 곧 신성한 축제.
교육의 목적이 아닌 이상, 이렇게나 실력의 차이가 나는 자들과는 축제를 벌일 수 없다.
뻐억!!
텐챠이는 손목을 비틀어 칼날의 옆면으로 십팔나한의 수장을 후려쳐 버렸다.
“컥……!!”
말의 뒷발에 걷어채인 어린아이처럼 날아가 버린 소림승은 마침 뒤쪽에 있던 다른 승려에 의해 받아졌지만,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뒤였다.
다른 나한들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런 무도한……!”
“나한진의 힘을 보여라! 절대로 통과시키지 마라!”
“타하앗―!”
소림 승려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 모습은 처음과는 전혀 달라서, 승려답지 않은 살기마저 품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좀 상대할 만하군.’
싸움에서 무술 실력은 승리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정신.
상대를 진심으로 쓰러뜨리고 싶어 하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 비해 몇 배나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퍼어억!
“크윽……!”
가장 앞서서 달려들던 승려 두 사람이 텐챠이가 휘두른 칼의 옆면에 얻어맞고 뒤로 튕겨졌다.
터엉!
하지만 뒤쪽에서 미리 대비하고 있던 다른 승려들이 그들을 받아 주었다.
동시에 날아드는 다섯 개의 목곤 공격.
찌르고 휘두르는 그들에겐 일정한 절도가 있어서 마치 모두가 한 몸인 것처럼 호흡이 딱 맞았다.
쩌어어엉!!
“흐음……?”
이번엔 처음으로 텐챠이가 휘두른 칼이 막혔다. 그가 사용한 힘을 여섯 사람이 나눠서 받아 냈던 것이다.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끈이 승려들을 묶고 있어서 한쪽이 밀려날 것 같으면 다른 한쪽이 당겨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재미있군.”
텐챠이의 입에서 흥미로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이것도 받아 봐라.”
확― 하고 터져 나오는 기세.
텐챠이는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기세로 칼을 휘둘렀고, 거대한 힘의 파동에 휩쓸린 승려 다섯 명이 목곤이 박살 난 채 뒤쪽으로 튕겨져 날아올랐다.
“커헉!”
“쿨럭……!”
나한진을 구성했던 승려들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진법이 강력하다고 해도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힘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태풍을 막을 수 있던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도 존재하기에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쿨럭! 쿨럭!”
소림승들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면서 멍하니 텐챠이를 응시했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일격에 담겨 있던 텐챠이의 힘은 소림승 열세 명이 버텨 낼 수 있는 힘보다 더욱 컸던 것이다.
“흠, 이 정도인가.”
텐챠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젊은 십팔나한의 무력에 대해서는 이미 처음 봤을 때 파악이 끝났다.
그다음은 근성과 정신력을 볼 생각이었는데, 그의 일격을 버텨 낸 것을 보니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소림이란 곳도 제법이군.’
애초에 자신의 패배는커녕 열세조차 생각지 않던 텐챠이였다.
그랬기에 그는 그나마 한 번이라도 공격을 받아 낸 소림의 힘에 만족했다.
“멈추시오!”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소!”
파라락―!
사방에서 천 조각이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텐챠이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마치 곡식을 발견한 새 떼처럼 허공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황색 가사의 인물들.
그 숫자가 십여 명이 넘었다.
게다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텐챠이를 주시하는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과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이게 진짜로군.’
텐챠이는 삿갓 아래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이마엔 여섯 개의 계인. 취하고 있는 자세는 빈틈없이 안정적이고 텐챠이를 노려보는 눈빛에선 깊은 경륜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제법 있군.’
텐챠이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승려들이 나이가 최소한 서른은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많은 싸움을 겪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 이곳에 있는 승려들이야말로 현재의 소림을 대표하는 진정한 힘이라는 뜻이다.
‘하시르가 그랬지, 지금 가장 어린 세대는 계(戒) 자 항렬. 소림 방장과 장로들이 각(覺) 자 항렬이고. 그 사이에 범(凡) 자 항렬이 있다고. 즉, 지금 이자들이 범 자 항렬인 모양이군.’
그사이 주변을 둘러싼 무승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텐챠이와 정면에 마주 섰다.
마주 서긴 했지만 절대로 가깝지는 않은 삼 장가량의 거리.
텐챠이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마른 승려였다.
“아미타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소림의 승려를 상하게 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니 동행해 주셔야 겠습니다.”
빠짝 마른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 내용은 더없이 강력한 뜻을 품고 있었다.
“동행? 방장에게 데려가 주겠다면 함께 가 주지.”
“……방장께는 안내할 수 없습니다.”
“그럼 대화는 필요없다. 비켜라.”
텐챠이가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딛자,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목곤이 겨눠졌다. 공기가 무거워진다. 날붙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목곤에 불과한데도 살을 에는 듯한 기세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과연.”
텐챠이는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려 얼굴을 코 언저리까지 드러냈다.
흉터의 끝자락이 새겨진 입가가 꿈틀대며 웃음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미리 말해 두지. 이번엔 자제할 수 없을 거다.”
무엇을 자제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범 자 항렬 십팔나한의 수장인 범오(凡悟)는 그 순간 텐챠이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을 수도 있을 거란 뜻일 터.’
범오의 시선이 뒤쪽에서 아직 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계 자 항렬의 십팔나한들을 향했다.
지금까진 칼에 ‘얻어맞았을 뿐’이지만, 아마 지금부터는 ‘베어지게’ 될 것이다.
“소림은 절대로 굴하지 않는 법입니다.”
범오는 반장을 취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텐챠이.
그를 향한 십여 개의 목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싸움이 시작될 것만 같은 불온한 공기 속에서 텐챠이가 칼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아미타불. 그만두시게.”
범오의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각운(覺運) 당주님.”
범오는 황급히 예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회색빛 수염을 턱밑으로 기른 노년의 승려가 차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텐챠이는 절로 눈길이 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나타난 승려는 상당한 고수였다. 텐챠이 자신으로서도 방심하면 크게 다칠 수 있을 만한 상대인 것이다.
“지객당을 맡긴 것은 삭막하게 깎여 나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건만……. 쯧쯧.”
“아, 죄송합니다, 각운 당주님.”
천하의 텐챠이를 상대로도 당당하던 범오였으나, 각운이라 불리는 노승을 상대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림사의 손님들을 총괄하는 지객당의 당주가 바로 각운이었다.
그는 텐챠이를 향해 차분한 움직임으로 다가와 지그시 응시했다.
“방장께서 찾으시네.”
“가, 각운 당주님!”
범오가 당황하여 외쳤으나 각운이 한 번 쳐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원래 문규상으로는 안 될 일이지만, 어째선지 방장께서 직접 괜찮다고 하시니 안내해 드리겠네.”
지객당주 각운은 부드러운 말투 속에 만만히 볼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텐챠이는 신응도를 다시 칼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각운의 말은 다 맞았다. 그는 대화를 하러 왔다. 범 자 항렬의 십팔나한들과 싸워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안내해라.”
텐챠이의 노골적이고 당당한 명령엔 그동안 온갖 경험을 다 겪은 각운도 안색이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순순히 텐챠이를 이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각운 당주님……!”
“범오, 십팔나한들을 이끌고 대기하시게.”
“하지만!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자네, 아직 멀었군. 방장실에 누가 있는지 모르나?”
“아……!”
“자네들은 이곳에 대기하게.”
“……예, 알겠습니다.”
범오는 침중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는 너무 흥분해서 잠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의 방장실.
그곳은 팔대호원이 지키고 있다.
무림에서 고수로 대우받는 십팔나한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무의 화신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괜찮…… 겠지…….”
범오는 혼란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대호원의 무승들은 정말로 강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범 자 항렬 십팔나한에게 둘러싸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삿갓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꽤나 깊숙한 곳에 숨어 있군.”
텐챠이는 주변의 풍경을 살펴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꽤나 거창하게 만들어져 있는 담을 몇 번이나 지나, 노골적으로 방문자를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소로를 통과해야만 방장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장께선 숨는 법이 없으시네.”
지객당주 각운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답했다.
대소림의 방장이 숨어 있다니,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폭언이었다.
“내 눈에는 깊게 파 둔 굴 속에 몸을 숨긴 토끼처럼 보이는데.”
“……크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숨어 있는지 모르겠군.”
각운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결국 상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오시게.”
각운의 발놀림은 자세히 보면 좀 특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로를 통과할 때 즈음부터 그랬다. 좌우의 간격을 조절하면서 걷는 것 같은데, 때론 길의 가장 오른쪽에 붙어서 걷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왼쪽에 붙어서 걷다가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가기도 했다.
텐챠이는 각운이 왜 그러는지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서 걸었다.
아마 진법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정해진 동작으로 걷지 않으면 곤경에 빠져 버리는, 그런 진법이 준비되어 있는 듯했다.
‘정말로 철저하게 보호를 하고 있군.’
텐챠이는 방장이 거하는 곳으로 보이는 소박한 절간을 보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열, 아니, 열둘은 되는 듯했다.
숨을 죽이고 그가 있는 쪽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만으론 정확히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각운은 방장실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 앞에서 공손히 인사를 했다.
“방장, 각운이외다.”
“들어오시게.”
방장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티없이 맑았다.
분명 음색만으로는 나이 든 보통 노인과 다를 바가 없는 목소린데 기이하게도 직접 말을 들으면 청아한 느낌이 묘하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각운은 방장실의 문을 직접 열었다.
종횡으로 삼 장 남짓한 정사각형의 방 안.
그곳에 정도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의 방장이 있었다.
소림 방장, 각로 대사는 마치 허름한 암자의 고승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뼈만 남은 것처럼 앙상한 육신에는 근육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각로 대사가 역근경과 무상대능력을 절정으로 익힌 초절정의 고수라는 것은 이미 유명한 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에게선 무공을 익힌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텐챠이는 각로 대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군.’
딱히 이유는 없다.
그에게 위협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아직 말을 섞지도 않았으나,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찝찝해졌다.
“네가 소림 방장인가?”
텐챠이는 각운의 옆을 성큼성큼 지나쳐서 소림 방장의 건너쪽에 털썩 걸터앉았다.
각운의 표정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리를 청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앉아 버리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짓이다.
게다가 소림 방장을 ‘너’라고 부르는 오만한 언사까지.
십팔나한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방장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이자 각운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방자한……!”
그리고 그런 텐챠이의 무례함은 각운뿐만이 아니라 소림 방장의 주변을 소리없이 지키고 있던 팔대호원의 고수들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대기가 일렁이며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운들이 넘실거렸다.
소림 방장이 그때 나서서 탁자를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텐챠이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허헛, 그만들 두거라.”
사아악―
각로 대사의 그 한마디에 모든 무승들이 일제히 기세를 감췄다.
마치 철저히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텐챠이는 그 모습을 보자 팔대호원의 고수들이 얼마나 각로 대사를 존경하고 따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네. 내가 소림 방장을 맡고 있는 각로일세.”
각로 대사는 텐챠이를 앞에 두고 허허 웃었다.
“나는 자네를 뭐라고 부르면 되겠나? 북천맹을 이끌고 있으니 맹주라고 부를까, 아니면 텐챠이라고 부르면 되겠나?”
“……!”
처음에 그가 무례한 태도로 소림승들을 놀라게 했다면, 이번엔 각로 대사가 텐챠이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 나이쯤 되면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네.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지.”
“영매인가?”
“허헛, 그런 건 아닐세. 그저 죽을 때가 다되어 가는 노인의 경험 같은 것이지.”
깊게 세월의 고랑이 파인 얼굴로 허옇게 센 수염을 쓰다듬는 각로 대사는 영락없는 촌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편, 텐챠이를 안내한 각운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설마했지만, 북천맹주라니……!”
북천맹주 텐챠이.
그가 소림에 들어와 있다니,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팔대호원!!”
쉬시식―!
각운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방장실의 사방을 사람의 그림자가 가득 둘러쌌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느낌을 풍기는 여덟 명의 무승이었다.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극도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는 숨길 수 없었다.
마치 쇳덩이를 사람의 모양으로 조각해 놓은 듯한 무인들이었다.
표정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안정된 자세에선 단단하고 강력한 기운만을 풍겨 낸다.
무의 화신과도 같은 여덟 사람이 방장실을 포위하자, 그것만으로도 천 명의 군세가 늘어서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들 왜 그러느냐? 혹시 대웅보전에 불이라도 난 게야?”
소림 방장 각로 대사는 태연하게 허허 웃었다.
“방장! 북천맹주를 방장실에 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각운, 자네는 그게 문제야. 절간에 찾아온 사람이 속세에서 무슨 일을 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방장!!”
“허허, 대화를 하러 온 걸세. 이 사람이 싸움을 하러 왔다면 이미 십팔나한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왜 몰라?”
“하나……! 이자는, 이자는 황실에 반기를 든 역도이자 마두 중의 마두란 말입니다!”
각운의 말은 지극히 당연했다.
불문의 성지이자 정도무림의 중심인 소림사에 마두 중의 마두인 북천맹주가 찾아오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허어…… 각운, 그럼 묻겠네. 이자가 악인인가?”
“물론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북천맹주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그건……! 직접 들은 적은 없으나, 현재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북천맹의 수장이 바로 이자가 아닙니까?! 흑도의 수괴는 당연히 악인입니다!”
“편협하구나, 각운!”
“방장!!”
“악인이 아니다. 이자는 그저 북쪽에서 찾아온 손님일 뿐이야.”
“큭……!”
“이제 그만하게.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각로 대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텐챠이를 경계하고 있는 팔대호원에게도 신호를 주었다.
“팔대호원도 다들 물러가 있거라.”
“예.”
각운은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고 입가를 실룩거렸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각로 대사는 겉보기엔 속없는 호인 같지만 한 번 고집을 세우면 쇠심줄처럼 질기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스스슥―
팔대호원의 고수들은 무표정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역시 방장의 명에 따라 다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각자 숨어들었다.
각운은 나중에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각로 대사를 쏘아보다가 탕! 소리가 나게 방장실의 문을 닫았다.
각운의 기척은 방문 앞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문은 닫았지만, 방장실 주변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이 각운이 생각하는 한계였던 것이다.
“허허, 각운은 여전히 힘이 넘치는군. 부러운 일이야.”
텐챠이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다 내 정체를 알아본다면, 이 세상의 노인들은 다들 무서운 존재겠군.”
“아, 거기부터 이야기하는 건가? 그렇지, 노인들은 다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네.”
“…….”
“믿기지 않나 보구만? 허허, 잊지 말게.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것이 아닐세. 오래 살다 보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것들까지 보이게 되는 법이거든.”
텐챠이는 소림 방장이라는 자가 생각보다 실없는 사람이며, 또한 기이하게 대화를 나누기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텐챠이는 삿갓을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바깥과 단절된 방.
각진 턱 선과 왼쪽 눈을 비스듬하게 가르는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텐챠이는 훤해진 시야로 각로 대사를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며 물었다.
“다시 묻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지?”
“허허, 꼭 알아야겠나?”
“…….”
“중원의 예를 따르지 않는 모습. 소림 방장의 권위보다 자신의 권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확신. 그리고…… 내면에서 마치 바람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네. 언젠가 탁발을 다니다가 보았던 북쪽의 초원이 생각나더군.”
텐챠이는 각로 대사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으나 거짓이라는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그렇게 초원의 느낌을 풍겼던가?’
황색 가사를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는 삿갓까지 썼다.
그 누구도 그를 보며 몽고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터. 그가 특별하다기보다는,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소림 방장의 안목이 특별했다.
“과연, 늙은이의 눈은 무섭군.”
“허허, 그렇다네.”
“오는 길에 소림의 승려들을 보았다. 약하진 않지만, 특별하지도 않더군. 북천맹의 주력을 데리고 온다면 반나절 안에 짓밟을 수 있다.”
텐챠이는 자신의 감상을 가감없이 말했고, 소림 방장은 ‘그런가?’라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말을 하며 웃을 뿐이었다.
‘거슬리는군.’
흉터가 새겨진 왼쪽 눈가가 꿈틀거렸다.
소림 방장의 저 여유로운 대응도, 반나절 안에 짓밟을 수 있다고 말하니 문밖에서 꿈틀대는 불편한 살기들도…….
하나같이 심기에 거슬리는 것들뿐이었다.
“강함이란 짓밟고 짓밟히는 걸론 정할 수 없는 법이네.”
“궤변이군. 늑대와 양을 비교해 보면 늑대가 강한 게 당연하다. 설마 양이 더 강하다고 말할 생각은 아닐 테지?”
“허허, 그건 그렇지. 늑대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비교하면 분명 늑대가 강할 걸세.”
“……한 마리?”
“하지만 거기에 양치기가 있다고 생각해 보게나. 그럼 그 양치기는 누구의 편을 들겠나? 늑대일까, 아니면 양일까?”
결코 흥분하는 일 없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각로 대사의 말은 텐차이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자연히 텐챠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각로 대사가 뜻하는 바가 뭔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심을 말하는 건가?”
“허허, 과연 오성도 뛰어나군. 맹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것은 단지 무력 때문만이 아니었어.”
“민심 따위…… 의미없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텐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각로 대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용히 웃더니 옆에 있던 다로(茶爐) 위에서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한잔할 텐가?”
“사양하지.”
“중원에선 손님이 오면 차로 맞는 것이 예의지. 북쪽에선 양젖으로 만든 술로 대접하던데……. 허허, 즐거운 기억이었어.”
텐챠이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중은 술을 안 먹지 않나?”
“그런 건 술이라고 하지 않는다네. 곡차이지.”
“……기가 차는군.”
“허허, 계율이란 본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수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타국의 예를 거절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세.”
각로 대사는 찻잔에 차를 따라 정갈한 동작으로 한 모금을 마셨다.
텐챠이로서는 그 모습을 보자 각로 대사에 대한 경계심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소림 방장.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다는 절간의 최고 우두머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왠지 각로 대사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사람 냄새’가 나는 느낌이었다.
사실 텐챠이는 소림에 와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잘해야 칼부림이 안 나는 정도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곳에 왜 온 것인가.’
텐챠이는 스스로 자문해 보았으나, 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결전을 앞둔 지금.
하시르에게조차 행선지를 숨기고 나와 소림에 들른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텐챠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곳엔 왜 왔나?”
텐챠이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각로 대사의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글쎄.”
“허허, 신기한 일이군. 어떤 질문이든 단칼에 대답할 수 있는 성품으로 보였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허어……!”
각로 대사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텐챠이를 바라봤다.
“지금 이 늙은이에게 화두(話頭)를 던지는 겐가?”
“화두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군. 초원에는 없는 단어다.”
“화두란 깊게 고뇌하고 답을 내기 위한 단서 같은 것을 뜻하지. 주로 불가나 도가 쪽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네.”
“깨달음이라…….”
텐챠이는 각로 대사의 손바닥 위에서 물결치고 있는 찻잔 속의 찻물을 바라봤다.
“그럼 나는 화두를 찾아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허허,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천맹주가 찾는 화두라…… 말해 보게, 흥미로워지는군.”
“…….”
“어려워 말게. 그걸 위해서 먼 길을 떠나 적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온 것 아닌가?”
텐챠이는 마치 어린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늙은 승려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길을 찾고 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텐챠이의 본심으로, 그동안 속에만 쌓아 두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점들의 핵심이었다.
“처음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천명에 충실하면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이 길을 가야 하는가, 이 일에 의미가 있는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
“허어, 어려운 문제로군.”
각로 대사는 허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개운치 않으면 안 하면 되는 일 아닌가?”
“…….”
산뜻한 대답에 텐챠이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늙은이, 아무리 남의 일이라도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허, 쉽게 말한 것이 아니네. 자신의 일은 본래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남에겐 어떤 거짓으로 진실을 숨겨도 자기 자신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법일세.”
“그 말인즉…….”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것은…… 사실 무의식중에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라네.”
각로 대사의 말인즉, 텐챠이는 내심 지금 그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
텐챠이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정말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내면에 갖고 있는가?
“한 가지만 묻겠네. 굳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뭔가?”
“그건…….”
텐챠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내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를 말로 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텐챠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고 싶었다. 아니, 이곳이 나를 불렀다.”
“불렀다?”
“최근엔 그런 순간이 많다.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 주듯이, 지금 이 순간에 해야만 하는 일들을 알게 된다. 왠지 모르게 지금 이곳에 와 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텐챠이는 한 번 말을 꺼내서 이어 가자 스스로의 마음도 정리가 되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부른 거다. 그래서 찾아왔다. 답을 찾기 위해.”
하시르를 닮아 가기라도 하는 것일까?
언제나 칼로 자르듯 단호한 대답만 일관해 오던 텐챠이의 성품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장황하고 명확하지 못한 대답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마음이란 말로 설명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허허, 그렇군.”
그리고 신기한 것은, 각로 대사는 그런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 현세의 짧은 만남도 전생에서 삼천 번의 옷깃이 스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이렇게 소림의 산문을 넘은 것도 인연일 게야.”
“…….”
“혹시 자네, 불가에 뜻이 있지는 않나?”
“없다.”
텐챠이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하늘과 바람의 신을 믿는다.”
“불가는 신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이 없네. 깨달음을 위한 자기 수양을 할 의사가 있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라네.”
“…….”
“어때? 머리 좀 밀어 볼 텐가?”
각로 대사는 ‘어차피 변발이라 밀 머리도 얼마 없지 않나?’라며 허허 웃었다.
거대 문파의 수장답지 않게 매우 소탈하고 정감 가는 모습니다.
텐챠이는 각로 대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했다.”
각로 대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
“설령 그 끝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끝까지 관철시키겠다. 이미 시작한 일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흐음, 그런가.”
각로 대사는 ‘그것도 좋겠지’라고 말하며 앞에 놓인 찻잔을 다시 들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말리지 않는 건가?”
“허허, 그런 게 인력으로 되겠나. 인연이 있고,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오겠지.”
“…….”
“왜? 좀 더 강하게 권유하지 않는 게 섭섭한가?”
“그럴 리가.”
텐챠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럼 이번엔 내가 하나 묻겠다.”
“물어보게나.”
“어째서 대화를 하자고 했지? 소림의 방장으로서 나는 보는 즉시 죽여야 할 주적이 아닌가?”
“허어……!”
각로 대사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각운 같은 소리를 하는군.”
허허 웃는 각로 대사와는 다르게, 방문 밖에서 당장에라도 뛰쳐 들어올 것 같은 분노 섞인 살기가 넘실대다가 사라졌다.
방문 앞을 지키던 각운의 것이 분명했다.
“소림사엔 면벽구년이라는 것이 있다네.”
“면벽…… 구년?”
“강호에서 흉악한 짓을 일삼던 마두들을 계도하기 위해 좁은 방 안에서 벽을 마주 보게 하고 구 년간 참회시키는 것이지. 어때? 한 번 해 볼 텐가?”
각로 대사는 조금 전 머리를 한 번 밀어 볼 거냐고 묻던 것과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거절한다. 어째서 그런 걸 해야 하지?”
“허허, 이제껏 살아오면서 참회할 것이 한 번도 없었나?”
“…….”
“마음의 번뇌를 홀로 지우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라도 번뇌를 지울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그 말을 하는 각로 대사는 마치 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다.”
텐챠이의 대답은 어쩐지 처음만큼 단호하지 못했다.
“소림 방장.”
“허허, 왜 그러나?”
“이미 알고 있겠지만, 조만간 남경에서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 싸움에서 내가 이긴다면 대륙은 나의 것이 될 테고, 그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북천맹은 사라질 것이다.”
“허어, 당금의 황제는 철혈의 명운을 타고났으며, 넓은 대륙엔 인재가 모래알만큼이나 많지. 어째서 남경의 싸움이 북천맹의 명운을 가른다고 생각하는가?”
“……그 녀석을 빼면 나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 녀석? 무쌍귀를 말하는 건가?”
“…….”
텐챠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거구의 육체.
강렬한 위압감이 방장실을 가득 채웠다.
“오늘의 호의는 기억해 두지. 북천맹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소림사는 그대로 남겨 두겠다.”
“허허, 그것참, 고맙군.”
텐챠이는 삿갓을 다시 눌러쓴 뒤 방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각운과 팔대호원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텐챠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주.”
“…….”
그리고 떠나려는 순간, 처음으로 각로 대사가 그를 시주라 불렀다.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소림으로 오시게. 소림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반장을 취하며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 각로 대사는 언제나처럼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텐챠이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손으로 더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속에서 소림을 떠나가고 있었다.
“방장!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오?”
텐챠이가 소로(小路)를 지나 시야 너머로 사라진 뒤, 각운은 각로 대사를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평소 엄격한 소림의 규율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금의 각운은 그런 규율을 생각지 못할 만큼 흥분해 있었다.
“각운, 자네는 내가 북천맹주를 잡아들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겐가?”
“당연한 것 아니오! 북천맹은 역도의 무리란 말이외다! 이 일이 자칫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우리 소림은……!”
“팔대호원의 입은 그리 가볍지 않네. 아니면 자네가 다른 곳에 말할 텐가?”
“……!!”
각운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어찌 그런 말을……! 방장! 섭섭하외다!”
“나도 섭섭하네, 각운. 어찌 그리 나를 믿지 못할 수가 있나.”
“이건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크흠! 방장께서 인정이 워낙 많다 보니 내가 걱정을 하는 것 아니오?”
“허허, 그럼 냉정하게 이야기해 볼까?”
“방장……?”
“저자를 붙잡으려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어야 할 것 같나?”
“뭣……! 소림의 승려가 언제 그런 계산을 하고 싸웠소? 막아야 할 자가 있으면 설령 모두가 죽더라도 싸워야 하는 것 아니오?!”
각운은 소림의 승려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고집과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소림 내에서 지객당주라는 직위를 얻을 수 있던 것이다.
“허어! 각운, 자네는 매번 입버릇처럼 범오가 수양이 덜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네도 아직 마음 수양이 덜 되었어.”
“방장!”
“면벽구년 좀 해 볼 텐가?”
“……!!”
각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각로 대사의 눈을 보며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꿀꺽.”
각운은 조금 냉정을 되찾은 채 입을 열었다.
“방장, 아무리 그래도 이건 가볍지 않은 사안이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소이다.”
“납득할 만한 이유라…….”
각로 대사는 찻잔에 남은 찻물을 마지막으로 들이켜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지않았네.”
“방장……?”
“북천맹주를 잡아 두기 위해선 소림 전력의 반을 걸어야 한다거나, 나조차도 죽을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변명밖에 안 될 걸세.”
“설마, 그런……!”
각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중요한 건…… 북천맹주의 생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네.”
“……!!”
“소림은 무파이기 이전에 불문. 답을 찾아 방랑하는 중생에게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주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각운은 혼란스럽게 눈빛이 흔들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림 방장 각로 대사.
그의 ‘삶’을 보는 능력은 소림에서도 각 자 항렬의 일부 고승들만 아는 극비일 만큼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가 북천맹주의 삶이 곧 끝난다고 한다면…….
그건 그대로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알겠소이다.”
각운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합장하였다.
각로 대사는 한 손으로 반장을 취해 그에 답하며 텐챠이가 사라져 간 방향을 응시했다.
‘빨리 번뇌를 끊어 내게나. 그렇지 못하면…….’
아련하게 깊어지는 각로 대사의 눈동자.
붉게 타오른 노을은 어느새 다가올 밤하늘을 마중하듯 어두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