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0화 (90/686)

第百七章 ― 천직등용(天職登用)

“기린, 어림군과 금군, 그리고 팔기군을 맡아 다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고 있던 장기린은 그 말에 섬광이 번뜩이듯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림군과 금군.

그들은 금의위 예비군이라 불리는 황실의 정예병이었다. 항상 황제가 거하는 곳만을 호위하며, 평소엔 황궁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는 존재들.

실전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은 조금 흠이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무예가 출중한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게다가 팔기군의 병사들은 장기린도 직접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일만의 군세가 팔기군이다.

황실에서 지방이나 국경에 보내는 증원군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부와 서부, 북부나 남부를 가릴 것 없이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경험 많고 강인한 군대였다.

‘팔기군의 책임자가 이호성(李呼聲)이었나? 나이 많고 괄괄한 노친네였지.’

워낙 공을 세우는 데 관심이 없어서 대장군은 되지 못했지만, 전투가 뭔지 아는 진짜배기 장수가 바로 이호성이다.

그런 그가 남경 공략전에 나선다면 아직 제 틀을 깨지 못한 원회보다는 훨씬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어림군과 금군, 거기에 팔기군까지 동원되면 확실히 남경 공략은 훨씬 수월해진다. 대신 황궁의 방비가 사라져 버리고…… 거기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지.’

황제가 제의한 것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숨겨져 있었다.

어림군이 오천, 금군이 일만, 팔기군의 숫자가 일만.

즉, 도합 이만 오천의 정예 병사들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한 병력을 맡으라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직위’ 또한 받으라는 뜻이다.

“폐하, 대장군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영락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명 제국이 생긴 뒤로 최연소의 대장군이 나오는 것이지만, 짐이 그 정도는 무마시킬 수 있다.”

“하나…….”

“이번만큼은 반론을 용납지 않겠다. 나라가 너를 필요로 한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느냐?”

황제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장기린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 나라엔 숨겨진 인재들이 많습니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대장군의 그릇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명 제국은 큰 나라입니다.”

“쯧, 적합한 인재가 그리 많다면 원회 같은 자가 대장군 후보로 올라가 있겠느냐?”

“…….”

황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현백.”

“……!!”

장기린의 고개가 휙― 하고 들어 올려졌다.

황제의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백.

장기린의 어린 시절부터의 친우이자 황실제일의 두뇌가 황제와 함께 와 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품이 넓은 백색의 문사복을 입은 백택과 검은색 무복과 삿갓으로 전신을 가린 반야혼도 함께하고 있었다.

“폐하, 대장군이라는 직책은 한 번 받으면 평생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린으로서는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야생의 새는 사람의 손에 잡히면 오래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폐하.”

황제는 심기가 불편해진 듯 미간을 좁혔다.

“괜히 물어봤군. 너는 어째서 이렇게나 기린의 편만 드는 것이냐?”

“편이라니,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현백은 황제의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평소대로 말했다.

“원치 않는 자리에 억지로 앉혀 봤자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기린은 부담스러워할 것이고, 간부들 입장에선 느닷없이 나타나 대장군의 자리에 앉은 기린을 곱게 보지 못할 터입니다.”

어림군, 금군, 팔기군.

어느 곳이든 자부심이 대단한 곳들뿐이었다. 그런 자들이 갑자기 나타난 젊은 대장군의 명에 순순히 복종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흠, 그 정도쯤은 기린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장기린에 대한 믿음은 그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기린.”

“예, 폐하.”

“너에게 보검을 하사하겠다. 반기를 드는 자가 있다면 그걸로 베어 버리도록.”

장기린은 고개를 숙인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누구든 베어 버릴 수 있는 검이라니.

즉, 어림군이나 팔기군의 수장이더라도 마음에 안 들면 죽여도 좋다는 건데, 일군의 장수를 그렇게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정만으로도 황제가 그를 얼마나 등용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전례없는 과감한 처사. 과연 황제 폐하답군.’

장기린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청이 있습니다.”

“말하라.”

“만년화리의 금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년화리…… 금구……?”

“예, 폐하. 만년화리라 불리는 영물의 내단인데, 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흐음.”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사랑하는 여인이라…… 그렇군, 그래서였군.”

“…….”

“그게 필요했기에 남경을 탈환하는 싸움에 자진해서 나선 것이었어.”

황제의 두 눈은 언제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그는 항상 싸움터로 되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던 장기린이 어째서 전장으로 돌아왔는지도 추측해 내고 있었다.

“거기에 두 눈에 가득한 적의와 복수심. 혹시 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상처 입힌 것도 원의 역도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만년화리의 금구라……. 그 이야기를 내 앞에서 꺼낸다는 것은, 그 물건을 구해 주면 내 뜻대로 싸워 주겠다는 의미로 봐야 하나?”

장기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피슉!

그 순간, 황제의 등 뒤에서 날아온 푸른색 불빛이 장기린의 왼쪽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이 목덜미를 적셨다.

위험천만했던 순간.

공격의 궤도가 조금만 안쪽으로 꺾였어도 장기린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무엄하다.”

장기린은 시선을 조금 들어 그에게 공격을 가한 상대를 바라봤다.

품이 넓은 흰색 문사복에 마른 체구.

거기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안광을 빛내는 것은 황실의 수호신이라고 암묵적으로 불리는 백택이었다. 백택이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감히 폐하와 거래를 하려 드는 건가.”

백택은 화를 내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대하기 껄끄러워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너를 키운 것은 공손웅 대장군이었으나, 너에게 이름을 내린 것은 여기 계신 폐하이시다. 그 은혜를 모른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짐승에 불과하다.”

“……알고 있소.”

장기린은 백택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폐하께서 항상 날 지켜봐 주셨다는 것도, 지금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특권을 주시며 배려해 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렇다면 폐하께 조건 같은 것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 텐데?”

“하지만 나와 평범한 삶을 함께하기 원하는 가족들을 배반할 수도 없소. 그리고 폐하께는 내가 아니어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있지만, 나의 가족들에겐 오로지 나 한 사람뿐이오.”

백택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장기린을 지그시 응시했다. 백택에게 하고 있으나, 사실은 황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의 확고한 결심을 황제에게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하거라, 백택.”

황제는 손을 들어 백택의 말을 막았다.

“만년화리의 내단이라……. 백택, 황실에 그런 게 있나?”

“…….”

백택은 개운치 못한 얼굴로 황제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음, 그런가. 세 개가 있군.”

백택은 황제의 뒤에 조용히 시립했고, 장기린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세 개라니!

대륙 전역을 뒤져 봐도 찾기 힘들다던 만년화리의 내단이 세 개나 있다니!

‘과연 황실 보고라 해야 하는가……!’

황실 보고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건 주원장이 명 제국을 건국할 때 쌓인 재보이기도 하고, 각지의 관료들이 철혈의 황제에게 잘 보이고자 행사 때마다 가져온 희귀한 진상품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찾기 힘든 보물들은 다 황실 보고에 있는 것이다.

“나는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는 것의 가치는 잘 모르지만, 황실 보고에 들어가 있다면 범상한 물건은 아닐 테지.”

황제는 자신의 턱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용의 불꽃처럼 강렬한 안광이 한층 더 강하게 타올랐다.

“짐은 아무리 아끼는 신하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는다. 묻겠다, 기린. 내가 그 물건을 내놓는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지?”

황제는 마차의 좌석에 앉은 채 지그시 장기린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번뜩이는 모습이, 마치 장기린이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경을 탈환해 드리겠습니다.”

“호오.”

황제의 눈이 번뜩였다.

“과하다.”

“폐하?”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경의 가치에 비해선 과하다. 그렇게 되면 짐이 빚을 지는 셈이겠군.”

“……저에게 있어서는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장기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황제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제가 살리고 싶은 여인은 저에게 있어 남경보다 중요합니다.”

한 여인이 남경보다 중하다.

실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으나 장기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진솔했다.

“물건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황제는 깊어진 눈빛으로 장기린을 응시했다.

“한 여인과 남경이라…….”

“자, 자!”

짝! 짝!

그때, 뒤쪽에서 현백이 박수를 치며 나섰다.

보통 사람이 황제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간 그야말로 ‘목이 잘려 나갈 대죄’지만, 싱글싱글 웃는 현백은 왠지 그 문제를 탓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폐하, 이렇게 하시죠. 기린에게 임시로 대장군의 직위를 하사하는 ‘칙령’을 내리는 겁니다. 그럼 상부상조하며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시라니. 내가 어림군, 금군, 팔기군을 주겠다고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하나, 기린은 평범한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과한 포상은 절대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기린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 이참에 천하만민을 다스리는 제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후세에 길이 전해질 미담을 하나 남기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현백은 드물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차의 좌석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없건만, 사람의 마음만은 쉽게 손에 들어오질 않는구나.”

황제의 목소리에선 회한이 묻어났다.

“그 여인이 사라지면 군에 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

장기린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황제는 한다면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휘연이 없어지면 장기린이 군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

단순히 상상하는 것을 넘어, 분명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구상해 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 그래서야 완전한 악역일 테지. 계란을 얻고 싶다고 하여 닭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해서야 명 제국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황제는 마차에서 내려 장기린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장기린의 눈앞에 황제의 사내다운 얼굴이 비춰졌다. 어딘가 지치고 피로해 보이는 모습. 오늘따라 그의 얼굴에선 유난히 연륜이 느껴졌다.

‘황제도…… 늙는 것인가?’

장기린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흐르는 시간은 제국의 황제에게도 차별없이 손을 뻗치고 있던 것이다.

“임시로 너에게 대장군의 자리를 주겠다.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말도록 하라. 짐이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양보이니라.”

“감사합니다, 폐하.”

장기린은 다시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사실 황제가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이 대장군의 직위도 받아들였어야 할 터.

하지만 그렇게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는 점이 당금 황제의 대단함이었다.

세간에선 철혈의 황제이며 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불리고 있지만, 실제론 이렇게 자신의 신하에게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성군이기도 했다.

“남경을 탈환할 수 있겠느냐? 너를 믿고 전장의 모든 권한을 주어도 되겠느냐?”

“반드시 남경을 되찾아오겠습니다, 폐하.”

“좋다. 믿겠다.”

황제는 위엄에 가득 찬 모습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만년화리의 내단은 곧바로 내주겠다.”

“아……!”

“너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인물이지. 그러니 위험에 빠진 생명부터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 터.”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공적을 세우기도 전에 그에 대한 대가부터 제공하다니. 황제가 이렇게나 잘 대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이건 옭아매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황제는 타고난 성품상 순수한 호의를 베풀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아마 이에 대한 대가는 클 것이다. 어쩌면 남경을 수복하는 것만으로는 다 갚지 못할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하나 장기린에겐 그런 계산적인 호의를 거절할 이유나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감사의 인사만을 올렸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황제가 미리 준비해 온 듯한 증표를 하사받고, 현재의 전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하게 보고한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현백이나 반야혼과는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황제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이 남아 있었으며, 그 자신도 지금 행군하고 있는 삼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서로 간에 간략한 눈인사만으로 헤어진 뒤, 장기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연.’

만년화리의 내단을 구했다.

휘연이 살아날 수 있는 길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이르다.

내단을 구했으나, 그건 결코 공짜로 얻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얻은 보물에 대한 대가.

그리고 객잔의 가족들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한 복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야만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휘연.’

장기린은 걸음을 재촉했다. 삼천 명의 병사들과 적룡기마대가 다가오고 있는 그곳을 향해.

☆ ☆ ☆

하남 숭산.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입구 쪽의 촌락을 지나, 한 쌍의 남녀가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남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청색 빛이 감도는 도복을 입은 노숙한 인상의 청년.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으려는 듯한 소녀였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도대체 이게 뭐예요? 한 달로 잡고 있던 여정이 석 달이나 걸리도록 길어졌잖아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통나무 솟대를 지날 때쯤 소녀 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평을 해댔다.

“화 매, 그렇게 화내지 마. 그래도 그 덕분에 하남의 지리를 잘 알게 되었달까……. 좋은 일도 많았잖아?”

“무슨 좋은 일이요? 도저히 마차로는 지날 수 없는 험한 길이 나와서 결국 마차를 버린 일이라든가, 길을 잃는 바람에 산적들의 산채를 화전민들의 촌락인 줄 알고 갔다든가 하는 그런 거요?”

“아니, 저기…… 그건 화 매가 돈이 부족해졌으니 산적들 주머니라도 털자고 해서…….”

“시끄러워욧! 제가 언제 그랬어요! 저는 그 지역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구요!”

자그마한 체구로 가슴을 쭉 내밀고 말하는 소녀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별거 아닌 의복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을 뿐인데도 왠지 모르게 고귀해 보이면서 외모가 빛이 난다.

성장 후의 미모가 기대되는 소녀였다.

“그래서, 백 오라버니는 지금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거예요? 한 달짜리 여정이 세 달로 늘어난데다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나 힘들고 지쳤는데?!”

“…아, 알았어. 내 잘못이야. 미안해.”

“그걸로 끝?”

“그럼……?”

“저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요.”

예쁘장한 인상의 소녀.

구양화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길가로 다가가 꽤 큰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빨간색 당혜를 벗자 조그마한 발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새하얀 피부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걸어온 흔적이다.

아무리 구양화가 거대세가의 외동딸이고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무공을 배웠다지만, 아직 장시간 먼 거리를 걸어오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아, 많이 상했네.”

“뭐라고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도복의 청년.

백연은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말했으나, 정작 그 말을 들은 구양화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숙녀의 발을 보고 하는 감상이 ‘많이 상했네’라뇨! 지금 제 발이 상한 계란 같다는 거예요?”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무도 안 했잖아!”

“흥, 속으로 생각했겠죠.”

“너무 흥분하지 마, 화 매. 난 그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백연은 구양화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발을 주물러 주었다.

진지한 얼굴로 자그마한 발을 주무르는 백연은 마치 천하에 다시없을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경건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 때문인지 싸늘하게 굳어져 있던 구양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만해요.”

구양화는 손을 내저으며 백연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잠깐만, 어혈이 뭉쳤을 땐 지압으로 풀어 줘야 하는 거야. 나도 수련을 많이 해서 발이 상했을 때, 사부님이 곧잘 주물러 주시곤 했어.”

“그, 그치만……!”

“그치만?”

백연은 대답을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발바닥의 중심과 골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손놀림은 놀랍도록 능숙해서 손의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던 구양화의 얼굴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뭐, 됐어요.”

구양화는 기묘한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됐다!”

백연은 구양화의 양발을 모두 정성스레 주물러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일어서 봐. 한결 나아졌을 거야.”

“…….”

“이제 산길을 오르기만 하면 소림사야. 거기에선 푹 쉴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으으……!”

구양화는 어째선지 마뜩찮은 눈으로 백연을 노려보았으나,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뭘 바라겠어.”

“어? 뭐라고 했어, 화 매?”

“가요! 가! 발바닥이 부르틀 때까지 가 보자구요!”

“저기, 내가 추궁과혈을 해 줬으니 이제 괜찮을 텐데…….”

“그러니까 가 보자구요!”

구양화는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고, 백연은 난감해하면서도 그 뒤를 성실하게 따라갔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산문에 도착한 백연과 구양화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소림승 두 사람의 태도가 전에 왔을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무당파의 일대 제자 백연이라고 합니다.”

“아, 일해검이시군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불편해질 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소림승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하지만 항상 공명정대하고 관대한 태도를 고수하던 소림승들이 이렇게나 긴장해 있다는 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백연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시골의 순박한 청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백연의 눈빛이 번뜩였다.

‘뭔가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공기.

왠지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소림 내부의 여기저기서 느껴지고 있던 것이다.

“각운 대사께선 안쪽에 계십니까?”

“예.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산문을 지키고 있던 소림승 중 한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안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소림사 내부의 모습은 이전에 찾아왔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고 있는 사미승들이 보이고, 건물 너머에선 소림승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백연과 구양화는 이내 지객당의 방 안으로 안내되었다.

지객당의 승려들에게 차를 한잔 얻어마시면서, 지객당주인 각운이 현재 소림 방장과 대화 중이기 때문에 잠시 기다려야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화 매, 뭔가가 이상하지?”

지객당의 승려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뒤에 백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네요. 전에 왔을 때랑은 분위기가 너무 달라요.”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이야.”

“사실 이곳은 중요한 곳이니까요. 북천맹에서 무슨 수를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걸요?”

구양화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세가의 종손으로서 여러 가지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라 왔다.

병법, 제왕학, 사람을 다루는 법. 그런 것들을 항상 배워 왔기에 또래의 아이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암습…… 이었겠죠?”

“으음, 그렇지 않을까? 대규모 싸움이 있던 것 같지는 않으니.”

“의외로 정면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버린 것 아니에요? 예를 들면 선전포고를 하는 북천맹의 사신이라든가?”

“에이, 설마. 그건 아닐 거야.”

백연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무림맹의 본단이야. 설마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 있겠어?”

“음, 그럴까요?”

구양화는 개운치 않은 듯 살짝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각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하아, 이럴 땐 그 객주님이 계셨으면 좋겠네요.”

한숨을 푹 내쉬며 구양화가 하는 말에 백연은 밝은 얼굴로 동의를 표했다.

“하하, 맞아. 장 객주님께서 계셨으면 이런 일도 쾌도난마로 풀어 나가셨겠지.”

“장 객주님은 묘한 분위기가 있어요. 우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하고 있던 일을 ‘뭐야, 이깟 일로 쩔쩔매는 건가?’라는 듯한 얼굴로 뭐든지 해결해 버린다구요.”

“하하하하! 맞아. 바로 그거야, 그거.”

“정말…… 다들 별일 없이 항주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은 밝게 웃다가 순식간에 침울해지고 말았다.

백연과 구양화.

두 사람은 각자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항주 금선로의 풍운객잔에서 지냈던 시간들은 더욱 소중하고, 또한 가슴이 아려올 만큼 슬픈 추억이었다.

“휘연 언니가…… 보고 싶어요.”

“…….”

“휘연 언니, 잘생긴 휴 오라버니, 어딘가 멍해 보이는 강 숙수님이랑 아칠, 아팔 쌍둥이들도…… 다들 보고 싶어요.”

“……그래. 나도 그래, 화 매.”

“풍운객잔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오라버니?”

“……잘될 거야. 장 객주님은 잠재력의 끝이 안 보이는 사람이니까. 분명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상황을 해결하시겠지.”

“저는…… 얼음 관 속에 누워 있던 휘연 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파랗게 빛나는 냉기 속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차세대 항주제일화라고 불리던 여인이 얼음 관 속에 누워 있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또한 슬프도록 처량해서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구양화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떤 수를 쓰든…… 장 객주님이 빨리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슬픔이 가득한 그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 배어 있었다.

백연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꽤 오랜 시간 친자매처럼 지내던 여인이 마치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은 구양화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주변이 별로 없는 백연으로서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침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 구양화와, 그런 그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하는 백연.

두 사람이 그렇게 침묵에 빠져 있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백 소협, 안에 계신지요?”

백연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백 소협을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예?”

백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자신도 지금 소림에 손님으로 막 도착한 참에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화 매?”

구양화에게 의견을 구해 봐도 그녀 역시 이 상황이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그녀를 확인한 뒤, 백연은 방문을 열었다.

“이곳에 저를 찾아올 만한 분은 없을…….”

백연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백연과 구양화를 지객당으로 안내해 주었던 승려가 보이고, 그 뒤에 전형적인 관료로 보이는 사내가 짙은 남색의 문사복을 입은 채 황금빛이 도는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들고 있었다.

관료의 뒤로는 금의를 입은 호위무사 두 사람이 무표정하게 두 손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금의위……?!’

“당신은……?”

“백연은 천하 만민을 다스리시는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으라.”

“……!!”

백연은 깜짝 놀라며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명이라면 지금 황제가 눈앞에 와 있는 것과 같은 권위를 지니는 만큼, 그에 대해 예를 표하지 않는다면 역모의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받으라.”

“아…… 예.”

백연은 조금 당황하며 관료가 건네주는 황금색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본래는 칙령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서 낭독해야 하나,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고 하였으니 칙령을 직접 그대에게 하사한다.”

“아, 예.”

백연은 허둥지둥하며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였다.

“이건……!!”

두 눈이 절로 크게 떠지고, 헛바람을 들이켠 가슴은 격하게 두근거렸다.

백연은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칙령 안에 쓰여는 내용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던 것이다.

‘설조조조조취도라더니……!’

설조조조조취도(說曹操曹操就到)

조조를 말하니 조조가 온다는 뜻이다.

호랑이를 말하면 호랑이가 찾아온다. 불행을 말하면 불행이 닥쳐온다.

남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벌어진다.

그야말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전설이었으나, 이렇게 실제로 겪고 보니 이젠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을 듯했다.

‘황제 폐하가…… 어째서…… 이런……!’

백연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칙령을 전달한 관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손바닥만 한 목함을 꺼내 백연에게 건네주었다.

“칙령의 내용을 읽었다면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자비롭고 관대하시지만,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엄정한 국법에 맞춰 처벌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잊지 말고 국무를 수행하기 바란다.”

‘국무……!’

관료는 직접적으로 국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이것은 어명이며, 국가가 내린 임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백연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반드시 차질없이 수행해 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다. 폐하께는 그 대답과 의지를 빠짐없이 전하겠다.”

관료란 명분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족속이다.

그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고, 등 뒤를 지켜 주는 금의위의 호장들과 함께 곧바로 소림사를 내려가 버렸다.

“오라버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관료가 떠나자마자 구양화가 달려와 다그치듯 물었다.

관료를 안내했던 소림승은 금의위 호장들과 마찬가지로 관료를 산문 밖으로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선 참이었다.

“잠깐, 잠깐만.”

백연은 구양화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 자신도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지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백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주변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엔 지금 백연과 구양화, 두 사람밖에 없다.

백연은 주변을 확인한 뒤, 방 안으로 돌아와 방문을 꼭꼭 닫고 관료에게 받았던 목함을 열어 보았다.

화아악―

“……!”

목함을 열자마자 확― 하고 피어오르는 화끈한 열기.

붉은빛의 융단 위로 엄지손가락만 한 금색의 구체가 휘황찬란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구양화의 입이 떡 벌어졌다.

거대 세가에서 온갖 귀한 것들을 보며 살아온 그녀였지만 이런 물건은 또 처음이다.

국보(國寶)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이건 결코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소유해야만 하는 보물이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대단…… 하군……!”

백연은 신음을 흘렸다.

“이게…… 이게, 뭐예요?”

“만년화리의 금구야.”

“……!!”

구양화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진짜요?! 진짜로 만년화리의 금구?!”

“쉿! 화 매, 조용히 해. 이곳이 아무리 소림의 경내라지만, 이 일은 함부로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일이야.”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단이 지금 눈앞에 있다.

공력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들에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절세 무공의 장보도가 나타난 것만큼이나 큰 반향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셨어. 이 칙령을 한 번 볼래?”

“아……!”

구양화는 백연에게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쭉 읽어 보았고, 백연과 마찬가지로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객주님이……!!”

“그래, 우리가 조금 전까지 말하던 그 장 객주님이야.”

“정말, 예상 밖에 일만 벌인다니까! 내가 그랬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매번 문제를 해결한다니까요!”

“그래, 정말 그래.”

구양화는 깡충깡충 뛰면서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돕는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인물인 겁니까, 장 객주님.’

백연은 장기린이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공포의 상징으로 세간에 알려진 철혈의 황제가 직접 나서서 보물을 하사해 준다.

대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오라버니, 그럼 이걸로……!”

“그래, 진 소저를 구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럼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죠!!”

구양화는 당장에라도 나가려는 듯 벗어 두었던 피풍의를 다시 입고 당혜를 신었다.

“당장 가요!!”

“……그래, 가자.”

백연은 구양화를 따라나섰다.

아마 지금쯤 지객당주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오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급한 일이 있었다.

사람의 인적을 찾을 수 없는 곳.

흑신의라는 의가의 거물이 은거해 있는 곳으로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백 소협,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지객당주께서 곧…….”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내려가 봅니다! 당주님께는 사과의 말씀을 꼭 전해 주십시오!! 조만간 다시 한 번 찾아오겠습니다!!”

백연은 등 뒤로 소림승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뛰어서 내려갔다.

소림의 산문이 보이지 않을 때쯤엔 발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절룩거리는 구양화를 등에 업었다.

한시가 급했다.

품속에는 황금색 두루마리와 손바닥만 한 목함을 품고, 백연과 구양화는 그렇게 석 달간 온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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