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1화 (91/686)

第百八章 ― 현실직시(現實直視)

명 제국의 수도 중 하나인 남경은 진이나 육조시대엔 건강성(建康城)이라고 불렸다.

본래 건강성은 진회하(秦淮河)라고 불리는 하천의 남쪽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에 건업이라 불리는 도읍지가 바로 이 남경을 뜻한다.

위치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지만,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언제나 큰 도읍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륙 전역을 망라하는 상권의 중심이며, 사람의 통행과 물류 이동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다. 국자감이 있고 온갖 종교들이 모여 있는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남경의 인구는 오십만. 그리고 남경의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하루에만도 십만에 달했다.

남경은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백성들의 주거지와 상업 지구, 황성을 포함한 내부 궁전과 서북쪽의 군영이다.

남경은 성 둘레가 약 칠십 리.

반경으로 따지면 약 오 리에 달하는 큰 원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남경’이라는 것은 꼭 성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남경이라고 하면 남경으로부터 그 둘레가 약 백팔십 리나 되는 거대한 지역을 말하며, 남경의 방어를 위한 하천이나 호수 같은 산악 지형도 포함한다.

그중 북천맹이 확실히 장악한 곳은 응천부성 내부.

즉, 둘레 칠십 리의 성벽 안쪽만이 현재 북천맹의 권역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농사를 짓거나 야채나 과일을 수확하는 평범한 농민들은 대부분 응천부성 바깥의 농지에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직접적으로 북천맹에게 지배당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상황이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명 제국이 건국된 이후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강장군 원회가 계속해서 고집하고 있는 남경 공략전의 식량이 그들로부터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강제 징발이다.

농민들이 한 해 동안 먹어야 할 식량들을 남김없이 차출해 갈 뿐만 아니라, 한창 농사일을 도와야 할 시점에서 농가의 젊은이들을 병사로 징발해서 데려간 것은 일년 농사를 통째로 망쳐 버리는 큰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식량과 젊은이들을 차출해 갔으면 제대로 지켜 주기라도 해야 하건만, 파강장군 원회는 북천맹에서 보낸 무뢰배들이 남경 인근의 마을들을 유린하는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받을 것만 받고 의무는 내팽개친 것이다.

결국 남경 인근의 촌민들은 원회와 북천맹, 양쪽에게 각각 재산을 두 배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명 나라도 끝이구나!”

“아이고, 이제 우린 죽었구나. 한 해를 날 식량을 다 뺏겼으니 어떻게 살아가나!”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전쟁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특히나, 나라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겐 더더욱 혹독한 것이 전쟁이다.

남경 인근의 사람들은 결국 농지에서 손을 뗀 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그나마 평생의 터전을 버릴 수 없던 사람들은 원회나 북천맹에 의해 철저하게 빼앗기고 유린당했다.

남경을 강탈당하고 반년.

어느새 남경 인근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지혜가 많고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여 지다화(智多花)라 불리는 모용소희는 진회하의 남부를 통과할 때 즈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게 정말 명 제국…… 아니, 남경 인근의 땅인가요?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요?”

“…….”

“말해 보세요!!”

모용소희는 평소엔 보이지 않던 날카로운 태도마저 보였다.

장기린과 부운화는 물론이고, 대열의 선두를 지키며 움직이고 있던 적룡기마대원들은 모두 껄끄러운 심정으로 그녀를 외면했다.

지금 참담한 심정을 느끼는 것이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 모습을 무심히 넘길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이 봐 온 전장의 모습은 이보다 참혹했으면 참혹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룡기마대에겐 이미 그런 쪽의 ‘상식’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모습은 일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터에 예가 어디 있고 절제가 어디 있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빼앗는 거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가차없이 부수고 짓밟는다.

그것이 전장의 법칙.

강자존(强者存)이다.

적룡기마대는 공손웅이라는 덕장(德將)과 장기린이라는 엄격한 대장 때문에 약탈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대가 약탈을 하고 노략질을 했다.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본전이라도 찾자는 생각에서 그런 행위를 하고, 군을 이끄는 장수들도 대부분 병사들의 그런 행위를 알고 있으면서도 군의 사기를 위해 모른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장에선 익숙한 일이라고 해서 규중화처럼 곱게 자란 여인에게까지 그런 것에 익숙해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용소희가 의견을 물을 때마다 적룡기마대의 대원들은 못 들은 척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조용히 하시오.”

모용소희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쌀을 가득 실은 수레 위에 걸터앉아 있는 장기린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장이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 당연한 곳이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겠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시오.”

장기린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살이 떨릴 만큼 냉정했다.

“장 대협……!”

모용소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장기린을 마주 봤다.

“어떻게 이런 광경을 보고도 그렇게 무심하실 수가 있죠? 보세요. 이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나라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저 사람들이 장 대협의 눈엔 안 보이나요?”

모용소희는 멀찍이서 행군하는 병사들을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장기린의 눈에도 보인다.

거지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들은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일 것이다.

그나마도 늙은 노인과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뿐, 젊은 사내나 여인이 어찌 되었는지는 굳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이 불쌍해 보이시오?”

“당연하죠! 저 사람들을…… 저대로 놔두면 안 돼요. 어떻게든 해 줘야 한다구요.”

모용소희는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불편하군.’

모용소희는 인정이 많고 따스한 심성을 지녔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장기린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도울 것이오?”

“네?”

“참고로 나는 남경을 공략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군량미를 준비해 왔소. 저들에게 나눠 주었다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병사들에게 밥을 못 먹일 수도 있을 테지.”

“꼭 쌀이 아니더라도…….”

“쌀이 아니면? 돈이라도 줄 것이오? 준다면 얼마나 주겠소? 당신이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내놓는다 해도 저들이 그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십 일? 보름? 그럼 그 후엔? 그 후엔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면 되겠소?”

“……저희 가문에 요청해서 지원해 주겠어요.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준다면…….”

“저들이 왜 목숨마저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시오?”

“…….”

“저들은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오. 그런데 새로운 터전을 준다고 한들 따라갈까? 게다가 저들을 구한다고 한다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이오? 둘레 백팔십 리의 공간을 아우르는 지역을 다 구할 수 있소?”

모용소희는 입을 꾹 다물고 분한 듯이 장기린을 노려봤다.

그녀는 도움을 구하려는 듯 주변을 살폈지만, 주변에 있는 적룡기마대는 모두 묵묵히 정면만을 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전부는…… 구할 수는 없어요.”

“그렇소.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빨리 움직여서 한시라도 빨리 남경을 탈환하고, 이 인근을 명 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되돌려 놓는 것이 우선일 것이오.”

모용소희는 우둔한 여인이 아니다.

지다화라 불릴 정도로 두뇌가 뛰어난 여인이기에 장기린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기 이전에 무인이며, 무인이기 이전에 정파의 강호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사람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어요. 그건 협(俠)이 아니라구요.”

“정도 무인의 신념이라는 것이오?”

모용소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천상 군인처럼 행동하던 장기린이 정도 무인의 신념을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요, 신념이에요.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도 어려운 사람을 눈앞에 두고 모른 척 돌아갈 수는 없어요.”

“잘됐군.”

“네?”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버려 두고 가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은 아니오. 그러니 이제부턴 소저와 정도무림맹의 무인들이 저들을 보살펴 주시오. 전부는 무리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돕더라도 큰 힘이 될 것이오.”

“……!!”

모용소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치명적인 역습을 당해 버렸다.

설마 거기서 ‘그렇게 돕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요. 무림맹의 사절단은 장 대협과 행보를 함께해야만 해요.”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는 결전을 위해 아껴 둬도 모자랄 병사들의 힘을 사람들을 돕는 데 쓰지는 않을 것이오. 그건 해결책이 되지 않으니까. 훨씬 빠르고 확실한 해결을 위해 남경 탈환에 전력을 다할 것이오.”

장기린은 이를 악물고 분해하는 모용소희에게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소저, 다시 한 번 말하겠소. 전쟁은 장난이 아니오.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무림맹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장기린은 수레에서 내려 대열의 앞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부운화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뒤쪽에 남겨진 모용소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사람을 우습게 보고 있어.”

그녀는 곱게 키워진 규중화가 아니다.

강호무림의 비정함은 결코 전쟁터 못지않다.

물론 거대 세가의 딸로서 부족함없이 자랐으나, 그녀는 무림세가의 여식인만큼 무림강호의 비정함이나 잔인한 숙명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그녀를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두고 봐요! 정도무림인으로서의 협의를 보여 줄 테니까!!”

주변을 온통 쩌렁쩌렁하게 떨쳐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부운화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기린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장기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모용소희 역시도 그가 뒤돌아볼 것을 기대하지 않은 듯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다화 모용소희.

호쾌하기까지 한 그녀의 걸음은 행군을 하는 병사들과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 ☆ ☆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부운화의 물음에 장기린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뭐가?”

“그녀 말입니다. 무림맹 사절단을 한데 모아서 따로 행동하는 것 같던데요.”

“알아서 하겠지.”

장기린은 상관없다는 듯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고, 부운화는 그런 그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대형, 지나치게 무심하십니다.”

“무심? 내가 왜 그녀를 신경 써야 하지?”

“그런 태도가 지나치게 무심하시다는 겁니다. 평소의 대형이셨다면 이 정도로 냉정하진 않으셨을 텐데요.”

“……그런가?”

장기린은 인상을 쓰며 침묵을 지키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인정했다.

부운화는 그런 장기린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런 순박한 대응이라니.

새삼 못 본 사이에 장기린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웃어? 지금 웃은 거냐?”

“하하하, 대형, 죄송합니다. 하하, 웃음을 참을 수가 없군요.”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하는데.”

“하하하하!”

부운화는 더는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고, 장기린은 미간을 지그시 좁혔으나 그 이상 뭐라고 하진 못했다.

그 역시도 지금 자신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여자는 어쩐지 대하기가 껄끄러워. 평소대로 대하면…… 뭔가 크게 잘못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다.”

“그건…… 어쩐지 이해가 가는 이야기군요.”

부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모용소희는 장기린의 연인인 진휘연과 꼭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대하기 껄끄러울 만도 했다.

“그래서 그 반작용이 지금의 ‘과하게 냉정한 태도’라는 겁니까?”

“……그 정도로 과한가?”

“대형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요.”

장기린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부운화는 앞쪽 대열의 적룡기마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 진군 방향을 조절했다.

그러자 약간 비스듬하게 움직이던 행군 방향이 똑바르게 수정되었다.

“대형, 어제 정찰병이 이쪽 지역에서 북천맹의 병사를 발견했습니다.”

부운화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였다.

“병사? 이곳까지?”

“예. 숫자는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이곳에 경계병이 있다는 의미는 큽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아직 전권(戰圈)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전투가 일어날 만한 지역까진 아직 십 리 정도 더 남아 있지 않았어?”

“맞습니다. 아무래도 적의 수뇌부 측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 같습니다.”

“…….”

“병사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뜻이잖습니까?”

부운화가 에둘러 말하는 요점을 모를 리가 없는 장기린이다.

그는 우측으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을 한 번 쳐다본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군.”

그는 이 상황이 상당히 귀찮다고 생각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대형. 무림맹이 뒤를 지켜 주는 값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뒤를 지켜 준다라…….”

“어쩌시겠습니까?”

부운화는 모든 결정을 장기린에게 맡긴 채 묵묵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했다.

“운화.”

“예, 대형.”

“잠시 물을 좀 마시러 다녀와야겠어. 그동안 군을 네게 맡긴다.”

“예, 알겠습니다.”

부운화는 부대에도 물이 준비되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 가서 물을 마시는 이유가 뭔지 되묻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럽게 웃을 뿐이다.

“천천히 마시고 오십시오. 군은 걱정 마시구요.”

“……고마워.”

장기린은 우두둑― 소리가 나게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부대에서 이탈했다.

부운화는 잠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근처에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적룡기마대원들에게 외쳤다.

“정렬! 이동!”

그 한마디에 다들 대열을 다시 정렬하고 행군 방향을 조정했다.

어느새 남경으로 향하는 대로가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남경까지는 앞으로 이틀.

큰 싸움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 ☆

황산파의 장문인인 태양검군(太陽劍君) 종조기는 자신의 길게 기른 백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황산파는 안휘성에 있었다.

안휘는 소림이 있는 하남과 남경이 있는 강서의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남경에서 내륙 쪽으로 흘러가는 물류가 통과하게 되는 첫 번째 도시였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황산파는 오래전부터 안휘에 터를 잡고 있는 남궁세가와 서로를 견제하며 지내 오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주로 합법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혔다면, 황산파는 염상(鹽商)이라는 불법적이지만 막대한 이문이 남는 일에 손을 대서 큰 성세를 이어 왔다.

물론 불법적인 일을 하는 만큼 인근 유지들이나 관료들과의 내밀한 관계는 필수였다.

가끔 가다 위험이 닥쳐오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황산파의 주력인 황산검귀(黃山劍鬼)들이 놀라운 무력과 잠행술로 그 위험들을 ‘제거’해 주고는 했다.

일류 보표들을 대거 고용한 관리들이든, 무림에서 이름을 떨친 고수든.

황산검귀들이 한 번 나서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황산파의 장문인인 태양검군에게 직접 무공을 배웠으며, 거기에 뛰어난 살수비기와 합공도 꺼려하지 않는 독심까지 갖췄으니 상대가 누구든 두려울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엔 그 황산검귀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정도의 무림맹이 발호하고, 그에 소속된 남궁세가와 무당파가 황산파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했기 때문이다.

무당파에선 납탑 도인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리는 태극신장(太極神掌) 태홍(太洪) 진인을 필두로 무력이 뛰어난 일대 제자들을 대거 내려보냈고, 남궁세가에선 최근에 재정비된 가문의 힘을 전부 끌어모아서 황산파를 향해 진격시켰다.

그 두 거파의 합일된 힘은 엄청나서, 만약 북천맹이 지원해 준 기마대나 공을 세우기 위해 새로이 몰려든 흑도 무인 삼천 명이 없었다면 막아 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된 병력 덕분에 승부는 동률이다.

물고 물리는 싸움을 계속하고는 있지만, 좀처럼 결정적인 승부가 나지 않아서 전황은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태양검군 종조기가 중얼거리는 말에, 옆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호우량(胡友諒) 당주가 입을 열었다.

“종 형, 그리 조급해할 일이 아니오. 오왕(五王)의 일인이 되었으니 수하들에게 큰 그릇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황산파의 실무를 대부분 책임지고 있는 호우량은 사적으로는 태양검군 종조기와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였다.

종조기에게 감히 충고를 할 수 있는 것도 호우량이 유일했다.

“우량, 최근에 자꾸 신경이 곤두서는군. 짜증이 나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싸움의 끝이 보이질 않아.”

“마음이 약해지셨소. 상처는 어떻소?”

“괜찮네. 내상은 다 나았으니.”

종조기는 오른쪽 늑골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있은 태극신장 태홍 진인과의 싸움은 종조기에게 꽤나 중한 상처를 입혔다.

태홍은 무당파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한 무인이다. 특히 무당파의 절공인 면장과 격공장에 능해 신장(神掌)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무림십대고수 이상의 무력을 지닌 종조기로서도 싸우다가 부상을 입을 정도의 상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코는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 것이야.”

“하하, 종 형의 신양검(伸陽劍)에 가슴이 갈라졌으니 지금쯤 가슴이 지글지글 타서 죽었을 거요. 오왕의 힘을 여실히 보여 준 싸움이었소.”

호우량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구파 중에서도 수위로 거론되는 무당파의 초고수 중 하나가 가슴이 베인 채 도망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북천맹과 황산파의 이름이 욱일승천하고 있듯, 종조기의 무위도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져 있었다.

황산파가 남궁세가와 무당파라는 두 개의 거파를 상대로 비등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은 종조기의 힘도 컸다.

“하나 방심해선 안 되네. 저쪽엔 아직 창천대협이 남아 있잖나.”

“하긴 그렇소. 듣자 하니 창천대협이 사실 남궁무회를 꺾은 숨겨진 고수라 하더구려.”

“무서운 작자야. 어떻게 그런 무공을 거의 평생 동안 숨기고 살아왔는지……. 그동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창천대협이 인품만 훌륭한 반편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나.”

“맞소, 그랬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종 형. 종 형의 무극신양검(無極伸陽劍)은 이제 세상에 적수가 없소.”

“허허, 그런가?”

“그렇소. 이 기세를 몰아 남궁세가를 싹 밀어 버리기만 하면 안휘성의 땅은 온전히 황산파가 가지게 되는 거요. 그때야말로 종 형이 진정한 왕이 되는 순간 아니겠소!!”

호우량은 이미 그때가 도래한 것마냥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호우량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비록 종조기랑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역시도 절정의 끝자락에 오른 고수였다. 황산파가 북천맹의 비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우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힘을 얻게 되면…… 황산파의 이인자인 그 역시도 일국의 재상이나 마찬가지인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호우량에게 있어서 그건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나는 미래였다.

그렇기에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종 형, 긴히 할 말이 있소.”

“뭔가? 말하게.”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고착 상태 말인데, 단번에 끝내 버릴 수 있는 소식이 들어왔소.”

“호오?”

종조기는 흥미를 보였다.

고착 상태를 끝낼 수 있다니.

지금의 지리한 상황을 깨부술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대가든 치를 용의가 있었다.

“자세히 좀 말해 보게.”

“오늘 오전에 북천맹에서 전갈을 보냈소. 강서성 쪽의 일인데…….”

호우량은 북천맹이 전해 준 소식과 정보, 그리고 그가 생각할 때 황산파에 가장 이로운 행보를 조목조목 자세히 설명했다.

“흐음, 우리 황산파보고 뒤처리를 하라는 말인가? 노골적이군. 체면 같은 건 전혀 차리지 않고 확실히 부려먹겠다는 심보 아닌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종 형, 일단은 왕부터. 그다음은 후에 생각합시다.”

종조기는 호우량을 지그시 바라봤다.

황산파의 실무를 다 책임지고 있으며 비상한 머리로 매번 황산파의 위기를 타파해 주었던 호우량이다.

북천맹의 삼호법과 기마대가 황산파로 쳐들어왔을 때, 일단은 순종하며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한 것 또한 호우량이었다.

“그렇군. 호 제는 야망이 있었군.”

종조기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긴 백염을 쓰다듬었다.

야망?

좋다.

호우량의 야망은 곧 종조기의 위치를 높여 줄 길이기도 했다. 의형제의 의리를 믿는다기보다는 호우량은 든든하게 보호해 줄 종조기라는 방패가 필요하고, 종조기에게는 실질적인 일을 책임지고 처리해 줄 유능한 수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빛과 그림자.

두 사람은 의리나 정보다 더욱 강한 관계로 엮여 있는 것이다.

“이거, 야망이란 말을 들으니까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피가 끓는군. 아무리 늙어도 사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종 형, 하시겠습니까?”

“그래, 해 보지. 이 지겨운 고착 상태를 확 뿌리뽑아 버리자고.”

종조기는 웃었다. 호우량도 웃었다.

다음날 새벽, 종조기와 호우량, 그리고 백여 명의 인원이 야음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황산파에서 사라졌다.

☆ ☆ ☆

“그러니까 요점은! 여러분이 이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거예요. 아니, 오히려 위험하지 않고 경작할 땅도 생기는 거니까 일석이조죠!”

모용소희는 그녀에게 지다화라는 별명을 만들어 준 언변을 마음껏 뽐냈지만, 천성이 순박하고 무지한데다 최근 연이어 가혹한 일을 겪은 탓에 불신이 팽배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없수.”

“데려가서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 거겠지. 다 알아.”

특히 세상 경험이 많은 노인일수록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배신과 절망이 가슴 깊숙히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아이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리로 가시기만 하면 경작할 농지와 돈을 드린다구요. 훨씬 좋은 조건이잖아요.”

“…….”

“안 가시겠어요?”

한 번 고집을 세운 노인들은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제가 한 번 여쭤 볼게요. 이대로 살면요? 이다음에 어떤 희망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 것 없어!”

“없으면 안 되죠! 노인분들이 그렇게 자포자기하면 이 아이들은요? 이런 위험한 곳에서 살다가 아이들이 얼마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면요? 이건 정말로 좋은 기회예요. 이걸 놓치면 그 아이들은 평생 후회할 거라구요!”

“…….”

모용소희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고, 손자손녀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집을 부리던 노인들의 얼굴에도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껏 고집을 부려온데다, 병사들의 행군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람들을 믿고 태도를 바꾸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눈앞의 여인이 얼마나 진솔한 얼굴로 화를 내더라도…… 마찬가지의 문제였다.

“이런 젠장! 모용 소저, 이만 돌아갑시다. 정승 관직도 제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지. 자기들이 싫다는데 뭘 어쩌겠소?”

“그래, 소희야. 이 정도면 할 도리는 다한 것 아니겠느냐.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모용소희에게 얼떨결에 끌려 나온 육모담과 모용소진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육모담과 모용소진은 각자 얼마 전에 입은 상처 때문에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무공을 익힌 건장한 사내들이 그런 모습으로 눈을 부릅뜨니 마을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만두세요. 사람들이 겁을 먹잖아요.”

“하지만 모용 소저……!”

“두 분은 이곳에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건가요? 정도무림의 협의지사로서 이런 모습을 보고 피가 끓지 않나요?”

“…….”

육모담과 모용소진은 입을 꾹 다물며 뒤로 물러섰다.

얼마 전 싸움으로 장기린이라는 사람과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게 ‘무인으로서의 오만함’을 깨부숴 주었을 지언정 평생을 특권 계층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아온 이기적인 심성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들은 이런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모용소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용 소저.”

그런 그녀에게 옆에서 묵묵히 서 있던 명진 도장이 말을 걸었다.

“소저의 심정은 이해하고 이 일은 백번 생각해도 옳은 일이지만, 저희에겐 무림맹에서 내린 임무가 있습니다. 그 임무는 포기하시는 겁니까?”

모용소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다간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둘 다 해내겠어요. 마을 사람들의 마음만 바꾸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명진 도장님도 마을분들을 설득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명진 도장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돌려 대로 쪽을 바라봤다.

삼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행군이라지만, 그 속도는 성인 남성이 전력을 다해 빨리 걷는 것과 같다. 잠깐만 방심해도 놓칠 만큼 상당한 속도인 것이다.

지금도 그들이 잠깐 다른 곳에 시간을 소모한 것만으로도 어느새 대열의 후미가 지평선 가까이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병사들이 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할 수 없지요. 저도 돕겠습니다.”

하지만 모용소희의 고집을 아는데 계속해서 반대만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었다.

명진 도장은 이왕 하게 된 일은 빨리 끝내자는 심산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명진 도장이 도사로서의 복색을 갖추고 있어서인지, 마을 노인들은 모용소희가 말할 때보다는 호의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모용소희의 말은 중간에서 잘라 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명진 도장의 말은 끝까지 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다.

모용소희와 명진 도장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평생을 살아온 땅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는 의견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정말…… 믿어도 돼요? 누나가 책임질 수 있어요? 우리 속이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의 해결은 갑작스러운 순간에 이루어진다.

앞으로 나선 꼬마는 아이다운 통통함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마른데다 삶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두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그 소년이 앞으로 나서자 근처의 노인들이 다들 놀라 이름을 불렀다.

“아호(兒虎)야!”

“나서지 마라! 이건 어른들의 일이야!”

노인들은 어쩐지 이 아이를 어려워하는 듯했다. 마치 불쌍한 아이를 보듯, 바라보는 눈빛에서 연민의 기색이 가득했다.

“상관있어. 이건 우리 삶이 걸린 것이기도 하잖아.”

“아호, 너……!”

“누나, 대답해 줘. 우릴 위한 일이라는 것, 진짜야? 송건상단처럼 우릴 이용해 먹으려고 거짓말하는 것 아냐?”

모용소희는 쪼그려 앉아 아호라는 소년과 직접 눈을 마주 보고 차근차근,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래, 진짜야. 난 지금 너희 마을을 돕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어.”

“……진짜네.”

아이는 모용소희의 눈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 누나가 하는 말은 진짜야. 거짓말 아냐.”

“그래도…….”

“가자, 이제. 할 만큼 했잖아? 이쯤 했으면 엄마 아빠도 뭐라고 안 할 거야. 상 아저씨랑 정 아저씨도 만족했을걸?”

“…….”

“가자, 응? 우리도 이제 풀뿌리만 먹는 건 질렸어.”

아호라는 소년이 말하자 뒤쪽에서 눈을 깜빡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말문을 열었다.

“맞아, 이제 질렸어!”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이사가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야?”

“가자, 가자. 나 가고 싶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노인들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져 갔다. 점차 슬픔이 차오르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노인들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정말로 괜찮은 거요? 우리가 가서 잘살 수 있소?”

아이들의 성화로 균열이 생겨난 마음의 벽은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모용소희는 이제 노인들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요. 모용세가의 이름을 걸고 제가 약속할게요.”

“믿겠소. 믿겠습니다, 아가씨.”

마을 노인들이 울고, 아이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기쁨과 기대,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뒤섞인 눈물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용소희의 눈에서도 투명한 이슬이 맺혀 주르륵 흘러내렸다.

☆ ☆ ☆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번에 모용세가에서 사람들이 오면 그들을 따라가라고 상세하게 가르친 뒤, 모용소희를 필두로 한 무림맹의 사절단은 이미 상당히 멀어져 버린 병사들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거리까 꽤나 멀어졌는지, 일각가량 신법을 사용해 움직였는데도 병사들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모용소희는 입을 꾹 다문 채 다부진 얼굴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녀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아미타불. 모용 시주.”

“아, 계원 스님.”

모용소희에게 다가온 것은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계원이었다.

“잘하셨습니다.”

“네……?”

모용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협의지도를 따르는 것은 정도무림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아…… 네.”

“만약 모용세가 쪽에서 일을 처리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림에서 저들을 돕겠습니다.”

“……!”

모용소희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항상 무표정하고 어딘가 차갑고 오만한 느낌이 들던 계원이었는데, 지금은 그 안에서 한 줄기 따스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의 싸움으로 가장 많이 변한 게 명진 도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틀린 모양이었다.

계원은 변해 있었다. 뛰어난 무공 말고는 텅 비어 있던 그가 이제는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 겠어요?”

“괜찮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계원 스님이 이런 일을 돕겠다고 나서시는 게 신기해서요.”

“……제세구민은 승려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계원은 그밖에도 하남과 가까운 지역엔 소림이 나서서 사람들을 돕겠다고 말했다. 소림승 한 명이 조금 전부터 안 보인다 싶더니, 어딘가에 소식을 전하고 온 모양이었다.

‘부럽네.’

모용소희는 모용세가에 전서를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모용세가 가주는 상당히 계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가문에 이득이 될 게 없다면 가차없이 거절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이득이 된다면 흔쾌히 승낙해 줄 것이다.

현 모용가주는 그런 사람이다.

협의지도를 버리고 상도를 따르는 데도 전혀 주저함이 없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

계원은 아마 모용가주의 그러한 성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 고맙게 받을게요. 혹시 일이 잘 안 풀리면 부탁드려요.”

“아미타불.”

계원은 손에 든 염주알을 굴리며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그 모습을 보자 계원이 어엿한 승려처럼 보였다.

“흡!!”

그런데 눈을 감고 염주알을 굴리고 있던 계원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계원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걷던 명진 도장도, 뒤쪽에서 빈둥거리던 육모담도 황급히 놀라며 대열을 정돈했다.

“이건 누구……?”

“무시무시한 고수입니다!”

명진 도장의 외침이 모두의 귓속을 파고들기도 전에 이미 대로의 저편에서 강력한 기세를 뿌리는 상대가 날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점처럼 작게 보일 뿐인데도 태산같이 느껴지는 위압감에 모용소희는 잔뜩 긴장했다.

“도대체 누구……?”

정면에서 다가오고 있는 사내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데, 휘적휘적 여유있게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앞으로 쭉쭉 뻗어 나왔다.

백발에 백염.

황톳빛 무복을 입었고, 허리춤엔 빨간 수실이 달린 검을 매달고 있었다.

“태양검군……!”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본 것은 지리적으로 안휘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호북의 무당파였다. 항상 온유한 심성을 잃지 않던 명진 도장이 황급히 검부터 빼 들었다.

“황산파의 장문인입니다! 모두들 조심하십시오!”

무림맹의 사절단 모두가 잔뜩 긴장했다.

황산파의 장문인.

태양검군 종조기는 상승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초절정고수였다.

그의 무극신양검은 양강 계열 무공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신공이고, 현재 황산파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무당파와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태양검군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도대체 왜……?”

그런데 그런 태양검군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을까?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황산파는 지금 무당파와 남궁세가를 맞아 비등한 싸움 중이었다. 지금은 그가 이런 곳에 나타날 때가 아닌 것이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오 장 앞까지 다가온 종조기가 뒷짐을 진 채 모용소희와 무림맹 사절단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너희가 무림맹의 아이들인가.”

명진 도장과 육모담 등이 이미 검을 빼 들고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종조기는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정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더니, 과연 나이 또래에 비해 상당한 성취다.”

난데없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들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종조기는 여전히 그들을 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만한 무력마저 갖추고 있다.

“노선배님,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모용소희가 나서서 묻자 종조기의 눈빛이 찰나에 기광을 번뜩였다.

“호오, 선배라고 불러 주는 것이냐?”

“노 선배는…… 노 선배니까요.”

“그렇군. 제법 기특한 아이들이다.”

한때는 흑도의 무인들이라도 무림에선 배분과 항렬에 따라 상대를 대우해 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난세에 누가 그런 예의를 지키겠는가.

요새는 배분이나 항렬에 상관없이 적이면 일단 검부터 빼 드는 게 당연한 세태가 되어 있었다.

“그 기특함을 높이 사서 한 번 물어봐 주마.”

종조기는 모용소희를 지그시 응시했다.

“순순히 잡히겠느냐, 아니면 싸워서 벌주를 마시겠느냐?”

“……!!”

모용소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잡히라니.

결국 종조기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왔다는 게 분명해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요.”

모용소희는 주변 사람들과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한 뒤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종조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백염을 쓰다듬었다.

“그런가? 알았다.”

스릉―!

종조기의 허리춤에서 붉은빛의 적검(赤劍)이 뽑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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