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 철성공략(鐵城攻略)
채채챙!
모용소희를 비롯한 모두가 검을 빼 들었다.
종조기는 지금 북천맹 오왕 중 한 사람으로서 대단한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초절정고수.
무림십대고수 이상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 강자가 그들에게 검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육모담, 명진 도장, 모용소진. 세 사람은 각자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과할 만큼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태만하지 못했다.
종조기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무림을 종횡하던 사람이다.
무력도, 경험도, 위명도…….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치에 올라 있는 상대였다.
“왜 그러는 것이냐? 겁이라도 먹은 건가?”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 눈빛만큼은 뱀보다도 차가웠다.
“큭……!”
육모담은 당장에라도 나서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부상을 당한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있기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건 모용소진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싸움에서 당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에 자신있게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다들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모용소희는 다급하게 외친 뒤 자신들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되살펴 보았다.
모용소진, 명진 도장, 육모담, 계원 스님.
모용세가의 무사 두 명과 무당의 오검 중 세 명, 화산의 무인은 단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소림승은 다섯 명이 모두 남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심한 부상을 입어 병사들이 끌어 주는 수레 위에서 쉬고 있는 처지였다.
‘다 합해서 열하나. 거기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명진 도장과 나, 그리고 계원 스님뿐.’
모용소희는 객관적으로 전력을 평가해 태양검군의 무력과 비교해 보았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도망쳐요!]
“……!!”
모용소진, 명진, 육모담, 계원.
모두가 놀라서 모용소희를 쳐다봤다. 갑자기 귓속으로 파고든 전음은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모용소희가 한발 앞서서 종조기를 향해 외쳤다.
“황산파가 비록 흑도이지만 기개가 있는 문파라고 생각했는데 북천맹에 머리를 굽히다니, 실망이 커요!”
종조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북천맹은 몽고의 이족이 세운 혈맹이에요. 거기에 머리를 굽히고 들어가다니, 당신은 자존심도 없는 건가요?”
모용소희의 말은 안 그래도 종조기가 항상 찝찝하게 생각하던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사람은 본래 치부를 공격받았을 때 가장 분노하는 법이다.
슥―
종조기의 적색 검이 정면을 겨눴다.
가늘게 뜬 두 눈에선 살기가 번뜩였다.
“계집아이가……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종조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검광이 번쩍였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모용소희의 몸이 뒤로 확 떠밀리며 앞머리가 일부 잘려 나갔다.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황색의 가사 자락이 눈앞에서 나풀댔다.
소림의 제일 기재, 계원이 어느새 놀라운 신법으로 거리를 좁힌 뒤 모용소희를 뒤로 밀어 버리고 있었다.
파파팡!
따당!
정신없이 휘젓는 양손에 휘말려 종조기의 검격이 옆으로 비켜났다.
반선수(盤禪袖)에 광한수(廣寒袖).
소맷자락을 사용하는 소림의 무공이 순식간에 두 가지나 교차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계원의 육신이 등불이 꺼지듯 휙― 사라지더니, 마치 손오공이 분신술을 사용하듯 잔상이 허공에서 여러 개로 갈라져 종조기를 포위했다.
‘잔상이 아홉 개! 연대구품(蓮臺九品)이야!’
똑같이 생긴 아홉 명의 승려가 양손으로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묘한 위압감을 만들어 냈다. 소림의 비전 신법 중에 대성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것이 바로 연대구품 아니던가.
그런데 잔상이 아홉 개라는 것은 계원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연대구품을 대성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계원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 장이라는 거리를 찰나간에 좁히며 검격을 날린 태양검군도 강하지만, 그것을 막아 내며 모용소희를 구해 낸 계원도 대단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지난번 싸움에서 소림만 유일하게 다섯 명이 모두 멀쩡한 것을 보고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강하다면, 어쩌면……!’
모용소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와중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계원의 무위는 상상 이상이다.
거기다 이쪽엔 무당파의 기대주인 명진 도장이 있고,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육모담과 모용소진이라는 절정의 무인도 함께하고 있다.
거기에 일류 무인이 열하나.
이 정도면 무림십대고수라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쒸이이익―!
“엇……!”
그런데 그사이, 종조기의 검 위로 새빨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 같은 강기가 아니라, 정말로 ‘불’이었다.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물에 갖다 대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로 변해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종조기는 그런 무시무시한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렀다.
무극신양검.
끝이 없을 만큼 양기를 극대화시킨 검법.
황산파 장문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기이며, 태양검군이라는 불세출의 무인 덕분에 대륙에 널리 이름을 떨친 특이한 무공이었다.
본래 대부분의 무공은 음양과 오행기의 조화를 근본으로 한다.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조화를 이룬 무공이 한쪽으로 특화된 무공보다 깨달음을 얻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한쪽만을 특화시키는 무공으로도 상승의 경지를 돌파하는 천재가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종조기다.
다른 부분은 둘째 치더라도, 무공과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종조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화르륵―!
“계원 스님!”
모용소희가 다급하게 외쳤다.
종조기가 불타는 검을 순식간에 십여 번이나 휘몰아치자, 아홉 개로 분산되어 있던 계원의 잔상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은 물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려던 계원의 본체마저 팔뚝에 큰 검상을 입고 튕겨 나가 버린 것이다.
피슉―!
검상이 꽤나 깊었던 것인지, 계원의 팔뚝에서 뿜어지는 피의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종조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싸움의 기본은 상대가 일어설 수 없도록 확실히 제압하는 것에 있다.
종조기의 불타는 검이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일직선으로 쏘아졌고, 그 끝에는 계원의 심장이 위치해 있었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그때, 사방에서 뛰어든 것은 계원과 함께 왔던 나한승 다섯 명이다.
곤봉을 들고 있는 세 사람이 한 점으로 공격을 집중해서 종조기의 검을 막으려고 했지만, 종조기의 일격을 막아 내는 대가로 곤봉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옆에서 뛰어든 나머지 두 무승이 십팔나한공의 좌우편마(左右騙馬)를 시전하였으나 종조기는 그마저도 간단하게 피해 버리고는 오히려 비스듬하게 휘두른 검으로 치명상을 입혀 버렸다.
“크윽……!!”
무승들이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종조기가 한 발을 옆으로 밀며 몸을 반회전시켰다. 순간, 허공에 그려진 거대한 불꽃의 반원이 어떻게든 돕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던 모용세가의 무인 두 사람의 허리를 양단해 버렸다.
촤아악!
“장오! 강산!”
모용소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허리가 양단되었으니 즉사다.
모용세가의 일류 무인이며 모용소진을 따르던 충직한 수하 두 사람이 허무하게도 일격에 당해 버린 것이다.
“이런…… 이런……!”
모용소진은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도 고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몇 수 버텨 내지도 못하고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있었다.
종조기의 무위는 실로 대단했다. 수하의 복수를 해 줘야 하는데 감히 덤벼들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곤봉이 잘려 나간 무승 세 명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잔뜩 경계한 채 종조기와 거리를 벌렸다.
그럼에도 종조기는 처음과 다름없이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당당히 어깨를 펴고 불타오르는 검을 든 그의 입가엔 미소마저 감돌았다.
“이럴 수가……!”
모용소희는 탄식했다.
계원이 십 초가량 막아 냈던 종조기를 소림 무승 다섯 명이 불과 두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소림무승들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계원이 뛰어나고, 종조기가 그보다 훨씬 강했을 뿐이다.
장오와 강산도 모용세가 내에서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고수들인데, 그런 그들도 일검에 둘이 한꺼번에 당했다.
종조기는 그 정도로 강했다.
무림십대고수를 뛰어넘는다던 태양검군의 무위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는 것이다.
“소림! 겨우 이 정도인가!”
모용소희 쪽이 절망에 빠진 것과는 달리, 종조기는 한껏 흥이 오른 듯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어깨를 들썩인다.
아니, 그는 실제로 부상당한 소림 무승들 방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비키시오!”
그때 나선 것이 명진 도장이었다.
그는 제운종의 가벼움으로 다가가 사상류검(四象流劍)의 엄격한 검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전개하였다.
파라라랑―
검날이 떨쳐 울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영롱하게 퍼져 나갔다.
명진 도장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처음엔 틀에 박힌 검법을 사용하는 듯했으나, 하체를 노리는 삼식(三式)에서 상대의 반응을 보며 중단을 노리는 이식(二式)으로 바꿔 버리는, 그런 종류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묻어났던 것이다.
얼마 전, 부운화라는 강력한 선배를 본 덕분이다.
그는 평생을 수련해 닮아야 할 목표를 찾았고, 그런 목표점을 잡은 것만으로도 그가 지금껏 갇혀 있던 한계를 한 꺼풀 벗어던질 수 있었다.
따앙! 따다당!
“큭……!”
일검, 일검을 부딪칠 때마다 핏물이 울컥 올라올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명진 도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숙께선 소청검과 태청검을 다시 익히라고 하셨다. 기본으로 돌아가 그 본류(本流)를 보라는 뜻! 철저히 기본으로 싸운다! 절대로 스스로를 과신해선 안 돼!’
명진 도장은 부운화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검을 움직였다.
본질적인 무력의 차이는 당장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정신에서까지 질 수는 없다는 각오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마치 끝까지 상대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는 싸움개처럼, 명진 도장은 기본적인 검법만으로 종조기의 검법을 끈질기게 쫓아갔던 것이다.
“허허! 무당의 검법이 이리도 추했던가!”
종조기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듯 명진 도장을 조롱했다.
그의 얼굴엔 짐짓 정파의 명숙인 양 거들먹거리는 표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는 공격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있었다.
때론 급박하게 밀어붙여서 명진 도장이 간신히 방어만 가능하게 만들다가, 어느 때엔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서 공격을 유도한 다음 거꾸로 검을 찔러 넣는 식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 명진 도장은 종조기와 불과 십여 초의 검을 섞었을 뿐인데도 탈진 상태에 빠져 버렸다.
헉헉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팔다리는 좀처럼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허허헛! 좀 더 힘을 내 보거라!”
따당! 따다당!
쩌저정!
“큭……!”
명진 도장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레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날개에 불이 붙은 독수리 다섯 마리가 그의 목을 잡아뜯으러 달려드는 것 같았다. 뜨거운 불꽃이 넘실댔고, 검을 부딪칠 때마다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열기가 몸에 닿았다.
누가 봐도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전투.
슬슬, 종조기가 본 실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진 도장은 유운검에 태청검, 소청검까지 사용했으나, 이미 상승의 경지로 완성된 종조기의 무극신양검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푸화아악!
“크윽……!”
마침내 움직임에 파탄이 나며 명진 도장의 가슴이 비스듬히 길게 갈라지고 말았다.
검에 실린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상처가 생기는 것과 동시에 피부가 녹아내려서,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혈은 거의 나지 않았다.
다만 고통.
검상(劍傷)에 화상(火傷)까지 합해진 극도의 고통은 한순간 명진 도장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끄아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명진 도장의 두 눈에선 이미 초점이 사라졌다.
과도한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이지가 망실된 것이다.
“안 돼! 안 돼요!”
모용소희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원 스님과 명진 도장이 예상 외의 강력한 무공을 보여 줬지만, 그걸로도 각자 십여 초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만큼 종조기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쪽에 아직 일류 무사들이 남아 있다지만, 저 괴물같이 강한 태양검군을 보자 감히 싸워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승산이 없어.’
모용소희는 황급히 좌우와 뒤를 살펴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그런 모용소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종조기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도망치려는 것인가! 한심하구나! 지다화라는 이름이 아깝다! 계집아, 너희에게 이미 퇴로 따윈 없다!”
종조기는 껄껄 웃으며 불타는 검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고, 그러자 무림맹 사절단의 좌우와 뒤쪽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듯 흑도 무인들 백여 명이 나타났다.
각자 다른 복색에 다양한 무기를 지닌 자들이었다.
황산파의 무인이 절반 정도, 나머지 절반은 최근에 합류한 것이 분명한 흑도의 낭인들이다.
황산파 무인들의 선두엔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호한이 위풍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산파의 실세, 호우량이다.
그는 백여 명의 무인들을 지휘하며 모용소희와 무림맹 사절단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당했어……!”
모용소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분한 표정을 지었다.
종조기가 앞을 가로막은 건 사실 치밀한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무림맹 사절단들을 모조리 없앨 계획이었음이 분명했다.
스릉―!
모용소희는 검을 뽑아 들었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면 쓸 수 있는 책략(策略)은 없지 않은가.
무책(無策).
오로지 결사 항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 끝인가…….’
모용소희는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장기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하던 말들이 떠오른다.
현실을 알라고, 전장의 비정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당장에라도 돌아가라고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가 말리는 대로 잠자코 있었으면 좋았을까?
그때 묵묵히 무림맹으로 돌아갔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까?
“아냐.”
모용소희는 고개를 저어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래선 지다화라고 할 수 없다.
그녀가 한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섰던 것도, 어린 소년이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결국은 마을 노인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던 그 일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가 약했을 뿐인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일을 하고, 신념대로 행동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그뿐이었다.
“모두 검을 드세요! 우린 잘못한 게 없어요! 끝까지 당당하게 싸워야 합니다!”
모용소희의 낭랑한 목소리는 절망에 빠져 허둥대고 있던 무림맹 사절단의 무인들에게 결사 항전의 의지를 일으켜 주었다.
모두가 검을 빼 들고 눈을 맑게 빛낸다.
비록 아직 철부지에 불과한 젊은이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정파의 무림맹으로서 ‘옳은 편’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당당해야 한다.
올바른 편에 서서 죽는 그 순간까지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것 또한 정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싸우자!”
“북천맹의 역적들을 하나라도 더 쓰러뜨리고 죽자!”
모두가 고함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그 속에는 모용소희도 있었다. 그녀는 부상당한 계원과 명진 도장, 육모담과 모용소진을 데리고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종조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검에서는 섬뜩한 위압감이 가득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는 법이다.
종조기를 노려보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던 모용소희의 눈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황산파 무인들 중 일각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콰직! 콰드득!
“으아악―!”
비명과 함께 대여섯 명의 황산파 무인들이 핏덩이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태양검군 종조기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뭐, 뭐냐?”
“적이다! 싸워라!”
“황산검귀! 모여라! 모여서 저자를…… 커헉!”
앞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던 황산파의 무인 한 명이 무기가 박살 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성큼성큼 달려오는 움직임은 꼭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를 닮아 있었다.
검은색 무복에 뒤쪽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
뭉개진 오른쪽 귀가 선명하게 눈에 비쳐진다.
“장 대협?!”
모용소희가 신음하듯 이름을 불렀다.
나타난 것은 장기린.
얼마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가 구하러 온 것이다.
‘당신은……!’
모용소희는 온갖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을 느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장기린이 구하러 와 준 것은 기쁘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다시 살아나게 된 것도 기분 좋다.
하지만 이렇게 몇 번이나 구해지며 장기린에게 짐이 되어서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도, 아니, 우리도 무림맹에선 제법 강하다고 자부하는데…….’
모용소희는 분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무림맹에서 제법 인정받는다고 오만했던 그들이 바보 같지 않은가.
“저놈은……!”
놀라운 것은 종조기의 반응이었다.
그는 장기린이 나타난 것이 예상 안에 있었다는 듯이 호우량을 향해 손짓을 했다.
호우량은 곧바로 수하들을 향해 뭔가 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황색 무복을 입은 황산파의 검귀들이 뒤쪽으로 빠져 나갔다.
마치 중요한 병력은 뒤로 빼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졸지에 멋모르고 끼어든 오십여 명의 흑도 무인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장기린은 무인지경으로 헤쳐나가 순식간에 그 포위망을 돌파해 버렸다.
십여 명의 흑도 무인들이 전투 능력을 상실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후퇴! 후퇴다!”
호우량의 외침에 황산검귀가 일제히 뒤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장기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 순간 종조기의 불타는 검이 장기린을 향해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쩌엉!!
계원과 명진이 막지 못하고 부상을 입었던 공격이지만, 장기린은 가볍게 막아 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섬광과도 같은 찌르기로 반격까지 했다.
쒜에에엑―!
고막이 찢어질 듯한 파공음과 함께 종조기의 정갈한 백염이 거칠게 흐트러졌다.
종조기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장기린을 적으로 상대하게 되면 그 누구나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받는다.
넓은 범위를 지배하는 장병(長兵)을 수족처럼 다루는데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숨어 있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주는 것이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죽는다.
한 치만 방어가 어긋나도 죽는다.
어느 정도의 경지 이상에 오른 무인은 항상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싸우는 것이다. ‘고수’의 경지는,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강해야만 오를 수 있었다.
“과연! 맹주가 절대로 맞서 싸우지 말라고 조언할 만하군!”
종조기는 마치 독수리의 날개처럼 불꽃이 넘실대는 검격을 여덟 번이나 연이어 휘두른 뒤, 뒤쪽으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종조기는 허허 웃으며 다시 호우량에게 뭔가 신호를 보냈고, 호우량의 지시를 받은 흑도 무인들 오십여 명이 일제히 무림맹 사절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
장기린은 눈앞에 있는 노인이 뱃속에 능구렁이를 아홉 마리는 품고 있는 듯 교활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종조기는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장기린의 능력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고, 승부를 이기지는 못해도 시간을 좀 끄는 것만은 가능하다는 것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장기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대로 두면 모용소희는 물론이고, 무림맹 사절단이 모두 죽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무림맹이 그들의 등을 지켜 주는 입장에선 무림맹사절단이 죽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될 일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자들…… 어째서 이곳에 나타날 수 있던 거지?’
장기린은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종조기와 격돌하는 와중에도 계속 생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지금 습격을 가한 자들은 남경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남경 쪽으로는 정찰병을 상당히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답은 하나다.
뒤쪽.
무림맹이 본래 지켜 주기로 했던, 다른 지방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 된다.
‘설마……?’
방벽에 실수로 구멍이 뚫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모종의 의도에서 생겨난 허점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장기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크게 무인창을 휘둘러 종조기를 뒤로 밀어냈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일단은 이자가 먼저다.’
종조기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싸워도 될 만큼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삼호방주와 맞먹는 무위.
그만큼 변칙적이거나 위험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정통 무공에 가깝기에 더욱 상대하기는 까다로운 면이 있는 것이다.
‘전력을 다한다.’
화아아악―!
생각과 동시에 장기린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공기가 일그러지고, 대기가 떨쳐 울린다.
바닥이 쩍! 하고 갈라질 것만 같은 진동과 함께 장기린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지금껏 한가닥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던 종조기마저 다급한 모습을 보일 만큼, 장기린의 기세는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전력을 다한 그의 힘은 무림오존의 경지에 맞먹었다.
양손으로 창을 잡고 정신을 집중한다.
상대의 호흡을 읽고, 자신의 호흡을 조정한다.
그리고 일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섬광이 번쩍였다.
따아아앙―!
“허엇……!”
경악에 가득 찬 신음과 함께 종조기의 검이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찰나의 순간, 숨을 다 내뱉고 다시 들이켜려는 그 짧은 틈을 노리고 날아온 공격이다.
웬만한 무인 같으면 눈을 빤히 뜨고도 공격을 알아채지 못하고 당할 테지만, 상대는 역시나 초절정의 고수.
종조기는 아슬아슬하긴 해도 확실히 공격을 막아 냈다.
쉬이익―!
하지만 장기린은 이미 종조기가 그의 공격을 막을 거라고 예상했다.
지금껏 무림십대고수였던 맹호도 방극이나, 오왕 중 한 사람이었던 삼호방주 강추산과 같은 초절정의 고수들은 어김없이 그의 쾌공을 막아 냈던 것이다.
삼호방주와 같은 급의 고수인 종조기 역시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터였다.
장기린은 곧바로 다음 공격으로 들어갔다.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천수관음상처럼 수십 개로 갈라진 창의 잔영이 상대를 에워싸는, 일연적룡무의 두 번째 초식이다.
따당! 따다다당!
종조기의 손놀림이 다급해졌다.
빠른 속도로 상대를 현혹시키는 쾌검은 상당히 자주 만나 볼 수 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마치 그물이 펼쳐지듯 전신을 노려오는 공격은 당가의 만천화우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
쒜에엑―!
종조기가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서는 순간, 장기린의 창이 다시 한 번 쾌속의 파공음을 울렸다.
여러 번의 움직임으로 정신을 분산시키고, 그 틈을 노려 다시금 날아간 공격이다.
“이노옴―!”
종조기가 노한 음성을 내뱉으며 황급히 검의 방향을 바꿨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장기린이 내찌른 창은 아래쪽에서 사선으로 치고 올라와 종조기의 왼쪽 어깨를 관통해 버렸다.
푸욱!
“크헛……!”
종조기가 피를 뿜는 것과 동시에 활활 불타는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장기린의 이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하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장기린의 앞머리가 잘려서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큭……!”
종조기는 아쉬운 얼굴이 역력했으나, 곧바로 무리하지 않고 몸을 빼 도망쳤다.
그는 싸울 때와 도망쳐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남자다.
종조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서 이미 상당한 거리까지 후퇴해 있는 황산파의 무인들과 합류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장기린은 종조기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잠깐이긴 해도 오십여 명에 둘러싸여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무림맹 사절단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짓도…… 이젠 질리는데.”
장기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날렸다. 그가 움직이는 곳이 곧 길이 된다. 내딛는 발걸음이 땅을 떨쳐 울리고, 휘두르는 무인창이 하늘을 가른다. 거친 굉음과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올랐다.
☆ ☆ ☆
“왜…… 온 거예요?”
모용소희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흰색의 고급 비단 무복 위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얼룩 몇 개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어깨와 팔뚝, 그리고 다리 부분에는 옷이 잘려 나간 작은 상처도 몇 개 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격전의 흔적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나마 나은 형편으로, 주변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특히 화산의 무인들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걸로 모용세가와 화산파는 함께 온 무인들이 모두 전멸을 당한 상태다.
육모담과 모용소진은 제각각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굳어져 있는 상태였다.
가장 아끼던 수하 겸 동료들이 다 죽었는데 어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옆에서 이름을 불러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무당오검 중 세 명은 일어서지 못할 만큼 심하게 다쳤고, 거기에 모용세가까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으로 된 거야.’
모용소희는 자책하며 아랫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을 꼽자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장기린이다.
그가 구하러 와 준 것은 고맙다.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천운에도 감사한다.
하지만…… 장기린과 천운에 감사하게 될수록 그녀는 대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장기린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가 저지른 실수와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그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번갈아 떠올라서 정신이 혼란해질 지경이었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지금 같은 상황에는…… 솔직히 보고 싶지가 않았다.
“가관이군.”
그런 그녀에게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늘한 눈빛에 너무나도 차가운 표정.
모용소희는 순간 발끈해서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제가 뭘……!”
“그 얼굴로, 그 옷을 입고, 그런 침울한 얼굴하지 말란 말이다!”
낮게 깔린 목소리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기이한 박력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잘못해서 꾸중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용소희는 움찔하며 물러서다가, 장기린이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 얼굴, 그 옷?
모용소희의 눈빛에 의아한 심중이 담겼다.
“따라와!”
“네……?”
“여기까지 왔으면 돌아가라는 말도 안 통할 테지. 그러니까 따라와라. 지다화라 불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모용소희의 얼굴이 멍해졌다.
갑자기 반말을 하는 장기린의 말투도, 그 속에 담긴 내용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저기, 그러니까…….”
“명령이다. 부상자를 데리고 부대로 복귀하도록.”
“아니, 그러니까 명령은…….”
장기린은 모용소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떠나가 버렸다.
멍하니 남겨져 있던 모용소희.
그녀의 얼굴에서 점차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더니,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입가가 느슨해졌다.
“가요! 간다구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아요!”
장기린은 대답을 해 주지 않았지만, 모용소희는 그가 그녀의 말을 다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외쳤을 때, 장기린은 분명 잠시지만 걸음을 멈췄던 것이다.
☆ ☆ ☆
발전된 성도의 한복판이 아닌 바에야 해가 지고 나면 모든 일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런 외곽의 농지 쪽은 보름달이 뜰 정도로 밝은 날이 아니면 정말로 칠흑 같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새카맣게 변해 버린다.
장기린은 병사들이 취침을 하는 사이, 임시로 지은 막사 안에서 피풍의를 바닥에 깔고 앉아 있었다. 옆에는 장기린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부운화와 섭우생이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똘망똘망한 눈으로 장기린이 건네준 집중해서 탐독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이건…… 대단하네요.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건가요?”
질문을 던지면서도 눈은 지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용소희는 지다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답게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지도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정보원은 밝힐 수 없다.”
“……섭섭하긴 하지만, 뭐, 그게 당연하겠죠.”
“말대답하는 걸 보니 기죽었던 건 다 회복된 모양이군.”
“애초에 기죽었던 적도 없었어요!”
힘차게 대답은 하지만, 자기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감상은?”
장기린은 곧바로 핵심을 물어 왔고, 모용소희 또한 진지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남경은 철옹성이에요. 사람이 타고 넘을 수 없는 성벽을 쌓아 뒀고, 그 성벽을 넘더라도 이차 경계망에, 또는 삼차로 준비해 둔 경계초소에 걸리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그렇군. 우생도 그렇게 말했다.”
장기린은 옆에서 철섭선을 살랑거리고 있는 섭우생을 힐끗 쳐다봤다.
섭우생 또한 남경 공략의 작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모용소희와 같은 의견을 말했던 것이다.
“병법을 익혔나?”
“무가에서 태어났으니까요. 비록 딸이지만 어차피 무림의 세계로 나가려면 배워 두라며 아버지가 좋은 선생님을 붙여 주셨어요.”
모용소희는 헛기침을 하며 의견을 계속 말했다.
“이 성을 공략하려면 최소한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해요. 녹림도 삼만이 지키고 있으니, 구만에서 십만 이상은 있어야 정공법으로 성을 뺏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알다시피 이쪽은 삼천이야. 그리고 그중 백오십은 일당백도 가능한 정예다.”
“물론 알고는 있지만…….”
모용소희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장 대협이 말씀하신 조건은…… ‘손해가 적을 것’, 그리고 ‘소수의 정예병으로도 가능할 것’이었죠?”
“그래.”
모용소희는 아예 지도를 바닥에 척하니 펼쳐 놓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손가락으로 한 점을 짚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장기린은 모용소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짚고 있는 지점을 바라봤다.
“황성?”
“네, 황성이요. 외부에 길이 없다면 내부에서 찾아야겠죠.”
“흐음, 결국 그건가.”
장기린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생이 낸 결론과 일치하는군.”
“그것 보십시오, 대형. 아무리 다른 사람이 새로운 시각으로 봐도 결론은 같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너와 같은 결론까지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이야.”
장기린은 솔직히 모용소희를 다시 봤다.
지다화라고 불린다지만 그건 근처의 젊은이들과 비교해서 얻은 별명이다.
황실제일의 두뇌인 현백. 그리고 그런 현백과 전략, 전술 쪽에선 대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섭우생과 같은 결론을 낼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물론, 당사자인 모용소희는 오히려 왜 처음 보는 사람과 비교해서 무시를 당해야 하느냐는 듯한 찝찝한 표정이었다.
섭우생의 능력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도리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황실이 있는 내부에서 길을 만든다. 즉, 황성에 미리 만들어져 있는 비밀 통로를 사용하자는 이야기겠지?”
“……네, 바로 그거예요.”
모용소희는 개운치 않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설명을 계속했다.
“황실은 전란이나 내란을 대비해 처음에 축조할 때부터 비밀 통로를 몇 개나 만들어 둔다고 들었어요. 그런 비밀 통로가 있다면 굳이 외성을 통과하지 않아도 내부의 요인들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죠.”
성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삼만여 명의 녹림도들.
그들과 싸우지 않고 내부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결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비밀 통로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 아닌가? 혹시 알고 있는 통로라도 있나?”
“아뇨……. 그런 건 없죠. 장 대협은 큰일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모용소희는 질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최후의 탈출로로 사용할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황실의 비밀 통로였다.
그런 황실의 기밀 중의 기밀일 만한 정보를 누군가 알고 있다?
만약 동창이나 금의위에서 알기라도 했다가는 다음 날 쥐도새도 모르게 뒷산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될 이야기였다.
“모른다라…… 그러면 쓸 수 없는 계책 아닌가?”
장기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뇨, 방법은 있어요.”
“어떤……?”
“제가 병법을 배울 때 가장 좋아했던 것이 있어요. 진(陳)의 흐름과 효과에 대한 거였는데, 여길 보세요. 이렇게나 과도하게 정밀하고 세세한 지도인데, 황실의 내부는 평범하게 외곽만 그려 놨잖아요?”
“아! 정말 그렇군.”
지도는 하오문과 남궁세가 뇌안각의 합작품으로, 황실 내부를 제외한 남경의 모든 지역을 그야말로 장님도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자세하게 새겨 놓았다.
하지만 황성의 성벽 안쪽만큼은 예외였다.
그저 황성이라고 하는 테두리와 입구 부근만 그려 놓았을 뿐, 그 내부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았다.
“황성의 내부 구조를 알기만 하면 어느 곳에 비밀 통로가 있을지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구조만 보고도? 그걸 알 수 있다는 건가?”
“네. 황성은 태극오행과 풍수지리에 맞춰서 설계되었어요. 비밀 통로도 그걸 따르고 있겠죠.”
옆에 있던 섭우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대형. 기관진식에 대해 지식이 있다면 건물의 구조만 보고도 대충 그 안에 숨겨진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용 소저는 아마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탁! 하고 접혀진 철섭선이 섭우생의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흐음.”
장기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즉, 결론적으로 말해 적룡기마대와 삼천 명의 병사를 남경 내로 잠입시키려면 황실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사용하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황성의 구조를 모르니 비밀 통로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비밀 통로를 찾기 위해서라도 황성 내부를 탐사해서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다.
‘폐하께 연락을 하면 순순히 알려 주실 것 같기는 한데…….’
철혈의 황제는 그깟 비밀 통로 하나가 알려지는 것따위를 아까워할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기린에겐 그 방법을 택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가 거하고 있을 북경에 전서를 보내고, 그 전서가 황제에게 전달된 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사흘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 사흘의 시간은 지금의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길다.
당장 내일 남경에 도착하게 될 텐데, 그 뒤로 전황이 어떻게 뒤바뀔지 모른다.
북천맹에서 미리 병력을 준비해 두었다가 요격을 가할지, 아니면 성벽 안에서 그대로 농성을 할지, 불확실한 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만약 북천맹에서 병력을 성벽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뒤쫓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비밀 통로를 통한 작전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되도록 곧바로 기습을 해야 돼. 굳이 북천맹에 우리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전혀 없다.’
결국 비밀 통로를 이용한 작전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혹시, 비밀 통로가 있을 만한 곳을 대략적으로라도 짚을 수 없나?”
“아…….”
모용소희는 뭔가가 생각난 듯이 탄성을 내뱉었고, 섭우생도 진지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능해요. 황성 내부는 외성과의 상성을 고려해서 만들었을 거고…….”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충 어디쯤에 있을 거라는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곳, 북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수기가 모입니다. 수기란 본래 한곳에 고이면 해가 되는 법. 반드시 어느 한곳으로 흘러가게 만들었을 테니 비밀 통로가 만들어져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도 그래요. 서남쪽의 이 지점은 팔괘 주역으로 따지면 휴문(休門)에 해당해요. 황성 내부에 흐르는 기의 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외부와 이어진 통로가 있을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그쪽의 휴문은 여기에 있는 중문(中門)과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럼 위치가 전환되어서 휴문이 이쪽의 중문이 있던 자리로 갈 수도…….”
“그렇게만 볼 수는 없어요. 여기에 큰 탑이 세워진다면 기의 흐름이 바뀌기 때문에 휴문의 위치도 이곳으로…….”
어느새 섭우생과 모용소희, 두 사람은 지도를 사이에 두고 갑론을박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뒤쪽에서 장기린과 부운화과 자신들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군.”
“그렇군요. 우생의 계획엔 허점이 거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절차탁마하다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라고 데려온 거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부운화는 장기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웃었다.
“……왜 웃어?”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십니다, 대형. 걱정돼서 데려왔다고는 왜 안 하십니까?”
장기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봐주지 못하겠기에 끌고 왔다. 그뿐이야.”
“그렇습니까?”
“저 옷, 저 말투, 저 성격으로 침울해져 있는 꼴은 도저히 못 본다.”
부운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대형.”
“왜?”
“혼자 가실 겁니까?”
“…….”
장기린은 조금 놀라면서도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섭우생은 머리가 좋다. 모용소희도 경험은 좀 부족하지만 사고력은 뒤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장기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역시나 부운화다.
부운화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결정을 내릴지 확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몸속에 들어갔다가 나와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혼자 가야지.”
“텐챠이는…… 강할 겁니다.”
“그렇겠지.”
장기린은 선선히 인정했다.
텐챠이의 자질은 대단하다. 장기린이 객잔 생활을 하는 동안 텐챠이는 여전히 전장에서 싸움을 계속해 왔고, 지금도 굉장한 고수인 오왕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북천맹의 맹주 자리에 앉아 있다.
뭐니뭐니 해도 장기린의 숙적이다.
강할 것이다.
분명, 마주치게 되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굉장한 힘을 준비해 두고 있을 것이다.
“단순한 정찰이다. 텐챠이를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어.”
장기린은 단호한 말투로 반론을 일축했다.
부운화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잠시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부운화는 뭔가 보여 줄 게 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장기린은 그런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니까, 북동쪽에는 탑이 없을 거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혹시 높은 전각이라도 지어져 있다면 그때는 인근의 기의 흐름이 완전히…….”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쳐다본 모용소희와 섭우생은 여전히 지도 예측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초승달이 떠 있는 하늘은 마치 새카만 장막을 드리운 것마냥 어두웠지만, 짙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얼굴을 드러낸 별들 덕분에 간신히 눈앞에 걸어가는 사람은 보였다.
물론 장기린이 감각을 끌어 올리면 눈을 감고도 움직일 수 있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공을 끌어 올리고, 과하게 예민한 감각을 끌어 올려 살아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부운화는 장기린의 속도에 맞춰서 움직여 주었다.
“말들……?”
장기린은 부운화가 그를 데려온 곳이 부대의 말들을 모아 둔 곳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상한 점도 한 가지 깨달았다.
본래 말들은 사회적인 생물이다.
여러 마리가 한곳에 몰려 있을 때는 반드시 우두머리가 뽑히고, 그 우두머리가 선두에 서서 모두를 통솔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들의 우두머리는 부운화의 말인 은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은수가 무리의 주변을 돌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를 하는 것은 무리의 이인자가 하는 일이다.
즉, 어느새 은수가 일인자의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몇 마리의 말들이 떠올랐지만, 태어날 때부터 천리마로서 타고난 은수를 넘어설 만한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설마…….”
장기린은 반가움을 표했다.
딱 한 마리.
은수를 넘어설 수 있는 말이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그 말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이 드디어 도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부운화는 기쁜 얼굴로 그를 말 무리의 앞쪽으로 안내했다.
장기린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히히히힝―!
말 무리 쪽에서도 장기린의 기척을 알아챘다.
터벅터벅, 내딛는 발걸음은 일천 근에 가까운 몸무게에도 불구하고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머리 쪽의 신장만도 칠 척이 넘는다. 탄탄하게 잘 단련되어 있으면서도 유연함이 느껴지는 근육이 전신에 붙어 있었다.
이만큼 거대한 체구면 둔중해 보일 만도 하건만, 유선형으로 잘 빠진 허리와 몸을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물결이 치듯 꿈틀거리는 육신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특히 특이한 것은 눈이다.
보통 말의 눈은 맑고 깊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말의 두 눈은 그야말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웬만한 맹수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만큼 강렬한 모습.
도저히 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깊고 강렬한 눈빛은 사람의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천 마리의 말들 사이에 끼워 놓아도 단번에 눈에 띌 만큼 뛰어나며, 어떤 명마라도 제압하고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천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탈 수 없다.
장군의 말.
오로지 말에게 인정을 받은 사내만이 올라탈 수 있는 하늘이 내린 명마다.
“오랜만이구나, 흑룡.”
장기린은 손을 내밀었다.
내뱉는 말엔 무뚝뚝하지만 반가운 정감이 담겨 있었다.
푸르륵―!
흑룡은 그런 장기린의 손에 스스로 이마를 갖다 댔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주인.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의 동반자와 다시금 재회하게 된 것이다.
“미안하다, 두고 가서. 그때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너를 데려갈 수가 없었어.”
푸륵! 푸르륵―!
흑룡은 투레질을 했다.
그건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그를 데려가지 않은 장기린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장기린은 한참이나 그렇게 흑룡과 교감한 뒤, 말안장에 묶여 있는 길고 커다란 물체를 발견했다.
“운화, 저건……?”
“왕분이라는 분이 보내셨습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땐 보물을 전하는 것이 예정보다 늦어진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다는 말도 함께 했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또다시 과례를 올리는 왕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국의 땅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이걸 찾아 갖다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예를 다했습니다. 차라도 대접하려고 했으나, 일이 있어서 급히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항주 쪽에도 뭔가 일이 생긴 듯했습니다.”
“그런가.”
장기린은 왕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흑룡의 등자에 얹혀져 있는 물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히히힝―!
만약 다른 사람이 손을 뻗었다면 당장에라도 뒷발로 상대를 차 버릴 흑룡이었으나, 장기린에게는 그저 순한 양처럼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지이잉―
단단하고 차가운 물체.
장기린은 오른손에 그 물체가 쥐어지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니, 박동하는 것은 그의 심장이 아니라 손에 들린 그 ‘물체’일지도 모른다.
두꺼운 천으로 둘둘 감아 놓았던 것을 풀어내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육 척 길이의 물체.
창이다.
창날과 창대 모두 묵빛의 철로 이루어진 일체형이라는 점에서는 진구의 적룡창과 같다.
하지만 창날 부분이 달랐다.
진구의 적룡창이 마치 작살처럼 십자형의 교차된 칼날이 붙어 있는 모습이라면, 지금 장기린의 손에 잡혀 있는 무기는 언월도보다는 뾰족하고 일반 창날보다는 두꺼운, 묘한 두께의 칼날을 지니고 있었다.
찌를 수도 있고 벨 수도 있다.
창이라는 무기의 묘용을 십이할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완벽한 병기다.
그러면서도 창의 전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균형이 잡혀 있으니, 진정한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매료될 모습이었다.
장식은 일절 없었다.
창끝에 달린 수실도, 손잡이에 새겨질 만한 문양도, 창날과 창대 사이의 경계점도……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묵빛의 철이 매끈하게 연마되어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누구나 이 창이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장식은 사족일 뿐이다.
이 병기를 만든 장인이 무기는 무기일 뿐, 장식은 필요 없다고 외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어떤 병기와 부딪쳐도 절대로 손상되지 않는 절대적인 강도와 손잡이의 어느 부분을 잡아도 창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완벽한 마무리까지.
황실제일의 명장 풍 도공(刀工)이 자신의 입으로 최고의 작품이라고 단언할 만한 완성도를 지닌 병기가 바로 이 검은색 창의 정체였다.
진천룡(震天龍).
우레와 벼락을 부르는 하늘의 용이 바로 장기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스아악!!
장기린은 시험 삼아 진천룡을 바닥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고, 공기가 섬뜩하게 갈려지는 느낌을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꼈다.
실제로 바닥에 깔린 바위에 선명한 금이 그어져 있었다.
“과연, 진천룡이구나.”
장기린은 그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전장에 있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섬뜩할 만큼 가벼운 느낌.
사람을 베어도 티끌만큼의 부담도 없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파괴력이다.
가볍게 휘두른 게 이 정도인데, 질주하는 흑룡의 등에서 전력을 다해 휘두른다면 어떤 파괴력이 나올까.
게다가 지금의 장기린은 그때보다 한층 발전된 무력을 갖췄다.
만약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면…… 그때의 장기린은 악귀라는 말로도 부족할 괴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형.”
그때, 장기린은 자신을 부르는 부운화의 목소리에 들끓어오르는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진천룡을 내려다보았다.
천하에 다시없을 명품이지만 살육을 위해 태어났고, 전장에서 수많은 업을 쌓은 무기는 그 주인에게마저 살육의 운명을 강요하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봐.”
“진천룡은 어디에 두고 오셨습니까? 제가 군을 떠나기 전에 여러 곳을 살펴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찾을 수 없을 만한 곳에 숨겨 뒀으니까.”
“어디에 두셨습니까?”
“대장군의 무덤에.”
“아……!”
부운화는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대장군 공손웅.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은 그 사람은 이름없는 초원의 한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끝까지 전장에 남고자 했기에 장가구 건너 몽고와의 경계선에 무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비석 아래에 묻어 두었어. 원래는 그날을 기점으로 절대로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랐지만…….”
장기린은 그의 손에 들린 진천룡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보지.”
장기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운명이란 마치 성기게 짜여 있는 그물과도 같아서, 겉보기엔 느슨해 보여도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결국은 발목이 잡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는 진천룡을 들자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대형…….”
부운화는 복잡한 표정으로 장기린을 응시했다.
장기린은 감상에 젖은 마음을 떨쳐 내고 진천룡을 다시 두꺼운 천속에 갈무리했다.
“우생이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 떠난다. 남경의 황실에 들어가서 비밀 통로를 찾아내겠어.”
휙― 등을 돌린 장기린에게서 부운화는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초승달이 떠 있는 깊은 밤.
철옹성을 공략하기로 결심한 날에 장기린은 전장에 두고 온 자신의 신병(神兵)과 다시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