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章 ― 낭인주호(狼人朱虎)
남경의 응천부성 내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북천맹이 남경을 빼앗은 뒤, 모든 치안과 법규가 무너져 버린 탓이다.
강호관직론.
강한 자가 관직을 차지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 이론은, 겉으로 보기엔 현재의 위정 세력을 타파하고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평등한 사상 같지만, 사실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만 이득일 뿐, 보통 백성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사상이었다.
북천맹은 사람을 등용할 때 인성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강함.
한 사람의 무위가 여러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뛰어난지만을 확인할 뿐, 그 이후에는 지역과 사람을 떠맡기고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다.
그자가 산적이든, 도적이든, 또는 차마 눈뜨고는 못 볼 목불인견의 참상을 저지른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강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권력을 주었던 것이다.
제한이 없는 권력은 무뢰배와 다를 바가 없는 법이다.
처음엔 북천맹의 위세에 눌려 꼼짝을 못하던 그들이었으나, 백성들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치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엔 북천맹의 요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이 주는 이득을 무한히 누렸다.
약탈과 능욕이 시시때때로 행해졌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자제라는 것 또한 조금도 없었다.
본래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막장인생들 답게, 권력이 주어지자 뒷일은 생각지 않고 무한정으로 그 힘을 사용했다.
거리마다 절망이 섞인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어떤 집은 하루에도 세 번이나 도적이 나타났다.
도저히 사람이 살 환경이 아니다 싶어서 남경을 떠나려는 자들은 출구를 지키고 있던 산적들에게 잡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거리의 입구엔 목이 잘리고 오체분시당한 시신이 내걸렸다.
본보기다.
남경을 떠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될 용기가 있다면 한 번 해 보라고 경고한 것이다.
빛나는 대제국의 성도였던 남경은 하루 아침에 절망과 비탄에 잠긴 지옥이 되어 버렸다.
하루하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백성들의 절규가 늘어 가고 있었다.
한때 남경제일루라 불리던 운중객잔.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전각의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그 속은 예전과 정반대로 달라져 있었다. 주인은 남경에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전재산을 가지고 날라 버렸다.
갑작스레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하인과 점소이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운중객잔을 자신들이 경영하려 했으나, 난이 일어난 직후 들이닥친 흑도의 도적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점소이장이었던 장오는 도적들이 나타난 첫날에 도망치려다가 오체분시를 당하여 거리의 입구에 내걸렸다.
그밖의 하인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도적들의 비위를 맞췄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트집을 잡혀 도적들이 술김에 휘두른 주먹에 맞아 반병신이 되어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막내인 백서(白鼠)뿐이다.
백서는 이름이 아니고 별명으로, 낯빛이 희고 몸집이 조그맣다고 해서 흑도의 도적들이 붙여 주었다.
나이는 열하나.
이제 막 철이 들기 시작할 나이였지만 워낙 험난한 인생을 살다 보니 눈치가 빨랐다.
아직 어린아이라 그나마 도적들이 손속에 사정을 둬서 살았지만, 그래도 몸이 불편해진 하인들을 돌보랴, 술에 취한 도적들의 비위를 맞추랴, 백서에겐 매일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야! 백서! 술 가져와!”
“여기도 가져와! 안주는 오늘 뭐가 있냐!”
백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흑도의 도적들은 속으로 오십을 셀 때까지 답이 나오지 않으면 주먹부터 휘두른다.
몇 번이나 실제로 경험을 한 뒤에 깨달은 법칙이었다.
“여, 여기 술이요. 오늘 안주는…… 저기, 건량밖에…….”
“뭐? 건량!”
머리가 새집처럼 엉켜 있는 사내가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져 버린 백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이 새끼가! 건량이면 말린 보리 아냐? 그딴 걸 어떻게 안주로 먹어!! 내가 말인 줄 알아!”
“…….”
“대답 안 해? 너 같으면 그딴 걸로 술맛이 나겠냐!”
백서는 양팔로 머리와 얼굴을 감싼 채 겁에 질려 대답했다.
“하, 하지만…… 이젠 창고에 음식이 다 떨어졌어요. 밖에서 구해 올 수도 없고…… 거, 건량밖에는…….”
“이 새끼가 끝까지……!”
퍽! 소리와 함께 백서의 작은 체구가 허공에 붕 떠올라 반대쪽 벽에 거세게 부딪쳤다.
“끄윽……!”
골이 얼얼해지는 충격이 온몸을 덮쳤으나, 백서는 크게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크게 비명을 지르면 시끄럽다고 더 맞는다.
이것 또한 백서가 그간 겪다 보니 저절로 몸에 익히게 된 지식이었다.
“안주가 없으면 네가 토끼라도 잡아오든가, 아니면 다른 데서 훔쳐라도 왔어야지! 너 같은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안주도 없이 술을 마셔야겠어? 앙?!”
“어이, 까마귀. 그만하지그래.”
까마귀라 불린 사내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나, 창가 쪽 자리에서 손바닥만 한 단도를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고 있던 청년이 나직하게 그를 제지했다.
까마귀는 잔뜩 엉킨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그 청년을 노려봤다.
“혀가 반 토막이 났나,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디서 반말질이야?”
짐짓 험악한 기세였으나 청년은 비웃듯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왜? 예의라도 따지시게? 불만있으면 한판 붙을까?”
청년은 던졌다 받았다 하던 단검을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렸다.
새끼손가락 끝에서부터 엄지손가락까지 차례차례 돌리는 모습이 마치 곡예단의 묘기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뜻.
손바닥만 한 단검은 이미 청년의 육체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이 고양이 새끼가……!”
까마귀는 말은 험하게 했으나, 청년에게 실제로 덤비지는 못했다.
청년이 그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주호(朱虎).
낭인계에서 굴러먹는 놈답지 않게 제법 멋있어 보이는 이름이었기에, 주위에선 다들 한 단계 낮춰서 고양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주호는 고양이처럼 잽싸고 날렵한 놈이었다.
얼마 전에 이쪽에서 이름을 날리던 흑저부(黑猪斧)가 얼굴이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뒤로 주변의 모두가 주호를 부두목쯤 되는 놈으로 여겼다.
참고로 흑저부는 덩치가 보통 사람 세 배는 되는 놈으로, 까마귀보다 조금 더 강했다.
“네가 뭔데? 백서가 네 숨겨 둔 애새끼라도 되냐?”
“말도 안 되는 소릴……. 내 애가 저렇게 못생겼겠냐.”
주호는 여유를 잃지 않고 웃었다.
“그럼 뭔데 애들 앞에서 네가 날 개쪽을 줘? 앙?”
“멍청하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안 그래도 네가 더러운 술버릇으로 하인들 다 병신 만들어 놨는데, 마지막 남은 애까지 일 못하게 만들려고? 그러면 누가 여기서 술시중 들 거야? 네가 할래?”
“…….”
“알았으면 지랄도 적당히 해. 이거야 원, 머리 나쁜 것들이랑 일하려니까 피곤하네.”
까마귀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무시하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차마 주호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못하기에 까마귀는 괜히 들고 있던 술잔을 팍! 하고 깨버리는 것으로 성질을 부렸다.
“그건 네가 치워야 된다?”
까마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대문을 걷어 차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가, 감사합니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백서는 주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꾸벅 했다.
주호가 말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 까마귀는 분을 못 참고 주먹질을 해서 이전의 하인들처럼 백서에게 큰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고마워할 것 없어.”
주호는 백서가 인사를 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는 듯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도 백서는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뒤, 술을 달라고 했던 사내들에게 술병을 나르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갔다.
휘리릭― 탁, 휘리릭― 탁.
주호는 까마귀와 다투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느긋하게 단검을 위로 던졌다가 받는 것을 반복했다.
어두운 밤, 시간은 언제나처럼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틈바구니에서 주호는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주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객잔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빈 그릇들을 치우던 백서는 깜짝 놀라 그릇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이거, 재밌어지는데.”
주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쾅! 하고 객잔의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까마귀가 굴러 들어왔다.
“끄억! 이, 이 자식! 뭐야! 넌!”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모두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사실 발소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못 들을 정도라는 게 알맞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게 선명하게 들린다.
왠지 모르게 모두가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 걸어 들어오는 사내의 존재감이 그만큼이나 거대했기 때문이다.
검은색 무복.
작지 않은 키에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단단한 체구.
등에 천으로 둘둘 만 긴 막대기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무기는 창이다.
다른 건 다 평범했지만, 오른쪽 귀가 뭉개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뭐냐고 묻고 싶은 건 나다. 너희는 심심하면 길목의 민가를 덮쳐서 아무나 두드려 패는 모양이지?”
“큭……!”
모두의 시선이 까마귀에게로 향했다.
또 저질렀냐는 듯한 시선.
까마귀는 얻어맞은 복부를 한 손으로 붙잡고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그놈들은 우리 거야! 이 지역에 있는 건 숟가락 하나까지도 다 우리 거라고!”
“그래서 화풀이로 아무나 두드린다?”
“그래! 뭐 잘못됐어? 그나저나 넌 어디서 온 자식이야! 어느 구역에서 왔어!”
까마귀는 씩씩대며 외쳤다.
한편, 객잔 안으로 들어온 장기린은 뭐라고 짖어대는 까마귀는 무시한 채 객잔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가게 안.
장식으로 보이는 벽의 족자나 마른 대나무들은 누군가에 의해 부서진 채 원래의 모습을 잃고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탁자는 박살 난 게 절반은 되고, 부서진 집기로 보이는 파편들은 치우는 사람도 없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치우긴 했으나 금세 누가 다시 박살 내 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쪽 얼굴이 빨갛게 부어 있고 온몸이 멍투성이인 왜소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가.”
장기린은 납득했다.
다른 건 더 볼 필요도 없다.
이것이 이쪽에 있는 놈들의 수준인 것이다.
“근데 넌 뭐야!”
“어디서 온 새끼야!”
아무리 까마귀가 진상을 부렸어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같은 패거리로서 엉뚱한 놈한테 맞고 오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까마귀 근처에 있던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잠시 긴장했던 까마귀의 얼굴이 다시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장기린은 가만히 그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주먹을 날렸다.
뻐어억!!
“어엇?!”
“헛……!”
까마귀에게 가세했던 사내들이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장기린의 일격이 그들의 눈엔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턱이 옆으로 휙 돌아간 까마귀는 입에서 부러진 이빨들을 우수수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으…… 어어……!”
단 일격으로 까마귀는 이미 의식이 반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내공은 일절 쓰지 않고 육체의 힘만으로 가격했는데도 이 지경이다.
주변에 있던 한패거리의 사내들이 잔뜩 긴장한 채 슬금슬금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들은 장기린이 까마귀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꾸욱!
“으어……!!”
장기린은 수많은 시선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내딛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까마귀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까마귀는 저항하려는 듯 몸을 비틀었지만, 장기린이 발에 힘을 한 번 주자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
나지막한 목소리엔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까마귀는 곧바로 뒤집힌 채 발에 밟힌 거북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
“너희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장기린의 모습에 객잔 안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원래 이런 상황이면 보통 단체로 달려들어서 몰매를 놔야 한다.
아무리 하류 인생들이 모인 곳이라도 그게 낭인 세계의 의리다.
그런데 그들은 감히 나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와 까마귀를 일격에 때려눕히고, 당당히 한 발로 머리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이 너무나 위풍당당했던 것이다.
“이 지역의 대장이 누구지?”
장기린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흑치거호다.”
“고, 고양이!!”
주변 사내들이 깜짝 놀라며 대답해 준 사내를 쳐다봤다.
장기린의 고개도 옆으로 돌아갔다.
턱선이 가늘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청년인데, 머리카락이 단발로 잘려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한 손에 손바닥만 한 단검을 들고 위로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동작이 극히 자연스러운데다 하체의 중심이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실력이 있는 자였다.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자가 아니군.’
흑도의 낭인들 중에서도 실력자는 분명히 있을 테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은 그 정도 수준은 분명 뛰어넘었다.
절정은 분명 뛰어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무림맹 사절단으로 온 후기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청년인 것이다.
“흑치거호를 만나겠어?”
청년은 어딘가 나른한 듯하면서도 살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내해 줄 건가?”
“만나고 싶다면.”
“그럼 부탁하지.”
장기린은 짧게 대답했고, 청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의 사내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어이, 그렇게 됐으니 술이나 더 마시고 있어. 보아하니 옆 동네에서 대장을 보러 왔구만 뭐.”
“으음…….”
“그렇게 떫은 표정 짓지 말라고. 혹시 알아? 우리 대장이 될지? 뭐, 잘 안 되면 우리 동료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주변의 사내들에겐 장기린이 흑치거호에게 도전하러 온 흑도의 낭인으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범상치 않은 모습.
거기에 한쪽 귀가 뭉개져 있다는 사실까지 합쳐져서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보고 싶긴 하지만……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겠지?”
“됐다, 됐어. 그냥 술이나 먹자고.”
주변의 낭인들은 관심을 끊고 이내 자신들끼리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장기린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이 하나둘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청년을 향해 움직였다.
우득!
“컥……!”
물론, 그전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까마귀의 목뼈를 밟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끄어어…….”
까마귀는 울컥 피를 토하며 꿈틀꿈틀 몸을 경련했다.
목뼈가 부러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옆쪽에서 비스듬히, 기도를 누르지 않을 만큼만 부러뜨려 놓은 것이다.
목뼈는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부러지면 다시 아물더라도 쉽게 부러질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함부로 주먹질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수로라도 목을 얻어맞으면 죽게 될 텐데 어떻게 함부로 싸움을 하겠는가.
“불만이라도 있나?”
장기린은 그런 자신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청년에게 도발적으로 물었다.
“아니, 별로. 친한 것도 아니고, 워낙 성격이 개차반같은 녀석이라.”
“그럼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익숙하다 싶어서. 목뼈를 정확하게 세 개만 부러뜨리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싸움 경험이 많은가 봐?”
청년의 나른한 눈빛 속에서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
장기린은 대답해 주지 않고 묵묵히 정면만을 바라봤다.
그의 입장에선 목뼈가 몇 개 부러졌는지까지 알아보는 그 안목이야말로 싸움에 대단히 익숙치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거라고 지적하고 싶었다.
“으음, 대답해 주지 않는 건가?”
“나야말로 묻지. 어째서 나를 순순히 대장에게 안내하는 거지?”
청년은 눈에서 호기심을 빛낼 때와는 달리 상당히 삐뚤어진 표정을 지었다.
“대장이랄 것도 없어. 얼간이 파락호들 사이에서 힘 좀 세다고 나대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 자신도 낭인의 일원으로 있는 것치곤 굉장히 신랄한 말투였다.
마치 낭인들과 대장이라는 흑치거호를 경멸하는 듯한 태도.
이 청년에겐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린은 곧 호기심을 거둬 버렸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선 지금 눈앞의 목적 말고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말하기 싫다면 묻지 않지.”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형씨, 재밌네. 마음에 들어.”
“…….”
“한마디 충고해 줄게. 흑치거호는 제법 세. 특이한 무공을 쓰는데다 의외로 집요하거든. 뭐, 형씨한테는 아무래도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방심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객잔의 뒤쪽에 있는 최고급 객실의 앞까지 도착했다.
그곳에서 청년은 안쪽에 신호를 보내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진한 주향이 코를 찔렀다.
술 한두 병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최소한 스무 병 이상의 술이 소모되어야만 날 것 같은 지독한 냄새였다.
“또 했구만.”
청년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세로 너비가 이십 장은 될 것 같은 넓은 방. 그 중심에 커다란 상을 펼쳐 두고, 그 위에 별로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상당히 다양한 음식들을 차려 둔 뒤 흥청망청 술을 마셔대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장기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거구의 사내는 적룡기마대의 넷째인 대석과도 맞먹을 듯한 거대한 육신을 지니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있는 어깨와 팔뚝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천부의 역사(力士)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몸매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듯한 배자(조끼)를 입었는데, 그 사이로 단단하게 꿈틀거리는 가슴팍과 복근이 보였다.
상당히 특이한 외모라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을 듯했다.
보통 중원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흑갈색의 피부색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얼굴과 양팔에는 마치 호랑이처럼 새카만 줄무늬를 그려 놓았다.
양옆에는 여자들을 끼고 있었는데, 그 여인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 고개를 숙이고 연신 술을 따를 뿐이었지만, 거구의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마다 마치 숯이라도 씹어먹은 것처럼 새카만 이빨이 드러났다.
‘그래서 흑치거호(黑齒巨虎)였던 건가. 과연, 그 별명대로의 외모로군.’
장기린은 이 지역 대장의 별명의 유래를 한눈에 알아내는 것과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눈치챘다.
‘이족(異族). 남만 쪽인가……. 특히 대월국 아래쪽에 사는 섬의 주민들은 흑갈색 피부에 검은색 이빨을 갖고 있다고 했지.’
장기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특이한 지역의 출신답게, 범상치 않은 외모와 실력 또한 가지고 있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기린의 눈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다만 숨어 들어온 입장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처리하려니 생각할 것이 많았다.
“뭐야, 주호냐?”
흑치거호는 주향이 풀풀 풍기는 입을 벌리고 크게 웃더니, 장기린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청년에게만 손을 흔들었다.
“역시 권력이 참 좋아. 큭큭, 북천맹에 오길 잘했다니까? 여기 이 두 명 보이지? 저어―기 황실 쪽에선 이름만 대도 아는 명가의 아가씨들이야. 평소대로라면 감히 말도 못 붙여 볼 아가씨들인데 지금은 내 옆에서 술이나 따르고 있잖아? 나라가 바뀐 덕이지. 이게 바로 권력이 좋다는 것 아니겠냐, 이거야!”
흑치거호는 한 손으론 여인의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한 손으론 반대쪽 여인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댔다.
흥이 잔뜩 오른 모습이다.
두 여인은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으나,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여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고 또한 가련했다.
“아아, 그러네. 좋겠어, 아주 좋겠어.”
주호는 누가 봐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는데, 흑치거호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껄껄 웃으면서 계속해서 즐거워했다.
“크하핫! 그렇다니까! 너도 한 명 잡아다 줄까? 말만 해라! 넌 내가 아끼는 놈이니까 특별히 좋은 계집으로 잡아 주지!”
“이런 여자들이 많아?”
“그럼! 흐흐, 좋은 가문에서 잘 먹고 큰 것들은 피부도 매끈매끈하다. 부하 몇 명 데리고 쳐들어가서 가족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해서 잡아오면 반항도 못해. 이렇게 쉬운 사냥이 어딨어? 안 그러냐?”
흑치거호는 대소를 터뜨리며 계속해서 손을 주물거렸다. 지켜보는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흑치거호가 뻔뻔하게 굴면 굴수록, 양옆에 앉은 여인들의 떨림은 심해져 갔다.
‘더 이상 못 보겠군.’
장기린이 입을 열려는 찰나, 주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말이야, 곤란한 일이 있어.”
“엉? 뭐가 곤란한데?”
“대장 자리를 놓고 싸우겠다는 도전자가 왔단 말이지. 여기에 있는 이 형씨야.”
“도전…… 자?”
흑치거호의 시선이 드디어 장기린에게로 향했다.
흑갈색의 피부인지라 눈의 흰자 부분이 유난히 선명해 보인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 과연 북천맹에서 관직을 주고 한 지역을 맡길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뭐냐, 너는? 감히 이 흑치거호 님께 도전을 하는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두는 게 좋아. 이 흑치거호 님은 나에게 도전한 놈은 절대로 안 살려 둔다.”
흑치거호는 거만하게 말했다.
장기린은 그 말을 듣고 옆에 서 있는 주호를 슬쩍 쳐다봤다.
방금 그 말로 주호가 흑치거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싸운 상대는 반드시 죽인다면, 여기에 있는 주호는 싸움을 하지 않고 순순히 흑치거호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하나 풀리는 듯했다.
“도전이라…… 뭐,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흑치거호라고 했나? 하나만 묻지. 네 위에 있는 대장이 누구냐?”
“……!”
흑치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인들을 주무르던 손길도 뚝 그쳤다.
“그게 뭔 말이냐?”
“못 알아듣나? 너를 관리하는 게 누구냐는 말이다.”
“너…… 누구냐?”
“누군지는 안 중요하지.”
“그럼 그걸 왜 알려고 하지?”
“그것도 네가 알 바는 아니다.”
흑치거호는 새카만 이빨을 드러내며 한 번 웃더니, 살기로 가득한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새끼가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긴, 이빨 새카만 망나니다. 좋게 말할 때 빨리 사실대로 말해라.”
“이런 쳐 죽일……!”
흑치거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어섰다.
“꺅……!”
“아앗……!”
옆에 있던 여인 둘이 그 서슬에 놀라 뒤로 나동그라졌다.
흑치거호가 몸을 일으키자 앉아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내뿜었다.
거대한 육체에 검은색 이빨. 야생동물처럼 줄무늬를 온몸에 새긴 모습이 꿈틀거리는 근육과 함께 드러났다.
“갈비뼈를 박살 내 줄까!!”
흑치거호는 다 마신 술병을 장기린에게 집어 던졌다.
날아온 술병이 뭉개진 오른쪽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장기린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흑치거호가 술병을 집어 던지기 위해 어깨를 움직인 순간, 이미 술병의 투로상 몸에는 닿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장기린이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알고 싶으면 네 에미한테 물어봐라!”
흑치거호는 이족 출신답지 않게 욕설이 매우 능숙했다.
어깨를 들썩거리고 양팔의 근육을 불끈거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파락호다.
장기린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가속했다.
아마 흑치거호의 눈엔 제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진 걸로 보였을 것이다.
장기린은 흑치거호의 왼쪽 옆구리로 파고든 뒤, 짧은 단타로 늑골 아래, 횡경막 부근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흑치거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크엇……!”
고통과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뜬 흑치거호였지만, 그래도 덩치값은 하려는 것인지 바로 쓰러지지 않고 양손을 뻗어 장기린을 붙잡으려고 했다.
장기린은 한껏 몸을 낮췄다가 마치 모래 속으로 손을 찔러 넣듯 왼손을 힘차게 앞으로 내밀었다.
스팟!
흑치거호의 오른쪽 옆구리가 길게 갈라졌다. 맨손으로 가격했음에도 마치 칼게 맞은 듯한 모습이다.
짐승 가죽으로 된 옷은 물론이고,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마냥 벗겨져서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었다.
“크아악……!”
고통이 상당했는지, 흑치거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장기린은 뛰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흑치거호에게 다가갔다.
흑치거호는 보기에 안쓰러울 만큼 양팔을 휘저어 댔다. 붕붕 휘젓는 주먹에선 바위도 박살 낼 것 같은 파공음이 연신 터져 나왔지만, 아무리 강한 주먹이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지금 장기린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 중이다.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싸움이 안 될 만큼 둘 사이의 격차는 극심했다.
뻐억!!
“컥……!”
발끝을 세운 앞차기가 흑치거호의 명치 부근을 올려찼다.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는 거대한 육체.
장기린은 신들린 것처럼 몸을 움직여 온갖 공격을 때려 넣었다. 흑치거호의 가슴, 배, 명치, 허벅지에 장기린의 주먹, 팔꿈치, 무릎이 차례대로 들어갔다.
흑치거호가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흑치거호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퍽!
“컥……!”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엎드려 있던 흑치거호가 뒤로 넘어갔다.
장기린이 가슴을 걷어찼기 때문이다.
장기린은 흑치거호의 가슴을 한 발로 짓밟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무심한 시선.
압도적인 무력.
무시무시한 존재감.
흑치거호는 순식간에 압도당해 버렸다.
“누, 누, 누구냐? 너는…… 큭!”
밟고 있던 발에 힘을 더 주자 흑치거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기린은 그 상태로 흑치거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천천히. 일각이 열 시진 같은 시간이 흐르고, 흑치거호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 내 상급자는…….”
“낭인왕이라고 불리는 안살도(顔殺刀) 목임태. 평소엔 취보문(聚寶門) 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어. 딱히 암호는 필요없고, 흑치거호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만나 주니까.”
“너, 너……!”
장기린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술술 말해 주는 주호를 바라보았고, 흑치거호는 당황과 분노를 얼굴 가득 떠올린 채 주호를 노려봤다.
“죽고 싶은 거냐?! 그런 걸 함부로 말했다간……!”
“나참, 이래서 머리 나쁜 것들은 싫다니까.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라요.”
“뭣……!”
“이봐, 형씨. 이걸로 내 말이 진짜라는 것도 알았지? 가짜였다면 이 머리 나쁜 인간이 이렇게 반응할 리가 없잖아.”
장기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분명, 주호가 처음에 거리낌없이 술술 말해 줬을 때는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다른 생각이 든다.
이 녀석, 정체가 뭘까. 그리고 뭘 원하는 걸까?
단순히 호의로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다. 분명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녀석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주호는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웃음만을 피식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말라고. 우린 적어도 적은 아닌 것 같으니까.”
“…….”
“그건 그렇고, 형씨. 저 아가씨들은 어쩔 거야?”
주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흑치거호에게 농락당하던 두 아가씨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두 사람은 장기린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녀들의 눈엔 악마나 다름없는 사내를 주먹질 몇 번으로 쓰러뜨리는 사람이니 겁을 집어먹지 않는다면 그게 되레 더 이상할 것이다.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발을 떼었다.
그에겐 이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북천맹에 들키지 않기 위해선 큰 소란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아가씨들을 흑도낭인들의 소굴에 그냥 버려 두고 갔다가는 그 결과야 불을 보듯이 빤할 것이다.
그래서야 나중에 휘연이 깨어나더라도 그녀를 당당하게 마주 볼 면목이 없다.
“잠시…….”
그리고 장기린이 입을 떼려는 순간, 옆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온 무언가가 푹, 하고 박혀 들었다.
“크륵……!”
“……!!”
장기린은 확― 몸을 돌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주호를 노려봤다.
흑치거호는 피거품을 입에서 질질 흘리고 있었다. 목을 관통한 손바닥만 한 길이의 단검 때문이다.
즉사였다.
주호는 장기린의 신경이 분산되는 찰나의 빈틈을 노려 흑치거호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너…….”
“왜 그래, 형씨?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른한 얼굴에선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위험한 놈이다.
장기린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물론, 실력의 차는 크다. 만약 주호가 장기린을 노렸다면 아무리 신경이 분산되어 있었더라도 막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주호가 노린 것은 한 걸음 옆에 있던 흑치거호였고, 주호는 그 빈틈을 노리기에 충분한 실력을 지녔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아무리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고 해도 불과 한 걸음 옆이다.
장기린이 완벽하게 지배하에 두고 있는 권역 내를 속수무책으로 찌를 수 있는 실력.
역시 절정은 훨씬 넘은 무인이 틀림없다.
애초부터 흑치거호의 밑에 있다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실력의 강자임이 분명했다.
“흠흠, 형씨. 형씨는 그런 면에서 무르네. 내가 나서도 되지?”
주호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성큼성큼 아가씨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봐, 아가씨들.”
“……네?”
“집에 가고 싶지?”
주호는 평소 버릇대로 손바닥만 한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두 여인의 시선이 주호의 단검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흑치거호가 이 단검에 찔려 피 거품을 내뱉으며 죽었다.
그녀들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며 단검만을 주시했다.
“네, 네. 가, 가고 싶어요…….”
“여기서 본 거 말할 거야? 그럼 죽여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친구에게 술래잡기를 하자고 꾀는 어린아이처럼 말한다.
두 여인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큰 소리로 호통을 지르며 윽박지르는 것보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위협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그녀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마, 말하지 않을게요!”
“저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다행히 두 여인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주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절박하게 외쳤다.
“다행이다. 착한 아가씨들이네.”
주호는 씩 웃은 뒤, 두 여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이, 형씨. 역시 이 방법이 빠르지? 언제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면서 설명할래?”
“…….”
“난 이 아가씨들 데려다 주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안살도한테는 갔다 와서 데려다 줄 테니까.”
장기린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흑치거호의 목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아 주호에게 던졌다.
그리고 주호의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섰다.
여기서 기다리지 않고 함께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밝힌 것이다.
“……뭐,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가? 알았다고. 귀찮다고 해서 이 아가씨들 안 죽일 테니까 걱정 마.”
두 여인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찔 떨렸다.
주호는 그런 두 여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장기린은 방 밖으로 나가기 전에 주검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흑치거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종잡을 수 없는 자다.’
본성이 악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 거부감이 없고, 눈치가 빠르고 속을 읽을 수 없으며, 뭔가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결여된 듯 성품이 일그러져 있었다.
선악으로 판별해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득.
장기린은 주호의 뒤를 따라갔다.
어느새 주호는 양 옆구리에 각각 두 여인을 끼고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거참, 그렇게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주호는 머리 뒤에 양손을 깍지 낀 채로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조금 전, 두 여인을 집에 데려다 주자 부모들이 뛰어 나와 엉엉 울며 감격의 상봉을 했다. 그리고는 은공이라며 몇 번이나 절을 하는 것을 두 사람은 간신히 떼어놓고 나온 것이다.
“어이, 형씨. 왜 그렇게 과묵해?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대답해 줄 테니까.”
“…….”
“나참, 그럼 내가 물어볼까?”
주호는 나른하게 몸을 건들거리며 물었다. 어두운 밤, 흉흉한 분위기 때문에 거리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형씨, 명 황실 쪽에서 왔지?”
뚝.
장기린의 걸음이 멈췄다.
동시에 주호의 걸음도 멈춘다.
장기린은 자신의 의지로 멈췄지만, 주호는 스스로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선택이 아니라 강제.
주호는 손가락 하나, 아니, 눈꺼풀도 깜빡일 수 없었다. 전신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칼날 수천 개를 온몸에 들이대고 있는 듯했다.
온몸이 저며지는 느낌이라는 것이 이러할까.
장기린은 양손을 늘어뜨린 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주호는 이 순간 심각한 목숨의 위기를 느꼈다.
심기상인(心氣傷人).
단지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경지가 느닷없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으…… 으으…….”
주호는 애써 얼굴 근육을 움직여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혀와 입술이 굳어 있으니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호라고 했나.”
억겁 같은 시간 끝에 장기린의 입이 열렸다.
“네 목적이 뭔지 묻지 않겠다. 왜 나를 도우려고 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할 경우…… 난 망설임없이 너를 없앤다.”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는 장기린의 눈에는 한 치의 인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주호는 오싹함을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호가 두 여인에게 했던 위협은 약과였다. 이것이 진정한 위협이다. 목숨은 물론이고, 존재조차 말살당하는 듯한 이 압도적인 위압감 말이다.
“잊지 마라. 내가 널 살려 두고 있는 이유는,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주호를 살려 두는 것은 지금 그의 행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도, 의외로 선한 면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장기린은 그 점을 주호에게 다시금 주입시켰다.
“……푸핫!”
주호는 압박이 사라지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형씨,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구만. 상상 이상이야.”
주호는 잠시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내 모든 걸 회복하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우두둑 소리가 나게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알았어. 그쪽 일에 방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게. 조금만 더 있으면 형씨도 알게 되겠지만, 우리 둘이 적이 될 일은 없을 거야.”
“알겠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취보문이라고 했지? 그쪽으로 가겠다.”
장기린은 계속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미 남경 전체의 지도를 머릿속에 외우고 있기에 취보문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취보문은 상업이 발달한 남경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지역이다. 상단과 상회들의 본점이 몰려 있고, 대륙의 삼대시전 중 하나인 남경 대시와 가깝다.
“형씨! 같이 가자고―!”
뒤쪽에서 주호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