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一章 ― 낭인지왕(狼人之王)
주호가 안내해 준 곳은 취보문 인근의 상가(商家)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상가가 있는 지역이었다.
삼층 이상의 전각들이 즐비하고, 어두운 밤중에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화려한 외양의 지붕과 벽지가 유난히 눈에 띈다.
물론 화려함만으로는 항주 금선로보다 못하지만, 취보문엔 그와는 다른 형태의 멋이 있었다. 북천맹의 집권으로 등불이 다 꺼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야경도 굉장했을 것이다.
“이곳이야.”
주호는 불이 다 꺼져 있는 전각들 중에 유일하게 문앞에 등불이 걸려 있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대문은 재복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칠해 두었다.
장기린은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임에도 안쪽에서 왁자지껄한 소음과 고함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호가 나서서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짙은 주향과 함께 사내들이 모여 있을 때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콧속으로 확 밀려들었다.
끼이익―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인근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개중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가져가는 사내들도 몇 명 보였다.
“여어―! 잘들 즐기고 있어?”
하지만 앞서 있던 주호가 유쾌한 얼굴로 손을 이리저리 흔들자 모여들었던 시선 중의 대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칫, 뭐야, 고양이였나.”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건배나 하자고!!”
다시금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거친 인상의 사내들이 벌게진 얼굴로 연신 되도 않는 노래를 부르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유쾌한 면이 있었다.
대부분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주호에게 시선을 계속 보내며 다가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피부색이 허연데다 키가 멀대처럼 크고 머리를 승려처럼 빡빡 민 사내였다.
그는 마치 원숭이가 생각나는 움직임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주호에게 알은척을 했다.
“주호, 여긴 웬일이지?”
“백원(白猿), 오랜만이네. 열흘 만인가? 갔던 일은 잘됐어?”
장기린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안 그래도 원숭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부르는 이름까지 백원(흰 원숭이)이다.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
“뭐, 그럭저럭 잘됐다.”
“존귀광대하신 낭인왕님 좀 뵈러 왔어. 위에 있지?”
“…….”
거기서 백원이 주호를 향해 의심스런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엉?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주호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백원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기린의 손이 슬그머니 등 뒤로 돌려 메고 있는 창대로 향했다.
“넌 꼭 사고를 치기 전에 목(木) 대장을 높여서 부르지.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냐? 설마 지난번처럼 칼부림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오늘은 그만둬라. 안 그래도 대장이 오늘 맹에 다녀왔는데,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루종일 서슬이 퍼렇다. 물이랑 숫돌을 가져가서 벌써 두 시진째 칼만 갈고 있단 말이다.”
“호오, 또 누구 얼굴을 도려내실라고 그러나?”
“멋모르고 까불다간 그게 네 얼굴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오늘은 그만두란 말이다.”
안살도(顔殺刀) 목임태(木林泰).
그는 수천에 달하는 대륙의 낭인 무사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고수로, 특히 대결에서 이기면 진 상대의 얼굴을 도려내는 잔인한 손속으로 이름을 떨친 자였다.
다행히 지금까진 정파의 인물들을 건드리지 않아서 무림공적이 되진 않았지만, 그 잔인한 손속으로 따지면 언제 무림공적이 되어 추살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거 잘됐네. 원래 긴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때야말로 빈틈이 생겨나는 거 아니겠어?”
“너……!”
차갑게 눈을 빛내는 주호를 보며 백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됐어, 됐어. 농담이야. 오늘은 흑치거호의 일로 왔어.”
“…….”
“안에 얘기 좀 전해 줘. 구역의 수금 문제라고 하던데.”
백원은 뭔가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쌓아 둔 물자는 다 소모되어 가는 시점이라서, 구역의 수금에 관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한편, 문제가 해결되는 듯하자 장기린은 창대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런데 이쪽은?”
“이 형씨는…… 으음, 올라가서 말할게.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서.”
“외부인은 목 대장의 방으로 못 들어가.”
“외부인은 아니야. 척 보면 알잖아? 흑치거호랑 예전부터 친목이 있는 사이라던데.”
백원은 장기린의 강인한 눈매와 험악하게 뭉개져 있는 오른쪽 귀를 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전하지.”
백원은 두 사람을 왁자지껄한 장내와 거리가 좀 떨어진 곳까지 안내하더니, 거기서 기다리라 말하고는 뒤쪽의 별채로 들어갔다.
“거짓말을 잘하는군.”
장기린은 무심한 목소리로 평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보니까. 별로 어려운 건 아니라고.”
“거짓으로 쌓은 인간관계는 쉽게 무너진다.”
“오, 그건 걱정해 주는 거야? 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긴 했지만, 형씨는 인정이 많다니까. 꼭 백원 같아. 어떻게 하면 사람을 그렇게나 죽이고도 인정을 유지할 수가 있지?”
장기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꼭 이런 식이었다.
주호는 대화를 하면서 꼭 상대의 심기를 긁는 말을 한마디씩 집어넣는다. 그것도 그 말이 상대의 심기를 긁는다는 것을 다 알면서 말이다.
앞서 느꼈던 영리함을 생각할 때 그것은 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어느 곳이든 자신을 미워하길 바라는 것 같은 행동이다.
“……뭐, 상관없겠지.”
장기린은 무슨 말을 해 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안살도 목임태만 만나고 나면 주호와의 관계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주호는 분명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이 이상 상관할 만한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 상관없지? 그럼 하나만 부탁할게. 들어가면 내 싸움에 끼어들지 말아 줘.”
“네 싸움이라고?”
“그래, 내 싸움. 아, 형씨가 원하는 건 대충 알아. 그건 확실히 알아봐 주고 싸울 테니까 걱정 말라고. 그러니 상관없는 내 싸움에는 끼어들지 마.”
“…….”
장기린은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주호를 지그시 응시했다. 속을 꿰뚫어 볼 생각이었는데, 주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속을 볼 테면 봐 보라는 식으로 가슴을 쭉 편 채 능글맞게 웃었다.
“주호.”
그때, 별실 입구에서 백원이 불렀다.
“만나 보겠다고 하신다. 들어와.”
“그래그래. 알았다고.”
주호는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며 별실로 들어갔다. 백원은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하급 보표마냥 입구를 지키며 서 있을 뿐이다.
상가의 별실은 객잔의 별실과는 또 다른 모양새였다.
귀한 물건은 이미 다 뜯어 갔는지 뭔가가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바닥에 깔린 융단이라거나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고급스러운 목재 가구들이 상당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마 남경이 북천맹에게 장악당하기 전에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유명한 대상들의 회의가 열렸을 것이 분명했다.
장기린은 황량해진 상가의 복도를 거닐며 마치 멸망한 왕궁의 수도를 거니는 듯한 세월의 허무함을 느꼈다.
“크흠!”
주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괜히 소리를 내는 듯한 헛기침이다.
긴 복도를 지나 내실의 문이 열렸고, 장기린은 흑치거호의 방보다는 작지만 훨씬 고급스럽고 정갈하게 관리된 방 안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푹신해 보이는 보료 위에 앉아 섬뜩한 예기를 흩뿌리는 은색 예도(銳刀)를 넓적한 숫돌 위에 갈고 있는 마른 체구의 사내가 보였다.
양손으로 칼날을 갈고 있는 모습은 더없이 경건했다.
그런 사내의 양옆으로 흑색 무복에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호위무사 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 주호와 장기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슥― 드르륵― 슥― 드르륵―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방 안에서 숫돌에 칼날이 갈리는 섬뜩한 소리만이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주호는 드물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사태를 지켜보기로 마음 먹은 장기린 역시도 침묵을 지켰다.
“흑치거호의 일로 왔다고?”
안살도의 목소리는 마치 모래가 부딪치는 소리처럼 메마르고 거칠었다.
“그래.”
스릉―
주호의 짧은 대답에 호위무사 두 사람의 허리에서 칼이 반쯤 뽑혔다. 무례한 반말이 심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만둬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나.”
호위무사 두 사람은 그 말에 칼을 다시 집어넣었지만, 여전히 살기로 가득한 시선은 주호에게 머물러 있었다.
“구역의 수금 문제라던데?”
“맞아. 운중로 부근의 수금 문제야.”
“이상하군. 바로 어제 흑치거호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다.”
“그래, 그 얘기도 했어. 그게 잘 안 돼서 걱정인 모양이야.”
“잘 안 된다……?”
안살도가 칼날을 갈던 손놀림이 처음으로 멎었다.
안살도가 칼에서 시선을 떼고 주호를 쳐다봤다. 마치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탁한 눈동자였다.
“정확하게 뭐라고 했지? 흑치거호가?”
“기한을 늘려 달라고 했어.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야.”
“……이해가 안 되는군. 정확히 어떤 점이 잘 안 풀린다고 했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난 그쪽에 관심이 없다고. 전해 달라고 하는 말만 전해 줬을 뿐이야.”
안살도는 싸늘한 시선을 주호에게 보냈고, 주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으며 똑같은 표정을 고수했다.
긴장감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주호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해도 이번만큼은 속여넘길 수 없을 것 같은 위험천만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맹에 다녀왔다면서? 그 일은 잘되어 가냐고 묻던데?”
“…….”
“왜? 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
주호는 인상이 굳어지는 안살도를 보며 오히려 과감하게 뭐가 잘못되었냐고 물었다.
“일은 잘 안 되었다.”
“아, 그래?”
“고집 센 몽고 놈들. 애초에 내린 명령만 충실히 지키라고 하더군. 더 이상의 특혜는 없다고 했다. 흉월이라고 했던가. 중간 관리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 감히 이 몸을 노예 취급했다.”
……속아 넘어갔다!
아마 진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참지 못하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살도는 맹에서 있던 일이 다시 떠오른 듯 불편한 표정이었는데, 그 살벌한 얼굴이 도리어 장기린과 주호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말인데…….”
“뭐냐?”
“흑치거호가 그러던데, 이번에 잘 안 되었으면 다음에 자기를 한 번 데려가 주면 안 되냐고, 일이 잘못되기 전에 황성 안쪽에 한 번만 들어가 보고 싶다 그랬어.”
“…….”
안살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흑치거호가 그랬다고? 황실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다고?”
“어. 이 기회가 아니면 평생 언제 황실에 한 번 들어가 보겠냐고, 꼭 한 번만 들어가 보고 싶다 그러던데?”
“흐음…….”
“허영심 많은 성격인 거 알잖아? 한 번 고관대작이 된 것마냥 황실 정문으로 떡하니 들어가 보고 싶은 거겠지.”
주호의 거짓말 실력은 정말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기가 막혔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미리 파악해 둔 사람들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럴듯한 말을 포장해 낸다.
말은 쉽지만, 상대가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있는데도 속여 넘긴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그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안살도는 주호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어차피 정문으로는 무리다. 우리가 지나갈 수 있는 문은 동쪽의 쪽문뿐이다. 몽고 놈들, 우릴 얼마나 무시해야 직성이 풀릴 건지…….”
안살도는 미리 준비해 둔 머리카락 하나를 자신의 예도 위에 떨어뜨리며 투덜거렸다.
머리카락은 너무나 쉽게 칼날 위에서 두 동강이 났다.
“그러니까, 목 대장이 빨리 비어 있는 오왕 자리 하나를 꿰어차라고. 북천맹도 목 대장을 인정했으니까 남경을 맡겼던 거 아니겠어?”
“쯧, 몽고 놈들은 생각보다 고집스럽고 오만하다. 기회를 쉽게 주지 않아.”
“그럴수록 더 기회를 엿봐야지. 북천맹에 목 대장만 한 실력자는 없잖아?”
주호는 화술이 능수능란했다. 안살도의 심기를 슬슬 긁 듯이 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어느새 자연스레 상대를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겨울철 쇳덩이마냥 냉랭하던 안살도마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린 것이 그 증거였다.
자고로 칭찬을 듣고 기분 안 좋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건 온갖 선행을 베풀고 다니는 선인이든, 수백을 죽인 살인마든 사람이라면 똑같이 겪는 이치였다.
“그래서 흑치거호에겐 내가 뭐라고 하면 돼? 목 대장이 황실에 들어가는 계획에 맞춰서 같이 가라고 할까?”
“그게 무슨 소리냐? 나보고 그놈의 안내나 하라는 건가?”
안살도의 눈에서 귀광(鬼光)이 번뜩였다.
“아니, 그치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방법은 있다. 정 들어가고 싶으면 아무 때나 동쪽 쪽문으로 가서 ‘바람의 아들들과 만나러 왔다’고만 하면 들여보내 준다고 해라.”
“아, 생각보다 쉽네? 혹시 암호가 주기적으로 바뀌거나 하는 거 아니지?”
“암호는 안 바뀐다. 하지만 그 암호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중전(中殿)까지뿐이다. 그 이상은 흉월이라는 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잘못 어슬렁거렸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해.”
“무섭네― 알았다고. 그렇게 전할게.”
주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답한 뒤, 고개를 슬쩍 돌려 장기린에게 눈짓을 보냈다.
괜찮냐고 묻는 듯하다.
장기린은 할 말을 잃었다.
‘대단한 놈이군.’
상대의 기분을 조절하고 눈에 잘 안 보이는 교묘한 말재간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다.
만약 주호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일이 몇 배나 어려워졌을 텐데, 의외의 인연에서 큰 수확을 얻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을게, 목 대장.”
“뭐냐?”
“중산혈사(中山血事) 말이야…… 그건 본인이 직접 한 거야, 아니면 저런 수하들이 한 거야?”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조금 전까지의 호의적인 공기가 거짓말이었다고 생각될 만큼 순식간에 살벌한 적막과 살기가 감돌았다.
중산혈사.
그건 온갖 추악한 일을 다 저질러 온 흑도 낭인 출신의 안살도로서도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인생의 오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호위들이 다시 칼을 빼 들었다.
이번에는 안살도도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머리카락도 잘려 나가는 최고급 예도를 손에 든 채 싸늘하고 살기 어린 눈으로 주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걸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
“궁금해?”
“…….”
“특별히 말해 줄게. 난 동생이 있었는데 말이야, 나랑 내 동생은 원래 중산에 살았어. 변변한 부모도 없는 나한테 유일한 혈육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마을의 심부름으로 산 너머에 다녀오니 마을이 피바다로 변해 버린 거야. 집으로 가 보니 동생은 이미 죽어 있더라고.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인데, 온 몸에 마치 꼬치에 꿰듯이 나무 죽창을 다섯 개나 꽂아 뒀어. 그것도 꽂은 시간은 다 제각각. 내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장난치듯이 창을 하나씩 꽂았다는 뜻이지.”
주호는 마치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하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혹한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웃는다.
그건 통곡을 하며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섬뜩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얼굴 가죽이 벗겨져 있더라고.”
“…….”
“혹시 기억나는 거 있어? 아무리 개망나니에 말종이라도 그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봤다면 기억할 것 같은데?”
안살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는 동작. 제자리에 버티고 선 자세.
그 어떤 것도 흠을 잡을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절정 중에서도 그 끝자락에 올라 있는 고수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냐?”
“글쎄? 일단, 그때 범인이 누군지 알려 주는 게 먼저 아닐까?”
“우습군. 이제 와서 반성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냐, 아니면 너한텐 복수할 권리가 있으니 죽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나?”
안살도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쳤다.
“역시 그런가……. 뭐, 너무 예상대로라서 식상할 정도네.”
“그래, 식상하지. 그러니까 새로운 결론을 짓는 게 어떻겠나?”
“어떤 결론인데?”
“그 형도 똑같은 죽음을 맞게 되는 거다. 죽창 다섯 개로 몸이 꿰뚫리고 얼굴 가죽이 벗겨지는 거지. 어때? 이야기가 하나 완성되는 듯한 모습 아닌가?”
안살도는 시퍼런 예기가 감도는 칼날을 혀로 한 번 핥았다.
칼날의 예기에 베인 혀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장기린은 그걸로 알게 되었다.
안살도라는 자.
낭인왕으로 불리는 이자도 역시 비틀려 있다.
사람으로서의 뭔가가 결여되어 빠지고, 완전히 뒤틀려서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변해 버렸다.
“이봐, 목임태.”
“뭐냐, 건방진 놈.”
“내가 왜 굳이 이곳까지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머리가 멀쩡하면 생각을 좀 해 보라고.”
주호는 씩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강단있는 모습이지만, 평소의 얼굴을 봤던 장기린의 눈엔 긴장해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글쎄, 죽고 싶어지기라도 한 것 아닌가?”
“아니지, 그런 게 아니야.”
고개를 저은 주호의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따당!!
“큭……?”
“읏……!”
안살도보다 앞서서 나서려던 호위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간 단검 두 개가 정확하게 그들이 칼을 뽑으려는 순간에 손잡이를 후려쳤던 것이다.
“난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온 거라고.”
당당한 목소리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뭐냐? 그럼 도전이냐?”
안살도는 크게 웃었다.
“좋다, 마음껏 발버둥 쳐 봐라. 내 장담하지. 네놈은 네 동생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
주호는 씩 웃으며 품속에 손을 넣어 한 손마다 네 개씩의 단검을 꺼내서 자세를 잡았다.
“얼굴 가죽을 벗겨 주마.”
“원래 이야기 속에서 악역은 항상 쓰러지는 법이라고.”
최고의 예기를 뽐내는 대도가 허공을 가르고, 손바닥만 한 단도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하늘을 수놓았다.
두 사람의 싸움은 순식간에 격하게 달아올랐다.
쉬익―!
목을 노리고 쏘아져 간 단검이 좌우로 진동하는 안살도의 움직임을 붙잡지 못하고 벽에 가서 박혔다.
안살도의 움직임은 빨랐다.
번잡스러운 행동 없이 전속력으로 쭉 파고드는데, 그 모습이 허공에 일직선으로 줄을 긋는 듯했다.
채애앵!!
“호오……!”
안살도는 힘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도법을 사용하는 듯했는데, 그는 주호가 단검을 교차해서 공격을 막아 내자 탄성을 내뱉었다.
무림의 격언 중에 ‘한 치만큼 길면 한 치만큼 유리하다’라는 말이 있다.
본래 거리를 제압하는 자가 승부를 제압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만큼 조금이라도 멀리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장병(長兵)이라면 짧은 단병(短兵)보다 유리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주호가 짧은 단검으로 긴 칼의 공격을 막아 냈다.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손바닥만 한 단검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낼 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주호를 향해 안살도의 공격이 노도처럼 몰아쳤다. 특히 칼로 노리기 쉬운 상체에는 한 번에도 수십 번의 공격이 날아가니 주호의 움직임이 한층 더 다급해졌다.
따당! 따당! 따다당!
순식간에 수십 합이 교차했다. 두 사람은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방법으로 싸우고 있었다.
중거리 이하로 최대한 접근하려는 안살도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는 주호의 거리 싸움이다.
서로의 간격이 한계까지 가까워지자 안살도의 얼굴에서 기쁨의 미소가 떠올랐다. 싸움의 광기에 한껏 도취된 표정이었다. 미친 듯이 내리찍는 칼날에선 한시라도 빨리 상대의 피가 보고 싶다는 집념이 절절히 느껴졌다.
피쉭―!
주호는 그러한 공격들을 비교적 잘 막아 내고 있었으나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게다가 스치는 머리카락마저도 잘릴 만큼 날카로운 칼날과 상대하다 보니 공격을 막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단검으로 공격을 막는다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날카로운 기세가 그 뒤에 있는 주호의 몸을 덮치는 것이다.
순식간에 주호의 몸이 너덜너덜하게 변해 버렸다.
팔뚝, 어깨, 얼굴, 가릴 것 없이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피가 뿜어질 만큼 큰 상처는 아직 없었지만, 자잘한 상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안살도는 옆으로 몸을 날리려는 척을 하더니, 갑자기 품속으로 확 파고들었다.
동시에 창과 단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베이고, 베고, 날린다.
주로 공격하는 쪽은 안살도였고, 주호는 거의 피해 내는 쪽이었다.
좌측 대퇴부를 노리는 듯했던 칼날이 갑자기 치솟아서 팔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주호는 놀라운 민첩성으로 그 공격을 피해 내고는, 바닥에 주저앉듯이 자세를 낮추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안살도의 발목을 노렸다.
쉬익―!
“죽어랏!!”
안살도는 주호의 공격을 펄쩍 뛰어넘은 뒤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콰직!
안살도의 공격의 파괴력은 굉장했다.
공격을 막을 때마다 주호의 몸이 휘청휘청거렸다. 게다가 기세가 오르면 오를수록 칼에 실린 괴력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주호도 계속해서 틈을 노렸지만, 안살도의 몸에는 항상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단검은 불과 한 치를 앞두고 빗나갔다.
간발의 차이.
하지만 그게 현재 안살도와 주호가 가진 능력의 차이와 마찬가지였다.
쩌엉―!!
“이런…….”
안살도가 전신을 회전해 크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 주호는 몇 번 공격을 계속하다가 단검으로 요혈만 보호한 채 뒤로 물러났다.
강기와 내력의 싸움이 되면 승부가 되지 않는다.
안살도의 눈이 번뜩였다.
쉬익― 하고 찔러오는 칼엔 섬뜩한 예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뱃속으로 푹! 들어오는 순간, 주호의 눈빛이 아득해지다가 다시 돌아왔다.
“쿨럭……!”
주호는 피를 토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쑥― 하고 칼날이 빠져나오자 잘린 혈맥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그나마 빨리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머리카락도 잘라 내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배가 길게 갈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졌네.”
주호는 복부의 상처를 한 손으로 누르며 항복했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봐, 목 대장. 진 걸 인정할 테니까 살려 주면 안 되겠어?”
“……허어, 살려 달라?”
“나처럼 유능한 부하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걸? 목 대장도 조금이지만 상처를 입었잖아? 그럴 만한 강자가 낭인들 중에 흔할까?”
주호는 출혈 때문에 안색이 허옇게 질려 가는 와중에도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안살도의 목덜미 부근이다.
싸움 초반에 단검들을 던질 수 있었을 때,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던 공격 몇 개가 생채기를 남겨 두고 있었다.
“내가 동생의 원수라고 하지 않았었나?”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뭐.”
“…….”
“어때? 살려 줄래?”
안살도는 들고 있던 칼을 허공에 휙― 하고 한 번 휘두르더니,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탁한 눈빛 사이로 잔인하고 가학적인 빛이 스쳐 지나갔다.
“무릎 꿇어라.”
“…….”
“네 가족의 원수다. 그런데 무릎을 꿇을 수 있겠나?”
“……알았어.”
주호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도 숙여야지. 그건 생명을 구걸하는 자세가 아니잖아.”
“……살려 주십시오.”
주호는 복부에 상처를 입어 몸을 굽히기 힘들 텐데도 불구하고 이마를 땅에 쿵, 하고 찧었다.
“…….”
장기린은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싸움과 패배, 그리고 능욕의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크하하! 크핫핫!”
안살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성큼성큼 주호에게 다가왔다.
그는 발로 주호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날카로운 칼날을 주호의 턱 밑에 들이댔다.
“어리석긴. 아무리 필요한 인재라도 너 같은 후환을 남겨 둘 것 같으냐?”
안살도는 잔인하게 웃었다.
결국은 잠시의 유흥이었을 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원수나 다름없는 주호를 살려 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다만 주호가 어디까지 굴복할 수 있을지, 얼마나 갖고 놀 수 있을지 궁금했을 뿐이다.
“걱정 마라. 내가 처음에 한 약속은 꼭 지키마. 너는 네 동생이랑 똑같이 죽을 거다. 사지를 죽창으로 고정시켜 두고 얼굴 가죽을 뜯어 주마.”
칼날이 드리워진 주호의 턱 밑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로 안살도가 칼날에 힘을 주려는 순간,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뭐라고?”
“음, 그렇지만 역시 아직은 싫어. 할 일이 많이 남아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
미끄러지듯이 주호의 양쪽 소매에서 튀어나오는 단검 두 개.
따아앙!!
피슉!
상반된 소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난 안살도가 목을 노리는 단검을 칼로 쳐 내는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찰나의 빈틈을 노리고 쏘아진 단검이 안살도의 왼쪽 허벅지에 박히는 소리였다.
“이, 이런……!”
안살도가 경악하는 사이, 주호는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모를 만큼 많은 숫자의 단검을 양손에 뽑아들고 있었다.
한 손당 네 개씩.
양손을 합쳐 여덟 개다.
“배알이 꼴리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고, 목임태.”
주호가 양손을 머리 위에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단전 앞으로 손을 모았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여덟 개의 단검이 허깨비처럼 사라져 있었다.
나타난 곳은 안살도의 코앞.
여덟 개의 방향에서 각각 여덟 개의 단검이 요혈을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따다당!
푸욱! 푸푹!
“크윽! 크아악……!”
안살도는 고통에 몸부림 치면셔도 경악으로 부릅뜬 눈을 주호에게 고정시켰다.
“팔향……! 팔향비접……!”
팔향비접(八香飛蝶).
그건 정파에서 아주 유명한 어떤 가문의 암기술이었다.
안살도가 미처 다 막아 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의 명문 무공은 다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명성을 날리는 거다. 여덟 개의 방향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여덟 개의 비도는 도깨비의 무공처럼 신묘하기만 했다.
“주군!”
“네 이놈……!”
한편, 안살도가 피를 토하며 몸을 굽히자 호위들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챙― 하고 뽑아 든 칼날이 주호의 목을 노렸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사납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이제 힘이 없는데…….”
주호는 창백한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을 애써 품속에 넣고 단검이 더 있지는 않나 더듬거렸다.
그는 지금 복부에 큰 구멍이 뚫린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거기다가 몸에 부하가 걸리는 팔향비접까지 사용했으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차핫!!”
“죽어랏!!”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주호는 자포자기한 듯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죽는 그 순간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비틀거리며 서서 몸에 박힌 단검을 하나씩 뽑아내고 있는 안살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쒸이이잉―!
푸화악―!
그런 주호에게 뜨끈한 핏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주호는 멍하니 양옆을 돌아보았다.
그를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던 안살도의 호위 두 사람이 허리가 양단된 채 상체가 사라져 있었다. 피는 허리 부분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주호는 자신의 등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이 새카만 창을 다시 천으로 둘둘 감아 등 뒤에 돌려 메고 있는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약속은 지켰다.”
장기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싸움엔 끼어들지 않았다.”
“…….”
잠시간의 침묵 후에…….
“하하! 하하하하!”
주호는 어깨를 들썩이며 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졌어, 졌다고. 형씨, 도저히 이길 수가 없구만.”
주호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도 능청스레 웃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웃음을 두고 볼 수 없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안살도 목임태.
그는 낭인왕이라 손꼽히는 고수답게, 요혈들이 단검에 꿰뚫린 상태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집요한 근성을 보였다.
“네노옴……!”
“어, 어? 잠깐!”
“네놈만은…… 네놈만은……!”
안살도는 귀신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대도를 주호에게 휘둘렀다. 주호는 등골이 섬뜩해졌다. 빈사 상태에서 펼치는 공격임에도 검끝이 살아 있는 일격이었다.
더 이상 단검이 남지 않은데다 움직일 힘도 없는 주호는 본능적으로 머리 위에 양팔을 교차했다. 안살도의 칼날은 욕이 나올 만큼 날카롭다. 아무리 약하게 맞아도 아마 최소한 팔 하나는 잃게 될 것이다.
‘젠장,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주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어……?”
아무리 기다려도 칼날이 떨어지질 않는다.
조심스레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자 대도를 머리 위로 쳐든 채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안살도의 모습이 보였다.
“어어……?”
그대로 칼을 떨어뜨리기만 해도 되는데, 손만 놓아도 저절로 팔 하나쯤은 뎅겅 자를 듯한 명도임에도 안살도는 끝내 그걸 하지 못하고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어진 채 뒤로 넘어갔다.
안살도의 원통한 눈빛은 마지막에 주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뒤쪽.
마치 서 있는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시선이었다.
“설마……?”
주호는 끈적하게 피가 굳기 시작하는 복부를 양손으로 누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고 말하던 사내.
장기린이 그곳에서 안살도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장기린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저기 말이야…… 형씨지, 도와준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장기린은 미간을 지그시 좁히며 인상을 꿈틀거리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풋……!”
주호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생명의 위기까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상태에서 웃으면 안 될 일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와는 정반대다.
장기린의 거짓말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어설펐다.
“아아, 졌어, 졌다고.”
주호는 벌렁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안살도에게 다가가 정말로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형씨, 전에 하던 이야기 좀 마저 할까?”
“해라.”
“내가 형씨가 명 황실이랑 관계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 줄 알아? 냄새가 났거든. 형씨한텐 짙은 피 냄새랑 관직에 있던 사람 특유의 꼿꼿함? 아무튼 뭐, 그런 게 느껴졌단 말이야.”
주호는 복부의 혈도를 짚어 지혈을 확실히 시킨 뒤, 입고 있던 옷을 북― 찢어서 복부에 칭칭 감았다. 그러면서 ‘으악! 아프다!’라며 엄살을 떠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다 흑치거호한테 상급자가 누구냐고 묻는 걸 보고 딱 감이 왔지. 아, 황성 안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하고 말이야.”
장기린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보통 사람은 그 정도만 보고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래서 관군 쪽에 속한 사람으로서 묻겠는데…… 흑도라든가 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안 좋게 생각하지? 더러운 범죄자들이라거나, 사회에 쓸모없는 쓰레기들이라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주호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안색이 아직 창백했으나, 두 눈만큼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뭐,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그중에 이 할 정도는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미친놈들이지만…… 그래도 나머지 팔 할은 어릴 적에 불행한 삶을 사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안 좋은 길로 빠졌을 뿐이지. 본성이 악하진 않더라, 이거야.”
주호의 말은 장기린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해 주었다.
이 세상에 선함과 악함은 없다.
강함과 약함, 그리고 세상에 적응한 자와 적응하지 못한 자로 나뉠 뿐이다.
‘하긴, 그들도 사람이지.’
조금 전에 이곳에 오기 전, 낭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유쾌한 광경이 떠올랐다.
백원이라는 자가 주호를 걱정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그들도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안 좋은 길로 빠졌지만, 그것만으로 경멸하고 죽여야 할 이유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난 야망이 있어. 이 낭인들을 규합해서 말이야. 끄윽, 아프네. 아무튼, 제대로 방향만 잡아 주면 대문파 못지않은 힘이 생길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무림인들한테 경멸받지도 않게 될 거야.”
“……그런가.”
“내가 형씨랑 적이 안 될 거라고 했던 말도 그런 이유야. 난 이제 낭인들을 다 데리고 북천맹을 떠날 거거든. 그러니 북천맹과 싸울 형씨랑 적이 될 이유는 조금도 없지.”
“……!”
장기린은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제껏 세상에서 멸시받던 낭인들에겐 이곳의 생활이 천국이었을 텐데 어째서 떠나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떠나려는 거지? 낭인들에겐 북천맹이 기회의 땅 아닌가?”
“큭, 형씨도 흑치거호랑 비슷한 소리를 하네. 하지만 사람이 큰 흐름을 볼 줄 알아야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선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그 말은……?”
“북천맹은 글렀어. 사람들을 대하는 법이나 관리랍시고 등용해 놓은 놈들을 보면 알 수 있어. 여긴 오래 못 갈 거야. 빠지려면 지금이 적기지.”
주호는 단언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장기린은 왠지 주호가 말한 야망이 실제로 성취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시류를 보는 눈이 있고, 뛰어난 실력에 독기까지 있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가. 알았다.”
장기린이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은 주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백원! 백워언―!”
마치 비명을 지르듯이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리며 백원이 뛰쳐 들어왔다.
“목 대장! 죽이면 안 됩니다! 주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어?”
백원은 방 안 가득한 짙은 혈향을 느끼고 사색이 되었다가, 다시 눈을 부릅뜬 채 시신이 되어 있는 안살도를 보고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으, 어, 어엇?!”
백원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백원, 귀가 울려……. 조용히 좀 해.”
“아, 그, 그래. 그런데 넌…… 으엇!! 넌 또 왜 이래? 배에서 피가 나잖아?! 괜찮냐?!”
“시끄럽다니까…….”
백원은 처음에 본 차분한 인상은 어디로 던져 버렸는지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며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목 대장은…… 설마?”
백원이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장기린을 쳐다봤다.
“내가 죽였어.”
“뭣?!”
“내가 죽였어. 십 년간 감춰 뒀던 비기로. 드디어 그놈을 죽였다고.”
백원은 처음엔 아연실색하여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건…… 이거, 심각한 일인데.”
“당연히 심각하지. 내가 낭인왕을 죽인 거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그래. 내가 이제부터 낭인왕이다.”
씩 웃으며 말하는 주호의 모습에선 왠지 모를 위엄마저 느껴졌다.
“낭인왕이라…… 실감이 안 나네, 실감이 안 나. 이거 진짠가? 꿈꾸는 거 아니야?”
“때려 줄까?”
“됐어!”
두 사람은 큭큭대며 웃었다.
“백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낭인왕이 되면 가장 먼저 뭘 할지?”
“북천맹을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맞아. 일단 이곳을 떠나서 세를 키울 거야.”
“그런데 낭인들이 순순히 따를까?”
“안 따르는 것들은 정리해야겠지.”
주호는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냉정한 결단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라 해도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없이 벨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얼핏 잔인해 보이지만, 어쩌면 군주로서는 오히려 뛰어난 자질일지도 몰랐다.
“저기, 형씨.”
그때, 주호는 장기린을 불렀다.
“고마웠어. 이제 가 봐야지? 바쁠 텐데.”
“…….”
“내 걱정은 하지 마. 이 정도론 안 죽으니까. 아니, 오히려 큰 산을 넘었으니 이젠 탄탄대로라고. 그리고…… 오늘 있던 일에 대한 빚은 언젠가 꼭 갚겠어.”
“그럴 것 없다.”
“아,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장기린을 주호가 다급하게 불렀다.
“저기, 내가 아까 목임태한테 한 말들은 다 거짓말이니까 믿지 마. 절대로. 그냥 좀 놀리려고 한 말이야.”
“…….”
“진짜라고! 다 거짓말이었어!”
장기린은 등 뒤로 소리치는 주호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준 뒤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
아무리 주호가 거짓말을 잘해도 이건 무리다.
중산혈사와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안살도의 반응, 그리고 주호의 얼굴 표정까지.
천만 명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그건 못 속인다.
장기린은 납득했다.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낭인들을 규합한 왕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그때의 주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장기린은 조금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