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5화 (94/686)

第百十二章 ― 천랑등장(天狼登場)

커다란 덩치,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를 띠고 있는 빳빳하면서도 부드러운 털.

산중왕(山中王)이라고도 불리는 대호의 움직임은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게 하는 마력이 있다.

“저기요.”

운찬은 그 대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요!”

대호가 가만히 있었다면 말을 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호가 어마어마한 식탐을 부리며 그들이 먹을 밥까지 싹싹 긁어먹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겨울 내내 창을 흔드는 바람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 할아버지!!”

결국 빽! 소리를 지른 뒤에야 대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대호(大虎).

정확히 말하자면 대호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이 칠십이 넘은 노인이다. 칠십이 넘은 노인이라고는 해도 웬만한 장정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근육질에 건장한 육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피의 양쪽에 구멍을 뚫어서 쭉 내밀고 있는 팔뚝만 봐도 알 수 있다.

말의 뒷다리처럼 부풀어 올라 있으면서도, 세세하게 갈라져서 힘줄이 불끈거리는 모습은 육체가 극도로 단련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항주 금선로 최고의 싸움꾼이었던 철우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될까.

나이를 떠나서 남자로서 대적하기 힘든 상대임이 분명했다.

“음, 운찬이냐?”

맹호도 방극.

문파나 세력도 없이 맨몸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다란 대도 한 자루만 가지고도 이름을 떨쳐 결국 무림에서 제일 강하다는 열 명 중 한 사람이 된 대단한 인물이 얼굴에 밥풀을 묻힌 채 운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몇 그릇째예요!!”

“다, 다섯 그릇?”

“적당히 좀 드시라고 했죠!! 이러다가 열흘치 식량을 이틀 만에 다 먹게 생겼다고요! 안 그래도 방 할아버지 식사는 우리들 세 배로 하고 있는데, 왜 날이 갈수록 점점 많이 드시냐구요!!”

운찬은 울분을 토했다.

지금 그들은 객잔 신세를 질 수도 없는 험한 길을 여행하는 중이다.

거기에 천직이 숙수이다 보니 식사 담당은 당연히 운찬. 자연히 식량의 조절과 같은 제반 사항 역시도 모두 운찬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게 어쩔 수 없잖냐. 너무 맛있다고, 네 밥은.”

“큭! 숙수로서 그 말은 기분 좋지만, 그래도 방 할아버지는 너무 심하다구요. 이틀 만에 쌀이 떨어지겠다는 건 절대 빈말이 아니에요!”

“이놈아, 늙은이를 먹을 걸로 괄시하면 천벌받아!”

낭인계에서 신처럼 추앙받는 맹호도 방극이 밥 때문에 서러워하고 있었다.

“늙은이도 늙은이 나름이죠! 소도 한주먹에 때려잡을 것 같은 사람은 늙은이로 볼 필요가 없어요!”

“이런 못 배워먹은 놈을 봤나!! 유교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라고 안 가르쳐 주디?”

“그러니까 이만큼이나마 밥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왜 몰라요!”

“큭……!”

“매번 이러시면 정말 곤란하다구요. 저랑 휴도 먹어야 하는데, 지금 밥통에 남은 양을 봐요! 한 그릇도 안 되겠네!! 저희는 굶으라는 거예요?”

“……젊은것들은 좀 굶어도 돼!”

“그럼 아예 내일부터 다 같이 굶게 밥 짓는 양을 절반으로 줄여 볼까요!!”

운찬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바락바락 소리쳤고, 맹호도 방극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그 이상 억지를 부리지는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식사의 책임자!

여행길에서 그보다 더 큰 권력은 없다.

“네가 늙어 봐야 이 마음을 안다. 늙으면 식탐만 생겨. 밥을 안 먹으면 머릿속이 핑핑 돈단 말이다.”

절정의 경지조차 뛰어넘은 고수가 밥 좀 안 먹는다고 머리가 핑핑 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방극이 커다란 덩치로 한숨을 푹 내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짠한 느낌마저 들었다.

“끄응, 그러니까 방 할아버지, 좀만 참으시라구요. 맛있는 음식은 이번 일 끝나고 나서 실컷 해 드리면 되잖아요.”

운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사실, 운찬의 입장에서 이 정도의 밥은 실력 발휘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쌀을 깨끗이 씻어서 밥을 하고, 미리 준비해 온 채소를 볶아서 소채를 만든 것뿐이지 않은가.

그나마도 들어간 조미료는 소금뿐, 제대로 된 기름조차 쓰지 않고 만든 요리였다.

그런데 이런 음식도 맛있다고 눈에 불을 켜고 먹는다면, 오향장육이나 신천지소면을 해 주면 방극은 기절할 것처럼 놀랄 게 분명했다.

“그래에?! 정말로 나중에 실컷 요리해 줄 테냐?”

“그래요. 여유가 생기면 뭔들 못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지금은 일단 좀 절제하자구요. 여행도 다니실 만큼 다니신 분이 왜 그러세요?”

방극은 그제야 밥통에서 숟가락을 놓았다.

“네놈의 손엔 귀신이 들린 게 틀림없어. 내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말이다.”

방극은 몇 번이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극찬을 했다.

운찬은 얼굴이 벌게진 채 쑥스러워했다.

“으으…….”

천직은 천직인 모양이다.

운찬은 황보 사부로부터 무공에 관해 칭찬을 받을 때보다 이렇게 음식에 대해 칭찬을 받는 것이 더 기뻤다.

“또 싸우신 겁니까?”

“휴!”

그때, 인적이 드문 숲 쪽에서 걸어오는 훤칠한 키의 청년이 있었다.

풍운객잔의 하인.

아니, 이제는 어엿한 남궁세가의 장남으로서 후계자의 자리를 약속받은 남궁휴였다.

운찬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남궁휴가 걸어 나온 쪽의 하늘을 쳐다봤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둘기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으음, 오늘은 한 그릇도 안 되겠군요. 점점 저희의 양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커험! 험!”

방극은 민망한 듯 먼 산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러다 우린 굶겠어.”

“뭐, 그렇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한 숟가락씩이라도 남겨는 주시겠죠.”

운찬과 휴는 작정이라도 한 듯 말로 사람의 가슴을 푹푹 쑤셨다.

“그래! 알았다! 아까 이미 운찬이한테 잔소리 들을 것 다 들었으니, 너는 그만해라. 다음부턴 너희들의 양을 남겨 놓으면 될 것 아니냐.”

방극은 서운한 듯 휙 등을 돌려 버렸다.

“농담입니다, 방 선배님. 식량은 제가 알아서 조달할 테니 마음껏 드십시오.”

“응? 그래도 되겠냐?”

방극은 언제 등을 돌렸냐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야, 야! 내가 겨우 타협을 봐 뒀는데……!”

“아니, 괜찮습니다, 강 형. 이래 봬도 방 선배님을 양껏 드시게 할 만한 능력은 갖추고 있습니다.”

“……하아, 됐다. 네 맘대로 해라.”

휴는 묘한 곳에서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결국 운찬은 포기해 버렸고, 방극은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운찬과 휴는 마주 앉아 각자 반 그릇을 조금 넘는 밥을 담아 식사를 시작했다. 휴는 소채가 맛있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좀 좋은 소식이 있었어?”

운찬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매일 하루에 두 번.

휴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남궁세가의 정보 집단인 뇌안각에서 보내 주는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다.

“예,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오!! 어떤?”

“하북과 산서 쪽에서의 싸움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답니다. 흑화보의 인물들은 거의 전멸당했다고 하더군요. 비록 흑화보주는 아직 잡지 못했다지만, 근거지를 없앴으니 싸움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대단하네! 살수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지난번엔 흑화보가 화약을 많이 갖고 있어서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황실 쪽에서 사람을 보내 줬답니다. 금의위랑 현백이라는 문사인데…… 그들이 온 뒤로 흑화보와의 싸움이 훨씬 쉬워졌다더군요.”

“으음, 신기하네? 문사라면 머리를 쓴 건가?”

“그렇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겁니다.”

남궁휴는 소채를 아삭아삭 씹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북무림맹이 상대하는 쪽에서 사혈방주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 사혈방주가? 어쩌다가? 전에 사혈방주가 그…… 뭐냐, 대단한 사람을 죽였다고 했는데?”

“종남파 장문인 천강검 구유상(邱有相)입니다. 무림십대고수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 사람!”

운찬이 맞장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듣고 있던 방극이 휙 고개를 돌렸다.

“뭐냐? 구유상이 죽었어? 어쩌다가!”

같은 무림십대고수로 손꼽히는 방극으로서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섬서 쪽에서 사혈방과 종남파의 격전이 있었는데, 그때 구 장문인께서 직접 검을 들고 선두에 서셨답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사혈방주와 정면으로 맞붙다가 결국…….”

“쯧쯧,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구유상 그놈이 워낙 건방진 놈이라 언젠가 멋모르고 날뛰다가 객사할 날이 올 줄 알았어.”

방극은 어딘가 통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림맹 놈들, 간담이 서늘했겠구만. 북천맹 오왕이 무림십대고수 이상이라고 말만 많았지, 실제로 증명된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예. 삼호방주가 원래는 약했던 자라고 폄하하던 자들도 이젠 할 말이 없어졌을 겁니다.”

“그놈들은 정신 좀 차려야 돼. 쯧, 나이 들면서 엉덩이만 무거워져 가지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자만에 빠져 있으니.”

방극은 혀를 차며 한심해했다.

방극은 굳이 따지자면 정파 쪽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흑도 쪽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사양도.

그렇기에 오히려 무림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종남파 장문인마저 꺾은 사혈방주를 누가 부상을 입혔다는 거야?”

“글쎄요. 거기까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문입니다만, 최근에 사혈방주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군요.”

“흐음…….”

“하지만 문제는 녹림 쪽입니다.”

“녹림? 아, 광살부마(狂殺斧魔)?”

광살부마 함대웅.

최근 그 이름은 사해를 떨쳐 울리고 있었다.

북천맹 오왕 중에서 가장 그 무위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살부마였다.

사천에 있는 아미파, 청성파, 당문, 점창파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녹림인 것이다.

녹림은 빠르고 강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렸다.

사천에 있는 고수들 중 상당수가 광살부마와 그를 따르는 광호채의 마인들에게 당했다.

북천맹이 그 능력을 명확히 보이지 않고 있는 지금, 녹림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최대 세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지역은 무림맹 측이 비등하거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반면에, 사천 쪽에서만큼은 무림맹이 뚜렷한 열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천에 대문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녹림이 강하다는 뜻일 겁니다.”

“큰일이네. 이러다 정말 소림이 나서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그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현재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하북, 산서, 서북을 이야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가장 무거운 주제만이 남아 있었다.

“안휘는…… 어때?”

“비등합니다. 황산파가 워낙 수완이 좋은데다 모여든 흑도 무인들의 수준이 상당히 뛰어나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세가에 큰 피해는 없고?”

“예. 아직까진 서로 지리한 신경전만 반복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만, 하북 쪽을 정리한 황실의 병력이 다음엔 안휘로 내려온다고 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 보고 있습니다.”

운찬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끼는 동생이 있는 세가다.

더군다나 그의 사부도 남궁세가의 식객이니, 남궁세가는 이미 운찬에게 남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잘됐잖아. 하북을 순식간에 제패한 그 문사가 있다면 일이 다 잘 풀리겠지. 다행이야.”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남궁휴는 식사가 끝난 식기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여행 중의 일은 각자가 분담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식량에 대한 관리와 식사 준비를 운찬이 하는 대신, 식기를 씻고 뒤처리를 하는 일은 남궁휴가 한다. 그리고 방극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사냥을 해 오는 일을 맡았다.

“그나저나 이제 곧…… 입니다.”

“그러네. 이제 거의 다 왔어.”

운찬은 남궁휴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쳐다봤다.

이미 강서성의 관문을 넘은 지는 오래였다. 두 사람은 뿌연 안개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대륙에서 가장 큰 도성을 응시했다.

“잘 계시겠지?”

“하하, 객주님께 무슨 일이 있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는군요. 게다가 그 주변엔 강한 무인들까지 있잖습니까.”

“하긴 그렇네.”

“우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객주님께 ‘그 소식’을 전해 드려야 합니다. 서두르죠.”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늙은이를 쉬지도 못하게 한다는 방극의 푸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남경은 지척이었다.

이제 하루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 ☆ ☆

안살도 목임태에게 들은 정보는 정확했다.

황성의 동쪽 쪽문으로 가 보니 녹림 출신으로 보이는 인상이 거친 사내 둘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무슨 일로 왔냐고 묻기에 ‘바람의 아들들을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순순히 문을 열고 들여보내 준 것이다.

‘조용하군.’

밤중에 오긴 했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의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이따금씩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로 보아서는, 경계 병력도 만만치 않게 숨어 있었다. 하오문에서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중전(中殿)에 도착하려면 관문 두 개를 지나야 한다. 관문 두 개면 대략 오백 보 정도. 그 뒤엔 흉월이라는 자를 만나서 승인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

장기린에게는 주호처럼 거짓말을 잘해서 활로를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

결국 육체적인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기린은 손바닥만 한 가죽 천을 꺼내 그 위에 새겨진 그림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지점은 정확하게 아홉 개.

섭우생과 모용소희가 격렬한 논의를 거친 뒤, 두 사람 다 납득할 만한 지점만 표시해 놓은 것이다.

‘동쪽으로 들어왔으니 동남쪽의 지점이 가장 가깝다. 다행히 중전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곳이고. 여기의 주의 사항은…… 인근에 삼층 이상의 누각이 없을 경우인가.’

장기린은 동남쪽 지점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장기린을 제외하곤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이따금씩 느껴지는 시선은 계속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곳곳에 은신해 있는 사람들이 각자 그를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장기린은 수상한 거동을 보이지 않기 위해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삼층 이상의 누각, 삼층 이상의 누각……. 큭, 있다. 여기에 종탑이 있었군.’

장기린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섭우생과 모용소희의 말로는 인근에 높은 건물이 있게 되면 지기(地氣)가 완전히 변해 버리니 그때는 미련 없이 다른 지점을 찾아보라고 충고했다.

장기린은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살짝,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가죽 천을 보며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동그라미를 찾았다.

‘다음은 남쪽. 대문 근처인가. 다행히 이것도 중전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위치군.’

장기린은 조금 안도하며 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는 지금 소매가 펄럭이는 문사복에 문사건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문사 한 명이 천천히 황성근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등 뒤에 메고 있는 길쭉하고 수상한 물체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남쪽, 남쪽…… 아, 여긴가.’

장기린의 시선이 남경대로에서 이어지는 황실의 대문을 보고, 그다음 주변의 지세를 살폈다.

‘없…… 다?’

장기린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다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삼층 전각 이상의 높이를 가진 건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럼…….’

장기린은 절로 긴장되는 마음을 다스리며 천천히 지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도에 동그라미가 표시된 위치엔 황성 내부에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수수하게 지어진 나지막한 건물이 있었는데, 황성 내에서 소비되는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보였다.

장기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재 그에게 몰려 있는 시선은 두 개.

좌측과 우측에서 각각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장기린은 시선을 못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며 창고로 다가갔다. 워낙 고요한 장소다 보니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장기린은 곧바로 창고의 문을 열어 보려고 했으나, 그 입구는 튼튼해 보이는 쇳대로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다.

‘절묘한 위치에 있는 창고다. 수상한 느낌이야. 그리고 바닥도…… 이상하다.’

장기린은 일부러 발을 한 번 굴러 보았다.

탕…….

튼튼한 지반이 밑에 있다면 절대로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울림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땅 밑에 공간이 있어.’

장기린은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한 창고에 지하 공간까지. 이렇게나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잠깐!”

그때, 두 개의 시선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장기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왔소?”

나타난 사내는 어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는 탓이다.

그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은 채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린을 의심스럽게 보며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흉월을 만나러 왔소.”

“흉월 님을?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

“황성엔 처음 와 봐서 지리를 잘 모르겠군.”

“중앙 문을 통과한 다음, 바닥에 놓인 길을 쭉 따라가면 아무 문제도 없소.”

“그런가?”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삼십 보 밖에서 그를 향하는 시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내가 길의 방향을 가르쳐 주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

우드득!!

“컥……?!”

장기린은 사냥을 하는 맹수처럼 덮쳐서 사내의 목을 정반대로 꺾어 버렸다.

스릉―

동시에 장기린은 죽은 사내가 허리에 매달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옆으로 집어 던졌다. 목을 꺾고, 검을 뽑아 옆으로 투척하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쒜에에엑―!

발경에 허리와 손목의 회전까지 가미한 투척이다.

장기린이 던진 검은 삼십 보 밖의 사내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내를 꿰뚫고 벽에 강하게 박혔다.

사내는 잠시 꿈틀거리다가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앞으로 일각……!’

장기린은 걸어오는 도중에 경계병들의 움직임과 위치를 대충 파악해 둔 상태였다. 경계병들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서로 위치를 교환하는 양상을 보였다. 즉,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시간이 이제 일각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파캉!!

장기린은 창고 문의 경첩 부분을 맨손으로 부숴 버린 뒤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생각보다 황량했다.

텅 비어서 바닥이 드러난 공간이 대부분이고, 값비싼 물건은 이미 누군가가 다 챙겨갔는지 보이지 않는데다, 노끈이나 밧줄 같은 값싼 물건들만이 남아 있었다.

장기린은 일부러 다리에 힘을 주고 쿵쾅거리며 걸어 다녔다.

밑에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건 확실한데,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반 각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장기린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장기린은 밖으로 나가 그가 목을 꺾어 버린 사내와 담벼락에 검으로 고정되어 버린 사내의 시신을 가지고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품속에서 항상 갖고 다니는 화섭자를 꺼내 밧줄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불을 붙였다.

창고는 불타서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만 밑에 있는 지하 통로나 경계병 두 사람이 죽은 사건이 무마된다.

“스으읍―!”

숨을 크게 들이켜고 천천히 내쉰다.

고오오오―

전력을 해방하는 장기린.

힘을 모은 그의 주먹이 일순간 바닥을 후려쳤다.

꽈아아아앙―!

순간, 황성 전체를 떨쳐 울리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나무로 깔아 놓은 바닥이 박살 나고, 그 밑에 있는 일척 두께의 지반이 일격에 붕괴되었다.

우르르릉―

장기린은 부서지는 지반과 함께 지하 통로로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내렸다.

장기린은 떨어지는 바윗덩어리 사이에서도 능숙하게 중심을 잡으며 균형을 유지했다.

발밑이 단단하게 고정된 뒤에 장기린은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정면은 어둠.

후면도 어둠이다.

좌우의 너비는 다섯 사람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것처럼 꽤나 넓었는데, 정면은 황성 남쪽 대문 밖의 어떤 곳으로 통해 있는 듯했고, 후면은 황성의 대전 쪽으로 뚫려 있는 듯했다.

‘입구가 없는 이유가 있었군.’

장기린은 그제야 그가 입구를 찾을 수 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창고는 애초에 지하통로가 ‘통과’할 뿐, 입구를 만들어 놓지 않은 곳이다.

없는 것을 찾으려 했으니 찾지 못할 수밖에 없다. 장기린은 부수고 내려온 게 정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르르륵―!

쿠구궁!!

장기린은 한 사람이 딱 통과할 법한 원형의 구멍 위로 불타는 나무 기둥과 잿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안 그래도 탈 것이 많이 남아 있던 창고는 순식간에 불에 타 버린 듯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창고가 있는 부분의 통로는 완전히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장기린은 결정해야만 했다.

이대로 황성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볼 것인가.

아니면 바깥쪽으로 나갈 것인가.

‘어차피 지하 통로를 찾은 상황에 황성 안쪽은 의미가 없다. 병사들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바깥쪽의 통로가 더 중요할 터. 밖이다. 지금은 밖으로 나가야 해.’

장기린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문 밖.

황성에서 이어지는 지하 통로의 출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불타는 창고로부터 들려오던 굉음과 폭음은 이내 지난밤의 꿈처럼 아스라이 멀어졌다.

지하 통로는 상당히 오랜 시간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만들어져 있었다. 등불이나 야광주조차 없으니 지하 통로는 불빛이 단 한 점도 들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웬만큼 오감이 예민하지 않으면 이 지하 통로를 이용하지도 못할 듯했다.

‘이대로면 관문 근처까지도 가겠는데?’

공들여 헤아리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도 천 보 이상 걸어 나왔다.

이대로라면 응천부성의 성벽 너머로도 이어져 있을 듯한 거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퉁, 퉁.

“……!!”

장기린은 갑자기 정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일정한 간격으로 진동이 느껴진다. 사람의 보폭이다. 몸무게는 적어도 이백 근 가까이 나가는 건장한 체구의 인물이 걸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가까이 다가올수록 발소리는 확연하게 들려왔다.

장기린은 숨을 삼키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 만남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이런 시간에 비밀 통로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긴장된 상황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는 이제 불빛만 있었다면 눈에 선명히 보일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삼십 보 정도.

점점 가까워졌다.

스무 보, 열다섯 보, 십 보…….

그리고…… 다섯 보.

그쯤 되자 상대의 발걸음도 멈춰 섰다. 아무리 장기린이 숨을 죽이고 있더라도, 이 정도 거리가 되면 본능적으로 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위치였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아무리 감각이 예민한 장기린이지만 아무런 빛도 없는 곳에서 상대를 볼 수는 없다. 그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저 기감(氣感)과 청각으로 상대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상대도 그건 마찬가지.

다섯 걸음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잠시 이쪽의 기색을 살피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지? 하시르인가?”

오싹―

장기린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 그 말투.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생 동안 서로를 유일한 적수로 여겼고, ‘누군가 나를 쓰러뜨린다면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여긴 상대다.

설령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 발소리로 추정한 이백 근이 넘을 듯한 몸무게와 단단한 바위처럼 위풍당당한 체형을 합하면, 나오는 답은 단 하나밖에 없다.

텐챠이.

현재 대륙을 뒤흔들고 있는 북천맹주이자, 몽고 초원의 하늘신이 북방에 내려 준 최고의 전사.

초원에 살아가는 모든 몽고인들이 경의를 담아 푸른 하늘의 늑대[蒼天狼]라 부르는 유일무이한 사내이며, 쿠빌라이 가문은 이 사내가 자리를 비웠기에 멸망했고, 이 사내가 있기에 북천맹은 남경을 빼앗았다.

그리고 장기린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안식처인 풍운객잔이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이며, 그가 사랑하는 여인, 휘연의…… 원수다.

장기린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거짓말 같은 우연과 인연으로 만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어째서 이런 만남을 준비한 것인가.

이것이 운명인가.

북천맹이나 남경을 공략하는 싸움을 하기 전에 텐챠이와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천명이란 말인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상하군. 거기 있는 것은 누구냐?”

텐챠이는 여전히 굵고 올곧은, 북쪽의 바람을 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셋을 세겠다. 그 안에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적으로 생각하고 베겠다.”

장기린은 텐챠이가 허리춤의 도를 잡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셋.”

온몸이 긴장된다.

“둘.”

텐챠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하나.”

화아악―

정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폭발적인 기세.

예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해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뽐내며 텐챠이의 명도(名刀) 신응(神鷹)이 뽑혔다.

베이면 죽는다.

목숨이 걸린 순간에 장기린은 결심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 주겠다.

촤아앙―!

그리고 그 순간, 장기린의 손도 등 뒤의 진천룡의 손잡이를 붙잡아 갔다.

<1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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