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6화 (95/686)

17권

第百十三章 ― 경천동지(驚天動地)

누군가 자신에게 칼을 휘두를 경우, 그 칼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칼이라는 것은 병기.

곧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다.

칼날에 닿게 되면 인간의 몸뚱어리쯤은 손쉽게 상처 입어 버린다.

피부가 갈라지고 근육이 잘리고 혈관이 끊어져 피가 흘러나온다. 자칫 신경이라도 건드리게 된다면 그 이상의 고통은 없다고 할 만큼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은 자연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칼날 너머에서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끝까지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처분만을 기다리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원래 기본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무인들은 무공에 입문할 때 상대의 공격을 끝까지 쳐다봐야 한다는 말을 수백 번도 더 듣지만, 그 가르침을 실제로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할 만큼 적은 수에 불과했다.

하물며 칼날이 날아오는 장소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어두운 공간이라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가진바 무공이 얼마나 뛰어나느냐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간인 이상 두 눈으로 칼날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두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암중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공격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감(氣感)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설령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촌부라도 뭔가 위험한 것을 만났을 때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무공을 익히게 되면 그 기감이 더욱 더 예민하고 정확하게 발전하게 되는데, 그게 다듬어지고 절정의 경지를 넘게 되면 등 뒤에서 암기를 던져도 수월하게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 ☆

장기린 역시도 그랬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하 통로.

너무나 어두웠기에 반대편에 있는 텐챠이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장기린은 텐챠이가 휘두르는 칼을 선명하게 ‘느끼고’ 피해 낼 수 있었다.

피아아앙―!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커다란 대도를 휘두르는데도 칼의 동작이 강물을 타고 움직이는 은어처럼 매끈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앞섶이 갈라졌다. 넋 놓고 있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상체가 양단되었을 것이다. 장기린이 전력을 다해 움직였는데도 이런 상황이었다.

텐챠이는 일격이 명중되지 않은 순간에 망설임없이 이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태산과도 같은 기도.

강철조차 조각조각 부숴 버릴 것 같은 막강한 패기가 대도의 칼날에 머물러 있었다.

장기린은 등 뒤에 돌려 메고 있던 진천룡을 아래쪽으로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칭칭 감아 놓은 천을 벗길 시간도 없었다.

화아악―!

아래에서 솟구쳐 오른 진천룡의 칼날이 하늘에서 덮치듯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져 내린 신응도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파아아앙―!

쩌어엉!!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충격.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수십 조각으로 터져 버린 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일격과 일격이 교차한 승부는 동점으로 끝이 났다. 장기린의 진천룡이 텐챠이의 신응과 마주치는 순간, 텐챠이의 오른쪽 어깨 부근의 천이 마치 누가 잡아 뜯은 듯이 찢어진 것이다.

장기린의 베어진 앞섶.

텐챠이의 뜯어진 어깨 천.

동점이다.

“…….”

텐챠이는 공격을 멈추고 놀란 듯이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볼 수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건?”

단단한 바위 같은 텐챠이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담겼다.

“거기에 있는 자, 붉은 악귀인가?”

장기린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그래.”

“……믿어지지가 않는군.”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끝이 바닥으로 내려진 듯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가?”

“…….”

“아니, 어리석은 질문이었군. 이유야 많이 있겠지. 지하 통로를 통해 공격해 올 생각이었나?”

장기린은 놀라고 말았다.

그건 텐챠이가 그들의 계획을 미리 알아채서도 아니고, 곧바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서도 아니었다.

텐챠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말투와 대응하는 자세에서 이전보다 훨씬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전의 텐챠이였다면 말없이 눈썹만 꿈틀거리다가 무작정 도를 휘둘렀을 것이다.

“변했군.”

장기린은 한줄기 불안과 감탄을 담아 말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했어.”

“다르지 않다. 조금 더 강해졌고, 말투가 딱딱하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나의 영혼, 하늘신이 내려 준 붉은 악귀의 숙적으로서의 천명은 그대로 남아 있다.”

슥―

텐챠이의 검이 다시금 장기린의 중단을 겨눴다.

“어둠 속에서의 사투는 반갑지 않다. 하지만 이런 재회도 나쁘진 않겠지.”

쿵!

텐챠이가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 안을 둔중하게 울리는, 둔탁하고 강렬한 발소리였다.

“이것 또한 하늘이 엮어 준 만남이다. 목숨을 걸어라, 붉은 악귀.”

텐챠이가 덮쳐 오는 압박감은 최고로 가속된 마차를 정면에서 가로막을 때보다도 컸다.

장기린은 한 발을 뒤로 뺐다.

창이라는 무기는 본래 ‘역습’을 위해 특화된 무기다. 장기린은 진천룡을 오른손으로만 붙잡은 채 창끝을 옆구리에 끼워 힘차게 앞으로 내찔렀다.

까아아앙!!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가슴에 구멍이 날 뻔한 텐챠이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신응도로 창끝을 위로 올려쳤다.

쾅!

튕겨 나간 진천룡이 지하 통로의 천장에 박혔다.

하지만 텐챠이는 한차례 도격을 뿌려 낸 뒤에도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바로 몸을 아래로 숙이며 장기린의 다리를 베어 왔다.

순식간에 다리가 잘려 나갈 것만 같은 위기.

장기린은 진천룡의 끝이 천장에 박힌 그대로 양팔에 힘을 주었다.

툭, 툭.

힘줄과 핏줄이 불거지며 진천룡이 천장의 일부를 부숴 버렸다. 그러고는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정면의 상대를 수직으로 내려쳤다.

다리를 노려 오는 신응도.

머리를 쪼개어 가는 진천룡.

후우우웅―!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서로의 병기를 휘두르다가 마지막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로를 비틀어 상대의 무기를 후려쳤다.

“…….”

“…….”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노려봤다.

아니, 눈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짧은 공방이었음에도 이미 주변의 모습은 초토화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천장은 금이 가서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고, 바닥에는 사람의 발로 박살 낸 돌 조각들이 철질려마냥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돌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쩌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이진 않지만 양쪽 벽면에도 길고 커다란 흉터가 새겨져 있을 게 분명했다.

“좁군.”

“좁다.”

장기린과 텐챠이의 의견이 일치했다.

눈빛이 번쩍이고, 다시 한 번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조금도 절제하지 않았다. 각자 몸속에 품은 무신(武神)을 해방한 것처럼 막강한 신위를 뽐냈다.

전력을 다해도 죽지 않는 상대와의 싸움은 어떤 면에서는 즐겁기까지 했다.

괴력을 뿜어내는 두 사람.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강철조차 짓누를 것 같은 파괴의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용과 늑대.

중원과 몽고에서 각각 추앙받는 신수는 그렇게 전력을 다해 부딪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과광!!

드드드―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던 지하 통로가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반경 십 장의 통로가 폭삭 무너져 버렸다. 땅 위에서 본다면 갑자기 원형의 형태로 땅이 무너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르릉! 콰드득!

파아앙―!

장기린과 텐챠이는 무너지는 돌덩이 따위는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허공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과 동시에 환한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오늘 밤은 비교적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지하 통로에 갇혀 있다가 나오니 대낮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기린은 창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두르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만큼 빠르고 위험한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공 초식? 주변 환경?

그런 것따윈 일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텐챠이 한 사람만이 보일 뿐이다. 장기린은 앞에서 폭풍처럼 몰아쳐 오는 공격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쏟아야 했다.

핏― 하고 작은 균열이 생기더니, 장기린의 왼쪽 소맷자락이 어깨까지 찢어지며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맨팔이 드러나며 팔뚝엔 상당히 길쭉한 혈선이 생겨났다.

그 순간, 장기린의 찌르기가 텐챠이의 옆구리 부근의 요대(腰帶)를 스쳐 지나갔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요대와 인근의 옷자락이 잡아 뜯기듯 날아가 버렸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싸움은 바로 그런 싸움이었다.

초상승의 경지를 넘은 자들의 대결인만큼 바위를 부수고 강철을 우그러뜨릴 수 있는 괴력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잠시의 방심으로 칼끝에 스치기만 해도 신체의 일부가 날아가 버린다. 만약 제대로 공격을 허용하기라도 했다간 육체가 통째로 박살 나 버릴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일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 가는 싸움이다.

장기린과 텐챠이는 서로를 노려보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깨의 움직임, 허리의 움직임, 손목, 손끝, 눈동자의 미세한 변화까지.

그 모든 것을 종합해 공격을 예측했다.

쉬이이익―!

파앙! 콰드득! 콰지직!

이미 한 번 폭삭 주저앉은 땅이 다시 한 번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장기린과 텐챠이는 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상체의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있었다.

까아앙!!

정면으로 한 번 부딪친 뒤, 두 사람은 삼 장가량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만하면 인사는 충분히 한 거 아닌가?”

“……너도 놀고만 있지는 않은 것 같군.”

두 사람의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무기가 강렬한 빛무리에 둘러싸였다.

우우웅―

짙은 떨림과 함께 대조되는 색상이 빛났다.

텐챠이는 푸른색.

장기린은 붉은색이다.

“하아앗!!”

“챠하앗!!”

꽈아앙!!

두 사람의 격돌과 함께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매, 맹주잖아?! 북천맹주!!”

장기린과 텐챠이, 두 사람이 천장을 무너뜨리며 땅 위로 올라온 장소는 간신히 응천부성의 성벽을 빠져나온 지점이었다.

빠져나왔다고는 해도 응천부성의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가까운 지역.

장기린과 텐챠이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히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벼락이 치는 것 같은 폭음이 연신 울려 퍼졌고, 마치 자연재해라도 일어난 것마냥 땅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어느새 응천부성 남쪽 성문엔 무인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북천맹에 가입하고자 찾아온 흑도의 무인들이었다.

강호관직론이라는 사상에 혹하여 무작정 북천맹으로 찾아왔으나,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고작 병사들이나 할 법한 잡무나 맡게 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멍한 눈빛으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북천맹주와 다른 한 사람은 강기까지 뿜어내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저, 저! 맹주와 싸우는 놈, 무쌍귀다! 무쌍귀야!”

“뭐? 진짜?”

“내가 삼호방 싸움 때 있었기 때문에 알아! 저건 무쌍귀다! 삼호방주를 죽인 그 무쌍귀라고!”

버럭 고함을 친 무인은 공포에 질려 벌벌 몸을 떨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수호귀는? 수호귀는 어디에 있지?’라고 중얼거렸다.

삼호방을 몰살시킨 무쌍귀와 한쌍의 장군검으로 수백의 무인들을 도륙한 수호귀.

이곳에서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무쌍귀와 수호귀라는 이름은 이미 무림 전역을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으음…….”

“무쌍귀는 삼호방주를 죽였지…….”

처음엔 깜짝 놀라고 긴장하던 흑도 무인들이었으나, 이내 그들 사이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무림인은 이름값으로 먹고산다.

당당하게 남에게 말할 만한 업적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이름값으로 평생을 먹고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즉, 명성은 곧 돈이라는 뜻이었다.

특히 북천맹처럼 힘과 업적만을 가지고 철저하게 평가하는 곳에선 그런 명성을 하나라도 쌓으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저놈만 잡으면……!”

“최소한 현령 정도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긴장과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고 욕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삼호방의 싸움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잠깐! 북천맹주랑 대등하게 겨루고 있는 놈을 어떻게 잡겠다는 거야?”

“그래. 우리 정도론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치기다, 이거야.”

“설마 일부러 자진해서 죽으러 가고 싶다는 것은 아니겠지?”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었으나 이미 눈앞의 먹이에 현혹된 자들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겁쟁이들. 일확천금의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잘 보라고. 맹주와 비등하잖아. 그럼 승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주변에서 기다려 보면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이거야!”

“그래! 만약 양패구상이라도 하게 되면……!”

“아무리 고수라도 지쳐서 비틀거리고 있으면 뒤에서 그냥……!”

흑도 무인들 중 한 사람이 목에 손을 대고 삭― 긋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 의견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들개는 사냥감을 직접 사냥하는 경우가 드물다.

곰이나 늑대, 혹은 호랑이 같은 맹수가 잡아 놓은 사냥감의 주변을 뱅뱅 맴돌다가 빼앗아 먹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래. 운이 좋다면…….”

“손해 볼 게 뭐 있어?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래. 보고만 있자고, 보고만.”

몇몇 무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눈을 빛내며 성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사람들 또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이제 성벽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처음의 십분지 일도 안 되는 숫자에 불과했다.

“저 싸움엔 절대 끼어들면 안 돼. 분명 파리처럼 죽게 될 거야.”

삼호방 싸움의 참전자이기도 한 사내의 중얼거림은 안타깝게도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 ☆ ☆

쩌어엉!!

장기린은 어깨를 노리는 공격을 옆으로 비스듬히 흘려내고 황급히 발을 뒤로 뺐다. 비스듬히 내려친 도격이 바닥을 스치는데, 그것만으로도 단단한 땅바닥이 폭죽이 터지듯 퍽! 하고 사방으로 튕겨졌다.

장기린은 상체를 비스듬하게 눕히면서 오른손을 앞으로 세차게 찔렀다.

쉬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뻗어 나가는 검은빛의 창날.

텐챠이가 피하는 바람에 진천룡의 이빨은 허공을 깨물었을 뿐이지만, 펑! 하고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거대한 여파는 텐챠이의 거구를 잠시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장기린은 자세를 낮추며 앞으로 내찔렀던 창을 텐챠이의 하체를 크게 휩쓸 듯이 휘둘렀다.

후우웅―

텐챠이는 한 발을 살짝 들어 올려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장기린의 머리를 노려 갔다.

일격필살. 정수리 끝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갈라 버릴 것 같은 공격이었다.

장기린은 양손으로 창을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리는 순간, 쩌엉! 하고 양발이 땅에 박혀 버릴 것 같은 파괴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맛이 배어 나오고, 큰 충격을 받은 전신의 근육들이 찌릿찌릿한 고통의 감각을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장기린은 고통과 긴장 속에서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이만한 격전이 얼마 만이던가.

장기린이 전력을 다해도 죽지 않는 상대는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공격을 가하는 틈틈이 이쪽이 죽을 수도 있는 공격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펼쳐 내는 사람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건 전장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하고, 또한 정겹기까지 한 감각이었다.

목숨이 칼끝에 걸려 있다는 긴장감이 등골을 찌릿찌릿하게 타고 올랐다.

“챠하앗―!”

장기린의 두 눈이 텐챠이를 꿰뚫어 보았다.

지금 어떤 공격을 하려고 하는지, 어떤 숨을 쉬고 있으며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지, 발끝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의 움직임을 예고하고 있는지.

그런 다양한 것들의 정보를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분석하며, 또한 숨을 쉬는 주기가 얼마인지를 판단한다.

장기린이 그 모든 것들을 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앞으로 힘차게 뻗은 손끝에서 검은색 섬광이 번쩍였다.

일연적룡무의 첫 번째.

상대가 숨을 다 내뱉은 찰나를 포착하는 쾌공이 발현된 것이다.

쒜에에엑―!

“……!!”

사람이 숨을 다 내뱉는 순간엔 육체의 모든 부분이 긴장을 풀고 이완되기 때문에 결정적인 틈을 내보이게 된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이 순간에 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릴 테지만, 무림십대고수로 손꼽히는 초절정의 고수들은 다들 이 공격을 막아 냈다.

찰나의 순간조차 평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저력이 그들에겐 있는 것이다.

하지만 텐챠이는 그들과는 또 달랐다.

찰나를 노린 공격을 막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피해 내고, 되레 반사적으로 반격까지 가해 온 것이다.

후우우웅―!

장기린의 공격과 거의 같은 속도로 목을 스쳐 지나간 푸른색 대도는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해 낸 장기린은 곧바로 텐챠이의 손목을 노렸으나, 텐챠이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한 번 도를 휘두르며 앞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그 공격을 무마시켰다.

쩌엉!

채챙!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고, 장기린의 진천룡과 텐챠이의 신응도가 중간에서 얽혔다.

서로의 거친 숨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장기린은 전신의 힘을 모두 집중시키며 앞으로 밀어붙였으나 텐챠이는 바위라도 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끼긱―!

칼날과 칼날이 얽혀 신음을 흘렸다.

장기린은 이를 악물었다.

텐챠이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마치 황소들의 싸움 같았다.

서로 간에 전력을 다해 부딪쳤기에 함부로 손을 떼고 물러났다가는 순식간에 한쪽이 당해 버릴 수 있는 교착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까드득!!

“흐읍……!”

“크흡……!!”

콰직!

대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발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발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발밑이 무너지면 디딜 곳이 없어지고, 디딜 곳이 없어지면 싸움이 더욱 힘들어진다.

‘이제 슬슬…….’

장기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슬슬 지금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푸욱!

‘무슨……?’

그리고 격통이 치달아 올랐다.

“큭……!!”

다리가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몸에서 힘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단번에 끊어져 버린 것과 같은 상황.

전력을 다해서 서로를 지탱하던 두 가지 힘 중 하나가 무너진다면?

그땐 일방적인 몰락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장기린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버티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코밑에 가느다란 수염을 기른 비열한 인상의 사내가, 자신이 찔러 놓고도 믿기지 않다는 듯 앞으로 쭉 내민 검과 장기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후힛! 히히힛! 됐다! 됐다고!!”

그 사내는 만세를 불렀다. 그 사내의 검은 장기린의 왼쪽 허벅지를 뒤에서 찌른 상태였다.

“내가 무쌍귀를 잡았다! 내가 잡았어!!”

“큭……!”

장기린의 다리가 서서히 굽혀졌다.

근육이 파열되고 신경이 손상됐다. 텐챠이를 버텨 낼 힘이 부족해지면서 몸의 균형이 급격히 뒤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이런 놈에게……!’

장기린은 탄식했다. 텐챠이에게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어느새 주변은 기회를 노리고 모여든 승냥이 떼처럼 흑도 무인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스치기만 해도 육신이 터져 버릴 수 있는 두 사람의 싸움에 겁도 없이 끼어 들어올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물론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런 걸 모르니까 다가온 것이겠지만, 장기린은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떠냐, 이놈! 감히 북천맹의 영역에 와서 나대더니, 꼴좋다!”

사내는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맹주님! 기억해 주십시오! 무쌍귀를 잡은 저의 이름은 강……!”

푸화악―!

염소수염을 기른 사내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장기린이 뒤로 무너지듯 넘어지고, 동시에 갈 곳을 잃은 텐챠이의 막강한 패력이 곧바로 그 뒤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사내를 덮친 것이다.

후두두둑…….

피와 육편이 뒤섞인 물체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주변에서 흥분의 함성을 지르고 있던 흑도 무인들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대번에 조용해졌다.

상체가 통째로 사라져 하반신만 남아 있는 사내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풀썩 쓰러진 장기린을 내려다보는 텐챠이의 얼굴은 흉신악살마저 두려워하며 도망칠 만큼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이루어진 대결인데……!”

화아악―!

텐챠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살기를 내뿜었다.

“감히, 너 따위가……!”

텐챠이는 성질이 나는 듯 제자리에 우뚝 서 있던 사내의 하반신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뒤로 튕겨 나간 그것이 어딘가에 퍽! 하고 처박혔다.

이어 불꽃이 타오르는 듯 강렬한 텐챠이의 시선이 주변 흑도 무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흑도 무인들은 그 시선을 감히 받아 내지 못하고 하나같이 황급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텐챠이는 당장에라도 그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크으으……!”

텐챠이의 시선 아래.

바닥에 팔을 짚고 겨우 버티고 있는 장기린이 있었다.

“나참…….”

장기린은 목과 이마에 핏줄이 선 채, 허탈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살짝 떨리는 손을 왼쪽 허벅지로 가져갔다.

“큭……!”

힘을 줘서 검을 뽑아내자 이번엔 피가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장기린은 소매를 길게 찢어 허벅지의 상처 부위를 꼼꼼하게 둘렀다.

허벅지에는 동맥이 흐른다. 그러니 피가 흐르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피가 차갑게 식어서 죽는 것도 순식간이다.

“이것도…… 천운인가.”

장기린은 진천룡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비록 왼쪽 다리는 당장 쓸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후우웅―

장기린은 머리 위로 진천룡을 한 바퀴 돌린 뒤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실으며 자세를 잡았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장기린은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으나, 텐챠이는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결판을 내지.”

“…….”

“안 올 건가?”

텐챠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장기린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상처가 있는 왼쪽 허벅지 부근에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웅―!

그러자 다리 부근이 붉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무공에서 강기(剛氣)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강화’한다는 의미였다.

상승 경지에 오른 고수가 날카로운 병기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육신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강화되면 인체가 낼 수 있는 힘도 강해지고,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도 가능해진다.

장기린은 그 이치를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육신의 상처난 부위를 강기로 보강하고 지탱하여 일시적이나마 정상적인 힘을 낼 수 있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장기린이 왼쪽 다리에도 무게를 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긴장을 풀면 피가 흘러나올 테고, 강기를 계속 유지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시적이나마 제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장기린은 정면의 텐챠이에게서 긴장을 풀지 않으며 한참 동안 대치했다.

텐챠이는 바위처럼 굳어진 얼굴로 입매를 씰룩거리다가 들고 있던 신응도를 바닥에 콱 꽂아 버렸다.

“이따위 싸움은…… 나의 천명이 아니다!”

텐챠이는 불같이 노한 얼굴로 아예 제자리에서 팔짱을 껴 버렸다.

앞으로의 싸움은 없을 거라는 것을 확정 지은 셈이다.

“너…….”

장기린은 잠시 그런 텐챠이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알고 있겠지?”

“…….”

텐챠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텐챠이도 이것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장기린이라는 사람은 일만의 병사의 가치와 맞먹는다.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이렇게 명백히 쓰러뜨릴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버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텐챠이와의 대결에서의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절묘한 순간에 난입한 무지한 자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만약 이 자리에 하시르가 있었다면, 나중에 텐챠이에게 목이 베이는 한이 있더라도 대업을 위해 장기린을 죽였을 것이다.

“애초에 지하에서 만난 것 자체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어떤 쥐새끼 때문에 신성한 결투가 방해받은 것 또한 예상 밖의 일이다.”

“그래서 살려 주겠다?”

“……너와의 싸움은 좀 더 제대로 된. 진정한 결투여야 한다. 이런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 텐챠이.

끝까지 자신이 살려 준 건 아니라는 식이었다.

장기린은 그 순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텐챠이는 원래 이런 인물이었다.

타협이란 것을 전혀 모르는 고집불통이지만, 또한 관대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엄격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기 때문에 도리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랬기에 장기린은 원수들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텐챠이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텐챠이.”

“왜 그러지?”

“넌 나의 원수다.”

장기린은 굳이 입으로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말했다.

“……알고 있다.”

“각자 소속된 나라를 따질 것도 없이, 네 수하들은 내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내 보금자리까지 파괴했어.”

“그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텐챠이는 미안해하지 않았지만, 당당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러니 너와 나는 적이다. 이번 일은 고맙게 받아들이고 좋은 기억으로 남기겠지만, 다음 싸움에서는 최선을 다해 싸울 거야.”

“바라는 바다.”

“좋아. 그럼 가겠다.”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것이 텐챠이에겐 오히려 보답으로 들렸을 것이다.

텐챠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목숨을 건 싸움을 나담(축제)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성격으론 오히려 기꺼운 말이었을 것이다.

“배웅은 않겠다.”

“필요없어.”

장기린은 휙하니 등을 돌렸다.

텐챠이에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보인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싸움은 끝이 났다.

남은 것은 탈출의 싸움.

도리어 틈을 보여선 안 되는 건 멀찍이 떨어진 채 이쪽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 승냥이 떼―흑도 무인들―였다.

비록 강기를 사용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나, 이 방식은 아무리 장기린이라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할 만큼 몸에 큰 부담을 준다.

장기린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허리는 꼿꼿이, 냉철한 표정을 짓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사위를 제압했다. 현재 상황이 좋지 않기에 도리어 더욱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덤빌 놈이 있나?”

강한 살기를 동반한 장기린의 시선을 받아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검에 허벅지가 꿰이고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 장기린을 괴물 보듯이 볼 뿐이다.

장기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퍽, 철퍽.

왼쪽 바지를 흠뻑 적신 핏물이 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거, 겁먹지 마라! 어차피 부상당한 놈이야!”

“이놈만 잡으면! 이놈만 잡으면 나도……!”

“단번에 일확천금…… 해볼 만하잖아!”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의 양을 본 몇 명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슬금슬금 장기린의 뒤쪽으로 돌아가는 자들도 있었다.

“…….”

하지만 장기린은 마치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기, 맹주가 보내 준 거 아냐? 그런데 공격해도 될까?”

“멍청아, 우리한텐 그냥 보내 주라고 안 했잖아! 그런데 적을 빤히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거냐!”

“그, 그렇긴 하네…….”

“다 같이 덤비는 거야. 저 정도 부상이면 오래 못 버틸걸?”

선동하는 한두 사람의 말에 백여 명의 인원이 동요되고 있었다.

흑도 무인들이 힐끔힐끔 뒤를 쳐다봤지만, 텐챠이는 실제로 팔짱만 끼고 서 있을 뿐,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장기린을 뒤에서 찌른 사내를 죽인 것도 옆에서 보기엔 그저 어쩌다 싸움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들은 용기를 얻었다.

북천맹주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만약 주변을 포위하고 달려들어 무쌍귀를 잡는다면?

그들은 단번에 ‘무쌍귀를 죽인 자’가 된다.

그 정도 이름값을 갖게 되면 북천맹의 보상이 없더라도 평생 울궈 먹을 명성이 생기는 일이었다.

“키햐앗―!”

“죽어랏!!”

한 번 마음의 벽이 무너지자 마치 버려진 곤충의 시체에 개미 떼가 달려들 듯, 흑도 무인들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공격이 닿으면 이기는 것이다.

스릉―

그런 그들에게 흑색의 창날이 겨누어졌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기린.

그는 걷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그대로 허리와 어깨를 움직여 진천룡을 휘둘렀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우측에서 달려들던 두 사람의 상체와 하체가 깨끗하게 분리되었다.

그와 함께 장기린은 곧바로 오른쪽 방향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창날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후우우웅―!

파캉!

달려들던 자들의 무기가 일제히 부숴져 나갔다.

장기린은 몸을 낮췄다. 그 순간, 뒤쪽에서 덤벼 온 자들의 무기가 장기린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동시에 치고 들어오는 박도가 두 개.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던 장기린은 진천룡의 손잡이로 박도 두 자루의 공격을 받아넘기며, 그대로 빈틈이 생긴 무사들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빠각!

“커헉!”

“쿨럭!”

몸을 반으로 접은 두 사람이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감촉으로 봐선 갈비뼈가 최소한 네 개는 박살 났을 터, 두 사람은 이제 전투불능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끼햐앗!!”

“흐리얏―!”

벌써 십여 명이 우수수 쓰러졌음에도 달려드는 흑도 무인들에게선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기린은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왼쪽 허벅지 부근에 좀 더 주의하며, 평상시의 움직임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양손으로 창을 붙잡고 아래쪽을 향해 비스듬히 휘둘렀다.

푸화아악―!

비 온 다음날의 새벽안개처럼 뿌옇게 피어오르는 핏물.

조각난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주변의 흑도 무인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며 벌린 입을 미처 다물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르는 또 한 번의 일격에 직면했다.

푸화아악―!

이번엔 더욱 많은 수의 목숨이 사라졌다.

마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치면 죽는다.

빨려들면 흔적도 없이 분쇄된다.

보통 사람의 범주로 예단할 수 없는 무언가가 눈앞에 존재한다.

퍼억! 우두둑! 푸화악!

장기린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신들린 것처럼 움직이며 무릎으로 올려차고, 비스듬히 상반신을 돌려 진천룡의 손잡이로 머리를 박살 내고, 반 회전하며 창을 휘둘러 사람의 신체를 동강 내어 버렸다.

“으으…….”

마침내 미친듯이 달려들던 흑도 무인들의 발이 멈춰 섰다.

온통 피에 젖은 땅 위에 당당하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장기린.

그 모습은 잔혹하지만, 또한 무인으로서 두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괴물이……!!”

누군가가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렇다. 괴물이다.

맨 처음 그들 중 한 사람이 장기린의 왼쪽 허벅지에 검격을 꽂아 넣었던 것은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었을 뿐이다.

보통 때의 장기린이었다면 그들은 삼 장 내에 들어가지조차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장기린은 낮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에게 주어진 제한 시간이 서서히 끝나 가고 있었다. 장기린은 철퍽거리는 핏자국을 남기며 걸음을 내딛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 서너 명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뒤를 돌아보자 묵묵히 서서 장기린을 지켜보고 있는 텐챠이가 보였다.

“다음에 보지.”

나지막하게 말했으나, 텐챠이는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장기린은 장막을 덮어 놓은 듯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따라오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 ☆ ☆

“후우, 후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이 심해져 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칠게 숨을 내뱉던 장기린은 바닥에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인근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드문드문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바위산.

커다란 산맥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조금만 옆을 보면 가파른 경사가 보였다.

‘물이 있는 곳…….’

장기린은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려는 것을 애써 막으며 물소리를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텐챠이가 놓아줬다고는 해도 추적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들개 같은 낭인들은 만약 장기린이 부상을 입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열 일 제쳐 놓고 달려올 것이다.

지금과 같은 몸 상태라면 그런 자들의 공격도 부담이 된다.

“물, 물이…….”

장기린은 말라서 갈라지기 시작하는 입술에 침을 묻혔다.

피가 부족해지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탈수 현상이다.

물을 마셔야 한다.

그리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도 냄새와 흔적이 끊어지는 물가로 이동을 해야 그다음 행동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찾았다.’

장기린은 발목까지 오는 옅은 개울에 발을 담근 뒤, 천천히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바위의 틈새를 발견했다.

바위의 아래쪽에는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다, 정면엔 수풀이 무성하게 나 있어서 웬만해선 사람이 찾기 힘든 절묘한 장소였다.

“으음…….”

평평한 바닥에 몸을 눕히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벅지의 근력을 강화해 주던 강기가 사라지자 상처에서 피가 울컥 새어 나오는 것은 물론, 그동안 억눌려 있던 고통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장기린은 소매를 더 찢어서 긴 천을 만든 뒤, 허벅지 위를 한 겹 더 감쌌다. 그러자 젖은 빨래에서 물을 짜듯이 핏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장기린은 더더욱 손에 힘을 줘서 허벅지를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묶고, 다리를 가슴보다 높은 쪽으로 올려서 피가 몰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나참, 꼴이 말이 아니군.”

장기린은 문득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지하 통로에서 텐챠이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싸움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진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텐챠이와 그는 동급.

장기린은 오늘 그것을 다시 확인했다.

검선과의 수련으로 격차를 더욱 벌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텐챠이는 더욱더 강해졌다.

장기린이 무공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는 동안 텐챠이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나아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껍질을 한 꺼풀 더 벗어던졌다.

서로 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고, 각자 자신이 더 위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싸움의 결과는 하늘이 결정할 터.

즉, 천운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오늘은 텐챠이에게 그 운이 조금 더 있은 모양이다.

전쟁터에 있던 시절로 비유하자면, 명성 높은 장수가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신병이 내뻗은 창에 느닷없이 찔려 버린 셈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일이 장기린에게 벌어졌다.

“텐챠이에게는 지지 않았지만, 천운에선 졌다는 건가……?”

장기린은 서서히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엔 지지 않는다…… 절대로…….”

이내 새근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잠에 빠져드는 장기린.

그의 몸이 개울가 옆에 자리한 바위 아래에서 천천히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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