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7화 (96/686)

第百十四章 ― 천명재인(天命在人)

북방의 별.

위대한 영혼이 선물했다는 영력(靈力)으로 천기를 살피며, 온갖 재능을 타고난 전인(全人)으로서 자존심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드높은 자.

하시르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 심지어 한창 원제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몽고의 대칸이 직접 찾아와 등용하려 했음에도 거절한 일은 이미 북쪽 초원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이었다.

하시르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신은 그 누구도 섬길 수 없는 몸이라고.

오로지 북쪽 초원의 위대한 영혼만을 따라야 하며, 이미 그 자신에겐 주어진 운명이 있기에 다른 길을 택할 수는 없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다.

하시르는 지금 남경의 북문에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특이한 눈빛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는 버릇은 여전했다. 등 뒤에 한 쌍의 도를 십자형으로 돌려 메고 있었는데,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흑색의 피풍의가 바람을 맞아 펄럭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힘차고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소 수십이 넘는 숫자의 말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하시르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십 장이 넘는 높이였으나 하시르는 중간에 튀어나온 부분을 몇 번 밟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착지해 냈다.

두두두두―!

히히힝―!

하시르는 자신의 눈앞에 쭉 늘어서는 백여 기의 기마를 바라봤다.

하나같이 튼튼한 명마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은 북방의 초원을 닮은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뭐야, 마중이라도 나온 거냐?”

굵직하면서도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백 기마의 선두에 서 있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는 우르칸이다.

하시르와 함께 삼대천의 하나로 손꼽히며, 괴력난신, 막강한 신력을 지니고 있는 패장이다.

“대기해.”

히히힝―!

우르칸의 수하들은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자리에 서서 그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예전의 모습이 나오는군요. 새로운 바위곰들입니까?”

“뭐, 그렇지. 아직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놈들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는 우르칸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상당히 강한 수준까지 올라간 게 분명했다.

예전에 한창 전쟁터를 돌아다니던 시절, 우르칸은 바위곰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친위대를 만들어 전장을 휩쓸고 다녔다.

몽고의 기병들은 대부분 가벼운 무장만을 한다. 그런데 바위곰들은 달랐다. 우르칸을 선두로 하여 육중한 힘으로 명 나라의 밀집된 보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중장기병에 가깝다고 해서 명의 병사들처럼 중갑을 입는 것은 아니고, 다만 몸을 극도로 단련시킨 거구의 사내들이 강인한 말을 타고 무거운 중병을 사용할 뿐이다.

철퇴, 언월도, 유성추.

초원을 내달리던 준마를 타고, 그 기세를 살려 육중한 병기를 휘두르는 바위곰 일백여 명의 위력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르칸의 바위곰들이 반년만 더 버텼더라면 지금 세상의 판도가 뒤집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위곰들은 명 제국 최고의 모사인 현백과 섭우생의 철저한 전략에 희생당해 적룡기마대에게 몰살당해 버렸다.

하지만 우르칸은 이번에 새로 키운 바위곰들은 예전과 다를 것이라 자부했다.

애초에 텐챠이 수호대로 뽑힐 만큼 재질이 출중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우르칸이 가진 비전의 육체개조법을 가르치자 금세 모든 것을 흡수하더니 우르칸을 따라잡겠다는 듯한 기세로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음, 좋다. 언제나 긴장을 풀지 마라.”

우르칸은 자신의 수하들을 보며 뿌듯한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이혼도 바람새들을 다시 키우고 있다고 들었지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수준에 올랐다고 하던데요.”

“흥! 그놈이 키우는 놈들 따위 보지 않아도 빤하다. 이리저리 도망다니면서 활이나 쏘도록 가르쳤겠지.”

“그 바람새들이 과거에 가장 많은 수의 병사들을 쓰러뜨렸습니다.”

“큭! 중요한 건 적장을 몇 명이나 잡았냐는 거야!!”

“쓰러뜨린 적장의 숫자도 자이혼이 더 많았지요? 백 장 밖에서 적장의 목을 단번에 관통하는 모습은 싸움의 백미(白眉)였지요.”

“……젠장. 그놈이 그런 전공을 세울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바로 우리란 말이다!”

우르칸은 분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서? 그 말을 지금 꺼내는 이유가 뭐야! 지금 시비라도 거는 건가?”

“그럴 리가요.”

하시르는 선선히 고개를 저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에게?”

우르칸은 희한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녹림에서의 싸움은 어땠습니까?”

“뭐야,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하시르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뭐, 별거 없었다. 미친놈이 대장 자리에 있으니 가관도 아니더군. 녹림은 대초원보다도 더 힘을 중시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래도 대초원에선 나이 든 자들을 존중했지만 녹림에선 그것조차 없었다.”

우르칸은 혀를 차며 경멸의 빛을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사납긴 하더군.”

“과연, 최근에 녹림이 올린 전공들은 그런 이유였군요.”

“조직적으로 개편을 좀 시켜 주고 나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돌아온 거다.”

우르칸의 말에 하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숫자만 많을 뿐, 조직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녹림도들을 쓸 만한 정규군으로 바꿔 놓기 위해 우르칸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다면, 그만큼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걸로 서북쪽은 한동안 안심을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봐, 하시르.”

“뭡니까, 우르칸?”

“너,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우르칸은 평소의 성격에 맞지 않게 뭔가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천명이 보이고 있나?”

하시르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천명.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고, 더군다나 영력이 있는 영매일수록 함부로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네가 보는 천명은 어떤지 항상 궁금했다. 이 싸움의 끝,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알고 있나?”

“…….”

“모르나?”

아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모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우르칸이 답답해져서 얼굴이 시뻘개질 때 즈음, 하시르는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예. 그것은…….”

하시르는 우르칸의 옆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고, 우르칸은 그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건……!”

“그게 삼대천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게…… 정말이라고?”

“오직 저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르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백만의 군대에도 망설임없이 달려들 수 있는 우르칸이 얼굴 가득 곤혹스런 빛을 띠었다.

“장군은…… 이 일을 알고 있나?”

“…….”

“……그런가.”

우르칸은 알겠다고 말하고 묵묵히 북문을 통과해 남경의 내부로 들어갔다.

북문 바깥을 바라보는 하시르.

남경 내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우르칸.

두 사람의 방향이 엇갈리며 교차하는 순간, 하시르는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우르칸!”

“…….”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삼대천(三大天)입니다.”

하시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르칸도 마찬가지.

남경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알고 있다.”

나직한 대답과 함께 육중하게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남경 안쪽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우르칸을 따르는 일백 명의 기마병이 모두 남경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하시르는 계속해서 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늘이…… 파랗군요.”

하시르는 북쪽의 관문을 내려다보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날의 하늘은 어디서나 파랗다.

북쪽의 초원에서도, 남쪽 이국의 수도에서도.

마치 아래에 있는 때 묻은 인간들을 비웃듯, 하늘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너무나도 파랗다.

“삼대천은…… 아니, 하시르는 그 누구도 따르지 않습니다.”

하시르의 독백은 맑은 하늘 아래 덧없이 퍼져 나갔다.

☆ ☆ ☆

꿈을 꾼다.

화창한 햇살 아래, 커다란 대죽을 반으로 잘라 장식해 놓은 소박한 가게의 앞을 싸리비로 쓸고 있는 꿈이다.

보통 사람들은 귀찮다고 꺼려하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가로세로 너비 이십 장 정도의 공간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행복이 다 존재했다.

가족이 있고, 삶이 있고, 미래가 있다.

그 이상 필요한 게 있을까?

……없다.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건 꿈이다.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은, 모든 위험과 시련을 무리없이 이겨 내고 행복을 성취한,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미래다.

“이런 건…… 있을 수 없어.”

장기린은 문득 바닥을 쓸던 손길을 멈추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낡디낡은 편액에 걸린 풍운객잔(風雲客棧)이라는 글자는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화창한 날씨.

항주 금선로의 거리는 여전히 낮이 더 한적했고, 객잔의 안쪽에선 운찬이 주방에서 뭔가를 튀기는 듯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칠과 아팔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거기에 장단을 맞추듯 그런 두 사람에게 장난을 치며 능글맞게 농담을 하는 건 남궁휴일 것이다.

“이런 건…… 말도 안 된다.”

장기린은 거듭 말하며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광경이지만, 상식적인 사람으로서 이런 헛된 환상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그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행복한 공간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순간을.

마치 공들여 짓던 탑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듯 풍운객잔이 부서지고 아끼던 가족들이 상처를 입던, 그 처절한 순간과 절망의 감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가짜다.”

장기린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무심코 손을 앞으로 내뻗는데, 손끝에서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딱딱하고 탄탄한 감촉이 느껴졌다.

대죽을 잘 말려 놓았을 때의 감촉.

그는 무심코 풍운객잔의 대문 옆 담벼락을 만진 것이었는데, 너무나도 현실적인 감각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이럴 수가……?”

장기린은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가짜면 가짜답게 손을 대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려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한 것일까?

마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예전의 멀쩡했던 풍운객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국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어……!”

장기린은 어느새 눈을 크게 뜨고 대문 옆, 대죽의 윗부분에 새겨진 비스듬한 칼자국을 손으로 꾹꾹 눌러 보고 있었다.

그 자국은 장기린이 객잔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청풍객잔에서 대머리사내들을 보내 싸움을 벌이다가 새겨졌던 상처였다.

그 자국 하나만으로도 풍운객잔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쯤 되자 장기린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섬세한 꿈이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 남은 처절한 기억이 진짜인가, 아니면 눈앞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 행복한 상황이 진짜인가?

‘왜 굳이 안 좋은 쪽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좋잖아? 더 이상 힘든 일도 없을 테고, 여기서 모두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 그뿐이다. 이 이상 좋은 일이 또 있을까? 굳이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서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

장기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마음이 흔들렸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꿀벌이 꽃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듯이 눈앞의 달콤한 상황에 자연스레 눈이 가고 만다.

장기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객잔의 안으로…….

마치 여행자를 홀리는 산속의 귀신처럼,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는 가족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포기하지 마세요.”

뇌리에 박혀서 도저히 떨쳐지지가 않는, 그 한마디가 떠올랐다.

“휘연…….”

장기린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순간, 휘연은 분명 그 말을 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평범한 삶을 살고 행복을 찾겠다고 했던 그의 의지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웃는 얼굴로 끝까지 당부하고 갔다.

“포기하지…… 않아.”

장기린은 눈을 감았다.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가시밭길을 걷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언젠가 그 자리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번쩍!

“으음…….”

온몸에 내리쬐던 따스한 햇볕이 사라져 간다.

귓가를 간질이던 아칠, 아팔의 웃음소리와 안쪽에서 풍기던 맛있는 냄새도 사라진다.

세계가 바뀌었다.

조금 전이 옥황상제와 팔선녀가 뛰노는 천국이었다면, 지금은 지옥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와 있는 듯했다.

온몸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고통, 경직, 마비.

그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육체의 상태를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크으…….”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근육이 너무 경직되어서 목 뒤가 뻣뻣했다. 장기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우선은 사방이 새카맣다.

머리에 피가 안 돌아서 그런 것일까?

오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고 있으니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었다.

어두운 공간, 바위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회색빛 무늬가 보였다. 동시에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와 흙냄새.

장기린은 자신이 상처를 입은 뒤,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와 바위틈 아래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울창하게 자라나 있는 수풀이 보였다.

멀리서 늦여름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이 겨울이었다면 피가 부족한 상황에서 얼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몸…… 은…….”

입안이 바싹 말라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장기린이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왼쪽 허벅지를 만져 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새로 찢어서 상처 부위를 감싸 두었던 천은 이미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벌써 세 번째로 천을 다 적셨다.

아무리 혈도를 눌러 지혈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동맥이 통과하는데다 자연스레 근육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절묘한 위치를 찔렸기 때문이다.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온 피를 다 따져 보면 치사량에 가까웠다. 정신이 몽롱하고 오감이 둔해진 원인이었다.

‘큰일이군.’

장기린은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군가 풀숲을 헤치는 듯한 묘한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스락! 바스락!

“……!”

장기린은 숨을 죽였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동물이 아니다. 이족보행을 하는 사람. 사람의 걸음걸이가 분명했다.

‘지금 만약 누군가와 싸운다면…….’

장기린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텐챠이와 싸우면서 소모되어 버린 진기의 양. 그리고 왼쪽 다리를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줄어들게 될 전투력.

‘일 할…… 도 안 되는가?’

평소의 십분지 일에도 못 미치는 힘에 육체 상태 또한 최악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순순히 잡혀 줄 수는 없는 노릇.

장기린의 오른손이 진천룡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

추격자는 장기린이 숨어 있는 바위틈 앞으로 다가와 노골적으로 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이만 나오지?”

장기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너……!”

설마 이곳에서 그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북천맹의 추격자.

머릿속에선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로 앞쪽의 풀숲이 갈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사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장기린은 설마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반야혼……!”

흑색 무복을 입고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사나운 눈빛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장기린과 같으면서도 다른.

이 세상에 피로 이어진 가족이 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동질감이 느껴지는 자.

그리고 지금은 황제의 곁에 있어야만 하기에 절대로 이곳에 올 거라 생각지 못한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네가 어떻게……?”

장기린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건…… 현실인가?”

“하?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는 반야혼에 의해 장기린은 조금이지만 현실감을 되찾았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렇지. 개소리지.”

“……너, 머리라도 다친 거냐?”

“아니, 뭐랄까, 깨달았다고나 할까? 현실은 지옥과 닮아 있구나…… 라고 말이야.”

찰나의 차이로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려 본 결과, 현실은 지옥에 좀 더 가까웠다.

귀중하고도 슬픈 깨달음이다.

“뭔 소리를 하는가 싶더니만…….”

반야혼은 그런 장기린의 모습이 심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발로 땅을 툭툭, 찼다.

“너, 항주에 있을 때는 천국에 있는 것같이 즐거워하더니만, 겨우 집 밖에 좀 나와 있다고 해서 그런 한심한 꼴을 하고 있는 거냐?”

“……천국?”

“애초에 사후 세계 같은 불확실한 건 믿지 말란 말이다. 사람을 만 단위로 죽인 놈이 그딴 거 믿어서 얻는 게 뭐냔 말이야.”

그랬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의 목숨을 만 단위로 빼앗은 존재.

만약 사후 세계를 믿고 그런 게 존재한다면, 더는 고민할 것도 없이 지옥행이 확정일 것이다.

“현실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인 거다. 애초에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아…….”

“이런 걸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알아듣는 거냐? 그렇다면 실망이 큰데…….”

여전히 듣기 좋은, 울림이 큰 목소리는 장기린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툭툭 내뱉는 듯한 말이 가슴속의 심중을 움직인다.

반야혼은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세계에서 배척받은 만큼, 그만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하, 그렇지. 그래, 현실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변하는 거지.”

반야혼은 이젠 웃음을 터뜨리는 장기린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뭘 새삼스럽게. 개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일어나라. 움직여야 돼.”

“……그래, 알았다.”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층 개운해진 얼굴로.

아무런 번뇌도 없이 깨끗하게 모든 걸 털어 내고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추적자가 있어?”

“아아, 있지. 지저분한 쓰레기들이지만, 숫자는 많아.”

“그런가……. 아, 그러고 보니 묻는 걸 잊었군. 넌 어째서 여기에 온 거지?”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다. 응천부성 밖에서 북천맹주라는 놈이랑 한판 붙었다던데, 그것도 혼자서.”

“그걸 벌써 알았다고?”

장기린은 놀라서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화창하다.

즉, 밤에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반나절 정도밖에 안 지났다는 이야기로, 그 소식을 다른 누군가가 알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남경에 정보원 한둘쯤은 당연히 박아 뒀겠지. 그보다, 그 소식이 날아오니 현백이란 놈이 얼굴이 하얘져서 말이다, 상대가 텐챠이면 아무리 장기린이라도 죽을 수도 있다나 뭐래나? 뭐, 그 능글 맞은 놈이 그런 다급한 면상을 하는 건 처음 봤지.”

“……그래? 걱정을 끼쳤군.”

현백.

자신의 머리 좋은 친우는 여전히 그를 걱정하며 아끼고 있었다.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솔직히 반야혼이 아군으로 참전한 만큼 이보다 든든한 일은 또 없을 터. 현백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승리가 확실한 아군을 보내 준 것이다.

“뭐, 그런 결과로 황제의 제가를 얻어 내가 왔다는 거다.”

“그런가.”

“황제는 네가 여기서 헛되이 죽으면 만년화리의 내단인가 뭔가를 다시 토해 내게 할 거라더군. 각오하고 죽으라고 말했다.”

“하하, 각오하고 죽으라고?”

장기린은 웃었다.

죽지 말라고 말하는 것조차 지극히 황제답지 않은가.

“그런데 그 텐챠이라는 놈은 어딨지? 혹시 추적대에 포함되어 있나?”

반야혼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고독하면서도 오만한 늑대의 눈빛.

강한 자와는 반드시 싸워 보고 싶다는 심중이 가감없이 전해져 왔다.

“없을 거다. 날 놓아준 게 그놈이니까.”

“놓아줬다?”

“그리고…… 관심 끊어라. 아무리 너라도 텐챠이는 안 돼. 그 놈은 내 거다.”

장기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호오…….”

반야혼은 그 모습이 신기한지 탄성을 내뱉었으나,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지.”

“방향은?”

“음?”

“탈출 방향 말이다.”

장기린은 강하게 말했다. 비록 왼쪽 다리는 쓰지 못하지만 여전히 탄탄하게 긴장된 전신에서 강한 기백이 뿜어져 나왔다.

“이거, 방금 전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더니, 이젠 완전히 살아났구만.”

“누군가가 현실에 대해 깨달음을 줘서 말이지.”

“카하핫! 그 은혜는 기억해 뒀다가 반드시 갚아라!”

반야혼은 늑대처럼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동쪽이다. 그쪽에 활로가 준비되어 있어.”

“바다 쪽인가……. 알겠다. 그쪽으로 가지.”

장기린은 상의를 좀 더 찢어 허벅지를 한 겹 더 감은 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강렬한 아픔도, 육체의 피로도 이제 더 이상 그를 막을 수는 없다.

반야혼은 정말로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현실은 바꿀 수 있다.

사람의 노력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휘연, 포기하지 말라고 한 거…… 그런 뜻이겠지?’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서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아라.

분명 휘연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그런 뜻일 것이다.

“좋아, 바꿔 놓겠어.”

옆에서 반야혼이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만, 장기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걸음을 내딛는 데 망설임은 없다.

화창한 하늘 아래, 휘연의 웃는 얼굴이 유난히 생각나는 날이었다.

☆ ☆ ☆

“이곳일까요?”

“으음, 척 봐도 그래 보이지 않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는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아! 있다, 있어! 휴, 저쪽을 봐! 저 사람!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서 은색 말을 타고 있는……!”

남궁휴는 운찬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 정말이군요!”

“그래! 저 사람, 그…… ‘둘째’ 아냐?”

“맞습니다. 기억이 나는군요.”

장기린을 따르던 의문의 무리들 중 이인자의 위치에 올라 있던 청년.

풍운객잔이 박살 나던 날에 얼굴을 봤기에 운찬과 남궁휴도 선명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삼천 명의 병사라는 거…… 이제야 실감이 나네.”

“……그러게 말입니다.”

낮은 언덕 위에서 삼천 명의 병사가 열을 맞춰 행군하는 모습을 보는 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무인이 이 광경을 본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나는 몇 명까지 벨 수 있을까?

삼천 명의 병사와 싸우게 된다면 삼천 명을 다 베어 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장한 삼천 명의 병사라…… 정말 장관이다. 그런데 저걸 객주님이 이끄신다, 이거지?”

“그렇지요.”

“아, 정말 적응 안 돼. 객주님이 그런 과거가 있으셨을 줄 누가 알았겠어?”

운찬은 흥분한 채 계속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삼천 명도 저 정도인데 말이야, 일만의 병사면? 황실 직속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정예 어림군이나 팔기군이 눈앞에 있으면 얼마나 대단할까?”

“하하, 그러니 아무리 무림인들이 자존심이 강해도 황실에는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북천맹도 대단하긴 한 것 같아. 그 황실에 당당하게 반기를 들고 남경을 빼앗다니 말이야. 그렇게 생각 안 해, 휴?”

“강 형, 역모에 찬사를 보내는 듯한 말에 동의를 구하셔도 곤란합니다만…….”

“뭐, 어때. 우리끼리 있는 데서 소심하게 굴지 말라고.”

운찬과 함께 웃는 가운데, 남궁휴는 속편하게 웃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거대 세가를 이끌어야 하는 후계자가 되었다. 남궁세가의 정확한 힘은 아직 남궁휴로서도 모른다. 다만 사업 규모와 내부에 항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무인들을 생각하면 능히 일천 명은 모을 수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자연히 생각이 그쪽으로 향했다.

일천 명의 남궁세가의 무인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삼천 명의 병사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무인 특유의 호전적인 사고방식이 독이 오른 뱀처럼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아마…… 힘들 것 같군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확연히 볼 수 있었다.

지금 저곳에서 행군하고 있는 병사들이 얼마나 규율이 확실하게 잡혀 있는지. 심지어는 오른발과 왼발을 내딛는 순서마저 동일하게 맞춰져 있을 정도였다. 저렇게 잘 훈련된 병사들이 상대라면 아무리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도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병사들은 체계적인 동작으로 화살을 쏘거나 창을 앞으로 내찌르며 달려들 테고, 그런 공격을 무인들은 모두가 절정고수가 아닌 이상 잘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결국은 어느 쪽이 더 단결되어 있느냐인데…… 단체전에 익숙지 않은 무인들이 불리한 싸움이 되어 버린다.

‘세가로 돌아가면 단체전 훈련부터 제대로 다시 시작해야겠군요.’

이 순간, 남궁휴는 훗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절규하고 비명을 지를 만한 결심을 했다.

“거기, 애송이들.”

그때, 운찬과 남궁휴의 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 가죽을 통째로 뒤집어쓰고 있는 노인.

가봉도 제대로 하지 않은 호랑이 가죽 사이로 드러난 육체는 울룩불룩하게 너무나 잘 단련되어 있어서, 도저히 몸만 봐선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맹호도 방극.

무림십대고수 중에서도 실전 무예의 달인이라 손꼽히며, 장기린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뒤, 지금은 다시 만나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운찬과 남궁휴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는 위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래요, 할아버지?”

왠지 평소와는 다른 기색이 느껴져서 두 사람이 반문하자, 방극은 딱딱한 얼굴로 등 뒤에 돌려 메고 있던 대도의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 장기린이라는 놈이 대장이라길래 예상은 했지만…….”

“예?”

“저놈들,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야.”

“뭐, 그야 그렇습니다만…….”

장기린의 의동생들이 얼마나 강한 사람들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방극이 쿵! 하고 발을 굴렀다.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들아!”

“예……?”

“이미 우리는 포위당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말.

“……!!”

운찬과 남궁휴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놀라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어느새……!”

남궁휴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주변은 고요했다.

흔한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도 나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너무’ 고요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언덕 아래쪽에선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진군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는 점이 더더욱 섬뜩했다.

사사삭― 사사삭―

“으음…….”

이쪽이 눈치챘다는 점을 아는지, 포위를 한 자들은 이제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막혔다.

원래 퇴로가 그리 많지 않은 공간이었으나, 그마저도 철처히 차단하고 있는 모습에서 전문적인 숙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숫자는 삼십.

하나같이 일류 고수 이상의 무력을 지닌데다, 서로 간의 호흡이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이럴 수가…… 이런 자들도 있었던가.’

남궁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자들이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해 봤다.

이 정도 수준의 무력과 조직력이라면 구대문파의 정예에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삼천 명의 잘 훈련된 병사들에 이 정도의 정예까지 있다면…… 그가 머릿속으로 조심스레 펼쳐 보았던 남궁세가와의 싸움은 해보나 마나다.

필패.

그 이외의 답은 내려지지 않는 것이다.

“어이, 형씨들. 여긴 아무나 얼쩡되면 안 되는 곳이야. 그거 알고 있어?”

특히, 정면에서 길고 커다란 창을 어깨에 툭툭 두드리며 수풀을 가르고 걸어 나오는 젊은 청년에게선 맹수와 같은 위험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남궁휴는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에 손이 갔다.

그만큼 눈앞에서 건들거리고 있는 앳된 얼굴의 청년은 기묘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

“저기…….”

하지만 이내 그 청년에게서 익숙함을 발견한 운찬과 남궁휴는 각자 탄성을 내지르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막내!”

“진구!”

그러자 건들거리는 자세로 강렬한 투기를 눈에서 뿜어내고 있던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어엉?!”

진구는 운찬과 남궁휴의 얼굴을 번갈아서 빤히 쳐다보다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아, 혹시……! 아, 그렇구나! 어이어이―! 중지! 중지! 적이 아니야!”

진구가 창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소리치자 주변의 수풀에서 마치 까마귀가 날아오르듯 사람의 머리가 불쑥불쑥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야, 적이 아니었어?”

“그럼 누군데?”

“대장들이 아는 사람인가?”

서로 간에 잡담을 나누는 모습은 조금 전의 철저할 정도로 숙련된 병사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엉성하고 적당했다.

“이 사람들은…….”

“응? 아아, 적룡기마대 대원들. 그나저나 형씨들, 여긴 어쩐 일이야? 우린 얼마 후에 남경에 쳐들어가야 해서 바쁘다고.”

남궁휴는 잠시 ‘이 사람들이 적룡기마대…….’라고 중얼거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진구를 쳐다봤다.

“그게…… 객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 대형은 여기에 없는데?”

“없다니? 여기에 안 계십니까?”

“아니, 있기는 한데, 지금은 잠시 어디에 갔어.”

남궁휴와 운찬이 난감해하는 사이, 뒤쪽에서 방극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어디에 갔는지 말해라!!”

“엉?”

오랫동안 만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방극의 목소리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갑작스레 나서며 소리치는 모습에 진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극을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누구야?”

“뭐?!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놈을 봤나!!”

“아니, 누군데 대형을 찾냐고. 알려 줄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이놈이!! 빨리 말하라니까!!”

“못 가르쳐 줘.”

“이놈……!”

“왜? 한판 붙어 볼래?”

진구의 눈은 어느새 처음의 그것처럼 호전적으로 불타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는 도중에 방극이 얼마나 강한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진구가 자신의 적룡창을 꽉 붙잡았다.

방극 역시도 사양하지 않고 언제든지 자신의 대도를 뽑아 들 준비를 했다.

승부욕으로만 따지자면 둘째가라고 해도 서러울 두 사람인만큼 서로가 만만치 않게 강하다는 것을 알아본 순간 싸움에 주저함이 없었다.

“잠깐! 잠깐!”

벌써 싸움 직전의 상황에 돌입한 두 사람 사이로 남궁휴가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노선배, 진정하시지요. 그쪽도 진정해 주십시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두 사람의 기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우린 상당히 중요한 안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륙의 판세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큰 사안입니다. 두 분은 그걸 망칠 생각이십니까?”

대세가의 후계자다운 당당하고 간결한 말투였다.

방극과 진구는 서로를 노려보는 채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싸운다고 해서…….”

“……그게 잘못되지는 않겠지.”

두 사람은 한마음 한뜻으로 대답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남궁휴는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건 그리 간단한 사안이 아닙니다. 앞으로 함께해야 하는데 첫인상에서부터 서로에게 나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개운치 않을 텐데……?”

“개운치 않아도 그냥 계십시오.”

“뭣……!!”

“그래 봤자 노선배 혼자의 판단 아닙니까? 혹시 일이 잘못되어서 삼천 명이 악감정을 갖는 것보다 낫습니다.”

방극의 얼굴이 마치 벌레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이, 형씨. 그 말은 흘려듣지 못하겠는데.”

방극이 조금 가라앉는가 싶자, 이번엔 진구가 반발하고 나섰다.

“싸우면 내가 반드시 잘못된다는 거야, 뭐야?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다 죽어 가는 늙은이 한 사람을 상대로 당할 만큼?”

“뭣이?! 다 죽어 가는 늙은이라고?!”

“그래! 이제 곧 송장이 될 늙은이!!”

“이놈……!!”

챙!

결국, 방극의 대도가 뽑혀 나왔다.

“그래! 해보자고!!”

“오냐! 덤벼라! 애송이 놈!”

“얼마 전에 장유유서라는 걸 배웠다고! 먼저 양보해 줄 테니 덤벼! 늙은이!”

“이노옴―! 장유유서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다, 이 무식한 놈아!!”

결국 남궁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적룡기마대원들은 재밌다는 듯이 아예 자리를 잡고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새 섞여들었는지 운찬 역시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긴장감 따위는 없는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

이런 관계 속에서 막상 싸울 때는 엄정한 군기가 살아난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러게 말입…… 헛!!”

남궁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었다.

남궁휴 못지않게 너무나도 잘생긴 청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명마를 타고 삼천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던 이 무리의 두 번째 대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남궁휴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눈을 끔뻑거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병사들이 진군하고 있는 선두를 바라봤다.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곳에 있던 장수가, 잠시 눈을 뗀 것만으로도 마치 축지법을 쓰듯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이자들은……!’

남궁휴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남궁휴와 운찬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주변을 포위하기도 하고,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신출귀몰하게 먼 곳까지 나타나는 자도 있다.

적룡기마대.

그들은 역시 장기린의 수하들답게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능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텅! 하고 부운화가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며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진구와 방극 사이에 흐르던 살벌한 기세가 칼로 잘린 듯 뚝 끊어져 버렸다.

“헛……!”

“으엇!!”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두 사람은 부운화를 마치 괴물을 보듯 쳐다보았다.

남궁휴가 말리지 못한 두 사람의 싸움을 단번에 멈추게 만든 것이다.

‘대단하다!’

남궁휴는 속으로 감탄했다.

절대고수 두 사람의 기세싸움을 단번에 중지시키는 것.

겉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지금 진구라는 사내가 어깨를 움츠린 모습과 맹호도 방극이 잔뜩 긴장한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부운화를 쳐다보는 것만 봐도 명백했다.

“남경 공략전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싸움은 그 다음에 하는 게 좋겠군요. 이의있으십니까?”

“……넌 누구지?”

“제 이름은 부운화. 대형을 도와 남경 공략전을 준비하고 있는 무장입니다.”

“무장…… 이라고……?”

“예. 현재 군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방극은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부운화는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가 무당파 출신의 무림인이라고 대답하면 방극이 더욱 호기심을 느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단 행군은 잠시 멈추겠습니다. 막사에서 이야기하시죠.”

부운화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고, 남궁휴와 운찬, 그리고 방극은 그 말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 뜻을 거슬러선 안 된다는 묘한 압박감이 든 것이다.

‘대단한 놈……!’

‘대단한 사람이다……!’

방극과 남궁휴는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결국 그들은 순순히 모두와 함께 삼천 명의 병사들속으로 들어갔다. 호기심 어린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큰 막사가 제공되었다.

미리 파견되어 있던 무림맹 사절단의 지다화와 인사를 나눈 뒤, 남궁휴는 부운화를 마주 보며 그가 직접 무림맹에서 가져온 소식을 전했다.

세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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