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五章 ― 애국지사(愛國志士)
북경의 자금성은 아직 다 축조되지 않았다.
구(九)라는 숫자는 양기가 극대화된 것을 상징한다.
양기(陽氣)란 곧 태양(太陽).
그리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며 백성들에게 따뜻한 햇볕을 내려 주는 태양은 예로부터 황제를 뜻했다.
그렇기에 명 황제가 거하는 궁전은 총 9,999칸으로 계획되었고, 실제로 십만 명이 넘는 인부가 십 년이 넘게 동원되고 있으나 아직도 그 공사가 완공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명 제국의 재정이 좋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공사가 중단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만들어지고 있는 궁전인만큼, 황제의 권위가 약해진다면 자연히 그걸 만드는 힘도 약해지는 법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권력이나 힘도, 명예와 돈도 온전히 백 년만 이어 가도 대단하다고 하는 각박한 세상에서 영원이란 것을 어찌 바랄 수 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진시황이 결국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생애의 끝을 맞았듯, 어쩌면 자금성의 축조도 돌아보면 모든 게 허무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재 명 황실의 수좌에 앉은 자.
영락제 주체는 그 당시 진시황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본래 하늘에 올라 본 자만이 추락의 고통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 뭘 하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손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또한 있는 법이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고, 그 집착은 과욕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황제는 지금…… 그 과욕을 부리고 싶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절반도 안 모였군.”
황제의 탐탁지 않은 목소리는 대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대는 철혈의 황제.
힘으로 조카의 권좌를 빼앗았으며 피를 피로 씻는 항쟁과 탄압으로 철권 통치를 이룩한 강력한 군주였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대신이라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을 정도이니, 지금처럼 황제가 기분 나빠할 이유가 명백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금성엔 오문이라는 곳이 있다.
오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말발굽 형태로 지어졌는데, 정문답게 중앙의 성벽에 위치해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열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누각이 마치 지붕처럼 덮여 있었다
오문에선 매년 황제가 새 역법을 공표한다.
황실의 중심에서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오문의 양옆에는 사각형의 측면 누각들이 각각 두 개씩 세워져 있는데, 그중 두 개에는 커다란 종이 있어 황실에서 신성한 행사가 있을 때는 어김없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문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문은 오직 황제만이 지나갈 수 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오문 옆에 만들어진 측면의 다른 통로를 통해 다녀야만 한다.
다만 황후가 내정될 경우에는 특별히 오문을 통해 궐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밖에도 예외가 있긴 했다. 과거에 급제한 세 명의 수상자는 측면의 통로로 들어와 관직을 받은 뒤 오문을 통해 퇴장한다.
큰 행사가 벌어질 때는 고위 관리들이 오문 앞에서 북소리에 맞추어 관직의 서열에 따라 줄을 서고, 측면의 문을 통해 입장하도록 되어 있다.
즉, 황실의 모든 행사는 오문에서 시작되어, 오문에서 끝난다는 뜻이다.
오늘은 특별히 황제가 모든 관료들에게 연락을 보내 오문 앞으로 집결시켰다.
오문을 통과하면 길이 칠십 장, 폭 사십오 장에 이르는 커다란 뜰이 나오는데, 황제는 이곳에 대신들을 모아 두었다.
보통 좀 더 안쪽에 위치한 대전에서 회의를 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특이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연단 위에서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황제를 보며 한기를 느꼈다.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모두들 오늘은 범상치 않은 하루가 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절반이라…….”
황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신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짐의 명을 무시하다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연단 아래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대신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품계별로 늘어선 탓에 중간에 드문드문 빠진 사람들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폐하―!”
그리고 그런 황제에게 고개를 깊이 숙인 노신(老臣)이 간언을 올렸다.
“현재 각지에서 도적이 창궐하고 관사가 습격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대신들은 대부분 그 사태를 수습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바, 어쩌면 이런 자리에 나와 있는 저희 같은 자들이야말로 불충한 자들일지 모르옵니다.”
내각대학사 이선장.
스스로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언제나 옳은 충언과 직언을 일삼는 정계의 거목이다.
한 그루의 소나무마냥 독야청청한 그와는 달리, 주변의 대신들은 모두 이선장의 발언에 사색이 되어 그를 노려보았다.
이선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철혈의 황제를 상대로 위험천만한 발언을 일삼으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불충하다고 했다가 처형이라도 당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런가. 정녕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불충하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 이선장, 지금 당장 역도들과의 싸움에 한 팔을 보탤 수 없는 것이 앞으로도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옵니다!”
이선장은 노구를 부들부들 떨면서 결연하게 외쳤다. 노쇠한 학사의 두 눈엔 나이에 걸맞지 않는 분노와 기백이 가득했다.
“됐다. 북경에 남은 대신들은 그 나름의 임무가 있는 것이지. 행정 업무 역시도 국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폐하……!”
“내각대학사의 그 마음은 익히 알고 있다. 하나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음이다. 그것 역시도 알고 있겠지?”
이선장은 고개를 숙였다.
“짐의 부름에 도저히 따를 수 없을 만큼 사정이 급박하다? 그렇다면 사죄의 서찰이라도 하나 보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가? 언제부터 명의 기강이 이리도 허술해졌지?”
“폐하, 송구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이선장의 외침에 주변의 대신들이 모두 똑같이 따라서 선창했다.
황제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오늘 황실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 중에는 실제로 북천맹과 황실을 저울질하기 시작한 자들도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짐이 잠자코 있는 모습이 명을 이미 패망한 나라로 보이게 만든 모양이야. 그러니 이리도 짐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폐하……!”
“재밌어. 정말이지 재미있다. 어찌 인간이란 자신의 안위가 걸려 있을 때는 이렇게나 쉽게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황제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질수록 연단의 아래에 시립해 있는 대신들의 가슴은 격하게 쿵쾅거렸다.
두려운 웃음이었다.
철혈의 피를 가진 황제의 본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톡, 톡…….
황제는 태사의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두드리며 나른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대신들은 그 모습이 마치 사냥하러 나서기 직전의 호랑이 같다고 생각했다.
“짐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순순히 황실에 모인 자들은 셋 중 한 가지로 나뉠 테지. 무능하여 발 붙일 곳이 없는 자, 북천맹에 이미 끈을 대고 있는 자, 그리고 진정한 애국지사(愛國志士).”
“폐하……!!”
이선장의 피끓는 외침엔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부정하지 말게, 내각대학사. 사실은 사실이니.”
“하나……!”
“다만 중요한 건 그에 대한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겠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명 제국의 운명이 상당히 위태로운 것일 텐데도 황제는 조금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자신만만해진 듯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대신들을 노려보고, 어쩌다 눈이 마주친 대신들이 황급히 눈길을 피하는 것을 직접 살펴보는 그의 모습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애국지사라……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애국지사(愛國志士).
나라를 사랑하는, 뜻있는 선비라는 뜻이다.
“이 땅에 유학을 따르는 선비는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자들만이 황실에 들어와 임관하고 관직을 수여받는다. 그런데 그들 중에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이다지도 없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선장이 통한의 외침을 토해 냈다.
“폐하, 아니옵니다! 뜻이 있는 자들은 많이 있사옵니다. 다만 지금은 힘이 없어 몸을 감추고 있을 뿐이니, 분명 계기만 주어진다면 모두가 들불처럼 일어나 그 뜻을 세상에 펼칠 것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저희 모두 명을 사랑하는 폐하의 신하들이옵니다!”
이선장을 시작으로 주변의 대신들이 모두들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장내를 시끄럽게 하던 대신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앞으로 나서지 않는가. 도처에서 도적 떼가 들끓는데 어째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가. 어째서 짐에게 스스로 나서서 싸우겠다고 하는 자가 고작 몇 사람밖에 없는 것이지?”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울 용기도 없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스산한 적막이 감돌았다.
대신들 모두 황제의 말에 대답을 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다들 저 뒤를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황제의 손짓에 뒤돌아본 그곳에는…… 오문 너머 인공적으로 만들어 둔 금수하라는 하천 위로 다섯 개의 다리가 정갈하게 세워져 있었다.
길이 칠십 장, 폭이 사십오 장이 넘는 넓은 뜰을 가로지르는 하천과 그 하천의 위에 있는 다리들이다.
당연히 황실 내에서도 유명하여 관리들 중엔 그 정체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내금수교…… 유교의 오덕을 상징하는 다리이옵니다, 폐하.”
다섯 개의 다리.
그것은 각각 유교의 오덕을 상징했다.
“그래. 그럼 오덕이 무엇이던가?”
“…….”
“말하라.”
멋도 모르고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던 대신 중 한 사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해했다.
유교의 오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너무 쉬워서 그렇다.
기초 중의 기초. 심지어 글을 읽을 줄만 안다면 다섯 살짜리도 알 만한 말을 황제가 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옵니다.”
“그래,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가 바로 그것이지.”
황제가 눈에서 강렬한 불길을 내뿜기 시작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인(仁), 역도들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의로운 마음이 의(義), 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예(禮), 자기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아야 하는 지(智), 어느 길이 옳은지 판별할 수 있는 신(信).”
“…….”
“너희는 모두 유학자들이지. 그러니 한 번 말해 봐라. 짐이 한 말이 틀린가?”
말없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대신들의 앞에서 이선장이 대나무처럼 꼿꼿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극히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그래.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으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음을 알리지도 않은 자들은 유학의 기초인 오덕조차 모르니 유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짐은 문득 유학이란 만고에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황제가 왜 분서갱유를 일으켰는지 이해가 갈 정도야.”
“폐, 폐하……! 그런 말씀을……!”
모든 대신들이 아연해져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찌 이리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단 말인가.
공맹의 후예가 여전히 살아 있던 삼국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도 여전히 중화는 유교의 윤리에 따라 다스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지배자가 유교를 탄압하겠다는 말을 내뱉는다면…… 그 문제에 대한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 오지 않은 자들은…… 짐의 침묵이 국력의 부족함이라 여기고 다른 나라로 갈아탈 준비를 하는 자들이다. 실로 신의가 없으며 인성이 가벼운 자들인 것이지.”
“폐, 폐하……!”
지금 이곳에 없는 자들은 다들 황실에 모여 있는 대신들과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라거나, 또는 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 등 알게 모르게 다들 연결되어 있는 사이였다.
즉, 만약 그들이 역모의 누명이라도 쓴다면 엮여서 처분당하기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모여 있던 대신들 중 대부분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왜들 그러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
“재미있어. 참으로 재미있다. 땅이 있고 병력이 있다. 그리고 나라가 불안정하면 누구나 난세라 생각하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착각들을 하게 되지. 이 얼마나 우습고도 서글픈 생각이란 말인가.”
스스로 왕이 된다는 착각!
이젠 역모 혐의를 쓰기까지 고작 한 걸음 남았다.
대신들은 모두들 식은땀을 흘렸다.
황제는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신들을 휘어잡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감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걱정하지 말라. 오늘 그대들이 이곳에 온 것은 내 똑똑히 기억해 둘 것이다. 다만 오지 않은 자들은…… 훗날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야.”
그것이 역도들을 상대로 세운 공이든, 죗값으로 바치는 자신의 목숨이든.
황제가 이렇게 말했으니 그들은 어떻게든 지불해야만 한다.
대신들은 깊이 고개를 숙인 채로 역시 황제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나라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 어떻게 이리도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건 상황을 잘 모르는 자의 오만인가?
아니면 정말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대신들이 해야 할 처세도 달라질 터였다.
“앞으로 이 땅에 애국지사가 얼마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겠다.”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에서 퇴장하였다.
절대자의 퇴장을 알리는 오문의 북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황제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장내를 빠져나간 후에도 대신들은 한참 동안이나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백택.”
“예, 폐하.”
항상 황제의 뒤에 시립하여 서 있는 백택은 곧바로 대답하였다.
“너는 애국지사인가?”
“저는 선비라고 불릴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폐하.”
“어째서 그러하지? 평생 동안 황제를 수호하고 있는 너라면 애국지사라 불리기에 마땅하다.”
“저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백택의 대답엔 평소와 달리 망설임이 조금 담겨 있었다.
애매한 말투였으나 황제는 그 핵심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런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나라가 멸망해도 오직 짐의 옆을 지킬 뿐이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 그렇군. 그래서였어.”
황제는 그제야 납득한 듯했다.
“백택이라는 신수는 언제 어느 때나 전설로 내려오지. 항상 황제의 곁에 있으며, 황제에게만 보이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듯하며 황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이야.”
“…….”
“선황께서 혜제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을 때도 너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짐이 정당하게 황위를 물려받자…… 너도 마치 부상품처럼 짐에게 주어졌지.”
부상품이라는 말이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백택은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선황은 항상 자신에게 새로운 신수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기린에게도 그런 이름을 하사했던 것인데, 그때 들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알겠구나.”
황제는 백택을 지그시 바라봤다.
“너는 황실의 망령일 뿐이었어.”
그 말에도 백택은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는 짐도 들은 적이 없다. 명이 건국하면서부터라고 짐작해 왔지만,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닐 수가 있겠구나.”
“…….”
“백택, 네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과감하게 그것을 끊어 버려라. 짐은 진심으로 따르는 자가 아니면 필요없다.”
아무리 백택의 능력이 뛰어나고 필요하더라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과감히 버린다.
설령 그것이 황제의 자리에 않은 자에게 당연히 주어진 권리라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가 얻은 것이 아니면 필요없다.
지금의 황제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백택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짐에게 얽매일 필요 없다.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록.”
황제는 다시 한 번 갈 길을 열어 주었으나 백택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은 듯했다.
그는 두 눈에 다른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을 담아 황제에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입니다, 폐하.”
“흐음.”
황제는 백택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후회하지 않겠나?”
“예.”
“그럼 마음대로 하도록.”
걸음을 옮기는 황제의 두 걸음 뒤에서 백택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랐다.
대전을 넘어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뜰을 가진 태화전으로 궁녀와 환관들의 극진한 인사를 받으며 한참이나 걸어가면서도 황제는 뭔가를 계속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대는…… 애국지사다.”
“…….”
백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짐이 죽는 날까지 떠나지 말도록.”
“예.”
짧은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의 걸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남경의 대시는 남쪽에 있지. 본래 풍수지리상 큰 시전은 항상 도읍의 북쪽에 있는 법인데, 손권이 건업을 세우면서 과감하게 그 법칙을 깼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여긴 북쪽에 종산이나 복주산 같은 산들이 크게 둘러싸서 길을 막고 있는데다 현무호라는 호수까지 있다. 당연히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관습을 깨고 남쪽에 시전을 두면서까지 도읍을 지은 걸 보면 분명 손권은 어지간히 이 동네가 좋았던 모양이야.”
장기린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 상처는 그대로였지만 천을 찢어서 몇 겹이나 두른 덕분에 겨우겨우 걸을 수는 있었다.
그나마 장기린의 육신이 극도로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은 허벅지가 칼로 관통당하면 최소한 닷새 이상 정양하고 일어서지도 못할 터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야혼은 부축해 주지 않았다.
그는 다친 짐승은 도태되고 죽임당할 뿐이라는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기린에게 보조를 맞춰 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인 듯했다,
“너…….”
장기린은 조금 거칠어진 말투로 물었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군.”
“반군에 있으면서 이거저거 주워들었지. 사람을 다루려면 지식이 필요하니까.”
반야혼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건…… 말이 많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
“그래.”
장기린은 솔직하게 말했다.
반야혼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뭔가를 계속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뭔가 오해하나 본데, 난 상대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남경이 건국된 이유에 대해 아는 게?”
“글쎄, 나중엔 나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게 될 텐데?”
“……이제 보니 헛소리도 잘하게 되었군.”
“크핫!”
장기린이 투덜거리듯이 말하자 반야혼은 소리 나게 웃었다.
“아무튼 기억해 둬라. 남경의 남쪽엔 대시(大市)가 있고, 북쪽은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과 동쪽엔 대로가 있는데, 주로 서쪽 통로가 많이 사용되지.”
“…….”
“그렇게 대놓고 오묘한 얼굴하지 않아도 이제 곧 잡담은 끝이다. 포위망이 형성된 것 같거든.”
장기린은 놀란 눈으로 반야혼을 쳐다봤다.
비록 부상당하고 지쳤다고는 하나 장기린은 느끼지 못한 것을 반야혼이 알아챘다는 건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장기린은 그들이 걷고 있는 언덕 너머 먼 곳을 주시했다. 그리고 약 일 리 밖에서 가늘게 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연기와, 뭔가에 놀랐는지 푸드득― 날개를 떨치며 이동하는 새 떼들이 보였다.
“그랬나…….”
아무래도 몸의 부상 이전에 마음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주변의 변화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거늘.
이러니 반야혼이 먼저 위험을 알아채는 것도 당연하리라.
“큭큭, 반성 좀 했나?”
“아아, 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싸울 수 있나, 아니면 여기에서 좀 숨어 있을 건가?”
반야혼은 고의성이 다분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야 없지.”
“그럼? 그 몸으로는 방해만 될 텐데?”
“일각…… 만 기다려라.”
“일각? 가능하긴 하다만, 그걸로 뭘 할 수 있지?”
장기린은 햇볕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가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각. 부탁한다.”
“……알았다고.”
장기린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정결한 마음으로 청명경 일천 자를 떠올렸다.
검선과 함께했던 시간에 배운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스으읍…….”
주변의 기운을 가슴 깊이 들이쉬고, 그 기운을 이용해 신체의 내부를 크게 한 바퀴 휘돈 뒤 천천히 내뱉는다.
육체의 탁기를 없애고 신체의 힘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었다.
피부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되살아나는 느낌.
뜨겁다.
이 순간, 장기린의 육체는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 신진대사를 가동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발산된 열이 장기린의 몸 주변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호오……?”
옆에서 지켜보던 반야혼은 탄성을 내뱉으며 매우 흥미로워했다.
장기린의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불꽃 위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가 몸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신진대사의 속도가 극도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본래 몸은 활동하면 활동할수록 일정한 열을 내뱉는데, 장기린은 지금 그러한 순환이 매우 빨라졌기 때문에 열을 내뿜는 것이었다.
‘대단한데? 이건 뭐지? 몸속의 시간이 빨라지는 건가? 그래서 자연 치유력을 높인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반야혼은 머리가 좋다.
일부러 짐승처럼 살고 있을 뿐이지, 말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두뇌가 필요한 법이다.
그는 현재 장기린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파악했다.
야생동물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회복력이 빠르다.
야생동물들은 사람보다 짧은 생을 살기 때문에 신진대사가 빠르고, 그런 만큼 상처가 회복되는 시간은 더욱 짧아진다.
말하자면 장기린은 자신의 인체 내부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보통 사람의 몇 십 배나 빠르게 만든 것이다.
“후우우…….”
장기린이 긴 날숨을 내뱉자 주변의 공기가 모닥불이라도 태우는 것처럼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상처가 있던 왼쪽 허벅지 부근에선 말라붙은 핏물이 가루가 되어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장기린의 호흡은 정확히 일각 동안 계속되었다.
다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두 다리로 멀쩡히 버티고 서 있었다.
“그거, 대단한데?”
좀처럼 좋은 말을 내뱉을 줄 모르는 반야혼조차 장기린의 그 기술엔 감탄을 내뱉었다.
“음? 아니, 별거 아니다. 제약도 많고.”
“제약? 무슨 제약이 있다는 거지?”
“격한 움직임은 할 수 없다. 내부까지 낫지는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해.”
“흐음…….”
반야혼은 의심스럽다는 듯 장기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서, 그 ‘격한 움직임’의 정의는?”
“뭐?”
“저 정도 녀석들을 제압하는 건 격한 움직임인 거야, 뭐야?”
반야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선 대규모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있었다.
적게 잡아도 백여 명.
각자의 실력은 크게 특출나지 않은 것 같지만, 포위망을 좁혀오는 모습에서 제법 체계가 잡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북천맹의 추적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상관없다, 저 정도는.”
“큭큭, 거 봐라. 역시 대단한 기술이야.”
반야혼은 비틀린 웃음을 짓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잘 봐라, 저쪽이다. 저리로 가면 하천이 갈라지는 부분이 나오는데, 거기서 북쪽으로 오 리 정도 올라가면 네가 가야 할 길이 보일 거다.”
반야혼이 가리키는 방향엔 나지막한 언덕이 배불뚝이 같은 능선을 그리고 있었다.
반야혼은 도발적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자신이 돕지 않아도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냐는 생각을 눈빛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히 받아들이겠지.’
평범하게 살겠답시고 어른스럽게 굴면서 자존심은 무척 강하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
실제로 장기린은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뭣하면 내기라도 할까?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큭큭, 제대로 도착하기나 해라. 괜히 발목만 잡게 되면 절대로 구해 주지 않겠다.”
반야혼은 으름장을 놓았고, 장기린은 당연하지만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반야혼은 장기린을 보며 한 번 씩 웃은 뒤 몸을 날렸다. 장기린도 잠시 제자리에서 기다리다가 어두운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럼 실력을 한 번 보자고.’
앞으로 질주하는 반야혼의 눈에 아직까지도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장기린은 이미 반야혼이 보이지 않는 우측 길로 빠졌다. 아마 반야혼이 공격해 들어가면서 생긴 틈을 이용해 빠져나가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렇게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지.’
반야혼은 근처의 나무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절대로 사람이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다. 분명 반야혼은 장기린을 도와야 한다는 명령은 받았지만 ‘모시고 오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
그러니 상관없다.
고생을 좀 시키고, 이참에 진짜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 보는 거다.
“좋은 구경 시켜 달라고.”
늑대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반야혼의 시선이 우측,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포위망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