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六章 ― 적화비대(敵火肥大)
북천맹의 중급 무사인 종대(宗臺)는 궁술(弓術)만큼은 한 지역의 최고를 자칭해도 된다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십 리 밖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안공(眼功)을 익혔고, 거기에 활 종류는 어떤 것이든 다 다룰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련을 쌓았다.
파괴력이 센 대궁(大弓), 먼 거리까지 쏠 수 있는 각궁(角弓), 거기에 빠른 속도로 쏠 수 있는 쇠뇌까지.
비록 근거리 무공은 보잘것없어도 북천맹은 그러한 종대의 능력을 인정해서 처음 들어오자마자 중급 무사의 직위를 주었다.
그리고 이번 첫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새로운 조를 짜서 조장 자리를 주기로도 약속된 상황이었다.
종대는 이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무림에선 궁술만으로는 인정해 주지 않고, 무관 시험을 보자니 뒷배경이 없는 하급 무사로 시작했다간 이십 년간 그 모양 그 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북천맹.
강호관직론이라는 사상을 좇아 북천맹에 온 것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렇게 맹에 들어오자마자 대우를 받지 않는가.
“음…… 잠깐, 정지!”
종대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손바닥을 허공에서 쫙 펼쳤다. 그러자 뒤를 쫓아오던 다섯 명의 무인이 우뚝 멈춰 섰다.
각자 검이나 도를 허리에 차고 있는 흑도의 무인들이었다.
“왜 그러슈?”
“뭐가 있소?”
종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활을 쏘면서 원거리를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된 종대는 뭔가 엄청난 것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세를 낮춰! 뭔가가 온다!”
“뭣……!”
“너! 너! 너! 덤불이 많은 좌측을 살펴! 너랑 너는 나랑 같이 우측을 살핀다!”
“그럼 중앙에는……?”
“멍청하긴! 중앙으로 오면 다 같이 공격해야지!”
주변의 다섯 명은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북천맹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상처 입은 남자 하나를 끝까지 쫓아 죽이라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고수이니 조심하라고 하긴 했지만, 쫓는 것이 단 한 사람인만큼 포위당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설픈 것들, 니들이 그러니까 하급 무사인 거다.’
종대는 자신은 그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종대까지 합해서 총 여섯 사람은 자세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검으로 수풀을 푹푹 찔러 보고, 시야를 가리는 덤불은 조심스레 양옆으로 갈라 보았다.
그리고 때때로 걸음과 호흡을 멈추고 주변의 기척을 살피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기척을 찾을 수는 없었다.
“…….”
슬슬 다섯 명의 하급 무사로부터 의심스런 시선이 날아올 때 즈음, 종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고요함이었다.
풀과 나무가 무성한 이 주변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침묵이 전면 삼십 장가량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풀과 나무가 있는 곳이 고요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런 곳에선 보통 풀벌레 우는 소리는 기본이고, 최근엔 늦여름답게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야 정상인 것이다.
끼기긱―
종대는 등 뒤에 메고 있던 여러 개의 활 중에 소의 뿔을 깎아 만든 각궁을 꺼내 화살을 재었다.
노리는 것은 정면 삼십 장 거리.
그의 본능이 외치는 방향이었다.
종대는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노려보았고, 마침내 그가 화살을 겨누고 있던 방향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쒜에에엑―!
오랫동안 단련된 종대의 육체는 움직이는 무언가를 본 순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강한 힘이 실린 화살은 공기를 찢어 버릴 듯한 기세로 쏘아져 덤불을 스치고, 삼십 장 너머의 어떤 나무에 쾅! 하고 꽂혔다.
커다란 나무의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의 파괴력.
보통 사람이 화살을 맞는다면 뼛속까지 관통하고 뒤에 있는 나무에까지 박힐 법한 위력이었다.
‘그걸 피해……?’
종대의 손은 이미 다음번 화살을 꺼내 활에 재고 있었다. 십 리 밖의 글씨도 읽을 수 있는 그의 뛰어난 눈은 희끗한 그림자의 움직임을 쫓아가고 있었다.
쫓는다.
눈으로 쫓고, 감각으로 쫓고, 손으로 쫓는다.
그 세 개의 조건이 모두 만족하는 순간, 좋은 사냥을 할 수 있는 법.
쒜에에엑―!
두 번째로 쏘아진 화살은 처음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쏘아졌고,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가차없이 관통해 버렸다.
종대는 ‘이번에야말로 맞췄다!’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쏘아 낸 화살은 이번에도 나무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퍼억!
“헛!!”
잠시 종대가 충격과 당황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이, 가죽 북을 크게 두드리는 듯한 둔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종대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왼쪽으로 수색을 시작했던 무인 중 한 사람이 휙― 하니 미끄러지는 듯하더니, 마치 맹수에게 다리가 물린 것처럼 수풀 속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으아아악……!”
수풀 속으로 몸이 사라지자마자 비명은 뚝 끊어졌다. 잠시 기다려 보았으나 수풀 근처에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종대의 등 뒤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쪽으로 갔던 무인들 중 나머지 두 사람이 서로 호흡을 맞춰 수풀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종대는 이번엔 등 뒤에서 대궁을 꺼내 들고 화살을 먹였다. 대궁은 각궁만큼 긴 사거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중거리에서 정확도와 파괴력이 뛰어나다.
활시위를 한계까지 잡아당긴 종대의 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잠시 후, 끌려간 동료를 찾으러 수풀 속에 뛰어든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밖으로 나온 순간, 이번엔 종대의 뒤를 지켜 주던 무인이 신음을 흘렸다.
“끄억……!”
대경한 종대가 황급히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온통 흑색의 커다란 날붙이가 뒤에 서 있던 무인의 등을 꿰뚫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음(無音), 쾌속(快速).
오직 그 말만이 어울릴 듯했다.
분명히 왼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오른쪽에서 불쑥 나타났단 말인가.
게다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가슴을 꿰뚫어 버린 저 무시무시한 흑색의 창은 또 무엇이고?
“이, 이놈…… 크악……!”
다른 한 무인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덤비려 하는 순간, 새카만 창날이 매끄럽게 움직이며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서걱!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주변의 땅을 적셨다.
그 순간, 종대는 보았다.
뿜어지는 핏물.
수풀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한 쌍의 새카만 눈동자를.
“크…… 으아아앗!!”
피슉! 피슉! 피슈슈슉!
종대는 정신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는 공포에 질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짧은 순간에 가장 많은 화살을 쏘아 냈다.
당기고, 쏘고…… 당기고, 쏘고.
수많은 화살들이 순식간에 전면을 빼곡히 잠식했다.
“헉, 헉, 헉…….”
종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나 화살들을 많이 쏘았는데 제대로 격중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며 다시 한 번 대궁에 화살을 쟀다.
눈앞에는 두 구의 시체뿐.
어느새 습격자의 모습은 사라져 온데간데없었다.
어째서 곧바로 그에게 덤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전에, 이번엔 다시 왼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억……!”
종대는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언제 또 저기까지 갔단 말인가.
신출귀몰도 어느 정도지, 이건 아예 귀신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당황과 경악이 뒤섞인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왼쪽에서 황급히 종대를 향해 달려오려던 한 사람이 가슴이 갈라진 채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한 사람이 검을 휘둘렀으나, 검은색 그림자는 손쉽게 공격을 피해 내며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뛰어난 안력을 지닌 종대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목격했다.
상대는 흑색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
거기에 오른쪽 허벅지엔 피로 물든 천을 겹겹이 감아 놓은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찾던 놈이야. 그런데 정말로 부상당한 놈 맞나? 부상당한 놈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지?’
종대는 멀쩡한 상태에서도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종대는 흑색 그림자가 숨어든 수풀을 향해 반사적으로 화살을 내쏘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흔들렸으나, 사람이 맞은 흔적은 없다.
이번에도 피해 낸 것이다.
“이놈……!”
종대는 이를 바득 갈며 마지막 남은 무인 한 명을 자신의 가까이로 불렀다. 어떻게든 뭉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 무인이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뗀 순간, 옆에서 덮쳐 든 검은색 그림자가 커다란 창날을 그의 몸에 박아 넣었다.
푸욱!
“끄르륵……!”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무인이 입에서 핏물을 쏟아 냈다.
까앙!
그리고 처음으로 검은색 그림자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창으로 막아 냈다.
종대의 화살.
대궁으로 쏜 화살이 창날에 튕겨져 바닥에 꽂혀 있었다.
“이노오옴―!”
종대는 화살이 피해진 게 아니라 막혔다는 것에서 약간의 희망을 얻었다.
그가 연속해서 쏠 수 있는 화살은 최대 열 개. 즉, 십연발이다.
종대는 정신없이 활을 쏘았고, 열 개의 화살을 전부 쏘아낸 순간, 곧바로 대궁을 옆으로 집어 던지고 품속에서 직사각형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쇠뇌.
근거리에서는 각궁보다도 더 큰 위력을 보이는 암기형 화살이다.
순간, 텅!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종대를 향해 정면에서 쏘아져 오고 있었다.
종대는 쇠뇌을 능숙하게 조작하여 정면을 향해 쏘았다. 철컹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중지손가락만 한 쇠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적에게 박혀들었다.
아니, 박혀들었다는 건 착각이다.
상대는 창을 쥐지 않은 맨손으로 그 쇠뇌를 잡아채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일체의 고통도 표시하지 않은 채, 묵묵히 쇠뇌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무슨……!!”
종대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자신의 두 눈에 비치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쇠뇌는 보통 화살의 삼분지 일 크기도 안 되면서 속도와 파괴력만큼은 전력을 다해 쏜 각궁과 맞먹는 기물이다.
연속해서 쏠 수만 있다면 다른 활들이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한 병기인데, 그걸 고작 일 장 거리에서 맨손으로 잡다니.
게다가 보통 무인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 낼 수 있는 이유는 화살이 쳐 내기에 충분할 만큼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작 손가락만 한 쇠뇌가 날아온다면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쳐 내는 건 불가능했다.
휘리릭―
“…….”
그사이, 쇠뇌를 쳐 낸 상대는 옆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다 잡아 놓고 어째서 옆으로 몸을 피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종대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다시 대궁을 주워 들고 화살을 쟀다.
‘몸에 이상이 있는 건가, 아니면 봐주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종대는 상대의 몸에 이상이 있는 걸로 결론 짓고는 인근의 나무둥치 옆으로 몸을 숨겼다. 상대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다. 마지막 한 수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종대는 숨을 죽이고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쓰러뜨린 걸로 볼 때, 저놈은 다수의 적과 싸워 본 경험이 많아. 상대를 교란시켜야 더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아는 놈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번에도 교란책을 쓴다. 첫 번째로 나타나는 기척은 미끼야.’
종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면에서 툭, 하고 뭔가가 발을 딛는 듯한 기척이 들려왔다.
이건 미끼다.
종대는 그렇게 판단하고 옆쪽의 다른 나무둥치에 몸을 숨기며 기척이 들려온 반대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 기척이 들려왔던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수풀이 갈라졌다.
‘그럴 줄 알았다!!’
종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단단한 통나무도 뚫어 버리는 대궁의 화살이 다섯 개나 쏘아졌다.
기척이 들려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쏘아 낸 공격.
당연히 피할 시간 따위는 없다.
종대는 적중을 확신했다.
피슈슉―
“어……?”
하지만 그가 쏘아 낸 화살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관통해서 지나쳤다.
종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척이 들려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쏜 공격이다. 혹시나 해서 화살 다섯 개를 횡렬로 쏴서 적중률을 높이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을 수 현실에 종대는 곧바로 기척이 들려왔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먹만 한 돌멩이를 발견했다.
‘이것도 미끼? 설마……!’
설마 상대가 두 번이나 교란책을 쓸 줄은 몰랐다. 종대는 이상을 느끼는 순간, 대궁을 집어 던지고 품 안에서 다른 쇠뇌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옆에서 폭발하듯 풀잎들이 튀어올랐다.
완벽한 호선을 그리는 흑색 창날이 순식간에 종대의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그 완벽한 공격을 보는 순간, 종대는 공격을 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갖고 있던 쇠뇌는 세 개. 처음에 쓴 걸 제외하더라도 아직 두 개가 더 남아 있었다.
그는 양손에 각각 쇠뇌를 잡았고, 흑색 창날이 피부에 닿기 직전에 큰 소리로 외쳤다.
“잡았다!!”
동시에 철컹! 하고 쇠뇌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리고, 종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창을 휘두르는 속도가 쇠뇌의 속도보다 빠를 리가 없다. 설령 속도가 같다고 해도 쇠뇌를 상대의 몸에 박아 넣었으니 양패구상이다.
그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도 비길 수 있는 한 수를 둔 것이다.
“하하하……!”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던 종대의 신형이 그 순간에 굳어졌다.
별이 번쩍거리는 듯한 점멸.
등골이 오싹하면서 심장이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의 시야는 새카맣게 물들었다.
☆ ☆ ☆
“뭐, 이 정도인가.”
장기린은 창날에서 핏물을 털어 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발밑에는 쇠뇌 두 개가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상대의 목을 베는 것과 동시에 날아오는 쇠뇌를 손잡이로 쳐서 떨어뜨린 결과였다.
“꽤나 능숙한 녀석이었어.”
장기린은 아직까지도 두 다리로 우뚝 서 있는 종대의 시신을 쳐다보며 방금 전의 상대를 평가했다. 아직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는 듯 위풍당당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시신이었다.
그만큼 깔끔하고 부드럽게 베였다는 뜻이지만, 사실 그동안 장기린이 싸워 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싸움이었다.
“몸에 부담을 최대한 안 주면서 싸우면 이 정도인가……. 뭐, 몸을 풀고 상태를 시험하기엔 적합한 상대였다.”
우측과 좌측으로 진형을 나눈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궁사의 대처도 싸움 경험이 많았는지 꽤나 노련했기에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마 장기린이 여전히 군부의 장수로서 북쪽 전선에 남아 있었다면, 어쩌면 죽이기 전에 등용을 권유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금 전의 상대는 그 정도로 꽤나 희소성이 있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북천맹에 들어갔는가…….”
장기린은 씁쓸한 심정으로 눈앞의 시신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만한 인재가 왜 황실이나 무림이 아니라 북천맹으로 들어갔는가.
그건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북천맹이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인재를 차별없이 등용하는 방식만큼은 배워도 좋지 않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장기린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위.
보통 사람이 올려다봐선 시야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 반야혼이 제집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뭘 묻는 거야?”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엔 불만이 가득했다.
“이런 재능이 북천맹에 흘러들어 간 이유 말이야.”
“하! 그런 건 나랑 상관없어. 그보다 방금 전엔 왜 그렇게 싸웠지? 그건 꼭…….”
반야혼은 뒷말이 쉽게 입 밖으로 안 나오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너 같다고?”
장기린은 반야혼이 하지 못한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꼭 내 싸움 방식 같던데, 왜 그랬지?”
“최소한의 힘과 노력을 들여 적을 쓰러뜨린다……. 여기에 걸맞은 싸움법은 아무래도 네가 쓰는 방식이 가장 가까웠어.”
“…….”
“뭐지? 부끄러워하는 건가?”
“하! 무슨 소리냐!”
멋쩍은 듯 반야혼은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만.”
이어지는 말에 장기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크흠!”
“상대를 교란시키고, 심리적으로 조종하며, 철저하게 배후와 약점을 노린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싸움으로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반야혼은 칭찬받는 것이 기분이 좋은 듯 계속해서 씩 웃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상대가 그렇게 느끼도록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야혼은 그런 존재니까.
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아무리 동류인 장기린이라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야생동물과도 같은 그 치열한 싸움법은 혼자서 치르는 싸움 중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장기린은 솔직하게 칭찬했다.
“그보다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거야? 슬슬 가지 않으면 기껏 열린 포위망이 다시 정비될 텐데?”
“슬슬 가야지.”
“빨리빨리 움직여. 난 너를 정해진 곳까지 데려가야 하니까.”
장기린은 툴툴거리는 반야혼의 말에 따라 진천룡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적한 하늘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피 튀기는 싸움과는 정반대의 풍경.
장기린과 반야혼, 두 사람은 그렇게 북천맹의 포위망을 통과했다.
☆ ☆ ☆
반야혼의 말대로 하천에서 갈라지는 길에서 북쪽으로 오 리 정도를 올라가자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언덕 위에 커다란 천막이 보였던 것이다.
명 제국 특유의 위가 뾰족한 천막은 주변의 고즈넉하고 정갈한 노송(老松)들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주변의 풀잎에 사람이 밟은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서는 주변을 돌아다니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장기린이 천막 앞으로 다가가자 마치 뱀의 비늘처럼 쇳조각들을 엮어서 만든 검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 한 명이 천막의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군부에서 온 건가?’
장기린이 잠시 뭐라고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으니, 병사는 장기린을 향해 두말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들어가시오.”
누군지조차 묻지 않는다.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반야혼이 나직하게 말했다.
“눈은 마주치지 않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두 말 않고 길을 열어 준다.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별로 달갑지 않아 하는 인상이군.”
“조용히 해.”
장기린은 반야혼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역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병사의 태도는 곧 병영 전체의 태도와 같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앞으로 상당한 난관이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장기린은 바닥에 깔아 놓은 모포 위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 두 명을 발견했다.
둘 다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무장(武將)이라는 것은 한눈에 파악했다.
날카롭게 가라앉은 눈,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에선 체구에 상관없이 무장 특유의 강인한 기백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장기린을 보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서두르는 것 없는, 느긋한 태도였다.
“어느 쪽이 장기린입니까?”
“이쪽이오.”
장기린이 대답하자 먼저 말을 꺼낸 황색 장포의 사내가 가벼운 포권을 취했다.
“어림군의 수장, 임무호라고 하오.”
어림군.
황실을 지키는 금군보다 상위에 위치하며,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오로지 황제의 명만을 따르며 황제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황제의 친위대였다.
주로 반역자의 가문을 색출하거나 내란이 일어났을 경우에 활약하며, 평상시에는 황제의 주변을 철통같이 경호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임무호는 그런 곳의 수장이었다.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직급으로 따지면 적어도 정이품. 대장군보다 한단계 낮은 최고위직의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그는 황색의 비단 장포를 겉에 두르고, 녹색의 상의와 품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약간 마른 체구에 속하지만, 유약하다기보다는 꽉 채워져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 짧게 콧수염을 기르고 눈꼬리를 올리고 있으니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한편, 어림군의 수장 임무호가 먼저 인사를 하자 옆에 서 있던 다른 한 명의 사내 역시도 장기린에게 포권을 취했다.
“팔기장군 관충(關忠).”
팔기군.
어림군과 마찬가지로 황실을 지키는 일을 맡고 있는 군이지만 어림군과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다른 곳으로는 절대로 이동하지 않고 수도를 지킨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수도를 지키는 군대라고나 할까.
어림군이 황실 내부를 지키고 있다면 팔기군은 황실 바깥.
즉, 북경 전역을 지키는 상비군이다.
숫자는 삼만.
어림군의 수장인 임무호와 마찬가지로, 팔기장군은 대장군의 바로 아래 직위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관충은 검은색 장포를 입고 신장이 칠 척은 될 것 같은 거구를 지녔다. 턱수염을 길게 길렀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방금 전의 무뚝뚝한 말투로 봐서는 만만히 볼 수는 없을 듯했다.
“장기린이오.”
장기린은 두 사람에게 형식적이나마 똑같이 포권을 취해 주었다.
그런데 인사가 끝났음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그로부터 떨어지지가 않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그들의 눈빛에 장기린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마침내 답을 깨닫고 품 안에서 황금색 비단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신, 임무호, 황제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장군령을 뵙습니다.”
임무호와 관충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태도로 장기린이 주머니에서 꺼낸 ‘임시 대장군령’을 대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조금 전보다는 훨씬 정중한 태도였다. 두 사람의 눈빛부터가 다르게 느껴졌다.
장기린은 그제야 서로를 확인하는 절차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고 싶소.”
장기린은 당당하게 물었다.
예전 같으면 장기린이 아래에 위치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자신은 임시나마 대장군이었다. 이 세상에서 황제를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자리에 오른 이상, 그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음…….”
임무호는 그런 장기린의 태도가 예상밖인 듯 관충과 서로를 힐끗 쳐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임시 대장군령을 받은 사람을 따라 남경 공략에 힘을 보태라고 하셨습니다.”
“일만의 어림군을 모두 데려왔소?”
“그렇습니다.”
“그럼 폐하의 곁에는……?”
“…….”
임무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도 그 점이 못내 마뜩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상비군 정도만이 남아 있습니다.”
“……폐하를 지킬 병사들까지 다 합쳐서 모든 병력을 투입하신 거군.”
“그렇습니다.”
어림군과 팔기군을 준다고 할 때부터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황제는 장기린에게 큰 투자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투자도 아니지.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 도박……. 폐하, 이런 건 비겁하군요.’
장기린은 속으로 황제를 향해 불만을 토해 냈다.
뒤로 후퇴할 길이 없는 것.
이를테면 배수의 진이었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이상, 장기린은 질래야 질 수가 없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팔기군은 어떻소? 삼만의 팔기군이 모두 온 것이오?”
“그렇소.”
관충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치 그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겠소. 그럼 다음 질문인데, 어째서 두 분이 이곳에 있는 것이오?”
“그건 빤한 것 아니오?”
이번엔 드물게 임무호가 아니라 관충이 대답했다.
“임시 대장군이라는 자가 당치 않게도 북천맹주라는 역도와 만남을 가진 후 부상을 당해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
관충은 자신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관성대제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장수가 불만을 가득 담아 노려보는 모습은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들기 충분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위축되기엔 장기린이 겪어 온 경험이 너무 많았다.
장기린은 무심하게 관충의 눈빛을 맞받았다. 처음엔 불꽃이 튀는 것처럼 보일 만큼 막상막하였으나 나중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눈빛이 누그러진 관충의 시선이 흔들렸다.
“으음…….”
관충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올 때 즈음, 장기린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할 생각이 없소. 북천맹주를 만나기 위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마주쳤고, 싸울 수밖에 없었소. 그건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오.”
“애초에 한 무리의 장이 그런 위험을 자초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런가. 나는 관 장군과 생각이 다르오. 직위가 장수이든 말단 병사이든,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각자 가장 적합한 임무를 맡아서 해야 하는 것이겠지.”
“한 무리의 장이라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이래서야……!”
장기린은 관충의 뒷말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으나 굳이 트집을 잡지 않고 넘어갔다.
어차피 이 정도의 불화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어림군, 팔기군.
어느 쪽이든 국가제일의 정예군이라는 자부심과 황제의 명령만 받는다는 강한 자존심으로 머릿속이 꽉 찬 족속들이다.
그런 곳의 우두머리들이니 어련할까.
‘임시’라는 직함을 달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젊은 대장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나는 내 신념을 굽히지 않을 것이오.”
“크흐흠!”
장기린과 관충의 대화가 격해지자 임무호가 나섰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그리고 장군, 이곳에서 장군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관 장군과 제가 계획해 둔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자, 여길 보십시오.”
어림군의 수장 임무호는 생각보다 유연한 태도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옆에 놓아 두었던 두루마리를 꺼내 앞에다가 쭉 펼쳤다.
장기린은 펼쳐진 두루마리를 보려다가 문득 반야혼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임무호와 관충, 두 사람의 성격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볼 때 분명히 함께 온 반야혼에 대해 따지고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심코 뒤돌아봤는데, 장기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반야혼은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무슨……!’
장기린은 당황하여 막사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니오.”
고개를 저으며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임무호의 의심하는 듯한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겠지.’
분명히 따라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면 반야혼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장기린은 일단 자신의 눈앞에 놓인 두루마리에 집중했다.
“이건 남경의 지도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응천부성의 지도입니다.”
임무호는 큼직큼직하게 주요 건물들만 그려져 있는 사각형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쪽이 가장 큰 서문이고, 여기가 두 번째로 큰 남문입니다. 이 중에 서문을 통해 남경성 내로 돌입할 계획입니다.”
서문을 통해 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정석적인 계획이었다.
남경의 경제 흐름이 건재했던 시절엔 서문을 통해서 드나드는 물류의 양이 전체 물류량의 절반 이상이었기 때문에, 남경에 존재하는 사방의 문중에서도 서문은 특별히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이 크다는 말인즉,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는 병사의 숫자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 단위의 병사들이 맞붙게 되는 ‘전쟁’에 있어서 서문만큼 편리하고 유용한 통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상대 쪽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문을 통과할 묘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일단은 정석적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차근차근 진격해서 거리를 좁히고, 성벽 앞에 흙과 목재를 쌓아서 지지대를 만든 다음 성문을 넘을 겁니다. 성문을 부술 수 있는 충차도 준비해 둬야겠지요.”
임무호는 그야말로 ‘정석’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성안에 있는 적을 공략하기 위해선 성벽과 성문을 넘는 것이 필수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는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수히 많은데, 그중에서도 임무호가 말한 정석적인 방법은 역사적으로 많은 장수들이 사용한 만큼 안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큰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장기린이 보기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건 장점보단 단점이 훨씬 컸다.
“성벽을 넘으려면 이쪽이 세 배가 넘는 병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 지금 상황에 서문에서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병력을 쓸데없이 소모시키다가 결국 패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오.”
“흐음, 그건 너무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까?”
“비관이고 뭐고 사실이오. 혹시 임 장군은 북천맹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기린은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북천맹에는 텐챠이와 삼대천이 있다. 게다가 실전 경험을 많이 쌓은 난폭한 산적들이 무려 삼만 명. 거기에 텐챠이 수호대라는 괴물 기마대도 함께하고 있으니, 성의 공략에는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단순한 숫자 계산만으로도 남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십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지금 장기린이 가지고 있는 병력은 총 사만.
그것도 탈탈 긁어서 그 숫자인만큼 그 상태로 성문을 뺏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석적인 방법을 사용해 우직하게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오차가 생길 확률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결과는 보나마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정석적인 방법이지?’
장기린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사실 곰곰히 따져 다스리는 병력의 숫자가 일만이 넘어가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성벽과 똑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어 버릴 수도 있고, 수로 공사를 통해 큰 강을 성안으로 흐르게 만들어 수해에 잠기게 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강물을 끌어와서 성안을 물에 잠기게 하다니.
말도 안 되는 듯하지만, 일만이 넘는 숫자는 그런 힘을 지닌다.
심지어 웬만한 산 하나는 사만 명이 달려들면 불과 며칠 만에 평평한 평지로 만들 수도 있다.
자연재해?
만들어 낼 수 있다.
몇 만이 넘는 병사들에겐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어째서 임무호와 관충은 굳이 정석적인 방법을 쓰려는 것일까?
아무리 어림군과 팔기군이 이런 식으로 성을 공략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도, 장수의 자리에 오른 자들이 그 정도로 기본적인 것도 모를까?
“아니, 아니오. 혹시 복안이 있는 것이오?”
장기린은 임무호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지금 그들에겐 ‘책략’의 힘이 필요했다.
십만 이상의 병력이 안 되는 상황이니, 그만큼의 병력 차를 없애 버릴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명백할 터.
그러니 임무호도 분명히 뭔가를 준비해 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봤을 때, 임무호와 관충은 그리 우둔한 자가 아니었다.
“예,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임무호는 순순히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 복안이 무엇이오?”
“본래 견고한 성일수록 안쪽에서의 공격에선 약한 법 아닙니까?”
“……설마.”
“그렇습니다. 북천맹의 역도들 중에 한 사람을 회유하였습니다.”
임무호의 당당한 말에 장기린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누구를 회유했단 말이오?”
장기린은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황실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남경의 무리들과 접촉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결실을 맺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는 말이오.”
“음, 서문 쪽을 지키는 북천맹의 간부 중 종오탁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무림강호에선 꽤나 유명한 모양입니다만.”
“종오탁?”
“그렇습니다.”
장기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종오탁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만약 그가 남경 내부에 들어갔을 때 만났던 주호의 이름이 나왔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기린은 그때 주호가 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낭인왕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장난스레 하던 대화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이, 형씨. 명심해. 이쪽 낭인 지역 말고는 그야말로 전부 다 북천맹의 광신도나 다름없다고. 보면 볼수록 북천맹이 사람 하난 잘 다룬단 말이야. 다들 여기를 일확천금의 기회의 땅 정도로 생각한다니까? 그러니 배신하고 싶겠어?”
“그 종오탁이라는 자는…… 정말로 우리 편인 게 맞소?”
장기린은 주호의 말을 떠올리고 나니 이젠 정말로 임무호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주호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낭인들을 제외하곤 모든 인물들이 이미 북천맹의 사상에 완전히 감화된 것도 맞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북천맹은 무인들에게 상당히 후한 대우를 해 주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종오탁이라는 자도 배신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명 제국의 진군에 맞춰 성문을 열 수 있을 만한 직위에 있다면 이미 그는 북천맹으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자일 테고,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면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배신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임무호와 관충은 그런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길을 잘못 들기는 했어도 그들 역시 명 제국의 국민입니다. 몽고의 역도들에게 진심으로 협력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허허, 역도들의 말로란 언제나 그런 것이지.”
“맞습니다. 역사가 짧은 자들인만큼 조금만 위기가 닥쳐와도 끈 떨어진 연처럼 사분오열되어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임무호와 관충은 서로 대화를 하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입니다, 장군이 그 배신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만, 관 장군과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조치라면……?”
“처자식을 잡아 두었습니다. 아니, 잡아 두었다기 보단 스스로 바쳤다고 해야겠군요. 하하하! 자신의 죄를 면제해 달라며 울고불고 사정하면서 스스로 처자식을 맡겼단 말입니다. 이 정도면 못 믿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임무호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 물론, 그들이 진짜 종오탁의 처자식이라는 것은 확실히 확인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으음…….”
“하지만 만에 하나 이 종오탁이라는 자가 성문을 열어 주기 전에 잘못될 수도 있으니 저는 정석적인 방법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문이 안 열리게 될 경우엔 정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다음 작전을 구상하는 시간을 벌자는 뜻입니다.”
그때 관충이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허어, 그럴 리는 없소, 임 장군.”
“하하, 그렇지요. 일단은 성문이 열렸을 경우의 전술을 이야기해 볼까요?”
‘이건, 어쩔 수가 없군.’
장기린은 일단 임무호와 관충이 분위기를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임무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종오탁이라는 자가 약속대로 성문을 잘 열어 주기만 한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본래 지금의 남경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십만의 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종오탁이라는 배신자 한 사람이 부족한 육만 명가량의 병력을 대신해 준다면 병사들의 희생도 비약적으로 줄어들지 않겠는가.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분명, 북천맹의 빈틈을 파고들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장군, 이쪽을 보십시오. 이게 저희 두 사람이 미리 세워 둔 계획입니다.”
임무호는 웃음 띤 얼굴로 서문으로부터 남경의 시가지를 통과해 황성으로 직행하는 선을 지도 위에 그렸다.
“종오탁이라는 자가 문을 열어 주는 순간, 저의 어림군과 여기 계신 관 장군의 팔기군이 곧바로 황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입할 것입니다. 경계를 서던 북천맹의 병사들은 갑자기 문이 열려 버려서 크게 당황할 테니, 곧바로 황성을 탈환하면 됩니다.”
임무호의 손가락은 황성의 대문을 통과해 정중앙, 황실에서 끝을 맺었다.
“병력을 나누지는 않소?”
“물론 나눕니다. 어림군은 제가 지휘할 것이고, 팔기군은 관 장군이 지휘할 것입니다. 어림군은 황성의 서쪽, 팔기군의 황성의 정문을 통해 돌입하기로 했습니다. 효율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선 그게 나을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형식상 묻고는 있으나 장기린의 의견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연했다.
이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병권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형식상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장기린을 위에 앉혀 둘 뿐이지, 전쟁에서 장수로서의 일은 모두 자신들끼리 알아서 할 생각인 것이다.
두 사람은 장기린을 주시했다.
장기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시오.”
장기린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흐음……!”
그러자 임무호와 관충은 의외라는 듯 장기린을 쳐다봤다.
“크흠, 원래 일군의 장수는 뒤에서 중심을 잡아 줘야 하는 법.”
“임시라도 대장군의 직위를 맡으셨으니 저희 선봉장들의 뒤에서 중심을 잡아 주십시오.”
그래도 양심에 걸렸던 것일까.
두 사람은 장기린의 체면을 조금은 세워 주었다.
“알겠소. 그럼 선봉은 두 분께 부탁하겠소.”
“하하,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입니다. 자, 그럼 이제 세세한 사항을…….”
그 뒤로는 임무호가 세세한 계획이나 날짜 등을 설명했고, 어느새 기분이 많이 풀린 듯한 관충도 옆에서 한두 마디씩 거들며 설명을 도왔다.
확정된 결행일은 이틀 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정오에 결판을 짓기로 정해졌다.
☆ ☆ ☆
“어이.”
장기린이 자신에게 배정된 막사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곳엔 마치 제집인 양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반야혼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올라 간데다 살기마저 실린 듯한 붉은빛의 눈동자가 정면을 보며 활활 불타올랐다.
“너는 밸도 없냐?”
반야혼의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소리지?”
“그 늙은이들 말이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살아 있는 것들은 목덜미에 송곳니를 콱 꽂아 줘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야.”
입꼬리를 말아 올려 송곳니를 드러내는 반야혼.
그 말이 비유나 농담이 아닌, 진짜 현실이 될 것 같기에 두려웠다.
“역시 천장에 있었군. 재주도 좋다. 어떻게 거기에 올라간 거지?”
병사를 통과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
반야혼은 장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천막의 꼭대기에 올라가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기린이 뒤돌아보았을 때 반야혼이 없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천하의 장기린도 처음엔 알아채지 못하고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야 알게 되었을 만큼 은밀한 동작이었다.
“말 돌리지 마라. 대답부터 해.”
반야혼의 미간에 새겨져 있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총합 사만의 병력을 데려온 장수들을 만나자마자 죽이라는 거냐?”
“죽이기 싫으면 겁이라도 주란 말이다!”
“지금 말해 봤자 소용이 없어서 그랬다. 그런데 왜 네가 화를 내지?”
“큭! 그냥 보기 싫어서 그렇다!”
반야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장기린이 순순히 당하고 왔다는 점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별일 아니다. 어차피 그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어.”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그럼 할 수 없고.”
“…….”
장기린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뻘개진 반야혼의 얼굴을 보며 장난을 그만뒀다.
“납득이 안 되나? 쉽게 말하자면, 그때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새로 부임한 젊은 애송이 대장군이 권력을 잡기 위해 발악하는 걸로밖에 안 보일 거라는 소리다. 그러니 일단은 물러나는 게 최선이지.”
“교활한 늙은이들……!”
반야혼이 이를 갈았다.
“뭐, 물론 그 두 사람도 이미 그걸 알고 한 일일 테지.”
“그래서? 인정하고 바닥에 배를 납작 엎드린 채 순순히 당하고 왔다는 건가? 그랬다면 이 만적의 혈족이라는 이름이 울 것이다!”
“혈족이라…… 기분 좋은 단어로군.”
혈족, 바꿔 말하면 가족이다.
그걸 인정하는 것을 보면 반야혼도 뭔가 변화하기 시작한 듯했다.
“자꾸 말 돌리지 마라!”
“알았으니 목소리를 낮춰라. 바깥에 네 목소리가 들렸다간 귀찮아질 수도 있어.”
장기린은 진지한 눈빛으로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대답했다.
“나하고 기 싸움을 하면서 인상이 좀 안 좋아지긴 했지만, 사실 저들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폐하께서 어림군과 팔기군을 맡기고 곁에 두셨다는 건 그만큼의 능력이 있어서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고, 그만큼의 능력도 있어.”
실제로 임무호가 짜놓은 계획은 딱히 트집 잡을 부분이 없을 만큼 잘 짜여져 있었다.
계획을 두고 고심했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하면 아군의 피해를 줄일지, 어떻게 하면 적들을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어림군과 팔기군이 전부 나서서 처리하는 경향은 보였지만, 어쩌면 신임 대장군을 꼬드겨서 선봉에 세워 이용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은 처사일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납득이 안 된다. 황제가 임명한 대장군을 어떻게든 누르려고 하는 건 불충이 아닌가?”
“불충이라…… 하하, 네 입에서 불충이란 말이 나오니까 재미있는데?”
“네놈……!”
“그래도 이번 일은 폐하께서 너무하신 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가 대장군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테지.”
아직 이십대에 불과한 젊은이가 갑작스레 대장군의 자리에 발령된다는 사실.
게다가 딱히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친 인물도 아니니, 임무호나 관충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애송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충성심을 보이라는 것 자체가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장기린 자신이 임무호나 관충의 입장이었어도 상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큭, 그래서? 결국은 그럴만하니 날 무시해도 납득해 주겠다? 성인군자 나셨군. 그래 가지고 이 전투에서 이길 수나 있겠나?”
반야혼은 한껏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장기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실제로 반야혼의 이야기는 그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서야 안 되지.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어.”
장기린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번뜩였다.
“호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신임 애송이 대장군의 권력 투정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반야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미가 가득한 채 되물었다.
하지만 장기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강인한 표정,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지. 실력으로 가르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