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七章 ― 독사출동(毒蛇出洞)
장기린은 생각했다.
그는 어째서 남경성에서 하시르를 만났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필 그날, 그 시점에 하시르가 지하 통로를 통해 돌아온단 말인가.
하시르가 돌아오는 게 조금만 더 빨랐다면 장기린과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린이 지하 통로에 들어서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역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은 만났고, 결국 치열한 싸움의 끝에 부상까지 당해 버렸다.
왼쪽 허벅지.
무공의 기본은 하체에 있기에 치명적인 상처였다. 왼쪽 허벅지에 부상이 있는 이상 장기린은 마음 놓고 전력을 다 끌어낼 수 없다.
강하게 땅을 밟을 수 없고, 육체에 부담을 줄 수도 없다.
앞으로 있을 전투에 있어 그건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시르와는 결국 동수를 이뤘다.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약하다고 할 수 없는 철저한 동급이다. 처음의 싸움은 물론이고, 마지막에 전력을 다한 격투에서도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으니 이견의 여지도 없다.
사실 그 결과는 장기린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풍운객잔에서 지내면서 살기를 없애고 자연체로 돌아간 일, 그리고 검선을 만나 제대로 된 기초를 다듬은 일 때문에 이번엔 하시르를 확실히 압도할 수 있겠다고 내심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늘은 절대로 쉽게 뭘 안 준다더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고생을 하고 노력을 했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뜻이다.
장기린이 그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니 자신은 뭔가를 쉽게 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심지어 길가에서 그 흔한 동전 하나 주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모양인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 하나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도 하필 하시르를 만나서 부상까지 당했다.
뭔 놈의 팔자가 이렇단 말인가.
왜 하늘은 그를 도와주지 않는가.
툭. 툭.
장기린은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겠지.’
이제껏 하늘은 그를 단 한 번도 손쉽게 도와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운명을 개척하는 것!
그게 바로 장기린이 아니던가.
“반야혼.”
“……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반야혼은 천막의 입구 근처에 누워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깔끔한 무복을 입고 있음에도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아마 그게 천성인 탓일 거다.
편안한 침상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땅바닥이나 풀숲에서 자는 것이 익숙한 생활을 해 와서 그렇다.
“네가 가면 나도 할 일이 있다.”
“할 일이 있다고? 그런데 왜 여기에서 가만히 있던 거지?”
“……뭐, 모처럼의 휴식이랄까.”
“신세를 졌군.”
반야혼은 딴청을 피우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장기린은 사태의 핵심을 곧바로 알아챘다.
“지켜 줘야 할 만큼 약하진 않은데 말이다. 내가 그렇게 안되어 보였나?”
“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만.”
반야혼은 도리어 불쾌하다는 듯이 일어나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목을 옆으로 꺾었다.
“난 그냥 시간 날 때 푹 쉬었을 뿐이야. 이상한 착각은 하지 말아라.”
“뭐, 그렇다면야.”
장기린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쯧, 아무래도…… 조만간 보게 될 것 같군.”
“그런가?”
“그래.”
이틀 뒤, 아니, 이젠 내일이 된 시점에 명 제국의 명운을 건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반야혼은 당연히 황제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꽤나 귀찮은 일을 맡아서 말이야. 변두리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 해충 네 마리를 각각 박멸해야 돼.”
“아아, 그렇군. 현백과 함께하고 있었다고 했지.”
장기린은 그제야 머릿속에서 정보들의 아귀가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현백에겐 안부를 전해 줘. 이번에 고마웠다고도 해 주고.”
“네가 직접 전해라.”
“고마웠던 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고마웠다, 반야혼. 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
반야혼은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눈가를 씰룩거리더니, 휙 몸을 돌렸다.
장기린은 작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아마 현백에게 제대로 전해 줄 것이다.
반야혼은 그런 인물이었다.
“큭큭, 평범하게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이젠 진짜로 그쪽 인간이 되어 버린 모양이구만.”
“그래? 그렇게 보이나?”
“그런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
반야혼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막을 나서기 직전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다음엔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군. 죽지 말아라.”
항상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이던 반야혼치고는 드물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장기린이 변했듯 반야혼도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점점 더 변해 갈 것이다.
“아아, 그래.”
만남은 길었지만 이별의 순간은 짧았다.
장기린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리는 반야혼의 등을 바라보며 다음번의 재회를 소망했다.
☆ ☆ ☆
“장군.”
남경의 심처.
한때는 철혈의 황제가 수많은 고관대작들을 발아래 두고 호령하던 장소에 텐챠이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태사의는 여전히 부서진 채였다. 조각조각 난 원목의 파편들은 누구 하나 치우는 사람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텐챠이는 묵묵히 손을 뻗어 그 조각들을 거머쥐었다.
따끔따끔한 감각과 함께 손바닥 위에서 부서진 나무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한때는 화려하게 치장하여 황제의 권위를 빛내던 물건이 이젠 한낱 장작 부스러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텐챠이는 그 모습에서 모든 것의 무상함을 느꼈다.
“장군.”
“왜 그러지, 하시르?”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어째서 놓아주셨습니까?”
텐챠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집요했다.
벌써 같은 질문을 이틀째 듣고 있는 텐챠이로서는 질릴 수밖에 없는 상황.
하시르는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한껏 단호한 눈빛을 띤 채 텐챠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이래저래 생각할 게 있다는 이유로 피해 왔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듯했다.
“이유는 첫날 이미 설명했을 텐데?”
“놓아주고 싶었다…… 라는 것 말입니까? 그걸로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하시르의 눈빛은 차가웠다.
“상대가 다른 자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붉은 악귀라면, 일만의 병사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 목을 순순히 놓아준 것에 대해 확실한 이유를 들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차분한 감정을 유지하던 하시르.
그런데 오늘은 어째선지 극도로 흥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가 들썩거리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일생일대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쳐 버린 바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시르, 너는 내게 전사로서의 긍지를 버리라고 하는 것인가?”
바보?
물론 최중요 인물을 쓰러뜨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니 바보 취급을 당해도 반박할 수 없을 테지만, 텐챠이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은 대초원의 형제라면 당연히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
바로 전사로서의 자존심이다.
초원의 전사에게 전사로서의 자존심은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했다.
“일생일대의 숙적이다. 그런 상대가 정당한 결투도 아니고, 주변의 방해를 받아 크게 부상을 당했는데 그 기회를 잡아 목을 베었어야 한다는 거냐, 너는?”
텐챠이에게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짓누르는 태산과도 같은 거대한 기도.
익숙치 않은 명 나라로 와서 여러 가지 일을 겪는 와중에 텐챠이는 이 넓은 대전을 혼자만의 기세로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하시르도 만만치 않았다.
텐챠이 수호대를 이끌고 무림을 종횡하며 지금의 북천맹 오왕들을 직접 모아 온 하시르 역시 여러모로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시르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텐챠이가 전사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붉은 악귀를 놓아줬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패망한 원의 마지막 희망.
흑도무림인들의 총본산이 될 거라 기대받고 있는 대북천맹의 맹주.
그런 곳의 주인인 신분이라면 그건 이미 한낱 전사가 아니었다.
전사로서의 자존심보다 두 어깨에 걸려 있는 책임이 더욱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장군, 당신은…… 지금 대륙 전역에서 모여들고 있는 십만이 넘는 무인들의 대장입니다. 더불어 원 제국의 유지(有志)를 잇고 있는 분이며, 북쪽에서 자신의 터전을 잃고 자꾸만 북쪽과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초원의 형제들이 당신의 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시르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해져 갔다.
“그런데! 그런데도!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오로지 붉은 악귀, 그와의 대결 말고는 혹시 아무런 흥미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장군!!”
텐챠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전사로서의 긍지이기 때문이다.
“하시르, 눈을 떠라, 그리고 인정해라. 사실은 너도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장군……!!”
“우리의 길에 미래는 없다.”
텐챠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서로 다 알면서도 애써 피해 왔던 주제.
그들의 운명, 아니, 북천맹에 미래는 없다는 것쯤은 이미 북천맹을 세울 때부터 알고 있었다.
“북쪽에서의 지원은 없다. 칸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은 채 서방의 광활한 영토를 두고 자신들끼리 싸우는 중이고, 대초원에서는 수많은 소부족의 족장들이 연합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며 명의 군세를 피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은 남경에 있는 우리를 돕지 못해.”
북천맹이 남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명 제국을 깜짝 놀래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또한 그들을 고립시키는 한 수이기도 했다.
명 제국의 북방을 지키는 병사들은 강하다.
아직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소부족의 힘 정도로는 절대로 뚫을 수 없는 강인한 방벽이다.
“애초에 고향의 도움을 기대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지원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기반이 없다.”
“기반…….”
“나라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의 명 나라처럼 땅에 거점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 제국의 빛나는 테무르처럼 끊임없이 이동하며 약탈하는 것이다.”
명 나라와 원 제국.
그 두 나라의 차이는 극명하게 갈린다.
명 나라가 땅에서 나는 곡식들을 수확해 지금의 번영을 이루었다면, 원 제국은 이동을 멈추지 않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약탈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
쉽게 말해 농경 국가와 약탈 국가의 차이였다.
작물의 재배인가, 약탈인가.
어느 쪽이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이 남경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경이라는 땅을 번영시킬 수도 없다. 남경의 문을 연다면 곧바로 이곳은 명 나라에 장악당한다. 그렇다고 밖으로 군을 이끌고 나가자니 갈 곳이 없다.”
하지만 수확이든 약탈이든 어느 쪽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굶어 죽기 때문에…….
그렇기에 북천맹에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이 싸움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다. 하시르, 너라면 이미 알고 있었겠지.”
“…….”
하시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병력을 이끌고 일시적으로 남하해서 제대로 된 거점을 만들고 소국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랬다간 국경에 있는 병사들이 움직일 계기를 줄 거다.”
“사왕들을 움직여서…….”
“그들은 도움이 안 돼. 각지에서 자기들 살기에도 바쁘다.”
하시르는 그만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네 말뜻은 알겠다. 하지만 나는 이 땅에서 굳이 왕이 될 생각은 없다.”
북천맹의 저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남경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지켜 내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시르의 말대로 방법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을지도 모른다.
변두리의 관권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 시작한다거나, 이대로 남경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는 것뿐이다.”
텐챠이는 바위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의지라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흔적. 대원 제국의 유지를 이어 남경을 빼앗고, 명 나라를 향해 당당히 싸우고 스스로를 주장했다는 증거 말이다.”
텐챠이의 두 눈은 무섭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럼 설마…….”
하시르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그걸 끝으로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
“장군, 다시 생각하십시오.”
텐챠이는 고개를 저었다.
“더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장군!”
“너는 영매다, 하시르. 네 눈에 비치는 나의 천명은 어떤가?”
“…….”
“그렇지. 말할 수 없겠지. 왜냐면 나에게는 제왕의 운명이 없을 테니까.”
제왕은커녕, 오히려 방랑자에 가까울 것이다.
텐챠이는 오랜 세월 수만 병사들의 장수로서 활약했지만, 본인이 그걸 즐긴다거나 자신의 천명으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의사로 바꿀 수 있는 겁니다.”
“그래. 그러니까 변해 보려고 한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이 지겨운 의무를 벗어 볼까 하는 거다.”
하시르는 그 순간, 더 이상 텐챠이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텐챠이는 이미 마음을 확실하게 굳힌 것이다.
이미 대화를 통해 바꿀 만한 시기는 지난 것처럼 보였다.
“하늘신이 나에게 내린 사명은 붉은 악귀와의 싸움으로 끝이 난다. 그러니 나를 말리지 마라, 하시르. 그 싸움은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무엇보다, 심지어 북천맹의 존재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텐챠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시르는 뭔가를 단념한 듯 차가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붉은 악귀와의 싸움으로 끝.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
“북천맹은 그날을 기점으로 해산……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
“그럼 텐챠이 수호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텐챠이는 묵묵히 대답했다.
“귀향시킨다.”
대초원의 자식들은 대초원에서 살아가야 한다.
물론, 그것도 이번 싸움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승리할 경우이지만.
어찌 되었든 붉은 악귀의 싸움이 끝나면 텐챠이 수호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텐챠이는 생각했다.
“이봐, 하시르.”
텐챠이는 거기서 조금 속마음을 꺼내 보았다.
“너는 우리가 남경을 빼앗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나는 왠지 최근에 이 정도면 됐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남경을 빼앗은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시던 주군을 잃었다는 슬픔.
이젠 더 이상 전장에서 싸울 수 없다는 무력감.
나는 이렇게나 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대초원의 전사들은 이렇게나 강하다!
그렇게 세상에 외치고 싶었기에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됐다. 초원을 지배했던 대제국에 대한 추모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 사실 엄정히 따져보면 오히려 넘칠 정도였던 게 아닌가.”
텐챠이는 손에 들고 있던 태사의의 파편들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창가 쪽을 바라봤다. 황실의 대전은 대단히 넓고 거대한 지붕에 덮여 있는데도 화사한 햇볕이 구석구석을 다 비춰 주고 있었다.
옆쪽에 붙어 있는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대전 구석구석을 다 밝힐 수 있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기술이다.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처음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황궁이었으나,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 가치를 알면 알수록 황궁의 일부를 함부로 부숴선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명 제국은 이 정도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을 품 안에 안고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반면에 원 제국은 전쟁과 싸움의 기술은 발달시켰지만, 그 외에는…….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성과를 낸 건 없는 듯했다. 특히 문화 쪽에는 거의 무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훗날, 약 오백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원 제국이 쓰러진 걸 안타까워할까?
아니면, 명 나라가 생긴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기꺼워할까?
“애초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잖나. 그럼 됐지. 이 이상은 분명 과한 처사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에 대해 욕심이 있다면 스스로 해 보는 게 어떤가? 북천맹을 물려받아 다스려 보는 것도 좋겠지.”
북천맹을 하시르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리다.
현재 북천맹에 소속되어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눈을 뒤집고 달려들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하시르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제왕의 운명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가. 아까는 인간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에겐 하늘이 내려 준 사명이 따로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 명확하고 확고해서 저로서는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시르의 목소리는 텐챠이만큼이나 확고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런 면에선 너와 나는 닮아 있군.”
“…….”
“왜? 나와 닮았다는 게 싫은가?”
“그건 아닙니다만…….”
하시르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변하셨습니다, 장군.”
“변화는 좋은 거다. 바람은 항상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기에 좋은 거야.”
“그런 점도 말입니다. 예전엔 좀 더…… 바위처럼 굳건한 느낌이셨습니다만…….”
하시르는 그 뒤에 이어질 단어를 고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드러워졌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친구 중에 먼저 변해 버린 녀석이 있어서 그렇다.”
하시르의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텐챠이가 친구라고 표현하는 자.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전사로서 경험과 능력을 높여 텐챠이와 서로를 동등하게 볼 만큼 강해지고, 그 뒤에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하다가 이젠 변해 버린 사내.
텐챠이는 그와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친구…… 입니까?”
“그렇다.”
텐챠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답한 뒤,
“그러니 그 친구와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게 가장 적합한 일일 거다.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도 없는데 이 이상 싸움에 집착하는 것은…… 그저 의미없이 분탕칠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아.”
“하아, 알겠습니다.”
하시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텐챠이의 말에 납득을 하고 말았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가지고 말입니다.”
“알겠다. 그리고 착각할까 봐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싸움을 질 생각은 없다.”
텐챠이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그건 전장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호전적인 얼굴이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주 웃는 하시르.
남경의 황성 안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해 가고 있었다.
☆ ☆ ☆
남경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진군한 적룡기마대와 다시 만난 장기린이 본 것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어깨 위에 미리 다듬어 놓은 듯한 길고 커다란 목재와 넓은 천을 가지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어디선가 망치로 정을 때리는 듯한 규칙적인 타격음도 들려오고, 땅을 파서 지반을 고르게 하거나 병사용 천막을 세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진지를 구축하는 건가.’
장기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경의 남부에서 조금 동쪽으로 치우친 지역.
뒤쪽으로 꽤나 큰 산맥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고,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퇴로도 존재했다.
산맥이 둥그렇게 휘감고 있는 넓은 분지 형태의 지형이지만, 주변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지대가 높기 때문에 만약 다른 군대가 이곳을 공격하려면 웬만한 언덕을 오르는 듯한 경사로를 타고 올라와야만 할 것이다.
퇴로는 확보되어 있다.
주변이 산맥으로 빙 둘러져 있기 때문에 방어할 지역이 좁고, 더군다나 지대가 높아 적을 상대하기에 수월하다.
분명,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진지를 구축하기에 최적의 지형이었다.
“이런 곳을 잘도 찾았군. 우생이 한 건가?”
섭우생.
적룡기마대의 다섯 번째 형제이며 과감하고 철저한 전략으로 몽고병들에게 귀군사(鬼軍師)라고 불리는 뛰어난 재인이다.
장기린은 그런 섭우생의 능력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병사들 사이를 걸어갔다.
물론, 병사들로부터 백 장 정도 떨어진 거리쯤에 도달했을 때 주변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던 적룡기마대원들에게 발각되었지만, 그들은 상대가 장기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별말 없이 멀리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임무 중엔 상급자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다.
군문에 들어가 있는 자에겐 당연한 상식이다.
“대형!”
장기린이 삼천가량의 병사들 틈을 가로질러 간부들이 모여 있는 중심 부분에 도달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부운화였다.
은빛 갈기를 가진 명마 은수를 타고 주변 진지를 시찰하던 부운화는 장기린을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소식을 듣고 걱정했습니다. 창천랑과 싸우셨다더군요.”
창천랑.
푸른 하늘의 늑대.
텐챠이의 별명이다.
“그래, 그랬어. 괴물처럼 강해졌더라고.”
나름대로 농담을 한 것이었으나, 부운화의 얼굴은 진지했다.
“대형이 괴물이라고 할 정도라면 대단하군요.”
“뭐, 그렇지.”
“게다가 그 부분, 다치신 겁니까?”
평소답지 않게 굳어진 부운화의 시선이 장기린의 왼쪽 허벅지를 향했다.
장기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그는 임무호가 배려해 준 덕분에 깨끗한 새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몸의 회복력을 극도로 끌어 올린 상태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분에 일상적으로 걷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 격한 싸움이 벌어지거나 전력을 다해야 할 상황이 되면 꽤나 움직임에 지장을 받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평상시에 겉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부운화는 장기린이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건지 알아차렸다.
그것도 한눈에.
부운화의 경지를 알 수 있게 되는 대목이었다.
“운화, 너 어느새 이렇게 실력이 늘었어?”
부운화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조금, 성취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대단하네. 어쩐 일이야?”
“최근에 무공을 사용하는 적들과 만나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흘 전.
깨달음은 어느 봄날의 꽃가루처럼 갑작스레 찾아와 부운화를 변화시켰다.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큰 이상은 없습니까?”
“아아, 괜찮아. 보면 알잖냐. 멀쩡해.”
“왼쪽 다리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보폭도 한 치 정도 좁습니다.”
놀라울 만큼 정확한 안목.
장기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뒤쪽에서 검으로 찔렸어.”
“……텐챠이였습니까?”
“그럴 리가. 그 녀석이 그럴 놈은 아니잖아.”
무시무시하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부운화는 금방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렇군요. 창천랑이 그럴 성품은 아니지요.”
“그래. 텐챠이랑 정면으로 싸우다가 잠시 힘겨루기를 했는데, 그때 뒤쪽에서 다가온 어떤 자가 찔렀어.”
“잠깐. 대형, 그 말은 창천랑과 대형이 싸움을 하던 도중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는 말입니까? 대체 그게 누굽니까? 삼대천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평범한 어떤 무인이었어. 보통 병사들보다 조금 강할까 싶은 정도?”
“그런……!”
“말이 안 되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니까.”
얼마 전에 장기린이 하늘을 원망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초고수들끼리의 싸움에 끼어들어 끝내 큰 상처를 입혀 버린 평범한 무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운이…… 안 좋으셨군요.”
부운화는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운이다. 그 운 때문에 부상을 입었고, 그 덕분에 살았어.”
“그랬습니까?”
“거기서 방해꾼이 없이 끝까지 싸웠다면 분명히 이 정도 부상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다. 최소한 양패구상. 텐챠이는 그 정도로 강했으니까.”
실제로 지하 통로에서 서로 마주쳤을 때는 ‘이대로 둘 중 하나는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건 텐챠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전장에서 싸워 오다 보니 서로의 심중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텐챠이는 그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때문에 장기린은 알 수 있었다.
그 싸움이 만약 아무런 방해가 없이 지속되었다면 극단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중단되지 않았으리란 것을.
“대형이 승리를 했다고 해도 부상이 너무 심해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거야.”
부운화는 모든 걸 이해한 듯 보였다.
“대형.”
“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장기린은 잠시 부운화와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길지 않은 말이지만 그를 생각해 주는 부운화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 받은 것이다.
“그래, 고맙다.”
부운화는 그제야 평소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서로 간의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부운화는 장기린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 계신 사이에 대형을 찾아온 분들이 계십니다.”
“날 찾아왔다고?”
“예. 아마 직접 만나면 반가워하실 것 같군요.”
장기린은 잠시 그게 누군지 의아해했으나, 진영의 가장 중앙에 마련된 지휘관용의 커다란 막사에 들어가자 부운화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막사의 입구에 발을 딛는 순간,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형님!!”
밝고 명랑한, 반가운 감정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듯한 순수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장기린은 깜짝 놀랐다.
우선 형님이라는 칭호에 한 번 놀랐고, 그리고 그를 향해 순수한 호의를 뿜어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운찬?”
“형님! 돌아오셨네요!!”
후다닥 달려와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활발한 성격은 여전했다.
풍운객잔의 숙수, 강운찬.
남궁세가에선 헤어진 이후로 보지 못했던 객잔의 식구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너……!”
“으하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 반가워요, 형님!!”
“……그래, 반갑다.”
장기린은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운찬을 보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잠시 인사말을 나눈 뒤, 장기린은 운찬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겨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운찬이 먼 길을 거쳐 이곳에 왔다는 것은 또 한 사람의 객잔 식구가 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운찬의 등 뒤에서 잘생긴 얼굴의 헌앙한 청년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객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휴, 너도 오랜만이다.”
남궁휴.
대남궁세가의 후계자이면서 또한 풍운객잔의 하인이라는 극과 극의 신분을 가진 청년이다.
남궁휴는 운찬보다는 좀 더 어른스러운 대응을 하며 장기린을 맞았지만, 그 역시도 반가운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장기린은 반가운 마음에 운찬과 휴의 어깨를 철썩철썩 두드렸다.
운찬은 변했다.
어깨가 좀 더 넓어졌고, 몸매도 상당히 다부지게 변해서 이젠 완전히 사내라는 느낌이 든다.
남궁휴도 마찬가지.
열화남이라 불리며 객잔 안으로 도망쳐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거대 세가의 후계자로서 이름을 떨쳐 무림에선 이미 대단한 후기지수 취급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게 아니건만, 대단한 변화이지 않은가.
부운화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이 손님들은 장기린이 반가워하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이에요! 정말로 오랜만!”
“그래, 오랜만이다.”
“으하하! 여기까지 오느라 꽤나 고생했다구요. 남궁세가를 떠나려고 하니까 황산파랑 싸움이 벌어지지, 휴 녀석이 후계자니까 함부로 떠날 수는 없지. 그래서 사태를 어느 정도 진정시킬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다니까요?”
운찬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가만히 놔두면 한참이나 떠들 수 있는 것 같았기에 장기린이 나서서 일단은 말을 끊었다.
“휴, 운찬.”
“예.”
“네!”
두 사람은 제각각 대답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예!”
남궁휴와 운찬, 두 사람의 얼굴에 벅찬 감정이 새겨졌다.
어째서 왔느냐, 다시 돌아가라.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풍운객잔을 다시 되찾기 위한 싸움이다.
텐챠이와 삼대천에게 객잔 식구들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남경을 되찾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만년화리의 금구를 얻어 휘연을 다시 깨운다.
이 싸움은 그걸 위한 것.
그러니 객잔의 식구라면 누구도 빠질 수 없다.
장기린은 만약 그러한 싸움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할 때의 기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휘연이 상처를 입었을 때, 장기린은 자신이 그 자리에 없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아마 남궁휴와 운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이 싸움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마음의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너희들이라면 힘이 된다. 앞으로 있을 싸움을 도와줄 수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당연하죠! 그러기 위해서 왔다구요!”
남궁휴와 운찬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각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알겠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풍운객잔 식구들의 재결합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칠이랑 아팔은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서찰을 주고받았는데, 새로운 무공 스승 밑에서 잘 배우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 다행…….”
“뭣! 서찰을 주고받았어? 그건 못 들었는데?!”
장기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운찬의 목소리가 버럭 울려 퍼졌다.
“왜 못 듣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남궁휴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그, 그렇지만! 서찰을 주고받고 있던 거야? 그, 다른 것처럼 뇌안각을 통해서 정보를 듣는 거 아니었어?”
“물론 정보도 듣습니다만, 종종 안부 서신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남궁휴는 ‘지금도…….’라고 말하면서 품 안에서 작은 크기로 정갈하게 접혀 있는 서신을 꺼내 들었다.
새하얀 화선지엔 아칠, 아팔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숙한 글씨체가 먹선을 만들며 새겨져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나만 빼놓고 그런 걸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걸 내가 몰랐던 거야?”
남몰래 가동되고 있던 서신망(書信網)은 운찬에게 큰 충격을 준 듯 보였다.
운찬은 더듬더듬 말을 이으며 그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만?”
“그래도! 나만 빠져 있다는 게 기분에 거슬리잖아!”
가족과도 같은 관계 속에서 혼자만 소외되어 버린 듯한 기분은 상당히 거슬릴 터였다.
“애초에 명절이 되면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서신 하나쯤 날리는 건 당연한 예절 아닙니까. 강 형도 서신을 썼다면 아칠, 아팔들과 진작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텐데요.”
“끄응…….”
“서신을 보내려고만 했다면 얼마든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
“결국은 사람 관리를 게을리한 강 형의 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게,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운찬은 있는 힘껏 반박해 보았지만, 그 누구도 공감해 주지 않았다.
이미 운찬부터가 얼굴이 벌게진 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칠, 아팔은 잘 지내고 있다는 건가?”
“예, 객주님. 한창 바쁘게 지내고 있다나 봅니다. 글과 학문도 익히고, 무공도 기초부터 제대로 수련하고 있다는군요. 또래 친구들도 있는데, 아칠과 아팔이 사회생활은 먼저 한 덕분에 사교성이 생겨서 친구가 많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무당파라고 했나?”
“예.”
아이가 아이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건 너무나도 기쁜 일이다.
아칠과 아팔은 풍운객잔 식구들에게 있어서 모두의 자식이자 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나저나 무당파라…….’
장기린이 옆을 슬쩍 쳐다보자 부운화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즉, 아칠과 아팔은 부운화와 같은 사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새삼 또 한 번의 질긴 인연을 느끼게 된다.
“객주님, 이제 저희는…… 남경에 쳐들어가는 것입니까?”
그렇게 잠시 아칠과 아팔의 이야기를 꽃피우다가 남궁휴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래, 그렇게 될 거야. 정확한 날짜는 내일. 이미 다른 곳의 지원 병력과는 이야기가 끝났어.”
“내일……!”
남궁휴는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기대화 흥분, 분노와 경계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휴에게 있어서는 이 싸움이 첫 출진일 터였다.
더군다나 풍운객잔을 무너뜨렸던 그 ‘괴물들’과 싸우는 것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객주님.”
“음?”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궁휴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저희와 함께 온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누구지?”
장기린은 의아해했다.
남궁휴와 운찬과 함께 오다니.
그럴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저희 남궁세가에 오셨을 때 만난 분입니다만…….”
“남궁세가에서? 누구지?”
“그…… 일단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분께 다른 뜻은 전혀 없으며, 순수하게 이 싸움의 끝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알고 보면 꽤나 좋은 분입니다.”
“……네가 감싸고 싶어 한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알겠다. 누군데 그래?”
“강호에서 맹호도…… 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맹호도……?”
잠시 기억을 더듬던 장기린은 곧 한 사람을 떠올렸다.
남궁세가에서 만났던 사람.
호랑이 가죽을 통째로 뒤집어쓰고 거대한 칼을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인상 깊은 노인이다.
그때는 적으로, 돈에 고용되어 적으로 나타나 장기린과 일격의 승부를 교환했다.
“맹호도 방극……?”
“예, 맞습니다. 그분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왜?”
“그게, 객주님의 싸움을 꼭 보고 싶다고…….”
“…….”
“안 됩…… 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남궁휴는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능글맞은 남궁휴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분명 맹호도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휴가 저렇게 편을 들어 주는 것일 테고.
진심으로 친해지지 않았다면 저런 표정은 나오지 않는다.
“괜찮다. 상관없어.”
“아……!”
남궁휴가 기쁜 표정을 한다.
맹호도 방극이 함께 있는 것.
무림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 이쪽 진영에 함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남궁휴나 운찬과 친분이 있는 듯하니, 여차하면 두 사람에게도 힘이 될 것이다.
“아마 병사들처럼 명령에 따라 움직여 주지는 않겠지? 그저 옆에서 지켜보겠다는 것이지?”
“……예, 맞습니다.”
“뭐, 됐다. 대신 네 옆에만 꼭 붙어 있도록 해. 네가 관리해야 된다.”
“감사합니다, 객주님.”
남궁휴는 고개를 숙였다.
맹호도와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그보다…….”
장기린은 두 사람의 어깨에 툭, 하고 손을 얹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환영한다. 내일 힘든 싸움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난 너희가 와서 기쁘다.”
“객주님……!”
“형님……!”
두 사람은 각자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장기린, 남궁휴, 운찬.
세 사람은 비록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분명한 가족이다.
그들은 그 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객주님.”
“왜 그러지?”
“사실 이 말을 지금 드리는 게 옳은 것일까 조금 고민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남궁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따뜻하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얼어붙었다.
장기린이 의아해하며 옆을 쳐다보자 운찬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듯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침모님께…….”
남궁휴의 입에서 나온 침모라는 말.
진휘연.
그의 연인을 뜻하는 말이다.
“휘연에게……?”
덩달아 장기린의 얼굴도 굳어졌다.
“침모님께 만년화리의 금구가 전해진 듯합니다.”
“……!!”
장기린은 눈을 부릅뜰 정도로 놀랐다.
만약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어떻게……? 아니, 어디서 나서……?”
“풍운객잔에서 오랫동안 지내던 백 소협으로부터 전해져 온 소식입니다.”
“백 소협? 백연 말인가?”
“예.”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도사답지 않고 마치 시골의 청년처럼 순수했던 사내를 떠올렸다.
“백 소협이 무림맹으로 돌아간 날,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와 그것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백 소협은 구양 소저와 함께 곧바로 흑신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고…… 그렇게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항상 평온을 유지하던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황제가 만년화리의 금구를 미리 주었다.
그 철혈의 황제가.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내기 전에 사례부터 해 준 것이다.
본래 황제의 성격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저히 일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것이 당금의 황제이거늘.
게다가 그는 큰 전투를 앞둔 장기린의 신경이 분산되지 않게끔 친분이 있던 백연에게 몰래 그 물건을 전달하기까지 했다.
황제무불통지(皇帝無不通知).
언젠가 부운화가 받았다던 그 서찰의 내용이 다시금 떠오른다.
황제는 모르는 것이 없다.
장기린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다.
‘가고 싶다. 당장에라도 흑신의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애초에 남경을 되찾기로 마음먹은 것이 휘연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휘연이 이제 회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만년화리의 금구를 얻었으니 흑신의 우문환은 곧바로 약을 만들 것이고, 그 약을 먹으면 휘연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장기린은 그 자리에 미치도록 가고 싶었다.
남경? 북천맹? 삼천의 군사?
모두 뒤로 제쳐 두고 휘연이 깨어날 수도 있는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었다.
부들부들.
꽉 움켜쥔 주먹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격렬하게 떨렸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장기린의 동요된 모습을 보며 남궁휴와 운찬, 그리고 옆에 있던 부운화도 모두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 왔다.
‘하지만…….’
장기린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겠지.”
그 말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폐하는 나를 믿고 미리 포상을 해 주셨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 봤자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휘연을 되살리는 것은 온전히 흑신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지금은 장기린이 가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곳에 있겠다. 남경을 되찾겠어.”
아직도 휘연에게 가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확고하게 결론을 내렸다.
남경을 되찾는다.
북천맹을 무너뜨리고, 풍운객잔에 대한 원수를 갚고, 숙적인 텐챠이를 쓰러뜨려…….
‘그리고…… 휘연을 맞을 준비를 한다.’
장기린의 두 눈이 강하게 빛을 내뿜었다.
휘연이 깨어났을 때 더 이상 다른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더 이상은 예전의 숙적이 찾아오거나 인근의 세력 싸움에 휘말려드는 일 없이.
불안 요소가 전혀 없는, 행복하고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마칠 것이다.
독사출동(毒死出洞).
마치 독사가 굴속에서 튀어나오듯, 갑작스레 나타난 마음이다.
장기린은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마음으로…… 텐챠이를 쓰러뜨리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