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21화 (100/686)

第百十八章 ― 중인탈각(中人脫殼)

다음 날 정오.

황실에서 보내 준 지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 지다화 모용소희는 앞으로의 계획을 전해 듣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종오탁이라구요? 그…… 성문을 열어 주기로 한 배신자가?”

뒤쪽의 말은 주위 사람이 들을 수 없도록 낮은 목소리였다. 장기린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모용소희는 찝찝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배검(背劍) 종오탁. 간교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모리배로 유명한 자예요. 성격은 치졸하지만 무공은 절정을 넘은 고수고, 호북 쪽에서 유명하던 작자인데, 뭐, 배신을 할 만하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배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즉, 본래 성격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북천맹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는 것에 반해 모용소희의 표정은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같은 편의 등도 서슴없이 찌를 수 있는 배검이라면 분명 북천맹도 배신하고 뛰쳐나올 수 있어요.”

장기린은 모용소희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궁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궁휴는 거대 세가의 후계자답게 무림세가 출신인 모용소희와 손쉽게 친해졌다. 아마 서로 간에 공통점도 많고, 또한 남궁휴가 여인들을 대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장기린은 이참에 모용소희가 무림맹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그녀는 이상할 만큼 강하게 고집을 부리며 부대에 남기를 원했다.

다만 앞으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부상당한 동료들은 돌려보냈다.

화산의 육모담, 모용세가의 장남 모용소진, 소림의 계원 스님까지 모두가 돌아갔다.

부대에 남은 것은 모용소희와 무당의 명진 도장뿐이었다.

“크흠!”

남궁휴는 장기린의 시선을 받고 눈치 빠르게 곧바로 부연 설명을 했다.

“제 생각에 모용 소저는 배검의 소문 때문에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소문?”

“그 어떤 감정에도 얽매이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은 배신하기도 쉽지만, 또한 다른 이득에 혹해서 금방 다른 쪽에 붙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장기린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함께 말을 몰고 있던 부운화가 물었다.

“대형, 작전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종오탁이라는 사람은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한데 과연 그를 믿어도 좋을 것인가.

아니면 이걸로 곧장 작전을 중단하고 돌아가야 할 것인가.

“계속한다.”

장기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용소희가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장기린의 결정에 순응했다.

적룡기마대를 포함한 삼천 명의 병사들이 남경 응천부성의 서쪽 관문에 도착했을 때, 어림군과 팔기군은 마치 보란 듯이 당당하게 진영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성 내부의 북천맹에게도 보일 테지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북천맹은 성벽을 믿을 테니까 들켜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군요.”

어림군과 팔기군의 진형을 보자마자 섭우생이 한 말이었다.

“그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별문제 없을 거다.”

어찌 됐든 종오탁이 충분히 배신을 할 만한 성품이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어림군의 수장인 임무호도 그에 대해 이미 조치를 충분히 취해 두었다고 하였으니,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대로 성문은 열릴 테고, 아무런 문제 없이 내부의 황성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운화.”

“예, 대형.”

“저게 뭐지?”

장기린은 남경의 성벽 위쪽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가리켰다.

성벽의 맨 위쪽에는 큰 구멍이 일 장 간격으로 나 있었는데, 특히 가장 좌측의 구멍은 성벽 아래쪽까지 긴 석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 저건 배수구입니다.”

“배수구? 비가 올 때 필요한 건가?”

“예. 그리고 유구(油口)라고도 합니다.”

“기름구멍? 아, 혹시 공성전을 대비한 건가?”

“예, 맞습니다.”

본래 성을 지키는 입장에서 기름은 상당히 유용한 도구이자 무기였다.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상대를 한꺼번에 물러나게 만들기엔 기름처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의 육체엔 의외로 기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의 온도로 가열되면 스스로 확! 하고 불타오른다는 사실을 장기린은 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싫을 만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분명 저 성을 설계한 자는 남경이 적에게 침탈당할 위기에 처했을 경우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도 세워 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흐음…….”

장기린은 그 유구의 모습을 두 눈에 유심히 새긴 뒤 어느새 앞으로 마중을 나와 있는 어림군의 수장 임무호과 팔기군의 장수 관충을 향해 말을 몰아 갔다.

“히히히힝―!”

장기린의 말인 흑룡은 전장에서 단련된 장군의 말이다.

덩치도 다른 말보다 절반 가까이 더 크고, 마주 보고 서면 다른 말들이 압도당해 뒷걸음질을 칠 만큼 위풍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임무호나 관충의 말도 모두 쉽게 볼 수 없는 명마였지만, 아무래도 흑룡의 앞에 서게 되니 기를 펴지 못하고 위축되는 듯했다.

“오셨습니까, 장군. 그나저나 대단한 말이군요.”

임무호가 장기린의 흑룡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 전우요.”

장기린은 그런 흑룡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단합니다. 과연, 아무나 탈 수 없을 듯한 말입니다.”

“자존심이 강하오.”

“하핫, 그래 보이는군요,”

임무호는 크게 웃더니 잠시 장기린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간부들을 쳐다봤다.

부운화, 추룡, 대석, 섭우생과 진구, 거기에 강운찬과 남궁휴까지.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는 자라면 일당천의 가치를 가진 그들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임무호는 잠시 이채를 띤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장기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계획은 그대로입니다. 다시 설명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소.”

“그럼 됐습니다. 이각 후에 저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럼 팔기군과 저희 어림군은 애초에 정해진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소.”

그 뒤로도 몇 가지 사안들이 나왔으나 장기린은 단 한 번도 반대 의사를 던지지 않았다. 임무호와 관충이 오히려 의아한 시선을 던질 정도로 순순히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계획은 어림군과 팔기군이 각각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 선두를 서고 장기린의 부대는 그 뒤를 따라가는 형태였다.

좋게 말하면 대장군으로서 뒤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이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전투에 대한 전권을 앞의 두 장수에게 위임한 채 뒤만 졸졸 따라가는 역할이었다.

어림군과 팔기군이 각각 전투 준비를 시작한 뒤에도 장기린과 주변의 병사들은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각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정오에 모두가 긴장한 채 성문만을 바라봤다.

과연 종오탁은 약속한 대로 북천맹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줄 것인가.

어림군과 팔기군, 도합 사만의 병력.

장기린과 적룡기마대, 삼천의 병사들.

모든 이들의 간절한 시선 속에서…… 마침내 성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열린다!

그 순간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성문이 열린다.

일전에 파강장군 원회가 그에게 주어진 십만의 병력으로 끊임없이 두드려도 단 한 번 열린 적이 없던 성문이 드디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전군―! 돌격 준비!”

철컹! 철컹!

역시나 팔기군은 정예병이었다.

관충의 짧은 기합성에 곧바로 대열을 정비하고 무기를 꺼내 드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어림군도 마찬가지였다.

임무호의 손짓에 따라 전투를 준비하는 그들에게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어쨌거나 황실 직속의 정예들.

경험은 둘째치더라도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끼기기긱― 쿵!

마침내 성문이 활짝 다 열리자 그 안쪽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새카만 무복에 진한 노란색 겉옷을 입어서 매우 눈에 띄는 모습이다. 그는 얼굴이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볼이 통통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눈동자가 다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작았는데, 새카맣고 노란 옷을 겹겹이 입고 있는 모습이 꼭 커다란 벌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

그 사내는 성문이 열리자마자 전력으로 달려와 병사들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던 어림군의 수장에게 깊이 포권을 취했다.

“임 장군님! 약속대로 성문을 열었습니다!”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정중하다기보다는 비굴해 보였다.

그가 바로 배검 종오탁인 모양이다.

임무호는 장기린을 대할 때와는 달리 싸늘한 눈빛으로 종오탁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잘했다.”

“그럼 약속은……?”

“지킨다. 나는 한 입에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오! 감사합니다! 이제부턴 충심을 다해 명 제국을 섬기겠습니다!!”

힘차게 외치는 목소리엔 한 점 부끄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일순, 뒤쪽에 시립하고 있던 병사들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배신자를 누가 좋아할까.

그런데 차가운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종오탁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단, 가족들은 아직 보내 줄 수 없다. 이번 싸움이 무사히 끝나면 돌려보내 주지.”

“아, 알겠습니다. 장군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

“모쪼록 제 진심만은 알아주시기를…….”

굽실거리는 종오탁을 앞에 두고 임무호는 노골적으로 못 믿는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쌍호(雙虎)!”

“예!”

임무호가 부르자 그의 뒤를 지키던 호위무사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어림군 특유의 황색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두 사람 은 형제인 듯 우직한 인상의 얼굴이 꼭 닮아 있었다. 발걸음이 가볍고 자세가 차분한 걸 보니 상당한 실력자처럼 보였다.

“이자를 데리고 있도록. 시야에서 떼지 마라.”

“예!”

두 사람은 얼굴의 인상과 마찬가지로 우직하게 대답한 뒤 종오탁을 각자 양쪽에서 포위하듯이 붙잡았다.

마치 죄인을 다루는 듯한 대우였으나 종오탁은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순순히 따라갔다.

임무호는 더 이상 종오탁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역도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역도들의 목을 많이 칠수록 내가 직접 포상을 내릴 것이다. 진겨억―!”

“와아아아아―!”

어림군의 병사들은 모두 용기백배하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팔기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관충이 자신의 커다란 언월도를 앞으로 휘두르며 말에 박차를 가하자 삼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팔기군―! 역도들을 섬멸하라―!”

“우오오―!”

어림군 일만.

팔기군 삼만.

총 사만 명의 진군은 어마어마한 진동을 동반하며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자. 사만 명이다. 사람이 단 백 명만 모여서 잡담을 나눠도 듣고 있기가 힘들 만큼 시끄러운데, 사만 명이 일제히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면 어떻겠는가.

게다가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간다면?

그들의 발소리만으로도 마치 남경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진동이 생겨나고 있었다.

두두두두―

“스, 습격! 습격이다!”

“막아! 막아랏!!”

“으아악……!”

성문을 지키고 있던 북천맹의 병사들은 명확한 지도자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애초에 그들의 지휘자가 바로 종오탁이었다.

한데 지휘자가 느닷없이 성문의 빗장을 열어버리고 사라져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구심점 없이 쓰러져 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종오탁! 이 개자시익―!”

“으아악……!”

한때 종오탁의 수하로 있던 무인들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채고 절규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종오탁이 미리 병력을 분산시켜 놓은 탓에 지금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고작해야 백 명 남짓.

그 정도 숫자는 선두에 선 삼만 명의 팔기군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했다.

팔기군은 순식간에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남경의 시내를 향해 노도와 같이 진격했다. 중간 중간에 미리 배치되어 있던 북천맹의 병사들이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별다른 저항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집단전이 되어 버리면 무림인들은 병사들의 적수가 아닌 것이다.

돌진하던 팔기군의 제삼진(第三陳)이 일제히 화살을 쏘고, 화살이 그치는 순간 순식간에 제일진(第一陣)이 들이닥쳐 모두를 베어 넘겼다.

진격의 속도는 빨랐다.

팔기군과 어림군의 선두가 남경 도읍의 입구인 청명문(淸明門)에 도달하는 데까지 걸린 시각은 불과 이각.

상궁사(湘宮寺)를 마주 보고 있는 삼도(三道)만 지나면 이제 곧 황성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크핫핫! 북천맹도 별거 아니었군!! 이대로 곧장 황성까지 가자!”

관충의 호탕한 외침이 선두에 선 모두에게 들려왔다.

병사들은 한층 더 신이 나서 돌진했고, 기세가 끝까지 올라간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북천맹의 병사들을 볏단 베듯이 손쉽게 쓰러뜨렸다.

“이상하군…….”

한편, 임무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쉬워.”

아무리 종오탁의 배신으로 허점이 생겼다고는 해도 진격이 지나치게 쉽다.

앞을 막은 병력이라고 해 봤자 고작 백 단위의 숫자뿐. 북천맹은 어림군과 팔기군이 서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텐데, 이런 식으로 언제 뚫려도 이상하지 않게 무방비하게 놔뒀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성벽을 믿는다고 해도 이건 지나치지 않나? 설령 우리가 정석적인 병법으로 성벽을 넘으려고 했어도 백 단위 숫자로는 막을 수 없을 텐데?’

임무호는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북천맹에게 성벽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사정이 생겼거나, 아니면 이건 모든 사실을 미리 짐작한 함정이란 것.

‘하지만 그걸 미리 알았다면 종오탁이 성문을 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잠깐, 함정?’

함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생각났다.

한 번 기세를 탄 병사들의 진군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가고 있다.

청명문을 지났고, 이젠 곧 삼도다.

삼도.

세 개의 길이라는 이름 그대로, 황성으로 연결되는 대로에 도읍 주변을 빙 두르는 길 두 개가 이어지는 곳이다.

‘삼도…… 삼도……!’

말을 달리는 와중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임무호.

그리고 그는 쌍호의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종오탁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관 장구운―!”

진군을 명하던 때와 같을 정도로 크게 외치자 옆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달리던 관충이 고개를 돌렸다.

“멈춰야 합니다! 속도를 줄이십시오!!”

관충은 알아듣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만 명의 함성 소리 사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관충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임무호는 손으로 정지 신호를 보내며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마침 정면에서 나타난 천여 명의 적군을 보고 흥분한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 때문에 관충에게 의사를 전달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우오오오―!”

“모두 죽여라아―!”

그 틈.

시간으로 따지면 반 각도 안 될 그 짧은 틈이 선두 병력의 생사를 갈랐다.

“멈춰엇―!”

임무호의 절규는 인근의 어림군에게만 통용되었을 뿐이다.

관충을 선두로 한 삼만 명의 팔기군은 곧장 기세를 타 정면의 적군에게 돌진했고…….

갑자기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선두의 일천 명가량이 순식간에 말 다리가 부러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아아앗?!”

“장군! 장군님이 쓰러지셨다!!”

“멈춰! 멈…… 끄아악!!”

순식간에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란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바닥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져 내렸고, 지반을 잃은 선두의 기마대가 그것에 휩쓸려 일제히 넘어졌다.

전력을 다해 뒤를 쫓아오던 병사들이 넘어진 기마에 걸려 다시 한 번 넘어지고, 그 뒤의 병사들은 멈추려고 하지만…… 뒤쫓아오는 만 단위의 병사들에게 떠밀려 넘어지거나 혹은 짓밟혔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급하게 속도를 줄인 팔기군은 간신히 진군을 멈췄지만, 그땐 이미 선두의 부대가 천 단위의 사상자를 낸 뒤였다.

“전군! 당황하지 마라! 대열을 갖춰! 주변을 경계해라! 앞 열의 병사들은 부상자를 수습해!”

임무호가 정신없이 명령을 내리는 사이, 함정에 빠져 쓰러졌던 관충이 위로 기어 올라왔다.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고, 자랑스럽게 기르던 긴 수염은 엉망이 된 채였다.

관충은 주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자신의 친위대를 보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간특한 놈들……!”

정면으로 싸울 것만 생각했지, 설마 도시 내부에 이런 함정을 설치해 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관충이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가 함정을 빙 둘러서 적들을 치라고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철컹철컹.

쿵! 쿵! 쿵! 쿵!

“뭣……!”

주변 삼면(三面)에서 일제히 화살이 날아올랐다.

피슈슈슈슉―!

하늘을 까맣게 뒤덮는 화살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일만.

평소에 화살에 대한 철저한 대응 훈련을 받은 어림군과 팔기군은 곧바로 왼팔에 차고 있던 작은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앞서 함정으로 부상을 당했거나 말단 병사라서 방패를 지급받지 못한 자들은 날아오는 화살에 속절없이 꿰여 버렸다.

“으아아악……!”

다시 한 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가을의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피슈슈슉―!

“큭! 멍하니 서 있지 마라! 정신 차려! 화살은 일정한 방향에서 날아온다!!”

그때, 임무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화살은 그치지 않았다. 처음엔 삼면에서 동시에 쏘았지만, 이젠 일정한 주기로 돌아가면서 화살을 발사하고 있었다.

임무호는 상대의 지휘관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보기에는 쉬워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번갈아 가며 공격을 가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공격만 봐도 상대 쪽 병사들이 얼마나 훈련을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휘관의 지배력이 말단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뻗쳐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구운―! 돌격한다아아―!”

“잠깐! 관 장군!!”

임무호가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피가 머리끝까지 솟은 관충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팔기군은 무너져 내린 함정과 함정의 사이에 난 샛길을 통해 돌진해 나갔다.

부상당한 말은 포기하고 몸소 앞으로 달려 나가는 관충과 그의 뒤를 따라 분노로 몸을 떨며 달려 나가는 팔기군에게선 굉장한 패기가 느껴졌다.

“와아아아―!”

“죽여랏! 죽여 버렷!!”

흥분한 팔기군은 이미 주위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이거대로 전보다는 나은가?’

이대로 함정의 뒤쪽에서 화살 받이로 있는 것보다는 일단 돌격해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팔기군은 이제 정면에 보이던 천여 명의 북천맹 병사들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달려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멈춰 있는 천 명쯤은 마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박살 내고 지나가 버릴 것 같은 순간, 천인 부대를 지휘하던 삿갓을 쓴 사내가, 등 뒤에 차고 있던 가늘고 긴 대도 한 쌍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허공에서 칼날을 교차시키는 신호를 보냈다.

“뭣……?”

관충이 의아한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멈춰 서 있던 천인 부대의 뒤쪽에서 거대한 물체가 날아올랐다.

“허엇……!”

황급히 몸을 숙인 관충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그것은 뒤따라 달려들던 병사들의 몸을 박살 내며 땅에 내려앉았다.

콰아앙!!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바닥을 내리찍은 건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통나무였다.

“이럴 수가……!”

임무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신음을 흘렸다.

졸지에 통나무로 퇴로가 막힌 채 고립된 관충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북천맹의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을 쏘아대고, 관충은 언월도를 정신없이 휘둘렀지만 화살을 다 쳐 내지 못한 채 서너 개의 화살을 몸에 박아 넣고 네 발로 기듯이 통나무를 넘어 도망쳤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좌측과 우측에서 각각 통나무가 대여섯 개씩이나 더 날아왔고, 방향과 거리를 바꾼 화살들이 양쪽에서 비 오듯이 쏟아졌다.

무작정 돌진을 하다가 통나무로 만든 벽에 갇힌 꼴이 되어 버린 팔기군은 우왕좌왕하다가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꽂은 채 하나둘 쓰러져 갔다.

앞이 막혔다.

양옆도 막혔다.

하늘에선 폭우가 내리듯 화살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뒤로 퇴각을 하려 해도…… 이미 꾸역꾸역 밀려들던 만 단위의 병사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퇴로가 없는 함정.

도저히 헤쳐 나갈 방법이 없는 외통수였다.

“이건, 즉흥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임무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절묘한 곳에서 기다리던 병력의 배치.

마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대규모로 준비되어 있던 함정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쪽을 공격하는 북천맹의 병사들.

즉, 요약하자면…….

북천맹은 그들이 오늘 이 시간에 남경으로 진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이이……! 종오타악―!”

임무호가 핏발 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었다.

일만 명의 어림군에게 포위되어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글거리던 북천맹의 배신자가!

“이놈! 감히 나를 속인 것이냐!!”

한 번 생각의 방향이 바로잡히자 모든 것의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절묘한 때에 배신하여 임무호에게 접촉한 종오탁.

너무나 쉽게 뚫려 버리던 성벽 인근의 병사들.

진격을 하는 도중에 이상하게 예민한 모습으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던 종오탁.

그리고 삼도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던 북천맹의 병력.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임무호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음에도 새카만 무복에 샛노란 상의를 걸친 종오탁은 평소의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무서울 만큼 냉정하고 차분했다.

종오탁은 만두처럼 동그랗고 허연 얼굴 위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몸의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알았나 보지?”

채챙!

명령받은 대로 종오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쌍호가 각자 검을 뽑아 종오탁의 목에 겨눴다. 손만 조금 삐끗해도 곧장 목울대가 잘려 나갈 것 같은 위험한 위치였다.

천애고아로 태어나 비천한 하인에 불과했던 형제를 구원해 준 사람이 바로 어림군의 수장인 임무호였다.

쌍호는 임무호에게 무례한 자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놈! 무례하다!”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서슬 퍼런 장검이 목울대에 닿아 있음에도 종오탁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자 임무호의 얼굴에서 차츰 노기가 가라앉아 갔다.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는 상대가 있다.

소리를 질러도 겁을 먹지 않고, 보복을 할 거라 위협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인종 말이다.

임무호는 종오탁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화를 가라앉혔다.

이런 자에게 화를 내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진상을 규명하고, 처절하게 복수를 해 주는 것이 더욱 올바른 대처법이라 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완전히 마음을 가라앉힌 임무호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가족은 내 손안에 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구해 갈 수 없도록 손을 써 두었지. 네가 보낸 여인과 자식들이 네 친자식이라는 것도 이미 확인을 했다.”

배검 종오탁이라는 비열한 위명을 쌓은 상대를 무턱대고 신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임무호는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고, 그 결과 임무호가 진짜 처자식을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 작전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설마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임무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뭘 모르시는구만요, 장군 나으리.”

종오탁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쌍호의 검이 한층 더 목에 가까워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예전에 삼국시대에 한중왕이 한 말이 있잖습니까? 처자여의복(妻子如衣服)이라고 했던가요?”

“……!”

임무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삼국시대 한중왕 유비의 말.

정확히 말하자면 처자여의복(妻子如衣服) 형제여수족(兄弟如手足)이다.

처와 자식은 의복과 같아서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꿰맬 수 있지만, 우정으로 이어진 형제들은 한 번 잃어버리면 회복할 수 없다는 뜻.

어찌 보면 더없이 잔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시절의 유비는 처자식보다 의형제와 수하들을 더욱 아꼈다.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가는 중에도 가족보다 형제들을 더욱 챙겼을 정도다.

지금 눈앞에 있는 종오탁이 굳이 그 고사(古事)를 인용했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

“네놈, 정말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저열한 놈이구나.”

즉, 처자식은 이미 버릴 마음이었다는 소리다.

임무호는 그 이유를 알아채는 순간 눈앞의 남자를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쌍호.”

“옛!”

“죽여라.”

쩌어엉!

“……!!”

이미 종오탁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쌍호로서는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팔목만 살짝 비틀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쌍호가 팔을 비트는 속도보다 종오탁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큭……!”

“크읏……?”

쌍호는 저릿해진 손목을 왼손으로 감싸 쥐며 각자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종오탁의 발검은 놀랍도록 빨랐다.

목 앞에 드리워져 있던 두 개의 검을 모두 쳐 내는 동작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까부터 계속 참고 있었는데, 어디에 감히 검을 들이대는 거냐. 건방진 놈들.”

휘리릭―!

피슉!

“크앗!!”

쌍호는 각자 팔목에 가느다란 검상을 입고 말았다.

엄청난 쾌검.

종오탁은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두른 뒤, 어느새 검끝을 다시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놈……!”

“죽이겠다!!”

쌍호는 분개하며 재차 달려들었다.

쌍호는 황실 금군을 가르치는 교두에게 체계적으로 배우기도 했고, 그 뒤로 임무호가 직접 구해다 준 상승 무공도 익혔다.

각자 일류 고수의 수준은 훨씬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인 것이다.

더군다나 피가 이어진 형제인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합격술은 금의위 최고수인 공보하도 ‘빈틈이 없다’고 평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따당! 따다당!

“차핫!”

“하앗!”

좌측에서 한 명, 우측에서 한 명.

두 사람의 합격술로서는 정석인 방식이지만, 워낙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탓에 빈틈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종오탁은 다 막아 냈다.

압도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차이가 있는 듯 쌍호의 검은 종오탁의 몸에 닿지 않았다.

“제법이구만! 하지만 부족하다!”

피슉! 피슈슉!

종오탁이 한 마리의 벌처럼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검을 떨치자, 마침내 쌍호의 가슴과 어깨에서 각각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얕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쌍호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임무호의 앞을 막아서는 듯한 형태로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임 장군 나으리, 날 너무 우습게 본 거 아니오?”

종오탁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검끝을 어깨에 툭툭 두드렸다.

배검 종오탁.

하북 쪽에선 꽤나 이름난 절정고수였으며, 거듭된 배신의 여파로 무림의 공적이 되지만 않았다면 아마 한 지역의 패주를 다투는 위치에 올라서기에 충분했을 터.

배검은 그 정도로 강했다.

북천맹은 그런 그의 무공을 높이 평가했기에 서쪽 성문을 지키는 큰 중임을 맡겼던 것이다.

“자, 어림군은 다들 화살을 피하느라 바쁘시고, 쌍호라는 놈들은 이 몸을 막기엔 역부족이고……. 이젠 어쩔 겁니까, 장군?”

“…….”

“하하, 이참에 잡담 좀 해 볼까요? 북천맹은 철저하게 실력과 실적을 중시해서 말입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잘 찾지 못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야망이 있다면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배신과 반역을 거듭하며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해 온 종오탁다운 생각이었다.

임무호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이를 악물고 목 뒤에 너무 힘을 주어서 그랬다. 그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종오탁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문을 여는 배신도…… 네가 계획한 것이었나?”

“뭐, 그건 계획이랄까, 그냥 발안만 했달까. 나머지는 높으신 분께서 다 완벽하게 처리해 두셔서 말입니다. 거기 계신 장군님께선 순진하게 다 믿어 주셨고.”

“이놈……!!”

“서쪽 성문을 맡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 올라가려면 편법을 써야 해서 말이죠. 이럴 때 장수의 목 하나 정도 가져가면…… 참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종오탁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입맛이 돋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큼,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종오탁.

그에 따라 임무호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쌍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쌍호가 약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무(武)를 위해 키워진 두 사람은 어림군 수장의 등을 지키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강한 사내들이다.

다만 종오탁이 예상 밖으로 너무 강한 것이었다.

강호의 무뢰배들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았는데, 설마 쌍호를 동시에 당해 낼 수 있을 만큼 강할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실책이었다.

“이 더러운 놈…….”

임무호는 자신의 검에 손을 얹고 망설였다.

이상적인 장수는 분노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하는 법이다.

그 역시도 어림군의 수장을 맡고 있는 만큼 상당히 강하다고 자부하지만, 쌍호보다는 강하지 못하다.

즉, 종오탁의 적수는 더더욱 안 된다는 뜻.

임무호는 종오탁의 등 뒤를 쳐다봤다.

그가 자랑하는 일만의 어림군이 있는 곳.

그런데 그곳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위험…… 하군.’

임무호는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앞은 절제절명의 위기에 빠진 관충과 팔기군.

뒤쪽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발이 묶여 버린 어림군.

그리고 그 틈새에 자신이 끼어 있었다. 어림군의 간부들 중 몇 명이 이상을 눈치채고 다가오려 하고 있지만, 그들이 다가올 때쯤엔 이미 종오탁이 모든 것을 끝낸 후일 듯했다.

“뭘 보십니까? 뒤에 있는 자들이 도우러 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종오탁은 ‘파하핫!’ 하고 비열한 웃음을 토해 냈다.

“아아, 나는 이럴 때가 가장 좋더란 말이죠. 최후의 최후에 배신당해서 갈 곳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란…….”

종오탁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부르르 떠는데,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종오탁의 모습이 너무나 기괴했다.

그렇게 싱글싱글 웃다가 갑자기 팟! 하고 뛰어드는 종오탁.

독침을 찌르려는 벌처럼 달려드는 종오탁에게 쌍호가 황급히 반응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종오탁은 슬쩍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검을 휘둘러 두 사람의 허벅지 부근을 삭― 하고 베어 냈다.

“크읏!”

“크앗!!”

핏물이 뿜어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허벅지.

특히 안쪽 부근은 어깨와는 다르다.

중요한 혈관이 지나가고 있는 곳이며,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곳이기 때문에 출혈량이 엄청난 급소인 것이다.

“파핫핫! 장군님, 목을 내놓으십시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심하던 임무호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채앵!

“장군님!”

“안 됩니다, 장군님!”

임무호는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쌍호를 양쪽으로 밀어젖히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관충과 팔기군은 엄청난 공세에 휘말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어림군은 발이 묶였으며, 지휘관인 그는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휘관씩이나 되어서 부하의 목숨을 방패로 살아남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쩌어엉!!

“크읏……!”

임무호는 단 일격 만에 자신과 종오탁의 실력 차를 깨달았다.

단체전이라면 모를까, 일대일의 무를 겨루는 자리에선 군문의 무장보다 무림인이 유리한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종오탁은 강했다. 이런 자의 검을 무려 백 초 이상 막아 낸 쌍호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자아, 그 목, 받아 가겠습니다!”

쩌엉! 쩌엉! 쩡! 쩡!

“크…… 으…… 으읏……!”

노도와 같은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임무호는 그때마다 간신히 막아 냈지만, 등골이 뻐근하고 자세가 점점 무너지는 게, 금세라도 균형이 무너져 칼에 몸이 꿰뚫리고 말 것 같았다.

쩌엉! 쩌엉! 쩌어엉!!

‘위, 위험……!’

마침내 연이은 공세를 버티지 못한 그의 다리가 풀리며 칼끝이 목을 베어 내려는 순간,

“음?”

기이하게도 승부를 낸 거나 다름없는 종오탁이 갑자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무슨……?”

임무호가 얼떨떨해하면서 뒤로 비척비척 물러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체 왜 그를 살려 준 것일까.

그런 의문을 느꼈으나 정작 당사자인 종오탁의 행동은 이상했다.

종오탁은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함정이 있을 것을 알면서 그의 뒤를 따라왔을 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무슨……?”

종오탁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건 동남쪽.

현재 팔기군을 포위하고 있는 삼도(三道)의 적군들 중 한쪽이 있는 곳이었다.

드드드드―

“무슨……?”

잠시 후, 임무호 역시도 느꼈다.

무장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있다.

강한 군대가 내뿜는 패기(覇氣).

십 리 밖에서도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만한 엄청난 기운이 동남쪽 방향에서 세상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콰과과광!

하늘을 가르던 화살비가 뚝 그치고,

팔기군의 진로를 막고 있던 커다란 통나무가 쾅! 하고 뭔가에 부딪쳐 박살 난 채 흩어졌다.

“……!”

그 자리를 지키던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통나무를 박살 내며 나타난 자.

그건 흑색의 신마를 타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내였다.

“장…… 군?”

임무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장기린이 갑자기 동남쪽의 방향에서 나타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아니, 장기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적룡기마대와 그를 따르는 삼천 명의 기마대가 질서정연하고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화살을 쏘아대던 북천맹의 병사들을 무참히 쓸어 넘기고 있었다.

“활을 놓고 칼을 들어!”

“막아랏! 막…… 크앗!”

적룡기마대의 검에 베이고, 병사들의 창에 찔렸으며, 최후엔 말과 사람들에게 밟혀 허무하게 생명을 마감한다.

따각따각.

장기린이 탄 거대한 흑색의 말이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대단한 주목력.

한 남자가 전장에 나타난 이후로 싸움은 모두 그쳤다.

모든 이들의 눈이 그를 주시했다.

통나무 너머에서 화살을 쏘아대던 북천맹 병사들의 눈도, 삼만의 팔기군과 일만의 어림군도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무호는 사십 장이 넘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린이 정확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심해 보이는 두 눈이 그가 있는 곳을 향했다.

히히힝―!

그리고 갑자기 그의 말이 앞발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다시금 흑룡의 앞발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갈색 빛의 무언가가 허공에 긴 직선을 그렸다.

쉬이이익―!

“……!”

임무호는 그 ‘물체’가 자신의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에야 알았다.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퍽! 하고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커허……?”

임무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흑색의 무복에 샛노란 상의.

그 악취미적인 의복 위로 항상 싱글거리던 비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져 있다.

임무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종오탁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당연했다.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렸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쿨럭! 이, 이런, 이럴 수가……!”

종오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거세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멀리 사십 장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장기린을 응시했다.

철컹!

종오탁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평생 배신을 반복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해 온 사내.

처자여의복이라는 말 그대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피로 이어진 가족마저 가차없이 버릴 수 있었던 자가 마지막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런…… 크륵, 괴물이…….”

종오탁이 마지막으로 핏물과 함께 내뱉은 말은 장기린에 대한 불신과 경악이었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종오탁.

임무호는 그 모든 과정을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봤다.

“저렇게나 강하다니……!”

흑색의 거대한 말을 타고 나타난 장기린.

그는 나타나자마자 홀로 아름드리나무를 박살 냈으며, 그 뒤에 던진 투창으로 거리가 사십 장이나 떨어진 상대를 죽여 버렸다.

그 강렬한 등장은 모두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심어 주었다.

따각따각.

흑룡이 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화살 비는 그친 상황.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팔기군 병사들은 그런 장기린의 앞을 막지 못하고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비켜 주었다.

“관 장군.”

“…….”

팔기군의 장수, 관충은 대여섯 개의 화살을 몸에 꽂은 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장기린을 맞았다.

“팔기군을 좌측으로 진격시켜 주시오. 화살이 멈춘 지금을 놓친다면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오.”

“…….”

“관 장군!”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관충에게 장기린이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소리를 질렀다.

관충은 망설이고 있었다.

애송이라고만 생각했던 장기린이 아무리 능력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도, 명색이 관록있는 노장으로서 그걸 인정하고 순순히 도움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장군의 명령이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관충의 표정이 변했다. 장기린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경험 많은 관 장군에게 부탁하겠소. 나를 도와주시오.”

비록 말 위에서지만 양손을 모아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장기린.

그건 오랜 시간 군을 이끌어 온 장수에 대한 예의이며, 주변에서 보고 있을 수하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리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내 비록 이런 꼴이지만, 대장군을 충실히 보필하겠소.”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난 관충은 장기린보다 더욱 정중한 예를 표하며 허리를 굽혔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충은 지금 처음으로 그를 ‘대장군’이라고 불렀다.

그건 아마 그를 상관으로서 인정했다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었다.

“전군―! 대장군의 명에 따라 방향을 바꾼다!”

“오오!!”

“화살은 이제 없다! 통나무 따위! 들어내 버려!!”

“와아아아―!”

관충의 호탕한 외침에 용기백배한 병사들이 순식간에 먹이를 둘러싼 개미 떼처럼 통나무를 들어 멀찍이 내던져 버렸다.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못할 게 없는 법이다.

비록 거듭된 함정과 화살 공격으로 오천이 넘는 병사들이 허무하게 쓰러져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에겐 이만 오천에 가까운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아름드리 통나무 다섯 개?

이만 오천 명이 있으면 그 정도는 장애물조차 아니었다.

통나무 방벽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팔기군은 노도와 같이 진격했다.

방벽이 사라지자 황급히 진형을 뒤로 물리고 있는 북천맹의 병사들을 쫓아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해 갔다.

“대형!”

두두두두―!

그사이, 삼도의 우측 병력을 해치우며 달려온 적룡기마대와 병사들이 장기린이 있는 곳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기린은 자신의 진천룡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우측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진군 방향을 오른쪽으로 수정하라는 신호였다.

두드드드―

히히힝!!

부운화를 필두로 한 적룡기마대원들은 그 신호에 맞춰 부드럽게 방향을 선회했다.

사실 천 단위가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향을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세 사람만 나란히 달려도 가장 안쪽에서 도는 사람과 가장 바깥에서 도는 사람 사이에는 꽤나 큰 격차가 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천 배인 삼천 명이 되면 어떻겠는가.

십 열 종대로 서면 무려 삼백 줄이 되고, 삼십 열 종대로 서도 백 줄이 되는 숫자다. 당연히 가장 안쪽과 가장 바깥쪽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자칫 잘못 방향을 틀었다간 안쪽의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에게 밀려서 넘어지고, 바깥쪽의 병사들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나가 버릴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두두두두―!

“우오오―!”

하지만 장기린의 병사들은 그것을 무리없이 해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부드럽게 방향을 선회한 그들은 곧장 장기린이 지시를 내리는 대로 정면의 북천맹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히히힝―!

“가자!”

그리고 그 선두에 장기린이 있었다.

앞을 막아서고 있던 통나무 방벽은 장기린이 진천룡을 한 번 휘두르는 순간, 절반으로 쩍! 하고 쪼개졌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짓쳐들어 가는 장기린.

그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검을 휘두르려 하는 북천맹의 무인 세 사람이 보였다.

“어엇……!”

“무, 무슨……!”

장기린은 무심하게 정면을 바라본 채 진천룡을 휘둘렀다.

푸화악―!

피가 튀어올랐다.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를 일격에 가장 앞에 서 있던 북천맹 무인 세 사람이 순식간에 상체가 잘린 채 비스듬하게 쓰러졌다.

“우와아악―?!”

뒷줄에 있던 북천맹의 무인들이 당황하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흑색의 신마.

거기에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장기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두근― 두근―

장기린은 진천룡을 쥔 오른손으로부터 거센 박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진천룡.

명 황실 제일의 검장(劍匠)이 최선을 다해 만든 병기였다.

살육에 특화되어 있으며, 피를 보면 볼수록 날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전쟁터에선 그만큼 효율적인 병기도 없을 것이다.

장기린은 진천룡의 손잡이를 옆구리에 붙이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 오래 끌어선 안 된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지금의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도…….

어느 쪽이든 그는 지금의 싸움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만 했다.

장기린의 두 눈이 번쩍 빛나고, 고삐를 잡아당기자 잠시 뒷발을 끌어 힘을 모은 흑룡이 전력을 다해 앞으로 돌진했다.

쒜에에엑―!

앞으로 쏘아지는 진천룡의 파성추 같은 칼날이 정면에 있던 십여 명의 무인을 휩쓸고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 냈다.

푸화아아악―!

잔인한 광경이 주변의 시선을 압도한다.

시뻘건 핏물이 비산하며 박살 난 육신의 조각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무, 무슨……?!”

“괴물……!!”

단 일격에 그의 앞에 넓은 길이 생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병사들은 모두 얼굴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강한 것도 어느 정도여야 납득이 되는 거다.

일격에 십여 명을 박살 내는 무시무시한 힘.

전신(戰神)이다.

장기린이 보여 주는 신위는 이미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운화!”

“예, 대형!”

뒤따라오던 부운화가 한 쌍의 장군검으로 유려한 반원을 그리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목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추룡! 대석!”

“예잇!”

“예에, 대형!”

추룡의 황룡창 언월도가 해왕십삼기의 막강함을 뽐낸다.

대석의 쌍룡창이 육중한 힘을 담아 상대를 박살 낸다.

“진구!”

“예에엣!! 저 여기 있어요!!”

하하, 웃으며 작살과도 같은 모양의 적룡창을 사방으로 내찌르는 진구.

그러자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던 무인들이 가슴이 뻥 뚫린 채 우수수 뒤로 넘어갔다.

이곳에 없는 우생을 대신하려는 듯 평소보다 훨씬 거친 모습이었다.

장기린은 외쳤다.

그의 형제들.

적룡기마대가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너희들, 내 등을 지킬 수 있겠나!”

“옛!!”

적룡기마대 백오십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장기린은 그 대답을 들은 뒤에 흑룡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렸다.

파앗!!

그러자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흑룡.

장기린은 통나무를 베어 내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한 사람을 향해 짐승처럼 포효했다.

“하―시―르――!”

포효를 들은 것일까.

천인대의 뒤쪽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삿갓을 쓴 사내가 살짝 고개를 들어 장기린을 바라보았다.

장기린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텐챠이가 적의 수장이기는 하나, 실제로 휘연을 벤 것은 하시르였다.

그 당시에는 휘연의 안위가 먼저였기에 돌아가는 것을 묵인했으나,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우우웅―

주인의 동요를 느낀 진천룡이 울었다.

상대는 삼대천의 하시르.

부운화에 버금가는 장수이자 무림십대고수 이상의 무력을 가진 강자였다.

방심은 금물.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한다.

다그닥― 다그닥―

흑룡이 한층 더 다리에 힘을 가하고,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가 강력한 기세가 되어 전신에서 뿜어졌다.

뽑아 들고 있던 쌍도를 눈앞에서 십자 형태로 교차시키는 하시르.

후우우웅―!

장기린은 전력을 다해 진천룡을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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