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22화 (101/686)

第百十九章 ― 만시지탄(晩時之歎)

깊고도 깊은 어둠 속.

지저(地底)의 차가움을 그대로 간직한 태고의 동굴에선 생명의 신비가 태동하고 있었다.

눈앞을 흐릿하게 만드는 뿌연 연기와 코끝을 저리게 만드는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

이건 그 어떤 지역과도 다른 이곳만의 특색이었다.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생명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불교를 창시한 석가?

유학을 크게 부흥시킨 공맹?

아니, 성자(聖子)라 불리는 그들로서도 모두 불가능하다.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륙 전역에서 몇 안 되도록 손꼽히는 의원뿐일 것이다.

“드디어……!!”

노인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일이지만, 그래도 성공할 확률은 솔직히 삼 할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일세의 보물인 재료가 없었다면 삼 할은커녕 반 푼의 확률조차 없었을 터.

이미 죽음에 다다른 인간의 생명력을 직접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은 기나긴 그의 인생을 되짚어 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 긴……?”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시간 자다가 일어난 사람 특유의 몽롱한 말투에선 지금 그녀의 상태에 대한 당혹감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피부가 창백해 보일 만큼 하얗다. 얼굴은 도자기의 표면처럼 반짝거리는 빛이 난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위로 아직 잠에서 덜 깬 사람 특유의 멍한 눈빛이 드러났는데, 그런 그녀의 얼굴이 동굴 안을 밝히는 은은한 등불과 잘 어울려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그녀는 얼음 관 안에 누워 있다가 이제 막 일어난 참이었다.

손을 대면 피부가 그대로 붙어 버릴 것 같은 극한의 장소에서 그녀는 무려 일 년 가까이를 보냈다. 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얼음 관에 눕기는커녕, 그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며 동굴 밖으로 얼른 도망치고 말 것이다.

이곳은 그 정도로 추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잠에서 깬 그녀는 이곳을 조금도 춥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꽝꽝 얼어붙은 얼음 관 위에 있다는 것도 의식을 찾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 알아차릴 만큼 여인은 온도 변화에 무덤덤했다.

여인은 상체를 일으킨 채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이내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진…… 휘연…….”

이름을 입밖으로 내는 순간, 온갖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오래전의 추억들.

힘들었던 일.

시련.

그리고 최근에 얻은 행복과, 그 행복을 방해하는 큰 사건까지.

“아……?”

그러다가 가장 최근의 기억까지 떠올린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못 보던 옷이었다.

긴 천으로 만든 장포 같은 옷이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앞에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더듬거리자 오래지 않아 가슴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나 있는 딱딱한 흉터가 만져졌다.

그 흉터의 감촉이 그녀를 급격히 현실로 되돌려 주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이미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방금 전까지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기까지 했다.

“소저.”

“아……?”

“이제 정신이 드는가?”

진휘연은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앞섶을 제대로 여미며 고개를 돌렸다.

“노인장께선……?”

대추처럼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지닌 노인이었다.

뭔가가 그를 크게 격동시킨 듯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우문환이라고 하네.”

“아, 진휘연이에요.”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우문환에게 진휘연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우문환이 그것을 만류했다.

“잠시 기다리게. 아직 몸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으니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근육이 놀라 다칠 수 있네.”

“아, 네.”

“소저는 자신이 쓰러지기 전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가?”

“네? 아, 네. 기억하고 있어요.”

“가슴이 비스듬한 각도로 무려 두 자나 갈라져 있었지. 상처의 깊이도 두 치가 넘었다네. 사실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릴 상황이었어.”

“그…… 랬나요?”

“보통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망에 이를 테지. 의원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

흑신의 우문환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한 사내가 그 상황을 바꾸었다네.”

“아…….”

“소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하늘을 뒤집는 것도 해낼 것 같던 사내더군. 그래서 본래대로라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방법을 사용해 보았다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내 눈앞에 있군.”

진휘연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

비록 지금 그가 눈앞에 없더라도 진휘연이 모를 리가 없다. 언젠가 그녀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던 것처럼, 지금 눈앞에 있는 고지식해 보이는 의원이 마치 홍안의 소년처럼 도전정신을 되찾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객주님…….”

오랜만에 불러 보는 그 호칭은 그녀의 마음을 아련하게 흔들어 놓았다.

“소저, 지금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몇 가지를 묻겠네.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가?”

“상태라고 물으시면, 잘 모르겠어요. 아픈 데 없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만은 알겠어요.”

무려 일 년 가까이를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일어났음에도 그녀의 몸은 기이할 정도로 개운했다.

“양손을 모두 나에게 주게.”

“네.”

우문환은 휘연의 양쪽 손목을 동시에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상이 없군.”

“다행이네요.”

“잠시 실례하겠네.”

우문환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어깨와 팔목 부근을 꽤나 강한 힘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프면 말하게.”

“아뇨. 괜찮아요.”

실제로 휘연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우문환은 냉철한 눈빛으로 휘연의 안색과 반응을 살피다가 마침내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났다.

“일어날 수 있겠나?”

“아, 네.”

진휘연은 살짝 긴장한 채로 얼음 관의 표면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일어서는 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한데 얼음 관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발을 구르는 순간, 쩍! 하고 갑자기 얼음 관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앗! 죄송해요. 이거 어쩌죠?”

휘연은 당황하며 우문환에게 사죄를 구했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이런 실수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그녀였기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

한데 우문환의 기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는 깨어진 얼음 관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귀한…… 건가요?”

“아니, 아닐세. 이젠 가치가 없는 것이야.”

“네?”

“그보단 자네가 더 중요하겠군. 소저, 거듭 말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해 주어야 하네.”

“네. 그런데 정말로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몸도 다 건강한 것 같구요. 당장에라도 뛰어다닐 수 있을 것처럼 활력이 느껴져요.”

진휘연은 자신의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긴 추운 곳이죠? 얼음이 얼 정도면 굉장히 추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네. 이곳은 매우 추운 곳이지.”

대륙을 모두 뒤져 봐도 몇 안 되는 극음지(極陰地) 중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당연히 춥다.

아니, 그 정도로 표현될 정도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평상복을 입고 들어왔다가는 한겨울 눈보라 속에 맨몸으로 던져진 사람마냥 제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그런데 추위가 안 느껴져요. 하나도 안 추워요. 이건 이상한 것 아닐까요?”

“몸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나?”

“네.”

우문환은 그녀의 동공과 손끝, 그리고 호흡의 주기를 살폈다.

동공 반응은 정상. 손끝도 얼어 있거나 떨리지 않는다. 호흡의 주기 또한 가쁘거나 느리지 않고 정상의 속도를 유지했다.

다만 그녀는 주변에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추워 보이는데, 추위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많이 놀라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몸의 이상이 아닐세. 그저 몸의 변화라고 해야겠지.”

“네? 몸의 변화요?”

“그렇다네. 이참에 어떻게 된 경우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겠네.”

우문환은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떤 과정을 밟아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때의 상태와 장기린이 그녀를 품에 안고 이곳까지 왔으며 그 뒤의 치료로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럼 객주님은…….”

진휘연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를 살릴 약품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우문환의 말에 진휘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 때문에 객주님이……? 안 돼. 객주님이 간신히 빠져나온 전쟁터에 다시 돌아가게 되다니……. 그래서는……! 그래서는, 예전으로 다시……!”

진휘연의 가느다란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그건 아닐세, 소저.”

진휘연의 고개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

“이 나이만큼 살아오다 보면 보이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운명이란 걸세.”

“운명…….”

“젊을 적에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게 마련이지만, 사실 지나고 보면 딱히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운명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거대한 흐름 같은 걸 느끼게 된다네. 이번 일도 그런 걸세. 얘기를 들어 보니 이번에 벌어진 일은 어차피 장 소협이 한 번쯤은 처리를 했어야 하는 문제더군. 즉, 소저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어차피 벌어질 일에 소저가 휩쓸린 것뿐이라는 거지.”

진휘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납득이 안 돼요.”

“그럴 테지. 젊을 때에는 이해가 안 갈 걸세.”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진휘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저한테만 듣기 좋은 말은…… 이해할 수 없어요.”

고개를 푹 숙인 진휘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

그게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기쁜 마음보다 슬픔과 미안함이 더 큰 법이다.

“그런가.”

우문환은 잠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내들이란 그런 법이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희생한다…… 사내는 그런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종자야.”

우문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진휘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소저, 마음을 굳게 먹게나. 장 소협의 진심을 안다면, 그가 돌아올 날을 위해 이곳에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뇨, 그렇게는 하지 않겠어요.”

떨림이 멎었다.

어깨, 손, 눈빛.

조금 전과 같은 동요는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 객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겠어요.”

우문환은 깜짝 놀랐다.

“그건 옳지 않은 생각일세!”

“도와야 해요. 비록 하루를 살더라도 함께 있겠어요. 함께 있다 보면 분명히 제가 객주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하나 그곳은 전쟁터일세.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지금 소저는 나보고 방금 전에 살려 놓은 환자가 다시 죽을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라는 건가?”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가족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

우문환의 말문이 막혔다.

진휘연은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우문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이란 힘들 때일수록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소저…….”

“지금의 객주님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요. 부탁드릴게요, 의원님. 저를 도와주세요.”

진휘연의 의지는 이미 꺾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후우…….”

우문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늙은 듯했다.

“알겠네, 도와주지. 단, 절대로 위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되네. 그건 아마 장 소협에게도 해가 되는 일일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진휘연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다.

“허허! 이것참, 이것참. 당가 놈은 또 어떻게 설득한다? 허허!”

복잡한 심경이 담긴 웃음을 터뜨리며 멀어지는 우문환.

진휘연은 그의 뒤를 쫓아갔다.

천천히,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강한 의지를 담아 움직였다.

☆ ☆ ☆

남경의 황성.

서문 쪽을 통해 들어온 황실군과 북천맹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점으로부터 오 리가량 떨어진 곳.

그곳에서는 각자 오십 명의 전사를 거느린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함께 남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무리는 외양부터가 서로 극명하게 달라 보였다.

한쪽은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듯하면서 다부진 사내들이 모여 있었고, 다른 한쪽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신력이 막강해 보이는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바람새와 바위곰.

풍조와 암웅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북천맹에서 가장 궁술이 뛰어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람새고, 완력과 근력이 막강한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 바위곰들이다.

특히 그들의 수장인 자이혼과 우르칸은 전 대륙에서 순위를 매겨도 최상위를 차지할 만한 실력자들.

그 두 사람이 내뿜는 기세에 주변의 모두가 강제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거,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자이혼은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빛의 화섭자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자이혼이 고민에 잠기다니, 상당히 드문 일이다.

지금까지는 언제 어떤 경우의 일을 당해도 항상 특유의 차갑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일관하며 모든 일을 간소하게 처리해 왔던 자이혼이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사안이 워낙 중요하고 민감했기 때문이다.

“하시르의 말을 들었잖나.”

“그래, 듣긴 했다.”

“그 녀석이 한 말은 적어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

“애초에 삼대천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일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지. 하시르에게 사리사욕은 없다. 그건 알고 있을 테지?”

“물론이다.”

자이혼은 코웃음을 쳤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키지가 않는군.”

“그야 당연하다. 우리 중에 누가 이 일을 내켜 할 것 같나?”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실제로 하시르는 최후의 최후, 상황이 잘못 흘러갔을 때에만 이 작전을 사용하라고 했다.”

“잘못되었어, 이건 잘못되었어…….”

“난 할 거다. 하시르와 끝까지 동행하지.”

“…….”

“넌 어떻게 할 거냐, 자이혼.”

우르칸의 시선이 자이혼에게로 돌아갔다.

“네가 없으면 일이 상당히 힘들어진다. 가능하면 함께해 주었으면 한다만.”

우르칸이 재촉하자 안 그래도 성질이 날카로워져 있던 자이혼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올라 갔다.

“뭘 그렇게 재촉하는 거냐? 안 본 사이에 하시르의 부하라도 된 건가?”

“……말이 심하군.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할 뿐이다.”

“왜 갑자기 성격까지 바뀐 거냐? 원래대로라면 이 쯤에서 성질을 부렸어야 할 텐데.”

“사람은 변한다.”

“하루 아침 만에? 개가 웃겠군, 개가 웃겠어.”

“…….”

“너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놈이 생각을 해서 판단했다? 애초에 판단을 내리는 이유까지 하시르가 생각해 놓고 너를 조종했다는 게 맞지 않겠나?”

우르칸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뒤쪽에 있던 바위곰 오십 명이 일제히 살기를 피워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자이혼의 뒤에 시립해 있던 바람새들이 살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두 부대는 각자 너무나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대장을 욕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심지어 같은 북천맹의 일원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자인혼의 부대와 우르칸의 부대 사이에선 당장에라도 부딪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네놈, 한 번 해 보자는 거냐?”

결국, 우르칸도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위협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야 네놈답군.”

“어쩌자는 거냐, 자이혼?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러니 더욱 진심을 내보이라는 거다. 네놈, 곧 죽을 것 같은 면상을 하고 있으면서 말은 잘하더군.”

“…….”

“꺼져라.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사라졌다.”

몸을 휙 돌리는 자이혼.

우르칸의 시선이 자이혼의 등 뒤에 못 박혔다.

“하시르가 부탁한 임무는?”

“…….”

“임무는. 어떻게 할 거냐?”

“……한다.”

자이혼의 대답은 낮고 간결했으며, 비정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래, 알았다.”

“…….”

“자이혼.”

“왜 그러지?”

“초원이 보고 싶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르칸.

자이혼은 고개를 돌려 그런 우르칸을 한 번 응시한 뒤,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바라봤다.

☆ ☆ ☆

쩌어엉!!

장기린의 일격은 깊고 무거웠으나, 하시르에게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특유의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시르를 공격하기 위해선 그 ‘무언가’를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데, 기이하게도 그 무언가를 통과하는 순간에는 미묘하게 공격의 속도가 늦춰지는 듯한 기분을 항상 받곤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번번이 공격은 하시르의 방어에 막히거나 빗나가기 일쑤였다.

‘철저하게 비껴내는군.’

장기린의 두 눈이 차가워졌다.

쌍도를 든 하시르.

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철저하게 정면에서의 교전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와 노는 듯한 기분이었다.

상대에게 유리한 곳에서 싸움을 하는 듯한 감각.

장기린은 왠지 자신의 속도와 성향대로 싸움을 끌고 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 뭔가가 더 있는 듯한데.’

사실 이건 실력과는 무관한 문제였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상대의 공격을 파해하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이 바로 하시르였던 것이다.

공격을 가하는 순간, 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상대의 공격을 느끼고 방해한다.

물론 야생 들고양이와 같은 그런 예민한 감각은 무공의 고수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하시르의 그것은 그보다 더욱 발전된 것 같았다.

마치…… 어디로 공격이 날아올지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

하시르는 영매다.

영혼을 만나고 귀신과 대화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예전에 흘러가는 듯한 말이지만, 텐챠이가 자신은 하시르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었다.

“하시르!”

히히힝―

흑룡이 크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돌진하고, 그 여세를 몰아 휘두른 장기린의 진천룡이 하시르의 몸을 뒤로 크게 밀쳐 냈다.

하시르는 곧바로 몸을 옆으로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장기린이 수직으로 창을 내려치자 발이 땅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도망치지 못한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장기린의 강한 의지가 그대로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그건 곤란하군요.”

하지만 하시르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장기린에게 정신없이 당하는 와중임에도 그에겐 여전히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이 있었다.

쩌어엉!!

“흐읍!!”

하시르의 몸이 휘청, 옆으로 꺾였다.

장기린의 일격에 이번엔 강기가 실렸기 때문이다.

시뻘겋게 빛나는 불타는 광채가 진천룡의 창날을 두텁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대장장이가 한껏 풀무질을 하여 벌겋게 달궈 놓은 듯한 모양새.

실제로 현재 진천룡의 창 주변에선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으, 지금 그렇게 불타오를 것은 없습니다. 곧 지겨워질 테니까요.”

“뭐?”

하시르는 손가락으로 우측을 가리켰다.

삼도의 좌측, 팔기군이 싸우고 있는 방향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장기린은 하시르가 손으로 가리킨 쪽으로 신경을 집중했고, 이내 그쪽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기군은 이만 오천이다.

반면에 삼도의 좌측에 있는 북천맹의 병력은 고작 일천 남짓이었을 터.

그렇다면 싸움은 해 볼 것도 없다.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전개되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양상이 되어야 마땅했다.

‘시끄럽게 싸우고 있어?’

그런데 너무나 소란스럽다.

앞쪽의 일부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만 오천 명 전원이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듯 당황하며 허둥지둥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기운이 요동친다.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강력한 무언가가 대군의 속으로 파고들어 휘젓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장기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휙― 하니 다시 시선을 돌리자, 하시르가 쓰고 있던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밝은 웃음을 보였다.

새카만 눈동자 두 개에서 기묘한 기운이 회오리쳤다.

“어떻습니까? 삶이란 게 참, 생각대로 안 되죠?”

“너, 설마…….”

“세상에는 먹는 자가 있으면 먹히는 자도 있는 법입니다.”

하시르가 손가락으로 장기린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천 명의 북천맹 무인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싸움을 하고 있는 부운화와 적룡기마대가 보였다.

“표풍검은 먹는 자 쪽이죠. 그럼 저기에 있는 북천맹의 무인들은 먹히는 자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엔 먹는 자인지 먹히는 자인지 불분명한 상대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걸 숙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시르가 다시 삿갓을 눌러썼다.

그러자 까무잡잡한 얼굴과 기묘한 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붉은 악귀, 당신은 명 나라 쪽에서 말하자면 최후에 내보낼 비장의 한 수일 겁니다. 그럼 우리 쪽에서도 최후의 한 수를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자, 북천맹의 최후의 한 수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붉은 악귀?”

하시르는 훌쩍 뒤로 물러나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된 목소리.

마치 경극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실제로 상황은 경극의 그것처럼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팔기군 이만 오천을 지푸라기처럼 베어 내며 파죽지세로 그를 향해 다가오는 ‘북천맹 최후의 한 수’.

텐챠이였다.

그는 하늘조차 박살 내 버릴 것 같은 육중한 존재감을 뽐내며 일기당천의 무력으로 정면의 적을 박살 내고 있었다.

뒤따르는 숫자로 봐선 최소한 오천이 넘어 보였다.

장기린은 하시르를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게 하시르의 계략일 터.

역시 변칙적인 북천맹 제일의 책사다웠다.

이 순간, 이 시점에서 텐챠이가 나오도록 이미 작전을 짜 두었다니.

‘무서운 놈.’

그 말인즉, 장기린이 장군들의 뜻대로 하지 않고 따로 급습을 가할 거란 사실까지 예측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네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나는 게 아니라,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장군과 저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아니면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저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정도로 약하진 않습니다만.”

빠드득―

장기린은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사실이다.

하시르는 부운화와 동급.

하시르는…… 쓰러뜨리기 위해선 최소한 삼백 초 이상 겨뤄야 하는 강자였다.

“그렇군.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하겠군.”

“맞는 말씀입니다.”

삿갓 아래, 하시르의 입이 웃고 있다.

“착각하지 마라.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질기시군요.”

“운화!!”

푸화악―!

장기린의 부름과 동시에 피투성이가 된 한 남자가 장기린과 하시르의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다그닥― 다그닥―

히히힝―!

그 뒤에 거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자.

부운화였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은색 갈기를 지닌 명마를 탄 부운화는 한 쌍의 장군검을 양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대형.”

부운화는 이미 장기린이 그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부운화는 이 자리에 나타난 뒤 계속해서 하시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운화, 휘연의 원수다.”

“예, 대형.”

“내 대신 갚아 줄 수 있겠지?”

부운화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약속하겠습니다.”

“믿겠다.”

장기린은 흑룡의 말 머리를 돌렸다.

부운화가 약속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바로 부운화다. 부운화가 복수를 대신해 줄 것을 약속한 이상, 이미 장기린에게 있어서 하시르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따각― 따각― 따각―

푸르륵― 하고 투레질을 한 흑룡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점점 다가오고 있는 그의 숙적을 향해서.

☆ ☆ ☆

“이렇게 검을 맞대는 건…… 삼 년 만인가?”

부운화는 말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강력한 상대와의 싸움이다.

상대가 말에서 내려왔다면 자신도 말에서 내려오는 게 더 유리했다.

“얼마 전에 항주에서 한 번 검을 맞대지 않았던가요?”

“그건 싸움이라고 할 수 없지.”

“그렇긴 하군요. 하지만 어쩌죠? 저는 여기서 당신과 싸울 마음이 없는…….”

부우웅―

부운화는 하시르의 말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장군검을 허공에다 휘둘렀다.

칼날에 묻어 있던 핏물이 허공에 튕겨 나가고 깨끗한 검신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빛을 발한다.

“안 본 사이 말이 많아졌군.”

척― 하니 가리키는 칼날에 섬뜩한 살기가 담겼다.

“이것참. 표풍검은 온화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보니 붉은 악귀와 판박이군요.”

“칭찬에 감사하지.”

“칭찬으로 한 건 아닙니다…… 만!”

쉬이이익―!

하시르가 말을 다 끝마치기 직전,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간 검격을 하시르는 아슬아슬하게 뒤로 허리를 굽혀서 피해 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목이 갈라졌을 뻔한 위험천만한 한 수였다.

“이것참…….”

하시르가 불만을 토해 내려는 찰나, 다시 한 번 부운화의 검격이 소름이 돋을 만큼 완벽한 반원을 그렸다.

쒸이이익―!

서걱!

“잡담하지 마라.”

허고에서 나풀거리면서 떨어지는 것은 하시르가 쓰고 있던 삿갓의 일부였다.

잠시 후, 삿갓이 쩍! 하고 갈라지며 하시르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하시르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수가! 표풍검도 더 강해져 있었군요.”

하시르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라면, 붉은 악귀와 맞먹겠군요. 계획을 수정해야 겠습니다.”

“필요없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테니.”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마시지요. 실력이 성장한 것은 표풍검 당신뿐만이 아니니 말입니다.”

“뭐?”

철컹―

그 순간, 부운화가 허리에 차고 있던 요대가 반으로 뚝 잘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언제 스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운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 놓았다.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하시르.”

“당신이야말로 그렇습니다, 표풍검.”

스릉―!

한 쌍의 장군검과 한 쌍의 장도.

하시르와 부운화.

두 사람은 모두 양손에 각각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정반대인 듯하면서도 닮아 있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 ☆ ☆

흑룡을 끌고 진군 방향을 정반대로 바꾼 장기린은 금세 ‘북천맹 최후의 한 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팔기군의 병사들은 텐챠이를 막아 내지 못했다. 얼마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공포에 질려서 대로나 다름없을 만큼 크게 길을 열어 준 모습이 보였다.

“추룡.”

“예, 대형.”

추룡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운화는 하시르를 위해 남았으니, 이제 적룡기마대의 책임자는 추룡이라 할 수 있었다.

“긴장되나?”

“그럴 리가요. 대형, 농담도 심하시군요.”

추룡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동안 얼마나 싸울 만한 놈들이 없었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대형.”

“뭐, 그래도 상대는 싸울 만한 정도는 이미 한참 벗어난 듯해서 말이다.”

“괜찮습니다. 그래 봤자 애송이들입니다.”

“저쪽의 숫자는 오천이야.”

“이쪽은 삼천입니다.”

“텐챠이 수호대만 해도 사백은 넘어 보인다.”

“적룡기마대 백오십이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이길 수 있겠나?”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대답은 추룡뿐만 아니라 적룡기마대원 전원이 함께했다.

적룡기마대원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감히 몽고 달자 놈들과 비교당한다는 것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장기린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말안장과 강하게 묶고 있는 가죽끈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런 뒤 진천룡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죽지 마라, 모두들!”

“존며어엉(尊命)―――!”

파핫!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듯한 함성과 함께 적룡기마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란 생물은 참으로 신기하다.

평소엔 겁이 그렇게나 많으면서, 조금만 훈련을 시키면 달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작정 앞으로 뛰쳐나가는 습성이 있다.

말이 속도의 최고점이 되는 데까지 필요한 거리는 오 장 내외.

고작 그 정도의 거리만 있으면 말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적룡기마대는 금세 그들의 최고 속도에 도달했다.

앞으로 쏘아지는 말.

그 위에 탄 적룡기마대.

만약 그들의 상대가 보병이었다면 아마 그 위용에 짓눌려서 이만 딱딱 부딪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기가 짓눌린 보병은 기마병에게 있어 달리는 데 거슬리는 장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상대는 똑같은 기병이었다.

그것도 창천랑이라 불리는 북원의 무신과 몽고 초원 최고의 정예인 텐챠이 수호대였다.

절대로 만만치 않다.

아니, 적룡기마대의 적수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두두두두두두―!

“우오오오오―!”

“끼요오오옷―!”

적룡기마대의 함성과 텐챠이 수호대의 함성이 교차된다.

상대와의 거리가 백 장 내로 접어드는 순간, 모두들 말 등자에 준비해 두었던 원형의 소형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피슈슈슈슉―!

텐챠이 수호대가 말을 타면서 쏜 화살들은 적룡기마대의 방패에 막혀서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반대로 적룡기마대가 말을 타면서 쏜 화살들 역시 텐챠이 수호대는 칼을 휘둘러 가볍게 막아 냈다.

고작 오십에서 백 개 사이의 화살이 날아다닐 뿐이지만, 그래도 팔기군이나 어림군과는 급이 다르게 느껴질 만큼 능숙하고 차분한 대처였다.

칠십 장.

오십 장.

……삼십 장.

점점 상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각자 무기를 거머쥔 손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격돌은 이제 곧이다.

생명을 건 격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온몸에서 땀이 나고, 머릿속은 하얗게 되어…… 오로지 가진 건 본능밖에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 갔다.

기마전의 싸움은 다른 싸움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건 무인의 싸움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군문의 병사들의 싸움과도 다르다.

찰나의 싸움.

한 마리의 말이 전력을 다해 달리고, 반대쪽에서 다른 한 마리의 말이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전력을 향해 달린다.

그렇다면 그 두 마리 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건 그야말로 눈을 한 번 깜빡할 시간밖에 안 되지 않겠는가.

즉, 기마 위에 탑승한 기마병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생사의 기로를 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시간 내에 상대를 베어 내면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거고, 그 시간 내에 베지 못하면 죽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건 울창한 가시나무 사이를 말을 타고 달리며 가지치기 해 주는 것과 같다.

성공하면 지나가는 거고, 실패하면 가시에 걸려 옷이 찢어진다.

더군다나 육중한 무게의 말이 달리고 있는데 그 힘이 좀 셀까?

달리는 기마병이 휘두른 검은 그야말로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박살 내게 마련이다.

즉, 일격에 승부가 난다는 뜻이다.

이격, 삼격도 아니다.

오로지 일격(一擊)이다.

짧은 시간에 서로를 보고, 눈을 마주치면서 무기로 서로를 노린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 긴장하지 않느다면, 그건 정신병자이거나 싸움이 뭔지 모르는 초짜뿐이다.

“우와아아아앗―!”

“끼야요오오옷―!”

말 등자의 몸을 한껏 눕히며 칼을 휘두르는 몽고의 기마병.

긴 창으로 멀리서부터 상대를 노리고 과감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적룡기마대.

푸화하하학―!

쩌저정!

콰직!

“크아아악………!”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피 냄새가 진동하고 격한 충격이 골을 뒤흔든다는 사실뿐이었다.

적룡기마대, 텐챠이수호대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똑같은 충격을 느끼며 스쳐 지나갔다.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힘의 역류로 인해 균형을 잃은 기마는 기마병 한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 버리는 높이까지 날려진 뒤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치열하고 처절한 광경.

그리고 그 사이의 한 쌍.

그 누구보다도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 역시도 텐챠이 수호대와 적룡기마대의 격돌과 동시에 맞붙었다.

“텐챠이―!”

“붉은 악귀―!”

푸른 빛이 감도는 말.

커다란 신응도를 휘두르는 북원의 무신.

검은색 일체의 말.

막강한 진천룡을 휘두르는 명 제국의 악귀.

장기린은 크게 창을 들어 아래로 내리찍었다.

텐챠이도 마찬가지였다.

머리 위로 크게 도를 들어 전력을 다해 아래로 내리찍는다.

쩌어어어어어어엉―!

거대한 굉음과 함께 땅 밑이 움푹 파였다. 말들의 다리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던 병기들은 서로에게 충격의 여파를 전해 준 채 간신히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

“크읏!!”

“챠핫!”

온몸이 저리고 눈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의 충격을 받았지만, 두 사람은 곧바로 다시 한 번 무기를 휘둘렀다.

그건 이미 사람과 사람의 격돌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할 만했다.

두 사람은 무신(武神)이었고, 싸움의 충격을 이겨 내며 두 사람의 다리 역할을 해 주는 말들은 그야말로 신마(神馬)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쩌엉! 쩌엉! 쩌엉!

두 사람의 격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서서히 원을 그리며 호흡이 격렬해져 갔다. 끝을 모르고 점점 빨라지는 공방은 종래엔 밖에서는 눈으로 다 쫓아갈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이게 되었다.

주변의 먼지가 회오리바람처럼 하늘로 솟아오르고, 거대한 기파가 하늘을 찢어 놓을 듯 넘실거렸다.

“굉장하다……!”

“저게 정녕 인간인가……!!”

멀리서 보고 있던 병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 아니다.

저건 무신이다.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챠하앗!”

“타하앗!!”

장기린과 텐챠이.

붉은 악귀와 창천랑.

두 사람의 인연을 걸고, 두 사람의 운명을 걸고.

그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힘을 다 끄집어내어 이 싸움에 쏟아부었다.

척! 척! 척!

“비켜라!”

장기린과 텐챠이의 싸움이 경극의 주연이었다면, 다른 적룡기마대와 텐챠이 수호대의 싸움은 조연 정도의 역할일 것이다.

그리고 경극에는 관객이 있다.

싸움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인물들이다.

“엇……?”

싸움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이던 북천맹의 병사들은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갑자기 북쪽에서 나타난 오십여 명의 무리가 각자 커다란 나무통을 들고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오십 명은 모두가 거구의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병사들을 지나쳐 가더니, 한창 싸움을 가속하고 있는 장기린과 텐챠이의 싸움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엇?!”

“으헛!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저만한 무신들의 싸움에 자칫 잘못해서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괜히 기파에 휩쓸려 죽임을 당하는 수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것이다.

그런데 거구의 사내들은 그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는지, 싸움의 경계선쯤에서 각자 들고 있던 나무통만 각자 두 개씩 싸움터 주변으로 집어 던졌다.

장기린과 텐챠이가 싸우는 공간으로부터 반경 약 삼 장 정도의 거리를 나무통이 둥그렇게 둘러쌌다.

장기린과 텐챠이가 그런 상황을 모를 리는 없었지만, 서로에게 너무 신경을 쓰느라 함부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오십 명의 사내는 그 임무만을 마치고 곧바로 미련 없이 물러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그 누구보다도 큰 체구를 지녔으며, 어깨의 너비가 키만큼이나 넓은 괴물 같은 사내.

우르칸.

괴력난신. 북원 최고의 장사가 양손에 나무통을 네 개나 들고 있었다.

“장군.”

우르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죄는 바람신의 앞에서 달게 받겠소.”

부웅―

네 개의 나무통이 허공으로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그러고는 정확하게 장기린과 텐챠이의 사이, 두 사람이 싸우는 공간 속으로 떨어졌다.

☆ ☆ ☆

한 쌍의 장군검과 한 쌍의 장도.

두 개의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는 사이, 하시르가 한마디를 던졌다.

“표풍검, 나는 당신과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실제로 하시르는 계속해서 공격을 회피하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는 어떤 힘도 낭비해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부우우웅―

부운화는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공격을 계속했는데, 하시르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부운화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당신의 대형, 붉은 악귀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뭐라고?”

부운화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의 천명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탈출하기 위해선, 좀 더 극적인 사건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무슨 소리냐!!”

“뒤를 돌아보십시오.”

하시르는 칼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부운화는…… 그 뒤를 쫓을 수 없었다.

하시르의 말이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이다.

“너…….”

잠시 망설이던 부운화가 고개를 돌렸다.

삐이이이익―!

그 순간, 매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소음과 함께 먼 거리를 격하고 화살이 하나 날아들었다.

그 화살의 끝은 빛나고 있었다.

화시(火矢).

불꽃을 실은 화살은 미리 정해진 위치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콰아아앙―!

곧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부운화가 평정을 잃고 말았다.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그가 잘못 봤을 리가 없다.

화살이 떨어진 곳엔 장기린과 텐챠이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큰 소리로 절규해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晩時之歎].

거대하고 화려한 불꽃과 함께 남경을 건 싸움은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1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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