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第百二十章 ― 폭화침중(暴火沈重)
폭침정(爆針鋌).
한순간 남경의 전장을 뒤흔든 나무통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어떻게 만드는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제작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어느 순간 그 물건은 암시장을 통해 세상에 퍼져 나갔고, 상대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최고의 암기로서 암중에 명성을 떨쳤다.
원리는 간단하다. 초석(硝石)과 유황, 목탄을 섞어서 만든 화약을 안에 담고, 나무통의 바깥쪽에 기름을 발라 불이 붙기 쉽게 만든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 순간, 통의 안쪽에 장착되어 있는 수백 개의 철침이 사방으로 쏘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폭침정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는데, 바로 무림 고수에게 통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몸에 호신강기(護身剛氣)라는 것을 두를 수 있다.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호신강기의 강도도 높아지고, 유지 시간도 길어진다.
철침만 내뿜는 암기라면 호신강기로 막을 수 있다. 화약의 폭발도 호신강기라면 막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합쳐지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호신강기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마치 단단한 돌에 쇠못을 박아 넣고 망치로 때리듯이, 호신강기를 산산이 부수며 맨몸에 틀어박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흔적도 없이 날아갈 만큼 강력한 폭발에 사방을 뒤덮는 철침이 수백 개.
게다가 하나만으로도 그만큼의 위력을 보이는 폭침정이 무려 백여 개나 투입되었으니, 단순한 계산으로도 백배의 폭발력을 가진 셈이었다.
장기린은 위험의 전조를 읽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면 육감이 발달하여 본능적으로 위험한지 어떤지를 알게 되는 법이다.
둥그런 나무통이 주변을 포위하듯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는 긴장했다.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
하지만 불운하게도 지금의 상대는 텐챠이였다.
북쪽 초원 최고의 전사.
푸른 하늘의 늑대라고 불리는 창천랑 텐챠이.
그를 상대로 한눈을 팔고 다른 쪽에 신경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들고 있던 무기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과 칼.
두 개의 병기가 서로 맞물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전력을 다하기 위해 말에서 내린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까지도 타고 있었다면 말의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끼기긱…….
장기린은 맞물린 병기 너머로 텐챠이를 응시했다.
텐챠이도 아마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무통을 보고 위험을 느꼈지만, 서로 간에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이미 극도로 단련된 육체가 제어할 틈도 없이 상대에게 공격을 퍼부을 것을 알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을 터.
두 사람은 창과 칼을 맞댄 채 위험한 나무통이 주변을 둘러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겹겹이 벽을 만들 듯 쌓여 가던 나무통이 마침내 백 개가 되어 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장기린은 문득 그 순간 텐챠이의 표정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텐챠이의 눈빛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나?’
텐챠이가 지금의 상황에 놀란다는 것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미처 몰랐다는 뜻이었다.
장기린은 그 순간 이상 사태가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적룡기마대나 그의 병사들 중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북천맹의 병사들 중에 누군가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뜻인데…….
어째서 텐챠이는 놀라고 당황하는 것일까.
‘설마, 배신인가?’
텐챠이가 몰랐다면 결국 이 함정은 텐챠이마저 위험하게 만드는 동귀어진의 한 수라는 뜻이었다.
장기린은 창을 잡고 있는 양팔에 저절로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고수의 칼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살의(殺意).
그 의지가 가장 극대화될 때야말로 가장 위험했다.
까드득―
창날과 칼날 사이에서 비틀리는 소음이 흘러나온다.
텐챠이는 장기린의 어깨 너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음처럼 한마디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하시르……!”
그 목소리엔 감탄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한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사이, 백 개의 나무통이 주변을 둘러싸고 마지막으로 네 개의 나무통이 장기린과 텐챠이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삐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매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소음과 함께 붉은색 불꽃이 하늘을 갈랐다.
채앵!
파앗!
장기린과 텐챠이는 그 소리를 신호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각자 무기를 거뒀다. 그 동작은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이 빨랐으나, 불화살을 쏜 사람도 그들 못지않게 특별한 자였다.
화살은 그야말로 찰나를 갈랐다.
보통 화살의 족히 서너 배는 될 듯한 무시무시한 속도와 기세로 내리꽂혔고, 그 궤도 또한 장기린과 텐챠이의 권역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가 손을 대기에도 애매한 위치.
그 탓에 두 사람은 아주 잠깐이지만, 불화살을 쳐 내려던 손을 머뭇거렸다.
만약 누구 한 사람이 먼저 손을 뻗었다면 다른 한 사람이 그 공격을 막았을 것이다. 그 둘은 지금까지 그 정도로 치열하고 첨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서로 간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화살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화살은 두 사람의 사이로 막 떨어지려고 하던 네 개의 나무통 중 하나를 퍽! 하고 직격했다.
누군가가 집어 던진 나무통을 멀리서 쏘아 낸 화살로 맞추는 실력은 그야말로 경악할 만큼 대단했고, 그렇기에 화살을 쏘아 낸 사람이 누군지도 짐작이 갔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장기린과 텐챠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반경 삼 장의 거리를 나무통이 둘러싸고 있어 피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장기린은 창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통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새빨간 화염과 함께 반짝이는 은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장기린은 그 순간,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폭발하자 그 옆의 나머지 세 개의 통도 폭발하고…….
그 세 개의 통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백 개의 나무통도 동시에 화염을 뿜어댔다.
장기린의 단련된 눈은 나무통이 폭발하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수백, 수천 개의 철침이 뿜어지는 순간을 선명하게 잡아냈다.
파바바밧―!
“……!”
장기린이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치자 사방에서 쏘아진 철침들이 온몸을 빼곡하게 덮어 버렸다.
피부로부터 불과 이 촌의 거리.
장기린의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겉을 완전히 뒤덮은 모습이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겉으로 보기엔 처참해도 실제로 장기린은 그때까진 손톱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싼 백 개의 나무통은 철침을 뿜어 낸 뒤에 다시 한 번 폭발했다.
그것도 조금 전보다 배 이상 강한 화력으로.
주변의 천지를 다 부숴 버릴 만큼 엄청난 힘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지이이잉―
귀가 먹먹했다. 고막이 터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충격만으로도 몸이 박살 났을 것이다. 주변을 보자 이곳저곳 땅이 움푹 파이고 화염으로 넘실거렸다.
터엉!
투두두두두…….
굉음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단지 온몸이 뒤흔들리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호신강기에 틀어박혀 있던 철침들이 순식간에 피부에 틀어박혔다.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장기린은 철침 하나하나가 피부에 박히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꼈다.
“크윽……!”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신음을 흘린 것이 대체 얼마 만일까.
강력한 폭발력에 의해 밀려난 철침은 그의 피부를 뚫고 뼈가 있는 근처까지 파고들었다. 다행히 뼈를 뚫지는 못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몸에 꽂힌 철침은 어림잡아도 수백 개 이상.
철침이 온몸의 모공을 찔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나무통은 세 번째 공격도 준비하고 있었다.
피슈슉―!
화르르륵―!
사방으로 뿜어지는 매캐하고 진한 냄새.
기름이다.
그것도 불에 가장 잘 탄다는 석랍(石蠟) 종류의 기름이었다.
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몰라도, 나무통 모양의 암기는 상대를 철저하게 멸살시키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온몸을 빼곡이 찔러 오는 수백 개의 철침에 피부를 다 벗겨 버릴 것만 같은 폭발력, 거기에 생명체라면 단번에 쪼그라들어 말라붙을 것 같은 화력까지.
그건 상대가 장기린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두 개였다면 모를까.
이런 무시무시한 암기가 일백 개나 있다면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기린이 창을 휘돌려 막아 낸 철침은 실제로 겨우 백여 개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가슴 윗부분과 머리 근처를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기린의 육체는 순식간에 불에 전소되었다.
“……!!”
거대한 불꽃이 넘실대는 공간.
고작 세 걸음 앞에서 입을 벌리고 몸을 비틀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텐챠이.
그 역시도 장기린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비명을 지르듯 꿈틀대고 있었다.
아직 귀가 먹먹한 상태이기 때문에 실제로 비명을 지르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분노의 고함일 수도 있다.
텐챠이는 두 눈으로 몸에서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선명한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하……!”
소리는 드문드문 들렸지만 텐챠이가 외치고 있는 말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시르…… 라고.
텐챠이는 자신과 함께하는 북천맹의 동지이자 책사의 이름을 격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역시 배신인가.’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장기린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크…… 으으……!”
장기린은 몸에 기(氣)를 흘려보내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온몸을 빼곡이 덮고 있는 철침 때문인지 기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수천 개의 댐으로 겹겹이 막아 둔 것 같은 느낌.
장기린은 온몸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창에 기력이 실리며 머리 위로 쏟아지려던 석랍과 불꽃이 옆으로 빗겨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장기린이라도 순수한 육신의 힘만으로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결국 다 막지 못한 석랍과 불꽃이 장기린의 팔다리를 불태웠다.
“크으…… 아아악……!”
결국 장기린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입술에서 피가 울컥 터지고, 얼굴에 새파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극도의 고통.
혼미해지려는 정신.
그 속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불꽃에 뒤덮인 텐챠이가 대도를 휘둘러 오고 있었다.
쩌엉!!
“……!!”
장기린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텐챠이는 귀신 같은 살기를 뿜어내며 장기린에게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철침 때문에 기(氣)를 움직일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위력이었다.
온몸이 불타면서도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
장기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지 않은가.
텐챠이는 배신당했다.
조금 전에 이름을 외친 걸로 봐선 하시르가 배신의 주체였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폭발물을 집어 던진 자들의 대장은 괴력난신 우르칸.
결정적으로 거기에 불을 당긴 것은 삼대천 중 한 사람인 신궁 자이혼일 것이다.
그런데도 텐챠이는 단지 한 번 분노를 드러냈을 뿐, 그 뒤에는 하늘로부터 무슨 계시라도 받은 양 장기린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텐챠이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우오오오오오―!”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화르륵―!
뜨거운 불꽃이 눈앞에서 크게 타올랐다.
마치 텐챠이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불꽃도 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쩌어엉!
장기린은 허리를 베어 오는 강렬한 참격을 간신히 막아 내고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지금의 텐챠이는 위험하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장기린만을 죽이려고 한다. 피부가 지글지글 타고 있는데도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더욱 힘을 끌어 내는 듯했다.
까앙!
장기린은 다시 한 번 창과 칼을 맞대고, 들끓는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어째서…… 지금도 싸우려는 거지?”
텐챠이는 핏줄과 힘줄이 함께 돋아나 괴기스러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녀석이…… 사욕을 위해 이랬을 리는 없다. 그만한 천명이 있었을 것이다.”
텐챠이는 배신을 당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이 되었음에도 하시르를 믿고 있었다.
그 신뢰는 마치 적룡기마대와 장기린의 사이에 버금가는 듯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그 이유가 올바를 거라고 믿다니, 대단한 관계이지 않은가.
“그런가…….”
장기린은 창을 잡은 양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곤 쩡! 하고 붙어 있던 칼날을 떨쳐 내 뒤로 물러나서 왼손으로 몸에 박힌 철침들을 닥치는 대로 뽑아냈다.
“큭……!”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뼈까지 닿아 있는 철침이다.
게다가 뒤집어쓴 석랍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당연히 철침도 그 열을 받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하나하나를 뽑을 때마다 마치 신경을 잡아 뽑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후두둑…….
순식간에 장기린의 발밑으로 철침 백여 개가 떨어졌다.
철침을 뽑지 못한 것은 종아리 부근과 몸의 뒤쪽뿐.
뽑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막상 뽑고 나니 처음보다는 한결 움직이기가 편해진 듯했다.
‘여기서 빠져나가긴 힘들겠지.’
주변의 땅이 지글지글 끓고 있을 정도의 열기.
게다가 나무통이 겹겹이 쌓여 있던 주변은 커다란 불꽃이 위용을 드러내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방벽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텐챠이가 엄청난 집념으로 공격해 온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여유 따윈 없을 터.
“좋다, 텐챠이. 이 승부, 끝까지 받아 주마.”
장기린은 결국 마음을 바꿔 텐챠이를 빨리 쓰러뜨리기로 결정했다.
후우우웅―!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응도를 휘두르는 텐챠이.
커다란 칼날이 섬뜩하게 귀밑을 스쳐 지나가고, 바람 소리는 그 후에 들렸다.
여전히 무시무시할 만큼 날카롭고 군더더기없는 공격이다.
장기린은 양손으로 진천룡을 붙잡았다.
허리는 꼿꼿이 세운 자세.
검선과의 협력으로 만들어 낸 무공, 일연적룡무(一衍赤龍舞)였다.
첫 번째는 찰나를 가르는 쾌속의 찌르기.
쩌엉!!
“흡!!”
튕겨 났다.
텐챠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얼굴 앞에서 묵묵히 휘두른 대도에 장기린의 진천룡이 위로 튕겨 나고 있었다.
그 순간, 곧바로 쾅! 하고 발을 내딛는 텐챠이.
바위처럼 잘 짜여진 육신이 앞으로 돌진한다.
키이이잉―!
텐챠이의 칼, 신응도가 기성을 내지르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시뻘건 화염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 거구의 사내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칼을 내리찍는 모습은, 보통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스으윽―
하지만 장기린은 바로 다음 초식으로 넘어갔다.
천수관음상처럼 양팔의 잔상이 생긴다. 은은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흑색의 창날이 허공에서 수십 개로 분신을 만들어 내며 주변을 장악했다.
속도는 쾌속.
투로는 명확.
한 번 휩쓸리면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버릴 것만 같은 공격이다. 마치 질기고 촘촘한 그물을 펼쳐 놓은 듯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창날의 그물에 걸린다면, 분명 바위틈에 짓이겨진 벌레처럼 뭉개져 버리고 말 터.
터엉!
쉬이이익―!
“……!”
그런데 텐챠이는 창날의 그물을 향해 망설임없이 돌진했다.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신응도의 칼날을 직각으로 세운 채 달려드는 텐챠이.
마치 태산이 달려드는 듯한 압박감이다.
여전히 불이 활활 타오르는 신체.
지옥의 장수와도 같은 텐챠이는 분열된 진천룡의 창날 중 하나가 그의 어깨에 닿는 순간, 커다란 칼을 붙들고 온몸을 회전시켰다.
쩌저저저정!!
한 번.
아니, 세 번, 네 번…….
총 열두 번의 칼질이 텐챠이의 팔방(八方)에 거대한 막을 형성했다.
중원에선 도막(刀幕)이라 불리는 기술.
거대한 천을 펼쳐 놓은 듯한 강기(剛氣)의 폭풍이 주변을 올올이 감싸고 있던 장기린의 공격을 모조리 쳐 내고 막아 냈다.
튕겨진 진천룡의 잔상이 사라지고, 결국은 장기린의 손에 잡힌 진짜 진천룡 하나만이 남았다.
‘역시……!’
장기린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텐챠이는 역시 그의 숙적이다.
온몸에 철침이 박히고, 뒤집어쓴 석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에도 서로가 가진 힘의 균형은 변하지 않았다.
원래 사람의 진짜 힘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드러내는 법이다.
저력(底力)이라 불리는 힘.
극한의 상황에 도달했을 때에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리는 그 힘이야말로 사람의 진정한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장기린과 텐챠이는 두말할 것도 없는 동급이었다.
“크으…….”
장기린은 슬슬 피부가 오그라드는 듯한 고통이 전해지자 신음했다.
아무래도 철침에 분산된 기(氣)만으로 버텨 내기엔 석랍의 화염이 너무나 강했던 모양이다.
슬슬 고통이 전해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는 현저히 느린 속도지만, 화염은 확실히 그의 육체를 태우는 중이었다. 특히 정면에 서 있는 텐챠이는 피부가 지글지글 끓는 모습이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
이젠 두 사람 모두 한계에 달해 있었다.
‘다음 일격이 승부다!’
장기린은 양손으로 거머쥔 진천룡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겨누는 듯한 수직일도세(垂直一刀勢).
그 자세는 장기린이 최고의 일격을 사용할 준비 동작이다.
일연적룡무.
마지막 세 번째 기술.
이름은 없다.
가진바 모든 힘을 끌어내는 일격이다.
심검(心劍)의 경지를 아우르는 무형의 능력으로 상대를 심혼부터 제압하고, 결국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무너지게 만든다.
무림십대고수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맹호도 방극이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일격에 제압당한 전례도 있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으니, 그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도중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흐읍……!”
장기린은 정신을 집중했다.
등골이 오싹하고, 목 뒤에 닿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고를 창끝에 집중했다.
숙적인 텐챠이는 활활 불타는 몸으로 장기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손으로 대도를 거머쥐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불꽃 사이로 일렁이는 푸른빛의 강렬한 기운.
핏줄이 돋은 얼굴 위로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빛.
신응도의 칼날 위로 솟아오른 푸른 강기는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여의봉처럼 점점 더 그 크기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과연…….’
장기린은 웃었다.
그와 텐챠이는 싸움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텐챠이는 장기린이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다음의 일격이 승부를 가른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텐챠이도 자신의 필살의 한 수를 꺼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이걸로 승부를 보자, 텐챠이.’
무려 십여 년간 이어져 오던 길고 긴 인연의 끝.
장기린은 크게 숨을 내쉬며 그의 마음속에 날카로운 날을 세웠다.
상대를 쓰러뜨린다.
제압한다.
그 두 가지 생각에 집중하며 텐챠이를 옭아맨다. 주변의 기운이 그의 생각에 동조한다.
의지를 실체로 바꾸는 힘.
그것이야말로 심검의 요체였다.
쿵!
막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던 텐챠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텐챠이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를 짓누르려는 무형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칼집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신응도를 천천히 뽑기 시작한다.
어깨의 근육이 수축한다.
살짝 상체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가슴, 복부, 대퇴부의 근육이 일제히 힘을 모은다.
수축. 수축. 수축.
그리고 한순간의 발산.
푸화아아악―!
“……!!”
장기린은 그 순간, 세상이 갈라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수평의 일격.
공기가 갈라진다.
시간과 공간.
모든 것이 잘리며 새카맣게 변한다.
장기린은 그가 만들던 심검의 힘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파란 살기를 내뿜는 신응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웅―
“크륵……!”
텐챠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기린의 가슴까지 주먹 하나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두었을 때, 그의 칼날이 멈춘 것이다.
끼긱…… 끼긱…….
신응도의 손잡이로부터 비틀린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텐챠이의 힘은 강했다. 장기린이 끌어 올리고 있던 심검의 힘을 모조리 사용해도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는 게 고작이었다.
‘시간이…… 없어……!’
지금도 여전히 장기린의 등 뒤엔 불이 붙어 있는 상황.
텐챠이는 온몸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와중에도 상식을 초월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화르륵―!
불꽃이 더욱 강하게 타오른다. 그에 맞춰 텐챠이의 신응도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다.
까득!
장기린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수직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는 진천룡.
푸른빛을 머금은 흑색의 창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룡인 양 위풍당당하게 텐챠이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기이이잉―!
후우우웅―!
칼날이 떨리는 소리.
바람이 흔들리는 소리.
진천룡의 칼날이 텐챠이에게 닿으면 장기린의 승리다.
신응도의 칼날이 장기린에게 닿으면 텐챠이의 승리다.
수직으로 내려오는 창날의 움직임이 이미 가슴에 거의 닿아 있던 칼날을 따라잡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교차하고, 서로가 서로의 몸에 자신의 무기를 갖다 댔다.
푸화아아악―!
먼저 폭발한 것은 텐챠이의 오른쪽 어깨.
장기린의 창날이 텐챠이의 어깨에 닿는 순간, 맹렬한 파동과 함께 상처가 쩍 벌어지며 핏물이 허공에 비산했다.
텐챠이의 얼굴이 꿈틀,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텐챠이의 신응도가 장기린의 가슴을 그었다.
촤아악―!
“큭……!”
장기린은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텐챠이의 어깨는 거의 함몰되다시피 변했다. 하지만 가슴을 수평으로 가른 장기린의 상처도 얕지는 않다.
놀랍게도 장기린이 심검을 사용했음에도 텐챠이와는 동수밖에 이루지 못한 것이다.
장기린은 오른손으로 진천룡을 잡고 앞으로 겨눈 뒤, 왼손으로 가슴의 상처를 꾹 눌렀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도끼로 찍은 듯 쩍 벌어진 상처.
목숨과 관련된 중요한 혈맥은 전부 갈라진 듯했다.
화르르륵―!
“크아악……!”
그때, 갑자기 불꽃이 더욱 강해지며 텐챠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치명상을 당한 탓에 불길을 억누르던 기운도 끊어져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크아아아악……!”
장기린은 생전 처음으로 듣는 텐챠이의 비명에 크게 놀랐으나, 그 자신도 그리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뭐라고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섰다.
콰아아아앙―!
“큭……!”
그리고 그 틈새를 가르듯 커다란 폭발이 한 번 더 일어났다.
근처에 널브러져서 다 타 버린 줄 알았던 나무통 하나가 다시 한 번 석랍을 내뿜으며 폭발해 버린 것이다.
텐챠이의 비명 소리가 멀어진다.
땅바닥이 지글지글 들끓고 잔뜩 달아오른 공기가 퍽퍽!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폭발했다.
샛노란 불꽃이 피부를 태운다.
반경 오 장 안쪽은 이미 지옥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텐챠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뭔가를 하려 했으나, 전신이 불꽃에 휩싸인 채 새빨간 화광에 휩싸여 이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장기린은 여전히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상처를 한 손으로 꾹 누른 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공기가 뜨겁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이 주변은 이미 화광으로 충천되고 있었다.
‘이건…… 힘들겠군.’
장기린은 진천룡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이미 한계의 한계까지 쥐어짠 육체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상태로 불꽃의 벽을 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허벅지 아래쪽과 등 뒤에는 철침이 빼곡이 박힌 상태.
게다가 뒤집어쓴 석랍에 붙은 불길이 점점 거세지는 상황이다.
숙적인 텐챠이와의 싸움에,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화염 병기가 일백 개.
아무리 장기린이라도 이건 무리였다.
끝.
최후.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휘연……!’
장기린은 마지막까지 간절히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시야를 뒤덮는 화광(火光).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장기린의 신형은 화염에 휩싸여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