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24화 (129/686)

第百二十一章 ― 전장외부(戰場外部)

남경 공략전이 시작되기 사흘 전.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한 대의 마차가 관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는 굉장히 속도를 내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차 바퀴에 손상이 가지 않을 만큼의 속도를 한계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는 목재로 만들어진다.

물론 중간의 바퀴살에 동물 가죽이나 나무판자로 여러번 보강을 해놓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무거운 것을 실으며 바퀴가 망가지고 고장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는 매우 숙련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마차가 부서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를 내게끔 조절할 줄 아는 것이다.

“이보게, 괜찮은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사이로 엄숙한 목소리가 마부에게 들려왔다.

선한 인상에 수염을 짧게 기른 마부는 여전히 고삐를 쥔 채로 서글서글하게 대답했다.

“어이쿠, 어르신. 사실은 괜찮지가 않습니다. 이렇게나 정신없이 달려본 건 제 생애 두 번째이구만요.”

마부는 너스레를 떨면서도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를 안전하게 조종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가 않은 일인 것이다.

“허허, 두 번째라면…… 혹시 첫 번째는 지난번의 그때인가?”

“예. 다친 소저를 데리고 있는 분을 태워 드렸을 때 말입니다. 어이쿠, 얼마나 재촉을 하시는지…… 제가 해 지고 나서 마차를 몰아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죠.”

“허어, 위험했군.”

“예에. 특히 중간에 산적을 만났을 땐 이제 다 끝이구나 싶었는데, 태워 드리던 분이 놀라운 고수여서 살 수 있었습니다요. 이건 그때의 은혜를 갚는 겁니다.”

“그런가……. 알겠네. 그럼 조금만 더 부탁하지. 그래도 전에 말했던 대로 품삯은 두 배로 쳐주겠네.”

“어이쿠! 감사합니다요!”

마부는 사양하지 않고 신바람이 난 듯 기운차게 고삐를 휘둘렀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마차는 관도를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역시…….”

마차 안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골이 장대한 노인, 한 사람은 얼굴이 대추처럼 붉지만 수염을 길게 기른 선풍도골의 노인,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듯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미모의 여인, 진휘연은 촉촉이 젖은 눈가를 숨기려는 듯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고생이 많았던 거네요.”

진휘연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마부와 대화를 나누던 선풍도골의 노인, 우문환은 세간에서 삼대신의(三大神醫) 중 하나인 흑신의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손을 대서 못 고치는 병이 없었고, 큰 병을 앓고 죽어가던 사람도 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다시 살려 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런 흑신의도 손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병이다.

이것만큼은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고칠 수 없다.

지금 역시도 사랑에 빠져 감격하고, 또한 슬퍼하는 여인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허, 내 말하지 않았나. 소저, 남자라는 족속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점에 기뻐한다네. 장 소협은 소저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걸세.”

“…….”

“이렇게 직접 전쟁터로 찾아가는 것만 해도 대단하지. 안 그런가, 당가야?”

우문환이 눈치를 주자 옆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던 기골장대한 노인이 움찔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문환을 힐끗거리는 시선엔 쓸데없이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커험, 뭐, 그, 그렇지.”

“그래그래. 그러니 소저도 이제 인상 좀 펴게. 그런 얼굴로 연인을 찾아가면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서겠어.”

휘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연인…….”

그녀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 혼자 유난을 떨며 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불편하셨죠?”

한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진휘연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

진휘연은 사람과의 벽을 허물고 마음을 터놓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깨어나고 나서는 그리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우문환과 당 노인이 진휘연을 친손주 못지 않게 아끼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불편할 게 뭐 있겠나. 괜찮네.”

“커험, 그놈이 죽일 놈이지. 소저에게 걱정이나 끼치다니.”

당 노대의 심술 궂은 한마디에 휘연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아니에요. 객주님은 저를 위해 험한 곳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는걸요. 제가 오히려 걱정을 끼친 거죠. 다 제 탓이에요.”

조금 전처럼 슬프거나 우울해 보이지는 않지만 단호한 얼굴에선 죽어도 장기린을 욕할 수 없다는 듯한 의지가 엿보인다.

당 노대는 우문환의 손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 오자 불편한 얼굴로 몸을 조금씩 비틀었다. 우문환이 괜한 말을 했다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커험! 날씨 좋구만―!”

창밖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는 당 노인.

그사이, 우문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진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저, 앞으로 삼 일 후에는 남경에 도착하게 될 걸세. 우리 두 사람이 도울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으나 그 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지금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을 수행하는 중이다.

진휘연이라는 여인에게 정이 많이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저버리면서까지 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두 분 다 바쁘신 분들이잖아요. 할 일이 있으신데도 저를 데려다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진휘연은 고개를 숙였다.

신의 의술을 가진 우문환.

암흑가에서 천금을 주고라도 찾고 싶어하는 당 노인.

두 사람 모두 그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기엔 너무나 귀중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크흠, 가능하면 좀 더 도와 주고 싶네만…….”

“정해진 시기에 못 맞추면 상당히 큰일이 나는 상황이다. 어린아이들 사랑놀음에 참견해 줄 상황이 아니야.”

우문환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당 노인이 단단한 바위 같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네, 알고 있어요.”

진휘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말만 들으면 당 노인이 무심한 사람 같지만, 사실 그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일부러 모진 소리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당 노인은 어떤 면에선 우문환보다 더 유한 심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평상시 환자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늘상 달고 사는 우문환이 의외로 당 노인보다도 칼같이 단호한 면이 있었다.

“지금 저를 데려다 주시는 걸로도 충분해요. 사실 저 혼자 보내셔도 되는 일인데, 두 분 모두 저를 걱정해 주셔서 원래 갈 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 주셨잖아요.”

원래 두 사람이 가야 하는 곳은 사천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본래 훨씬 빨리 갈 수 있는 대로를 놔두고 그녀 때문에 이틀이나 더 걸리는 남경 쪽 관로로 굳이 돌아왔다는 소리였다.

“커험!”

“크흠!”

진휘연의 말에 두 노인이 각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진휘연은 다시 한 번 살풋 웃었다.

“감사합니다, 두 분.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 말은 진휘연의 진심이다.

그녀는 두 사람 덕분에 살아났다.

그리고 두 사람 덕분에 이렇게, 장기린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말 말게. 그럼 나는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군.”

우문환은 인자한 얼굴로 안타까운 듯이 진휘연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저는 진심으로 두 분께 감사하고 있어요.”

“사실 나는 좀 더 도와 주고 싶었다네. 하나 삼 일 뒤에 소저를 내려 주고 곧바로 떠날 수밖에 없으니……. 나로선 마음이 편치가 않네.”

“그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소저가 지금 찾아가는 사람이 인덕이 많다는 걸세.”

“네?”

진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찾아가는 사람.

장기린을 말함이다.

“살아오면서 덕을 많이 베푼 것 같더군. 허허, 그를 돕는다니 나서겠다는 사람이 아주 많았네.”

“아……!”

“짐작 가는 것이 있는가? 허허, 사람은 원래 힘들 때 진가가 드러나는 법일세. 덕을 베풀면 덕이 돌아오는 법. 그 청년은 아주 보람된 삶을 살아온 게 틀림 없어.”

진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문환의 말대로다.

사람은 힘들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지 않던가.

정말로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어려울 때는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인데도 어려울 때 아낌없이 도와 주는 사람이 있다.

진휘연은 가문이 망했을 때 그 점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때만큼 아버지의 인덕이 부족함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우문환이 한 말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장기린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너무나도 기뻤다.

“삼 일 후에 남경에 도착할 때 즈음, 우리들은 가게 되지만 대신 도와 줄 사람이 있을 걸세. 그러니 소저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네……. 감사해요, 정말로.”

“괜찮네. 이것도 인연인 게지. 그나저나 하늘이 흐리군. 비가…… 많이 내리겠어.”

우문환은 침중한 얼굴로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선풍도골의 용모를 지닌 우문환이 그런 말을 하자 묘한 깊이가 느껴졌다.

진휘연은 반대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칙칙한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하늘 아래, 그녀를 태운 마차는 빠른 속도로 남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북천맹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경성 안으로 돌입하기 두 시진 전.

남궁세가의 적자이자, 풍운객잔의 하인으로 일했던 남궁휴는 조금 전에 건네받은 서찰을 들고 부운화에게로 향했다.

막사 안에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검은색 철갑을 입고 머리에는 문사건을 쓴 마른 체구의 사내는 섭우생.

하얀색과 노란색이 섞인 비단 궁장을 입고 앞머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돌려서 비녀로 고정해 둔 아름다운 여인은 무림에서 지다화라 불리는 모용소희였다.

그 두 사람과 부운화는 중간에 넓게 펼쳐 놓은 지도를 사이에 두고 뭔가를 격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옆에 놓인 지필묵은 이미 수십 번이나 사용된 듯 주변에 먹물을 흩뿌리고 있었다.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작성을 하는 모양인 듯했다. 실제로 남궁휴가 이 막사에 막 들어왔을 때는 섭우생이 직접 미친 듯한 속도로 서찰에 글씨를 적어 가고 있었다.

“북천맹이 움직이다니…….”

“그건 남경에 있는 북천맹을 말함인가요, 아니면 다른 지역에 있는 북천맹인가요?”

섭우생과 모용소희는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다른 지역의 북천맹입니다. 사혈방과 녹림, 황산파의 세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으음, 그들에게 그런 여유가 있었습니까?”

부운화는 부드럽지만 냉철한 얼굴로 남궁휴를 바라봤다.

부운화.

장기린의 의동생이자 실질적인 적룡기마대의 지도자다.

남궁휴는 그의 앞에 서자 내심 긴장이 되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혈방과 녹림이 전력상 무림맹을 압도하고 있던 것은 알고 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만.”

“오왕, 아니, 사왕들이 지금까지 마음껏 싸울 수 있던 이유는 남경에 있는 북천맹이 뒤를 받쳐 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림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림은 남경의 북천맹을 의식해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전면에 나섰더라면 전황이 많이 달라졌을 테죠.”

부운화와 섭우생, 모용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군대에 의해 북천맹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여 북천맹의 사왕은 각자 가지고 있던 병력을 돌려 남경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음……. 남궁 소협, 그 병력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십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세 사람 중 섭우생이 나서서 질문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사왕이 각자 일천 정도씩 차출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천 명…….”

섭우생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확실히 이젠 ‘병력’이라고 불러야 할 숫자였다. 무림문파라기보다 하나의 군 세력에 가까울 만큼 북천맹은 크게 성장한 것이다.

“감사한 정보로군요. 그런데 어째서 황실 쪽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던 걸까요?”

섭우생은 부운화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들은 황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고 있었다.

만약 그런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들에게도 연락이 오는 것이 상식이다.

“황실도 지금 정신이 없을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남경으로 오신다고 들었거든요.”

“뭣……!”

“뭐라고……!”

이번엔 모두가 그야말로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부운화조차 인상을 지그시 찌푸릴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남경으로 온다니.”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전장에 나가겠다고 하신 모양입니다. 북경의 관리들이 난리가 난 모양이더군요.”

“으음, 그렇다면 그 북천맹의 원군은 설마?”

“예. 폐하를 노리는 걸로 보입니다.”

막사 안에 침묵이 흘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황제가 전장에 직접 달려 나오고, 그를 노리는 병력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누구도 침착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부운화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섭우생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아까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남경 외곽에서 뭘 해야 한다고 했지?”

“예. 나중에 적군이 퇴각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잠깐, 잠깐! 그걸로 끝입니까? 그냥 그렇게 넘어가도 되는 화제입니까, 이게?!”

남궁휴는 너무 놀랍고 황당해서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부운화는 너무나 태연했다.

마치 황제가 아니라 인근 농민이 자원병으로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섭우생도 그렇다.

부운화가 묻는 말에 별다른 이견 없이 순순히 대답할 뿐이다.

단 한 사람, 모용소희만큼은 남궁휴랑 같은 생각인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운화와 남궁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남궁 소협.”

그런 그에게 말을 꺼내는 부운화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했다.

“남궁 소협은 폐하에 대해서 모릅니다.”

“예……?”

“그분이 괜히 철혈의 황제라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장에 칼이 꽂혀도 벌떡 일어나실 분. 이 세상의 그 무엇이 그분을 해할 수 있을지 저는 상상이 되질 않는군요.”

부운화는 차분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미미하게 찌푸린 눈매에서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남궁휴는 그 순간 깨달았다.

부운화는 그가 모르는 황제의 비밀 같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점은 부운화에게 불쾌감을 주는 듯했다.

죽여도 죽지 않을, 마치 인세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보고 그에 대해 대화하는 듯한 초월적인 불쾌감이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남궁휴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습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남궁휴는 부운화가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을 알았지만, 그래도 굳이 캐물었다.

지금 그걸 알지 못하고 넘어가면 두고두고 마음속에 의문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 무공이 강하신가?’

영락제가 전쟁터를 즐겨 나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절세고수들이 판을 치는 북천맹의 인물들만큼이나 강할까 싶었다.

“남궁 소협, 소협은 폐하께서 어째서 철혈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는지 압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개국공신의 지위에 빌붙어 있는 자,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온 사족(士族)들. 그런 권문세족들의 뿌리를 뽑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

남궁휴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그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철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계기라면 인상이 좀 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철혈은 그 처리 과정에 있어서 생겨났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철저한 섬멸전. 단순히 무력과 병력으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 두뇌를 사용해 철저하게 상대를 짓뭉갰기 때문입니다.”

부운화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전쟁터에서 거칠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사용하는 어휘가 상당히 거친 것이다.

“즉, 황제 폐하께서는 북천맹에서 습격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남궁휴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되물었으나 부운화는 딱 부러지게 단언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책이 있어야…….”

“만약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셨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미리 연락을 취하셨을 겁니다. 한데 그런 것 없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저희의 힘이 필요없으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남궁휴는 잠시 뭔가를 말하려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어찌됐든 황제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부운화다.

그렇다면 남궁휴가 뭐라고 말할 부분은 없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우둔한 자가 산을 옮기듯, 본래 조금 우둔한 사람처럼 사는 것이 더욱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법이지요. 남궁 소협께서도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너무 머리를 쓰시다가는 오히려 걱정만 늘어나서 쓸데없이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씩 웃으면서 섭우생이 하는 말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봐 항상 하늘을 올려다보고 살았다는 고사(古事)를 인용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남궁휴가 과하게 걱정이 많다는 것을 놀리는 말이었는데, 부운화는 그런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폐하를 도울 사람은 저희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을 보자면…… 그래요, 무림맹이 있지요.”

“무림맹…… 이요?”

“황제 폐하를 노리는 사천 명의 적도를 막아 낼 만한 고수들 말입니다. 무림맹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죠. 남궁 소협께서 저희에게 하려던 말도 상황이 이러하니 무림맹에 연락을 취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뜻 아닙니까?”

“……!!”

남궁휴는 놀랐다.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건…… 어떻게……?”

“이건 기밀입니다만, 폐하께서 휘하의 모든 병력을 저희에게 주신 탓에 이제는 정말로 명 제국 내에서 병력을 차출할 만한 곳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무림맹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남궁 소협께서는 계속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체면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가 자신들을 초청하게 만드는 건…… 무림맹의 상투적인 방식 아닙니까?”

씩 웃는 섭우생은 너무 말라서 볼이 움푹 들어간 탓에 아무리 좋게 봐도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궁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무림맹과 황제가 취할 행동을 예측한다.

그 모습은, 남궁휴가 보기엔 현재 무림맹에서 계책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제갈가주보다 더욱 뛰어나 보였다.

“과연…….”

남궁휴는 씁쓸하게 웃었다.

“객주님의 의형제분들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하하, 그건 칭찬이지요?”

섭우생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궁휴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사실대로 말했다.

“섭 소협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림맹에서는 남경을 공략하는 싸움에 도움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무림인들은 무림과 관을 나눠 놓고 싶어하기 때문에…… 무림맹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밀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북천맹에서 강호관직론이라는 것을 내놓아서 더욱 그렇지요. 이미 사혈방이나 녹림이 관인들에게까지 손을 대고 있는 마당에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림맹의 입장에선 더 이상 무림인들의 인망을 잃고 싶지 않아합니다.”

섭우생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부운화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쪽의 모용 소저도…… 대충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남궁휴의 지적에 모용소희가 조금 얼굴을 붉혔다.

지다화(智多花).

제갈가주의 뒤를 이을 거라 기대받고 있는 모용소희는 무림맹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주기적으로 무림맹에 연통을 넣고 그에 상응하는 정보도 얻고 있을 것이다.

“저, 저는…….”

모용소희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충 알고 있었어요. 무림맹은 이곳에 참전하고 싶어해요. 다만 명분이 없어서 끼어들지 못하고 있지만요.”

“예에, 그렇군요.”

섭우생은 수염도 없는 턱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부운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째 형님, 어떻게 할까요?”

“즉, 무림맹은 남경 공략전에 참전하고 싶은데, 관의 일에 간섭한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몸을 사리고 있다는 뜻이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부운화는 남궁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남궁 소협, 폐하께서 이미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만.”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음, 그렇군요. 그럼 저도 공식적인 서신을 한 통 보내 놓도록 하죠. 용건은 폐하를 노리는 적도들을 막아 줄 것. 이거면 되겠습니까?”

“예, 그거면 됩니다. 하지만 이왕 공식적인 서신이라면 뭔가 관직이 있는 분이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 말에 옆에서 섭우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남궁 소협.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계신 둘째 형님은 꽤나 높은 관직에 올라 계시니까요. 무림맹의 체면을 세우기에도 충분할 겁니다.”

“아, 그렇군요…….”

남궁휴는 부운화를 새삼 다시 봤다.

뛰어난 인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관직까지 갖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이미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관직에 오르지 않은 것이 더욱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맞을까요? 이미 사천 명의 군사가 남경을 향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제 와서 무림맹에 서신을 보내도 늦을 것 같은데요?”

모용소희는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저.”

“네?”

“아마 무림맹은 이미 전력을 모아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 정말로요?”

모용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이쪽에서 서신을 보내든 보내지 않든 폐하를 지켜야 하는 건 기정사실일 테니까 말이죠. 이미 그에 대한 준비는 마쳤을 겁니다.”

“아……!”

“다른 문파는 여력이 없을 테니, 아마 소림이 직접 와 있겠군요. 속가와 동맹 표국들의 힘까지 모조리 동원했겠죠. 그쪽의 싸움도 상당히 거칠겠는데요?”

섭우생은 씩 웃으며 북서쪽 방향의 어딘가를 멀리 바라봤다.

모용소희는 그런 섭우생을 멍하니 쳐다봤다.

섭우생의 두 눈은 아득히 먼 곳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겐 없는 능력. 신기의 경지에 이른 두뇌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게 만든다.

“크흠.”

한편, 남궁휴는 헛기침을 한 뒤 부운화를 바라봤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저는, 아니, 저와 함께 온 동료들까지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부운화는 남궁휴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럼 남궁 소협은 전투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아뇨. 돌아올 겁니다만, 아마 전투 도중에 참가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저는 전투가 시작된 뒤에는 어느 쪽으로 돌아와서 도우면 좋을지 묻고 싶습니다.”

웬만하면 전투의 시작 때부터 함께하고 싶지만, 지금 그가 가려는 곳은 남경의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한 용무가 있었다.

“그렇군요. 나중에 돌아왔을 때의 합류 지점입니까?”

“예.”

“우생?”

부운화의 부름을 받은 섭우생이 곧바로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라면 한 사람이라도 고수의 손이 더 필요한 곳을 알려 드리면 되겠군요. 전투 시작 후 한 시진 뒤라면 이곳, 두 시진이 지났다면 이곳입니다. 두 시진 이후가 될 경우, 그다음 싸움은 이곳이나 이곳, 둘 중 한 곳에서 마무리될 것입니다.”

거침없이 말하는 섭우생은 마치 이후에 일어날 싸움의 경과를 머릿속으로 다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책사들은 보통 전략을 수립할 때, 머릿속에서 가상 전투를 백 단위로 돌려보고 마무리한다고 했다. 아마 섭우생도 그런 사람일 거라고 남궁휴는 추측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로 합류하도록 하죠.”

남궁휴가 지도의 모습과 필요한 지점들을 머리에 넣은 뒤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잠깐, 남궁 소협.”

“예?”

“어떤 일로 가는 건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남궁휴는 부운화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 내며 대답해 주었다.

“객주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지금 가는 곳엔…….”

설명이 끝나자 부운화와 섭우생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남궁휴는 당당하게 뒤돌아서 막사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흐렸다.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이었다.

☆ ☆ ☆

황제의 행차는 빠를 수가 없다.

누가 그렇게 정해 놓아서가 아니라, 절차상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는 데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정면 삼백 보 앞에서 주변 오백 보 내에 위험한 자가 없는지 정찰하고, 기백이 넘는 고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종과 환관들을 대동한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위엄을 유지하며 움직여야 하는 것이 황실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원이 주변 경계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움직이니 빨리 이동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터.

본래대로라면 북경에서 남경까지 가는 것만 해도 몇 십 일이 걸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황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특권(戰時特權)’이라는 것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움직인다.

시종이나 하인 따위는 따라붙지 않는다.

전장에서도 장애물이 되지 않을 법한 인물들만 선별되었기 때문이다. 어림군과 팔기군은 장기린에게 양도해 주었지만, 황제에겐 아직 금의위가 남아 있다.

금의위의 숫자는 일만.

황제는 그중 최정예 일백 명을 데리고 나왔다.

비단 금포에 금색 갑주를 입은 황제와 그 주변을 물샐틈없이 호위하고 있는 금색 비단 옷의 금의위들.

그 모습은 일견하기에도 장관이었다.

“폐하.”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 사이로, 금의위의 차세대 대장으로 신임받고 있는 부장(部將) 공보하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러느냐?”

황제는 고삐도 잡지 않은 채 익숙한 자세로 말을 몰며 되물었다.

“이 앞의 고개를 넣으면 이제 남경까지는 지척이옵니다. 다만 지형적으로 위험할 수 있으니 잠시 쉬어 가시는 게 어떨까 하옵니다.”

공보하는 언제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거친다.

이번에도 남경으로 향하는 황제의 급작스런 명령에 밤을 세우며 남경까지의 지형과 특징에 대해 미리 암기해 둔 그였다.

“위험하다? 어떻게 위험하다는 말이냐?”

“내리막길을 지나면 비교적 폭이 좁은 협로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때 양쪽으로 언덕이 있는 탓에 적도들이 기습을 하기에 유용하옵니다.”

“호오, 그런가?”

“예, 폐하. 그러니 금의위들이 정찰을 할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하옵니다.”

황제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강호에 나가면 뛰어난 고수로 손꼽힐 것이 분명한 금의위 부장 공보하조차 한 손으로는 고삐를 거머쥐고 있었다.

“백(白),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여전히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묻는 황제의 말에, 우측 뒤에서 함께 말을 달리고 있던 문사복의 사내가 대답했다.

“공보하 부장의 말은 타당합니다만, 폐하께선 어차피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겠지요.”

“호오?”

황제의 오른쪽 입꼬리가 끌어 올려졌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금의위들이 몸을 움찔했다.

철혈의 황제. 영락제.

그 드높은 자존심은 감히 자신을 재단하려는 오만한 자를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실제로 예전에 대전 회의에서 황제의 의중을 지레짐작해서 말하던 대신(大臣)이 헛된 것을 보고 있다며 눈이 뽑힌 적이 있다.

감히 은연중에 황제를 조종하려던 자는 간특한 입을 놀렸다며 혀가 잘렸다.

금의위는 황제의 수족이 되어 그 위엄을 지키는 업무를 하는 자들이다.

당연히 그 형(刑)의 집행 또한 금의위가 직접 했다.

이제껏 그런 모습들을 줄기차게 보아 온 금의위들은 일순 폐부가 싸늘해지는 심정으로 황제가 어떤 처분을 내릴지 기다렸다.

‘눈이 뽑힐까?’

‘혀가 잘리려나?’

‘감히 황제 폐하의 의중을 지레짐작하다니, 겁이 없는 자로구나.’

하지만 황제의 대답은 그들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하하, 과연. 너는 짐의 심중을 잘 알고 있구나.”

황제는 껄껄 웃었다.

그야말로 관대한 대장부의 모습이다.

금의위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황제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한 사람은 백색의 문사복을 입은 사내.

다른 한 사람은 흑색의 무복을 입었다.

두 사람은 체형과 느낌이 모두 달랐는데, 그나마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금의위 부장, 공보하.”

“예. 신 공보하, 폐하의 부름을 받사옵니다.”

공보하는 말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중한 예를 표했다.

“금의위의 위장이 이곳에 동행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그대가 책임자일 테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럼 그대에게 명한다. 휴식은 없다. 정찰도 필요없다. 적이 나타난다면 최대한 교전을 피하면서 무조건 남경을 향해 달리도록.”

“…….”

“다른 의견이라도 있나?”

공보하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씩 웃는 얼굴로 묻고 있으나, 마치 태양처럼 활활 불타는 황제의 두 눈은 감히 그의 반론을 불허(不許)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다. 믿으마.”

황제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여전히 고삐는 잡지 않고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멀리 남쪽을 바라볼 뿐이다.

두두두두―

히히힝!

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아가기를 대략 일각 정도.

어느 순간, 공보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미 대열 모두가 협로로 접어든 상황.

그때에 맞춰 우측 언덕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의 군기(軍氣)가 확! 하고 솟아올랐다.

“부장! 우측 언덕! 적군입니다! 숫자는 일천 이상!”

“부장! 좌측 협로에서 적군입니다! 숫자는 오백가량!”

“부장! 정면! 창을 든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숫자는 약 오백!”

미리 정찰을 위해 대열에서 이탈해 있던 금의위의 대원들이 속속들이 귀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백인가…….”

공보하의 시선이 좌우를 바쁘게 훑었다.

역시나 적은 최적의 위치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에 대기하고 있던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눈을 가늘게 뜬 공보하는 삼백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오백 명의 적군이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병사들의 뒤편에선 흙먼지가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뛰어온 건가? 즉, 간신히 시간에 맞췄다는 거다.’

황제는 처음 북경을 벗어날 때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릴 것을 명령했다.

각종 무공과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금의위들조차 지쳐서 허덕일 만큼의 진군 속도였다.

그런 움직임을 따라잡아 길을 막는 것은 적들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터.

고작 오백 명이 정면을 막고 있다는 것이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적들은 아직 지쳐 있고 병사들 사이의 진형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싸워 볼 만하다.’

진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오합지졸이 상대라면 숫자상 다섯 배의 차이가 나더라도 충분히 싸워 볼 만했다.

“부장! 우측에서 적이 접근! 멈추면 화살이 닿을 겁니다!”

“부장! 좌측 협로에서 나타난 병사들은 보병입니다. 멈추면 포위당합니다!”

공보하는 수하들이 외치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황제는 적이 나타나도 멈추지 말고 무조건 뚫고 나가라고 했다.

황제의 명령이다.

하늘의 명령.

그에게는 천명(天命)이다.

“금의위 전원, 발검―!”

채채챙!

공보하가 냉정하고 침착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거친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일백 명의 금의위가 일제히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대부분이 검날의 폭과 길이가 일정한 협봉검.

그중 부장인 공보하와 몇 명은 칼날의 폭이 좁은 협도를 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무림인은 집단전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으나, 금의위는 그에 대해 예외인 몇 안 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무공을 익히면서 군(軍)으로서의 집단전도 빠짐없이 익힌다.

여차할 때는 황제의 곁을 지키며 반란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의위는 곧바로 파성추와 같은 형태로 진형을 갖추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앞쪽의 첨병으로는 공보하.

그 옆과 뒤를 받쳐 주는 형태로 일백의 금의위가 뒤따랐다.

“폐하, 뒤쪽으로 물러나 주시옵소서! 전투의 여파가 미칠 수도 있사옵니다!”

황제는 크게 웃었다.

“하핫! 그대는 재미있군. 짐을 무력한 문사처럼 취급하다니.”

“아니, 그게 아니오라……!”

“시끄럽다, 공보하. 선두를 내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도록.”

여전히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달리는 말 위에 오연히 탑승해 있는 늠름한 황제.

공보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쪽이 고작 일백의 숫자에 불과할지라도.

정면에 오백의 병사들이 있고 주변을 수천의 적도들이 포위하고 있음에도, 왠지 절대로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순전히 황제의 마력(魔力)과도 같은 존재감 때문이리라.

공보하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는 손에 든 협도를 앞으로 내뻗으며 뱃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크게 외쳤다.

“돌격하라아―!”

오백의 적도들이 허둥지둥 창을 들어 올렸다.

물론 창은 돌격해 오는 상대에게 효과적이다.

하지만 금의위라면 말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며 정면의 창을 옆으로 쳐 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두두두두―!

푸화악!!

“크아악……!”

달려오는 말의 기세를 살려 휘두른 검에 목이 날아가는 병사들.

뿌옇게 피어오르는 핏물 사이로 온갖 비명이 터져 나왔다.

퍼억!

콰직!

달려가던 기마와 엉성하게 서 있던 병사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굉장히 섬뜩하게 들렸다.

공보하는 가장 선두에 서서 순식간에 다섯 명의 목을 베어 낸 뒤, 습관적으로 그의 뒤쪽을 따라오던 황제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무리 사기가 올랐더라도 백 단위가 넘는 전투는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공보하는 황제를 호위하는 ‘백’이라는 자의 실력을 항주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전쟁터에서는 호위가 있어도 별로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기에 걱정이 되었다.

공보하가 아무리 정면의 적을 쳐내고 쓰러뜨리더라도 슬쩍 틈새를 빠져나간 적병들이 황제에게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으음……!”

하지만 뒤를 돌아본 공보하는 자신의 우둔함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가 걱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의 수가 다섯 배나 많다 보니 포위한 채 틈새를 노리고 접근하는 자들도 몇 명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황제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호위무장인 ‘흑’이나 ‘백’이 나서서가 아니었다.

황제가, 그 자신이 직접 달려드는 병사들의 머리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있었다.

“하핫! 별거 아니구나!”

호탕하게 웃는 황제는, 이 순간만큼은 황제가 아니라 경험 많고 패기 넘치는 장수로 보였다. 말에 탄 채로 가볍게 걷어찰 뿐인데도 적도들은 안면이 박살 난 채 퍽퍽 널브러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오히려 더욱 그 위험함을 알게 되는 모습이다.

공보하는 감탄했다.

황제는 대체 못하는 것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 우측에서 적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 중입니다!”

“부장! 좌측 협로! 창병들이 달려옵니다! 앞으로 삼십 장!”

수하들의 보고에 공보하의 눈이 빠른 속도로 좌우를 훑었다.

우측에선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는 궁병들이.

좌측에선 창을 든 병사들이 쫓아오고 있다.

금의위들이 조금만 시간을 지체하거나 발이 묶이게 되면 곧바로 포위당할 형세.

공보하는 긴장했다.

한 발만 삐끗해도 숫자가 적은 자신들 쪽이 큰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아무리 적들이 엉성한 모습으로 서 있다고 한들, 그래도 숫자가 오백이나 된다.

일백의 금의위 중에는 곧바로 돌파하지 못하고 점점 발이 묶이는 자들이 하나둘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공격을 당하면…….’

설령 무사히 오백 명을 돌파한다고 한들, 절반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공보하는 순간적으로 지금이라도 진영을 다시 짜서 차근차근 전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공보하.”

그런 공보하의 혼란을 느낀 것일까.

등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를 들려왔다.

“그대로 돌격하라.”

그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다른 자의 의심을 불허하는 강인한 목소리였다.

“옛!”

공보하는 그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평소에는 냉철하고 영민하게.

하지만 황제의 명이 떨어지면 그 외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금의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다.

☆ ☆ ☆

사혈방에서 동원한 군대의 우두머리로 뽑힌 방백(傍伯)은 백도(百刀) 중 상위에 손꼽히는 실력자로서, 사혈방 내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중의 고수였다.

절정을 넘은 지는 오래.

그는 이제 초절정의 경지에 훌쩍 다가섰다고 자신했다.

방주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꿈이 아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사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이끌게 된 것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천하의 대장군으로 입신양명할 꿈을 꾸는 법이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천 단위의 병사들을 이끌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림인으로 시작해 사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이끄는 장수가 된 방백.

손가락 하나로 수천 명을 부릴 수 있다.

그의 결정 하나에 사천 명의 생명이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방백은 그러한 상황에,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한 희열을 느꼈다.

“잘 들어라! 저놈들만 없애면 이제 이 세상은 북천맹의 것이다! 흑도에서 굴러먹던 네놈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지금 같은 기회는 절대 없다! 이 위기만 넘어가면 네놈들 같은 구제불능의 망나니들도 삼처사첩을 옆에 끼고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 이거야!”

금의위와 황제를 가리켜 말하면서 존칭마저 쓰지 않는다.

이미 사흘 밤낮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달려오느라 지쳐 있던 병사들이지만, 방백의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북천맹은 냉혹하지만, 그만큼 계산은 확실했다.

이번 전투에서 싸워 이기면 그만큼 좋은 대우를 해줄 것이다.

“죽여! 죽여 버려!”

“한 놈이라도 잡아 족치고 죽어라!”

“다섯 놈당 한 놈이야! 그것도 못하면 혀 깨물고 죽어랏!”

“우오오오―!”

지치고 의욕없던 병사들이 창을 내던지고 각자의 진짜 무기를 뽑아 들었다.

애초에 흑도에서 굴러먹던 무인들이다.

급조해서 집단 창술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평소에 쓰던 무기가 익숙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병사들이 본래의 무기를 사용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자 파죽지세로 헤쳐 나가던 금의위들의 진군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좋아, 좋아.”

방백은 사혈방에서 직접 데리고 온 검사 다섯 명을 자신의 호위로 세워 두고 다른 병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동쪽 언덕을 넘어서 오고 있는 궁병들이 이제 거의 도착했다.

서쪽 협로에서 달려오는 오백 명의 사혈방 무인들도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

즉, 그가 오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싸움이 승리로 끝날 수 있다는 뜻이다.

푸화아악―!

“호오? 금의위 꼴통들 중에서도 저런 놈이 있었나?”

방백은 금의위의 선두에서 파죽지세로 병사들을 베어 내고 있는 냉막한 인상의 젊은 청년을 노려보았다.

금의위의 옷을 입고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거만한 태도로 보여 주기 위한 검술만을 쓴다.

그게 방백이 금의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었지만, 선두에 서 있는 청년만큼은 달랐다.

폭이 좁고 긴 협도를 사용하는데, 오로지 상대의 치명적인 요혈만을 노리는 검술은 인의가 없는 완벽한 살검(殺劍)이고, 전후좌우를 모두 망라하는 검의 움직임엔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달인의 경지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집요한 수련을 쌓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법이잖나. 저놈. 황실에도 제법 쓸 만한 무공이 좀 있었나 보지?”

방백은 등 뒤에서 손바닥 두 개만 한 외날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론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손바닥만 한 작은 손도끼를 뽑았다.

“일단 옆에 있는 놈부터…….”

왼쪽 다리를 뒤로 빼고 크게 허리를 젖히는 방백.

뒤쪽으로 빠졌던 왼발이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방백의 왼손에 들려 있던 손도끼가 정면으로 날아갔다.

쉬이이익―!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간 손도끼는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금의위 한 사람의 어깨에 꽂혔다. 어깨에 손도끼가 꽂힌 금의위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말에서 낙마했다.

선두의 바로 옆을 지키던 것으로 보아 대장에게 제법 신임받던 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계속 정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냉막한 인상의 청년은 그 금의위가 낙마하자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타핫! 그다음은 두 번째!”

방백은 다시 한 번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왼발을 뒤에서 앞으로 내딛으며, 이번엔 반대쪽의 금의위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엔 선두의 청년이 좀 더 빨랐다.

재빠르게 휘두른 협도가 옆에서 함께 달리던 금의위의 정면을 차단한 것이다.

쩌어엉!!

폭이 좁은 협도가 부러질 것처럼 둥그렇게 휘어졌지만, 간신히 날아오는 손도끼를 쳐 낼 수 있었다.

순간, 방백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의 얼굴에서 불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놈!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마!”

방백에겐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었다.

정도의 하늘인 구파일방.

그중에서도 무당파와 함께 이대검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화산파의 마운부(摩雲斧)라는 정통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사부를 두고 익힌 게 아니라 우연히 화산 근처의 나무꾼으로부터 입수한 비급을 통해 익혔지만, 무공의 깊이나 위력으로 볼 때 저잣거리에 나도는 일반 무공과는 급이 달랐다.

‘제법이긴 하지만, 대충 구색만 갖춘 황실 무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애초에 사람들이 금의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등에 업고 있는 권위 때문이지, 그의 무공 때문이 아니지 않던가.

방백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가 사혈방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될 수 있던 것은 다 마운부 덕분이다.

자신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같은 구파일방의 무공을 지닌 자가 나와야 한다.

방백은 그렇게 생각했다.

촤아악―!

푸화악!!

어느새 금의위의 젊은 수장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순간, 그의 호위를 맡고 있던 다섯 명의 검객 중 두 사람의 목이 날아갔다.

여전히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는 동작이다.

“흥, 쓸모없는 것들.”

방백은 왼손에는 손바닥만 한 손도끼, 오른손엔 큼직한 외날 도끼를 들고 금의위의 젊은 수장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두두두두―

방백은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고 허리를 비틀었다.

묵직한 외날 대부가 우측 하단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위로 솟구쳤다.

본래 사람은 좌측과 우측 하단이 사각지대다.

특히 말에 타고 있을 때는 허벅지 쪽에 가깝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까다로운 위치.

방백의 외날 대부는 상대의 하체를 그대로 자를 뻔하다가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온 협도에 의해 막혔다.

쩌어엉!

“호오……!”

방백은 감탄하며 오른발을 왼발 옆으로 이동시켰다. 온몸이 좌측으로 일 회전하며 도끼가 다시 한 번 상대를 후려친다.

금의위의 젊은 수장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달려드는 말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말이 발을 구르는 순간, 갈색의 탄탄한 신체가 근육을 꿈틀거리며 힘차게 땅을 박찬다.

금의위가 진군을 멈추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이 서로와 겨루는 시간은 매우 짧을 터였다.

방백은 일격필살의 한 수를 내놓았다.

마운부.

화산 무공의 정수가 담긴 한 수를 전력을 다해 펼친 것이다.

휘리리릭―

왼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도끼를 허공에 내던진 뒤,

쩡!!

오른손에 들린 외날 도끼로 작은 손도끼의 날 부분을 후려쳤다.

젊은 수장의 눈빛이 흔들린다.

반사적으로 처음에 던진 손도끼 쪽을 막으려고 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의외의 한 수를 보여 주면 상대는 조금이라도 당황하기 마련이다.

당황하면 정신이 흐트러지고, 정신이 흐트러지면 손이 조금이나마 느려진다.

방백에겐 그 정도 빈틈이면 충분했다.

큰 도끼에 얻어맞아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상대에게 쏘아지는 손도끼.

그리고 그 뒤를 바로 따라붙으며 외날 도끼가 막강한 경력을 품고 휘둘러지고 있었다.

‘잡았다!’

방백은 승리를 확신했다.

손도끼와 외날 도끼의 투로는 미묘하게 다르다.

손도끼를 막으려면 외날 도끼를 포기해야 하고, 외날 도끼를 막으려면 손도끼를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설령 한쪽을 막으려 협도를 휘두른다고 한들, 방백은 방어를 깨부수고 상대를 곤죽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마운부의 비급에선 마운부의 경지가 구성에 이르면 쇳덩이도 잘라 낼 수 있다고 했다.

방백은 지금 구성의 경지에 올라 있다.

당연히 금의위 나부랭이가 휘두르는 좁고 약한 협도 따위는 일격에 박살 낼 수 있다. 공격을 흘리거나 쳐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운부의 공격에는 주변의 기류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한 번 공격의 범위 내에 들어오면 산사태에 휩쓸린 것처럼 빠져나갈 방도가 없어진다.

‘구파일방의 무공이 아닌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

방백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챠하아앗!!”

소부와 대부.

두 개의 연속 공격이 거대한 기파를 만들어 냈다.

그때까지도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금의위의 젊은 수장은 잠시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운부의 강력함은 한눈에 알아봤을 터.

그는 이내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협도를 휘둘러 왔다.

아니, 휘두르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오른손을 끌어당겨 허리에 붙인다.

신기한 자세였다.

왼손은 손바닥을 쫙 펼친 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협도의 손잡이를 허리에 붙인 채 협도의 칼날은 앞으로 쭉 뻗어 나와 왼쪽 손바닥 아래에 놓인 상태.

검술이라기보다는…… 창술의 자세에 가깝다.

섬뜩하게 빛나는 눈빛.

말 위에서 군더더기없이 자리 잡힌 자세를 보는 순간, 방백은 자신의 위험함을 깨달았다.

‘설마……!’

뭔가가 온다.

방백은 마운부를 전개하는 도중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는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번뜩이는 섬광.

마치 칼날에 태양빛이 반사된 듯 눈을 잠시 찌푸리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쒜에에에엑―!

“……!!”

먼저 날아간 소부는 이미 머리 위로 튕겨 나고 있었다.

그 뒤에 휘두른 외날 대부는 중간의 날이 움푹 파인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잡이가 부러졌다. 방백의 외날 대부는 이름있는 장인이 만든 상당한 명품이었으나, 정체불명의 섬광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박살이 나 버렸다.

‘말도 안 돼……!’

그나마 마지막에 방백이 덮쳐 오는 칼날의 경로를 눈에 새긴 것은 천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빠르다.

이 세상에 이렇게나 빠른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빨랐다.

눈을 뜨고 정면에 놓인 물건을 인식하는 속도보다 빨랐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보다 빠르고, 날아가는 참새의 뒤를 눈으로 쫓는 것보다도 빨랐다.

굳이 비교 대상을 찾자면 벌의 날갯짓에 가까웠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몇 번이나 움직이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방백은 이 세상에 이렇게나 빠른 검도 있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 어마어마한 속도로 뻗어 나온 칼날은 소부를 쳐 내고, 외날 대부의 중간을 쳐서 부러뜨렸으며, 동시에 방백의 목을 갈라 오고 있었다.

피할 방법은 없다.

세 번의 칼질은 그가 눈 한 번 깜짝할 수 없는 짧은 순간에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칼만 일시적으로 초신속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인가. 대단하군, 대단해! 이건 분명 구파일방의 무공. 아마 사라진 점창산의……!’

방백은 허탈하게 입을 벌렸다.

신이 되었거늘.

이제 장군의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며 잘사는 일만 남았거늘.

방백이 한바탕 욕지거리라도 내뱉고 싶었던 그 순간, 섬광은 마침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툭.

묵직한 원형의 무언가가 떨어진다.

그리고 뿜어지는 핏물이 그 무언가의 주인을 붉게 물들였다.

☆ ☆ ☆

두두두두―!

‘아끼는 부하를 잃었어.’

공보하는 부관 한 명을 잃은 것이 안타까웠다.

설마 투척용 무기를 사용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기에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실제로 꽤나 강한 상대였다. 얼마 전에 살수들과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면서 무공이 한 단계 발전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을 만큼 강한 상대였다.

‘대장 급이었을 테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대장 급을 쓰러뜨렸기에 앞으로의 싸움은 좀 더 수월할 것이다. 그는 뒤처지려는 부하들을 다그치며 오로지 앞으로만 돌진했다.

퇴로가 완전히 막히고, 좌측과 우측에서 각자 공격을 당할 상황이 되었음에도 정면으로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적도들은 대장이 쓰러졌음에도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아마 결집력이 약한 대신 이렇게나 집착을 보일 만한 이득이 있는 모양이었다.

“방금 그거, 구파의 무공 아닌가?”

앞만 보고 돌진하던 공보하의 어깨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가까운 곳에 의외의 인재가 있었군. 백, 어떻게 생각하나?”

“무(武)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력이 낮은 게 흠이군요.”

“그래? 흐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공보하, 그대에게는 황실에 돌아가는 대로 영약을 하사하지.”

“……!”

공보하는 자칫 뒤를 돌아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황제와 백의 느긋한 말투 때문에 잊기 쉽지만, 지금 이곳은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치열한 전장이다.

조금 전의 도끼를 쓰던 사내와 같은 고수는 이제 없지만, 그래도 백 단위의 병사들이 앞을 막는 상황에서 다른 쪽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폐하, 혹시 또 ‘이름’을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그것도 괜찮지 않나?”

“만약 이름을 내리신다면 네 번째로군요.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좀 더 신중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책임과 의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공보하는 등 뒤의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수는 다 썼으니, 이젠 사신(四神)을 만들고 싶은데 말이다. 공보하는 왠지 북쪽이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폐하…….”

“알았다. 일단은 돌아가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공보하 부장에게 영약을 내리겠다는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폐하의 뜻대로 되실 겁니다.”

어딘가 포기하는 듯한 ‘백’의 목소리를 끝으로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두근― 두근―

한편, 공보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황제에게 영약을 하사받는다.

포상의 의미를 담은 그 상징적인 의미는 제쳐 두더라도, 일단 황제가 주겠다고 한 이상 범상한 약은 아닐 것이고, 그 정도의 약이 있다면 그동안 정체되었던 무공의 벽을 넘어 버릴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좋아……!’

공보하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듯 움직였다.

표정을 내보이는 일이 없는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

공보하는 한층 더 용기백배하여 휘두르는 칼에 힘을 실었다.

앞을 가로막던 병사들이 그 기세에 놀라 허둥지둥 뒷걸음질쳤다.

좁고 날카로운 협도는 직선적이면서도 빠른 움직임으로 병사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채챙! 챙!

두두두두―!

공보하가 선두에서 길을 뚫고 옆으로 붙은 그의 수하들이 가까이에 있는 적도들을 칼로 베어 낸다.

공보하는 눈앞에 있는 적도들을 이미 열 명 이상 베었으나, 그래도 포위망을 완전히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사이에 좌측과 우측에서 원군이 다가왔다.

공보하는 당장에라도 금의위의 후미가 습격당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오오옴―! 니이이이―!

데에엥!

머릿속에서 종을 치는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공보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황제도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시작은 우측 언덕에서부터였다.

노란색 가사에 붉은색 천을 두른 모습.

박박 민 머리에 여섯 개의 계인이 찍혀 있다.

숫자는 삼백 명 정도 될까.

그중에 제법 나이가 있는 계층은 한 손에 키보다 더 큰 선장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젊은 층은 절반은 맨손, 절반은 두꺼운 목곤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합장을 하며 큰 소리로 불호를 외웠다.

마치 거대한 범종이 치는 듯한 위력이었다.

피를 보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전장의 공기가 대번에 식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선두에 있던 중년의 승려가 전장의 모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쿠웅!

중년의 승려는 선장을 쿵! 하고 바닥에 내리찍었고, 그 순간, 뒤에 도열해 있던 삼백여 명의 무승들이 일제히 동쪽 능선에서 내려오고 있던 적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측에서 몰려오던 적도들의 수는 얼핏 봐도 일천 이상.

하지만 삼백 무승의 힘은 굉장해서, 일천의 병사들이 꼼짝도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할 만큼 장렬한 싸움을 보여 주었다.

그들에 비하면 금의위 일백의 무용(武勇)도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굉장한……!”

저것이 소림의 힘인가, 라고 공보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을 느꼈다.

황제가 황궁을 빠져나온 것은 이변 중의 이변.

황제가 독단적으로 변덕을 일으켰기에 생긴 사건이다.

아마 그 일이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가는 것은 잘해야 오늘 오후 즈음일 터.

그런데 소림이 어떻게 알고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황제의 측근에 사람을 붙여 두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북천맹의 역도들조차 따라붙기가 힘든 속도였는데, 소림은 어떻게 이곳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일까?

‘설마……!’

공보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앞에서 다가오던 세 사람의 목을 베어 내며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전율을 느꼈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오만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호탕한 웃음이다.

공보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황제는 황실에서 나올 때부터 소림에 연락을 취해 두었다.

역도들이 나올 걸 예측하고, 길의 어느 지점쯤에서 사건이 일어날지도 이미 예상했던 것이 틀림없다.

황제는 출궁을 하기 전에 황실 최고의 두뇌라는 현백 학사와 몇 번이나 따로 만남을 가졌다.

그 정도의 기책(奇策)은 준비해 두었으리라.

“그대에게 명한다. 휴식은 없다. 정찰도 필요없다. 적이 나타난다면 최대한 교전을 피하면서 무조건 남경을 향해 달리도록.”

공보하는 황제의 그 말이 이제야 납득했다. 그의 냉정한 얼굴에서 ‘하핫!’ 하고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폐하!”

“음? 왜 그러나, 공보하?”

“폐하께선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전장은 말 울음소리와 병사들의 비명 소리,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까지 합해져서 매우 시끄러웠으나, 그래도 공보하의 목소리는 황제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황제는 그 직후에 특유의 호탕하고 힘찬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챈 그대도 제법 대단하구나.”

공보하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우측에서 몰려오던 일천의 원군을 소림이 막아 주고 있다.

좌측 협로에서 다가오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소림 때문에 어느 쪽을 공격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상황이다.

공보하는 한층 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즐거운 듯이 떠드는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포위망은 뚫렸다.

공보하를 선두로 한 일백여 명의 황금색 무리는 곧바로 남경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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