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25화 (103/686)

第百二十二章 ― 인연지사(因緣之事)

남경 인근 부초(夫椒).

서남 태호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은 예로부터 남경과 연결된 절경지 중에 하나였다.

흑신의 우문환과 신비의 장인인 당 노인은 진휘연을 그곳에서 내려 주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감탄할 새도 없이, 진휘연은 그녀를 마중나와 있는 듯한 익숙한 얼굴의 청년과 마주하게 되었다.

“휴……?”

일 년 만에 만난 청년은 그새 성장한 듯 분위기부터가 예전과 너무나도 달라졌지만, 특유의 매끈한 얼굴형과 영민한 눈빛은 객잔에서 함께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비단옷에 허리에는 간소한 듯하면서도 고급 가죽으로 겉을 감싼 협봉검이 매달려 있었다.

마른 듯하면서도 잘 단련된 몸이기에 품이 넓은 흐늘흐늘한 옷이 매우 잘 어울린다.

남궁휴는 진휘연을 보자마자 살짝 입을 벌린 채 놀란 심중을 숨기지 못했다.

입술이 떨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검증에 검증을 거쳐 마침내 확신에 도달하듯 남궁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내걸렸다.

“침모님!!”

남궁휴는 한달음에 달려와 진휘연의 손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정말…… 살아나셨군요……!”

풍운객잔 가족의 재회다.

남궁휴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솟아 나올 것만 같았다.

항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 눈물샘이 말라 버린 듯한 모습이었는데, 아무리 유들유들해도 기쁨의 눈물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상처 입은 상태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이라니! 정말 잘됐습니다, 정말 잘됐어요.”

남궁휴는 코끝을 손으로 문지르며 주먹으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했다.

“휴도 무사했네요. 다행이에요.”

진휘연 역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궁휴와 운찬이 싸우다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흑신의 우문환에게 객잔 식구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예……. 하하, 이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요. 그나저나 침모님, 더욱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남궁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눈가를 손으로 몇 번 훔치더니, 어느새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진휘연을 바라봤다.

“그런가요? 저는 꾸밀 틈도 없이 이곳으로 와서 엉망은 아닌가 걱정했는데요.”

“아뇨. 예전에도 아름다우셨지만…… 지금은 뭐랄까, 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군요. 이젠 꾸미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과찬이세요. 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진휘연은 남궁휴가 그녀의 기분을 띄워 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크흠, 저는 언제나 진심으로 말합니다, 침모님.”

“네네, 알겠어요.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혹시 신의님께……?”

“음, 저는 구양세가로부터 정보를 들었다고 압니다만.”

남궁휴는 그제야 진휘연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마차 쪽을 바라봤고, 막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의 노인을 발견했다.

“혹시 노사님들께서……?”

남궁휴는 더없이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허허, 그렇다네. 그러는 자네가 바로 요새 무림에 소문이 자자하다는 일검룡(一劍龍)인가?”

“부끄러운 허명입니다.”

“흐음, 내 듣기로는 오히려 그 별호가 부족할 지경이라고 하던데. 황산파의 당주 급 고수들을 모두 일검에 무릎 꿇려서 일검룡이라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작게 포권을 취하며 내뱉는 말은 겸손의 말이긴 하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 또한 들어 있다.

남궁휴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명문세가 후계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우문환이나 당 노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허허, 인재로군.”

“허리에 차고 있는 그 검, 가주의 신물이로군. 벌써 인정받은 것인가?”

당 노인은 무기를 만드는 장인답게 남궁휴가 차고 있는 검에 먼저 시선이 가는 모양이었다.

남궁휴는 놀랐다.

흑신의 우문환은 알지만, 당 노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검집에 꽂혀 있는 검의 손잡이만 보고도 그 정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능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후계자로 확정되는 날 아버님께 건네받았습니다.”

“그런가. 좋은 검이군.”

검장(劍匠)다운 호기심을 보이며 당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아―!”

그사이, 갑작스런 괴성과 함께 길목 너머 수풀 사이에서 한 청년이 뛰어왔다.

한 발로만 뛰는 것처럼 껑충거리는 움직임이었는데, 그 속도는 놀랍도록 빨랐다.

머리는 뒤로 넘겨 하나로 묶었고, 평범하지만 깨끗한 갈색 무복을 입었다.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은 평범한 인상이지만, 선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

“강 숙수님!”

진휘연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강운찬.

풍운객잔의 숙수가 나온 것이다.

“치임―모오―니임―!”

강운찬은 한 발로 껑충껑충 뛰어와 진휘연의 앞에 섰다. 한데 어째선지 분한 것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잠시 측간 간 사이에 오는 게 어딨어요!”

상대가 잘못된 원망이다.

강운찬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눈을 부릅뜨고 진휘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짝 부담스런 시선이었으나, 진휘연은 마주 보며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는다.

그녀 역시도 매우 반가웠던 것이다.

“강 숙수님……!”

진휘연은 너무나 반가웠지만, 자연스레 강운찬의 다리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객잔을 지키는 와중에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보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진휘연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강운찬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침모님.”

운찬은 그런 진휘연의 마음을 짐작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보다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하!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요.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시다고 들어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그랬…… 나요?”

“네! 이제야 발 뻗고 자겠네요. 객주님이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네…….”

진휘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운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왼손엔 운찬의 손, 오른손엔 남궁휴의 손을 끌어모아 가슴 앞에서 꼭 붙잡는다.

“두 분 모두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휘연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나이 차는 크게 안 나지만, 마치 진휘연이 두 사람의 누이나 엄마인 것 같은 모습이다.

남궁휴와 강운찬의 얼굴이 벌게졌다.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이다.

그들은 새삼 깨달았다.

가족.

풍운객잔의 식구들은 혈연보다도 진한 정으로 이어진 진정한 가족이었다.

“크흠, 침모님.”

남궁휴는 진휘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헛기침을 했다. 슬쩍 손을 빼는 것에 맞춰서 진휘연도 두 사람의 손을 놓아주었다.

“객주님은 남경의 전투에 참가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보러 가실 겁니까?”

“네.”

진휘연의 대답은 간결하면서 단호했다.

“위험한 전장에 계시더라도…… 꼭 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어렵게 다시 정신을 차리셨는데 이젠 위험한 곳에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건 객주님도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남궁휴는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강운찬도 마찬가지다.

“괜찮아요. 두 분이 지켜 주실 거죠?”

가족끼리는 사양하지 않는 법.

딱 부러지는 휘연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난다.

“자자, 언제까지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말로 설명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객주님을 꼭 만나 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 두 분이 저를 도와주세요.”

진휘연은 당찬 여인이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주저앉아 손수건에 눈물을 적시는 삶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녀는 장기린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숨을 쉴 수 있는 이상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드릴게요.”

남궁휴와 강운찬은 힘차게 대답했다.

진휘연은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마차 앞에서 그런 자신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우문환과 당 노인에게 다가갔다.

“두 분,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진휘연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당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고, 우문환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연일 뿐이지. 은혜는 아니라네, 소저. 정인(情人)을 다시 만나 모든 일이 잘되길 기원하겠네.”

“감사합니다. 두 분, 부디 건강하세요.”

정인이란 말에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진휘연은 정중한 인사를 끝마쳤다.

두 사람에게는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다.

크게는 목숨의 은인이고, 작게는 자신의 일도 내팽개치고 남경 인근까지 데려다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지만, 우문환과 당 노인은 그마저도 부담스러운 듯 휘휘 손을 내저으며 사양한 뒤, 웃는 얼굴로 다시 마차에 타고 떠나갔다.

방향은 서쪽.

달려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며 진휘연은 생각했다.

범상치 않은 두 기인이 가는 길이니, 분명 막중한 책임감이 얽힌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녀의 등을 밀어 주었다.

이젠 그녀가 힘을 낼 차례였다.

“자, 가시죠.”

진휘연은 힘차게 말했다.

남궁휴와 강운찬은 서로를 힐끗 한 번 쳐다본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밝게 웃었다.

☆ ☆ ☆

진휘연과 남궁휴, 강운찬을 태운 마차가 남경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시체. 시체. 시체.

성문 근처에서부터 중앙 관도에 이르기까지 십 리 가까이 되는 길에는 마치 돌멩이처럼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

사람이 걷는 길에 발자국이 남 듯이, 전쟁의 뒤엔 이런 식으로 시신이 남는다.

이미 시신을 질릴 만큼 본 남궁휴와 강운찬조차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생전 처음으로 시체를 본 진휘연은 어떻겠는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굳건하게 맞서고 있었다.

“침모님, 굳이 보실 필요 없습니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세요.”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저희는 지금 어느 쪽으로 가는 거죠?”

“……삼문의 중심부로 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쯤이면 그곳에서 전투가 일어날 거라고 참모가 그러더군요.”

남궁휴는 의외로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는 진휘연에게 감탄하며 설명했다.

“그렇군요.”

진휘연은 묵묵히 마차의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는 전투가 일어난 대로가 아니라 도심의 좁은 길목을 통해 달리고 있었다.

마차의 좌우로 한 뼘도 채 남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마차는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벽에 부딪칠 것 같은 협로를 용케도 빠져나가 대략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삼문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췄다.

진휘연, 남궁휴, 강운찬.

세 사람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망부석처럼 멍하니 굳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끓는다.

들끓는다.

삼문의 중심부는 용광로처럼 온갖 살의가 뒤섞여 한데 뭉치고, 또한 흐트러지고 있었다.

만 단위 숫자의 전투를 직접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이제 그들 세 사람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은 경이롭지만 두렵고, 장엄하지만 잔혹했다.

시체. 시체. 시체.

피. 피. 피.

그들이 숨을 한 번 내쉬는 사이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부딪치는 것은 장엄했으나,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쓰러져 가는 시신은 너무나도 잔혹하게 망가져 있었다.

특히나 압권인 것은 삼문 전투의 중심부였다.

반경 이십 장 정도의 공간이 텅 비어 있다.

그 주변은 똑같은 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비유가 아니라 진실로,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거대한 불꽃이 끝을 모르고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건 대체……?”

“어째서 저런 불꽃이 전장의 중심에……?”

남궁휴와 강운찬이 각자 의문을 가지고 불꽃을 바라보는 사이, 옆에 있던 진휘연으로부터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아……!”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 아래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침모님……?”

“잠깐. 침모님,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남궁휴와 강운찬이 놀라서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진휘연은 불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야 해요.”

“네?”

“설마, 저곳으로 말입니까?”

진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저기는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최중심지라구요!”

남궁휴와 강운찬이 만류했으나, 지금의 진휘연에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빙설을 깎아 만든 듯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라면 잠깐도 견디지 못할 극한의 냉기 속에서 일 년가량을 살아왔다.

그 덕분일까, 새로 깨어난 뒤로 그녀는 종종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들을 느끼곤 했다.

허공에 손을 뻗으면 뭔가가 잡힐 것 같은 느낌.

상쾌한 바람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무언가의 거대한 흐름이라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흑신의 우문환은 그런 그녀에게 몇 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소저는 말이지, 극한의 냉기를 받아들이며 겨우 보존하고 있던 육신에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는 거대한 양기를 집어넣어서 되살린 걸세. 음양의 조화란 정말 신묘한 것이지. 소저는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그래도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되네. 극음과 극양의 기운이 한데 만났으나 그게 모두 융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네. 어느 쪽 힘이 더욱 강한지는 아무도 몰라. 방금 전에 철과 같은 강도를 지닌 얼음관이 깨진 것도 소저의 몸에서 그 힘의 편린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지. 정말이냐고? 정말이고 말고. 소저는 무림인으로 따지면 ‘기연’을 얻은 걸세. 그러니 앞으로도 너무 놀라지 말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본능과 운명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따라가게나. 사람의 육신은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진휘연은 우문환이 해 준 말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멍하니 불꽃을 쳐다봤다.

저 속에 있다.

그녀가 찾아온 것.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진휘연은 깨달았다.

그녀가 어떻게든 장기린을 찾아서 만나고 싶었던 이유.

그녀가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이곳에 찾아와야만 했던 이유.

천명을 느낀다.

하늘이 내린 운명.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운명의 끈을 느낀다.

“저기로 가야 해요!”

진휘연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웬만한 무림인 못지 않은 속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침모님!”

“이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강운찬과 남궁휴는 재빨리 그녀의 양옆에 따라붙었다.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다.

다행히도 눈앞의 적에게만 온 정신이 쏠려 있는 병사들은 진휘연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못했다.

겨우 세 사람 정도는 만 단위의 목숨이 들끓고 있는 용광로 안에서는 고작 티끌 정도에 불과했다.

세 사람은 미칠 듯한 긴장감 속에서 중심부의 불꽃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인위적인 정전 지대였다.

싸움이 멈췄다.

북천맹의 무인들이든 황실의 병사들이든.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멍하니 불꽃 속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모님!!”

“잠깐! 안 됩니다!!”

진휘연은 강운찬과 남궁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순식간에 뛰어들어 불꽃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

샛노란 비단옷이 새빨간 화염 속으로 넘실대며 빨려 들어갔다.

“침모니이임―!”

두 사람의 절규가 전장의 모두에게 꽂혀들었다.

☆ ☆ ☆

“이건…… 말도 안 돼.”

남궁휴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렸다.

“지, 지금이라도……!”

진휘연의 뒤를 쫓아 불꽃 속에 뛰어들려는 강운찬을 남궁휴가 뜯어말렸다.

“강 형, 진정하십시오. 마지막에 침모님의 움직임…… 뭔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움직임……?”

“예. 찬찬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강운찬은 혼란과 절망에 빠져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자, 잘 모르겠어.”

“저와 강 형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침모님이 뛰어드는 것을 막지 못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건, 침모님이 너무 갑작스럽게 움직이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남궁휴는 강운찬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알았다.

강운찬은 혼란에 빠져서 허둥지둥하고 있고, 남궁휴는 당황하였으나 이성적으로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어쩌면 그게 지도자로서의 자질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야?”

“저와 강 형이 함께라면 침모님이 설령 절벽에서 뛰어내리더라도 사전에 막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움직임과 반응속도에 있어서는 일반 사람들의 몇 배나 더 뛰어난 것이 무림인 아닙니까?”

“그렇지. 맞아, 그러고 보니…….”

“침모님이 뛰어들려는 순간, 저는 손을 뻗어 소매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신법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침모님의 몸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어요.”

“그 말은 설마……?”

“침모님을 되살리기 위해 일세의 영약이 사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침모님께 어떤 능력이 생겨났다고 가정한다면…….”

남궁휴는 진휘연이 들어가 버린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휘연은 항상 당당하면서도 누구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상가(商家)의 자제다.

그러니 앞뒤 가리지 않고 불길에 뛰어든 것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두 사람의 희망이니까.

남궁휴와 강운찬은 시간이 멈춰 버린 전장에 서서 하염없이 불꽃만을 바라보았다.

☆ ☆ ☆

활활 타오른다.

붉은색 불꽃이 사방에서 치솟는 광경은 어떤 의미에선 굉장한 절경이었다.

파삭!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덩이가 밟힌다.

이미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긴 불꽃은 평상시라면 감히 똑바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광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진휘연은 스스로도 신기했다.

어떻게 이런 곳으로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

보통 때라면 이런 무시무시한 곳은 삼 장 내로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산불이라도 난 듯한 엄청난 불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는 들어왔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마치 그녀의 안에서 뜨거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겨 버렸다.

‘뜨겁지 않아…….’

진휘연은 손을 뻗어 근처의 불꽃 속에 집어넣어 보았다.

뜨겁기는커녕 불이 닿는 듯한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오한이 든 것처럼 춥게 느껴진다.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겨울 강물에 몸을 풍덩 담근 것처럼, 몸속 내부에서 스르륵 퍼져 나간 냉기가 발끝까지 뒤덮은 것 같았다.

그녀는 까맣게 타 버린 소맷자락을 손으로 털어 냈다.

타 버린 것은 딱 팔목이 있는 지점까지다.

아무래도 불꽃이 뜨겁지 않게 느껴지는 그녀의 ‘힘’은 피부와 닿는 부분까지만 전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품이 넓어서 아래로 축 처진 소맷자락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투둑. 투둑.

화르륵!!

지금 이 순간에도 주변에서 땅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불꽃에 공기가 퍽퍽 터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객주님…….”

휘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뜨겁지 않게 느껴지는 불꽃 사이를 휘저으며,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겨 어딘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그녀는 청각을 집중해 알아들을 만한 신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불꽃 속으로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휘연은 마침내 기다리던 목소리를 들었다.

‘휘연!!’

“객주님!!”

두 귀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불렀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화르르륵―!

“객주님―!”

진휘연은 크게 외치며 뛰어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바깥쪽을 둥그렇게 태우고 있는 불꽃과 중심부 사이에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한 사람이 차렷 자세로 겨우 서 있을 만한 좁은 공간.

그곳만이 기름이 뿌려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휘연은 그곳에서 그녀가 가장 보고 싶어했던 사람을 만났다.

비록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처럼 온몸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과 체구를 잘못 볼 리가 없다.

“그아아아……!”

일 년이나 걸려 만난 사내.

그녀를 위해 황제에게 하나의 도시를 되찾아 주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던 남자.

그녀의 하나뿐인 짝, 장기린은 지옥의 신장처럼 오른손에 새카만 창을 든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객주님! 객주님!!”

진휘연은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느낀 것일까.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장기린이 움찔하며 창을 휘둘렀다.

팟!

눈을 한 번 깜짝하는 순간, 흑색의 창날은 이미 진휘연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절제절명의 상황임에도 놀랍도록 깔끔한 공격.

흑색의 창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으며 잘려 나간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다 불꽃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크윽…… 무슨……!”

하지만 창날은 멈췄다.

창을 긋기 직전, 두 개의 눈동자로 진휘연을 똑똑히 쳐다봤기 때문이다.

장기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진휘연을 쳐다보며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진휘연은 안도했다.

장기린은 온몸이 불타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무사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진휘연은 장기린의 품속으로 곧바로 달려들었다.

“크윽……!”

장기린은 깜짝 놀랐으나 피하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진휘연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마치 그의 온몸에서 불꽃을 털어내려는 듯이.

“연꽃……?”

어째서일까.

장기린은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다.

“휘…… 연……?”

잔뜩 구겨지고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의문을 표한다.

고통스런 가운데, 그를 꽉 끌어안는 여인이 진휘연이라는 사실을 차츰차츰 인지하는 듯했다.

“무, 무슨……! 크윽, 쿨럭! 쿨럭! 떨어져! 위험……! 크윽…….”

거센 기침과 함께 몸이 반으로 접힌다.

장기린과 한 몸이 된 것마냥 꽉 끌어안고 있던 진휘연은 그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으세요! 가만히! 진정하고…….”

진휘연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감격스러운 첫 재회는 둘째 치더라도, 지금 장기린의 상태가 많이 심각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다.

장기린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의 장기린이라면 일단 이곳에 진휘연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차분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그녀를 환각인지 현실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점이 반쯤 사라진 눈빛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객주님, 저예요. 휘연. 객주님을 만나러 얼음 관에서 깨어나 이곳까지 왔다구요.”

진휘연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장기린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뻣뻣하게 굳어진 채 격하게 기침을 토해 내던 장기린이 차츰차츰 몸에서 힘을 뺐다.

“휘연? 휘연……?”

“네, 객주님. 휘연이에요.”

“휘연…….”

아직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

하지만 장기린은 진휘연을 꽉 부둥켜안았다.

“보고 싶었어…….”

“네, 저도요.”

한순간 숨이 막힐 만큼 그녀를 끌어안았던 힘이 차츰 사라져 간다. 장기린은 눈을 감고 있었다. 축 늘어진 몸이 진휘연에게 기대어졌다.

작은 체구로 장성한 사내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평소 같으면 매우 힘든 일일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게 조금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 노사, 저에게 힘이 주어진 것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음양의 부조화니, 만년화리의 내단이니 그런 건 모른다.

중요한 건 장기린을 구해 낼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운명이다.

인연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장기린을 들쳐 업었다. 장기린이 끝까지 놓지 않는 검은색 창도 어깨에 함께 짊어졌다.

마치 어른을 업은 어린아이 같은 몰골이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한 발씩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객주님,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번엔 제가 구해 드릴게요. 반드시.”

진휘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장기린의 얼굴을 그녀의 볼 옆에 바짝 가까이 댄 뒤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불꽃이 넘실댄다.

그녀와 한 사내의 모습은 불꽃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 ☆ ☆

퍼어어엉!!

“으헛……!”

폭발하기 시작한 지 대략 반 시진.

마치 축제의 끝을 알리는 폭죽처럼 서서히 기세를 잃어 가던 불꽃이 한순간, 커다란 폭음과 함께 더욱 기세를 올렸다.

주변에서 멍하니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던 수백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귀를 틀어막는다.

폭발은 엄청났다.

안 그래도 십 장가량 거리를 벌리고 있던 병사들이 무심코 더욱 거리를 벌릴 만큼 뜨거운 화염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모두가 눈을 질끈 감고 뜨거운 바람을 피해 외투를 뒤집어쓰는 그 순간,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서 사람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어엇?!!”

“저, 저것 좀 봐!”

“누, 누가 나왔어!”

병사들이 웅성거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옥이 현실에 나타났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불길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리 비키시오!”

“엇……?”

모두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남궁휴와 강운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두 사람은 피부가 익어 버릴 것만 같은 열기를 느끼며 진휘연을 맞이하러 나갔다.

진휘연은 검은색 창을 든 한 사내를 등에 업고 있었다.

“으음…….”

“음……!”

두 사람은 지금이 급박한 상황임을 잊고 잠시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용광로 같은 불꽃 속에서 빠져나왔음에도 진휘연에게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

기적이다.

아지랑이처럼 눈앞이 일렁일 정도의 열기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기적’을 떠오르게 했다.

“휴, 객주님이 위험해요.”

남궁휴는 진휘연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휘연에게 정신이 쏠려서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진휘연에게 업혀 있는 장기린이다.

남궁휴의 눈빛이 변했다.

차분하고 냉정한, 지도자의 눈빛이다.

“강 형, 이것을 부탁합니다.”

“알았어.”

남궁휴는 품속에서 죽통 하나를 꺼내 건네줬고, 강운찬은 그걸 들고 망설임없이 하늘을 향해 쏘았다.

피유우웅― 펑!

연흔전.

하늘에 흔적을 남겨 신호를 주고받는 데 사용되는 폭죽이다.

남궁휴는 진휘연으로부터 장기린을 건네받자마자 그 무게에 놀랐다.

무공을 익힌 그에게도 묵직하게 느껴지는데, 진휘연은 대체 어떻게 그를 불속에서 업고 나온 것일까.

“이건…… 심각하군요.”

남궁휴의 눈이 장기린의 몸을 훑어보았고, 곧바로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사인(死因) 중엔 ‘놀라서 죽는다’라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다리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경우.

익사를 하거나, 물에 부딪쳐서 죽는 것보다는 심장마비로 죽는 경우가 더 많다.

불길에 휩싸이거나 칼에 베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출혈이나 상처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상처가 만들어 낸 ‘충격’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기린은 전신에 철침이 빼곡이 박힌 채 불길에 휩싸였다.

그 ‘충격’만으로도 죽는 게 당연해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의 상처였다.

“지금 당장 출발합니다. 강 형, 침모님을 부탁합니다.”

“알았어.”

강운찬은 실례한다고 말한 뒤 진휘연을 등에 업었다.

남궁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을 미리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망설임없이 인적이 드문 지름길을 찾아 어딘가로 향하는가 싶더니, 남경의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궁 공자님이시죠?”

성문 밖으로 나오자 한 대의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상가(商家)에서 쓸 법한,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실용적인 마차였다. 마부는 키가 좀 작지만 튼튼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반짝이는 눈빛이 영민해 보이는 사내였다.

“신호는 확인했습니다. 어서 타세요.”

마부는 장기린을 안에 눕힐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나머지 세 사람이 타자마자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방향은 북쪽.

북경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북천맹의 병사들 같은데?”

그때, 창밖을 내다보던 강운찬이 눈을 크게 뜬 채 다급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남궁휴가 황급히 창밖을 내다봤다.

북천맹의 잔당으로 보이는, 심상치 않은 외모의 사내들이 길목을 지키고 서서 마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숫자는 오십 명 정도.

각자 무기는 제각각이지만, 어깨에 차고 있는 ‘북(北)’ 자의 완장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 북천맹 소속인 게 분명했다.

“큭, 여기서 시간을 끌 수는 없는데……!”

강운찬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진휘연은 다른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장기린의 몸에서 철침을 뽑아내고 상처를 돌보는 중이었다.

다행히 마부가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휘연은 장기린의 몸에서 철침을 뽑고 화상을 입어 참혹하게 변한 피부에 물을 붓는 중이었다.

“침모님, 제가 시간을 벌게요.”

강운찬의 목소리는 비장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기린을 돌보던 진휘연이 고개를 휙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진휘연은 장기린을 돌보는 것에 너무 집중하느라 앞서서 적이 나타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강운찬은 하하 웃었다.

“침모님은 객주님을 돌봐야 하고, 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때 얼굴을 내밀고 나서야 해요. 하지만 저는 굳이 이곳에 있지 않아도 되거든요.”

“강 숙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래 봬도 그사이에 엄청나게 강해졌어요. 저런 이름도 없는 놈들을 상대로 적당히 싸우다 도망치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구요.”

강운찬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강 형…….”

“휴, 너도 걱정 마. 내 실력 알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남궁휴가 지그시 미간을 좁힌 채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엉?!”

강운찬이 황급히 창문에 달라붙었다.

남궁휴의 말대로였다.

길목을 막고 있던 오십여 명의 사내들이 갑자기 당황한 듯 웅성거리며 허둥대고 있었다.

“으아악……!”

“귀, 귀신?!”

비명 소리가 마차가 있는 곳까지 들려온다.

자세히 보니 숫자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어느새 열 명이나 쓰러졌는지 고작 사십여 명만 남아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을 쓰러뜨린 ‘적’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 어른의 전언입니다요!”

어리둥절해 있는 그들에게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어른?”

“아아, 이 마차는 최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풍운상회에서 빌린 마차입니다.”

“풍운…… 상회?”

“기억하시죠? 풍운객잔에 자주 오던 왕 대인 말입니다.”

“왕 대인!!”

강운찬이 놀란 듯 소리쳤다.

왜 모르겠는가.

거대한 체구를 지닌 그는 매번 객잔에 찾아와 요리를 극찬해 주었으며, 지병 때문에 죽을 뻔했으나 장기린이 살아있는 곰을 잡아다 준 덕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설마 그 풍운상회의 주인이……?”

“예, 왕 대인입니다. 객주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더군요.”

두 사람이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 마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지금 마차에 타고 계신 귀인께선 주인어른의 목숨의 은인이시며, 또한 얼마 전에 인연을 맺은 밤의 무사님께도 적지 않은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 은혜를 오늘 조금이나마 갚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강운찬과 남궁휴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밤의 무사라면…….”

“설마……?”

갑작스레 쓰러진 사람들.

보이지 않는 ‘적’의 모습.

“살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십여 명의 무인들 중 한 사람이 목을 붙잡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만약 가까이에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테지만,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던 남궁휴와 강운찬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검이 나타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새카만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그림자 같은 사람이 허공에서 나타나 그림 같은 움직임으로 한 사람의 목을 베고 곧바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왼쪽 끝에서 허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더니, 두 사람의 심장을 찌르고 다시금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좌측에서 사고가 일어나 좌측을 보면 우측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그렇다고 우측을 돌아보면 이번엔 중앙에서 사상자가 나온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술(邪術)’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도의 은신술이었다.

“원래 은신술은…… 숨어서 쓰기 때문에 은신술이라 불리는 거 아니었어?”

“그렇…… 지요. 그런데 당당히 맞서면서 은신술을 쓰다니, 이미 은신술의 범위를 초월했군요.”

강운찬과 남궁휴는 멍하니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급한 상황임에도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정체불명의 살수가 보여 주는 은신술은 그 정도로 경이로웠다.

마치, 무공에 대한 그들의 상식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객주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건가……. 저런 괴물에게?”

“객주님의 저력은…… 정말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두 사람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진휘연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장기린을 쳐다봤다.

장기린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지금 이곳에서 죽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속력을 내주세요!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예이! 알겠습니다요!”

철썩!

채찍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마차 아래쪽에서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좀 더 격렬해졌다.

마차는 이내 오십 명의 무인들이 길을 막고 서 있던 골목을 지나갔다.

이미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 있는 것은 스무 명 정도.

나머지 삼십여 명은 전의를 잃고 도주한 듯 보였다.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남궁휴와 강운찬은 그 지역을 지나는 순간, 그들을 쳐다보는 살수와 눈이 마주쳤다.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한편으론 불꽃처럼 뜨거운 눈빛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궁휴와 강운찬은 그 사내가 사라지기 직전, 검은색 무복의 어깨에 더욱 진한 검은색 실로 새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조…… 탑?”

야조탑.

강남 최대 살수 연합.

남궁휴는 풍문으로 들은 그들의 대단함을 곱씹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기, 도련님들!”

“왜…… 그러십니까?”

남궁휴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기,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요.”

“예? 왜요? 지금은 한시가 급합니다.”

“그게…… 이건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요.”

마부의 목소리엔 난감함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남궁휴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략 오십 장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휴는 체면불구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마부의 말대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명 제국 내에 사는 이상, 그 누구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 이런……!”

옆에서 함께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강운찬이 경악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흘렸다.

그들이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마부는 천천히 마차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저들’의 앞에서 마차를 달리는 것은 그야말로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황실의 금의위라니…….”

남궁휴의 당황스런 중얼거림과 함께 마차는 완전히 멈춰 섰다.

☆ ☆ ☆

사정을 모른 채 장기린을 돌보는 것에 정신이 팔린 진휘연은 제쳐 놓고, 남궁휴와 강운찬은 마차의 문 너머에 몸을 숨긴 채 금의위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겉으로 보기엔 상회에 소속된 평범한 마차처럼 보일 것이다.

척 보기에도 무언가 바빠 보이는 그들이라면 길가에 멈춰 서 있는 평범한 마차 따위는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실제로 선두의 금의위는 길가에 세워진 마차를 한 번 흘깃 쳐다봤을 뿐, 그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휴우…….”

“후우…….”

남궁휴와 강운찬의 입에서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금의위 선두의 뒤에서 존재감이 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멈춰라.”

짧고 간결한 명령이었다.

놀랍게도 일백 명이나 되는 금의위가 그 말 한마디에 일제히 말을 멈췄다.

‘이건……?’

‘무슨……?’

남궁휴와 강운찬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은 어째서 행군을 멈췄을까?

그렇게 자문하기도 전에 어느샌가 누군가가 다가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금의위다. 문을 열어라.”

“저, 저기, 나으리…….”

“문을 열어라. 열지 않으면 부수겠다.”

마부가 나서서 말리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역효과였다.

남궁휴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불가침한 관계라지만, 그래도 명문 남궁세가의 이름을 대면 조금은 봐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타파하고 마차를 질주시켜야 했다.

“아무리 금의위라 하나 너무나 무례하오! 나는 남궁세가에서…… 음?!”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힌 남궁휴는 그 순간 드러난 광경에 너무나 놀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금의위 일백 명이 어느새 말에서 내려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멀쩡히 서 있는 것은 단 세 명.

금색의 갑주를 입은 위엄이 가득한 중년의 사내와 그 뒤를 지키듯이 서 있는 백색과 흑색의 사내들이다.

“무…… 슨……?”

남궁휴는 선뜻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금의위.

황제의 권위를 지키는 자들로서, 가끔 직권의 힘이 지나치다 하여 포악하다는 소리마저 듣는 관의 폭군들이다.

지방관청의 하급 관리들을 눈아래로 보는 오만함은 물론이고, 그들은 황실의 대전에 들 수 있는 백관(百官)들에게도 뻣뻣한 태도를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런 금의위들이 지금 한쪽 무릎을 꿇고 극도의 공경을 표하고 있다.

대체 누구일까.

누가 감히 금의위에게 이런 극도의 공경을 받을 수 있는가.

‘답은 하나밖에 없잖아……!’

빤하다.

단 한 사람.

천상천하 유아독존.

명 제국의 지배자이며 하늘의 아들이 ‘그’만이 금의위로부터 절대의 공경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황금 갑주까지 입었잖아!!’

남궁휴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진심으로 고민했다.

“남궁가의 후계자, 비켜라. 나는 마차 안에 있는 사내에게 볼일이 있다.”

황제의 두 눈, 황제의 목소리가 남궁휴에게 집중되었다.

확―하고 뿜어져 나온 존재감이, 감히 그의 앞에 두 다리를 뻗고 버티고 선 무례한 자를 짓누른다.

“꿀꺽…….”

남궁휴는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무공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상대를 짓누르는 무언가가 황제에게는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황제는 그를 알고 있었다. 또한 마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듯하다.

“비키지 않을 텐가?”

나직한 목소리가 이렇게나 두렵게 들릴 줄이야.

남궁휴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황제의 두 눈을 감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폐하!”

잠시 후, 남궁휴는 결심을 내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다.

“황공하오나, 이 안에는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분이 생명의 경각에 달해 있습니다. 당장 신의에게 보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기에 본래는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을 아껴 가며 달려야만 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남궁휴는 땅에 이마를 쿵! 하고 찧었다.

“으, 으어……?”

동시에 뒤에서 얼빠진 신음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위압감과 남궁휴의 너무나 절박한 외침에 압도당한 청년.

누군지는 물을 것도 없다.

강운찬이다.

“폐, 폐하!”

그리고 그 역시도 상황을 파악한 뒤 곧바로 남궁휴의 뒤로 몸을 던져 납작 엎드렸다.

“부, 부디 자비를……!”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강운찬은 온몸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황제의 존재감은 범상치 않다.

그 앞에 버티고 설 수 있는 존재는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하다.

“재미있는 이야기군.”

고개를 푹 숙이고 땅바닥만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호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라……. 그래서 그 소중한 사람의 가치가 짐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건가?”

“……!!”

남궁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럼?”

“그게…….”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유들유들한 언변을 잃지 않던 남궁휴가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것처럼 폐부가 싸늘하게 식는다.

“…….”

입을 뻐끔거리던 남궁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생각하여 말문을 열려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장난은 이쯤하지. 안쪽에서 위급에 빠져 있다는 사내는 아마 짐도 매우 아끼는 사람일 테니.”

“예……?”

남궁휴는 얼빠진 대답을 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지. 황제는 객주님을 알고 있었어!!’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황제는 장기린을 아끼기에 진휘연을 구할 수 있도록 만년화리의 내단까지 내준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 마차에 장기린이 타고 있는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가 장기린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는 없다.

“알았으면 비키도록.”

남궁휴는 천천히 반쯤 몸을 일으켜 황제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읏……!”

뒤에서 강운찬이 당황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무언가를 결심한 듯 강운찬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객주님은…… 엇……?!”

그 순간, 남궁휴는 강운찬의 손목을 붙잡고 확 당겨서 황제의 앞에 길을 열어 주었다.

“휴, 무슨 짓이야!”

“쉿! 강 형, 잠시 제 뜻대로 따라 주십시오.”

남궁휴는 다급하게 강운찬의 머리를 눌러 강제로 상체를 숙이게 만들었다.

황제의 앞에서 똑바로 일어서거나 두 눈을 바라보는 것은 크나큰 무례이며 죄가 된다.

남궁휴는 강운찬이 처벌을 받을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황제는 그들 쪽에는 관심도 갖지 않고 오직 마차 안쪽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기린.”

황제의 입에서 차분하면서 묵직한, 하지만 어딘가 친근감이 있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황제는 거침없이 마차 안에 발을 디뎠고, 그 안에 비치는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

남궁휴는 피가 마르는 듯한 심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황제가 장기린을 아낀다는 것은 상당히 확실한 추론이지만, 그래도 철혈이라 불리는 영락제의 성품상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일백여 명이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황제는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다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남궁휴는 뜨거움을 느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황제의 분노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

남궁휴는 황제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핵심만을 담아 설명했다.

“황공하오나 폐하, 저도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만, 북천맹의 맹주 텐챠이와 대결을 했고, 삼대천이라 불리는 적장들이 기이한 암기를 사용해 두 사람을 모두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라고?”

“예.”

남궁휴는 황제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나, 그가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텐챠이는?”

“……불길에서 나온 자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랬군. 그랬단 말이지…….”

황제는 몸을 휙 돌려, 그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호위들을 바라봤다.

“앞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남궁휴는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에 궁금증을 느끼고 표시 나지 않게 살짝 고개를 들었다.

백색 옷을 입은 문사와 흑색 무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황실의 수호신 백택과 만적 반야혼은 황제의 그 말에 고개를 살짝 흔들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남궁가의 후계자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이걸 받아라.”

황제는 품속에서 황금색 물체를 꺼내 남궁휴에게 건네주었다.

남궁휴는 두 손을 뻗어 공경의 자세를 보이며 물건을 받았다.

손잡이부터 칼날까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검이었다.

아무래도 실용적인 물건은 아닌 듯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용의 형상을 띄고 있는데도 손잡이 쪽 용의 머리 부분엔 붉은색 보석까지 박혀 있어 더욱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이대로 곧장 북경으로 가서 황실로 가라. 그 단검을 보여 주며 백의선(白醫仙)을 찾도록.”

“백, 백의선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남궁휴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황금 단검을 품속에 넣었다.

백의선이라니.

백의선은 진휘연을 살려 준 흑신의 우문환과 함께 세상에 삼대신의라고 불리는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다만 ‘황실의 맹약’이라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에 황족이 아니면 절대로 그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남궁휴는 본래 북경으로 가서 그곳에 있을 일류 의원에게 장기린을 보일 셈이었는데, 만약 백의선이 장기린을 치료해 줄 수만 있다면…… 그가 살아날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남궁휴는 오체투지를 하며 극도의 예를 보였다.

옆에서 상황을 깨달은 강운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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