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26화 (104/686)

第百二十三章 ― 용호상박(龍虎相搏)

장기린은 꿈을 꿨다.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려 있다.

천 근의 바위가 몸 위에 놓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으며, 눈을 뜨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깊은 물속에 뛰어든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 여러 가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간신히 기억이 이어지는 어린 시절.

세 살 내지 네 살 정도 되었던 시절엔 거지들의 소굴에서 주워져서 다른 거지들이 동냥하는 데 도우러 따라다니곤 했다.

대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거지 왕초가 그를 누군가에게 팔았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키가 크고 적색의 장포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태극 문양의 방울을 달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는 그 후에 이 년 정도 행복한 생활을 했다.

밥 같은 밥을 배불리 먹었으며, ‘교육’이라고 부를 만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다. 그와 같은 처지인 오십여 명의 또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어두운 동굴.

금빛의 두꺼비, 붉은색의 지네, 푸른빛이 감도는 이끼, 색깔이 없는 물고기와 도룡뇽과 같은 기이한 생명체들만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도저히 인간은 살 수 없는 곳에 내던져진 것이다.

여덟 살짜리가 그런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돌이켜 보면 그가 이 년간 배운 것들은 생존에 필요한 방법들뿐이었다.

먹을 것을 구하는 법이라든지, 몸에서 힘을 보존하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 무기를 사용하는 법, 그리고 사람의 심리에 대해 배웠다.

워낙 어린 나이이다 보니 배운 것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능력은 없었지만, 극한의 상황에 놓이니 그런 것들을 자연스레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배고픔은 굶은 지 삼 일이 되었을 때 절정에 이른다.

잡아서 요리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무조건 입에 집어넣어서 씹고 싶은 의지는 바로 그때 생겨난다.

함께 지옥에 내던져진 오십여 명 중 살아 있는 것을 씹을 용기가 없던 두 명이 칠 일째 되는 날 죽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신을 본 것이 바로 그때다.

처음으로 본 시체는 너무나 차갑고 딱딱했으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당시의 그는 시신을 처리할 줄을 몰랐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한쪽에 나란히 눕혀 두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독한 시취는 하루 만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동굴에 서식하던 온갖 생명체들이 새로 생겨난 ‘먹이’를 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죽으면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된다.

즉, 자신도 죽으면 저렇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직접 지켜본 아이들은 자신은 저렇게 되기 싫다고 생각했다.

처참하게 죽고 나서 벌레들에게 뼈만 남도록 물어뜯기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아이들의 살기 위한 집착이 강해졌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깨작깨작 먹던 이끼나 물고기들을 경쟁적으로 잡아채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다.

동굴에서 그래도 정상적으로 먹을 만한 것은 이끼와 물고기였다.

이끼는 흙맛이 낫지만 그래도 자꾸 씹으면 향긋한 느낌이 들었고, 투명한 물고기는 돌에 내던져서 죽인 뒤 머리만 빼고 씹어 먹을 수 있었다.

물고기는 달았다.

많이 굶주렸던 탓에 그렇게 느꼈는지는 몰라도 육즙이 풍부한 살을 씹는 맛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숫자는 마흔여덟 명이나 된다.

동굴은 상당히 넓었지만, 마흔여덟 명을 모두 먹여 살릴 만큼 물고기는 많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동굴의 개울가에 살던 물고기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씨가 마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험을 느낀 물고기들이 깊은 수원(水源)에만 서식하며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다시금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그다음으로 도룡뇽을 잡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재빠른데다 피부가 미끈거려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끼리 서로 먹을 것을 나눠 먹지 않게 된 것이 그때쯤이다.

사냥감이 있으면 몰래 잡고, 먹는 것도 혼자서 먹게 되었다.

하지만 도룡뇽도 머지않아 잡히지 않게 되었다.

그때쯤 사냥할 힘이 없어서 오랫동안 먹지 못한 세 명이 더 죽었다.

남은 것은 마흔다섯 명.

먹을 만한 생물체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금빛 두꺼비, 붉은색 지네, 붉고 푸른색이 섞인 뱀…….

잡아먹는 생물체가 바뀔 때마다 사람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변이 일어난 것은 마지막으로 잡아먹던 뱀마저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다.

겨우 잡은 뱀 한 마리를 두고 두 아이가 실랑이를 벌였고, 다툼 끝에 한 아이가 근처의 돌로 내려쳐서 상대 아이를 죽였다.

돌로 내려친 아이는 콸콸 흐르는 피를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그 뒤에는 바로 옆에서 잡았던 뱀을 해체해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 사건은 모든 아이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더 강한 사실을 각인시켰다.

경쟁자가 없으면 풍족해진다.

나눠 먹어야 하는 존재가 없으면 한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시체가 생겨나자 그걸 먹기 위해 생명체들이 많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식량이 확보된 것이다.

그 뒤로는 비슷한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갔다.

욕심은 적을 만들고, 한 번 뒤틀린 관계는 절대로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립이 대립을 부른다.

종내엔 서로 간에 딱히 먹을 게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서로 눈만 마주치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미 어째서 싸우기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무조건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 생각만으로 전력을 다해 상대를 죽이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단 한 사람만이 남았을 때, 그 지옥은 끝이 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 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를 구해 준 것은 대장군 공손웅이었다.

우연히 역모를 진압한 곳에 그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 공손웅을 보고 달려들었으나 상처만 하나 만들었을 뿐, 이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그 뒤엔…… 약 이 년 정도 ‘행복’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안락한 곳에서 편안히 밥을 먹고 공부했으며, 딱히 일을 하거나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살 만한 환경이 주어졌다.

공손웅은 그를 양자처럼 대해 주었다.

하지만 이미 이 년간 인성이 마비된 장기린은 그것을 행복이라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근처에 다가올 때마다 살기를 일으키며 경계했다. 누군가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병적으로 싫었고,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안 된다.

분명히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군에 지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안락한 곳에서는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장기린은 목숨을 건 전장이라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곳이라면 그를 거둬 준 대장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도 그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렇게 군문에 들어간 뒤로는 십삼 년간 전쟁터를 종군했다.

그가 잃어버렸던 인성을 되찾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으며, ‘친구’나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다.

전쟁터엔 인간 말종들도 많다.

지원해서 병사가 된 게 아니라, 죄를 지어서 최전방의 병사로 끌려온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인간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지금의 장기린의 모습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웅이 죽었다.

그를 위해 전쟁터에 있던 건데, 그가 사라져 버렸다.

마침 사람을 죽이는 것에 회의감이 느껴졌던 때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군을 떠났고…….

두 번째 행운을 만났다.

풍운객잔.

그리고 객잔의 식구들.

항주에서의 기억은 오로지 행복한 기억들뿐이다.

별거 아닌 일에 즐거워했고, 사소한 일에 슬프거나 웃는 것을 반복했다.

전쟁터에서 있던 일들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일들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못 견디게 즐거웠다.

어쩌면 평범한 삶이라는 것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입신양명이나 출세 같은 것은 필요없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한 사람의 인생으로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닐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그런 일상이 몹시 그리워졌다.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가족들.

적룡기마대의 형제들과 풍운객잔의 식구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여인.

돌아가야 한다.

장기린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 ☆ ☆

“전투가 끝난 모양이군.”

남경성에 도착한 황제는 시신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은 관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황제도 황제지만, 그가 타고 있는 말 또한 대단했다.

건장한 적토마는 바닥에 시체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듯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모습이, 그야말로 황제의 말이라는 지위에 걸맞았다.

“결과는…… 명군의 승리인 모양이군.”

황제는 관도의 끝에 아스라이 보이는 남경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은 ‘북(北)’ 자가 아니었다.

명(明).

대명 제국의 상징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공보하를 시작으로 모든 금의위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됐다. 본래 있던 것을 되찾았을 뿐이니, 그리 기쁠 것도 없느니라.”

황제는 늠름하게 어깨를 편 채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황궁에 도착하기 직전.

삼문을 지나던 도중, 그는 중심부에 새카맣게 새겨진 원형의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이곳인가.”

황제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잿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결말이 났군.”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천맹의 맹주와 남경 공략전의 장수가 맞붙은 곳이다.

수수께끼의 암기를 사용해 불태웠다더니, 그 흔적만 봐도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정도 화력이면 정말 대단하군. 암기를 몇 십 개나 썼다고 해도 순간적인 파괴력으로는 너무나 강력하다.”

황제는 직접 말에서 내려 새카맣게 탄 토양과 잿더미들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폐하, 손을 더럽히지 마시옵소서. 제가 하겠습니다.”

백의의 문사, 백택이 나섰다.

“아니, 됐다.”

“하오나…….”

“그보다는, 돌아가는 대로 이 암기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조사하도록. 나무통에 넣어서 터뜨리는 종류 같은데, 그 위력이 실로 범상치 않다. 어떻게 된 경위로 북천맹에 흘러 들어갔는지 면밀히 알아보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화기(火器)는 관의 통제를 받는 물품.

그런 위험한 병기가 북천맹에 수십 개나 흘러 들어갔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황제는 함께 말에서 내려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반야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그대로 말에 타지 않고 황궁까지 걸어갔다.

황궁 입구까지의 흔적은 이곳에서 어떤 싸움이 일어났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처음엔 맞서 싸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관도의 중반 이후에는 도망치다가 등을 베인 듯, 앞으로 꼬꾸라진 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의를 잃었다는 뜻이다.

장수의 탓인지, 전략의 탓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전황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엇……!!”

황궁의 입구쯤에 다다르자, 뒷정리를 하고 있던 명의 병사들 중 몇몇이 황제와 금의위를 보고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그, 금의위?!”

병사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인근의 병사들에게 뭐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안쪽으로 병사 세 명이 황급히 뛰어갔다.

“무,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로 온 것 같나?”

대답을 한 것은 황제다.

공보하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그를 만류하고 먼저 대답해 버렸다.

“대, 대장님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황제의 위압감과 존재감은 보통이 아니다.

병사는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됐다. 직접 가서 얼굴을 보겠다.”

“그, 그게…….”

“비켜라.”

황제의 말에 움찔하면서도, 병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했다.

아무래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듯했다.

황제는 그 병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감히 누구의 앞을 가로막는가.

병사는 그의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도 당장 죽어 버릴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제법 근성은 있는 듯했다.

그 병사는 허리춤의 칼을 꽉 붙든 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길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딱히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강대한 존재감을 앞에 두고,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칼을 잡았을 뿐이다.

채채챙!

“감히!”

하지만 그 행동이 화를 불렀다.

금의위는 다른 어떤 일에도 우선해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자들이다.

감히 황제의 앞에서 똑바로 서 있는 데다 무기에 손까지 가져갔다면, 그건 이미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대역죄다.

“감히 누구의 앞에서 검을 잡는 것이냐!”

“큭! 그, 그게…….”

“당장 손을 떼라!”

병사는 당황하면서도 어떻게든 서 있기 위해 칼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칼에서 손을 놓지 못하니 금의위들의 살기는 점점 더 날카로워져 갔다.

팽팽하게 긴장된 일촉즉발의 상황.

난감한 대치를 타파한 것은 황궁 안쪽에서 나온 젊은 무장(武將)이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차분하면서도 낭랑한, 귓속으로 선명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황궁의 안쪽으로 쏠렸다.

검은색의 철 갑주를 입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미청년.

허리에는 한쌍의 장군검을 좌측과 우측에 각각 매달고 있었는데, 걸음걸이와 손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차분한 기품이 흘렀다.

그 청년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병사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낸 뒤, 황제의 앞에서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했다.

“신(臣) 행군사마 부운화, 대명 제국의 유일한 군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부운화가 무릎을 꿇자 입구를 막고 있던 병사의 눈이 더는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자신이 감히 황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화, 황제 폐하?”

“예, 예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부운화를 따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부운화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병사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자입니다.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 일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청합니다.”

낭랑한 목소리에 사리에 걸맞은 화법이다.

거기에 타고난 기품까지 더하니, 듣고 있던 모두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런 것은 이미 마음에 두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부운화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폐하의 자비로움에 모든 이들이 감탄할 것입니다.”

“그보다, 너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부운화의 입이 다물어진다.

“오는 길에 급하게 길을 떠나는 마차를 보았다.”

“그건……!”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하나 그 옆에 네가 없다는 것은 왠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

“…….”

“게다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부운화는 역시 황제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대형께 남경 공략군을 승리로 이끌 것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불길에 스스로 뛰어들어 대형을 꺼내 오는 대단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여인? 그건 혹시…… 그 여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이 대화는 부운화와 황제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한 여인이었군.”

황제의 얼굴에 감탄과 호기심이 담긴다.

“그랬기에 너는 기린을 돌보는 것을 포기하고 군을 이끄는 것에 주력했다, 이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는 부운화.

그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걱정된다.

그의 대형인 장기린이 오늘만큼이나 큰 상처를 입고 빈사 상태에 이른 것은 십삼 년의 군생활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횟수였다.

걱정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장기린의 곁에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 풍운객잔의 식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현재 그분의 곁에 있어야 할 것은…… 그들일 테지.’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렇기에 부운화는 더욱 힘을 내야만 했다.

그는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북천맹을 무너뜨리고 남경을 되찾았다.

☆ ☆ ☆

북천맹의 텐챠이나 삼대천은 황궁 내부를 꾸미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기에, 황궁 안은 북천맹이 반란을 일으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날 남경의 황궁에서 묵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본래 전쟁터에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은 잠자리를 가지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맨땅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재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오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투입되었고, 그들은 황궁 내부에 웬만한 귀족의 침실 못지 않은 방을 만들어 냈다.

“신경을 많이 썼군.”

황제는 탄탄하면서 정갈한 대나무 침상을 손으로 두드리며 감탄했다.

“하루 만에 만들려면 바빴겠어.”

황제가 함께 앉으라고 손짓을 하자 백택은 묵묵히 서 있었고, 반야혼은 근처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부운화는 삼대천이 도주했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단순히 싸움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그런 것일까?”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백택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반야혼 또한 백택의 말에 동의했다.

“삼대천은 텐챠이를 포기하면서까지 도주했습니다. 단순히 싸움이 불리해서 그렇게까지 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긴 그렇군. ‘천명이 이곳에 있지 않다’라고 했다니 말이야.”

“뭔가 노리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

“삼대천이 특유의 무력과 통솔력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결사 항전을 했다면, 이 싸움은 최소한 삼 일은 더 걸렸을 테고, 싸움의 피해도 열 배 이상 늘어났을 거다. 그런데 적들은 그걸 포기했다. 상식적으론 이해가 안 되지 않나.”

황제의 말에 백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것만으론 상대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던 것이다.

“내 생각엔 말이지…….”

그때, 반야혼이 입을 열었다.

“머리를 치러 올 것 같아.”

“머리?”

“황제 말이야, 황제.”

백택이 싸늘한 기세를 뿜으며 반야혼을 노려보았다.

하는 말이나, 말하는 본새나, 백택이 보기엔 너무나도 불손했다.

“네놈……!”

“알았어, 알았어. 흥분하지 마, 영감.”

반야혼은 겉으로 보기엔 중년 문사에 불과한 백택이 실제로는 백 세가 다 되어 간다는 것을 안 뒤로 그를 영감이라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립이 격해지자 황제가 손을 내저어 말렸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러니까 말이지, 그 삼대천이란 놈들은 장기린의 동생들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버리기까지 했단 말이야? 황제의 말대로 거기서 끝까지 싸웠으면 훨씬 더 활약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지. 그건 그 전투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거나, 아니면 역전의 한 수가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아?”

“호오, 그래서? 그 역전의 한 수가 짐을 치는 것이다?”

“장수를 죽이는 것만으론 전쟁을 이겼다고 할 수 없잖아? 명 제국 전체와의 싸움이니, 제대로 이기려면 황제 정도는 죽여야지.”

아무리 가정에 불과하지만, 황제를 죽인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불손의 극치.

백택이 당장에라도 나설 것처럼 한 걸음을 내딛었다.

“네 녀석……!”

“그만. 백택, 너도 이 녀석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짐이나 너는 하기 힘든 생각이다. 확실히, 반군 출신은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군. 지나가는 세 사람이 있으면 배울 점도 세 가지가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문제점이 있다. 반.”

“무슨 문제점?”

“이곳엔 팔기군과 어림군, 그리고 적룡기마대가 있다. 그런데 이제 병사들도 없는 그들이 어떻게 짐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겠나?”

“하핫! 난 또 뭐라고.”

반야혼은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황제. 내가 어떻게 당신이랑 만났는지 잊었어?”

“흐음, 즉, 아무리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도 소용없다?”

“그래. 이번에 무림인들이 관아를 습격해서 장악할 수 있던 이유가 뭔데? 무림인들의 힘을 우습게 보고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야? 무공을 배운 놈들은 마음만 먹으면 관아의 담장 따위는 귀신 못지않게 넘어 다닐 수 있는 놈들이라고.”

황제는 자신의 짧은 수염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하긴, 그렇지. 사실 짐도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앞으로 관아의 병사들은 강해질 것이야. 황실 비고에 잠들어 있는 무공들 중 웬만한 것은 모두 개방하여 병사들의 질을 높일 생각이다.”

“하핫! 그렇군, 그런 수가 있었지!”

반야혼은 호기심을 느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숫자로는 관아의 병사들이 훨씬 많으니까. 무공을 익히기만 하면 이번처럼 무림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겠지.”

“바로 그것이다. 앞으론 무림문파가 관아의 힘을 뛰어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황제의 말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어서, 앞으로 그 일이 현실이 될 것에 조금도 의심이 생기지 않았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군.”

황제는 다시 본래의 화제로 되돌렸다.

“그래서…… 그자들이 몰래 이곳까지 습격할 것이다, 이건가? 하지만 그러면 너희 둘이 나를 호위하면 될 일 아닌가?”

“이봐, 황제. 난 말이지…….”

반야혼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난 말이야, 장기린이 그런 꼴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게다가 장기린과 대등하게 겨루었다는 그 북천맹의 맹주라는 놈도 꽤나 강한 놈이었겠지? 그런데 그 둘이 다 죽거나 그런 꼴이 되었다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반야혼의 목소리에선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장기린.

그 녀석은 하늘이 무너져도 멀쩡할 것만 같은, 그런 묘한 존재감이 있는 사내였다.

그런데 그런 꼴이 되다니.

처참한 모습으로 마차에 누워 있던 그 모습을 보고 반야혼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암기를 사용한 거다. 실력과는 상관없어.”

“그래서 더 그런 거야.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해도 암기 따위로 그 녀석 정도의 강자를 쓰러뜨린다? 이상해.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즉, 기술의 힘이 무공을 따라잡는다는 게 못마땅하다는 것인가?”

“큭큭,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반야혼은 분명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뭐, 일단 그건 둘째 치더라도, 어쨌든 중요한 건 그놈들이 이곳까지 숨어들 수 있다, 그리고 장기린도 쓰러뜨릴 수 있는 암기를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야. 어떻게 생각해?”

“즉, 기린이 쓰러졌으니, 짐도 언제든 당할 수 있다?”

“뭐, 그렇지.”

황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반야혼의 말이 완전히 근거가 없지는 않게 들렸던 것이다.

“백, 어떻게 생각하나?”

“확실히…… 가능성은 있을 듯합니다.”

백택은 반야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 때문에 맞는 말을 아니라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백택도 인정하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룡기마대를 불러와야겠군. 오늘은 호위를…… 아니, 이미 늦었나.”

황제는 허리를 쭉 편 채 늠름하게 팔짱을 꼈다.

백택과 반야혼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제의 앞과 뒤를 막아선 상태였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강대한 기세.

마치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와 보라고 소리치는 듯, 강렬한 존재감이 황궁 전체를 떨쳐 울리며 황제를 부르고 있었다.

“재미있군.”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떠오른다.

눈에 띄는 도발이다.

만약 이 도발을 계획적으로 생각하고 한 거라면 상대는 분명 대단한 자일 것이다.

황제는 자존심이 강하다.

이런 노골적인 도발을 앞에 두고 위험하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간다.”

“폐하, 일단은…….”

“간다, 백택. 그대라면 짐이 어떻게 할지 잘 알고 있을 테지.”

황제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백택과 반야혼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황제의 침소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문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짙은 혈향에 숨을 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꿰뚫린 시신들이 무려 수십 구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비록 남경을 탈환하고 모든 병사들이 승리의 기쁨에 빠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투가 끝난 다음에 곧바로 긴장을 풀어 버릴 만큼 부운화는 허술하지 않았다.

미리 어림군의 병사들 중에 정예를 선발해 황제의 주변을 지키도록 지시해 두었다.

적룡기마대를 쓰지 않은 이유는, 어림군이 본래 북경의 황궁에서도 황제의 주변을 지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임무에 익숙했고, 반대로 적룡기마대가 황제의 주변을 지키려고 하면 반감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소리도 없이 전멸인가.”

황제는 약간의 감탄을 담아 말했다.

어림군 같은 정예 병사들을 안에 있던 황제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두 참살했다.

그 한 가지만 봐도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름을 말하거라.”

위급한 상황임에도 황제의 당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꽃과도 같은 시선이 정면에서 고요하게 서 있는 사내를 향했다.

평범한 갈색 옷에 삿갓을 쓰고 있다.

등 뒤에는 두 자루의 칼을 십자로 교차해서 메고 있었다.

“하시르, 그게 세상이 저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린 그의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혼탁하면서도 신비로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이다.

하시르의 시선은 황제를 넘어 어딘가 먼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네놈이 하시르였던가. 자신의 장군을 죽인 놈이 뻔뻔하게 잘도 나타났구나. 이제부터 짐을 쓰러뜨려서 명예라도 회복해 보려는 작정이냐?”

황제가 도발적인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시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의 천명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붉은 악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창천의 늑대뿐. 그곳에서 서로를 봉쇄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천명이라? 좋다, 그럼 말해 보아라. 너의 천명은 무엇인가?”

“저의 천명은…….”

하시르가 그런 말을 하려고 할 때쯤이었다.

주변의 경계를 맡고 있던 어림군이 이변을 알아채고 몰려든 것이다.

“지켜라! 폐하의 곁을 지켜라!”

“우오오―!”

어림군장 임무호였다.

쌍호는 크게 부상을 당한 탓에 함께 오지 못했지만, 그는 부상으로 양팔과 어깨를 천으로 칭칭 감아 두었음에도 용맹하게 어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오백여 명의 어림군 병사들이 황제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황궁 내부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어림군 오백 명 뿐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아직 궁의 바깥쪽에 있었다.

“방해됩니다.”

황제의 앞을 가로막은 어림군 중에 몇 명이 하시르에게 창을 겨누는 순간, 하시르의 몸이 바람을 타는 듯한 움직임으로 휙―하니 삼 장여 거리를 단축시켰다.

“조심……!”

어림군장 임무호가 미처 경고를 하기도 전에 하시르의 쌍도가 앞쪽에 있던 병사 세 명의 몸을 휩쓸고 있었다.

푸화악―!

“크헛……!”

“으악……!”

비명과 함께 세 사람의 몸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다.

주변의 병사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은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

쌍도를 좌우로 내뻗은 채 마치 춤을 추듯 빙글 회전하는 하시르.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허리가 섬뜩하게 잘려 미끄러졌다.

푸화아악―!

“으, 으아악……!”

차라리 상대가 칠 척 거한에 무시무시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면 덜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한데 상대는 지극히 평범한 체구의 사내였다.

삿갓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앳된 부분이 있기까지했다.

하시르에게는 그 자신만의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안개를 몸 주변에 두른 것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묘한 거리감이다.

당장 손에 닿을 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하시르는 마치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이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것처럼 거침없이 황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놈, 강하다.”

듣기 좋은 목소리.

반야혼이다.

“삼대천이란 놈들은 다 저런 건가? 과연, 저 정도라면 전쟁터에서도 만만치 않았겠는데.”

호승심을 느낀 듯 늑대처럼 이를 드러내는 반야혼에게 황제가 태연하게 답했다.

“삼대천이라면 북쪽 전장에선 사신과 같은 명성을 지닌 자들이지. 명 제국의 무수히 많은 유능한 무장들이 저자들에게 당해서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황제는 선혈의 안개를 주변에 휘감은 하시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짐 또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 역시 명불허전이다.”

황제가 감탄하고 반야혼은 호기심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황제의 안위를 우선시하며 주변을 면밀히 살피던 한 사람.

백택이 경호성을 내질렀다.

“폐하! 위험합니다!”

냉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외침에 황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하시르에게 못 박혀 있던 그 순간, 언제 나타난 것인지 좌측과 우측에 이국적인 복색을 한 백여 명의 사내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있었다.

황제가 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벌 떼가 날아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좌측과 우측에서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피슈슈슈슉―!

직사(直射)가 아니라 곡사(曲射).

백여 개의 화살이 모두 한 점으로 집약되어 있는 뛰어난 궁술이다. 화살의 경로를 살펴보면 그 목표점은 황제였다.

반야혼이 양손을 짐승의 발톱처럼 사납게 꺾는다.

어림군 중 몇 명이 다급하게 몸을 돌린다.

하지만 화살이 한발 빠르다.

황제는 입가에 호탕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마치 어떠한 위기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폐하!!”

임무호의 다급한 외침과 거의 동시에,

촤르르륵―!

“……!!”

허공 위로 바가지로 부은 듯한 물덩이가 생겨났다.

물덩이는 당장에라도 황제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처럼 보이다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지는 듯 동그랗게 뭉쳐진 채 허공에 멈춰 섰다.

파바바밧!!

화살은 그 물덩이 속에 힘차게 꽂힌 뒤 힘을 잃고 멈춰 섰다.

신비로운 광경이다.

허공에 떠 있는 물덩어리 속에 백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무슨……?”

“대단하다……!”

모두의 시선이 물덩어리로부터 천천히 그 옆에서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는 백택에게로 향했다.

물을 움직인 것은, 누가 봐도 백택이었다.

고대의 선술(仙術).

또는 술사들이 쓴다는 부적술과도 같다.

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광경이다.

텅! 터텅! 터엉!

“끼요오옷―!”

“챠하핫!!”

그때, 화살을 날린 호리호리한 사내들 뒤에서 달려 나온 거구의 사내들이 각자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둥그런 나무통을 집어 던졌다.

앞서 남경 전투에서 그 나무통을 본 적이 있던 어림군들이 깜짝 놀라며 그 통으로부터 물러섰다.

통들은 황제의 주변 삼 장 거리를 둘러싸며 일정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뒤쪽의 황궁의 문 앞까지 가로막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핫!”

황제는 큰 소리로 웃더니, 어느새 뒤쪽으로 훌쩍 물러선 하시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스스로 미끼가 되고, 그걸로도 모자랄 경우를 대비해 화살로 상대를 흐트러뜨린다? 제법이다. 인정해 주지.”

황제는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 가리킴을 받은 하시르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반, 죽여라.”

화아아악―!

“……!!”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하시르의 뒤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