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二十四章 ― 사적불가(史籍不可)
“반, 죽여라.”
코앞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검은색 그림자는 하시르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치 야생짐승에게 습격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바로 옆까지 다가오는 것을 하시르가 ‘보지 못할 수’ 있었을까.
‘대단한 능력이다!’
하시르는 감탄하며 쌍도를 눈앞에서 십자 형태로 교차했다.
쩌어엉!!
단순히 맨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은 쪽의 칼날이 오히려 박살 날 것처럼 떨렸다.
대단한 악력.
굉장한 힘이다.
게다가 잡아 뜯을 것처럼 날아오는 손의 공격이 치명적인 사혈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시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강하다.
분명 정면으로 승부해도 삼백 초 안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 실력자다.
하지만 하시르에게는 특유의 능력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하시르지만, 사실 괴짜들만 모여 있는 삼대천 중에서도 그는 가장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항상 그의 주변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역장은 그에게 끊임없이 예민한 감각을 전달해 준다.
즉, 역장이 닿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마치 피부로 만들어진 것처럼 하시르에게 모두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엄청난 공간 장악 능력.
주변으로 근 일 장 거리를 모두 제 몸 안처럼 지배하에 둔다는 뜻이니, 고수의 싸움이 될수록 유리해지는 능력이다.
반야혼 정도의 강자가 움직일 때는 일 장 거리를 좁히는 데 반 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 초의 시간이면 하시르가 피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는다.
하시르는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반야혼이 내뻗은 손이 아슬아슬하게 어깨 옆을 지나가는 위치였다. 동시에, 하시르의 팔꿈치가 허공에서 빙글, 반 바퀴를 돌았다.
“흠……!!”
반야혼의 눈에 놀람이 스친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에서 죽립이 잘려 나갔다.
간격을 허용했다는 뜻이다.
반야혼에게 있어서는 몸에 상처가 남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네놈…….”
반야혼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늑대와 같은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밖으로 드러났다.
반야혼이 다시금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척하니 그를 향해 겨눠진 칼날이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그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마치 짐승과 같은 싸움법, 강철을 우그러뜨릴 수 있는 악력. 당신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새벽녘의 안개와도 같은 신비로운 눈빛이 반야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르칸이 말하더군요. 예전에 자신을 방해했던 자가 있는데, 상당히 거슬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덩치 큰 몽고 놈 말인가? 거슬리다니? 위험했다는 걸 잘못 말했겠지.”
“하하, 언변도 뛰어나시군요. 의외입니다. 그보다, 이미 늦은 것 같군요.”
“뭐가 말이지?”
“당신이 지키려는 사람 말입니다.”
반야혼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황제를 쳐다보는 우(愚)는 범하지 않았다.
상대는 하시르.
잠시라도 빈틈을 보였다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강자다.
하시르는 한 손으로는 반야혼을 겨눈 채,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칼을 수직으로 들어 올려 하늘을 찌르더니, 천천히 허공에다 원을 그렸다.
“흡……!!”
그 순간, 반야혼은 먼 곳에서 위험한 뭔가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번뜩이는 섬광이 황제의 주변을 둘러싼 나무통에 박혀 들었다.
하늘을 찢는 듯한 소음은 그 뒤에 들려왔다.
쒜에에엑―!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악……!!”
폭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 은빛의 작은 무언가가 사방을 뒤덮고, 불길이 옮겨붙은 석랍이 파도처럼 터져 나왔다.
“치, 침이……!”
“머리가…… 머리가 타고 있어!!”
“끄아아악……!”
나무통들은 주변 삼 장가량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폭발하면 그 피해는 안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인근.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들에게도 당연히 미치는 것이다.
순식간에 백오십여 명의 어림군이 처참한 몰골이 되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철침이 몸에 박혀 괴로워하는 자.
튀어오른 석랍이 몸에 불을 붙여 바닥을 뒹구는 자.
단지 화살 하나가 날아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지옥도가 펼쳐진다.
바깥쪽이 그럴진대 나무통들이 포위하고 있던 중심부는 어떻겠는가.
황제가 서 있던 곳은 가장 심했다.
나무통들의 화력이 총집중된 것은 물론이고, 석랍들이 모두 한쪽으로 모여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화르르륵―!
무려 십 장 밖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얼굴이 후끈하다고 느낄 정도의 엄청난 화력이 발산되었다.
폭발에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특히 어림군을 책임지는 임무호는 큰 혼란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폐, 폐하……! 물을, 물을 가져와라! 어서 불을 꺼!!”
임무호가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병사들은 삼사십 명에 불과했다.
황제가 나무통에 포위당하고, 반야혼이 하시르에게 달려들고, 갑자기 날아온 화살 하나에 나무통이 폭발한 것.
길게 느껴졌지만, 사실 시간상으로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늦은 것이 맞죠?”
반야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시르는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그 모습은 마치, 원하던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 같았다.
☆ ☆ ☆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지붕 위에서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적룡기마대와 함께 황궁 바깥쪽의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부운화와 다른 간부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섭우생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부운화를 쳐다봤다.
“둘째 형님, 소리가 들린 것은 폐하가 계신 쪽입니다.”
“……적룡기마대!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양동일 가능성이 있어! 일반 대원들은 모두 이곳을 지켜라!”
“옛!”
부운화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뒤 지시를 내렸다.
“추룡, 대석, 우생, 진구. 간부들은 나와 함께 안쪽으로 간다. 전원! 전투 준비!!”
“옛!”
비록 장기린이 선두에 설 때 같은 괴력은 나오지 않겠지만, 적룡기마대는 개개인이 일류 고수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최정예 부대였다.
설령 열 배가 넘는 적이 몰려와도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충분히 정문을 지켜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부운화는 모두에게 각자의 지시를 내린 뒤, 나머지 간부들을 데리고 몸을 날렸다.
“가자!”
“옛!”
부운화, 추룡, 대석, 섭우생, 진구.
다섯 사람의 강자가 황궁 내부의 싸움에 참전하였다.
☆ ☆ ☆
“슬슬 돌아가봐야겠군요. 이제 슬슬 적룡기마대가 달려올 시간이라서 말입니다.”
하시르는 혼란에 빠진 주변의 병사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휙하니 몸을 돌렸다.
“어이, 너.”
물론, 그걸 그냥 두고 볼 반야혼이 아니다.
민첩한 산고양이처럼 훌쩍 도약한 반야혼이 하시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막으실 겁니까? 우선 귀하신 분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구해? 누구를?”
“당연히 당신의 황제 말입니다.”
“하핫!”
반야혼은 웃었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네 눈에는 황제가 누군가가 구해 줘야 하는 존재로 보였나 보지?”
“……무슨 뜻입니까?”
“뭐, 상관없다. 나중에 직접 보도록. 아, 아니지. 못 보겠군. 넌 그때쯤 눈을 뜨고 있지 못할 테니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반야혼에게서 사나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황제가 살아 있다는 겁니까? 폭침정이 백 개나 사용된 저곳에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붉은 악귀도 저곳에선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시르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폭침정은 현존하는 살상 암기 중의 최강이다.
그리고 실제로 텐챠이와 장기린이라는 걸출한 희대의 무인 두 사람을 동시에 지옥으로 보내 버린 병기이기도 했다.
발동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폭침정이 발동되어 그것에 휩쓸렸다면, 아무리 굴강한 고수라도 순식간에 시신마저 온전히 보전할 수 없는 꼴이 되어 버린다.
“하핫,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만.”
“무슨 소리입니까?”
“네가 붉은 악귀라 부르는 사람 말이다, 살아 있어.”
“……!!”
“뭐랄까, 상당히 다치긴 했지만, 내 느낌엔 살아날 것 같단 말이지.”
“…….”
하시르의 얼굴에서 천진한 웃음이 점차 사라져 갔다.
“살아났다면…… 살아난 건 붉은 악귀 혼자입니까?”
“모르지, 그건.”
“…….”
“자, 그럼 잡담은 이만하자고.”
이 말 또한 심리전의 일부.
반야혼은 씩 웃으며 양손을 쭉 뻗어 손가락의 근육을 풀었다.
우두둑.
섬뜩한, 뼈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야혼은 곧바로 하시르에게 달려들려다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다.
“어이.”
반야혼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네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
하시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야혼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기묘한 눈빛과 표정으로 하늘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늘은…… 역시, 그리 쉽게는 내주지 않으시는군요.”
스릉―
하시르의 칼날은 매우 예리했다.
칼날 위로 낙엽이 떨어지면 저절로 쩍, 하니 베여서 반으로 쪼개질 정도였다.
하시르는 그런 칼날로 반야혼을 겨눴다.
섬뜩한 살기가 바늘처럼 온몸을 찌른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하시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상황을 지켜봐야겠군요.”
“호오, 그럼 죽을 텐데?”
“글쎄요. 붉은 악귀가 없는데다 적룡기마대까지 없는 명 제국은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입만 살았군. 증명해 봐.”
“얼마든지요.”
반야혼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한 걸음 더 내딛으려다 황급히 상체를 굽히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푸욱―!
어느새 날아온 화살 하나가 반야혼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을 딛고 있던 곳에 틀어박혀서 꼬리만 살짝 내놓은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반야혼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전에 아무런 기색도 없이 날아와 굉장한 위력까지 갖추고 있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피이이잉―!
“큭?!”
곧바로 다시 한 번 날아온 화살을 반야혼은 허공에서 손으로 잡아챘다.
파라라락!!
“크읏?!”
하지만 거세게 회전하는 화살은 기묘한 기류를 만들어 내며 끝까지 나아가 반야혼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푹, 하고 피부를 뚫은 화살은 쇄골보다 조금 위쪽의 뼈에 박히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반야혼이 재빨리 뽑아버렸지만,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반야혼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살에 이 정도의 힘을 싣다니, 누군지 몰라도 상대는 대단한 놈이다.
게다가 그의 본능이 이게 끝이 아니라 경고하고 있었다.
하시르가 등을 돌렸다.
그런 뒤 반야혼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섬뜩한 칼놀림으로 주변의 병사들부터 베어 나갔다.
허공에 뛰어올라 한 바퀴, 두 바퀴…….
마치 나비처럼 회전할 때마다 병사들의 몸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큭, 거기 서라!”
반야혼이 소리치며 따라가려고 했으나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의해 봉쇄되고 말았다.
화살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것에 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야혼의 움직임을 가로막기엔 충분했다.
방심하면 몸이 꿰뚫릴 만한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황제의 침실 쪽에서 보면 좌측.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던 그쪽으로부터 쿵쿵거리는 땅울림과 함께 보통 병사들의 다섯 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구가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콰과과과―
콰직! 우두둑, 콰앙!
“으아악……!”
앞을 가로막으려는 병사들은 마치 귀찮은 벌레를 쫓듯 그가 손을 내저을 때마다 옆으로 퍽! 하고 튕겨져 나갔다.
아무리 어림군의 정예라도 소용없었다.
창을 찔러도 피부에 박히지 않는데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철로 만든 창대가 상대의 손에 잡히면 우그러져 버렸다.
뒤쪽에서 하나로 땋은 변발. 거구의 육체는 강철과도 같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다.
삼대천 우르칸의 등장이다.
반야혼은 더 이상 하시르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정체 모를 강력한 화살이 그를 견제하고, 우르칸이 달려든다.
당장 여기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아슬아슬했다.
“큭큭, 이거, 위험하군.”
반야혼은 웃었다.
하시르는 그야말로 양중호(羊中虎)처럼 날뛰고 있었다.
양손에 든 쌍도를 휘둘러 병사들을 베어 넘기는데, 이미 쓰러진 숫자만 해도 오십에 달하는 듯했다.
사람을 효율적으로 베는 살상력만으로 따지면 장기린보다 더한 것 같았다.
“황제, 살아남으라고.”
반야혼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힐끗 쳐다본 뒤, 우르칸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오오오―!”
우르칸이 쾅! 하고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찍자, 석조 바닥이 쩍하니 갈라지며 파편들이 사납게 튀어올랐다.
거대한 곰과 사나운 표범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림군의 병사들이 쓰러지고, 폭음을 듣고 이변을 알아챈 팔기군과 적룡기마대가 황궁의 중심부로 모여든다.
남경 공략전의 마지막 싸움은 절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 ☆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경(仙境)이 따로 있을까.
인세에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면 그게 바로 선경이다.
황제는 천천히 한 손을 내밀어 찰랑찰랑하게 흔들리고 있는 물덩어리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그가 손을 대자 슥― 하니 평범한 물속에 손을 넣는 것처럼 물속으로 들어가진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좌측과 우측, 위쪽도 확인했다.
나무통으로 만든 암기가 주변에 떨어진 직후, 반야혼이 하시르를 공격했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동쪽에서 날아온 화시(火矢)가 나무통을 폭발시켰다.
그 모든 과정은 그야말로 찰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모두 이루어졌다.
나무통이 폭발했고, 안쪽에서 수백, 수천 개의 철침과 불이 붙은 석랍이 터져 나왔다.
만약 황제의 주변을 물의 방패가 반구 형태로 감싸지 않았더라면, 아마 철혈의 황제라도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기하군. 바깥에서는 철벽의 방어를 만들지만 안쪽에선 평범한 물이라는 건가? 백택, 너의 술법은 언제 봐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물로 만들어진 방벽에는 물 전체가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많은 철침이 박혀 있었다.
게다가 붉게 타오르는 화염이 있다.
물 방패의 바깥쪽은 지글지글 끓는 석랍에 뒤덮여서 뿌연 수증기를 내뿜는 중이었다.
“감사…… 합니다.”
백택은 황제의 뒤에서 양손을 좌우로 뻗은 채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얼굴로 평정을 유지하던 백택이지만, 지금만큼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철(鐵)과 불[火].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합쳐져 있으니 물을 다루는 백택으로서는 상성이 안 좋다.
실제로 바깥의 화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백택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굵어져 갔다.
“백택, 네가 힘들어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
황제는 그런 백택의 얼굴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대답해 다오. 네가 만약 기린 정도 되는 강자와 대결하는 도중에 이 암기에 급습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백택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대답했다.
“죽…… 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멀쩡히 빠져나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과연. 역시 이 병기는 위험하다.”
황제는 태연했다.
백택의 양손이 당장에라도 밑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건만, 생명의 위험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물의 방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내부를 한 바퀴 돌더니, 위엄있는 웃음을 지으며 백택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젠 시간이 된 것 같군. 백택, 길을 열거라.”
“예, 폐하…….”
그 순간, 백택의 눈에서 푸른색의 신광(神光)이 감돌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펼친 손끝에서도 푸른색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라라라락―!
품이 넓은 문사복이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
뒷짐을 진채 서 있는 황제의 앞.
성인 남자 한 명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물덩어리가 생겨나더니, 나선의 형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물덩어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황제의 정면.
거대한 물덩어리는 마치 손오공의 여의봉마냥 앞으로 쭉 늘어나며 황제의 정면에 있던 석랍과 불꽃을 모조리 휩쓸었다.
콰드드득!!
치이이익―!
시야가 뻥 뚫리며 바깥쪽의 공기가 훅― 하고 밀려든다.
황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열에 증발한 수증기가 황제의 주변에서 마치 선계의 구름과 같은 진풍경을 만들어 냈다.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황제는 웃는 얼굴로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어림군은 전멸했다.
대여섯 명이서 어림군의 수장인 임무호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지만, 아마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황제의 시선이 황궁의 정문과 이어지는 큰 통로로 향했다.
바깥쪽의 병사들이 황궁 내부로 들어오려 하는 듯하지만, 입구를 막아선 거구의 몽고족에게 막혀서 들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깥쪽의 인원이 많아도 소용없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좁은 이상, 그곳을 뚫으려면 압도적인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몽고병들의 종류가 두 종류로군. 한쪽은 몸이 단단하고 큰 거구의 집단, 다른 한쪽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해 보이는 궁사들. 재미있군. 그리고 저쪽이 삼대천일 테지.’
황제의 시선이 한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반야혼에게로 향했다.
반야혼은 상처투성이였다.
양어깨와 팔, 다리엔 열 개가량의 화살이 박힌 채 움직이는 중이다.
그 상태로 엄청난 거구의 사내와 싸우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괴력을 지닌 듯한 사내의 공격을 피해 내는 모습은 역시나 그가 왜 ‘만적’이란 칭호를 갖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빠르고, 민첩하며, 치명적이다.
상대가 주먹질을 하면 그 팔목을 잡아 뜯고, 상대가 발차기를 날리면 뒷발의 힘줄을 끊어 버린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악력을 지닌 반야혼이 아니라면 구사할 수 없는 전투법.
본래대로라면 어떤 상대든 빠른 시간 내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반야혼이지만, 지금은 상대가 워낙 거구인지라 쉽게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거구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둔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 방향으로 돌진할 때는 놀랄 만큼 재빨랐다.
실제로 반야혼은 소매가 한 번 잡혀서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닥에 패대기쳐지기도 했다.
“크아아아……!”
“흐아앗!!”
반야혼과 우르칸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둘의 싸움은 호각.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적이 한 명 있기에 반야혼이 밀리고 있었다.
‘화살이 문제로군.’
황제는 화살이 날아오고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상대가 그의 시선을 알아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신속의 화살이 황제의 미간을 노렸다.
쒜에에엑―!
철퍽!
순간, 허공에 나타난 물덩이에 화살이 박혀서 멈춰 섰다.
하지만 이번에 쏘아진 화살은 다른 화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려, 백택이 만들어 낸 물의 방패를 거의 다 뚫고, 꼬리깃만이 물에 담긴 채로 겨우 멈춰 선 것이다.
황제는 백택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힘이 좀 빠졌다지만, 백택의 술법을 뚫어 버리는 위력은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삼대천인가 보군.”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삼대천의 전장이다.
괴력난신 우르칸.
신궁 자이혼.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영매 하시르.
휘리릭―
바람이 미끄러진다.
하시르의 움직임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황제의 앞으로 다가와 큰 각도로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푸확!!
폭발하듯 터져 나간 물덩어리가 하시르의 몸을 적셨다.
어느새 백택이 황제의 앞쪽에 물로 방패를 만들어 낸 것이다.
파아앗!
하시르는 흠뻑 젖었지만, 내공을 이용해 순식간에 물기를 날려 버렸다.
“과연……!”
하시르가 웃었다.
뭔가를 알아차린 듯, 개운하고 자신만만한 웃음이다.
그가 허공에서 쌍도를 한 번 쩡! 하고 부딪치는 순간,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 같은 기운이 더욱 강해진다.
하시르는 다시 한 번 공격을 가했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또 하나의 물덩어리가 터져 나갔다.
칼의 기세가 조금 약해지는가 싶었지만, 하시르는 왼손에 들고 있던 칼로 반대쪽 손의 칼날을 후려치며 힘을 더했다.
쩌엉!!
퍼어엉!
물덩어리가 폭발했다.
처음으로 방패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터져 나간 것이다.
하시르의 왼쪽 칼날이 황제에게로 다가간다.
다시 한 번 물덩어리가 허공에 생겨났지만, 하시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쪽 칼날로 왼쪽 칼날을 후려쳐서 물덩이를 터뜨렸다.
쩌엉!!
푸화악!
허공에서 흐트러지는 물안개 사이로 하시르의 칼날이 유려한 선을 그려 낸다.
황제까지의 거리는 이제 일 장.
앞으로 몇 번의 물 방패만 더 뚫는다면 충분히 황제의 몸에도 칼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과연. 백택의 수선법(水仙法)을 그런 방법으로 깨다니, 삼대천이라 불릴 만하다.”
칼날을 목전에 둔 상황임에도 황제는 여전히 태연하다.
한편, 백택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두 눈에서 푸른색 신광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정면에서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물덩어리가 하나둘씩 증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백택은 단순히 황제의 몸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하는 물덩어리.
나선형으로 날카롭게 갈린 물덩어리가 앞으로 쏘아져 하시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콰드드득!!
하시르가 예민한 감각으로 공격을 피해 내자, 딱딱한 돌바닥이 섬뜩할 만큼 쉽게 부숴졌다.
이번엔 백택이 주변에 떠 있는 물덩어리에 손을 넣어 직접 물을 앞으로 흩뿌렸다.
그러자 엄지손가락만 한 물방울이 웬만한 암기 못지않은 파괴력으로 사방을 장악한다.
하시르는 그때마다 미래를 예지(銳智)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간신히 피해 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저의! 천명은!”
쩌엉!
푸화아악!
온갖 공격을 쳐 내고, 물덩어리를 터뜨리며 전진한 하시르의 입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푸화아악!
마지막 물 방패가 터졌다.
이제 남은 거리는 반 장(丈).
“저는, 하늘의 뜻을 완수합니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는 황제를 보며, 하시르의 눈에 신묘한 신기(神氣)가 담겼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린 하시르의 칼.
자신의 천명을 담은 쌍도가 커다란 십자(十字)를 그렸다.
☆ ☆ ☆
부운화는 앞을 가로막는 우르칸의 수하 중 다섯 명을 단 일검에 베어 버렸다.
허공에서 그려지는 반원.
태극혜검에 독자적인 깨달음을 섞어 만든 부운화의 검술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단단한 외공(外功)을 익혔어도 마찬가지다.
강철조차 베어 낼 수 있는 부운화의 공격은 우르칸의 바위곰들을 볏단 자르듯 베어 버렸다.
푸화아악―!
“으윽……!”
마침내 두려움이 없던 바위곰들의 눈에 공포심과 외경심이 떠오를 때 즈음, 황실 내부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부운화는 무당 비전 제운종(梯雲縱)을 시전해 구름을 밟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안쪽에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오백여 명의 어림군이 몰살당했다.
그중 일부는 자이혼의 바람새들에게 당한 듯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강력하고 재빠른 칼에 당했다.
하시르.
지금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물과 싸우고 있는 북천맹의 괴장(怪將)에게 말이다.
‘백택이라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일단은 이쪽, 우르칸이다.’
부운화의 시선이 황궁을 모조리 파괴할 듯한 기세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싸움터로 향했다.
한 사람은 우르칸.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황제의 뒤에 서 있던 검은 무복의 사내다.
‘만적이라고 했던가. 저대로라면 이길 수 없다.’
대형인 장기린이 혈육과 같은 온정을 느끼는 존재다.
정당한 일대일이었다면 모를까, 지금과도 같은 상황에선 이길 수 없을 걸로 보였다.
‘자이혼은…… 다른 애들이 갔겠지.’
부운화의 시선이 잠시 바위곰과 바람새들이 모여 전투를 벌이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우르칸에 못지않은 거구를 지니고 양손에 쌍추를 든 채 주변을 휩쓰는 대석.
새카만 철 섭선으로 상대의 목을 민첩하게 베어 내며 싸우는 군사, 섭우생.
그 두 사람이라면 바위곰과 바람새 일백여 명이라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궁 입구에선 팔기군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중이었다.
싸움의 승패는 이미 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운화의 몸이 다시 한 번 제운종의 구결대로 움직이며 격렬한 싸움터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부우우웅―!
파바바밧!
우르칸은 거대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찍고, 반야혼은 옆으로 피해 내며 다리를 노리려던 중이었다.
“흡……!”
“큭……!”
우르칸과 반야혼은 동시에 경악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들의 코앞에 섬뜩할 만큼 날이 잘 갈린 장군검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우르칸!”
부운화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번뜩이는 눈빛. 웃음이 사라진 차가운 얼굴에 서린 냉랭한 적의.
졸지에 반야혼은 뒤로 밀려난 셈이지만, 그는 항의할 틈조차 찾지 못했다.
부운화가 곧바로 우르칸에게로 돌진했던 것이다.
“크윽, 표풍검……!”
우르칸은 난색을 표했다.
언제 어느 때든 싸움은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는 우르칸이지만, 반야혼과 다투면서 상처를 입은 마당에 붉은 악귀 못지않게 강하다는 표풍검은 부담되는 상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운화는 이 순간, 격식을 따지지도, 정정당당함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적은 곧바로 말살할 뿐.
부운화의 쌍검이 허공에서 빛나는 태극 문양을 그렸다.
반원과 반원이 합쳐진 공격.
필살의 태극혜검이다.
푸화아악―!!
“크윽……!”
우르칸은 미처 피하지 못했고, 가슴에 거대한 태극 문양의 상처를 입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깟것……!”
매우 고통스러울 텐데도 기합으로 이겨 낸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사나운 인상에 덥수룩한 수염 위로 극도의 분노가 드러났다.
“표풍거어엄―!”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르칸의 가슴에서 뿜어지던 핏물이 멈췄다.
놀랍게도 근육으로 상처를 강제로 수축시킨 것이다.
게다가 회복력이 얼마나 빠른지, 상처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게 너의 능력이었다, 우르칸.”
부운화는 놀라지도 않고 그런 우르칸을 냉랭하게 응시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강인한 육신, 그리고 정상이 아닌 회복력. 하지만…… 그걸로 지금의 내 검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우르칸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태산도 뒤흔들 것 같은 고함을 질렀다.
“표풍거엄―!”
황성 내외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머리털이 쭈뼛섰을 것이다.
우르칸의 외침은 그 정도로 살기등등하고 사나웠다.
“이지도 흐려졌는가? 너의 진정한 죄는 역모가 아니다, 우르칸.”
우르칸은 애초에 몽고인.
역모죄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가 진정으로 잘못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우리의 대형을 건드린 것. 행복을 방해한 것. 네 몸으로 직접 뉘우치게 해 주겠다.”
“크아아아아―!”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양주먹을 바닥에 내려치는 우르칸.
주먹이 내려쳐진 주변 바닥으로부터 네모난 석판들이 일제히 위로 튕겨져 솟아올랐다.
우르칸의 몸에서 근육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듯한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그는 손을 쭉 펴서 관수의 형태로 만들더니, 발밑으로 푹 쑤셔 넣었다.
콰드드득!
그리고…… 지면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렸다.’
황실 내부, 가장 밑바닥에 깔아 둔 지반석을 꺼내 든 것이다.
드드드드―!
“으아악……!”
“괴, 괴물……!”
가까이 다가오려던 팔기군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며 땅이 비스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리석은 짓.”
부운화는 자세를 낮췄다.
양다리를 편안하게 어깨넓이로 벌리고, 오른손은 왼쪽 허리에, 왼손은 오른쪽 어깨 위에 갖다 댄다.
비스듬하게 몸이 기운 자세지만 그걸로 좋다.
애초에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과한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바로 진정한 ‘태극(太極)’.
태극만상(太極灣商).
부운화가 깨달은 최고의 심득이자, 차고 기운 것을 평온하게 하는 만물의 이치가 담겨 있는 검이다.
그는 서서히 기울어지는 지반을 미끄러지듯이 타넘으며 천천히 좌우의 검을 교차하듯 그었다.
일격.
그리고 왼손은 위로 반원을, 오른손은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우르칸의 상체에 거대한 태극 문양이 다시 한 번 새겨진다.
지반을 뒤집어 버리려던 우르칸의 몸이 움찔 흔들린다.
“크…… 아아아아―!”
하지만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튼다.
지반이 다시 들썩들썩거린다.
그 순간,
부운화의 검이 빛살을 내뿜었다.
촤르르륵―
쉬잉― 쉬잉― 쉬잉―
파가가가각!!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새겨지는 태극 문양.
두 개와 두 개.
총 네 개로 나뉘어진 태극 문양이 우르칸의 가슴에 새겨진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부운화의 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정면을 제압했다.
수십, 아니, 백 단위의 검격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단 한 번의 움직임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만(萬) 개의 변화는 심검의 이치가 담긴 강기(剛氣)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 아아아…… 아아악……!!”
우르칸이 울부짖는다.
반쯤 기울었던 지반이 쿵! 하고 떨어지며 다시 황실 내부는 평탄한 형태로 돌아갔다.
우르칸은 신체의 내부가 천참만륙된 채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육신을 강화했으나 박살 나 버렸다.
재생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기반이 되는 심장과 내장이 모조리 부서졌다.
죽음.
마침내 우르칸은 영원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우르칸답다면 우르칸다운 최후였다.
“다음 생에는 좀 더 평온한 삶을 살도록 해라.”
부운화는 그런 우르칸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오랜 시간 싸워 오던 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미려한 청년의 얼굴엔 승리의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삼대천 중 첫 번째 희생자와 함께 황성 내의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 ☆ ☆
“거기인가!!”
어색한 억양의 한어(漢語)였다.
추룡은 곧바로 황룡창을 뽑아 들며 종횡으로 두 번이나 휘둘렀다.
따아앙!
“큭……!”
먼 거리를 격하고 쏘아진 것은 자이혼의 섬광과도 같은 신궁(神弓)이다.
하지만 일격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나를 막았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순간적인 반사신경으로 다섯 발이나 화살을 더 쏘았다.
땅! 따다당! 땅!
추룡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역시 명불허전이다.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뚝에서 살이 한 움큼이나 뜯겨져 나갔다.
화살이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혼의 화살에는 하나하나 회전력이 걸려 있어서 막아 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추룡은 강해졌다.
수로채로 돌아가 아버지와 겨뤄 보며 다시금 느낀 것이지만, 그는 예전과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정을 넘은 지는 오래.
초절정의 경지에 한 발을 걸친 상태다.
둔중한 발놀림이지만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가 익힌 용왕십삼기(龍王十三技) 중 최후의 초식, 해일(海溢)을 시전하기 위해서다.
경신술에는 원래 자신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삼대천 중 가장 몸놀림이 빠르다는 자이혼은 그에게 최악의 상대일지도 몰랐다.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추룡이 자이혼을 상대로 자신감있게 다가가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자이혼은 추룡이 한 걸음을 다가가자마자 곧바로 뒤로 몸을 날리며 거리를 벌렸다.
단 한 번 땅을 걷어찼을 뿐인데 무려 삼 장이나 훨훨 날아간다.
자이혼의 경신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한 수였다.
이대로라면 놓칠 터.
계속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화살이나 계속 막아야 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지금!!’
하지만 이미 믿는 구석이 있던 추룡은 큰 소리로 외쳤다.
“진구야아―!”
“……!!”
깜짝 놀란 자이혼의 얼굴.
그리고 설마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적룡기마대에도 경신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이 하나 있었다.
진구.
적룡기마대의 막내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재(武才)를 타고난 악동이다.
진구는 어느새 소리소문도 없이 자이혼의 등 뒤를 잡고 있었다.
진구가 든 작살 형태의 적룡창이 불을 뿜었다.
그어어엉―!
마치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음과 함께 섬광의 찌르기가 자이혼의 등을 노렸다.
피할 틈은 없다.
추룡에게 활을 겨누며 물러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진구가 창을 내찔렀기 때문이다.
이대로 몸을 뒤로 돌리는 것도, 다른 곳으로 몸을 날릴 여유도 없다.
쩌어어엉!!
“아닛!!”
진구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자이혼은 뒤로 돌아서 공격을 막은 것도,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려 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래로 주저앉았다.
진구에게 등을 보인 채 주저앉는다.
즉, 진구가 척추를 노리고 내지른 창이 목덜미를 노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이혼의 등 뒤 목덜미엔 그가 항상 차고 다니는 거대한 외날 도끼, 잔성(殘星)이 있었다.
진구의 적룡창은 잔성의 도끼날을 때리고 뒤로 튕겨 나왔다.
‘이럴 수가……!!’
분명히 등을 잡았는데도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도 자이혼이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몸의 각도를 비틀어 적룡창을 옆으로 흘렸기 때문이다.
“전사도 못 되는 버러지들!”
자이혼은 어색한 한어로 외치며 그제야 등을 돌렸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오른손에는 거대한 외날 도끼가 들린 채였다.
진구는 황급히 적룡창을 수직으로 세워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반 바퀴.
마치 금강석처럼 지독하게 단련된 자이혼의 근육이 거대한 통나무를 일격에 잘라 내듯 진구의 적룡창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크읏……!”
진구의 발밑이 움푹 파였다.
어찌나 충격이 강한지 두 다리가 땅속으로 발목까지 파고들었다.
그사이 추룡이 달려왔다.
진구에게 도끼질을 하는 자이혼을 향해 커다란 언월도, 황룡창을 들어 올려 수직으로 내려쳤다.
쩌엉!
피슈슉!
“큭?!”
추룡의 참격은 허공에서 막혔다.
그뿐이 아니다.
자이혼은 추룡의 황룡창을 공중에서 도끼로 후려친 다음, 뒤로 훌쩍 물러나며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화살을 두 번이나 쏘아 추룡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이노옴……!”
추룡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프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삼대천이 강하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다.
장기린과 부운화.
그 두 사람이 아니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적룡기마대제일의 무재를 지닌 진구, 그리고 부운화 다음으로 강한 자신이 힘을 합쳤는데도 오히려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절대로 안 되지!’
추룡은 아픔을 정신력으로 이겨 내며 소리쳤다.
“진구야! 발목 잡아라!”
“예잇!”
마침 진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분노로 시뻘겋게 된 얼굴로 적룡창을 양손으로 짧게 잡고 달려든다.
추룡과 진구.
적룡기마대 내에서 불굴의 투지만으로는 첫 번째인 사내들이다.
자이혼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외날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진구는 그걸 반만 막았다.
반.
절반(折半)을 막았다는 뜻이다.
절반의 위력을 죽인 뒤, 진구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스스로 도끼에 갖다 댔다.
퍼억!!
“끄윽……!”
진구의 눈에 핏발이 선다.
절반이래도 상대는 자이혼이다.
커다란 외날 도끼에 실린 막강한 힘은 단순히 피부와 근육뿐만이 아니라 장이 파열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
“쿨럭…… 발목…… 잡았습니다, 둘째 형.”
진구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었다.
“이, 이놈……!”
자이혼이 당황하여 몽고어로 말을 했다.
“그래. 잘했다, 진구야.”
진구가 복부에 강하게 힘을 준 탓에 외날 도끼는 뽑히지 않았다.
한 손과 외날 도끼가 봉쇄된 틈.
추룡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이혼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용왕십삼기(龍王十三技) 해일(海溢)!
초절정고수인 장강수로맹 맹주의 무공.
세 번의 움직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해일이 몰려드는 것 같은 위압감을 만들어 내는 최후의 초식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추룡은 초신속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느려진다.
추룡의 황룡창은 정확하게 자이혼의 목을 베어 가고 있었다.
퇴로는 없다.
공격을 막아 낼 방법도 없다.
초신속의 세계에서 추룡의 황룡창 칼날이 목에 닿으려는 순간, 찰나간의 갈등 끝에 자이혼이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다.
푸화아악―!
“흡……?!”
허공에 비산하는 선혈은 분명 자이혼의 것이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목은 멀쩡히 붙어 있었다.
추룡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잘려서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커다란 대궁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자이혼의 왼팔이었다.
초신속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용을 써보았지만, 추룡은 아직 해일을 쓰면서 내려친 황룡창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혼이 한 팔이 잘려 나갔음에도 초신속의 세계에서 마음껏 움직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이혼은 진구의 가슴을 발로 차서 도끼를 빼내고, 마지막으로 추룡을 사납게 노려본 뒤 등을 돌려 떠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초신속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그저 잔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 식……!”
흑백으로 물들었던 세계가 팟! 하고 깨지며 다시 원래의 색깔이 돌아왔다.
추룡은 이를 으득, 갈며 앞을 노려보았다.
자이혼은 이미 지평선 끝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와서 달려간다 한들 추룡의 경신술로는 무리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다면 진구가 전력을 다해 쫓아가는 걸 테지만…….
“쿨럭…… 쿨럭……!”
“어이, 인마. 괜찮냐!”
추룡은 피를 토해 내며 후들후들 몸을 떠는 진구를 재빨리 붙잡아 주었다.
진구는 좌측 옆구리가 한 뼘이나 찢어져 있었다.
이미 검은색 무복을 입었음에도 티가 날 만큼 피를 많이 흘린 상태.
그나마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은 진구가 그동안 단련해 온 근력 덕분이었다.
파바밧!
추룡은 재빨리 점혈로 응급처치를 한 뒤 조심스럽게 진구의 한쪽 어깨를 부축해 주었다.
“제길, 놓쳤어요.”
진구의 입에서는 고통에 대한 푸념보다 상대를 놓쳤다는 것에 대한 분함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래, 놓쳤다.”
“제길…… 제길……!”
“분하냐?”
“큭…….”
“나도 분하다, 인마. 우리 둘이 힘을 합친데다 동귀어진까지 각오했는데 겨우 팔 하나라니. 그 말은 대형이나 둘째 형한테도 똑같을 거 아냐?”
“……지금, 약올리는 것…… 쿨럭! 쿨럭!”
진구가 울컥해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다시 한 번 핏물을 토했다.
“이걸 봐.”
“…….”
“이게 우리의 현재 위치야. 그리고 업적이기도 하다.”
추룡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피가 흥건히 고인 웅덩이에 어깻죽지에서부터 잘려 나간 한 팔이 떨어져 있었다.
극도로 단련되어 핏줄과 힘줄이 돋아난데다, 근육이 금강석처럼 단련된 팔이다. 어깨와 팔목에는 이국적인 가죽띠들이 십여 개나 묶여 있었다.
“크윽, 다음에는…… 안 질 거예요.”
“그래그래. 왠지 저놈이랑은 또 만날 것 같으니까 말이지.”
“그때는 저 혼자 싸울 거예요.”
“그럼 나는?”
“한물간 형님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세요.”
“이 자식이!”
퍽! 하고 얻어맞은 진구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저 환자라구요!”
“시끄러!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이런 악당!”
“시끄러!”
추룡과 진구는 그렇게 서로 부축하며 황궁 안쪽으로 돌아갔다.
삼대천, 두 번째 싸움이 그렇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 ☆
하시르가 영매라 불리게 된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다.
그는 아직 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의 혼령을 보고 위대한 하늘신의 사자라는 정령들을 보기 시작했다.
초원의 영매들은 그를 하늘신이 점지해 준, 타고난 무격이라고 말했다.
하시르는 처음엔 누구나 그런 것들을 보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혼령이나 정령과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만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위대한 영혼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때때로 그를 시험하기도 했고, 중요한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알아듣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미래를 예시해 준다.
물론 죽은 지 얼마 안 된 혼령들은 사람의 말을 제대로 해 주기도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쓸모있는 이야기를 듣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최근에 받은 천명(天命)이다.
그건 하늘이 알려 줬다기보다는, 여러 가지의 복선과 단서들이 만나 스스로가 깨우치도록 도와줬다는 쪽이 맞다.
하시르는 세상에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느꼈다.
정확해진 것은…… 붉은 악귀의 보금자리를 부쉈을 때.
붉은 악귀의 연인을 베는 순간, 하시르는 하늘의 큰 뜻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건 금단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열기 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지만, 막상 열어 보면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허망한 미래뿐이다.
붉은 악귀가 그에 대한 복수보다 여인을 구하는 것에 우선하는 순간,
그 순간에 하시르는 위대한 영혼이 일평생 동안 그에게 말하려 했던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텐챠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을 거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북천(北天)의 영광(榮光)은 없다.
예로부터 흘러간 역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대를 제패한 패자가 훗날 다시 재기한 역사도 없다.
그동안 대륙에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지만, 한 번 패망한 뒤에 두 번이나 그 영광을 재현했던 나라가 있던가?
없다.
전혀, 절대로 없다.
그 대단했던 진시황이나 한고조가 되살아난다 해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은 단 한 번, 하나의 영광만을 준다.
원 제국? 북쪽의 대초원?
그곳의 영광은 이미 하얗게 되어 꺼져 가는 모닥불과 같다.
이미 끝났다.
더 이상은 아무리 바람을 불어넣어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이제는 하시르도 텐챠이가 어째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지 잘 깨닫고 있다.
북천맹은 여기까지다.
애초에 그들에게 있어 이 이상의 결과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경을 빼앗고 세상을 뒤흔들었던 것조차, 사실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하늘은…….
아니, 위대한 영혼은 어째서 텐챠이와 삼대천, 그리고 칼간의 피해자들을 남경으로 끌고 와서 이러한 일을 벌이도록 했는가?
하시르는 그에 대한 답을 갈구했고…… 마침내 깨달았다.
역사에 남기 위해.
비록 원 제국과 초원의 시대는 갔지만, 앞으로도 역사는 쭉 이어질 것이다.
백 년, 이백 년…… 아니,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초원에선 목동이 양을 칠 것이고, 바람의 후예인 대초원의 전사들은 말을 타고 넓은 초원을 내달릴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역사에 남겨야 한다.
원 제국이라는 위대한 영광이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반한(反漢)의 기치를 세운 자들이 있었음을.
타앙!
아마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
하시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했다.
황실의 수호신 백택의 공격은 모두 돌파했다.
엄청난 위력을 보이던 나선형의 물의 술법도 그의 특수한 능력으로 모두 피하거나 흘려 냈고, 앞을 집요하게 가로막던 물덩어리들도 칼날과 칼날을 부딪쳐 진공시키는 방법으로 모조리 깨 버렸다.
그는 백택을 이겼다.
물론 백택이 함정 때문에 지쳐 있던데다 상성이 좋지 않았지만, 그러한 핑계는 온갖 것들이 뒤섞이는 전장에서 소용없는 일이다.
백택의 분노하는 얼굴.
더 이상 쓸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시인하는 얼굴도 똑똑히 확인했다.
하시르는 그 뒤에 황제에게 확실히 칼을 내려쳤다.
물론, 빗나간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칼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만, 막혔을 뿐이다.
터엉!
“흡……!”
황제의 오른발이 하시르의 손목을 올려 차고 있었다.
공격이 막혔다.
하시르가 그 사실을 머릿속에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황제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동작으로 허리를 반바퀴 회전시키더니, 손목을 올려 찬 발을 아래로 내려 쾅! 하고 하시르가 내밀고 있던 왼발을 밟아 버렸다.
우드득!
“크윽……!!”
경악과 충격이 등골을 타고 내달린다.
황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밟았을 뿐인데.
하시르는 자신의 왼발이 완전히 박살 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은 없었다.
뒤로 빠져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하시르는 왼발이 밟혀 있었기에 도망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공격을 선택했다.
하체가 묶여 있었기에 상체만을 사용하는 공격이다.
좌우의 쌍도를 십자로 교차하며 물레방아처럼 회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