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화
서장 소호(小虎)
올해로 십이 세.
은자촌(隱者村)에 사는 소년 소호는 지루했다.
산골 농촌이 십이 세 소년에게 지루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소호가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렸을 적부터 타고난 강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소호는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마을 주변 백 리를 샅샅이 뒤져 보며 살았다.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삼산(三山)에서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까지도 올라가 봤고, 마을에서 제일 힘세고 사나운 황소의 등에 올라탄 채 하루 종일 노래를 불러 보기도 했으며, 한 달에 한 번 마을 사람들이 사냥 나갈 때 따라가서 어른들도 낑낑대며 못 잡던 토끼도 잡아 보았다.
그런데 소호는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처럼 항상 부족했다.
아니 뭔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허무해졌다.
이럴 때 친한 형이라도 한 명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마을에 있었던 몇 명의 젊은 형들은 스무 살이 될 무렵 꿈을 찾겠다며 번화가로 우르르 떠나 버렸다. 해서 이젠 물어볼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아버지 심심할 때 뭐해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다. 어릴 적부터 소호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왠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또 마을을 지루해한다는 걸 알게 되면 크게 슬퍼하실 테니 더더욱 말하기 어렵다.
소호가 첫 번째로 엄마에게 지루하다고 말했을 때는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그 말이 나온 뒤, 소호의 엄마와 아버지는 싸우고야 말았다. 당신 때문에 아들이 괴롭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맹모삼천지교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뒤로 소호는 아버지께 열흘간이나 눈총을 받아야 했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아버지에게 눈총까지 받았으니 어린 소호에게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슬프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호는 아버지가 자신을 또 그런 눈빛으로 노려본다면 심장이 멎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그런 표정을 다시 보게 돼서는 안 된다.
한편 작은엄마나 젊은 삼촌들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작은 엄마는 차분하고 상냥하고 소호의 이야기도 잘 들어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새로 생긴 꼬마 동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삼촌들은 맨날 혼내고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만 한다. 이래저래 소호의 마음을 상담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셈이다.
“후우…….”
소호는 시끌벅적하고 재밌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삼산 안쪽에 있는 개구리를 닮은 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개구리 바위 위에 올라가 있으면 햇볕도 적당하고 바람도 살살 불어서 잠이 솔솔 쏟아진다.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는 주해나 미미가 모르는 비밀 장소라는 것도 좋다.
휴식이다.
이렇게 자고, 또 자다 보면 어느 순간 뭐든지 알면서도 세상이 지루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아아! 심심해!”
심해―해―해―해―.
멀리 퍼져 나간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소호는 개구리 바위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입을 삐쭉거렸다.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니, 등골이 짜르르 울리면서 온몸이 노곤해졌다.
“아으으, 뭔가 재밌는 일 없을까?”
이럴 땐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이는 푸른 하늘이 얼마나 얄미운지 모른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따스한 햇살에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 소호는 기이한 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거렸다.
“어?”
새들이 놀라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
씩씩거리는 거친 숨결도 들렸다.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호는 귀가 아주 좋다. 분명히 숲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헤에?”
날다람쥐처럼 몸을 튕겨 일어나서 쪼그려 앉은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본다.
소호의 두 눈에 호기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산속 은자촌(隱者村)에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제1장. 기옥(祁鈺)(1)
쿠웡!
“……이, 이노옴! 아무리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한들 미물 따위에게 당할 줄 아느냐!”
쿠워어엉!
“허억!”
소호는 근처의 수풀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보았다.
곰의 대화에서 ‘쿠워어엉’은 위협, ‘쿠웡'은 대화다.
그렇다면 ‘허억!’은 무슨 뜻일까.
소호는 신음을 흘리며 굳어 버린 저 사내가 갑자기 곰을 만나는 바람에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항하겠답시고 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는데 그건 무척 잘못된 행동이었다.
맹수는 자극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위험한 행동을 한다.
겁을 집어먹어서 손을 덜덜 떠는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맹수가 흥분하면 더더욱 위험해지는 걸 모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저 아저씨 많이 다쳤네…….’
자세히 보니 등허리 쪽은 피로 물들어서 옷이 새카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이도 있고. 저 아이는 몇 살일까? 여덟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겁에 질린 듯 사내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아, 필사적인 거구나.’
어떤 동물이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지는 법.
“이노옴! 가까이 오지 말거라!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쉭, 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검광이 번뜩였지만 커다란 흑곰은 가볍게 앞발을 휘둘러 날아오는 칼날을 쳐 내 버렸다.
따앙!
“헉!”
흑곰의 앞발은 칼을 쳐 내고 곧바로 사내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사내는 찢어진 손바닥을 왼손으로 감싸며 황급히 몸을 굴렸다.
스쳐 지나간 앞발이 옆에 있던 두꺼운 소나무를 ‘콰직’ 하며 부러뜨리고 있었다.
“으아아아! 어떻게든 해 봐!”
뒤에 있던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멀찍이 도망쳤다.
으르렁거리는 거대한 흑곰.
바람처럼 달려든 곰이 사내를 밀치고 바닥에 짓눌렀다.
“으어어어!”
사내는 비명을 지르면서 곰의 목덜미와 옆구리에 주먹질을 해 댔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화만 돋웠는지 곰이 다시 한번 포효했다.
쿠워어어어!
입을 쩍 벌리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손가락만큼 긴 송곳니가 머리를 파고들면 두개골이 와삭, 하고는 부서지리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내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안 돼!”
소호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날렵하게 수풀 밖으로 빠져나간 소호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먹을 거 아니야!”
쿠워엉!
소호는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론 드러누운 사내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먹, 을, 거 아니야!”
쿠웡!
“깜돌이. 안 돼! 먹는 거 아냐! 지지!”
쿠워엉!
흑곰.
아니, 깜돌이는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계속 아쉬운 듯 아래쪽을 힐끔거렸다.
소호는 마침내 화난 얼굴로 품 안에서 황동(黃銅)으로 만든 방울을 꺼내 들었다.
“말 안 듣네! 삼촌들한테 이른다!”
쿠웡! 쿠워엉!
“이거 흔든다! 진짜 흔들 거야!”
방울을 흔들려고 하자 깜돌이는 혼비백산하며 뒤로 돌아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나무가 흔들리며 새들이 놀라서 하늘로 날아오른다.
숲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깜돌이는 이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히힛. 까불고 있어!”
소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얼이 빠진 듯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괜찮아요?”
“큭…… 저기…….”
동그란 눈에 각진 턱.
듬직한 덩치를 가진 사십 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맙다.”
“히힛, 뭘요.”
사내는 ‘보통 곰이 아니었다’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옆에서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던 꼬마 아이에게 황급히 물었다.
“다친 곳은……?”
꼬마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내는 그걸로 만족 못한 듯 이리저리 꼬마 아이의 몸을 살펴보더니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 크윽!”
“아저씨! 피가 많이 나는데!”
“넘어지면서 상처가, 큭. 그나저나 혹시 주변에 마을이 있는 거냐?”
“네, 있어요.”
소호는 바닥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사내의 허리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치료 빨리 안 하면 위험할 거예요.”
“……괜찮다.”
사내는 숨쉬기가 불편한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 이름은 배진화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관리지. 날 그곳으로 후우, 데려다주련?”
“네, 알겠어요.”
소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치고 곤란한 사람은 도와야 하는 거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는 거라고 넷째 삼촌이 항상 말했었다.
“걸을 수 있으세요?”
“괜찮다.”
소호는 그 후로도 배진화가 백 걸음을 걸을 때마다 물었고, 그의 대답은 항상 ‘괜찮다’였지만 안색은 눈에 띄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꼬마 아이는 뒤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마을로 가면 삼촌들이 도와줄 거예요. 삼촌들은 상처도 잘 치료해요. 의원 같아요.”
“그……래……?”
“네. 그러니까 힘내세요. 정신 잃으면 안 돼요. 삼촌들이 피를 많이 흘렸을 때 잠들면 죽는다고 했어요.”
“…….”
소호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배진화는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다가 종래엔 대답할 기력도 없는 듯 겨우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삼각형으로 깎인 커다란 바위 두 개.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은자촌의 입구이자 소호의 집이 나온다.
숨을 헐떡이던 배진화는 소호의 집에 걸린 현판을 보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풍운……객잔?”
그는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뇌어 보더니 깜짝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 풍운객잔……이라고?”
배진화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정말 존재했었다니…… 제대로 찾아온 건가……!”
“아저씨. 괜찮아요?”
“물론이지! 난 멀쩡…… 쿨럭! 쿨럭!”
“기, 기침이 무지 심한데?”
“난 괜찮…… 쿨럭! 쿨럭! 쿠어어!”
배진화는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미친 듯이 기침을 해 대더니 결국 경련을 하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기침이 멎었다.
“으악! 아저씨!”
소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배진화의 볼을 쿡쿡 찔러 보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사람이 죽었다아!”
“……인마, 아직 안 죽었다.”
“으아아! 시체가 말을 한다아!”
“안 죽었다니까.”
힘겹게 눈을 뜬 배진화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사람을…… 불러다오”
“사람?”
“네 집이 풍운객잔이라고 했지……? 중요한 일이다. 풍운객잔의 주인…… 죽……기 전에 꼭 말해 둬야 해.”
소호는 당황했다.
절박한 사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소호는 아버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게…… 저기, 문제가 있어요.”
“문제라니……?”
“어어, 아버지는 지금 여기에 없어서…….”
“뭣!”
배진화는 회광반조라도 되는 양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네가 풍운객잔의…… 아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