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화 (131/686)

1권 2화

제1장. 기옥(祁鈺)(2)

“네가 아들이었냐……!”

“네?”

“만나야 해. 그분은 어디 계시냐. 어떻게 하면 맨날 수 있지!”

“으악, 귀 아파! 소리 지르지 말고 진정해요, 아저씨.”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겨…… 쿠어억!”

배진화는 또다시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에에잇! 아저씨 죽을 생각 말고 버텨요! 직접 말하면 되잖아요.”

“큭……!”

소호는 숨을 헐떡이는 배진화를 등지고 일어나 배가 빵빵해지도록 숨을 들이켰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한껏 목청을 키웠다.

“삼초오온! 큰일 났어! 나와 봐아아아!”

“흐억!”

배진화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뒤에 있던 꼬마 아이는 귀를 막고 놀라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마침내 풍운객잔의 두꺼운 대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뛰쳐나왔다.

“으하핫! 소호 왔냐!”

“진구 삼촌!”

“소호! 너 인마! 내가 감자 깎고 나가랬지!”

“음, 그게…… 운찬 삼촌.”

나이는 삼십 대 초, 중반.

소호 아버지의 의형제들인데 아버지와는 성격이 전혀 딴판인 활기찬 사람들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표범처럼 날렵한 몸을 지닌 사람이 진구 삼촌.

하얀 얼굴에 순박한 눈망울을 지닌 삼촌이 강운찬 삼촌이었다.

“하하핫! 강 형, 이것 봐. 내가 소호는 오늘도 감자 안 깎고 사고 칠 거라고 했잖아.”

“으윽!”

“내놔. 은자 한 냥.”

“으으윽!”

운찬은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은자를 꺼내 진구에게 건넸다.

은자를 건네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어? 뭐야! 날 두고 내기를 한 거야?”

올해 십이 세.

소호는 인생 최고로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으하핫! 그래, 내가 이겼다! 한 달에 한 번 하던 내기도 이걸로 십구 승 십칠 패!”

진구는 빙그레 웃으며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처음이 아니란 말이지!”

소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섭섭하단 듯이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내기를 서른여섯 번이나 했다면, 오늘이 삼 주년 기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걸 나 몰래 하고 있었다니!”

“이게 우리 삶의 조촐한 낙이야, 인마.”

진구는 애써 소호를 위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해! 날 안 믿었던 거잖아!”

어차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심부름을 시키다니. 억울함과 배신감이 소용돌이친다.

삐뚤어진 마음을 가득 담아 노려보니, 진구가 가까이 다가와 진지한 눈빛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소호야.”

“왜!”

“그런 게 아냐. 난 너를 믿었다. 소호야.”

“어? 그럼 운찬 삼촌이 안 믿은……?”

“아니. 난 네가 심부름을 절대로 안 할 거라고 믿었지.”

운찬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빴어!”

소호는 차마 그 신뢰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더 슬펐다.

“으하핫! 우리 조카가 어떤 아이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운찬이 다시 한번 소호를 골려 주었다.

“으윽!”

소호는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운찬의 시선을 피했다.

신뢰를 잃는다는 건 이런 것이리라. 뼈아픈 경험이었다. 이런 게 더덕 할아버지가 항상 말하던 사회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뢰를 잃었다면 실리라도 챙기자.

“그럼 반은 내 거!”

“뭣?”

“내 덕에 번 돈이잖아! 절반 내놔!”

“인마, 너한테 돈을 주면 신성한 내기가 더러운 뒷거래로 변하는 거야. 내부 결탁이란 건 범죄라고.”

진구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홉 살 때부터 뒤에서 내기한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이, 이 녀석이.”

“안 주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순간, 진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야, 인마. 고추 달린 사내가 계집애처럼 이르고 그러는 거 아냐.”

“몰라. 난 어린애야.”

“뭣이! 인마, 치사하게!”

“치사해? 좋아. 그럼 옆 동네 미애 누나한테 이른다!”

“여기 은자 반 냥이다.”

‘미애 누나’ 소리가 나오자마자 진구는 어느새 은자를 반으로 뚝 부러뜨려 소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소호는 웃었다.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다.

“히히. 어차피 줄 거면서.”

“이런 요악한 녀석.”

“으앗! 하지 마아.”

진구는 피식 웃더니 양손으로 소호의 머리를 마구 비벼서 헝클어뜨렸다.

“저, 저기…….”

그때, 잠시 잊고 있었던 부상자가 소호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아 맞다! 삼촌. 이 아저씨 좀 봐 줘. 곧 죽을 것 같아!”

“아직 안 죽…… 쿠어억!”

괜히 강한 척하려던 배진화가 다시 기침을 토했다.

“이미 보고 있었다. 인마.”

진구는 배진화를 똑바로 눕히고는 천천히 지시를 내렸다.

“등이랑 어깨 자상(刺傷). 꽤 심하네. 내장까진 안 다친 것 같은데……. 이보쇼. 내 말 들리오? 정신을 집중해 봐요. 손에 힘이 들어갑니까? 눈꺼풀이랑 안면 근육은 움직이는 것 같고…… 발은 어떻소? 감각이 있습니까?”

소호는 역시 진구 삼촌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다가도 진지할 땐 굉장히 진지한 사람이다. 배진화를 똑바로 눕히고 이곳저곳 살펴보는 모습이 매우 능숙해 보였다.

“손은 움직이는데…… 발은 잘…….”

“어디까지 느껴져요? 계속 손으로 누를 테니까 감각이 안 느껴지면 말하세요.”

진구는 가슴 정중앙부터 꾹꾹 누르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느껴집니다…….”

“다행히 괜찮네.”

“난 괜찮……소. 일단 풍운객잔의 주인을…… 만나서 꼭 할 말이…….”

“흐음.”

소호는 그 순간 삼촌들의 눈빛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좀 잡시다.”

“자다니. 안 될 말……!”

진구가 이마 정중앙과 명치를 같이 꾹 누르자 배진화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다.

“우와! 삼촌,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내일 몫까지 감자 다 깎으면 알려 줄게.”

“으으…….”

“인마.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감자를 싫어하냐.”

“싫은 건, 그냥 싫은 거야.”

소호는 입을 삐쭉였다.

그냥 싫은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하핫, 그렇긴 하지. 싫은 건 싫은 거야.”

진구 삼촌은 배진화를 등에 업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치료를 할 모양이었다.

“소호, 너.”

“아얏.”

소호는 멍한 틈에 다가온 운찬에게 꿀밤을 얻어맞고 이마를 문질렀다.

“이 말썽쟁이야. 자꾸 위험하게 밖에 쏘다니지 말랬지! 그리고 감자 깎는 건 큰형님이 시킨 거란 말이다. 꼭 해야 해! 자꾸 삼촌 걱정시키고 그럴 거야?”

“씽. 알았어. 안 그럴게.”

“난 널 믿었는데!”

“으으, 누가 내기하래? 아얏!”

이번 꿀밤은 정말로 아파서, 소호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내기가 문제가 아냐. 이 녀석아, 사람이 자신의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안 하기 시작하면 금세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이 된다. 삼촌은 네가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싫어. 넌 내 귀한 조카니까.”

운찬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소호는 마음이 안 좋아졌다.

“알았어.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좋아. 믿는다, 조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손길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것도 좋긴 하지만 평소와 다른 건 어색하다.

소호는 들고 있던 은자 반 냥을 건네주었다.

“히힛, 삼촌. 이거.”

“응? 어엇?”

“내 탓이었으니까. 이건 선물.”

“……!”

“십구 승 십칠 패라니. 날 그렇게나 몰라서 쓰겠어? 다음번엔 이기라고!”

“이 녀석이……!”

운찬은 은자 반 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결국 헛기침을 하면서 품 안에 넣었다.

“말 안 해도 다음번엔 이길 거야. 이 녀석아!”

소호는 다시 날아오는 꿀밤을 피하고는, 뒤에서 우물쭈물하며 서 있던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삼촌! 배진화 아저씨 잘 부탁해. 난 얘랑 놀다 올게!”

“또 어딜 가. 이 사고뭉치야!”

“사고 안 쳐!”

“안 치긴! 심태연(心太軟) 만들어 놓을 테니. 일찍 들어와!”

소호는 씨를 뺀 달콤한 대추 속에, 쫄깃쫄깃한 찹쌀 경단이 들어간 심태연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심태연은 소호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다.

그걸 만들어 준다는 걸 보니 은자 반 냥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 듯했다.

“히힛! 역시 운찬 삼촌이 최고야!”

“그걸 이제 알았냐!”

운찬은 점점 멀어지는 소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

소호가 데리고 나온 꼬마 아이는 신기한 녀석이었다.

처음에 손을 잡고 뛸 때부터 왠지 뛰는 모습이 어설프더라니, 멀리 가기도 전에 숨을 너무 헐떡거려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얼굴도 손발도 통통하고 하얗다. 그리고 소호가 아는 어떤 아이보다도 체력이 약했다.

“힘들어 보이네? 으음, 몸이 안 좋은 건가? 혹시 어디 아파?”

“…….”

“히힛, 생전 처음 뛰어 보는 사람 같다.”

소호는 단지 걱정돼서 물어본 건데. 꼬마는 손을 홱 하고 뿌리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호를 노려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화난 고양이 같은 얼굴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 까칠하구나?”

“흥!”

“뭐, 좋아. 손잡는 게 싫으면 안 잡을게. 근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아, 혹시 말을 못 해?”

“하!”

꼬마는 뭔가 기가 찬 모양이었다.

불만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대더니,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턱을 치켜들고 코끝을 하늘을 향하고 있다. 눈은 여전히 소호와 마주친 채다.

“…….”

왜 저러는 것일까?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콧구멍을 보여 줘야 하는 가문의 전통이라도 있는 걸까?

“이익!”

잠깐 그러고 있더니, 갑자기 꼬마가 뒷목을 잡으며 성질을 부렸다.

“목이 아프다!”

“말할 줄 아네! ……아니, 근데 왜 성질을 내?”

“칫!”

혀를 차는 소리가 은근히 성질을 긁었다.

꼬마는 옆에 있는 널찍한 바위 위로 뒤뚱거리며 올라가서 다시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세웠다.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진 자세였다.

소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꼬마는 상대를 내려다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보면 재밌어?”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소호는 직접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읏쌰!”

“……!”

꼬마가 서 있던 바위 위로 소호도 똑같이 올라갔다.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소호는 올해로 열두 살.

꼬마는 기껏해야 여덟 살쯤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는 나이 차가 있으니 소호가 한 뼘 이상은 더 컸다. 소호도 꼬마처럼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세운 채 내려다보았다.

뭐가 다를까 궁금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아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딱 하나, 꼬마의 얼굴이 좀 더 화난 얼굴로 바뀌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빡!

“으갹!”

그 순간 소호의 정강이에서 빡, 하고, 소리가 나면서 엄청나게 아팠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감히 누굴 내려다보는 것이냐! 이 무지하고, 무도한 녀석 같으니!”

“으음, 너 말투가 이상해.”

소호는 어른 흉내를 내는 듯한 꼬마의 말투가 영 이상했다.

“이상한 건 너다! 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꼬마가 방방 뛰면서 성질을 부렸다.

쪼끄만 게 성격은 어찌나 난폭한지. 꼬마는 연신 손가락질을 해 대며 소호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 순간 소호는 정강이를 한 번 더 걷어 차였다. 또다시 빡,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소호는 눈물이 핑 도는 것과 동시에 울컥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이게!”

소호는 삼촌들에게 배운 정의의 꿀밤을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꼬마에게 먹여 주었다.

“감히 나, 나를 때렸어……?”

꼬마는 이마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불타는 장작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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