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화 (133/686)

1권 4화

제1장. 기옥(祁鈺)(4)

바느질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잡담하듯이 말을 툭툭 내뱉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롭다.

그가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의 작은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이제 겨우 삼십 대 중반이나 됨직한 이 젊은 사내의 수준이라기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그러고 보면 다친 상처를 꿰매는 것은 급박한 전장에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을 때만 쓰는 의술(醫術)의 사도(邪道)고.

황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한 식견도 예사롭지 않다.

이런 자가 존재하다니.

풍운객잔.

무서운 곳이다.

‘믿어도 되는 것일까?’

배진화는 초조해졌다.

만약 적이라면?

혹시 이 사내가 나쁜 의도를 갖는다면 막을 수 있을까?

자연스레 오른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묵묵히 바느질을 마무리하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헛! 배에 힘 빼라니까. 바늘이 안 들어간다지 않소.”

“…….”

“거참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소심해서야, 원.”

계속 긴장을 풀지 않으니 사내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먼 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공 부장은 잘 있습니까?”

“공 부장……?”

“아. 이제는 부장이 아닐 수도 있겠군. 십 년 전에 금의위의 부장이었던 사람인데 이름이…… 공보하였던가?”

광록훈황실금의위(光祿勳皇室錦衣衛) 제삼위장(第三衛將) 공보하.

그 이름을 듣자 손에서 힘이 탁, 하고 풀렸다.

그래. 다쳐서 쓰러졌다가 일어난 탓일 거다.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치료를 마무리하며, 오해를 풀라는 듯 금의위의 아는 이름을 꺼내지 않는가. 그런 사람이 적일 리가 없었다.

심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의심할 상대가 아니었는데, 심신이 약해진 바람에 헛된 의심을 품고 말았다.

“그분은 이제 공보하 위장(衛將)이 되셨소.”

배진화는 모든 의심을 풀고 자신이 금의위라는 것을 인정했다. 배에서도 자연스레 힘이 빠졌다.

“영락제 폐하 때부터 황위를 보필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금의위 역사상 최연소 위장이 되셨소. 지금은 황실 금의위를 움직일 수 있는 최고 실권자 중 한 사람이오.”

“최연소 실권자! 하핫, 그 형님 뭐가 되도 되겠다 싶더니. 결국은 해냈구만!”

“형님? 친한 사이였소?”

“친하다고 하긴 그렇고. 그냥 큰일을 같이 하면서 안면이 좀 있소. 서로 비슷한 면이 있어서 말이 잘 통했소.”

“비슷한 면이라니. 그분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오.”

“사람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면이 있지. 그건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끼리만 알 수 있는 법이오.”

배진화는 오금이 저릴 만큼 차가운 성격의 공보하 위장과 눈앞에 이 활발해 보이는 사내가 어떻게 비슷하다는 건지 이해가 좀처럼 가질 않았다.

“자, 다 됐소. 열흘간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열흘 이후에는 실밥을 풀어야 하오. 몸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 잊지 마시오.”

사내는 능숙한 솜씨로 상체 전반에 흰 천을 둘러 주었는데,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상처 부위를 꽉 조이자 확실히 몸이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양팔을 들어 올려도 상처가 당겨지는 느낌이 없었다. 대단한 솜씨였다.

“자, 이제 말씀해 보시오.”

“……?”

“형씨는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테지?”

드디어 중요한 순간이었다.

배진화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현재 도주 중이오. 정식으로 쫓기는 몸은 아니지만, 당장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숨어 있어야 하오.”

“그렇군.”

“실은 위험해지면 이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공 위장님이었소.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그분의 조언을 믿고 나는 이곳으로 온 것이오.”

“위험하다는 건 형씨요? 아니면 함께 온 그 아이요?”

“둘 다……일 것이오.”

“흐음, 그렇군.”

배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직 회복이 되진 않았는지 몸이 휘청거려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소호라는 아이가 삼촌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소. 부디, 나에게 풍운객잔의 주인을 만나 뵙게 해 주시오.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오.”

“알겠소.”

의외로 대답은 쉽게 나왔다. 배진화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이오?”

“사실 큰형님껜 이미 연락해 뒀으니 지금쯤 성산에서 오셨을 거요.”

“고,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다만 부탁을 들어주실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소. 우리 큰형님은 남의 일에 휩쓸리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배진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풍운객잔을 추천했던 공보하도 부탁이 통할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배진화의 몫이라고 말했었다.

“그건 아마 내 몫일 것이오.”

이쪽으로서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뭐, 그렇긴 하지만.”

사내는 안타까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그렇게까지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으음, 한 가지 더 말해 줄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이오?”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요.”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말이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닌 배진화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겠소.”

***

처음 객잔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풍운객잔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오래된 목재를 사용해 만들어졌고, 장식이라고는 벽지 대신 굵은 대죽(大竹)을 반으로 쪼개 이어붙인 게 전부인 곳이다.

방 안의 탁자.

침상.

복도의 장식장과 그림 몇 점.

그런데 묘하게 허름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라서 잠시 머물다 가기엔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구경할 틈도 없이 배진화는 객잔의 뒤편으로 안내받았다.

널찍한 공간에는 둥그런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주변은 매끈매끈한 돌멩이들이 박힌 석로(石路)가 나 있었고 바닥은 촉촉하게 젖어 있어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백여 개의 감자가 우물 옆에 쌓여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미 한 번 물에 헹군 듯한 감자를 잔뜩 쌓아 두고, 그 옆에서 한 남자가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겉보기엔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적당한 체구에 사내다우면서 준수한 얼굴.

가만히 두면 등허리까지 올 것처럼 긴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묶었고, 전국 어디에서나 팔 것 같은 거친 재질의 흰색 백창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귀가 없다는 게 조금 특이하달까.

나이는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마 수염이 없었다면 이십 대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각. 사각. 사각.

칼질로 세 번쯤일까.

사내가 나무칼을 세 번 움직일 때마다 감자 하나가 깨끗이 껍질이 벗겨져 대야에 담긴 물속으로 퐁당 던져진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감자를 깎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신기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잠시 바라보는 사이에도 수십 개의 감자가 껍질이 깎인 채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아앗! 형님!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또 그러십니다! 제가 할 테니 그냥 두세요!”

적어도 삼십 대로 보이는 진구가 형님이라 부르는 걸 보고 배진화는 흠칫 놀랐다.

‘형님이라면 이 사내가 혹시……?’

진구는 그 사내가 감자 따위를 깎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듯, 황송한 모습으로 두 손을 휘저었다.

“너는 매번 그러는구나. 처음 객잔을 샀을 때부터 난 이렇게 종종 야채를 다듬곤 하였다.”

“그래도 이젠 동생들이 있잖습니까. 형님 저희가 해야지요.”

“녀석.”

배진화는 그가 나직하게 웃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허드렛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냥 두세요. 형님.”

“뭐 어떠냐, 난 이게 재밌다. 옛날 생각도 나고 좋군.”

“끄응. 제가 불편하니 그렇지요.”

“불편해하지 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보다 소호는 또 도망간 모양이지?”

“으음 그게…….”

“…….”

“하핫, 원래 뛰노는 거 좋아할 나이잖습니까? 밖에 나가고 싶어 하기에 내보내 줬습니다.”

“항상 소호를 감싸는구나.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다.”

“소호는 착한 아이예요. 자유분방한 듯 보여도 자기만의 규칙이 있지요. 장담컨대 천방지축으로 자라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도 소호를 혼낼 땐 따끔하게 혼내라.”

“예. 형님.”

대화가 끝났다.

사내의 시선은 어느새 배진화를 향하고 있었다.

“자네가 황실에서 왔다는 사람인가?”

“예? 아, 예! 그렇습니다만…….”

배진화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정면으로 사내를 마주 보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그저 평범하기만 한, 티 없이 맑을 뿐인 그의 눈빛이 보였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용좌(龍座)까진 아니라도 비단금침에 파묻혀 지내는 대귀족(大貴族)이거나,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시무시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방의 현령쯤만 돼도 땅에 발 한번 안 대고 살아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데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소박한 아니, 어찌 보면 빈곤해보이기까지 한 백창의를 입고 통나무에 걸터앉아 나무칼로 묵묵히 감자를 깎고 있지 않은가.

“혹시 이분이……?”

진구에게 다시 한번 물었으나 그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상하다. 공 장군께서는 워낙 인상이 강렬한 사람이라 만나면 그 즉시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될 거라고 했었는데…….’

어찌됐건 상대는 그가 찾고 있던 풍운객잔의 주인.

배진화가 정중하게 양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려던 찰나였다.

“타고난 충성심과 우직함. 경망되지 않고 신중하게 사리를 판별하니 호위대의 무장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황실에서 배운 처세가 타고난 인품도 가려 버리는군.”

포권을 취하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

겉으로는 분명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황실에서 익힌 겉치레가 단박에 박살 났다.

“사람은 절박하면 본래 당장 필요한 것밖에 눈에 안 보이는 법. 지금 자네는 무엇을 보고 있나?”

배진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영락제께서는 부탁도 당당하게 하는 분이셨다. 상대의 호의는 얼마든지 그 이상의 호의로 갚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오히려 상대가 자신의 보은(報恩)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항상 시험하셨지. 자네도 진정 주군을 위한다면 믿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배진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빈곤한 옷차림? 평범해 보이는 얼굴?

다 잘못 봤다.

애초에 상대는 감히 그가 측량할 수 없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뭔지는 알겠지만, 신뢰란 것은 내가 말한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닐 테지. 은자촌을 둘러보고 내일 다시 오게.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지.”

‘신뢰. 내일.’

배진화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방금 들은 상대의 말들만 계속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말 한마디 못해 보고 쫓겨나는 셈이다.

배진화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멍하니 우물가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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