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화 (134/686)

1권 5화

제1장. 기옥(祁鈺)(5)

“어떻소? 우리 형님 대단하지 않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걷고 있던 배진화의 곁으로 진구가 다가왔다.

“뭐랄까. 그릇이 달라.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대단해지는 것 같소.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큰형님께선 사실 옛날에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거든. 그냥 한번 슥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오금이 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니까? 같은 편일 때는 모두를 승리로 이끄는 전신(戰神). 적일 때는 모두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악귀(惡鬼). 원래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은 매력이 없지 않소? 그런 면에서 우리 큰형님은 적과 아군이 분명해서 동료들이 다들 좋아했지.”

“전신이자 악귀…….”

“그랬던 사람이 객잔을 하나 운영하더니 점점 변하더라고. 살기가 없어지고, 또 웃는 모습도 종종 보게 되고. 알콩달콩 연애를 하더니 가족도 생기고.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 되려나 싶었더니…… 웬걸? 어느 순간 거인이 되어 있는 거요. 장담컨대 이제는 그 무시무시했던 영락제 폐하랑 이야기를 나눠도 우리 형님이 꿀리지 않을 거요. 나로서는 감히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셨지.”

진구는 따라가려야 따라갈 수 없는, 너무 멀리 가 버린 큰형님을 생각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한편 배진화는 멍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강렬한 구토감을 느꼈다. 길가의 수풀로 달려가 한 번 게워 내고 나니 그나마 속이 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소?”

“우욱, 괘, 괜찮소.”

“많이 놀라셨구만.”

“내가 원래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아닌데……. 우욱.”

진구는 어느새 배진화의 곁으로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런 건 두 번째요. 황실 금의위에 입대해 처음으로 황제폐하를 영접했을 때 딱 한번 이렇게 속이 울렁거렸는데……. 이걸 또 경험하게 될 줄이야.”

“하하, 거 보쇼. 내 말이 맞지 않소? 우리 큰형님은 대단한 분이라니까.”

배진화는 마른기침을 몇 번 더 토해 낸 뒤 따가운 코를 풀었다. 구토 후의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자, 이걸 마셔 보시오.”

“고맙소.”

배진화는 대나무 수통에 든 물을 무심코 마시다가 깜짝 놀라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달달하면서 청량한 꿀물 위로 삼각형으로 접은 대나무 잎사귀가 위에 떠 있었다.

놀라서 쳐다보니 진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맛있지 않소?”

“맛있소. 속이 훨씬 나아졌소.”

“이 땅은 모든 것이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곳이오. 땅속에 흐르는 물, 길가의 대나무조차 그 생생한 생기를 간직하고 있지. 저 멀리 좌측의 산이 보이시오?”

배진화는 진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안개 사이로 비교적 둥그렇고 검은 빛이 도는 언덕 봉우리가 보였다.

“좌측의 흑산(黑山)을 시작으로, 우측의 백산(白山). 가운데의 령산(靈山). 삼산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오백년이 넘은 자작나무 신수(神樹)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소. 이곳은 그 자체로 신령한 곳이며, 그중에 우리가 터전으로 삼은 곳은 은자촌(隱者村)이라 부르고 있소.”

“아아…….”

배진화는 그런 어벙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듣고 보니 너무나 대단한 느낌이라 함부로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어?”

그때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놀라서 돌아보자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거대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괴물 같은 황소를 끌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만수 어르신! 산책 가십니까?”

“그래 이놈아. 당연한 걸 왜 물어!”

걸걸한 목소리의 노인은 깐깐한 눈빛으로 배진화를 훑어보았다.

“이놈은 뭐냐. 못 보던 놈인데?”

“오늘 도착한 손님입니다.”

“아! 이놈이 그놈이구나. 깜돌이가 자기한테 칼을 들이밀었다고 화나 있던데.”

“하핫. 소호가 잘 뜯어 말렸습니다.”

“쯧쯧. 인간 주제에 주제를 알아야지.”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거대한 황소는 노인의 옆에서 당당하게 걸어갔다.

“살펴 가십시오.”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진구에게 배진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건 대체 아니, 저것도 소라고 할 수 있소?”

“적왕이 좀 크긴 하지만 분명 소요. 대충 전설에 나오는 적토마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혈통부터 특별한 놈이지.”

“허.”

웬만한 마차만큼 커다란 소는 처음 본 배진화였다. 그놈이 숨을 거칠게 쉴 때마다 그는 도망을 쳐야 하나 움찔거렸을 정도였다.

“은자촌엔 저런 분이 총 열 분 정도 계시지. 이제부터 대충 소개해 주겠소.”

“아, 알겠소.”

배진화는 설렘과 긴장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전래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다음 날 배진화는 해가 뜨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모시는 분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곤히 잠들어서 코까지 골고 있었다.

이렇게나 깊이 잠이 든 모습은 황실에서도 보지 못했기에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이제 겨우 여덟 살.

본래대로라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천방지축으로 클 나이건만, 정반대로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아온 것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아니, 그가 바꿔야 했다.

배진화는 몸과 의복을 단정히 한 채 상기된 얼굴로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회관(會館)’이라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그분’을 만났다.

오늘도 역시나 검소한 차림새지만 오늘의 배진화는 어제와 달랐다.

공손히 다가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 저는 황실금의위호위대(皇室錦衣衛扈衛隊) 종육품(從六品) 의랑(議郞) 영군도위(領軍都尉) 배진화라고 합니다. 어제의 무례를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우선 사죄부터 드리고자 하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배진화는 장작을 패던 소리가 멎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게. 난 자네가 오체투지를 할 만큼 높은 사람이 아니야.”

“외람된 말씀이오나 대인께선 그만한 위치에 계십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공보하 장군이 말했습니다. 영락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던 날 황실의 사직과 안녕을 위해 황사(皇師)로 모셔 가르침을 구해야 할 사람들을 몇 명 말씀하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대인이셨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나는 그 직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대인께서 말씀하셨듯, 영락제 폐하께선 원하는 일은 언제나 당당히 성취하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설마……?”

“조정 대신들의 논의를 거친 것은 아니나. 대인께선 엄연한 황사(皇師)이며, 또한 대장군의 명부에 올라 국구(國舅:왕의 장인 또는 처남)에 준하는 권한을 지니고 계십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헛웃음 같았다.

“그리되었나? 분명 폐하께선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시지.”

“예, 그러니 오체투지의 예가 절대로 과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일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 일은 됐어. 그보다 자네, 마을은 구경해 보았나?”

“예. 은자촌에 자리를 잡은 일백 명 모두를 만나 보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럼 내가 원하는 바도 알겠군?”

“그렇습니다, 대인.”

배진화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평온한 삶을 원하시는 대인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허나 그렇기에 더욱 대인께 청하고 싶습니다. 부디 저의 주군. 제이황자(第二皇子)이신 주기옥 전하를 살려 주십시오.”

쿵. 쿵.

배진화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절히 외쳤다.

“제이황자라면 함께 온 그 아이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인.”

“황자 전하를 살려 달라니. 감히 황족을 노릴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혹시 황제폐하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한 건가?”

“황제폐하가 아니라…… 황태자입니다.”

“승계 문제였군.”

배진화는 쿵 하고 다시 한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

“현 황제폐하이신 선덕제께선 병환이 깊어 위독한 상태이십니다. 대신들이 후계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였는데…… 황태자이신 주기진 전하는 성품이…… 조금 특이하셔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호위무장으로서 황실에 근무하던 날, 주기진 황태자가 서방에서 공물로 들여온 앵무새를 맨손으로 짓이기며 환관 왕진과 함께 웃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는 작은 생물과 석류처럼 붉은 피를 양손에 한 가득 묻히고 웃는 어린아이.

“특이하다면 어떻게 특이하다는 건가?”

“그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진구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요.”

배진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황태자 주기진은 천성이 잔인하고 신념이 없으며, 도덕과 예(禮)에 관한 관념이 희박하여 자신과 가까웠던 것들도 버리고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를 보필하는 환관 왕진은 야심이 큰 자입니다. 훗날 방해가 될지 모르는 주기옥 전하를 살려 둘 리가 없습니다.”

“흠.”

배진화는 식은 땀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말, 밖으로 새어 나가면 역모 아닌가?”

“……그럴 테지요.”

“용감하군.”

“그만큼 절박하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배진화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손이 떨렸다.

“황제폐하께서 쓰러지시고 후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자…… 곧바로 환관 왕진이 제이 궁(宮)으로 찾아왔습니다. 저보고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계속 제이 궁에 남을지, 아니면 남쪽의 대월국과 대치하는 관문에 자원해서 갈 것인지.”

명제국 최남단.

대월국 관문에 자원해서 간다면 평생 북경이나 남경 쪽엔 발도 못 붙이게 된다.

공직자로서는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저는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주군을 두고 혼자 도망갈 수는 없었습니다.”

“충성심인가?”

“……예.”

사실 그것보다는 더 복잡한 감정이지만, 배진화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천하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공보하 장군은 새로운 황제로부터 주기옥 황자마마를 지켜 줄 만한 능력이 있고, 동시에 권력에 욕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오직 대인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는 대인의 마을을 돌아보고 그 말이 옳았노라 확신했습니다. 대인뿐입니다. 부디, 황자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그렇다.

믿을 만한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전날 신뢰가 필요하다고 했던 대인의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다만 속세가 싫어 은거한 분이 문제덩어리나 다름없는 황자를 받아줄지 걱정될 뿐.

배진화는 부디 대인이 그의 청을 받아 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나 묻지.”

“예. 대인.”

“제이황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예……?”

“황위를 찾길 원하나? 아니면 자신의 직위를 버리고 평민으로서 살아가길 원하는가.”

“주기옥 전하께선…… 저도 확실한 그분의 의중은 모르겠습니다.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어서 그러신지…… 하지만 당장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을 바라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잘 대답한 것일까?

본래의 직위 따위 버리길 원한다고 대답했어야 할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배진화에게는 천년처럼 긴 시간이었다.

“일어나게.”

“대인…… 부디.”

“말을 안 듣는군. 내 직위가 있다고 했으니 명령으로 하지. 일어나게. 명령이야.”

배진화는 황급히 일어섰다.

이마에서 피가 엉겨 붙은 흙덩어리가 후두둑 떨어졌으나 손으로 닦아 내지 않았다.

불안 했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다보니 비로소 대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그의 얼굴이 어제보다 따뜻해 보였다.

“은자촌은 억울한 죄인, 은원으로부터 도망쳐 평화로운 삶을 원하는 자,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처음 마을을 만들 때부터 그리 정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 규칙이지.”

배진화의 눈빛이 떨렸다.

설마…….

“황자 주기옥은 본인이 원한다면 지난날의 지위와 은원을 버리고 은자촌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풍운객잔의 주인이자, 은자촌의 촌장인 나 장기린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감격하여 고개를 푹 숙이는 배진화.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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