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6화
제2장. 대미미(1)
그야말로 찌는 듯이 더운 날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과도한 폭염을 토해 냈고 돌멩이가 박힌 석조 바닥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지독하게 더웠냐면, 단 한 번도 손과 얼굴을 빼고는 맨살을 안 보여 주던 기옥이 스스로 장포를 벗어던지고 깨진 계란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있을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우물가로 가려고 노력하던 중인가 보다. 달팽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후후, 일어나라. 더위에 찌든 패배자!”
소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기옥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
기옥의 눈에 잠시 반항의 빛이 번뜩였지만 이내 기운을 잃고 다시 축 늘어졌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혀를 찬 소호는 더위를 날려 버릴 기적의 단어를 말해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시원한 거 먹고 싶지 않아?”
움찔.
기옥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덥지? 목마르지? 단 게 땡기지?”
“나, 난, 괜찮다!”
“괜찮긴. 넌 지금 말라죽기 직전의 지렁이 같아.”
“지렁이라니! 감히 또 모욕을!”
“오오! 팔팔해졌다!”
소호는 붕붕 날아오는 주먹을 손으로 탁! 잡아챘다.
“히힛, 그럼 가는 거다?”
기옥의 팔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처음엔 버둥거리던 기옥이었지만, 이내 포기했는지 축 늘어진 채 터벅터벅 걸어서 따라왔다.
“너 말이야. 진화 아저씨가 간 뒤로 너무 쳐져 있다구. 그래서야 진화 아저씨가 밖에서 맘 편히 일 보고 오실 수 있겠어?”
“……내가 언제 그를 신경 썼단 말이냐.”
“신경 쓰고 있잖아? 아저씨가 떠난 뒤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아, 아니다! 그저 생각할 게 좀 있었을 뿐이다!”
슬쩍 돌아보니 기옥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은 밖에서 햇볕 받으면서 하는 거야. 진화 아저씨가 떠나면서 나한테 널 부탁했거든. 그래서 난 항상 너를 데리고 같이 놀러 다니기로 결심했어.”
“…….”
“잘됐지? 그치?”
“필요 없어.”
소호 눈에 기옥은 거짓말쟁이였다.
배진화가 떠난 뒤로 눈에 띄게 외로워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아닌 척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놀고 싶다고 했어?”
기옥의 왼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히힛. 눈썹!”
“뭐, 뭐야?”
“어제 진화 아저씨가 그랬어. 네 왼쪽 눈썹이 움직일 때는 아무리 싫은 척을 해도 사실 속으론 엄청 좋아하는 거라고.”
“내, 내가 언제! 배진화……! 네가 감히 그런 말을……!”
기옥은 양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감싸며 부들부들 떨었다.
“히힛 그러니까 그냥 따라와.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나는……!”
기옥은 자신도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결국 생각해 내지 못했는지 조용해졌다.
그 후론 묵묵히 뒤를 따라왔다.
“자. 바로 여기야.”
풍운객잔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떡갈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바로 앞에 난 공터에 통나무로 지어진 집이 있었다.
집 주변의 울타리는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발돋움을 하면 보이는 담장 너머엔 일정한 크기로 잘린 목재들과 다섯 칸짜리 집이 보인다.
“여기엔 우리 삼촌들 중 한 명이 사셔. 매일 장작을 만들어서 우리 집에 갖다 주셔.”
“…….”
기옥은 입을 다물고 앞을 내다보았다.
“어? 뭘 봐?”
기옥은 더 이상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커다란 떡갈나무를 그저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봤어.”
“처음 봐? 아! 그동안 큰 집에 갇혀 살았다고 했었지. 그래서 그런가보다.”
“그런가……? 이렇게 큰 나무가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걸?”
“음. 그래?”
“크다……. 느낌이 이상해.”
기옥은 한참 동안 떡갈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를 좋아하는구나? 그럼 다음번엔 어엄청 큰 소나무도 보여 줄게. 사실 우리 동네엔 큰 나무가 많아.”
가만히 두면 하염없이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소호는 기옥을 끌다시피 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삼촌! 대석 삼촌!”
소호는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폈지만 평소와 달리 대석은 집 안에 없었다.
원래 이 시간쯤이면 담장 밖에서도 대석이 장작을 패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데 방 안에서 식사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의아해하면서 들어가려는데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며 문이 열렸다.
“소호 오라버니!”
반가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매끈한 붉은색 면 옷에 연한 꽃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소녀였다. 동그란 얼굴에 눈이 동그란 귀여운 인상이다.
소호는 환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미. 안녕! 대석 삼촌은 나가셨어?”
“응. 아빠는 나갔어.”
“윽! 우리, 삼촌 보러 왔는데! 언제 다시 오셔?”
“잠깐만. 엄마한테 물어볼게.”
미미가 양손을 모으더니 조신한 걸음걸이로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왜 저렇게 걷는 걸까? 소호는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저기.”
“응?”
뒤에서 기옥이 소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쟤 몇 살이야?”
“아홉 살. 아, 그러고 보니 기옥이 너한테는 미미가 누나네.”
“한 살 차이인데 뭐.”
“한 살 차이라도 누나야.”
“흥.”
‘누나는 무슨’이라고 말하는 듯한 건방진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기옥은 호기심이 생긴 눈으로 미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를 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같이 놀 거니까 친하게 지낼수록 좋다.
그때, 집 안으로 잠시 들어갔던 미미가 웃는 얼굴로 뛰어 왔다.
쿵. 쿵.
나무 바닥이 울렸다.
“어, 어어……?”
뒤에서 기옥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소호는 히힛,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미는 귀엽게 생긴 얼굴과 달리 몸집이 제법 큰 소녀였다.
멀리서 보면 모르지만, 가까이 와 보면 안다.
아홉 살이지만 열두 살인 소호보다 몸집이 크다.
키는 소호와 비슷하지만, 무게로 따지면 더 나갈 것이다.
살이 쪄서 그런 게 아니라 타고난 골격이 컸다. 여자치곤 어깨가 넓은 편이고 손목도 소호의 손가락으로 다 안 잡힐 만큼 굵었다.
그렇지만 워낙 키도 같이 커서 균형이 맞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하늘하늘한 치마에 여성스러운 붉은색 경장을 예쁘게 차려 입은 소녀이지 않은가.
소호는 미미가 바느질과 집안일을 좋아하는 매우 여성스러운 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래 나이보다 몸집이 큰 것만 빼면 무척이나 평범한 소녀.
아니, 소녀보다 더 소녀 같은 여자아이였다.
“앗차!”
그렇게 뛰어 오길 잠시.
세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양손을 모으더니 조심조심 몸을 움직였다.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발을 사뿐사뿐 들어 올리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다. 미미는 걸을 때마다 힐끔거리며 소호의 눈치를 보았다.
“……응?”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물어보았다.
“미미야. 걸음을 왜 그렇게 걸어?”
“헤헤, 엄마가 아가씨들은 이렇게 걷는 거라고 그랬어.”
“으음, 불편해 보여.”
“그래도…… 이런 게…… 되게 예뻐 보인대.”
“그래?”
소호는 전혀 모르겠다.
평소처럼 호쾌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더 좋다.
“난 원래 모습이 더 좋은 것 같아.”
“그래?”
“응. 원래 뛰던 모습이 더 예뻐.”
미미는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원래대로 우다다 뛰어 왔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걸을게!”
“응. 좋아, 좋아.”
덩치만 크지 영락없는 막내 여동생이다.
소호가 예쁘다, 예쁘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미미는 눈을 감으며 헤헤 웃었다.
“흐음…….”
그때 기옥이 옆을 기웃거리며 미미의 주변을 한 바퀴 뱅 돌았다.
“뭐야! 무슨 계집애가 이렇게 커!”
“얌마!”
정말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꼬맹이다.
소호는 정의의 꿀밤을 다시 날려 주었다.
“으악! 또 왜!”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크니까 크다고 한 거잖아. 왜 안 되는데!”
“음, 그게…….”
찔리는 게 있어서 잠시 우물쭈물하니 기옥이 곧바로 콧대를 세우고 건방져졌다.
“흥. 자기도 이유를 모르는 거지?”
“바보야. 그런 게 아냐. 상대가 기분 나빠할지 어떨지 모르는 말은 그냥 안 하는 게 좋은 거랬어.”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말을 할까, 말까 고민되면 하지 마. 고민하던 말을 하면 무조건 후회할 일이 생긴대.”
기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이 불만투성이다.
미미를 봤더니 신기한 눈빛으로 기옥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도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크다고 그래서 나 엄청 울었었는데.”
“윽!”
“그런데 지금은 동생을 가르치고 있어.”
미미는 방긋방긋 웃으며 즐거워 보이지만 소호에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다. 인생에서 여자아이를 처음으로 울렸던 곤란한 기억인 것이다.
“하!”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기옥이 엄청나게 당당한 얼굴로 소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것 봐,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듯한 얼굴이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악! 왜 때려!”
정의의 응징이다.
“얘가 걔야? 소호 오라버니들 집에 살게 되었다던 애.”
“맞아. 이름은 기옥이야.”
“안녕, 난 대미미야.”
“…….”
기옥은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미미는 그걸 귀엽게 보는 듯했다.
“동생이지?”
“맞아. 여덟 살. 미미 너보다 한 살 어려.”
참고로 나이는 배진화 아저씨가 확인해 주었다.
“오라버니. 엄마가 포도 먹고 놀라고 하셨어.”
“그래? 히힛. 포도 좋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반색을 하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인사했다. 방 안에는 젖먹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차분한 인상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대미미의 어머니.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연 부인이라 부른다.
“소호 왔구나. 와서 포도 좀 먹으렴.”
“감사합니다! 철이는…… 아직 그대로네요!”
보송보송한 솜털에 매끈매끈한 피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은 새끼손톱만하고, 몇 가닥만 숭숭 자라난 머리카락은 이틀 전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
똘망똘망한 눈은 대석 삼촌과 미미를 쏙 빼닮았다. 또한 자그맣고 통통한 입술은 연 부인을 닮은 듯했다.
“미미도 이러다가 금방 자랐지. 철이도 곧 자랄 거란다. 그땐 소호가 많이 아껴 주렴.”
“당연하죠. 미미 동생이면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
소호가 나만 믿으라는 의미로 가슴을 두드리자 연 부인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여기 얘는 기옥이에요. 이번에 저랑 같은 집에 살게 되었어요.”
“이야기는 들었단다. 기옥이도 포도 좀 먹으렴.”
“……예.”
어느 때보다도 순순한 목소리.
소호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기옥이 평소처럼 툴툴거릴 거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미미와 기옥까지 세 사람은 마당에 있는 탁자에 둘러앉았고, 접시에 담긴 포도를 맛보기 시작했다.
여름에 나오는 포도는 뒷골이 당길 만큼 새콤하면서도 매우 달았다.
오물거리며 속살을 씹어 삼키니 씨앗이 남는다. 소호는 풉, 하고 바닥을 향해 뱉어 냈다.
“……!”
그런데 어째선지 기옥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선 포도를 집어 든 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응? 왜 그래? 풉!”
“그, 그거.”
“응? 어떤 거? 풉!”
“그거 말이야! 그거!”
“포도?”
고개를 끄덕이는 기옥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도 어서 먹어. 엄청 맛있다구. 풉!”
이번에는 씨가 조금 빗나갔다.
이전에 뱉었던 씨앗과 부딪친 포도 씨가 옆으로 핑, 하고 튕겨 나가자 기옥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겁이 많은 녀석이다.
포도 씨 따위를 겁내는 건가?
“아니, 맛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혹시 씨에 맞을까 봐 그러는 거야? 아냐! 이래 봬도 포도 씨를 잘 뱉는다구. 사람한테 안 맞춰!”
기옥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앞쪽에 있던 미미도 포도를 다 먹고 풋, 하고 귀엽게 씨를 뱉어 냈다.
연 부인은 왜 평소랑 달리 약하게 뱉냐고 웃으며 물었고, 미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원래 그렇게 세게 안 뱉는다고 변명을 했다.
미미가 뱉은 씨는 바닥 안에 파고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기옥은 뭔가 포기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