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화 (136/686)

1권 7화

제2장. 대미미(2)

그래도 포도를 몇 개 집어 먹더니 씨와 껍질은 얌전히 손으로 가리면서 뱉어서 탁자 위에 모아 두었다.

왜 저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껍질은 몸에 좋고. 씨는 바닥에 뱉으면 또 자랄 텐데.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호야. 우리 낭군님을 만나러 온 거면 대나무 언덕 쪽으로 가 보렴. 오늘은 대나무를 베러 간다고 하시더구나.”

“잘됐네요! 어차피 대나무 언덕에 가려고 했어요.”

“그러니?”

“네!”

연 부인은 인자하고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언제 찾아오던지 밝은 미소로 받아 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누군가 소호에게 마을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분명 연 부인이 들어갈 것이다.

포도를 다 먹은 소호는 기옥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심했다던 미미도 즐거운 얼굴로 합류했다.

“낭군님을 보면 이 도시락을 좀 전해 주련? 아침에 챙겨 드렸는데 또 놓고 가셨단다. 지금쯤 배고프실 텐데. 난 철이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가 않아서…….”

“네! 걱정 마세요! 꼭 전해 드릴게요!”

소호는 히힛 웃으며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아직까지 온기가 느껴졌다.

대석 삼촌은 분명 엄청 좋아할 것이다. 대석 삼촌은 연 부인을 엄청 사랑하는 팔불출 삼촌이니까.

그런 연 부인이 직접 만든 음식이라면 장담컨대 쌀 한 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대석 삼초오온!”

소호는 미미, 기옥과 함께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산길은 익숙했다. 수풀이 무성한 언덕을 오르다 보면 은자촌의 입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절벽이 하나 나오는데, 이 근방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곳은 그곳밖에 없는 것이다.

“헉. 헉. 허억…….”

언덕의 중턱쯤 되니 기옥이 힘들어해서 소호가 업어 주었다. 기옥은 처음엔 싫다면서 버둥거렸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묵묵히 업혀서 따라왔다.

고양이 같은 녀석이다. 어차피 할 거면서 항상 도도하게 군다.

“다 왔다!”

소호는 대나무들이 똑같은 크기로 잘린 채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공간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선 대석 삼촌이 도끼질하는 소리가 쿵쿵 울려야한다.

한데 오늘은 웬일인지 도끼질 소리도 안 나고, 그렇다고 대석 삼촌이 어딘가에 앉아서 쉬는 것도 아니었다.

대석 삼촌은 덩치가 무지무지 크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지금쯤 한눈에 딱 보였을 것이다.

“이상하네. 삼촌이 어디 갔지?”

함께 온 대미미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 아빠 어디 갔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소호는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나무 숲의 가장자리가 휑하니 비어있는 것을 보니 분명 여기서 작업을 하긴 했었던 것 같았다.

옆에는 일정한 크기로 잘린 대나무들이 쌓여 있기도 하다.

“으음, 어디 가셨지?”

소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사이에, 미미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급하게 달려갔다.

“오라버니! 이거 봐. 채송화야! 불쌍해……. 햇님을 못 봐서 시들었어.”

잎사귀가 무성한 자작나무 묘목 밑에 채송화 한 송이가 힘겹게 서 있었다.

햇빛을 못 받은 지 꽤 되었는지 꽃잎 끝이 갈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하였다.

자연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꽃이 먼저 피고, 그 뒤에 옆에서 나무가 자라서 커지면 주변의 꽃들은 말라죽어 버리는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미미는 시들어가는 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섰다.

“나무 나빠! 채송화가 불쌍해!”

그러고는 자작나무 묘목을 붙잡고 뽑아냈다.

우두둑, 우두둑.

뿌리가 뽑히는 소리가 나면서 나무가 옆으로 쓰러진다. 소호는 다급하게 미미를 혼냈다.

“미미야. 안 돼. 그럼 나무가 죽잖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채송화가 불쌍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미미가 애원하듯 바라본다. 소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꽃도 중요하지만 나무도 중요해. 그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죽여선 안 되는 거야.”

“그렇지마안……!”

“이렇게 하자.”

소호는 반쯤 뽑혔던 자작나무 묘목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그 밑에서 시들어가던 채송화를 손으로 살살 퍼냈다.

흙을 걷어 내고, 뿌리를 조심조심 끌어내서 통째로 퍼내 햇빛이 잘 드는 땅으로 향했다.

나무가 자라지 않은 땅을 촉촉한 흙이 나올 때까지 파낸 뒤 그 속에 채송화를 옮겨 심었다.

주변의 흙을 꾹꾹 눌러 주니 채송화 한 송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휴우. 다 됐다. 이젠 둘 다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미미도 만족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시들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종종 보러 오자.”

“헤헤, 역시 오라버니가 최고야.”

기뻐하는 미미를 보면 소호도 기분이 좋다. 문득 기옥을 바라보니 입을 벌리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기옥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응?”

기옥은 가끔 이상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별로 특이한 것도 없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곤 한다.

뭐가 놀라웠던 걸까?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일다경이 지나도록 대석이 오지 않아 소호와 아이들은 저희끼리 시원한 걸 먹으러 가기로 했다.

대나무 숲보다 더 높은 지대로 가야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경사진 언덕을 올랐다.

도중에 지친 기옥을 부축해 주겠다고 미미가 손을 내밀었는데, 기옥은 화들짝 놀라며 괜찮다면 굳이 거절했다.

왜 거절한 걸까? 남자의 자존심 같은 걸까?

소호는 결국 끝까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명 황실을 상징하는 색을 고르라면 보통 화려한 금색이나 새빨간 적색을 떠올릴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백성들은 다른 색을 먼저 떠올린다.

흑색(黑色).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논 사람이 다음 날 사라진다.

술자리에서 나라의 대소사에 관해 격론을 벌였던 남자가 그 다음 날 사라진다.

온갖 괴담이 나올 법한 기상천외한 일이지만, 명제국의 백성들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도 그렇게 잡혀가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 뿐이다.

잡혀가게 된 정보의 출처는 친구, 동료, 먼 친척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자기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을까.

사람들은 검은색 관복을 무서워했다. 누구든 검은색 관복을 입은 자가 찾아와 질문을 던지면 사실대로 순순히 고백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거나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고문을 받을 테니까.

관청에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적어도 명제국 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은색 관복을 입은 자들은 지방 관리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지방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황족들조차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어쩌겠는가.

황실 최대의 정보조직이자 기밀 유지와 역적색출의 권한을 가진 동창(東廠).

자칫 그들의 비위에 거슬려 역모로 몰리면 고위 관료조차 삼족이 멸한다.

강력한 황제였던 영락제는 독재에 가까운 밀정 정치를 펼쳤고, 그 안 좋은 영향은 영락제가 승하한 뒤에도 여전히 남아 버린 것이다.

“이쪽인가?”

검은색 관복에 챙이 넓은 관모. 양쪽 어깨에 검 모양의 문양 세 개가 새겨진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다섯 명의 사내들이 조용히 그의 뒤에 일렬로 늘어섰다. 모두의 얼굴이 분칠을 한 것처럼 창백했다.

“배검대(背劍隊)는 처음의 흔적을 쫓아 삼산(三山)의 좌측으로 돌아갔습니다. 지세가 이상하다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런가. 나도 이상한 느낌이군. 뭔가 답답하고……. 공기가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다.”

“정찰을 하고 올까요?”

“아니. 이대로 같이 들어간다. 견검대(肩劍隊)는 앞으로.”

견검 제이(二) 대주 도종환의 명령에 대원들은 일제히 숲속으로 들어가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총 여섯 명의 사내들이 산을 타고 오르는데, 나뭇잎들이 바람에 스치는 정도의 소리만 날 뿐 잡다한 기척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군.”

도종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밑에서 보기엔 낮은 언덕처럼 보였습니다만……. 만만치 않군요.”

“체력을 잘 관리하도록. 배진화는 만만치 않은 자다.”

“황실금의위라고 해봤자 허울만 좋은 자들 아닙니까? 특히 호위대 쪽은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자네 동창에 들어온 지 삼년쯤 되었던가?”

“예. 이번 중추절을 지나면 사 년째 됩니다만…….”

“정보 등급은 이(二)급쯤 되지?”

“예.”

도종환은 혀를 찼다.

“이급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 황족 관련된 내부 정보는 다루지 못하지?”

“예. 방계 쪽밖에는…….”

“이참에 말해 두지.”

도종환은 냉엄한 눈빛으로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잘 들어라. 출신 때문에 들어온 어중이떠중이 금의위들이야 별 볼일 없지만. 적어도 황족을 경호하는 호위대 부장들은 금의위뿐만 아니라 황실 무인들 전체 중에서도 최정예다. 우습게 보다가는 일격에 목이 날아갈 게야.”

“그 정도……입니까?”

“그래. 나도 혼자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견검이대 대원들은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겸검 이대주 도종환은 동창의 무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자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배진화라는 자가 그 정도 실력이라면 자신들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은 각자 무기에 손을 올리고 전의를 다졌다.

긴장을 하며 나아가길 일다경 정도. 가장 앞쪽 전위에 있던 대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대주. 앞쪽에 민가가 하나 있습니다.”

“민가? 이곳에 마을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 관에서 받은 지도에는 없었습니다.”

“화전촌인가.”

명나라의 역사는 아직 오래되지 않았다.

관의 지배를 거부하고 산에 들어가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은 것이다.

“쓰레기 같은 자들. 당연히 내야 할 세금을 피해 숨어 살다니. 정당한 의무를 피하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도종환은 나라의 반동분자들을 경멸했다.

“민가는 몇 개인가?”

“일단 보이는 것은 하나입니다. 목수 일을 하는 듯 땔감들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지금 안에 있는 사람은 여인 하나와 젖먹이 아이 하나입니다.”

“땔감들이 쌓여 있다? 그렇다면 민가가 하나가 아니군. 그 땔감들을 공급하는 마을이 있는 거야.”

도종환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사검. 오검.”

“예!”

견검이대의 다섯 부대원 중, 가장 무력이 약한 두 명이 선별되었다.

“우린 지금 배진화의 도주 경로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중이다. 배검대는 배진화의 뒤를 쫓고, 우리는 한 발 앞서서 넓게 포위해 가는 셈이지. 배진화는 상처를 입었다. 화전촌이 있다면 그곳에 들러 상처를 치료했을 가능성이 높아. 황자 한 명을 데리고 돌아다닌다면 더더욱 그렇지.”

“그럼 저 여인이 뭔가를 알고 있겠군요.”

“물론이다. 너희는 여인에게서 배진화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라. 나라를 좀먹는 화전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반항한다면…… 죽여도 좋다.”

“예.”

나직하게 대답하는 겸검이대의 사검, 오검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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