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화 (138/686)

1권 9화

제2장. 대미미(4)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깊은 산속의 개울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법이다.

그중에서 유난히 잘 깎은 대나무 통에 손끝이 찌릿해질 만큼 차가운 물을 잔뜩 담고, 갓 따온 벌집을 한 움큼 떼어 내 꿀물을 꽉 짜 낸다.

그리고 그 위에 대나무 잎을 세모꼴로 접어서 올리면 끝.

“헤헤. 맛있다!”

대미미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이런……? 별거 아닌 게 이렇게 맛있다니……?”

기옥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야. 별거 아니라니! 갓 딴 벌집이 얼마나 맛있는 건데!”

“벌집 따위…… 더 고급품도 먹어본 적 있다.”

“이건 숙수인 운찬 삼촌이 말해 준 건데. 아무리 비싼 고급 재료라도 신선한 재료에는 이길 수 없대.”

기옥은 납득할 수 없는 듯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 꿀물을 의심스럽게 계속 노려보았다.

“맛있지? 인정하지?”

“…….”

“나오길 잘했지?”

기옥은 천천히 대나무 꿀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비장한 얼굴로 큭, 하고 신음을 토해 낸 뒤 말했다.

“……맛있군.”

“하하핫!”

소호는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도 만들려고 대나무 물통에 물을 뜨고 벌꿀을 짜 넣는 순간, 뒤통수를 누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에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손끝에서 꿀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호 오라버니. 왜 그래?”

“쉿!”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만. 조용히 해 줘.”

소호는 좌우를 살피다 홱, 하니 고개를 돌리고 수풀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갔다.

꿀꺽.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양손과 양발의 긴장한 근육을 애써 풀어 준다.

“핫!”

단번에 수풀을 훌쩍 뛰어넘어 정면을 탐색.

“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으음?”

“아무도 없어. 오라버니.”

대미미가 옆으로 다가와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네. 이상하다. 잘못 들었나?”

“그러게. 잘못 들었나 보다!”

“으음…….”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잘못 듣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상한 날이었다.

“으악! 물이 식었어! 대나무 꿀물의 생명은 찬물인데!”

“헤헤, 다시 만들어. 오라버니.”

“으으, 이미 꿀도 짜 넣었는데!”

소호는 슬퍼하며 대나무 꿀물을 꿀꺽 삼켜 보았다.

때를 놓친 탓에 등골이 짜릿해지는 차가움은 없다.

달콤했지만 찝찝했다. 마치 조금 전에 느껴졌던 인기척처럼.

***

“읍! 읍! 푸하앗!”

얼굴에 덮고 있던 검은 보따리가 벗겨지고 입에 물려졌던 재갈이 풀리는 순간, 황실 직속 동창 견검이대 대주 도종환은 눈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 누가 감히 대 동창의 대원을 구속하는가!

공권력을 동원해 엄벌에 처하겠노라 외치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더욱 처참한 꼴로 온몸이 붕대로 감겨 있는 배검삼대 대주 오철을 보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말도 안 된다.

오철은 도종환이 일대일 승부로는 이길 수 없는 동창의 실력파 무인이다.

저렇게 너덜너덜한 몰골로 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게 무슨……?”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도종환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주변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신과 견검이대의 대원들은 모두 의자에 앉은 채 손이 뒤로 결박되어 있었다.

다들 고통에 신음하긴 했으나 기껏해야 골절상이다.

목숨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엔 좌측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배검삼대 대주 오철. 그리고 그 주변의 다섯 대원들은 모두 짐승이 할퀴기라도 한 듯 서너 줄기짜리 자상을 여기저기 입고 있었다.

‘뭐야. 짐승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자세히 보니 어깨에 송곳니로 물린 상처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들이 평범한 짐승이랑 싸워서 티끌만큼이라도 다칠 사람들이던가. 어이가 없는 심정으로 그들의 무사함을 확인한 뒤, 이번엔 그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지금 밭 위에 있었다.

옆에서는 배추를 기르고, 건너 쪽에는 물을 대서 벼가 자라고 있는 농촌의 논밭 말이다.

그러고 보니 농촌 특유의 쾌쾌한 퇴비 냄새도 난다. 좌우에는 사람의 키만 한 갈대숲이 자라고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저 멀리 언뜻언뜻 일백 가구 정도가 살 것 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보였다.

슥 턱. 슥 턱.

“음?”

도종환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견검이대를 어린애 다루듯 가볍게 제압했던 거구의 사내가 삽질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큰 부삽이 마치 숟가락처럼 보인다.

그가 숟가락질.

아니, 삽질을 할 때마다 흙이 뭉텅이로 퍽퍽 파였다. 서너 번 파고 나니 사람의 몸이 들어갈 만큼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잠깐, 삽질?’

도종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의자 열 개.

사람도 열 명.

거구의 사내가 파고 있는 커다란 구덩이는 이제 세 개째다.

그것도 부족한지 삽질을 계속하고 있다.

“대석아. 그만하고 저 사람들 의자를 돌려주거라.”

“예. 어르신.”

중후한 목소리를 지닌 노인의 말에 대석이라 불린 덩치 큰 사내가 공손히 대답했다.

도종환은 그가 의자를 뒤로 돌려 줄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싸움 때문에 왠지 모를 공포심이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동창이라. 옛날 생각이 나는군. 진조는 잘 있나?”

“……!”

진조.

그 두 글자에 도종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조…… 태감께선 현재 동창의 제독이……십니다.”

“허헛, 그 친구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백발에 백염. 낡디낡은 마의를 입었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잘 단련된 상완근은 상대가 범상치 않은 노인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진조 태감을 아십니까?”

“의견이 달라서 티격태격하며 자주 싸웠었지. 그래도 술은 자주 마셨지만 말이야. 술 먹으면 참 재밌는 사람이야. 그 친구가.”

“예……?”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그게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구먼.”

냉혈한 괴물로 유명한 진조 태감과 싸웠었다? 그리고 술을 자주 마셨다?

도종환에게는 귀신을 봤다는 것만큼이나 허황되게 들리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 나야 화전촌에서 밭이나 일구는 노인네지. 요즘은 더덕을 기르고 있다네. 이게 잘만 기르면 인삼보다 더 좋다는군.”

“……그런 것 말고.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자네 말이야. 정보 등급이 얼마나 되나?”

“예?”

“보자. 동창이고 견검대고. 검이 세 개면 분대 대주 정도 되는 거지? 총대주가 아니라.”

“……!”

“일급쯤 되나? 그러면 알려 줄 수가 없어. 아직 황제폐하의 비사는 다룰 수 없는 단계 아닌가?”

도종환은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신입대원들에게 잘난 척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면 총대주 정도는 데리고 오도록 해. 정보 등급 특급이 되면 알려 주지. 나뿐만이 아닐세. 우리 마을에 견검대의 일개 대주가 알아도 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뭐라……구요?”

도종환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배검삼대의 대주 오철도 질린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음모와 비사들을 캐내 온 동창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노인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다.

범상치 않은 육체와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말해 준다.

상대는 화전촌 농민 따위가 아니다. 진실로 황실 분류상 특급에 해당하는 대단한 사람이고, 심지어 그런 사람이 이 화전촌 전체에 수두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쪽은 이쪽대로 물러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도종환은 세게 나가기로 했다.

“실례했습니다. 허나 이쪽 사정도 좀 봐주시지요. 저는 지금 황제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제게 명을 내리신 분을 생각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함부로 저희를 대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허허헛. 지금 이 늙은이를 협박하는 겐가?”

“글쎄요. 그렇게 느끼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쯧.”

노인의 눈빛이 변했다.

“동창은 이래서 문제야.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려고 하거든. 아무나 무는 게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말이야.”

“지금…… 미친개라고 하셨습니까?”

“왜? 모욕적인가?”

“그 발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니. 정말 더러운 세상이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잘못된 건지. 원.”

“가관이로군. 방금 그 말은 반역이오.”

“그럼 뭐?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 마디 했다고 반역으로 잡아 가려고?”

“못 할 것도 없지요.”

“쯧쯧. 대석아.”

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대석은 눈치가 빨랐다. 삽을 들고 다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 것이다.

도종환과 동창의 대원들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요순시대의 왕들은 한낱 촌민이 왕 따위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니 상관없다는 식의 노래를 불러 대도 아무렇지 않았다네. 오히려 기뻐했지. 그게 자신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이야. 백성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예민하게 굴고, 어떻게든 곳곳에 간자들을 심어 두려 애쓰고, 반역이니 뭐니 소리치는 건 오히려 군주가 속이 좁은 소인배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야.”

“나라의 질서를 잡기 위한 일이오.”

“나라를 세웠던 초기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이야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작금의 동창은 나라의 질서보다는 오히려 권력자들의 이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어. 어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

도종환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동창이 황제만을 위해 움직였던 것은 이미 옛날 일이었다. 동창이라는 막강한 기관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동창의 제독. 진조 태감일 뿐.

사실 그 자신도, 마치 잡초를 뽑아내듯 역모 죄를 뒤집어씌울 땐 종종 회의감이 들지 않던가.

“쯧쯧, 영락제 때는 강한 위엄과 매력이라도 있었지. 지도자는 모두를 이끌고 어느 방향으로 갈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거늘. 혈통만 믿고 아무 생각도 없이 제위에 오르니 이런 호가호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던가.”

“노인장…….”

“진조도 그래.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야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쳐서 제도를 이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파탄이 나는 법이야. 예전에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겠다는 그럴 듯한 이유라도 있었는데. 어디 지금엔 그런 이유라도 있던가?”

혀를 차는 노인.

나라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황제에게 조차 가르침을 내릴 품격을 보여 준다.

“자네들은 황자 때문에 왔겠지? 그렇다면 마을을 내려가서 동쪽으로 향하게. ‘그’는 이 마을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동쪽으로 갔다네. 우리 마을은 상관이 없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일이야.”

“…….”

“이 말마저 안 듣는다면, 어쩔 수 없이 파 놓은 구덩이를 사용해야 하겠지.”

도종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혼란스러운 심중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노인장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이곳은 당신의 마을입니까?”

“이 마을이 내 거냐고?”

노인은 껄껄 웃었다.

“말했잖은가. 나는 더덕을 캐는 노인일 뿐. 우리 은자촌의 촌장은 따로 있다네.”

“은자촌……. 노인장 위에 또 누군가가 있다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의 촌장은 누구입니까?”

노인은 의뭉스럽게 마치 그가 알게 될 순간이 못내 기다려진다는 듯 재밌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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