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0화
제2장. 대미미(5)
십여 명의 사내들이 삼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하산하고 있었다. 모두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몇 명은 옷이 잔뜩 찢어져 있었고, 몇 명은 상처가 심해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패잔병 같은 몰골이었다.
“도 대주. 어떻게 생각하나?”
배검삼대 대주 오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해. 우린 엿 된 거지.”
“그건 당연한 거고. 저 마을을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야.”
“저 마을?”
오철의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지금 함께 내려오고 있는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견검이대 대주 도종환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봐. 오 대주. 자네도 들었잖아? 추묵환이래. 장강의 용왕(龍王)이자 하북 쪽에서는 신 취급 받으면서 사당까지 세워져 있는 그 추묵환이라고. 난 떠도는 소문처럼 정말로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간 줄 알았지. 설마 이런 하남 촌구석의 화전촌에서 더덕이나 캐고 있을 거라곤 상상이나 했겠나?”
“장강수로십팔채…….”
“아니. 이젠 녹림십팔채까지 통일해서 삼십육 채지.”
“그야말로 재야의 왕(王)이로군.”
“아니야. 아들인 추룡이 총채주가 되었으니 선왕(先王)이라고 해야지.”
오철과 도종환은 실성이라도 한 듯 꺽꺽거리면서 웃었다.
세상 모든 수적과 산적들의 왕.
전국각지의 거친 사내들을 하나로 통일한 전설적인 존재.
그게 바로 장강용왕 추묵환이다.
“대주. 그래 봤자 도적……아닙니까?”
오철과 도종환이 인상을 굳히며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만 봐도 대답은 뻔했지만 오검은 당돌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물론 장강수로채가 규모가 크다는 건 알겠지만, 백만 금군이 상주하는 황실의 동창이 겁먹기엔 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멍청한 녀석!”
대번에 도종환이 소리를 질렀고 오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럼 명제국의 태조께서도 고작 도적이더냐.”
“무, 무슨 말씀을!”
오검이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이 홍건적 출신인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함부로 말을 꺼냈다간 큰일을 당한다.
“잘 들어라. 내가 이참에 설명해 주마. 구검대(口劍隊) 알지? 우리 중에 대주 급 이상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전부대.”
“예. 저희들이 정보를 알아오면 모두 기록하고 판단하는 곳 아닙니까?”
“그래. 그 구검대에서는 주기적으로 나라에 큰 위협을 끼칠 수 있는 집단을 조사하고 적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평가한다. 당연히 장강용왕이 있는 수로채도 평가를 했었지.”
오검이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육 개월간 명제국의 모든 상행위와 물류 유통의 마비.”
“예?”
“물론 그 후에는 수로맹이 모조리 멸살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지. 음지에 숨어있는 힘을 우습게보지 마라. 수로맹이 장강의 모든 항로를 걸어 잠그고, 산적 떼가 난립하여 마차들을 습격해 대면 국가가 마비된다. 수로맹과 싸우는 순간 전쟁 수준의 병력이 움직여야 해.”
오검은 상상도 못했던 결과에 멍한 얼굴이었다. 옆에 있던 오철이 한 마디 거들었다.
“전쟁보다 더 하지. 국가 내부에서 싸워야 하니까.”
“그래.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수로맹이라는 국가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싸우면 내전이 벌어지는 거야.”
“그 정도……였습니까?”
“진조 태감이 아무나와 술을 마실 것 같은가. 다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지.”
도종환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하 세계의 왕 정도 되니 명제국의 실세와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어때? 아직도 고작 도적이라는 말이 나오나?”
“아뇨. 죄송합니다.”
오검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수로채나 산적 떼 하나둘 정도야 신경 쓸 거리도 안 되지만 이렇게나 모여 버리면 무서운 거다. 그게 바로 군중의 힘이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도종환은 걸음을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구름으로 둘러싸인 삼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그는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추묵환이 누군가의 밑에 있다는 것이야.”
한참 동안의 침묵.
그리고 묵묵히 산을 내려가는 동창 무인들의 뒷모습에선 패배감이 흐르고 있었다.
***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백산의 정상에서 건장한 몸집의 백발노인이 물었다.
노인은 추묵환이었다.
동창의 관인들을 하산시킨 뒤에 그는 이곳에 올라와 은자촌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때가 된 듯합니다.”
좁은 험로.
산봉우리의 끝.
소박한 흰색 베옷을 입고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피부는 잘 그을려져 보기 좋은 빛이 돌았고, 긴 머리는 뒤에서 하나로 질끈 묶었다.
한쪽 귀가 없다는 점이 눈에 띄지만 강인하면서 준수한 인상이 그 특징을 누그러뜨렸다.
적당히 기른 수염이 남성적으로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입단속은 잘 시켰다네. 이래 봬도 아직 내 이름이 제법 무게가 있으니 말이야. 진조 태감도 함부로 손을 대진 않을 테지. 아니, 누군가를 보내서 잘만 이야기하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지도 몰라. 필요하다면 내가 본채에 이야기해서 돈을 좀 가져오겠네. 그 정도는 괜찮아.”
“어르신.”
“아니지, 아니야. 아예 내가 다녀오겠네. 간만에 진조 그 친구를 한번 만나 보는 거야. 술도 한잔하면서. 예전부터 죽엽청을 아주 좋아했으니 제대로 된 걸 하나 사 가면 어떨까?”
“어르신.”
“나는 말이지.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다네. 한 마디 내뱉으면 모든 게 이루어졌지. 예전에 잉어 요리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라면 평생 먹어도 좋겠다고 말했더니 사방에서 다들 잉어를 잡아다 바치는 바람에 상인들이 내 원망을 했다네. 추묵환 때문에 잉어가 씨가 말랐다고 말이야.”
가끔 사람이 웃는 모습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지금의 추묵환이 그랬다.
불가능한 일을 간절히 바라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
“촌장. 난 말일세. 가끔 왜 진작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네. 아마 나뿐만이 아닐 거야.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십로(十老)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걸세.”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기린은 추묵환이 감정을 수습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렸다.
“그동안 만족하셨습니까?”
“만족하다마다. 꿈같은 시간들이었다네. 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기간을 연장시키고 싶어.”
추묵환은 목이 메는 듯 잠시 숨을 골랐다.
“많은 일이 있었네. 생판 모르던 늙은이들과 한 마을에서 살아가며 가족이 되고, 손에 흙을 묻히면서 더덕을 캐고,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하루하루 지켜보며 살았네. 이보다 행복한 시간은 없을 것이야. 과거엔 모든 것을 이루었고 이제는 이루었던 것을 다 내려놓으니 행복해졌지. 그런데 이상하지? 그럼 만족하고 당장 죽더라도 여한이 없어야 할 텐데…….”
추묵환의 주름진 눈가에서 결국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허허, 이것 참……. 주책이구만.”
“이해합니다.”
장기린은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았다.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되 차가운 머리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성공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권위는 원망을 낳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늘 따라붙는 것.
은원(恩怨)이다.
은혜의 은과 원수의 원.
“인생은 산 정상에서 떨어뜨린 바위와 같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고 강해집니다.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렇지. 맞는 말일세.”
“저는 어르신 같은 분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자촌에 들어오신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바위가 바닥에 부딪쳐 깨지기 전에 잡아 준 덕분일세.”
장기린은 추묵환을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쌓아 둔 빚이 있으니 그걸 처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렇……겠지.”
장기린은 추묵환의 흙이 묻은 딱딱한 손을 붙잡았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진심을 다한다면 모든 것이 잘 처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형제들이 모두 애써 주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모두 능력 있는 녀석들입니다.”
“알지. 알다마다. 내 아들 놈도 그중 하나인데. 그래도 난 걱정일세.”
그는 일개 촌부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이 걱정 가득한 노인을 지하 세계의 왕이라는 장강용왕 추묵환이라 하겠는가.
“십로 모두의 은원은 크네.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나?”
“저 혼자만의 은원만 따져도 그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은원의 크기는 성공의 크기와 비례한다. 추묵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그럴 테지. 분명 그럴 것이야.”
은자촌은 참 대단한 마을이었다.
“어르신께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사실 얼마 전까지 전 이 마을을 해체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랬을 테지. 이해하네. 그게 더 합리적이니까. 어째서 마음이 바뀌었나?”
“아이들입니다.”
추묵환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호, 주해, 미미.”
“예. 그 아이들은…….”
“특별하지.”
추묵환의 단언에 장기린이 씁쓸하게 웃었다.
“예, 특별합니다.”
“이곳 성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인지. 아니면 특별한 혈통 때문인지. 참으로 특별한 아이들일세. 하늘이 내린 재능이니 본래대로라면 축복일 테지만.”
추묵환은 안타까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지금 은자촌에 있는 아이들을 한 명씩 떠올려보았다.
“소호는…… 이참에 말해 두지. 내가 살면서 그렇게 특별한 아이는 본적이 없네. 과연 자네 아들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
“천방지축에 사고뭉치일 뿐입니다.”
“절대로 방치하지 말게. 그 아이는 모두가 탐낼 보물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추묵환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장기린의 다짐을 받은 뒤에야 안심했다.
“주해는 남해군도의 ‘그것’을 내려 받았지. 만약을 대비해서 곁에 항상 누군가가 있어야 해.”
“예. 그 일 때문에 우생이 바쁘게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술사(術士)를 찾는 모양인데, 그것으로는 안 될 걸세. 차라리 다룰 수 있게 만드는 게 나을 텐데.”
“허나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을 테지요.”
“하긴 그렇지.”
부모의 마음은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법이다.
자식이 평범하고 잘 살게 만들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는가.
“미미는…… 허허, 여아인건만. 천하무쌍(天下無雙) 거력지체(巨力之體).”
“대석의 말로는 자신이 어렸을 때보다 더 강하다고 합니다.”
“중화에 엄청난 여걸이 한 명 나오겠군.”
“본인은 현모양처가 되어서 시집가고 싶다고 합니다만.”
“허허헛.”
추묵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재밌으면서도 슬픈 일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놔두질 않는 세상이 잘못된 것일까?
“힘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대석이 젓가락을 사용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데 삼십 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잡는 족족 젓가락이 부러져서?”
“예.”
“거참, 생각보다 힘든 체질이구만. 그럼 미미도 삼십 년이 걸리는 건가?”
“아닙니다. 미미는 이미 젓가락을 쓸 수 있게 되었다더군요.”
추묵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잘된 것 아닌가?”
“대석은 그게 더 문제라고 했습니다. 조만간 억눌린 힘을 통제할 수 없는 날이 올 거라고.”
“허어.”
무인의 정점까지 올랐던 추묵환이다. 모든 것을 이해한 그는 안타까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였군. 촌장이 은자촌을 지키자고 마음먹은 게.”
“예. 이 마을이 있기에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평범하다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기린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추묵환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모두 내 친손자 같은 아이들일세.”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예. 그러겠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삼산 아래에 위치한 은자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평범한 화전촌의 모습이었다. 추묵환의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고맙네. 이런 삶을 내게 줘서.’
추묵환은 은자촌을 지키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