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2화 (141/686)

1권 12화

제3장. 섭주해(2)

“인정할 수 없어.”

섭주해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뭐?”

“소호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버님께서 예는 아무리 어려도 서로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어. 소호 형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네가 맘대로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뭐?”

기옥이라는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소호가 신경을 써 주기 때문이 아니다. 항상 자신의 자리였던 오른쪽 등 뒤에 자리를 뺏겼기 때문도 아니다.

‘어차피 말도 안 듣겠지만…….’

원래 약한 자가 강한 척하는 것만큼 꼴불견인 것도 없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애써 모른 척하는 사람들.

마치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왜? 뭐, 분명히 특이한 점은 있지만…….”

아니나 다를까. 기옥은 예상대로 코웃음 치며 섭주해를 비웃었다.

“……내가 뭐하러?”

섭주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뭐하러? 넌 소호 형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흐음.”

기옥은 소호를 쳐다보더니 한번 몸을 움찔했다.

소호는 그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하! 세상 물정 모르고 힘만 센 데다, 히히거리며 경박하게 웃기나 하는 사람에게 내가 왜 예의를 차려야 하지?”

“너……!”

섭주해는 십여 년의 인생 중에 이렇게나 울컥 화가 나는 건 처음이라 생각했다.

역시나 이 녀석은 좋아할 수가 없다.

사람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시선부터,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허리를 젖힌 태도까지.

뭐 하나 좋게 봐 줄 구석이 없지 않은가.

“후우.”

하지만 일단은 존경하는 소호의 앞이었다. 섭주해는 ‘한 번만 더 참자’ 생각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넌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소호 형은 대단한 사람이야.”

“대단하다고?”

“그래. 게다가 형으로서 널 챙겨 주려고…….”

“잘난 척 말하는 것치고는 눈이 낮네. 네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수준은 고작 이런 건가?”

기옥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다.

섭주해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섭주해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후후후후.”

“으응?”

기옥이 눈살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섭주해는 웃으면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부우웅.

“흐억?”

섭주해가 휘두른 주먹은 기옥의 머리 위를 아깝게 스쳐 지나갔다. 통통하고 운동신경 따위는 결코 없게 생겼는데 의외로 반응이 빨랐다.

“이 천한 게! 감히 무슨 짓이냐!”

“그래. 천한 것한테 한번 맞아 봐라!”

“내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어!”

기옥은 이를 갈더니 덤벼 왔다. 안타까운 사실은 섭주해도 운동신경이 없다는 것이다.

시원하게 때려 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잘 안 됐다.

주먹을 허공에 몇 번 붕붕 휘두른 뒤에 결국 둘이 부둥켜안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서로의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이 자시이익!”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자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물론 섭주해도 딱 그만큼 되갚아 주었다.

“야야. 그만들 해! 그만!”

섭주해는 아직 분이 안 풀려서 숨을 씩씩거렸지만 소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화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기옥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나한테 생각이 있어!”

“예?”

소호는 두 사람의 어깨를 동시에 붙잡은 채로 말했다.

“이럴 땐 노는 거야! 놀러 가자!”

“예……?”

“뭐라고……?”

깜짝 놀라서 올려다본 소호는 얼굴 한 가득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놀러 가는 거야! 옆 마을로!”

***

흑석촌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쌍두마차 안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대략 육십쯤 되었을까. 보통 그 정도 나이면 세상만사에 집착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 노인은 달랐다.

붉은색의 화려한 비단 장포를 멋드러지게 입고 있었는데 넓은 어깨에 군살 없는 몸집, 눈빛은 장마철 번개를 가둬 놓은 듯 번뜩거리고 볼이 움푹 들어간 얼굴은 청빈하면서도 강직해 보였다.

서류를 넘기고, 먹이 잔뜩 묻은 붓을 일필휘지로 휘갈기고, 서명하고, 처리가 끝난 찌꺼기를 내던진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음 서류를 집어 든다.

이 같은 일을 반복하며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를 검토하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식욕이 왕성한 대식가를 연상키셨다.

노인이 서류와 죽간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해 나가는 모습은 그 정도로 탐욕스러웠다.

“대인. 속도를 높일까요?”

마부석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노인의 움직임을 잠시 멈춰 세웠다.

“어디쯤 왔나?”

“삼산 부근입니다요, 대인.”

“그럼 이제 반 시진 정도 더 걸리던가?”

“예. 아직 해가 중천이긴 하지만……. 아슬아슬할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노인은 마차의 창밖을 흘깃 내다보았다.

오롯한 산길 너머로 커다란 떡갈나무 숲이 춤을 추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게. 흑석촌 회담에는 늦어선 안 돼. 그들에게 기 싸움에서 밀릴 빌미를 주면 안 되거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요.”

삼십 년이 넘게 넘도록 함께한 마부는 정중하고 주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노인은 다시 서류와 죽간들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아랫사람들한테 일을 나눠 주어도 직접 확인하고 결재를 해야 할 서류는 항상 넘쳐난다.

공적인 일이란 그런 것이다.

대충 누군가에게 떠넘겨 버리기엔 노인은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긍지가 높은 사람이었다.

“이놈들아! 비켜서라! 대인의 행차시다!”

위협적으로 말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히익, 하고 어린아이가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빨라진다. 마부가 서두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원, 사람. 고지식하기는.”

아이들 정도는 그냥 두어도 좋았을 텐데.

다시 서류를 집어 들던 노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곳이 삼산(三山)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삼산에는 ‘그 마을'이 있다. 오랫동안 묵혀 둔 문제를 떠올리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결정한 일이었으니…….”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는 게 평생의 신조였지만 그래도 씁쓸한 마음까진 막을 수는 없었다. 노인은 다시 서류와 죽간들 사이에 파묻혔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곧 있을 흑석촌에서의 회의는 한 성의 운명을 바꿀 만큼 중요했다.

***

명나라는 넓은 중원 대륙을 모두 통일한 강대한 제국이었다. 물론 남쪽의 대월국이나 북쪽의 원나라 잔당.

그리고 동쪽엔 조선이라는 세외의 왕국들이 있다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한민족이 생각하는 ‘중원' 땅은 진시황제 때 이후로 하나로 통일된 넓은 지역을 뜻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 보니 관리해야 할 지역도 엄청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정치, 경제, 치안, 국방 등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무궁무진하게 쌓여 있는 것이다.

명나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분업과 책임을 중시했다.

하나의 성은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 세 사람의 기구에 맡기고, 그들은 지부대인들을 감찰했다.

지부대인은 그 밑의 지주들을 다스렸고, 지주들은 흔히 지현이라 불리는 현령들을 책임졌다.

하나의 나라를 성, 부, 주, 현의 순서로 나눠 크기별로 책임을 나눈 것이다.

보통 하나의 주는 열 개의 현을 포함하고, 하나의 현은 보통 일만호 정도의 인구를 다스렸다.

현령이 가장 밑에 있다고 해서 권력이 적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현령은 그 땅에서 군주로서의 지위를 톡톡히 누렸다.

군권과 행정권, 수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감히 누가 덤빌 수 있을까.

실제로 위에 위가 더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지방의 소규모 왕족과 다를 것도 없었다.

“아이고 포정 대인! 어찌 이런 먼 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아! 이거, 이거 못 본 새 풍채가 더 좋아지셨습니다. 시선(詩仙)이 살아난다면 딱 대인과 같은 모습이었을 테죠!”

서류를 한쪽에 쌓아 둔 채 쌍두마차에서 내리던 노인은 오체투지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굽실거리는 사내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만두처럼 퉁퉁한 얼굴에 볼록한 배까지.

발로 툭, 치면 저 멀리까지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중년의 사내였다. 인상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데 아부를 늘어놓는 언변은 제갈량 수준이다.

기억나는 외모랄까.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그는 흑석촌과 백송촌, 삼산을 관리하는 삼산현의 현령이었다.

“오랜만이오. 하 현령.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금칠로 본인을 부끄럽게 만드는구려.”

“금칠이라니요. 저는 거짓말을 못 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항상 느낀 그대로 이야기를 하지요.”

“허.”

노인.

하남성 종이품 포정사 이백(李伯)은 시선(詩仙) 이백에 비유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극도의 실용주의자인 그는 시나 음악과 같은 낭만적이기만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혐오했다.

자기 감상에 젖은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들으면 돈이 생기는가? 술주정 같은 흥얼거림을 따라 부르면 쌀이 생기던가?

사람이라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삼산현의 현령 하만복은 눈치가 빠른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쪽으로는 이백의 심기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쪽은 도착했소?”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대접할 차도 끓지 않았으니 딱 적당한 때에 오셨지요.”

“다행이군.”

“그런데 저기…….”

“할 말이 있소?”

“아니, 아닙니다. 하핫 일단 들어가시지요.”

이백은 꼿꼿한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흑석촌에 있는 이 비밀회담장은 몇 번 찾아와 봤었기 때문에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둥그런 탁자가 있는 방은 손님이 막 도착한 탓인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젊은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키가 큰 쌍둥이 두 사람이 등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자넨 누군가? 강 상주(商主)는 어디 가고?”

“아! 포정사 어른.”

탁자에서 일어선 사내는 그림으로 그려도 될 듯 절도 있는 모습으로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 일의 전권을 전해 받은 손오라고 합니다. 강 상주님께서는 다른 일을 맡게 되신 관계로 앞으로 하남 쪽 일은 제가 맡아서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일이라고?”

이백은 그리 길지 않은 자신의 턱수염을 손으로 매만졌다.

기분이 상하면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다.

“삼 년이 넘게 관계를 이어온 상주가 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

“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부의 사정인지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여기 제가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지령서(指令書)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손오는 나이가 삼십 대 정도 되는 젊은 사내였다.

허리가 곧고 두 눈에 자신만만한 기색이 역력한, 전형적인 야심가의 모습이다.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네.”

“예?”

“정중하고 겸손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오만하지. 세상에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고, 주변 모든 것들을 발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할 거야. 나이만 많고 머리가 굳은 늙은이들은 퇴물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고 말이야.”

“하핫,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없…….”

“강 상주는 그리 뛰어난 상인은 아니었지만 신뢰는 지킬 줄 알았다네. 사람이 바뀐 이상 지난 삼 년간 나와 칠성(七星)상회가 쌓아 온 신뢰는 없는 걸로 생각하게. 강 상주를 제치고 여기에 왔다면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왔을 테지?”

이백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상대를 바라보니 손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무너뜨린 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야심이 크다고 한들 아직 애송이란 뜻일 텐데.

이백은 허둥대는 젊은이를 냉철하게 응시했다.

칠성상회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취했는지 모르지만, 이백은 그들이 감히 자신을 우습게 보았다면 그 대가로 뼈째 씹어 먹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정이품 포정사 이백.

그는 육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노인이 아니라 패기 가득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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