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3화
제3장. 섭주해(3)
“으음, 오늘 논의할 내용은…… 서역에서 건너오는 교역 물자, 그리고 운남 쪽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철을 거래하는 내용이었지요. 그 내역에 관한 서류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아, 여기에 있네요. 하하하!”
자신을 칠성상회의 젊은 상주(商主)라고 소개한 손오는 눈에 띄게 허둥대고 있었다.
처음 맨날 때 보여 줬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 시립해 있던 그의 쌍둥이 호위마저 한심한 눈빛으로 손오를 바라본다.
‘내가 너무 흔들어 놓았나?’
이백은 속으로 조금 실망하며 손오가 건넨 서류들을 눈으로 읽어 내렸다. 작년에 받았던 서류와 거의 일치하는 숫자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익숙한 품목, 눈에 익은 가격들.
그런데 마지막에 총액을 합쳐 놓은 곳에서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거, 가격이 이상한데.”
“예?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지난번보다 철괴의 단가가 세졌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
“아! 그건 말이지요. 운남 쪽의 경기가 너무 좋아져서 말입니다. 최근에 차(茶)라던가 광물의 질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지요. 그 때문에 찾는 사람도 많아졌고, 수요가 늘다 보니 가격이 너무 올라갔어요. 죄송합니다만 지난번의 가격대로 거래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흐음.”
“여기, 이번에 운남에서 가져온 철의 품질 확인서입니다. 가격은 올라갔지만 그 대신 품질만큼은 확실하더군요.”
이백은 손오가 내미는 품질 확인서도 확인해 보았다. 명제국에서 손꼽히는 장인들 중 하나인 ‘풍 도공’이 바로 운남 사람이다.
그가 평가하고 지장까지 찍은 확인서라면 의심 없이 믿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확실한 서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이백은 ‘탁’ 소리가 나게 서찰을 접어서 탁자 위에 올려 놓고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보다 좋은 조건이면 모를까. 안 좋은 조건을 들고 와서 계속 거래하자고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것도 철괴의 가격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데.”
“하하, 대신 철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녹여서 뽑아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가격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튼튼하지요.”
“흠…….”
이백은 잠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손오를 살피다가 툭 내뱉었다.
“운남 쪽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곳이 유정상회던가?”
“장악……이라고 하기엔 아직 세력이 작지만……. 예, 지역 주민들과 합심해서 주요 품목들을 선점하고 있지요.”
“유정상회는 잘하고 있나 보구만. 한 지역을 그 정도까지 발전시키다니. 우리 하남 쪽도 그런 상회가 필요한데 말이야.”
이백은 전에 만났던 유정상회의 주인을 떠올렸다. 젊고 열정이 넘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들던 젊은이였다.
“하남은 운남과 달리 이미 발전한 땅이라……. 더 발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참, 상담(商談) 중에 다른 상회 칭찬을 하시니 질투가 납니다. 저희도 이 땅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꽤나 유명한 상회인데 말입니다.”
“그랬지. 그런데 말이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째 인성을 더 보게 되더군. 겉모습만 보는 건 아무래도 젊을 때뿐인 듯해.”
“가끔은 겉모습도 중요합니다, 대인.”
“글쎄.”
“특히 저 위에 계신 분이 바뀌려고 할 때는 철을 얼마나 구할 수 있느냐가 곧, 상회가 가진 힘의 척도가 되지요.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얼마나 구할 수 있는가, 그게 곧 상회의 겉모습 아니겠습니까?”
저 위.
손오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순간, 이백은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쯤에서 서로 연기는 그만 두는 것이 어떨까요, 대인. 곧 황실의 주인이 바뀐다는 건 상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상회라면 이미 모두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위험한 이야기를 하는군.”
“저희는 위험한 이야기를 하러 오지 않았던가요?”
손오가 손을 한데 모으고 씩 웃었다. 어느새 처음의 어설픈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인들은 정보가 빠르지요. 특히 장사와 관련된 정보는, 어쩌면 황실의 동창보다도 빠를지 모릅니다. 최근에 상계 동향이 어떤지 아십니까. 대인? 각 지역에서 철의 수요가 늘었습니다. 앞날은 모르는 법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들 무기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철 값도 오른 것이고요.”
“그래서 나에게 파는 철의 단가도 올라갔다?”
“예, 그렇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백은 고개를 저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야심도. 그런 야심을 부추기는 상인들도 문제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다들 사고 있으니 나도 안 사면 큰일 날 거다, 이건가?”
“대인. 저는 다만 대인께서는 저희의 유일한 고객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하북 쪽에 팔아도 괜찮지요. 요즘의 철은 어디서든 부르는 게 값이니까요.”
손오는 상인답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절대로 웃으며 들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북 지역의 포정사 왕종호는 호전적이고 야심이 큰 자였다.
만약 아직 어리고 실권이 없는 황자가 즉위하게 된다면 그는 병사들을 이동시켜 인근 지역을 무력으로 장악할 게 뻔했다.
칠성상회에서는 이런 사실까지 알아보고 그를 압박하는 것이다.
이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방 안이 침묵에 잠겼다.
“과연, 강 상주가 빠진 이유가 있었군. 그라면 이런 식으로 본래의 관계를 엎어 버리는 제안은 하지 못했을 테지. 칠성상회에선 거래 상대에게 위협을 가할 때는 자네를 쓰나 보군.”
손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긍정의 뜻으로 빙긋 웃어 보였을 뿐이다.
“대답은 부(不).”
이백은 단호히 말했다.
“예?”
“이 제안은 거절한다.”
이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깐! 잠깐만요. 대인.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에게 더 할 말이 남았나?”
“진심이십니까? 여기서 철을 팔지 않으면 저는 하북으로 가서 팔아 치울 것입니다. 그럼 하북은 병사들을 전부 무장시키고도 남는 양의 철을 갖게 될 것이고……. 이리 된다면 하남은 끝입니다. 대인이 통치하던 땅을 빼앗긴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든 말든 자네랑은 상관없는 일일세.”
“삼 년이 넘게 거래한 고객입니다. 어찌 상관없을 수 있습니까.”
“자네, 이상한 말을 하는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삼 년이 넘게 거래를 해 왔든 말든 자넨 가지고 온 철을 하북에 팔아 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던가?”
“그건…….”
“삼 년간의 신뢰 관계가 없는 걸로 생각하고 시작해 보라고 하였더니 정말로 신뢰 따윈 없다는 듯이 협박을 하더군. 자네, 참 재밌군. 당돌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던가? 을러서 겁주면 금방 꼬리라도 내릴 것 같던가?”
이백은 손오에게 서릿발처럼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상인이 어떤 손님에게 팔지 본인이 정하겠다면, 나도 어느 상인에게서 물건을 살지 고르면 되겠지. 이 세상에 있는 상회는 칠성상회 단 하나가 아니니까 말이야.”
“대인!”
돌아서는 이백을 향해 손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후회하시기 전에 말씀드리지요. 철괴의 가격으로 인한 손해는 서역 물품 교역으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진정하고 앉으시지요.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신다면 정말로 곤란한 일을 겪게 되실 겁니다!”
“허헛!”
이백은 웃었다. 정말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희 무기 상인들은, 하나같이 항상 싸움과 분열을 만들기 좋아한단 말이야……. 그래야 무기가 잘 팔리기 때문일 테지만……. 어째선지 늘 자기 주제를 몰라. 이곳저곳에서 분쟁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니 자기들이 황제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그 시커먼 속내를 우리가 모를 줄 알고?”
“대인. 이번 일이 대인께는 작게 느껴지실지 몰라도, 그 대가는 막대할 것입니다.”
“허허헛! 잘 듣게나. 손 상주.”
이백은 뒷짐을 진 채로 손오를 노려봤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나에게 뒷돈을 제안하거나, 어설픈 협박을 가할 시에는, 이곳 하남 땅에서 자네는 물론이고 칠성상회 전체가 발도 못 붙이게 될 것이야.”
“대인! 대인께선 어떠한 약점도 없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있다고 한들, 너희 더러운 무기 상인들만 하겠나.”
이백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손오를 내버려 둔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차 앞에는 앞서 인사를 했던 삼산현의 현령이 입가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이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오! 포정사 어른! 고생하셨습니다. 소인은 포정사 어른과 식사를 하기 위해 밥도 먹지 않고 세시진 동안 기다리며…….”
“입가의 기름이나 닦게. 오리라도 먹었는가?”
“예? 험험, 이게 왜 묻어 있는지 소인은 잘…….”
“출발하지. 자네는 관청으로 가 있게.”
이백은 자신의 마차 안으로 들어가 평생의 동반자인 붓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한 일일까.
아니면 실수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이제부터 격류처럼 일어날 사건들이 말해 줄 것이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하던 그는 쾅 하고 온몸을 후려치는 거센 충격에 황급히 마차 벽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서류가 흩날리고 먹물이 쏟아졌다. 마차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무슨 일인가!”
“아이고! 대인, 죄송합니다. 마차 바퀴가 부서진 모양입니다.”
“마차 바퀴가? 갑자기 왜!”
“살짝 삐걱거리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낡아서 그런 듯합니다요.”
허리를 두드리며 마차에서 내린 이백은 반으로 쩍 갈라져 버린 마차 바퀴를 확인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뭔가 사고를 당했다기보다는 낡아서 자연스럽게 갈라진 모습이었다.
“이 마차를 산 지 얼마나 되었지?”
“십오 년쯤 되었습죠.”
“오래 됐군.”
“사실 오래된 건 바로 갈아 줬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정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대인. 정비를 미리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요.”
이백은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슬퍼 보이는 늙은 마부에게 손을 내저었다.
“됐네. 낡은 마차를 타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이지. 미리 새로운 마차를 사지 않은 내 잘못일세. 그나저나 고칠 수는 있겠나?”
“크기가 맞는 마차 바퀴가 있을지……. 제가 시장에 나가 볼 테니 대인께선 그동안 객잔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지요?”
“그러도록 하지.”
이백은 쩍 갈라진 마차 바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오래된 건 갈아 줘야 한다’던 마부의 말이 유난히 가슴속을 시리도록 파고들었다.
‘나도 늙었나 보군. 쓸데없이 감상적이야.’
이백은 스스로를 반성하며 성큼성큼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심히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마치 앞날의 파란을 예고하듯, 유난히 붉은 노을이 머리 위를 뒤덮고 있었다.
***
“흐어어어.”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은 기옥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고 손은 겨울철 버들가지마냥 부들부들 떨렸다.
“약골.”
“기옥이는 약하구나.”
“멍청이.”
소호, 미미, 주해가 차례대로 기옥을 평했다. 분한 기옥은 분노로 콧구멍을 씰룩였다.
“너희가 이상한 거야! 어떻게 달리는 마차의 뒤에 매달릴 생각을 해! 정말 미친 거 아냐?”
기옥은 삿대질을 하려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게 왜 이상해?”
“맞아, 그건 가장 쉽게 다른 마을에 가는 법인데?”
“멍청이.”
소호와 미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해는 팔짱을 낀 채 비웃었다.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다.
세 사람이 말하면 없던 호랑이도 생긴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당연한 듯 말하자 기옥은 본인이 비정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대체 왜 얌전히 길가에서 꽃구경 하다가 마차에 올라타는 건데? 그것도 갑자기 낚아채서 반 시진 동안이나! 난 들킬까 봐 비명도 못 지르고!”
“히힛, 짜릿했지? 재밌었지? 원래 처음엔 그래도 나중엔 재밌어져.”
“재미는 무슨! 죽기 일보직전……. 우웨엑!”
계속 얼굴색이 허옇던 기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속에 있던 것들을 게워 냈다.
“약골.”
“기옥이는 약하구나…….”
“멍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