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8화 (147/686)

1권 18화

제4장. 낭관(郎官)(3)

“어디 또 도망가 보시지?”

소호는 히죽 웃는 동추의 등 뒤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낭인들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쇳소리와 낭인들의 조롱 섞인 야유가 소호 일행을 에워쌌다.

“얼른 붙잡아!”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매달아 버립시다!”

“니들는 큰일 났어. 이것들아, 감히 누굴 고생시켜?”

“이것들만으로는 분이 안 풀리지. 이 꼬마들의 부모도 찾아서 족칩시다.”

“그래! 그러자!”

낭인들은 온몸에 뒤집어쓴 검댕과 먼지들을 털어 내며 섬뜩한 목소리로 웃어 댔다.

“이백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시간을 벌어야 해요.”

소호가 나직하게 한 말에 이백은 ‘왜?’냐는 흔한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위풍당당한 풍채의 노인은 자신의 새하얀 턱수염을 몇 번 쓰다듬더니, 품 안에서 검은색 대나무 통을 꺼내 동추에게 던져 버렸다.

“이런 미친?”

너무 가까워서 피할 틈이 없는 상황.

동추는 신기한 기술을 선보였다.

상체를 뒤로 젖히는가 싶더니, 허리를 튕겨 몸에 두르고 있던 쇠사슬을 회오리 모양으로 차르륵 벗어 던졌다.

어깨를 슬쩍 옆으로 돌리니 쇠사슬 끝에 매달린 황동(黃銅) 재질의 추가 마치 사람의 손처럼 능수능란하게 대나무 통을 위로 밀어냈다.

“와아아.”

소호는 그 모습을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펑, 하고 하늘에서 분홍빛 연기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거 아까 쓰지 않았어요?”

“또 가지고 있었거든.”

소호는 이백의 덤덤한 말투에 웃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할아버지였다.

한편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동추.

이백은 제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이런 씨벌!”

쾅!

동추가 던진 쇠사슬이 이백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뒤쪽의 단단한 돌 벽에 틀어박혔다.

“죽고 싶나, 늙은이?”

“이상한 말을 하는군. 너흰 나를 죽이러 온 거 아니었나?”

이백은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자기가 뭘 하러 왔는지도 잊었나 보군. 생긴 건 원숭이인데 머리는 닭대가리인 모양이야.”

“…….”

잠시간의 침묵.

그 후에 동추의 눈이 돌아갔다.

“씨벌, 내가 이 늙은이를 찢어 죽이지 않으면 성을 간다!”

동추가 오른손에 잡힌 쇠사슬을 채찍 휘두르듯 아래로 잡아끌었다.

쇠사슬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웅―하고 공기가 진동하고, 쇳덩이가 틀어박혔던 돌 벽이 쩍, 하고 갈라지며 파편을 쏟아 냈다.

무시무시한 광경.

무림 고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동추였다.

“안 됩니다!”

“대장이 목표물은 마차에서 죽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죽이면 대장님이 화내요!”

낭인 세 명이 동추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붙잡았지만, 동추의 신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쿵. 쿵.

동추가 낭인들을 온몸에 매단 채 묵직한 걸음걸이로 한 걸음씩 다가온다.

이백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무심한 얼굴로 아니, 오히려 비웃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상대를 경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소호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백이 균형을 잃을 정도로 왼손을 강하게 잡아당긴 것이다.

쒜에에엑!

“음?”

이백이 넘어질 뻔한 것과 동시에 노란 쇳덩어리가 창처럼 허공을 찔렀다.

이백의 소맷자락이 관통당했다. 가만히 서 있었다면 복부가 통째로 날아갔을 일격이다.

“피해……?”

동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움찔한 순간, 소호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이백의 허리띠 매듭과 앞섶의 단추들을 풀어 버렸다.

“실례합니다아!”

치렁치렁했던 비단 장포가 벗겨진 건 한순간이었다.

당황한 이백으로부터 이불 털 듯 겉옷을 벗겨 버린 뒤, 허리띠만 쏙 빼 냈다.

“어딜 도망가!”

동추가 손을 튕기니 뭉툭한 쇠사슬이 살아 있는 용처럼 꿈틀댔다.

한데 소매를 관통시켰던 비단 장포가 치렁치렁하게 감기며 쇠사슬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게 뭐야!”

화가 나서 소리치는 동추.

비단은 부드럽지만, 거칠게 꼬이면 톱질도 안 통할 만큼 튼튼한 직물이다.

소호는 씩 웃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바로 지금이었다.

“이쪽으로!”

소호가 기옥이를 업고 냅다 뛰고, 이백은 얼떨결에 같이 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미미와 주해도 같이 따라갔다.

멍하니 있던 낭인들도 당황하며 뒤를 쫓았다.

“잡아!”

“그물을 던져!”

소호는 본래의 길을 피해 울창한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합성이 들리고, 바람을 가르며 그물 몇 개가 날아왔다. 소호는 토끼처럼 폴짝거리며 날아오는 그물을 피했다.

몇 개는 나뭇가지에 걸렸고 또 다른 몇 개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으어어!”

등에 업혀 있던 기옥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왜 이 몸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

“기옥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쒜에에엑

소호는 보지도 않고 몸을 숙였다. 커다란 쇳덩이가 기옥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어어?”

쾅.

둔중한 폭음이 고막을 쩌렁쩌렁하게 흔들었다.

옆에 있던 아름드리나무의 몸통 부분이 마치 맹수가 물어뜯은 것처럼 떨어져 나갔다.

기옥이 다리를 덜덜 떠는가 싶더니 이내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더 이상 불만도 들리지 않았다.

“으응?”

소호는 불안한 마음에 등을 더듬어 보았다.

“휴, 젖지는 않았네.”

누구든 옷이 젖은 상태로 뛰고 싶진 않은 법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두머리가 있기 때문일까? 낭인들은 처음과 달리 연계된 움직임으로 차례차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억지로 붙잡으려하는 게 아니라 소호와 일행들을 끊임없이 한쪽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쫓기다가 궁지에 몰리면 바로 붙잡히게 될 것이다.

이젠 동굴처럼 추격을 끊기 좋은 지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다 함께 도망칠 수는 없어.’

도망가려면 뭔가 수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꼬마야. 이제 됐다.”

이백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를, 두고 가거라.”

“싫어요.”

단호한 이백의 제안처럼 소호의 대답 또한 명확했다

“삼촌들이 그랬어요. 위험한 상황일 때는 살려는 생각만 해야 한다고. 자존심이나 생각은 나중이래요.”

“뭐라고……?”

소호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질긴 아저씨네.”

쇠사슬에 칭칭 감겼던 비단옷은 이미 떼어 낸 모양이었다. 소호는 뒤를 쫓는 동추를 힐끗 바라본 뒤 마음을 굳혔다.

“미미야!”

“응?”

“여기부터는 길 알지?”

“으응.”

“주해 내려놓고 먼저 가!”

“어디로?”

“객잔!”

소호는 품 안에서 손가락 세 개만 한 종을 꺼내 미미에게 던져 주었다.

딸랑, 딸랑.

맑고 영롱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미미는 상황 파악이 빠른 아이였다. 더 이상 묻지 않고 곧바로 종을 들고 뛰었다.

“어어! 저거 어떡하지?”

“몇 놈은 쫓아가야지!”

우물쭈물하는 낭인들을 막은 것은 동추였다.

“시끄러워! 저 계집애가 누굴 데려오면 그것들도 조지면 될 것 아냐!”

낭인들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지.”

“퇴로나 차단해. 멍청이들아.”

“예이, 예이.”

낭인들이 주변을 둘러싼다.

소호는 혼란스러운 눈빛의 이백, 멀뚱히 서 있는 섭주해, 기절한 기옥을 한번씩 쳐다본 뒤,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지었다.

“히히, 걱정 마세요. 잘될 거예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했다.

나 자신과 상대방을 알고 있으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로울 일이 없는 법.

소호의 몸이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온 낭인에게로 한 걸음에 다가갔다.

낭인의 입장에선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껏 쫓기만 했지 상대방이 덮쳐온 적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그것도 열두 살짜리 소년이!

쉭-.

소호는 그 기세로 상대 낭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깜짝 놀란 낭인이 발차기를 피해 내고, 상체를 젖히며 후퇴했다.

그는 얼굴이 굳은 상태였지만 순식간에 허리에서 뽑은 검만은 망설임 없이 소호를 찔러 오고 있었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이었다. 찌푸린 얼굴,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입가엔 잔인한 미소까지 매달았다.

피할 필요도 없었다. 소호는 발을 교차하며 검날을 아래에서 위로 차 올렸다.

쩡―.

울리는 검극.

낭인은 설마 공격까지 막힐 줄은 몰랐는지 더욱 당황하며 다시 한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이었다.

소호는 후퇴를 넘어서는 속도로 낭인의 품까지 뛰어들었다.

발끝이 서로 맞물리는 순간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른다.

짧은 거리에선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낭인은 검을 옆으로 눕혀 방어에 들어갔다.

소호는 어깨를 뒤틀었다.

절묘한 각도로 정권의 궤도가 휘며 퍽, 하고 낭인의 옆구리에 소호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신음이 흘러나오며 낭인의 허리가 굽었다.

딱 적당한 높이.

펄쩍 뛰어오르며 몸을 한 바퀴 돌린 소호의 원앙각이 상대의 목덜미에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컥.”

제자리에서 스르르 쓰러지는 낭인이 주변 모두를 정지시켰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소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야비한 꼬마 놈! 무공을 익혔구나!”

동추가 외친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열두 살 소년이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을 단박에 기절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소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쓰러진 낭인의 허리에서 그물을 집어 들었다.

그물은 굵은 밧줄처럼 한쪽으로 돌돌 말려 있었는데 끝부분이 끈으로 묶여 있어서 쉽게 풀리지 않았다.

부웅―. 부웅―.

그물을 몇 번 돌려 본 소호는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그사이에 소호에게 다가온 동추가 무서운 얼굴로 대뜸 쇠사슬을 내던졌다.

창이 날아오는 듯한 파공음.

노리는 곳은 소호의 허벅지.

소호는 눈을 반짝이며 허리를 튕겼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상태였다.

소호는 양팔을 크게 휘저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뒤틀었다. 밧줄처럼 말려 있던 그물은 어느새 회오리 같은 나선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쩌엉!

쇠사슬이 거세게 진동했다. 동추가 던진 쇠사슬은 그 나선의 소용돌이에 붙잡힌 채 끝이 허공으로 치솟아 버렸다.

동추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던진 쇠사슬이 위로 튕겨 나다니. 그것도 자신의 무공으로!

“너……!”

동추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낭인들도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모르겠는가.

방금 전에 소호의 동작은 동추가 검은 대나무 통을 쳐낼 때 선보였던 불주연사(佛珠連射)와 움직임이 똑같았다.

“꼬마야, 솔직하게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동추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소호를 노려보았다.

“불주연사를 어디서 배웠느냐. 소림에서 배웠나? 아니면 지나가던 못생기고 거지 같은 땡중한테서?”

동추는 자신이 불주연사를 익히느라 고생한 오 년에 가까운 시간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불주연사는 흔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사부에게서 같은 무공을 익힌 거라면 사형제가 되어 버린다.

똑같은 무공을 익힌 사형제라면 이 녀석을 살려 줘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묵묵히 제거해야 할 것인가?

“음?”

반면에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불주연사가 뭐야?”

“뭐?”

“내가 방금 그물을 움직인 그거 말하는 건가?”

동추는 드물게 당황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 그래. 네가 방금 내 공격을 위로 쳐 낸 것 말이다. 그 기술을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냔 말이야.”

“아 그거?”

소호는 툭 내던지듯 대답했다.

“난 그냥 아저씨가 한 거 따라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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