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9화
제4장. 낭관(郎官)(4)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호는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동작을 따라한 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이었던 걸까?
그것을 평생 당연하게 생각해 온 소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순 거짓말쟁이 아냐?”
그렇기에 소호는 느닷없이 욕을 듣자 당황했다.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한 번 보고 따라했다고? 불주연사를? 그러니까 뭐냐. 네가 천하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천재다, 뭐 이런 거냐?”
“천재? 음, 우리 아버지가 난 천재가 아니라고 했어.”
“그런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몸이 십 년이 넘게 단련해서 익힌 걸…… 한 번 보고 익혔다고? 네놈이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냐?”
“동작을 따라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든 어떤 일을 처음 배울 때는 윗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 아니던가? 은자촌에서 더덕 캐는 법을 배웠을 때가 그랬고, 진구를 따라서 처음으로 소 등에 올라탔을 때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그물을 휘두른 것은, 소호에게 있어서 흔하디흔한 곡괭이질을 따라해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동추는 눈꺼풀을 사납게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쳤다.
“죽여 주마.”
공기가 울렁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커다란 쇳덩이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소호는 자연스럽게 한 발을 뒤로 빼면서 고개만을 돌려 피해 냈다.
쉭, 하고 섬뜩한 파공음이 귓가를 스쳤다.
‘관조(觀照)’라는 게 있다.
불교에서 쓰이는 말인데, 나 자신을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타인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을 뜻한다.
소호는 ‘관조’라는 단어의 뜻은 몰랐지만 이미 관조하듯 주변의 모든 정황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뒤쪽에 있던 낭인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추가 뭐라고 소리치면서 다시 한번 어깨를 흔든다.
쇠사슬이 수평으로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소호는 양반 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소호의 머리 위로 쇳덩이가 지나갔다.
날아간 쇳덩이는 공중에서 팡, 하고 마치 이불을 턴 것 같은 반동을 일으키며 이번엔 수직으로 다시 내리꽂혔다.
꽝!
둔중한 진동과 함께 주변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바닥엔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동추가 전혀 자제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고 있단 증거였다.
거구의 사내는 분노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느새 소호는 한 낭인의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동추가 찰나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쇳덩이를 날려 보냈다.
“이얍!”
소호는 장난스러운 기합성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아무런 형식 없는 동작이었지만, 움직인 순간이 매우 절묘했다.
쇳덩이는 소호를 맞추지 못했고, 그 뒤에 서 있던 애꿎은 낭인을 격퇴시켰다.
쩡―하고 조각난 쇳조각들만 사방으로 비산했다.
낭인은 검을 들어서 막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또다시 쇠사슬이 날아왔고, 이번엔 소호도 피할 수 없는 각도라서 다시 한번 낭인의 ‘불주연사’를 이용했다.
쩌엉!
쇠사슬이 위로 튕겨났다.
“제길!”
동추는 잔뜩 약이 올랐다. 마치 곰과 원숭이의 싸움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동추는 계속해서 쫓아갔고 소호는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잡았……!”
소호가 도망가는 동안에 몇 번은 바짝 따라온 낭인에게 붙잡힐 뻔했지만 소호는 그때마다 절묘한 동작으로 빠져나갔다.
“히힛. 못 잡는다니까.”
웃으며 외치는 소호였다.
허나,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소호는 열두 살 소년일 수밖에 없다.
소호는 그 순간 의기양양했고, 분명 방심하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까.
소호는 단순히 시간만 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너무 강했다.
낭인들이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쌓은 경험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거늘.
동추의 눈빛이 잔인해졌다.
그는 위협적으로 쇠사슬을 윙윙 돌리더니, 소호의 정면으로 그 쇳덩이를 던졌다.
‘동작이 단순해졌잖아?’
소호의 두 눈은 여전히 주변 상황을 관조했다.
사방 열 걸음 이내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는 중이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쇠사슬 따위는 사실 신경 쓸 공격도 아니었다.
처음처럼 돌돌 말린 그물을 이용해서 쳐 내면 그뿐 아니던가.
‘어?’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쇠사슬의 궤도.
얼핏 소호의 정면을 노린 것 같지만, 쇠사슬의 길이를 생각할 때 그 끝 부분에 걸리는 게 있었다.
‘혹시 할아버지랑 주해……?’
찰나의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외통수.
어느새 이렇게까지 몰린 걸까?
소호가 쇠사슬을 쳐 내면 끝이 위로 치켜 들릴 것이다.
그리고 동추는 습관처럼 아래로 내리꽂을 터.
그 충격 범위 안에 이백과 섭주해가 있었다.
절묘한 각도였다.
동추의 얼굴을 쳐다봤다.
냉혹한 표정 위로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분명 의도적인 노림수였다.
뻔할 정도로 단순했던 공격들은 이제껏 소호를 한곳으로 몰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안 돼.’
소호는 돌돌 말린 그물을 두 겹으로 겹친 뒤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다리에 힘을 주고, 어깨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잠시 후, 그물에 닿은 쇳덩이는 강력한 회전력으로 두꺼운 그물 밧줄을 터뜨려 버렸다.
파편이 튀어 올랐다. 마치 포탄 같은 위력이었다.
쇳덩이는 그물을 뚫은 채 그대로 직진했고, 소호의 복부를 강타했다.
“윽!”
소호가 낼 수 있었던 건 단말마의 비명뿐이었다.
그대로 튕겨진 소호의 육체는 무려 삼 장이나 날아가 무성한 수풀 속에 둔탁한 굉음을 내며 처박히고 말았다.
“소호 형!”
긴급사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섭주해였다.
섭주해는 당연히 소호가 공격을 피하거나 쳐 낼 줄 알았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소호고, 지금껏 봐 온 모습으로 볼 때 저런 어중이떠중이 낭인들에겐 당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소호는 굳이 멈춰 섰다.
잠시 섭주해 쪽을 응시한 뒤.
뭔가를 결심한 듯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낭인들의 공격을 순순히 받아 낸 것이다.
‘어째서?’
소호가 처박힌 곳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섭주해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명문 섭가의 후손으로서 단련된 두뇌는 금방 논리적인 답을 도출해 냈다.
받아 내야 하기 때문에 받아 냈다.
공격을 쳐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공격을 쳐 내면 치명적인 타격이 생기기 때문.
어째서? 그 순간 소호의 약점이 무엇이었기에?
이백과 섭주해, 그리고 기옥.
즉, 공격을 쳐 내면 이백과 섭주해, 기옥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을 제자리에서 받아 냈다는 결론.
‘이럴 수가.’
충격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 섭주해가 소리를 지르기 직전, 먼저 절규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안 돼!”
정신없이 뛰쳐나온 건 백발의 노인, 이백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노인은 자신의 죽음조차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성품을 어디로 벗어 던졌는지 완전히 냉정을 잃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소호의 상태를 확인한 뒤, 동추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어린아이에게 꼭 손을 대야 했느냐.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이백은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동추를 가리켰다.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네놈은 천벌을 받게 될 것이야!”
단호한 저주였다.
너무 확고해서 마치 곧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처럼 들렸다.
동추는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정신 상태였다.
한편 섭주해는 묵묵히, 쓰러진 소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상의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배는 나선형으로 갈라지고 피멍이 들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섭주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힘없이 내뱉었다.
“안 돼…… 안 돼…….”
섭주해는 지금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소호는 섭주해가 정한 마음의 기둥.
혈육 이상의 존재.
매번 폭주해 버리는 자신의 미친 저주를 막아 주던 수호신이다.
섭주해에게 있어서 소호가 쓰러졌다는 건 하늘이 무너진 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소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쓰러져 버리다니. ‘도대체 누구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흐흐, 이놈의 애새끼. 드디어 잡았다.”
섭주해는 고개를 홱 돌려 둔중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거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매사에 멧돼지처럼 씩씩거리기만 하는 무뢰한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 때문에 그의 수호신이 상처 입었다.
그 순간 섭주해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끼 새처럼 조심스럽고 두렵지만, 마음먹은 대로 날아갈 수 있는 하늘이 한가득 눈 안에 들어왔다.
“뭘 꼬나봐? 이 동네 애새끼들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어쭈? 그래도? 콱!”
피융.
거한이 위협하듯 들어 올린 손으로 뭔가가 날아와 퍽, 하고 꽂혔다.
“어?”
거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거기엔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당황하여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바닥에서 솟구친 쇳조각 십여 개가 벌떼처럼 날아들어 이미 난 상처를 후벼 파며 살 속으로 들어왔다.
“끄아아악!”
덩치가 크다고 해서 모두 대장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겁이 많고 고통에 약한 자도 있다.
깨진 검날들이 허공에 일렬로 늘어서서 손바닥을 둥그렇게 관통했다. 거한은 고통에 겨워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울부짖었다.
스륵.
섭주해는 마치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얼굴이 희고 눈매가 가느다란 열 살의 소년.
평생 손에는 붓밖에 쥐지 않았을 것 같은 소년의 눈동자에서 푸르스름한 귀기(鬼氣)가 감돌기 시작한다.
번뜩이는 시선 아래,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건 전부 당신들 탓이야.”
섭주해는 자신의 정확한 현재 상황을 인식했다.
수호신이 쓰러졌다.
즉, 그를 지켜 줄 존재는 이제 없다.
“내 탓이 아니야.”
이 모든 사건은 돼지 같은 거한과 들개 같은 낭인들 때문.
원망했다.
섭주해는 그들이 모두 꼴 보기 싫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날카롭게 날이 선 칼날로 모두 없애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르릉하고, 벼락이 치기 전의 하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오듯이 섭주해의 주변이 요동쳤다.
스릉.
웅― 웅― 웅―.
“어어?”
“뭐, 뭐야!”
쓰러진 낭인까지 포함해 모두의 숫자 삼십.
그들 모두의 허리에서 검이 스스로 뽑혀져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공기가 서늘해졌다.
하늘이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낭인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푸르스름한 귀기를 머금은 것은 섭주해의 눈만이 아니다.
허공에 떠오른 검에는 제각각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차가운 살기가 가득했다.
“귀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낭인들이 절규한다.
섭주해는 나직하게 웃었다.
이상했다.
예전에는 이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던 것 같은데, 이젠 허공에 떠오른 검들을 손가락 움직이듯 간단히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재밌게 느껴진다.
―나를 잡아.
떠오른 검(劍) 중에 하나가 눈앞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섭주해는 검날에 비치는 불빛 속에서 푸른 귀안(鬼眼)이 그를 응시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민은 잠시.
수호신을 잃고, 자제력 또한 잃어버린 섭주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상관없어.”
덥석 검을 움켜쥐는 섭주해.
태어나 처음, 괴물에게 몸을 허락한다.
섭주해는 그 순간 온 세상이 푸르게 물드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
남해검문 청조각의 성녀(聖女) 비전(秘傳).
검혼(劍魂)이 각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