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화 (149/686)

1권 20화

제4장. 낭관(郎官)(5)

동추는 자신이 낭인계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강자(强者)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어딜 가도 ‘몽도 패거리의 동추’라고 하면 꽤 알아준다.

한데 딱 거기까지다.

제법 이름을 떨친 강자. 그 이상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세상엔 낭인왕이나, 그 낭인왕 자리를 노리는 몽도 대장 같은 괴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달랐다.

마치 자연 세계에서 맹수들의 계급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듯,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동추뿐만이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낭인들은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겪어 보니, 동추는 열등감을 간직한 채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세상은 불합리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지만, 천재(天才)의 씨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저런 천재들이 태어나니까 노력하는 사람이 설 곳이 없다고 술 먹고 한탄도 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존재하는 실력 차가 사라지던가?

못난 놈의 푸념일 뿐이다.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지만 가끔 저런 걸 갖고 ‘태어나는 놈’이 있는 것이다.

그런 놈은 자연재해를 만났다 생각하고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넘치도록 배웠다.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오길 십수 년.

동추는 오늘, 하남 삼산현의 산골 구석에서 그의 세계관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존재를 만나 버렸다.

기껏해야 열 살, 많아야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귀찮은 꼬맹이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만나 보니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열 살짜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몸놀림. 쾌활한 말투에 항상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삼장법사를 따라간 산 원숭이가 이런 녀석 아니었을까 싶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을 기가 막힌 원앙각으로 쓰러뜨리는 모습은 감탄을 넘어 소름이 끼쳤다.

저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무림문파의 정점이라는 구파일방?

온갖 기재들을 돈으로 사서 다 모아 놨다는 오대세가?

동추는 확신했다.

세상 어딜 가 봐도 저런 녀석은 없다. 젖먹이 때부터 무공을 가르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기껏해야 열 몇 살짜리가 관조(觀照)의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으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힘으로 구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것도 대련이 아니라 실전 싸움에서?

이 녀석은 진짜라는 확신과 함께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심지어 그가 평생 동안 익힌 불주연사를 한번 보고 따라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녀석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해 보았다.

이 녀석은 누군가에게 불주연사를 익힌 사형제일 거라고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한데, 이 녀석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마치 한번 보면 따라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한 채로.

동추가 자제력을 잃은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이의 순수한 말은 그의 모래성처럼 나약한 자긍심을 뿌리부터 박살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칼 밥을 먹고 사는 낭인들 사이에도 불문율은 있다.

아이는 죽이지 말 것.

인정을 버리지는 말자는 건지, 아니면 저주와 관련된 미신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동추는 그런 불문율조차 잊어버릴 만큼 극도로 흥분했다.

전력을 다해 연이어 공격했음에도 아이를 잡을 수 없었다.

그 상황이 점점 더 동추를 궁지로 몰았다.

결국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뒤에 있는 동행들을 인질로 삼아 치졸한 공격을 하니 잡을 수 있었다.

기뻤다.

행복했다.

좀 치졸하면 어떤가.

그는 과거의 열등감 가득했던 자신을 극복해 낸 것 같았다.

‘흐흐, 이게 현실이야. 싸움터에선 더 치사한 놈들이 얼마든지 있어. 내 경험이 재능을 이긴 거다. 결국엔 내가 더 강하다고! 나도 강해질 수 있어!’

푹, 하고 살갗이 찢어지는 감촉을 느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부가 찌걱거렸다. 상처를 찢고, 벌리고, 뜯어냈다.

신경이 조각나는 듯한 고통이 오른쪽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온몸을 관통했다.

동추는 자신이 지옥에 간 건지, 아니면 아직 현실에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푸르스름한 귀광.

허공에 떠오른 검들이 사방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관없어.”

나직하면서도 짙은 결의를 담은 목소리였다.

고작 열 살짜리.

손오공 같던 천방지축 꼬마에게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던 서생 차림의 꼬마였다.

그 꼬마가 이번엔 귀신 들린 무당처럼 섬뜩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동네 꼬마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평범한 꼬마는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동추는 발악하듯 왼손으로 쇠사슬을 휘둘렀다.

생각하고 움직인 것이 아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발악하듯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날아간 쇠사슬은 허공에서 벼락처럼 내리꽂힌 다섯 개의 칼날에 꿰여서 바닥에 고정되어 버렸다.

동추는 작은 소년에게서 거대한 거미의 모습을 보았다.

앞다리로 먹잇감을 짓누르는 무당거미처럼, 위에서 내리 꽂힌 두 개의 검이 발등을 관통하고 팔목을 찔렀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박제된 곤충처럼 완벽할 정도로 꼼짝없이 붙잡힌 것이다.

남은 것은 마무리뿐.

꼬마의 옆에 수평으로 떠올라 있던 검이 그의 미간을 노려 온다.

쉭, 하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푸르스름한 귀기를 두 눈에 한 가득 담으며 동추는 정신을 잃었다.

째앵!

마지막 치명타를 가하려던 공격이 막힌 것은 섭주해에게 있어서 불행일까, 아니면 다행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추를 처리하려던 행위는 실패했다.

더벅머리에 다부진 몸.

원재료를 알 수 없는 가죽옷을 대충 걸친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힘줄이 잔뜩 돋아난 팔뚝 위로 칼날 두개가 역으로 돋아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마귀 같았다.

자세히 보면 손잡이와 칼날이 료(了) 자 형태로 붙어 있는 특이한 병기를 쥐고 있었다.

당랑도귀(螳螂刀鬼) 몽도.

낭인 패거리의 수장이 등장한 것이다.

“동추 이 멍청한 놈. 이런 꼬마를 죽이려 하다니. 이봐, 작은 친구. 얘가 벌은 좀 받아야겠지만 그래도 죽이는 건 안 돼. 우리 패거리의 행동 대장이거든.”

몽도는 느긋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뒤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게 다 무슨 꼴이야? 일 처리가 이렇게 어설퍼도 돼? 너희들 혼 좀 나야겠다?”

너무 느긋해서 장난스럽기까지 한 말투였으나, 주변에 있던 낭인들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허리를 쭉 펴고 긴장했다.

그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몽도는 이 심상치 않은 패거리의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어이? 일단 얘 좀 챙겨라.”

몽도는 동추의 발등과 팔목에 박힌 검을 뽑아 버린 뒤,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육신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낭인에게 밀어 버렸다.

막 다루는 것 같았지만, 사실 동추를 섭주해와 일직선으로 만들지 않는 각도였다.

“…….”

섭주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사방이 흐릿하게 보였고, 머릿속에선 ‘베어라. 갈라라. 잘라 내!’ 같은 섬뜩한 말만 반복해서 들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소호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로 손가락을 들어 동추를 가리켰다.

쒜에에엑.

챙!

허공을 가른 은빛 광채가 화살처럼 날아온 검을 멋들어지게 쳐 냈다.

“어허, 안 되지.”

몽도는 언제 움직였는지 모를 만큼 재빨리 원래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절도 있는 모습.

그의 편안한 자세에서 위압감이 흘렀다.

“죽이진 말라니까.”

“…….”

섭주해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스르릉.

쇠사슬에 박혀 있던 검까지 모조리 떠올라 섭주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몇 개는 수평으로 몇 개는 수직으로 떠오르더니 한 순간, 마치 사람의 손처럼 움직여 동추가 있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콰지직.

땅바닥에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거인이 손톱으로 할 퀸 듯한 자국이다.

몽도는 거인의 손아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베고, 쳐 내고, 솟구치고, 회전하고.

격투술인지 검술인지 모를 신묘한 무공을 사용했는데 모든 동작이 눈으로 쫓기 힘들만큼 빨랐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은광이 번뜩였다.

섭주해는 양손을 번갈아 휘둘렀다.

그때마다 수십 개의 검이,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주변 오 장 거리를 초토화시켰다.

땅이 패고, 바람이 갈라지며 근처에 서 있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굉음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수십 개의 검을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검술이 이제껏 존재했던가?

검들은 날아다니면서 때론 사람의 손처럼. 때론 살아 있는 거미처럼 몽도를 제압하려 했고, 거기서 흘러나온 여파만으로도 옆에 있던 낭인들은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후우!”

몽도와 섭주해.

모두의 어깨가 들썩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섭주해의 몸을 감싼 푸른빛이 점점 더 진해졌다.

“그르르르.”

살짝 벌어진 섭주해의 입에선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자세히 보면 눈의 초점도 사라져 있었다.

“호오?”

몽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것 봐라? 이성을 잃은 거야?”

“그르르르.”

콰드득!

이성을 잃은 만큼 힘은 강해지는 걸까?

다섯 개씩 움직이던 검이 이젠 제각각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쒜에엑.

검 십여 개가 연속으로 사방 곳곳으로 쏘아졌다.

촤르르륵.

다섯 개씩 세 쌍의 검들이 단단한 돌바닥을 두부처럼 으깨며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냈다.

몇몇 낭인들이 어떻게든 다가가려 했으나 모두 어깨와 가슴 등을 난자당한 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허……? 이것 참.”

몽도는 혀를 내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입고 있던 가죽옷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고, 뺨에는 얇은 실선이 몇 개나 그어져 있었다.

“후우, 힘들어라. 괴물 같은 꼬마일세. 이래선 안 되겠는데?”

몽도는 바닥에서 신음하는 낭인들을 힐끗 바라보았고, 일관된 특징을 발견했다.

“그래도 동추 빼고 다른 사람은 죽일 생각이 없었나 봐?”

자세히 보면 모두 섭주해의 공격으로 칼에 베이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씩― 웃음 짓는 몽도.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낭인 한 명의 뒷덜미를 덥석 잡고, 마치 돌멩이 던지듯 한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으아아악!”

섭주해는 손가락을 들어 낭인을 가리켰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낭인이 날아간 방향에는 소호와 기옥, 그리고 이백이 있었던 것이다.

당황하는 이백.

폭풍처럼 몰아친 검들은 낭인을 베고 꿰뚫었으며, 이백의 어깨 또한 베어 냈다.

“크윽!”

핏물이 뿜어졌다. 이백은 탄식했다.

“제어할 수 없는 검귀인 건가!”

지금 이 순간 섭주해에게 이성이란 없었다.

그저 움직이는 모든 것을 베어서 쓰러뜨릴 뿐.

감당할 수 없는 검혼(劍魂)은 악귀와 다름없는 것이다.

“역시.”

흠칫, 놀란 섭주해의 몸이 황급히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몽도는 순속(淳俗)의 속도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으랏챠!”

뻑―하는 소리.

섭주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이야. 방어도 되네? 볼수록 신기한걸?”

몽도는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채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섭주해가 기침을 쿨럭이며 일어섰다.

근처에 있던 검 세 개가 배를 감싸 주지 않았다면 걷어차였을 때 크게 다쳤을 것이다.

몽도의 속도는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크를르…….”

섭주해의 입에서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섭주해가 손가락을 움직였고, 검 다섯 개가 몽도를 노리고 쏘아졌다.

챙! 챙! 챙!

허나 몽도는 제자리에서 몇 번 팔을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말은 못하는 거지? 귀신 들린 거랑 비슷한 건가 보네?”

몽도는 웃음을 그치고,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그럼 죽여도 되려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찰나의 순간 은빛 광채가 일직선으로 쭉 늘어났다.

섭주해는 남은 검 모두를 방벽처럼 세웠으나, 몽도는 속도만으로 모든 방벽을 돌파하고, 섭주해의 등 뒤를 점했다.

“잡았다.”

씩 웃는 웃음이 이렇게나 섬뜩할 수 있을까?

터져 나온 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몽도의 몸이 회전하고, 은빛 칼날이 섭주해의 목을 베어 내려는 그 순간.

쿵.

“거기까지.”

섭주해와 몽도의 사이로 짓쳐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몸집은 작지만 기괴해 보일 만큼 튼튼한 근육을 지닌 말이 쿵, 하고 바닥을 짓밟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언제 사이로 뛰어들었는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여유를 잃지 않았던 몽도조차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푸르륵―.

“워워, 진정해 삭풍(朔風). 오랜만에 싸움이라 흥분했어?”

얼핏 장난스러운 목소리.

쾌활하고 여유 있는 모습은 얼핏 몽도와 닮은 듯 보이나, 그 속의 내면은 정반대인 사람이다.

이성을 잃은 섭주해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사람은 소호 일행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풍운객잔에서 일하는 사람.

언제나 소호와 아이들을 챙기는 은자촌의 젊은 삼촌.

진구.

적룡기마대의 막내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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