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화 (150/686)

1권 21화

제4장.낭관(郎官)(6)

“우우우.”

거친 산길을 내달리는 미미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소녀의 움직임은 빨랐다.

땅을 박차고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멀어졌다. 그럼에도 은자촌까지는 일각이나 더 가야한다는 점이 미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소호 오라버니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또 주해, 기옥이는 무사할까. 새로 만난 이백 할아버지는 또 어쩜 좋아…….”

“우우.”

여러 가지 상념들이 계속 미미를 괴롭혔지만, 미미는 소호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은자촌 삼총사의 맏이이자 뭐든지 해내는 믿음직한 오라버니가 아니던가. 지금은 울 게 아니라 힘을 낼 때다.

미미는 소매로 눈을 슥슥 닦은 뒤 영롱한 소리를 내는 방울을 오른손으로 살짝 움켜잡았다.

쿵. 쿵. 쿵.

“우우?”

그 순간 미미는 좌측의 대나무 숲에서 굉음을 울리며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새들이 푸드덕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이 좌측 숲에서 뛰쳐나와 우측 숲으로 도망쳐갔다.

잠시 후, 좌측 길목에서 마치 포탄이 터지듯 대나무 몇 개가 부러지며 튕겨져 나갔다.

“꺅!”

미미는 놀라서 멈춰 섰다.

거대한 그림자가 대나무를 부수고 튀어나와 길목을 막았다.

씩씩거리는 숨소리. 둔중하게 울리는 발걸음.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새카만 털가죽이 위압적으로 꿈틀거린다.

쿠워어어어―!

삼산현 맹수들의 지배자. 송곳니를 드러낸 거대한 곰이 미미의 앞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

진구는 자신의 애마 삭풍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섭주해가 당할 것 같아서 달려들긴 했지만 아직 상황 파악은 제대로 못한 채였다.

적부터 살펴보니 상처를 입고 바닥에 뒹구는 낭인들이 절반, 아직은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나머지 절반이었다.

낭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제법 관록이 있어 보였다. 함부로 덤비지 않고 이쪽의 실력을 재 보려고 한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이번엔 아군을 살펴봤다.

귀신들린 소년이 하나. 못 보던 노인 한 사람. 기절한 기옥.

그리고…… 상처 입고 쓰러진 소호.

“뭣?”

진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호를 재차 확인하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크으으.”

진구가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으어어, 큰일 났네. 난 형수님한테 죽었다……!”

진구는 부들부들 떨다가 이백을 바라보았다.

“어이, 거기 영감님. 소호는 괜찮소? 무사합니까?”

진구의 장점은 낯선 사람일지라도 친근하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백은 진구를 잠시 경계하듯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겉으론 괜찮아 보이지만…… 잘 모르겠군. 의원한테 데려가 봐야 알 것 같네. 아까 상처를 입을 때 난 소리가 너무 컸어.”

“숨은 쉬고 있소?”

“살아 있네.”

“상처가 난 부위는 어디요?”

“복부와 명치 부근에 공격을 당했다네.”

진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 소호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몽도를 노려보았다.

“니들이 감히 우리 조카들을 건드려?”

“……조카?”

“그래. 이 아이도, 저 아이도 다 내 귀한 조카님이시다.”

몽도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넌 누구지?”

“알 거 없어. 여기서 중요한 건, 네가 내 조카님들을 상처 입혔다는 거고, 그 일에 화를 낼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

“닥쳐.”

마치 한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듯, 진구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뿜어지는 기백.

진구에게서는 강대한 기운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낭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단 한 사람의 표정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기온이 뚝 떨어진 듯 오금이 저려왔던 것이다.

“넌 네가 감히 어딜 침범했는지도 모를 테지. 그 무지함의 대가가 너의 목숨일 수도 있다는 걸 몰랐나?”

진구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늦었어.”

히히힝―.

진구는 흥분해서 투레질을 하는 삭풍의 목덜미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몸집은 작지만 힘은 장사인 그의 애마가, 주인의 감정을 느끼고 함께 화를 내고 있었다.

“크르릉―!”

급변하는 공기를 느낀 걸까.

검혼에 잠식당한 섭주해가 갑자기 으르렁대며 움직임을 보였다.

웅웅―떨리며 삼십 개의 검날이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외치는 듯한 살벌함.

낭인들이 술렁거렸다.

“가만히 있어. 인마.”

그 ‘검혼’을 상대로 진구의 대응은 너무나도 간결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섭주해의 뒷목을 가볍게 툭 치는 것만으로 제압한 것이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검들이 일제히 바닥에 다시 떨어졌다.

“으음.”

몽도가 신음한다.

방금 목격한 그 ‘한 수’만으로도 그는 승리를 포기해야 했다.

“정말로…… 대화의 여지는 없는 거요?”

“그래.”

“나 참. 흑수가 웃돈을 얹어 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군.”

몽도도 걸물은 걸물이었다.

그는 이내 싸움을 결심한 듯 낭인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낭인들 역시도 주변을 포위하며 싸움을 준비했다.

“쉽게 죽어 주진 않을 거요.”

“거짓말하지 마. 도망가려고 눈치 보고 있으면서.”

“도망이라. 글쎄.”

몽도가 만세라도 외치듯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패배가 당연한 싸움을 하는 녀석치곤 지나치게 평온하다 싶어 뭔가 의구심이 들려는 그때.

쾅―하고, 주변 시야가 흙먼지로 가려졌다.

츠츠츠츠―.

맹렬한 속도로 쏘아진 검은색 철시(鐵矢)가 바닥에 꽂힌 상태에서도 회전력을 잃지 않고 빙글빙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걸 철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철창이라 불러야 알맞을 크기였다.

등 뒤에서의 일격이었다.

거리는 대략 이백 장 정도.

들려온 소리로 추정해 보면 그 정도 거리였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숲이었다. 바깥과는 울창한 나무와 바위들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새카만 화살은 진구를 향해 돌진해 왔다.

망설인 기색도 없다. 공교롭게도 주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몇 개 잘려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튀어 오른 돌조각과 파편들이 주위에 흩뿌려지고 안개처럼 피어오른 흙먼지는 허공을 날아 하늘까지 뿌옇게 만들었다.

마치 폭발의 중심지 같은 모습.

그 안에서 진구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삭풍과 함께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긴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징―하고 진동이 뼈를 울린다.

단단한 손바닥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십(十)자 칼날 작살 모양의 일체형 장창.

‘적룡창(赤龍槍)’이 움직였다.

북로전쟁 최고의 공포였던 적룡기마대의 일익이 현신한 것이다.

“포격이라…… 옛날 생각나는데?”

진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땅에 박힌 철시를 바라본다.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땅바닥이 움푹 패여 그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갈라져 버렸다.

이런 화살은 어떻게 쏘는 걸까? 사람의 힘으로 쏘기는 불가능하니 처음 상상대로 화포에다가 넣고 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뭐, 그건가?”

흙먼지 따위가 진구의 감각을 가릴 수는 없다.

몽도의 뒤로 몰려드는 낭인들. 진구가 아니라 쓰러진 소호와 이백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하는 몽도. 모두 단번에 알아챘다.

“니들, 전투 경험이 많다는 거지?”

진구의 입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다.

낭인들이 일제히 집어 던지는 그물들을 보고 즐거운 듯이.

“귀엽네.”

쩡! 하는 굉음이 흙먼지를 꿰뚫었다.

한순간이었다.

적룡창이 몽도의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꿰뚫는 것에 특화된 십자 형의 작살은 몽도가 얼굴이 시뻘게질 만큼 당랑도에 힘을 줘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다 정확하게는 몽도의 가슴으로, 창날의 첨단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진구가 왼손의 고삐를 한번 흔들었다.

히히힝―.

삭풍이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빠각, 하는 소리가 울린다. 몽도가 속에 받쳐 입은 사슬 갑옷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갑옷 정도로는 못 막지.”

진구는 창 손잡이를 옆구리에 붙인 채, 말과 한 몸이 되어 창끝을 들어 올렸다.

일기관천(逸驥貫穿).

마치 낚시라도 하듯 몽도의 몸을 창끝에 꿴 채로 들어 올려 그대로 밀어붙였다.

뒤에 서 있던 낭인 십여 명이 몽도를 붙잡아 주려다 졸지에 뭉텅이로 엮여 뒤편 나무둥치에 들이박았다.

꿍! 하고 둔중한 굉음이 울렸다.

제일 뒤편에 있던 낭인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구는 다시 한번 삭풍에게 박차를 가했다.

“끄아아악!”

드드드드―.

나무둥치가 뿌리 채 뽑혀 들리기 시작했다.

삭풍은 힘이 장사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낭인들은 공포에 질렸다.

과거 장판파의 장비가 이러했을까. 진구는 의심의 여지없이, 혼자서 다수를 압도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 잔혹한 손속.

가장 무서운 건 상대가 상처 입는 공격에 망설임이 없다는 점이다.

사방에서 뼈가 부러지는 파열음과 고통스러운 비명이 합주를 이루어도 진구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콰드득.

“끄으…….”

때마침 나무둥치가 뽑혀 나가며 낭인들은 간신히 목숨을 유지한 채 뒤로 튕겨졌다.

“쿨럭, 쿨럭…….”

일격에 무력화되어 버린 몽도는 상처 입은 눈으로 진구를 노려보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결과는 명백했다.

모두가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멀쩡히 서 있었다.

“괴물……!”

몽도의 한 마디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는 양손을 다시 한번 번쩍 들며 외쳤다.

“도망가!”

그 말과 함께 가장 먼저 도망친 것도 몽도. 낭인들은 상처 입은 자들을 버리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만 달려서 숲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게 당연하다는 것일까.

남겨진 자들은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진구는 혀를 차며 적룡창을 허공에 수직으로 휘둘렀다.

쩡! 하고, 다시 날아온 철화살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쯧쯧.”

진구는 생각했다. 의리 따윈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다. 이래서 낭인들이 들개 취급받는 것이다.

“자네 대단하군……!”

뒤로 물러나 소호를 보호하던 이백은 진구에 대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쫓아가지 않아도 되겠나? 낭인들은 자신들을 방해한 자에겐 꼭 복수를 한다던데. 후환이 있을지도 모르네.”

“괜찮소. 숲 안쪽으로 도망쳤으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그들이 여우를 피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는 말이오.”

진구는 그 이상 답하지 않은 채 삭풍의 등에서 내려 소호에게로 달려갔다.

“으음, 다행히 심하진 않은데.”

진구는 소호의 눈꺼풀을 한번 까 본 뒤, 손과 발을 주물러 주고 옷을 찢어 가슴부터 하복부까지를 꼼꼼히 감싸 주었다.

그러고 나서 기옥과 주해는 삭풍의 등에, 소호는 자신이 직접 등에 업었다.

“난 이제 마을로 돌아갈 건데. 영감님도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나도…… 말인가?”

이백은 충격적인 모습을 연이어 본 탓에 조금 멍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알겠네. 부탁하지.”

“그럼 갑시다.”

진구는 숲의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전장에는 낭인들의 신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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