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23화
제5장. 중립(中立)의 땅(1)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한적한 산길에서 두 사람이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흥얼거리는 노래 곡조는 태평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속편한 민초들의 노래였다.
두 사람은 엄마와 딸, 혹은 나이 차가 좀 있는 언니와 동생처럼 보였는데, 특히 먹칠이라도 한 듯 새카만 비단옷이 눈에 띈다.
어린 쪽은 십 세 전후, 나이가 많은 쪽은 이십 대 후반 정도일까.
두 사람 모두 지나가던 사람이 백이면 백, 뒤돌아볼 것 같은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언니, 다리 아파. 배고파. 졸려.”
두 사람 중 나이가 어린 쪽이 다른 한쪽의 허리를 당기며 칭얼거렸다.
“조금만 참아. 진진(珍珍).”
“그렇지만 다리 아픈걸?”
“업어 줄까?”
“그건 싫어, 부끄러워.”
여인의 이름은 진하(珍河).
진진과 똑같이 새카만 비단옷을 입었는데, 남성적인 바지와 장포를 입고 있었다.
물론 남자 옷을 입었다고 해서 타고난 미모가 가려지지는 않았다.
“그럼 참아 봐.”
“너무해. 왜 우린 마차가 없어?”
“목적지에 도착도 안 했는데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거든. 일 끝내면 편하게 가자.”
“싫어어. 힘들어어!”
진하는 칭얼대는 동생을 다독이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 각 정도 걸었을 때, 그녀들이 온 방향에서 수레 한 대가 다가왔다.
“거기 아가씨. 미인이구만?”
흑석촌 방향에서 온 중년의 사내였다. 육포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두 눈에 욕망이 가득했다.
“커흠, 태워 줄까? 어디까지 가?”
“……이 근방에 화전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화전촌?”
사내가 대번에 깔보는 듯한 얼굴로 변했다. 픽, 하고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뭐야, 거기 사는 것들이랑 친척이라도 돼? 그런 곳을 왜 가? 것도 애까지 데리고.”
“볼일이 있어요.”
“거참. 내가 원래 그쪽 것들이랑은 상종도 안 하는데 말이지. 아가씨는 특별히 태워 줄게. 화전촌은 여기서 직진해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나온다고.”
“그래요? 가깝나 보죠?”
“흐흐, 그렇지. 그래도 걸어서 가려면 피곤한 거리야. 수레에 안 타면 힘들걸?”
진하는 진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네요.”
“대신 공짜로 태워 줄 순 없지.”
“차비는 낼 거예요.”
사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젊은 아가씨가 뭘 좀 아네. 일단 앉아 봐. 애는 뒤에 태우고.”
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단도를 꺼내 사내의 목 밑에 들이밀었다.
“자리에는 우리 둘이 앉아서 갈 거예요.”
뜬금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사내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 눈동자를 굴렸다.
“무, 무슨 짓이야?”
“걱정 마세요. 차비는 낼 거예요.”
“……얼마를 낼 건데?”
“이 단검 크기만큼.”
진하는 환하게 웃었다.
***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마차에서 막 내리던 삼산현 첨사(僉司) 공손책은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사건 현장은 좀 더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법이다. 동네 시장처럼 시끄러워서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첨사 나리. 오셨습니까?”
포두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시형도(屍形圖)를 든 채 난감해하며 인사했다.
“여긴 사람 통제 안 하나?”
“죄송합니다. 평소에 장사치들이 이용하는 길목이라 사람들이 점점 모여드는 탓에…….”
“나 참, 시체가 뭐가 신기하다고 다들 저러는지.”
공손책은 혀를 끌끌 차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쪽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포졸들이 막고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지 고개를 쭉 빼고 안쪽을 넘겨다 보는 모양새다.
그 한가운데에 넋이 나간 얼굴로 울부짖는 소년과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 보였다.
공손책은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하는 건 아니군.”
“예?”
“가끔 가족들이 범인일 때가 있으니까. 확인은 해 둬야지.”
공손책은 시형도를 건네받은 뒤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사건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책이 들어서자 사람들을 막고 있던 포졸들이 긴장해서 자세를 꼿꼿하게 가다듬었다.
첨사라고 하면 정 오품에 안찰사 중에서 중급 관리에 불과하지만, 말단 포졸들에게는 하늘같은 위치인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득한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얌전히 누워 있는 시신을 중심으로 주변이 흥건하게 피로 젖어 있었다.
“일격에 죽었군. 고통스러울 시간도 없었겠어. 보통 솜씨가 아닌데?”
공손책은 중년 사내의 시신이 깨끗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른 상처는 없었지?”
“예. 턱밑을 꿰뚫은 상처를 제외하곤 깨끗합니다.”
공손책은 손가락으로 시신의 턱밑 상처를 벌려서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면 아래턱, 혀, 윗 턱에 머릿속까지 관통당했겠어. 사인이 맞아. 흉기는 손바닥만 한 단검 같은데. 혹시 살수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첨사 나리. 단검으로 머리뼈를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 그것도 반항의 흔적도 없이 일격에.”
“한데 살해당할 만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은 이런 산골 마을에서나 유세를 조금 떨 정도의 상인에 불과해서……. 고급 살수에게 의뢰를 당할 만한 일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은 누가 발견했나?”
“두 시진 전에 지나가던 상인과 표사들이 발견했습니다.”
공손책은 한쪽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모여 있는 사내들을 힐끗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태양의 위치와 자신들의 짐을 번갈아 응시하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다.
“저쪽도 아냐.”
“예?”
“유족들은 뭐라던가?”
포두가 대답하기 직전, 포졸들에게 붙잡혀 있던 소년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 시신을 향해 돌진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이!”
“이 녀석, 들어오면 안 돼!”
“놔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리가 없어! 아버지이이!”
아이는 계속 버둥대다가 공손책이 양손으로 얼굴을 붙잡자 그제야 조금 조용해졌다.
“네 아비의 원수는 내가 꼭 잡아 주마. 그러니 조용히 좀 해.”
“이게 다 화전촌 때문이야!”
“뭐라고?”
“그 거지새끼들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이 꼴이 된 거라고! 하필 백송촌으로 배달을 가야 하니까. 그 거지새끼들 집 근처를 지나가다 이렇게 되신 거라고!”
공손책은 울먹이는 아이치고는 말투가 참 거칠고 독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말 속에 들어 있는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거지새끼들이 누구냐. 삼산현 주변에 거지 소굴이 있던가?”
“있어! 화전촌 새끼들!”
공손책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전촌……?”
“분명 백송촌 가는 길목에서 옆으로 빠지면 화전촌이 있긴 합니다만.”
“나도 알고 있네. 객잔이 있는 곳이지. 그런데 그 마을이 존재한 지는 오래됐는데 지금껏 아무런 문제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강도 짓 같은 걸 할까?”
아이는 계속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화전촌이 한 짓이라고 주장했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와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꼭 범인을 잡아 달라고 말하며 겨우 데리고 갔다.
아이의 이름은 아석이었다.
“강도 짓…… 강도 짓……?”
공손책은 왠지 입안에 걸리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어 보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시신의 발쪽으로 향했다.
“역시.”
“첨사 나리.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너무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어. 분명 이 남자를 죽인 건 고급 살수 수준의 살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 목적까지 꼭 암살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 살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강도 짓을 할 수도 있는 거잖나?”
“예?”
“이 발뒤꿈치를 봐. 끌려서 흙이 많이 묻어 있지?”
“그렇……군요.”
“흉수는 이 사내보다 몸집이 작고 힘도 약한 사람이었어. 발뒤꿈치가 땅에 질질 끌려야 이런 흔적이 남지. 그런데 굳이 시신을 관도 한쪽 구석으로 끌고 와서 버렸단 말이야? 심지어 턱밑에 박았던 단검도 여기서 뽑은 모양이야. 피가 저쪽 관도에는 안 묻어 있잖아? 여기서 눕힌 채로 뽑았으니까 피가 이렇게, 부채꼴로 뿜어진 거라고.”
공손책은 사내의 머리 쪽에 앉아 관도 쪽을 바라보며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럼 당연히 왜 본래 죽인 곳에서 단검을 뽑지 않았을까? 피를 묻히면 안 되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결론은 흉수는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거야. 여기 이 사내가 원래 타고 가던 마차를 말이야.”
공손책은 확신했다.
살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 이 사내는 불쌍하지만 범인의 목적이 아니다.
“즉, 마차를 뺏기 위해서 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확신하네. 그 마차 뒤에 뭐가 들었었는지도 궁금하군.”
“알아보겠습니다.”
포두는 꽤나 성실한 사내였다. 공손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 포졸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심상치가 않군. 얼마 전에 하남 포정사께서 낭인들에게 습격당했던 것도 여기로 기억하는데. 왜 최근 들어 이 지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화전촌이 범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연관이 전혀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멍청이다.
그와 동시에 평소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이백 포정사가 얼마 전에 그에게 직접 찾아와서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삼산현의 화전촌 인근 치안을 잘 살펴 달라고. 그곳을 자유롭게 놔둘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뭔가가 있어. 분명 심각한 뭔가가.’
청백리의 상징처럼 살아오던 이백이 평생 무언가를 부탁했던 일이 있었던가?
그런 사람이 부탁을 했다.
그것도 누가 들어도 이상할 만큼 의미심장한 내용의 부탁이다.
공손책은 그의 복잡한 마음처럼 흔들리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했던 날이 지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했다.
***
객잔을 향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는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도란도란 나누는 말소리가 들린다면 더욱 좋다. 손님이 둘 이상이라는 뜻이니까.
평소에 오매불망 흥미로운 사건만을 기다려 오던 소호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야 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실수가 현재의 발목을 잡는다고나 할까.
오늘의 소호는 활기차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적의 소년이 아니었다.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 소호.
과거의 빚을 청산해야만 하는 빚쟁이 소호였다.
“저기…….”
“안 돼.”
소호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객잔 한구석.
병아리 같은 밝은 연노란색 경장을 입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여인이 있었다.
젊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이는 삼십 대 중반. 남들이 처음 보면 소호에게 누나 아니냐고 종종 놀랄 정도의 동안이다.
버드가지처럼 가는 팔목을 지닌 여인은 단아한 자세로 서찰을 읽고, 그 밑에 세필로 뭔가를 적어 나가는 작업을 계속해서 해 나가고 있었다.
서찰이 두껍께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그녀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은 듯 보였다.
소호는 힐끗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서 몸이 들썩거렸다.
“손이 쉰다?”
“윽, 하고 있어요.”
“나가서 놀기 싫지?”
“아닙니다!”
소호는 씩씩하게 걸레질을 다시 시작했다.
누가 쉬었다는 것인가.
잠시 숨을 골랐을 뿐이다.
“빨리 끝내고 빨리 노는 게 낫지 않겠어?”
“네. 그렇지만 객잔 벽을 전부 닦는 건…… 너무 많아요!”
소호는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말대답을 하네? 지금 잘했다 이거지?”
“아닙니다!”
그녀는 한 장의 서찰을 마무리한 뒤 향긋한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새끼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기껏 귀하게 키우면 뭘 해. 몰래 나갔다가 다쳐서 업혀 오는걸.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게다가 주해까지 쓰러졌잖아. 큰 형은 그래선 안 돼. 동생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든가. 아니면 끝까지 지켜 줄 수 있어야지.”
“죄송해요…….”
그 부분에 있어선 소호도 책임을 통감하는 부분이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소호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소호야. 엄마는 많이 걱정했어.”
“…….”
“이리와.”
소호의 엄마.
진휘연의 품에 안긴 소호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래 봤자 열두 살이었다.
괜히 눈과 코가 매운 느낌이다. 소호는 혼나고 기죽었다가 사랑을 받는 과정에서 격해지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가 소호 미워서 그러는 게 아냐. 걱정돼 그러는 거지. 네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지만.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앞으로 소호가 위험한 일은 다신 안 했으면 좋겠어. 엄마 마음 알지, 우리 소호?”
“……네, 알아요.”
“그래.”
진휘연은 따뜻한 품으로 소호를 안아 주고, 등을 토닥거려 준 뒤 말했다.
“자, 그럼 다시 일해.”
“……우씨!”
“약속은 약속이니 벽은 다 닦아 두고 놀아야지.”
“쳇, 알았어요.”
소호는 코와 눈을 소매로 슥슥 닦은 뒤 걸레를 다시 집어 들었다.
괜히 부끄러워서 벽을 더 박박 닦았다.
진휘연은 작게 웃은 뒤 서찰과 세필을 챙겨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들, 손님이 오면 인사는 해.”
“네. 알았……. 어?”
소호가 귀를 의심하며 당황하는 사이, 말발굽 소리가 객잔 앞에서 멈추는 게 들렸다.
소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고민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소호는 걸레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식사하실 거예요? 아니면 주무시고 가실 건가요?”
너무 급하게 이것저것을 물어본 것일까?
수레에서 내린 손님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인사해 주었다.
“안녕, 꼬마야.”
소호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손님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소호 또래의 어린 소녀, 한 명은 성숙한 여인.
그리고 그 둘은 똑같이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