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화
제5장 중립(中立)의 땅(4)
“정말로 못 봤어? 잘 생각해 봐. 꽤나 특징 있는 얼굴이잖니?”
소호는 진하의 분위기가 처음과 다르다고 느꼈다.
‘으으, 뭐지? 뒷목이 서늘해. 등이 간질간질한데?’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로 못 봤는걸요. 그런 얼굴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최근에, 열흘 내로 못 보던 남자들이 온 적 없니? 여기 풍운객잔에 말이야.”
“으음, 없어요.”
진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정말?”
“네. 정말로.”
“흐응?”
진하가 오른손으로 소호의 어깨를 붙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톡. 톡. 톡.
소호는 어깨 위에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랬구나. 계속 물어봐서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소호는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내 동생이 조금 걷고 싶어 하는데 이 근처에 산책을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아, 그거라면!”
옆에 있던 강운찬이 나섰다.
“제, 제가 한 군데 가르쳐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강운찬은 순박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호의를 표했다.
“그래요? 어디가 좋은가요?”
“우선 객잔 뒷길로 가면 성산 무호쪽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좋습니다. 특히 더덕이 많아서 걸을 때 느껴지는 향이 좋아요. 그쪽으로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질 것 같달까…….”
“거기로 갈게요. 괜찮아 보이네요.”
“저, 저기, 길을 모르실테니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다리가 불편한 분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죠. 동생이랑 찾아볼게요.”
“예? 아, 예…….”
강운찬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펑퍼짐한 옷 때문에 안 보이는데도 용케 알아본 모양.
괜스레 시무룩해진 강운찬을 뒤로 한 채 진하가 진진을 불렀다.
“진진, 다녀오자.”
“응!”
진하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살랑살랑. 검은색 비단 옷자락이 부드러운 어깨선 너머로 흔들린다. 진하가 사라지자 강운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그제야 숨을 크게 쉬었다.
“하아. 긴장되네.”
“뭐가 긴장돼? 운찬 삼촌?”
“예쁘잖냐. 난 예쁜 여자만 만나면 잔뜩 긴장되더라.”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예쁜 건 둘째 치더라도 여자를 상대로 말할 때 긴장된다는 것 자체가 소호에겐 별세계 이야기였다.
“저 정도면 예쁜 거야. 그것도 엄청.”
“그렇구나. 예쁜 거구나.”
“어디서 온 걸까? 계속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데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그냥 자매끼리 여행 다니는 거 아닐까?”
“사연이 있어 보여. 항상 잘 안 웃고 뭔가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잖아?”
“그래?”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운찬은 탁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마치 빚이 있는 집안의 딸들처럼. 아니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을 돌볼 여력이 안 되어서 먼 길을 떠나기 시작한 거야! 멀리 사는 친척을 찾아가는 거지!”
“근데 여기서 어떤 남자를 찾고 있었잖아?”
“그게 바로 친척!”
강운찬의 목소리에는 반드시 친척이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친척이 이 은자촌에 산다고?”
“바로 그렇……! 아니, 백송촌이나 흑석촌에 살 수도 있지!”
소호는 불신의 눈빛으로 강운찬을 바라봐 주었다.
“음, 저 누나는 초상화의 그 남자랑은 안 닮았던데?”
“먼 친척!”
“으이그.”
“아니면…… 집안의 원수?”
강운찬의 상상이 점점 더 신파극 같은 느낌을 띄기 시작했다.
“난 전혀 모르겠어.”
“녀석. 넌 아직 어려서 그래. 인마.”
“그런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호는 딱히 말로 말하지 않았다. 강운찬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아 참, 그건 그렇고 소호야. 아까 주해가 찾아왔었어.”
“어? 정말?”
소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걸어 다녀도 되는 거야?”
“우 어르신이 괜찮다고 하셨나 봐.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진작 말해 주지! 가 볼게! 지금 가 볼래!”
소호는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오라는 강운찬의 말을 뒤로한 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주해가 회복되었다니. 정말 다행인 일이다.
소호는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리에 점점 더 힘을 실었다.
***
“젠장!”
당랑도 몽도는 자신이 들고 있는 두툼한 쇳덩이 두 개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지금 당랑도를 들고 있었다.
료(了)자 모양으로 생긴 손잡이에 무기 부분이 역수(逆手)로 만들어져 있다는 게 똑같다.
헌데 칼날 부분은 전혀 달랐다.
예전의 매미 날개처럼 날렵한 유선형의 동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젠 두꺼운 묵철(墨鐵)로 도끼처럼 육중한 칼날을 달아 놓은 것이다.
‘사람이 기절한 사이에 이런 만행을……!’
당랑도는 그의 성명병기.
당연히 그가 익힌 무공의 위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몽도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다. 헌데 이젠 아니다.
무게가 이미 열 배가 넘게 무거워져서 기껏해야 도끼질 같은 무식한 공격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나무꾼으로 쓸 심산이었겠지.’
몽도 입장에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젠자앙!”
욕지거리를 들은 걸까.
귀도 좋은 노인이 뒤에서 소리쳤다.
“이놈아! 노냐!”
몽도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오!”
“그럼 빨리 나무나 패!”
몽도는 투덜거리면서도 왼발을 단단히 딛고, 허리를 돌려 오른손의 당랑도로 아름드리나무를 강하게 후려쳤다.
콰득!
전혀 깔끔하지 못한 소리와 함께 나무의 일부분이 움푹 패였다. 모양만 칼이지, 도끼질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쯧쯧, 나무도 한 방에 못 패는 놈.”
뒤에서 신선놀음 하듯 누워 있는 노인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몽도는 혈압이 올랐으나 상대하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애써 참았다.
쾅. 쾅. 쾅.
세 번을 후려치자 나무가 기우뚱하며 옆으로 넘어갔다.
“후우.”
몽도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탈출을 시도한 것만 해도 총 세 번. 그런데 세 번 모두 실패했다. 실패도 보통 실패가 아니라 노인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한 대실패였다.
‘당랑도가 부러져서 그래. 저런 괴물 같은 노친네.’
몽도는 괜히 병기 탓을 해보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쳐다봤다.
사지에서도 살아 돌아갈 수 있게 훈련시킨 독한 놈들. 그들이 합심하여 더덕을 뽑아대니 이제 인근 산의 더덕은 씨가 말랐을 정도로 모조리 뽑아 버렸다.
“다했어……!”
“우리가 해낸 거야.”
몇몇은 이미 상황에 순응하고 더덕 일을 마친 것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몽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고로 송곳니가 뽑힌 들개는 강아지만도 못한 존재거늘.
그때, 모자란 수하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는 몽도의 곁으로 추묵환이 다가왔다.
“다했구먼. 잘했다 이놈들아. 이거 먹으면서 해.”
추묵환이 옆에 두었던 보따리를 하나 던져 주었다.
몽도의 수하들이 받아서 열자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먹밥 오십여 개가 나왔다.
“이건……!”
“밥이다!”
몽도패거리 낭인 서른 명은 고된 노동 끝에 먹는 따끈한 밥의 향기를 거부하지 못했다.
앞다투어 달려들어 하나씩 집어 들고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도저히 못 봐 줄 몰골들이라 마침내 한 마디 하려던 몽도.
헌데 추묵환이 그런 몽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이리 따라와라.”
“영감은 끼어들지 마시오. 이건 우리끼리의 일이니.”
퍽, 소리와 함께 몽도의 고개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이 노친네가!”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네 상황을 모르는 거냐? 아까 그 녀석이 한 말은 벌써 잊었나 보지?”
몽도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진구의 공포는 그의 마음에 확실히 심어져 있었다.
“그러네. 냉정을 잃고 있었어.”
패배하고 실패한 상황에서의 자괴감. 공포심.
몽도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할 말이 뭐야. 영감.”
“허허, 그 말투는 못 고치는군. 일단 따라와라.”
추묵환은 그의 첫인상처럼 거침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
“음? 대장이 어디 갔지?”
“괴물 같은 노친네도 없어.”
“뭐지? 어디 간 거야?”
한창 걸신들린 듯이 주먹밥을 베어 물던 낭인들이 그제야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이내 주먹밥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근처에 있겠지.”
“그나저나 밥이 무지 맛있구만.”
“도대체 어떻게 만든 밥이야? 시장이 반찬인가?”
“아냐, 밥 자체가 엄청나게 맛있어.”
한 번 깃든 노예근성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낭인들은 보자기에서 주먹밥이 전부 사라져 버릴 때까지 미친 듯이 먹어댔다.
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밥인데도 불구하고 쌀이 쫀득하게 익은 정도가 완벽했다. 게다가 씹을수록 고소하면서 짭짤한 부분이 황홀하지 않은가.
“후아. 잘 먹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걸 만든 거야?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네. 마치 마약 같은 맛이구만.”
“딱 맞는 말이네. 양귀비처럼 중독성이 있어.”
낭인들은 앞으로 이 주먹밥을 양귀비 주먹밥이라 부르자면서 서로 껄껄 웃어댔다.
“저기, 실례 좀 할게요.”
“음?”
낭인들이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밥을 먹느라 정신을 못 차린 탓일까.
어느새 못 보던 사람들이 뒤에 서 있었다.
“아가씨는 뭐요?”
“마을에서 일하는 분들이신가 봐요?”
“뭐, 그렇다면 그런데. 왜 그러는 거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낭인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는 자.
상하의 모두 특이하게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 진하와 진진 자매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장기린은 자신의 방에 조용히 앉아 벽면에 걸려 있는 ‘풍운객잔’ 현판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왔던 포정사 이백이 한 말이 떠올랐다.
“황실에서 이런 글씨체를 본 적이 있소. ‘하늘을 오시(傲視)할 만큼의 천재인데, 마치 나는 천재가 아니외다’라고 외치는 듯한 글씨체였지. 본성을 숨기고 지극히 평범한 척을 하려고 한 것이오. 혹시 미불의 고사를 알고 있소?”
“모릅니다.”
“미불은 북송시대의 문인인데, 당시 그 유명한 채양, 소동파, 황정견 같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의 사대가로 불렸지. 그런데 이 미불에게 특이한 취미가 있었소. 당대에 명작이라 불리는 글씨를 똑같이 따라 쓴 다음에 마치 진품인 것처럼 섞어두고 사람들에게 맞추라고 시켰다더군.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지 못했다오.”
“흥미로운 고사로군요.”
“흥미로운 건 이 부분이요. 그때 미불이 따라 쓴 가품이 지금 가끔 발견되는데. 미불이 썼다고 하면 이젠 오히려 진품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소. 남아 있는 송나라 작품의 절반은 우리가 못 알아볼 뿐이지 사실 미불이 쓴 거라는 말도 있지. 재밌지 않소? 다른 작품들 사이에 숨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빛나게 되어 버린 것이오.”
“의미가 깊은 말이군요.”
“그렇소. 난 미불의 고사를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다오. 사람은 평범해지려 하는 순간 특별한 것이구나. 그리고 특별해지려 한다면 슬프게도 그건 평범한 사람이구나.”
“……그렇군요.”
“저 글씨를 쓴 문인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현백이라 합니다.”
“역시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오. 부디 소호를 나에게 믿고 맡겨 주길 바라겠소.”
장기린은 현판으로부터 시선을 떼어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가. 이젠 특별해져야 할 때인가.”
소호. 가족. 은자촌.
고민은 잠시.
장기린은 결론을 명쾌하게 내리는 사람이었다.
“형님! 큰 형님!”
그때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진구가 방문 앞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객잔에 누가 찾아왔습니다!”
장기린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누가 찾아왔다는 거지?”
“안찰사의 관인인 것 같아요.”
“안찰사?”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말인가?”
“예. 살인 사건이 나서 수사 중이랍니다.”
“그런데 우리 객잔에는 왜 온 거지?”
“살인 사건이 났을 때 사라진 수레가 우리 객잔 마구간에 있다는군요.”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둘까요?”
“아니.”
장기린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 확고한 신념이 선언하듯 흘러나왔다.
“풍운객잔에서, ‘분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