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화
제5장 중립(中立)의 땅(5)
“이놈아. 넌 왜 그렇게 분쟁을 못 만들어 내서 안달이야?”
몽도는 어이가 없는 듯한 얼굴로 추묵환을 바라봤다.
“영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분쟁을 만들었소?”
“가만히 지켜보니 네 존재 자체가 분쟁거리다.”
“뭐야? 말 다했소?”
“원래 인간은 순응하는 동물이다. 두목이 철저하게 패배했는데 네 수하들이 포기한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자존심이 강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네 분노를 수하들에게 풀면 남아나는 놈이 없을 거다. 그건 우두머리의 자질이 아니야.”
몽도는 성질이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추묵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건 사실 내 성격이 아니지.’
몽도는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네 녀석 앞으로 어쩔 거냐.”
“어쩌긴 뭘 어째. 살아남는 게 목표요.”
“살아남는다는 건, 우리 마을로부터? 아니면 네 의뢰주로부터?”
“…….”
몽도는 상대가 평범하지 않은 노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보는 눈도 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에 나도 묻겠소. 우릴 살려 주긴 할 거요?”
추묵환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 하는 거 봐서.”
“끄응.”
추묵환은 근처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이 되었다.
거칠게 뻗은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하얀 수염.
노인답지 않게 넓은 어깨에 평범한 농민의 옷을 입어도 숨겨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이 꿈틀 거렸다.
“잘 들어라, 애송아. 옛날에 한 사람이 있었다. 어렸을 때 그의 가문이 몰락했다. 그 가문을 몰락시킨 배신자 놈은 높은 관직에 올랐지. 가문의 토지와 재산은 모두 배신자 놈들 패거리가 지들끼리 갈라 먹어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니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였어도 오래 못 가더군.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다가 결국 부모님들도 비참한 죽음을 맞고 나니 그 사람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청산이 푸른 한 땔감 걱정은 없다? 다 개소리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남으면 복수를 할 힘도 없는 거야.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세상이 만든 틀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목숨만 연명하기도 벅차다.”
추묵환의 굵은 목소리에선 남의 이야기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애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포기했소?”
“그래. 그 순간에는 분명히 포기했지. 그는 점점 안 좋은 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가진 건, 자신의 몸밖에 없었으니까. 튼튼한 몸뚱아리만 믿고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고, 패거리의 대장이 되어서 돈을 받고 칼질도 했다. 그렇게 막 살다 보니 어느새 꽤 명성이 쌓였어. 인근에선 감히 건드리는 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인간이란 신기한 거야. 그는 먹고 살 만해지니 옛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배신자 놈이 생각난 거야.”
“힘이 생기니 변한 거군.”
“그래. 원래 그 사람의 본성을 알려면 그에게 힘을 줘 보면 안다.”
“그래서. 복수를 했소?”
“했지. 잔혹할 정도로. 그가 겪었던 고통에 오랜 세월의 이자까지 합쳐서. 가문을 부수고, 명예를 짓밟고, 가진 재산은 승냥이 같은 놈들에게 갈가리 찢기도록 나누어 주었다.”
“통쾌하군.”
몽도는 그제야 개운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래, 통쾌했지. 마지막에 그 배신자 놈의 자식이 원수 보듯 쳐다보지만 않았다면.”
“배신자의 새끼도 배신자요. 죽였어야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배신자의 자식이 과거의 자신과 똑같다고 느꼈거든.”
“어설픈 인정이군. 복수를 안 하면 모를까. 하려면 제대로 싹 쓸어버렸어야지. 그런 놈이 꼭 후환이 되더라.”
“클클, 사람이 그렇게 완벽하면 신이 왜 있겠나. 결국 그는 복수를 꿈꾸지 말라며 그놈의 손가락만 잘라 버리고 놓아 주었다.”
추묵환은 찝찝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몽도를 보며 껄껄 웃었다.
“이게, 네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는 이유다.”
“그건 또 뭔 소리요?”
“난 네놈을 꾸짖을 만큼 정의롭게 살아 오지 못했다는 말이야. 그러니 하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낭인이라든가, 살수 짓 같은 거 하지 말고 네 길을 찾아라. 세상은 내 원한만 갚기도 힘들다. 다른 사람의 원한까지 뺏어 오는 일은 하지 마.”
“……늙은이의 충고요?”
“그렇지.”
추묵환은 순순히 인정하며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이거 받아라.”
“어?”
핑, 하고 날아온 하얀색의 무언가를 받아든 몽도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개껍질……?”
“귀한 거다. 화석(化石)이라는 거야.”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에 풀 같은 게 새겨져 있네.”
“인위적으로 새긴 게 아냐. 자연이 만든 거다.”
“끄응, 이건 왜 주는 거요? 여기에 가둬 뒀던 보상 같은 건가?”
“쯧쯧.”
추묵환은 혀를 찼다.
“네놈이 잘못해서 벌을 받은 건데 어디서 보상을 논하나.”
“끄응, 사실 그 꼬맹이도 그렇고 우리랑은 상관없었다고. 방해받은 건 우리야.”
“멍청한 녀석아. 어쨌거나 우리 애들이 다쳤잖냐.”
“……그건 그렇지.”
“오히려 우리가 보상을 받아야지. 그리고 그 대가로 너희는 더덕을 캔 거다.”
“끄응…….”
“내가 혼자 하려면 귀찮았을 텐데. 고마운 일이지. 수고했다.”
몽도는 왠지 클클 웃는 추묵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건 처음의 공포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애송아. 그에 대한 보상은 아니지만 너희에겐 다른 걸 줬다. 그 칼. 당대 최고의 명장(明匠)이 만든 거다. 귀찮아하면서 대충 만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네 본래의 칼보다 몇 배나 귀한 거야.”
“그럴 리가! 이딴 무겁기만 한 철 덩어리가?”
“쯧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놈 같으니. 제대로 쓰려고 노력해 봐라. 언젠가 네 목숨을 세 번은 구할 거다.”
“…….”
몽도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거무튀튀해진 흑(黑)당랑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가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몽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으음, 알겠소.”
“음?”
“고맙소, 영감. 좋은 이야기를 들었소.”
정중한 포권에 진심 어린 감사가 담겼다.
“애송이,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구만.”
추묵환은 조금이나마 더 따뜻해진 눈으로 몽도를 바라보았다.
“이 마을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네놈을 위해 하는 말이다. 그리고 밖에서 혹시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장강의 수로맹으로 찾아가.”
“장강…… 수로맹?”
몽도가 고개를 휙 들고 놀란 듯 바라보았다.
“영감은 혹시? 아니, 아니지. 대체…… 정체가 뭐요?”
“뭘 또 물어? 더덕 캐는 노인이라니까 그러네.”
추묵환은 껄껄 웃었다.
“그만 가봐. 앞으론 착하게 살고.”
거구의 노인은 휘적휘적 몇 걸음 걸어가는가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몽도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추묵환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
“그 아가씨는 뭐지? 이 마을에 사나?”
“대단한 미인이던데.”
“크, 분위기가 아주 죽여. 묘한 느낌이더라고.”
낭인들은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질문을 하나 던지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아가씨는 잡담의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던데.”
“그러게. 얼마 전에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잖아?”
“아 참, 그거 왜 우리라고 말하지 않았어?”
“우리 중에 그런 미인이랑 아는 사람이 있겠냐.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겠지.”
“이 자식이. 왜 우리 패거리를 무시해? 있을 수도 있지!”
“내가 언제 무시했어! 면상들을 봐라. 이런 놈들이 미인이랑 잘 살 수 있겠냐?”
낭인들은 자신들끼리 서로를 살펴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혹시 모르지. 두목이라던지.”
“아, 그러네. 근데 두목이면 더더욱, 더덕 캐는 모습 따위 보여 주기 싫을 거 아냐?”
“으음…….”
낭인들은 스스로 말해 놓고 자기들이 실의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 뭐하고 있는 거냐.”
“더덕이나 캐고 앉았고.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지?”
“젠장 괴물 같은 것들이 가득한 마을이잖아. 죽기 싫으면 뭐든지 해야지.”
“천하의 몽도 패거리가 아주 다 죽었구만. 다 죽었어.”
한숨을 푹푹 내쉬길 잠시. 그들은 다가오는 인기척에 오감을 곤두세웠다.
“어! 두목?”
나타난 것은 몽도였다.
그는 거무튀튀하게 변해 버린 당랑도를 들고 뭔가 고민에 빠진 듯 묵묵히 걸어왔다.
“뭐하고 왔수?”
“그 괴물 같은 노친네는?”
몽도는 복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한 명, 한 명 응시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이제 다 끝났어. 돌아가자.”
“……엉?”
낭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뭔 소리야?”
“두목. 호, 혹시, 그 노친네를 벤 거요? 성공한 거야?”
“뭐야? 두목이 그 괴물을 쓰러뜨린 거야? 정말?”
몽도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열 받는 걸 참느라 주먹에 힘을 줘서 그랬다.
“멍청이들아! 우리가 할 일 다 했으니 보내 줬다고! 이걸 내 입으로 꼭 말해야겠냐!”
“……!”
낭인들이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서로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그랬구나.”
“놔 줬구나. 그럼 그렇지.”
“그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낭인들은 잔뜩 캐서 한쪽에 쌓아 둔 더덕들을 쳐다보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아아, 더덕 캔 거 정리하고 가야 하는데.”
“가는 건가. 으음, 양귀비 주먹밥도 이젠 끝이군.”
“양귀비 주먹밥! 크윽.”
“아쉽네, 맛있었는데.”
“언제 또 먹어 볼 수 있으려나.”
마치 첫사랑의 추억을 말하듯 아련한 목소리였다. 몽도의 팔뚝에 돋아난 힘줄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 멍청한 것들이……!”
몽도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진심으로 폭발하기 직전. 낭인들이 놀라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동추 대장이잖아?”
한쪽 팔을 붕대로 칭칭 감고, 온몸이 만신창이인 듯한 몰골이지만, 거대한 덩치에 사나운 인상은 분명 몽도 패거리의 돌격대장 동추가 확실했다.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거대한 덩치 옆에 늘씬하고 매력적인 여성과 고작해야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소녀가 함께였다.
“어? 저 아가씨는?”
“뭐지? 설마 찾는 사람이 동추 대장이었던 거야?”
낭인들이 거대한 충격에 입을 쩍 벌리는 사이, 동추와 매력적인 여인은 몽도에게로 다가갔다.
***
“동추.”
“두목.”
몽도와 동추는 잠시 서로를 부르기만 한 채 침묵을 지켰다.
“뭐, 살아 있으니 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몽도였다. 그는 동추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진심인가?”
“탓할 생각은 없다. 최종적으론 내가 결정한 거니.”
동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 관대한 척하는 모습은? 대판 깨지더니 철이라도 든 건가.”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동추. 그냥, 이번 일은 자연재해 같은 거였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제길, 그 빌어먹을 꼬마만 아니었어도!”
“아, 그러고 보니 잘못한 게 하나 있었군.”
퍽, 소리와 함께 동추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턱을 얻어맞아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애는 건드리지 말자고 했잖냐.”
“큭, 젠장! 그 괴물 같은 놈은 그냥 꼬마가 아니었다고!”
“그래도. 거기까지 가면 우린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거다. 악귀(惡鬼)가 따로 있는 게 아냐. 동추야. 칼질하며 사는 막장인생이지만 그래도 애는 죽이지 말자.”
동추는 양옆의 눈치를 봤다.
주변에서 낭인들이 동정과 질책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동추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던 것이다.
“멋진 분이시네요.”
몽도는 약간 갈라지는 듯, 낮고 매력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누구요?”
“아까 지나가면서 혹시나 했었는데. 이분에게 물어봤던 게 정답이네요.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나를?”
뒤에서 경박한 낭인들이 ‘역시!’라던가 ‘젠장!’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몽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동추를 힐끗 쳐다봤다.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온 꼬마 소녀가 동추의 곁에서 턱을 살펴봐 주고 있었다.
‘동추에게 물어봐서 나를 찾은 건가? 왜?’
곰곰이 이유를 더듬어 보는 사이, 아름다운 여인이 코앞까지 다가와 물끄러미 자신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요?”
몽도도 사내다.
아름다운 여인이 관심을 표하는 게 싫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한 발을 뒤로 내딛고, 양팔은 내린 채 상체를 슬쩍 비트는 순간.
바로 그때, 턱밑에서 칼날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