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화 (157/686)

2권 3화

제5장 중립(中立)의 땅(6)

“최상급. 등위(等位)는 팔(八).”

진구는 버들피리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그는 백송촌으로 이어지는 관도에 서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회색 두건을 머리에 쓴 왜소한 체구의 남자다.

눈동자가 안 보일 만큼 눈이 가늘게 찢어졌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매부리코에, 툭 튀어나온 입은 영락없이 쥐를 닮은 사내다.

그래서인지 별명도 흑서(黑鼠). 검은 쥐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확실해?”

진구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확실하냐니. 이 사람아, 장사 하루 이틀 해?”

“그 장사가 어디 믿을 만해야 말이지.”

“그건 또 무슨 섭섭한 소리래.”

흑서가 비통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 구역에서 담당자로 일한 게 벌써 십 년 째야. 우리 문(門)에서는 고객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했다간 큰 벌을 받는다고. 그게 특급 고객이신 ‘대인’께 가는 정보면 더더욱. 그런데도 이렇게나 신뢰를 못 하다니. 아아! 이 절대 고독! 역시 일로 만난 친구는 아무 소용없구나!”

흑서는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진구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사람이 저번에 그렇게 허탕을 치셨어?”

“허탕이라니! 그저 조금 늦었을 뿐이야.”

“조금? 이틀이나 늦었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줄 알아? 황실 정보를 이틀 만에 빼왔으면 충분히 어마어마하지!”

“쯧쯧.”

진구는 한심한 눈으로 흑서를 응시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정보인지 내가 알게 뭐야? 필요할 때 필요한 정보를 못 주면 쓸모없는 거지. 나랑 우리 큰 형님이 직접 두 눈으로 판별하지 않았으면 황실 사람인지도 몰랐을 거 아냐? 일이 꼬였으면 어쩔 뻔했어?”

“끄응.”

“어떻게 황자랑 황자의 호위무관도 몰랐대? 하오문도 한 물 갔구만? 그렇지?”

흑서는 억울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늦은 건 사실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넓은 무림강호에서 정보력에 한해 천하제일문이라는 하오문.

흑서는 그 하오문의 체면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뭐, 그에 대해선……. 나도 대인께 사과를 드리긴 해야 하는데…….”

흑서는 풍운객잔을 슬쩍 쳐다보곤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감히 말을 붙일 자신이…….”

“뭐, 우리 큰 형님이 좀 무서운 분이긴 하지.”

“좀 무서운 정도가 아니지. 나 같은 범인(凡人)은 감히 쳐다도 못 볼 분이라고.”

흑서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최상급. 등위는 팔. 확실해.”

“믿기지가 않네. 물론 손힘은 좀 셌지만…….”

진구는 소매를 걷고 아직 빨갛게 남아 있는 손자국을 보여 주었다. 흑서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게 뭐야? 시험이라도 당한 건가? 그런데도 안 들켰어?”

“뭐, 여기 살면서 숨기는 데는 익숙해졌으니까.”

“그래도 전문 살수를 상대로 일반인인 척을 하다니……. 실력이 또 늘었나 본데? 정보에 수정이 필요하겠어.”

흑서의 눈이 잠시 하오문 하남 제이(二)지부장답게 냉철하고 계산적인 느낌을 풍기다가 사라졌다.

진구는 흑서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최상급 팔등이라는 건 믿기지 않는데?”

“그야 살수 쪽이니까.”

흑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낭인 쪽이랑은 등급을 매기는 기준 자체가 달라. 은신(隱身). 위장(僞裝). 암살(暗殺)…… 등등. 그런 자잘하고 개성적인 것들에 임무 성공률을 더하니까. 순수하게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의 무력(武力)만 따지는 낭인들이랑은 다르지.”

“그래?”

“적어도 진하, 진진 자매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잘 알아?”

“얼굴 정도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는지는 서류로 봤지.”

“얼마나 쌓았는데?”

흑서는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다섯 명은 아닐 테고. 오십?”

“아니, 오백.”

“흐음, 기간은?”

“일 년.”

진구는 처음으로 조금 놀랐다.

“일 년 만에 오백 건?”

“흐흐, 이 사람아. 놀랍지? 왜 최상급 팔등인지 알겠어?”

“그렇군. 위험한 여자였군.”

진구는 생각했다.

전장에서 살아 본 그였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정말 위험한 사람은 무공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어느 누구든 해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살인’을 할 수 있는 자야말로 인간 사회에 위협이 되는 극도로 위험한 인물인 것이다.

“위험한 여자가 아니야.”

“음?”

“여자들.”

흑서가 진지하고 냉혹한 얼굴로 말했다.

“진하, 진진 자매는 둘 다 위험한 여자들이라고.”

***

샥―.

마치 깨진 사기그릇에 손가락이 베듯, 날카로운 촉감이 몽도의 턱 끝을 관통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반 발자국만 앞에 있었어도 턱밑을 꿰뚫렸을 것이다. 뜨끈하면서 점성이 있는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앞섶을 적셨다.

“이게 무슨……?”

의문과 경악. 위기의식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턱밑을 관통하지 못한 순간 단검의 궤도가 일변.

안면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인 눈알을 사정없이 찔러온 것이다.

“크……윽!”

몽도는 일단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아픔이건 뭐건 간에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궤도와 시점이 절묘해서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머리가 꿰뚫릴 지경이었다.

손가락 안쪽이 반쯤 잘려 나갔다.

날카로운 칼날이 뼈에 걸려 덜컹거렸다.

“넌, 뭐야?”

몽도는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단검 하나를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힘껏 미는가 싶더니, 한 순간에 쭉 힘을 빼며 단검을 손에서 놓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어?”

버티던 힘이 사라졌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몽도는 중심이 앞으로 쏠렸고, 그 순간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오른쪽 발등이 새로운 단검에 꿰뚫린 것을 확인했다.

‘이건?’

언제, 어떻게 공격했는지도 보지 못했다.

몽도는 극렬한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이 찢어질 만큼 이를 악 물었다.

“큭……!”

여자가 다시 한번 달려드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몽도는 제자리에서 다급하게 당랑도를 휘둘렀다. 오른쪽 발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깡! 하고 단검 하나가 옆으로 튕겨나가 땅에 그대로 박혔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다시 한번 휘둘러 반격했지만 여자는 미끄러지듯이 뒤로 피해 내더니, 이내 자세를 낮추고 냉철한 눈빛을 띤 채 몽도를 관찰한다.

그를 철저히 분석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몽도는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상대의 발을 묶고, 상처를 입힌 뒤 힘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날 사냥하고 있군.’

몽도는 거기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살수.’

언제 어디서든, 방심한 틈을 노리는 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습격자.

“큭큭,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몽도는 분노를 느꼈다.

“얼마였길래 네 목숨을 팔았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몽도는 왼손을 펼쳐 보았다. 피가 흐르지 않고 몽글몽글하게 맺혀 있었다. 손이 따끔거리면서 마비된 듯 감각이 둔했다.

“큭큭, 약까지? 이거 제대로네.”

몽도는 머릿속이 핑 도는 것을 애써 감추며 이를 악물었다.

“두목!”

“뭐지! 무슨 상황인 거야?”

뒤쪽에서 어리벙벙한 낭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목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치정 싸움이야?”

“두목! 무슨 짓을 했수? 바람핀 거요?”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건지. 못 챈 척하는 건지.

몽도는 다가오려는 낭인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만류했다.

“오지 마라.”

몽도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실핏줄이 터졌다.

“거기 여자. 내가 누군지 알고 덤빈 거겠지?”

여자는 침묵했다.

“그래. 그럼 후회하지 말고 죽어라.”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몽도.

넘치는 살의가 광기가 되어 온몸을 잠식했다.

몽도는 전신에 힘을 주고 근육을 부풀렸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검에 박힌 발을 억지로 들어 뽑아냈다.

그는 신경이나 감각 따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번엔 냉혈한 같던 여자도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낭인 짓을 하다 보면…… 살수 놈들도 자주 만나지. 그런데 결국 그놈들이 번번이 패퇴했어. 왜인 줄 알아? 이유는 간단해.”

몽도가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더 강했거든. 그뿐이야.”

***

하남 안찰사 첨사 공손책은 미묘한 얼굴을 한 채 불편하게 서 있었다.

풍운객잔에 들어올 때부터 난감했던 일이다.

정황증거상 혹시나 해서 들어왔는데 동행한 포졸들이 객잔의 마구간에서 사라진 수레를 찾아내고 말았다.

‘이백 포정사님께서 화전촌은 가만히 두라고 부탁하셨는데……. 그렇다고 이미 나온 증거를 무시할 수도 없고……. 아아! 제길, 이러면 귀찮아지는데.’

객잔의 손님이 범인이든, 아니면 화전촌에 사는 누군가의 범행이든 어쨌거나 이곳은 사건에 연루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눈치 없는 부하들은 자꾸만 옆에서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첨사 나리!”

“범인의 흔적을 생각만으로 찾아내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이참에 이런 화전촌 따위 뒤집어 버리죠? 저희가 샅샅이 뒤져서 범인을 색출해 내겠습니다!”

공손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용히하게. 그렇게 섣불리 처리할 일이 아니야.”

“예?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깟 화전촌 따위 안찰사에서 떴다 하면 벌벌 떨…….”

“어허!”

공손책은 그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자네들은 먼저 나서지 말게.”

“예?”

“명령이야.”

공손책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고, 잠시 후 자신을 풍운객잔의 주인이라 소개하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얀 무명옷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사내였다. 특이하게도 한쪽 귀가 없었다.

“반갑소.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이라하오.”

포권조차 하지 않은 인사에 주변 부하들은 발끈했으나, 공손책은 반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는 평소에 항상 졸려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기운을 쭉 빼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관(官)이란 쉬운 자리가 아니다.

잘못 발을 내딛었다간 한 방에 휩쓸려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퍽도 객잔 주인이겠다. 그 얼굴, 그 분위기로 이런 산골 화전촌의 객잔이나 하고 있다고?’

공손책은 이백 포정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하남 안찰사 첨사 공손책이라 합니다.”

공손책은 포권을 취했다.

“어떤 일로 왔는지 묻고 싶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흑석촌에서 무고한 백성을 죽인 살인마입니다.”

“그 사람이 객잔으로 온 것이오?”

장기린의 두 눈엔 엄중한 빛이 감돌았다.

함부로 말을 해선 안 될 분위기였다.

“제 수하들이 이곳에서 범인이 훔쳐간 수레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사라진 경로상 백송촌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 마을밖에는 올 곳이 없습니다.”

“그런가.”

당당하면서 엄중한 반응이었다.

공손책은 직감했다. 상대는 관직(官職)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범인은 어떤 사람이오?”

‘젠장 더 귀찮아지는데.’

공손책은 찝찝해 하면서도 공손히 대답했다.

“살수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 최근에 객잔이 묵은 적이 있습니까?”

뒤쪽에서 수하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여자야?”

“왜지?”

“근데 우리 첨사 나리는 왜 저렇게 공손하신 거야?”

공손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라. 멍청이들아.’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잘 모르겠소.”

“그렇……습니까? 그럼 이 사람은 본 적이 있으십니까?”

공손책은 품 안에서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 장기린에게 내밀었다.

선이 굵으면서 특징을 개성적으로 살려 놓은 그림.

밑에 당랑도라고 적힌 수배서였다.

“이 사람은?”

“몽도라는 낭인입니다. 살수가 노리는 자일 겁니다.”

“역시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공손책은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납득이 된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는 솔직히 흑석촌 아석의 아비 따위 관심도 없었다.

어서 이 일을 마무리하고 관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째서?”

“첨사 나리……?”

놀라고 당황한 수하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장기린의 뒤쪽에서 객잔 오른쪽 외벽이 터져 나갔다.

콰직! 쾅!

“크하하하! 내가 봐로 낭인 왕이 될 몸이시다! 어디 더 던져 봐! 그 가소로운 단검들을 던져 보라고!”

박살난 나무 파편과 함께 튕겨져 들어온 것은 검은색 비단 옷을 입은 미녀. 그녀는 객잔 안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양이 같은 몸놀림을 뽐내며 반대쪽 벽의 창문으로 뛰어넘어 도망쳤다.

그 뒤를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사내가 쫓아왔다.

“어딜 도망가나! 날 잡으러 왔잖냐!”

그는 오로지 그 여인만 보이는지 창문이 있는 쪽 벽을 온몸으로 때려 부수며 밖으로 쫓아갔다.

“…….”

침묵이 흘렀다.

장기린은 눈을 질끈 감았고, 공손책은 당황하여 숨도 쉬지 못했다.

객잔 안의 뻥 뚫린 구멍 사이로 허망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잠시 후 먼저 입을 뗀 것은 장기린.

“그 사람들을 보지 못했소.”

공손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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