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4화
제5장 중립(中立)의 땅(7)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방금 지나갔잖……억!”
공손책은 눈치 없이 소리치는 부하의 등짝을 후려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이 사람 참, 이제 헛것도 보이나? 그동안 내가 자넬 너무 혹사시킨 모양이구만.”
“어, 예? 저기, 첨사 나리?”
“미안하네. 내가 이렇다니까. 너무 일만 보고 산 모양이야. 자네뿐만이 아니야. 자네들 전부에게 휴가라도 좀 줘야 할 것 같군.”
“예? 휴가요?”
“그래, 휴가.”
공손책은 아직도 이해를 못한 부하들에게 진심으로 휴가를 주고 싶었다.
영원히.
“첨사 나리.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헛것이라니. 좀 전에 그것들 때문에 객잔 벽이 뚫린 게 안 보이……억!”
“하핫! 하핫! 이 사람 참. 창문이니 당연히 뚫려 있지! 지금 공사라도 하는 모양인데 어서 비켜 드리는 게 좋겠어.”
“아니 첨사 나리,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객.잔.을 새로 멋지게 꾸미시는 모양인데 방해되잖냐. 자자, 어서 나가자고.”
“어어어?”
공손책은 당황하다 못해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의 부하들을 서둘러 객잔 밖으로 내몰았다. 그는 문을 쾅 닫은 뒤 장기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부탁했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이쪽도 정리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사정을 조금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장기린은 침묵 끝에 대답했다.
“내일 다시 오시오.”
“감사합니다.”
공손책은 다시 한번 정중히 포권을 취한 뒤에 떠나갔다.
잠시 후, 서찰 하나를 들고 돌아온 진구가 객잔 안의 풍경을 보며 화들짝 놀라 외쳤다.
“으악!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진구.”
장기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잡아 와.”
“……예!”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구는 차렷 자세로 대답한 뒤 전력을 다해 뛰쳐나갔다.
***
몽도의 광기가 가라앉았다. 그는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왼손의 상처에서부터 시작된 약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머릿속은 몽롱했고 근육의 반응은 생각한 것보다 조금씩 늦어졌다. 발에서 계속 피가 흐른 것도 이제는 큰 짐이 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일각. 이젠 과다 출혈로 목숨이 위험해질 시간이었다.
‘이대로 쓰러지느냐. 아니면 내가 먼저 잡느냐.’
다행인 것은 한 방의 공격만 성공시키면 단번에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몽도는 살수 여인과 서로 눈을 마주보며 생각했다.
‘마치 야생 고양이처럼 재빠른 저 여자를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저 여자의 약점은 어디일까.’
“약점……?”
몽도는 소리 내서 말하고 말았다. 순간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몽도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상대방도 곧바로 그의 의중을 알아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챙―.
방해를 위해 날아오는 단검을 중간중간 쳐 내며, 몽도는 본래 싸움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몽도의 부하들과 동추, 그리고 살수 여인의 여동생이 처음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어? 일찍 왔네?”
살수 여인의 동생이 손을 들어 반겨 주었다.
“와아―. 언니 대단해. 벌써 거의 다 잡았네.”
소녀는 웃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동추의 등에 올라탄 채, 손바닥만한 단검을 동추의 목덜미에 박아 넣은 모습으로, 해맑게.
“약점은 무슨.”
몽도는 벌레 씹은 얼굴로 우뚝 멈춰 섰다.
“어이.”
몽도는 흐릿한 시야로 동추의 안색을 살폈다.
“동추야, 살아 있는 거냐.”
“흐흐…….”
동추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몸이 마비된 것 같긴 하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단검이 박힌 목 부근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몽도는 부하들 쪽을 바라봤다.
“두목…….”
“조금만 움직여도 단검으로 혈관을 끊어 버리겠다고…….”
“보통 계집이 아닙니다.”
부하들은 얼굴이 모두 시뻘겋게 된 채 잔뜩 흥분해 있었다. 몽도는 기가 차서 웃었다.
“하긴, 살수가 짐이 되는 걸 데리고 다닐 리가 없지. 동추. 내가 방심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했냐, 안 했냐.”
“흐흐흐…….”
“각오는 되어 있지?”
“흐흐…….”
“걱정 마. 적어도 미인이랑 같이 갈 수 있게 해 줄게.”
몽도는 당랑도를 꽉 붙잡았다.
그 순간, 낭인이든 뭐든 내려놓고 벗어나라던 노인의 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그런데 동추의 등에 매달려 있던 소녀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언니는 같이 안 가. 아저씨도 이미 잡았거든.”
쉭―.
황급히 돌아보는 몽도를 향해 소녀가 단검을 던졌다.
소녀의 단검술은 언니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 쳐 내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이건 미끼.’
몽도는 낭인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고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았다.
역시나 살수 여인이 단검을 내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끊고.’
챙―.
따당!
몽도는 크게 두 걸음을 내딛었다.
‘내 허점을 노릴 테니 막고.’
땅!
‘지금이다!’
몽도는 자세를 낮췄다가 전신의 근육을 이용해 뛰쳐나갔다. 몸속의 압력이 강해지자 상처가 났던 부분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 광경을 본 살수 여인이 단검을 내던지려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단검을 내던지는 데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
一. 단검을 잡는다.
二. 손을 어깨 뒤로 뻗는다.
三. 앞으로 내던진다.
투술(投術) 기본 중의 기본.
그런데 지금은 단검을 잡는 것까지 밖에 못 했으니 던지려면 두 단계가 더 필요했다.
‘내가 더 빨라.’
그런데 예상을 빗나갔다.
살수 여인은 던질 시간이 부족하자 손가락을 튕겨서 단검을 내던지는 기술을 선보였다.
그것을 하나는 쳐 냈고, 하나는 몽도의 복부에 박혔다.
몽도는 이를 악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의 근성을 우습게보지 마라!’
몽도의 허리가 회전했다.
살수 여인의 왼쪽 허리에서부터 오른쪽 어깨가 일직선으로 갈라지며 허리가 굽었다.
“언니!”
소녀가 동추의 목덜미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 몽도에게 내던졌다.
푹, 하고 몽도의 등에 소녀가 던진 단검이 박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수 여인의 소매 자락에서 딸깍거리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작은 단검 두 개가 몽도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암기(暗器)! 아, 이게 아까 발을 관통했던 거군.’
어떻게 공격했는지도 몰랐던 첫 번째 단검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몽도는 가슴에 두 개의 단검을 박은 채 무릎 꿇었다.
살수 여인도 긴 자상을 입은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언니! 내가 죽여 버릴게!”
몽도를 향해 달려들던 소녀는 뛰쳐나온 낭인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처박혔다.
“끼야아아악―!”
소녀는 신경질 적인 비명을 질러댔다.
낭인들은 가차 없이 그녀를 짓눌렀다.
“제길, 이게 무슨 상황이야.”
“두목. 정신 차려요! 두목!”
몽도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씩 웃었다. 이런 곳에서 죽다니 아쉽지만, 그래도 이겼다. 그게 어딘가.
“어, 어라?”
“잠깐! 우리 두목은 지금 위험……. 우악! 막아!”
“가지 못하게 막……. 쿠억!”
몽도는 그의 수하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모습을 희미하게 목격했다.
잠시 후, 꿈에서도 잊기 힘든 사내가 눈앞으로 다가와 멱살을 잡고 무시무시한 웃음을 지었다.
“이봐, 그분이 데려오라고 했으면 삼도천을 건넜어도 데려와야 해.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그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몽도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
장기린은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번 만큼은 예외였다.
등 뒤에는 박살난 객잔의 풍경이 있고, 눈앞에는 샛노란 비단 경장을 갖춰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명해 봐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탓이 아니오.”
지그시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날카롭게 바뀌어 있었다.
“……그래, 내 탓이오.”
장기린을 말 바꾸게 만드는 사람은, 아마 천하에서 진휘연이 유일할 것이다.
진휘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외부 사람들끼리 싸움이 붙었어.”
“그 사람들이 객잔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휘연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못된 사람들이네.”
“그렇지.”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귀한 객잔이 이 꼴이 되는 동안 뭐했어요?”
“나?”
장기린에게 갑자기 불똥이 튀었다.
“으음, 그게…….”
그녀의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따가울 정도로 올곧았다.
“난 관에서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그것들이 오른쪽으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나갔어.”
장기린은 생각했다.
사실을 이야기할 뿐인데, 왜 변명을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아니나다를까 진휘연이 연신 싸늘한 얼굴로 추궁했다.
“왜, 안 막았어요?”
“막을 수 없었어.”
“관에서 나온 사람 때문에? 실력을 보여 주면 안 되니까?”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외부 사람들은 여기에 왜 왔는데요?”
“그건…….”
“그건?”
장기린은 잠시 고민했다.
진휘연에게 소호의 모험을 설명해야 할 것인가?
소호가 이백을 구해 줬고, 그 때문에 낭인이 임무에 실패했으며 그 실패한 낭인을 처벌하기 위해 살수가 왔다고.
즉, 결국엔 소호 때문에 객잔이 이 꼴이 되었다고?“……내 탓이오.”
당장 맞아 죽더라도 장기린은 남 탓을, 그것도 자식 탓을 할 성격은 못 된다.
“휴,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이유가 있는 거겠죠.”
진휘연은 장기린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장기린의 복잡한 듯하면서 단순한 성격 정도는 이미 예전에 다 파악했다. 그녀가 어디까진 화를 내고, 어디부터 상대를 믿어야 하는지 그 선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벽은 어떡해? 내가 이 건물 짓는 일에 얼마나 신경 썼었는데……. 뼈대가 다 부서져서, 때운다고 해도 영 이상하겠네.”
진휘연은 그래도 아쉬움이 큰 만큼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아련한 손길로 부서진 벽면을 매만지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놓치지 않았겠죠?”
“물론.”
“지금 어디에 있어요?”
“진구가 잡으러 갔어.”
제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그녀에게선 장기린도 움찔할 만큼 서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사람들, 나한테 맡겨요.”
“음?”
“객잔의 벽을 부순 대가를 받아내야죠.”
돌아서는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화사하게 웃는다.
장기린은 생각했다.
그는 일만의 병사와 대치해도 두렵지 않은 사내였지만, 역시, 진휘연과는 절대로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
소호는 기분 좋은 얼굴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켜니 온몸에서 활력이 넘친다. 이상할 정도로 힘이 나고 기분이 좋은 아침이었다.
“응? 저게 뭐야?”
밖으로 나와 보니 객잔의 사방에 통나무와 사다리를 걸쳐 놓은 채 뭔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두건을 쓴 인부들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온갖 목재와 공사 자재들이 담벼락 옆에 쌓여 있었다.
“어째서?”
소호의 눈이 반짝였다. 흥미로운 예감이 물씬 들었다.
“운찬 삼촌! 무슨 일이야? 왜 우리 객잔이 갑자기 공사를 해?”
“아, 저거?”
객잔의 주방이 아니라, 안채의 주방에서 주먹밥을 만들던 운찬이 밥솥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형수님이 이참에 객잔을 넓히자고 하셔서. 객잔에 회의실(會議室) 같은 걸 만드려나 봐.”
“왜? 우리 객잔은 원래부터 손님 별로 없었잖아?”
“끄응, 그렇긴 하지. 근데 필요하니까 만드시는 거 아닐까?”
소호는 주먹밥을 만드느라 바쁜 운찬을 뒤로하고 객잔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곳엔 소호의 어머니인 진휘연이 진두지휘 하며, 두건을 둘러쓴 인부들을 거칠게 부리고 있었다.
‘뭔가 바빠 보이네.’
어머니를 방해하지 말자고 생각한 소호는 객잔 안으로 일단 들어가 보았다.
안에서는 온몸에 붕대를 두른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옛날 벽을 뜯어내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신의(神醫)가 고쳐 주면 다야?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부상자에게 일을 시키다니. 젠장, 옆구리가……!”
소호는 그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으아 씨! 깜짝이야!”
사내는 깜짝 놀랐다가 소호의 말에 한번 더 놀랐다.
“아저씨, 어디서 본 것 같네요.”
“으응?”
남자가 당황하며 두건을 고쳐 맸다.
“으음,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안 나요. 어디서 봤더라?”
“그, 글쎄. 난 널 처음 본다.”
“그래요?”
소호는 잠시 갸웃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잘못 봤나 보다. 죄송해요, 아저씨.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커험, 난 바빠서 이만…….”
사내가 벽에서 뜯어낸 목재를 들고 허둥지둥 밖으로 빠져나갔다.
소호는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그 사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히히힝―.
“어?”
객잔 밖에선 웬 마차 하나가, 막 출발을 하려 했다.
나무로 창살을 만든 감옥이 뒤에 달려 있었는데, 안에 있는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 있어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건 또 뭐지?”
호기심에 쫓아가 보려던 소호는 그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소호의 아버지, 장기린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일어났느냐.”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소호는 꾸벅 인사를 하며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소호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소호야, 아버지는 지켰다.”
“……네?”
아버지는 어깨를 한번 툭 두드려준 뒤 안으로 들어가셨다. 만족한 듯한 얼굴로, 당당하게.
“으응?”
소호는 대체 무슨 뜻이었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에잇, 일단 애들이랑 놀자.”
내일 걱정은 내일.
소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우선 기옥을 찾아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