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5화
제6장 대천문(代天門)(1)
모든 공사가 끝난 풍운객잔에 여덟 명의 노인이 찾아왔다.
허리가 잔뜩 굽어 걷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노인에서부터 젊은이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한 추묵환까지 그들은 다양했다.
장기린은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맞았다.
노인들 또한 장기린에게 정중한 예로 화답했다.
거물 아홉 명이 들어오자 새로 지은 회의실도 꽉 차 버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과 앞으로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장기린은 잠시 굳은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르신들. 예정보다 시기가 앞당겨졌습니다. 원인은 저의 자식 놈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장기린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가 그동안 살아 오면서 황제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극상의 예(禮)였다.
노인들이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원인은 무슨!”
“어릴 땐 다 그러고 노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오히려 사내 녀석이 어릴 때 얌전하기만 하면 이상한 것 아닌가.”
“문제는 소호를 건드린 놈이지! 우리 소호가 무슨 잘못이 있나!”
“늙은이들이 오랜만에 맞는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소호를 건드린 게 어떤 놈들인지 말만 하게.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개성 가득한 노인들이 제각각 목소리를 높였다.
장기린은 문득 노인들과 처음에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서로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미 이야기를 다 들으셨군요.”
“커험! 진구 녀석이 내게 이야기해 줬다네.”
진구가 추묵환에게 이야기했고, 추묵환이 다른 십로들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뜻이다.
장기린은 넉살 좋게 씩 웃는 진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야기가 잘 풀릴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쓴 모양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들.”
무뚝뚝한 표정을 조금 무너뜨린 장기린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은자촌은 숨은 곳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작은 일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미 일부가 드러났고, 적들은 밖으로 새어 나간 작은 단서조차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젠 마을 전체가 다른 은신처를 찾을지, 아니면 해결을 해야 할 때가 왔는지 결정할 때인 것 같습니다.”
노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르신들?”
장기린이 되묻자 노인들 중 추묵환이 먼저 나섰다. 그는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은 뒤 말을 꺼냈다.
“크흠, 우리 십로(十老) 중에 두 사람은 지금 이곳에 없지만 그들도 동의했을 거라 생각하네.”
추묵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설마 이미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물론일세. 이제 때가 되었지. 우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네.”
장기린은 회의실에 모인 여덟 명의 노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았다.
모두가 평온하고 신뢰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각오를 마친, 결의에 찬 모습들이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장기린은 한창 군부에서 동생들과 부하들을 책임지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거운 책임감이 있지만, 또 한편으론 이렇게나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에서 무한한 힘이 나는 법이다.
“헌데 촌장. 이야기를 들어 보니 칠성상단이 문제인 것 같던데……. 일단 그곳의 입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필요하면 우리의 힘을 써도 괜찮네만.”
장기린은 추묵환의 조언에 고개를 저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사람을 보낸 건가?”
“예.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일이 처리되었을 거란 믿음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십로들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기린은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 살짝 비치는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바람이 선선합니다. 벌써 춘절이군요.”
“음? 그야 그렇지. 어느새 대문에 복(福) 자를 붙여야 할 날이 다가오는군.”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저에겐 믿음직한 형제들이 몇 명 있습니다. 추룡이 그렇고, 진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을 밖에서 저를 보이지 않게 도와주는 형제도 있습니다.”
“그가 칠성상회를 처리해 줄 거란 뜻인가?”
“예.”
십로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장기린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장기린과 형제들에게는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뢰 관계가 있었다.
전장에서 엮인 전우애라는 것일까.
“춘절에는 형제들을 모두 만나 보고 싶군요.”
장기린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체 왜 아직도 그놈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거야? 일처리를 이딴 식으로 해도 되는 거야?”
칠성상회의 젊은 상주 손오는 자신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언성을 높였다.
“낭인들이 방해를 해서 추적이 힘듭니다.”
“현상금을 높여도 애초에 찾을 수가 없으니 처리가 어렵습니다. 살수들만으로는 힘듭니다.”
뒤따르던 쌍둥이 호위가 한 말에 손오는 더욱 격분했다.
“젠장! 명예고 뭐고 없는 낭인왕 새끼. 임무에 실패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 아냐? 지들이 알아서 뒤처리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방해를 해? 그것들 제정신이야? 낭인들 평판은 안중에도 없나 보지?”
‘쾅!’ 하고 손오가 복도에 있던 나무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쌍둥이 호위는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손오는 명백히 냉정을 잃고 있었다.
“지금의 낭인왕은 새로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인망이 두텁습니다.”
“이름이 뭐랬지?
“주호입니다. 의리를 중요시해서 낭인은 절대로 같은 낭인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낭인 주제에. 시답잖은 짓 하고 있네.”
손오는 비웃음을 던졌다.
“젠장, 너희들도 그래. 너희들을 뒤따라 보냈을 때 몽도라도 찾아 놨어야지. 왜 멍청하게 빈손으로 돌아왔어?”
쌍둥이 호위는 둘이 똑같은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미 하늘에 연흔전이 몇 개나 터져서…….”
“병사들이 수색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암살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암살에 실패한 시점에서 방도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손오의 수하가 아니기 때문일까.
쌍둥이 호위는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다.
“젠장, 알았으니 닥쳐!”
손오는 불합리한 분노를 뿜어내며 한참 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그래. 하오문에 도움을 청해.”
쌍둥이 호위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하오문은 우리가 급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보료를 많이 요구할 것입니다.”
“상관없어. 써.”
“저희에게는 제한된 금액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하오문 고용은 어렵습니다.”
“젠장! 내 이름으로 도장 찍어 줄 테니 액수 상관하지 말고 쓰라고!”
손오는 품 안을 더듬어 잘 접힌 서찰을 한 장 꺼내 주었다.
서찰의 끝부분에 얇은 금박으로 일곱 개의 별,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 가지고 근처 지부장한테 도장 받아 와. 거기에 내가 도장 찍으면 돈은 얼마든 꺼내 줄 거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
“둘 다 말입니까?”
“그래.”
“괜찮겠습니까?”
“젠장, 우리 상회 안에서 감히 어떤 놈이 날 습격하겠어? 빨리 꺼져!”
쌍둥이 호위를 쫓아내듯 밀어낸 뒤, 손오는 자신의 집무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젠장! 빌어먹을!”
손오는 ‘쾅쾅!’ 발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걸어가 어두운 집무실 안쪽에 등불을 켰다.
등불을 키자 집무실의 풍경이 자세히 드러났다.
넓은 책장 위를 가득 매운 서책과 서찰 들, 한쪽엔 관에서 유통을 금지시킨 지도(地圖)가 버젓이 벽에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언제든 생각난 것을 표시할 수 있도록 세필과 먹이 마련되어 있었다.
손오는 맨 아래쪽에 숨겨진 서책을 꺼내 들었다.
갈색 가죽으로 표지를 감싼 두꺼운 책이었다. 손오는 책을 펼쳐 그 끝부분에 세필로 글자를 쓰면서 중얼거렸다.
“몽도 놈. 쉽게 제거할 수 있어서 그동안 쓴 건데 마지막에 이런 잔수를 부리다니.”
손오는 주판을 튕기면서 뭔가를 급히 계산해서 써 내려갔고, 이내 붓을 손에서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군. 이대로라면 기일에 맞추지 못하겠는데.”
손오는 머리카락을 감싸 쥐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다가 정면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으와악!”
손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졌다. 땅바닥과 부딪친 어깨에서 격통이 치밀어 올랐다.
***
원래 사람은 너무 놀라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는 법이다.
그는 옆에 있는 책장을 붙잡고 일어서려다 미끄러져서 다시 한 번 넘어지는 등 계속해서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흥미롭군.”
차분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에 손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경박스러운 성격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이지적인 미안(美顔)을 지닌 사내가 푹신한 양털 의자 위에서 정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까.
언뜻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차분한 안색에, 깎아 만든 듯 절제된 기품이 돋보이는 사내였다.
사람은 말투에서 인격이 나온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황족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깔끔한 한어(漢語)를 구사했다.
“누, 누구요? 당신은?”
괴한은 대답하지 않고 옆에 놓여 있던 서찰을 들어 올렸다.
“흑수 손오. 맞나?”
“……그렇소.”
손오는 그가 쥐고 흔드는 서찰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상당히 재밌는 삶을 살았더군. 새로 칠성상단이 사업에 진출할 때면 손오라는 이름이 빠지질 않던데. 아마 칠성상단의 이상할 정도로 빠른 성장은 그대 같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 세상은 불법일수록 성공하기가 쉬우니까.”
사내는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툭 던졌다.
“칠성상회를 위해 일했을 뿐이오.”
“그렇겠지. 나도 내가 따르는 분을 위해 일할 뿐이다.”
손오는 그 순간 눈을 반짝였다.
‘관인?’
거친 재질의 검은색 무복, 무릎에 대어 있는 각반, 글씨가 빼곡한 서찰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익숙함.
겉모습처럼 정말로 싸움을 업으로 삼는 낭인이면 가질 수 없는 태도였다.
‘관인이 대체 무슨 일로?’
크게 당황했던 손오는 그제야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비밀 장부를 소매 밑으로 감추고, 슬금슬금 의자 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소리요?”
“난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는 않군. 재고하길 바라네.”
손오는 그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해 보았다.
아찔했다.
맑은 날의 깊은 바닷물처럼 푸르고 청명한데, 그 안에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공간이 숨어 있었다.
‘위험해.’
손오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꼈다. 꼼수를 부리면 죽는다. 그의 본능이 그렇게 경고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원하는 게 뭐지?”
“일단 지금 원하는 건 간단하다. 몽도와 관련된 건에서 모두 손을 떼 주었으면 좋겠군.”
“몽도와 관련된 건……?”
손오는 당황하였다.
‘일단’이라는 단어도 상당히 거슬리지만, 몽도와 관련된 건이라고 하면 범위가 매우 넓다.
과거에 그가 지시했던 모든 살행들부터 최근에 있었던 하남 포정사인 이백의 일도 몽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건 어렵겠…… 으읍!”
손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대체 언제 일어선 걸까.
괴한은 귀신처럼 눈앞에 서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세필을 책상에 두드려서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쪼개진 파편을 그의 손등에 박아 버렸다.
“으으으읍!”
비명을 질렀으나 입이 막혀 ‘웅웅’거리기만 했을 뿐 시끄럽게 울리지 않았다.
“허억, 허억.”
잠시 후, 괴한이 손을 떼었을 때, 손오는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시 한번 묻지. 몽도와 관련된 건에선 손을 떼어 줬으면 좋겠군.”
“개소리하지 마! 이런 미친 개……. 으읍!”
이번엔 왼손이었다.
“으으으으읍!”
손오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안면에 지나치게 힘을 줘서 입술이 다 찢어져 버린 것이다.
“허억…… 허억…….”
진이 빠져 버린 손오의 앞에서 괴한은 처음과 똑같은 얼굴, 처음과 똑같은 눈빛으로 차분하게 그를 응시했다.
품 안에서 꺼낸 삼베 천으로 손을 닦아 내는 모습이 정갈하기까지 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법이다.
손오는 자신이 꽤나 냉철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비하면 새 발의 피만큼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오의 흐릿한 시선이 사내의 허리춤에 닿았다.
그곳엔 그가 앉아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한 쌍의 커다란 장군검이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