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화 (161/686)

2권 7화

제6장 대천문(代天門)(3)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추묵환의 나이가 일흔을 앞두고 있던 즈음의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 하나에 홀로 몸을 실고 드넓은 장강의 본류(本流)를 건너가고 있었다. 노를 저을 때마다 누렇고 탁한 물줄기가 파도가 되어 뱃머리를 철썩였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상쾌했다. 젊었을 때와 달리 노질이 힘에 부치는 것조차 신선했다.

“장강여민(長江如民) 황이석금(黃而夕金).”

추묵환은 흥에 취해 즉석으로 시를 지어 흥얼거렸다.

장강의 물은 마치 민초들과 같다. 누렇고 탁하지만 해질녘이 되면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추묵환은 여전히 건장한 상완근과 승모근을 부풀리며 힘껏 노를 저었다. 일부러 무공은 사용하지 않았다.

반 시진이 지나자 목 뒤에 뜨거운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배가 강가에 닿자마자 노를 손에서 놓고 배 위에 드러누웠다.

“허허, 나도 늙었구만.”

누가 그랬던가.

과거를 추억하기 시작하면 이미 늙은 거라고.

추묵환은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엔 내공을 안 써도 이 정도는 거뜬했는데 말이지.”

그는 숨을 몰아쉬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햇빛이 너무 강렬했다.

“불효막심한 놈!”

햇빛에 눈이 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망할 놈 같으니. 사람 고생을 어지간히 시켜야지. 기껏 물려줬더니 다 내팽개치고 서역을 가? 나 보고 다시 총채주라도 되라는 거냐? 고얀 놈!”

젊은 시절의 패기도 되살려 볼 겸,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오랜만에 배를 탔건만 마음만 더욱 싱숭생숭해지고 말았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다.

부모는 자식이 효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던데, 그의 자식은 왜 그리 천하태평인지.

“내가 이렇게 너무 건강해 보이는 것도 탈이구먼. 추룡아, 내가 평생 살기라도 할 것 같으냐…….”

무림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면 뭐하는가.

세월 앞에선 그 누구도 장사가 없거늘.

잠시 누워 있던 추묵환을 향해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누군가가 다가왔다.

탁, 탁, 탁.

추묵환은 제자리에서 상체만을 일으켰다.

한 소년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인, 장신구 하나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넝마나 다름없는 거적때기를 옷처럼 입고, 잔뜩 떡진 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년이었다.

나이는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소년의 웃음은 산골 동자승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소년의 왼쪽 눈두덩이와 오른쪽 뺨에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맑음’만이 돋보였다.

‘어떤 천벌 받을 놈이 애를 이렇게 때려?’

추묵환은 불편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소년이 내민 물건들을 바라봤다.

그저 조개 몇 개를 노끈에 꿴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왠지 마음에 들었다.

‘대놓고 구걸하는 것보단 기특하지 않은가.’

“값이 얼마냐, 꼬마야.”

하나 사 주려고 품 안에 손을 집어넣으니 소년이 움찔하며 놀랐다.

“왜 놀라는 것이지? 내가 안 살 줄 알았느냐?”

“그게 아니라……. 대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셔서…….”

“음?”

추묵환은 이상함을 느꼈다.

소년의 눈은 초점이 맞질 않았다.

하얗게 백태(白苔)가 껴서 맹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눈도 안 보이는 아이가 어떻게 그의 나이를 추측했냐는 것이었다.

“내가, 젊을 것이라 생각했었느냐?”

“네…….”

“어째서 그런 판단을 했지?”

소년은 잠시 당황하며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덩치가 크고 건장하셔서 젊은 분인 줄 알았어요.”

“눈이 보이느냐?”

“많이 흐리지만, 그림자 정도는 보여요. 그리고…… 숨소리도.”

“숨소리가 왜?”

“깊고 거칠수록 젊고 건장한 분이고, 얕고 가늘수록 나이가 많은 분이거든요.”

소년은 죄라도 진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귀가 좋구나, 꼬마야.”

“네…….”

추묵환은 자신이 너무 고압적이었나 반성하며 소년의 손에서 조개 팔찌들을 몽땅 뺏었다.

“엇?”

“내가 이걸 다 사 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추묵환은 다 사 주겠다고 했을 때 소년의 얼굴을 스치는 절박함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집을 안내해다오. 내가 잘 곳을 소개해 주면 더욱 좋다.”

“여기서 가까운 집은 저희 집밖에 없는데…….”

“거기로 좋다.”

소년은 한참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배는……?”

“두고 가면 된다. 신경 쓰지 말거라.”

소년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지팡이를 움직이며 걷기 시작했다.추묵환은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

소년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초가집 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근처에 작은 텃밭 하나를 일궜을 뿐 딱히 재산이랄 것도 없는 곳이었다.

추묵환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들을 느꼈다.

‘어디 보자. 남자가 아홉에, 여자가 다섯인가.’

한 구석에서 그물을 손보고 있는 젊은 사내들이 넷.

유일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에 모여서 뭔가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여인들이 다섯. 그리고 평상에 둘러 앉아 검패 놀이를 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들이 다섯이었다.

“그러고 보니 꼬마야, 너 이름이 뭐냐.”

“아, 제 이름은 유준이에요.”

소년은 순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추묵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좋은 이름이구나. 부모님이 지어 주셨나?”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유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미안하구나.”

“네? 뭐가요?”

“가족들이 여기에 사니?”

“네.”

추묵환은 평상 위에 앉아 있던 사내 중에 눈매가 가장 날카로운 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준아, 아까 그 팔찌가 얼마랬지?”

“하나에 동전 한 문이에요.”

“여기 있다.”

추묵환은 전낭에서 동전 열 개를 꺼내 유준에게 건네주었다. 유준은 손으로 동전을 더듬어 보더니 깜짝 놀라 다시 내밀었다.

“어? 너무 많이 주셨어요. 팔찌는 다섯 개였는걸요.”

“나머지 다섯 개는 집을 안내해 준 안내비란다.”

“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일단 갖고 있으렴.”

동전 열 개면 고작 소면 한 그릇이나 사 먹을 수 있는 돈.

하지만 추묵환은 왠지 그 동전들조차 유준이 갖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뉘슈?”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다가왔다. 다른 사내들의 시선이 따갑게 모여들었다.

“여행객이오.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늘 좀 쉴 곳을 찾고 있소.”

“여긴 객잔이 없는데.”

중년의 사내는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추묵환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알고 있소. 그저 한숨 자고 갈 수 있는 공간만 내주면 족하오.”

“보면 알겠지만. 우리도 그리 여유 있는 형편이 안 돼서.”

“물론 방 값은 내겠소.”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마나 낼 거유?”

“동전 오십 문이면 되겠소?”

보통 객잔에서 하루를 묵는 데 백 문 정도를 받는 게 시세였다.

“거 형편도 넉넉해 보이는데 손이 작으시네. 칠십 문 주슈.”

“좋소.”

수락하고 곧바로 돈을 건네자 사내의 태도가 급변했다.

“식사는 하셨수?”

“괜찮소. 배는 고프지 않소.”

“그럼 더 권하진 않겠수. 우리 먹을 것도 모자란 세상이니까.”

사내는 유준의 엉덩이를 퍽, 걷어차며 소리쳤다.

“아 뭐해! 손님,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 않고!”

“네.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유준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지팡이로 더듬으며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묵환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유준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사내에게선, 으레 마을의 꼬마 아이에게 가질 법한 인정이나 애정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방이니 불평하지 마슈. 그럼.”

중년 사내는 방을 한번 보여주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유준은 그와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사내에게 끌려가다시피 돌아가야만 했다.

“흐음.”

방은 예상대로 낡고 허름했다. 심지어 목조가 비틀렸는지 문이 꽉 닫히지 않아 바람이 이따금씩 들어왔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추묵환은 벽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단전의 뜨거운 기운이 몸으로 퍼져 나가고, 노곤한 기분과 함께 예민해진 청력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잡아냈다.

“웬일로 저 모자란 게 봉을 주워 왔대?”

“칠십 문이라니. 노인네 노망이 들었나? 뭐, 우리야 좋지만.”

“상황 봐서 주머니 좀 뒤져 볼까? 옷 질감이 제법 좋아 보이던데.”

“야! 아까 다 봤다. 동전 받은 거 내놔! 이 불효막심한 놈. 우리가 너 같은 병신 새끼 먹이고 입히면서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그깟 동전 몇 개 아까워서 끝까지 쥐고 있어?”

“술이나 사 먹을까? 간만에 공돈인데?”

“좋지!”

“허어, 쯧쯧.”

추묵환은 혀를 차며 다시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 했는데 역시나이다.

“이제 어쩐다?”

웃는 게 어여쁜 제법 마음에 드는 꼬마아이.

그리고 삶에 지친 탓인지 지독히 세속적으로 타락한 마을.

추묵환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피곤에 지쳤는지 옆으로 누워 깊게 잠들었다.

코를 골 만큼 깊이 잠들었던 추묵환은 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천하에서 손꼽히는 무공만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추묵환은 돌아눕지도 않은 채로 물었다.

“심심해서 내게 놀러 온 게냐?”

“엇, 네에…….”

추묵환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유준은 눈이 안 보이는 맹인임에도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그래. 앉아 봐라. 나도 네게 할 말이 있다.”

추묵환은 결국 이 일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

추묵환은 유준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마음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새 또 상처가 늘어나 있었다.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고 지팡이를 쥔 오른쪽 팔목엔 사람의 손 모양으로 멍이 들어 있었다.

‘잘 씻기면 참 잘생겼을 녀석인데.’

지금이야 거지꼴을 하고 있지만 유준은 얼굴선이 깔끔하고 코도 오뚝해서 썩 괜찮은 외모였다.

“준아, 아까 그 남자가 네 친척이더냐?”

“네에, 제 삼촌이에요.”

“그래? 그런데 어째 너를,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같더구나. 괜찮니?”

유준은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저를 거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걸요.”

“그……래?”

기특한 말. 기특한 얼굴.

추묵환은 거기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먹여 주고 재워 준다고 해도 약자를 때리는 건 잘못된 거란다. 자기가 못난 사람일수록 약자한테 성질을 부리는 법이거든. 본래,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제가 약자인가요?”

“그래. 너는 지금 약자다.”

추묵환은 직설적으로 문제를 짚었다. 유준은 진지한 모습으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럼 강자가 되면 아프게 맞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렇단다. 아무도 널 우습게 보지 못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유준의 얼굴에서 또 한번, 간절함이 스쳤다.

“그래. 하지만 지금의 너는 약하다.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해. 네가 강해지려면 때를 기다려야 할 게다.”

“때……?”

추묵환은 유준이 실망하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당연한 말 같지?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니.”

“…….”

“하지만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네가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해서란다.”

“저는 노예가 아니에요.”

유준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확립된 서열은 웬만해서 바뀌지 않지. 마음에서부터 굴복하는 게 당연해지면 나중에 네가 덩치 큰 거한이 되더라도 계속해서 굴복하게 된단다. 심신(心身)을 강건하게 가꾼다는 건 그런 거다. 노예는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불합리한 이 세상의 틀. 당연하듯 군림하는 윗사람.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서부터 당연시하는 순간, 너는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추묵환에게서 강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세상의 틀과 불합리를 논한다.

무림강호에서 손꼽히는 거인. 추묵환의 그릇은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고 있었다.

“잊지 말거라. 맞는 게 당연한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정말……요?”

“잠시 힘이 없어서 굴복하는 것?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늘 당연하게 여기게 되어선 안 된다. 반드시 강해져서 언젠가는 맞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슴에 품어라. 믿어라. 너는 언젠가 반드시 강해진다.”

추묵환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유준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그런 추묵환을 올려다보았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널 책임질 수는 없다. 복잡한 사정이 엮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급한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서 반드시 너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마.”

“저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나요?”

“당연하지.”

유준의 백태가 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추묵환은 비로소 미소 지으며 유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동안…… 많이 아팠지?”

“저는…… 저는…….”

추묵환은 유준을 다독여 주며 말했다.

“지팡이를 잡거라. 아프지 않게 맞는 법. 그리고 몸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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