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3화 (162/686)

2권 8화

제6장 대천문(代天門)(4)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추묵환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소호의 얼굴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당연히 궁금하죠! 그 애는 그럼 할아버지의 무공을 배웠나요? 장강에서의 인연으로 제자가 된 거고?”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 제자도 아니야.”

“에이―.”

소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했다.

“한 번이라도 무공을 가르치면 스승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그 애도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는 거죠.”

“뭐라? 한 번이라도 무공을 가르치면 스승이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묵신 할아버지가요.”

추묵환은 혀를 찼다.

“하여간 그 영감. 어떻게든 사부 소리 들으려고 용을 쓰는구만.”

“어? 그렇지만 신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사부 맞잖아요?”

“쯧쯧, 다 검은 속이 있는 게야. 망해 버린 암살일문을 떠맡기려 하는 것이니 혹시라도 뭔가 물건을 주면 절대로 받지 말거라.”

“물건은 왜요?”

“냉큼 일야회의 신물이라도 맡기면 곤란해지니까.”

추묵환은 십로 중 여섯 번째인 묵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뚝뚝한 성격이면서도 희한하게 수완이 좋은 늙은이였다.

“그보다 힘들진 않느냐? 벌써 반 시진이 넘었는데?”

“이거요? 음…… 뭐, 괜찮은 것 같은데요?”

소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추묵환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호는 무릎을 직각으로 굽히고, 상체는 꼿꼿이 세운 마보(馬步)자세에 양 팔을 좌우로 쭉 벌린 상태.

거기에 어깨와 허벅지 부근엔 각각 스무 근짜리 쇳덩이를 매달고 있었다.

즉, 총 팔십 근.

소호는 지금 자기 몸무게만큼의 쇳덩이를 하나 더 얹어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왜 이런 걸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뭐, 재밌긴 하지만요.”

철없이 부루퉁해 하는 소호였다.

“지난번에 위험한 일이 있었잖느냐. 다 네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이야.”

“흐응.”

“기특하구나, 소호야. 넌 꽤나 잘하는 편이란다.”

소호는 추묵환의 박한 칭찬에도 배시시 웃었다.

상대의 무공을 한 번만 보고도 간파하는 동체 시력, 상상한 대로 뭐든 행할 수 있는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육체.

추묵환은 극찬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재능이 있을수록 칭찬을 아껴야 하는 법.

자칫 오만해지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정말 기가 막힌 육체야. 고작 열두 살 나이에 이런 유연성과 근력이라니.’

추묵환은 생각했다.

고대 서적에 나오는 ‘천무지체(天武之體)’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아마 그렇기에,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소호가 수련하는 모습은, 그때 그 아이와 너무나 비교가 되었기에.

“그 아이는 천재는 아니었단다.”

“저처럼 재능이 보통이었나 봐요?”

“……아니, 소호 너보다 못했지.”

추묵환은 진지한 눈빛으로 과거의 기억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어.”

***

추묵환은 냉정한 눈으로, 나무가 넘어가듯 꼿꼿한 자세로 쓰러지는 소년을 응시했다.

그나마 뒤로 낙법을 하듯, 굴러서 다시 일어나는 게 발전이라면 발전이랄까.

기이할 정도로 신법에 재능이 없는 아이였다.

“다, 다시 해 볼게요!”

유준은 주섬주섬 다시 일어나 양손을 턱밑에서 모았다.

추묵환이 가르치는 건 간단했다.

방어법.

추묵환은 제자리에 서서 손바닥으로 밀고, 유준은 다리를 살짝 굽힌 채 양손과 양팔로 손바닥을 버텨 내는 것이다.

턱, 명치, 관자놀이.

옆구리의 간장 부근까지 급소를 가리게 하는 것까진 성공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몸에 받는 충격을 최대한 분산시켜서 흘려보낼 수 있느냐.

그건 근육의 유연성과 힘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간다.”

추묵환은 밀었다.

내공은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한 육신의 힘만으로, 성인 남성 한 명이 힘껏 때리는 정도의 파괴력을 사용했다.

유준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다시 한번 나동그라졌다.

등이 땅바닥에 닿는 소리가 둔탁했다.

추묵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걸로 열 번째니 판명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상하다. 처음 만났을 때 이 아이에게서 분명 뭔가를 느꼈었는데.’

유준에겐 방어 능력과 다리 움직임을 포함한 신법(身法)의 재능이 없었다.

추묵환은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준아. 방어는 됐다. 맞을 일이 생기거든 최대한 힘을 분산시킨다는 느낌으로 이처럼 버텨 내는 거다. 하나, 하나, 고통스러워도 참고 버티다 보면 예전보다 나아질 것이다.”

“네!”

유준은 추묵환의 말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들거라. 이번엔 공격이다.”

“네? 공격이요?”

“아무 때나 네 힘을 자랑하라는 뜻이 아니야. 본래 무공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해야하는 법이다. 창(戈)으로 막는다(止)고 해서 무(武)다.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 네가 공격해야만 하는 때가 오면 너 스스로 알게 될 것이야. 너 자신을 지킬 때, 그리고 악인을 참(斬)할 때만 쓰거라.”

“네. 명심할게요.”

추묵환은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준을 보며 기특한 심정이 되었다.

추룡 같은 제 멋대로의 망나니 말고 이런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짜로 데려다가 제자를 삼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 될 말이지. 지금도 녹림이랑 수로채가, 족보가 꼬여 난리인데. 갑자기 내 제자가 나타나면 어떡하라고. 으음, 은자촌으로 데려가야겠어. 거기 가면 스승이 되어 줄 사람 한 명쯤은 있겠지.’

추묵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유준의 뒤로 돌아가 유준의 손을 감싸듯 지팡이를 붙잡았다.

“잘 느껴 보거라. 이건 내가 익힌 무공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초식이다. 해풍(海風)이라고 하지.”

왼발을 한 발 앞으로 뻗으며 장중하게, 가벼운 듯하면서도 묵직한…… 언제 한겨울의 칼바람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구름처럼 지팡이가 움직였다.

때론 봄날의 훈풍(薰風)처럼 산들거리다가, 어느 순간엔 늦가을의 갑작스러운 한파(寒波)마냥 냉정하게 끊어 쳤다.

크게 보면 그저 수직내려치기를 몇 번 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변화무쌍한 의미들이 숨어 있었다.

“내가 가진 무공은 열세 개의 초식을 갖고 있단다. 해왕(海王)이 가진 열세 개의 기예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해풍은 그중에 기본공에 불과하지만, 옛날 조사(祖師)께선 해풍에서 나머지 열두 개를 만들어 냈다고 할 정도로 의미가 깊은 초식이란다. 또한 나중에 배울 무공의 연습도 할 수 있게 잘 만들어져 있지.”

추묵환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서 유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음?’

유준의 표정은 뭔가가 달랐다.

방어법을 가르칠 때랑은 딴 판이다.

추묵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음, 아냐. 음, 이렇게……?”

유준이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지팡이를 미묘하게 흔들었다.

추묵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유준의 움직임은 명확하고, 정확했다.

동작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안에 담긴 뜻까지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추묵환은 묵묵히 뒤로 물러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준은 그 뒤로 한 시진 가까이나 고민하며 해풍 초식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됐……다!”

유준은 생전 처음으로 달성감을 얻은 듯 환하게 웃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이 녀석……!”

추묵환은 기절해 버린 유준을 한손으로 끌어안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넌 뭐냐. 도대체 어떤 녀석인 거지?”

신법은 천하의 둔재.

공격 무공에 한해서는 말도 안 되는 천재.

거기에 반 시진이 넘게 무공에 탐닉하는 집중력과 정신력.

추묵환은 유준의 배꼽 위, 명문혈에 장심을 갖다 대고 내력을 운용했다.

채 영글지도 않은 단전을 순식간에 내력으로 채워 버린 뒤, 전신의 혈도를, 내력을 담은 손으로 꾹꾹 누르며 추궁과혈을 해 주었다.

“후우.”

추궁과혈을 다 끝낸 뒤, 추묵환은 조심스럽게 유준의 목 뒤를 지그시 눌러 주었다.

유준이 눈을 번쩍 떴다.

“어? 어어?”

유준은 눈을 끔뻑거리며 당황하다가, 추묵환의 손을 만져 본 뒤 환하게 웃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저 성공했죠? 그렇죠?”

유준은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이상해요. 왜 몸이 이렇게나 가벼운 걸까요? 뭔가 상쾌한 기분이에요.”

유준은 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추묵환은 미리 챙겨 둔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그런데 저 성공한 것 맞죠?”

“그래. 대단했다. 엄청난 재능을 가졌구나. 어떻게 한 번에 그걸 따라한 거니?”

“재능이 있어요? 제가요?”

“그래. 대단한 재능이구나.”

유준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닐 거다. 특히 한 번만 느껴 본 초식을 완전히 분해해서 복원하는 건 나도 살면서 처음 보는 것 같구나.”

“정말……요?”

“그래.”

유준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기쁜 듯이 웃었다.

추묵환은 그 순수한 웃음을 보자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녀석. 이런 곳에 가만히 두기 아까운 재능을 갖고 있었구나.”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아니다. 그 정도 재능이면 내가 아니라도 어떻게든 발견되었겠지. 그런데 어떻게 한 거냐. 초식 전개를 한번 같이해 줬을 뿐인데 어떻게 모든 변화를 읽어 냈지?”

유준은 손을 꿈지럭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냥……. 알았어요.”

“그냥?”

“지팡이로 움직이는 건 익숙하거든요. 그동안 지팡이가 제 눈이자 길잡이였기 때문에……. 왠지 알 수 있었어요.”

추묵환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 무공을 익히는 데 축복이 될 줄이야.

‘지팡이에 모든 걸 의지했다……. 지팡이를 통해 모든 걸 느끼려 하고, 모든 감각을 지팡이에 의존한다. 지팡이를 검으로 바꿔 보면 검신일체가 아닌가?’

검사들은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일부러 감각을 차단하고 검과 한 몸이 되려 노력한다.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인 유준은 그 과정을 강제로 겪다시피 하면서 이처럼 기이한 재능을 얻게 된 것이다.

“대단하구나, 준아. 하지만 명심해라. 무공은, 배웠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수련하고 또 수련해서 완전히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자다가도 펼칠 수 있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게 하나를 파고들면 그게 곧 무공의 궁극이다.”

“네. 명심할게요.”

추묵환은 결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루에 천 번.”

“처, 천 번……?”

“하루에 천 번씩 수련하며 기다리거라. 나는 백 일 뒤에 돌아오겠다.”

“백 일 뒤에…….”

유준이 작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반드시 해낼게요. 할아버지.”

***

“맹인인데 무기술을 한 번에 완벽하게 익히다니. 신기한 재능이네요. 에이, 뭐야. 결국 천재였잖아요.”

소호는 쇳덩이를 어깨와 허벅지에 찬 채로, 등이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젖힌 뒤 어깨 관절을 탈구시켜 팔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말했다.

천축에서 전파되었다는 전신 근육 단련술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깨에 올려놓은 쇳덩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자세를 하고 있으면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추묵환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근데 왜 백 일을 기다리라고 하신 거예요? 바로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소호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유준을 직접 보고 싶은 눈치였다.

“추룡 녀석과 단판을 지을 생각이었지. 녹림수로채는 내 평생의 업적이니까. 버리고 가고 싶다면 날 쓰러뜨리고 가라고 했단다.”

“어? 추룡 삼촌은 결국 서역에 갔잖아요? 그러면……?”

“…….”

“히힛. 더는 안 물어볼게요.”

“시끄러워 이 녀석아. 내가 져 준 거야!”

추묵환은 버럭 소리쳤다.

“커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어어? 치사해요! 백 일 뒤에 어떻게 되었어요? 유준은 어떻게 됐는데요?”

“몰라, 이놈아. 그 동작 그대로 반 시진 더 버텨야 한다. 알았지?”

“으으! 쪼잔해!”

추묵환은 부루퉁한 소호를 애써 외면하며 기억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지금쯤 열다섯이 되어 소호보다 형이 되었을 유준.

추룡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실, 순수한 소호에게 더는 말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후회로 점철된, 너무 잔혹한 피투성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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