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4화 (163/686)

2권 9화

제6장 대천문(代天門)(5)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약속했던 백일 째의 날이었다

추묵환은 당황하여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따리 속 깨끗한 옷과 간식들이 뒤섞여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게냐……!”

원래 변변찮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완전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추묵환은 다급히 가장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의 생각대로 난장판이었다.

탁자와 집기들이 널브러졌고 바닥에는 기묘한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추묵환이 새카맣게 굳은 흔적을 발로 조금 비벼대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분명 사람의 피였다.

“싸움……?”

추묵환은 차가운 눈으로 주변의 흔적을 훑었다.

그는 집 안의 흔적을 다 살핀 뒤 밖으로 나가 다른 집의 상황도 살폈다.

이제 보니 사방이 피범벅이었다.

벽, 바닥, 특히 마을의 중심은 땅이 온통 새카맣게 보일 정도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고 나니 명확한 결론이 나왔다.

적은 고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오히려 다수였던 건 마을 사람들 쪽이다.

그들은 하나씩 덤비다가 나중엔 집단으로 덤볐고, 최후엔 도망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움직임, 모습. 그리고 흉수가 싸울 때의 모습까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벽을 길게 가른 흔적을 본 추묵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손을 비스듬하게 휘둘러보았다.

벽과 각도가 일치했다.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천히 걷던 추묵환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유준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추억의 장소로 걸어갔다.

“허…….”

추묵환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유준이 수십 번 나동그라지면서도 순수하게 웃던 그 장소에 총 열네 개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설마.”

추묵환은 떨리는 심정으로 다가갔다.

‘유준도 죽은 걸까’ 하는 공포심이 들었다.

무덤의 가장 앞에 지팡이가 바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준의 것……!”

추묵환은 지팡이의 끝에 매달린 서찰을 황급히 펼쳐 보았다. 한 글자라도 더 빨리 읽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허어.”

서찰을 다 읽고 난다 읽은 추묵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힘이 빠져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서찰의 어설픈 글씨가 안부를 묻고 있었다.

대인.

돌아오셨나요? 별일은 없으셨겠죠?

저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마을 사람들은 늘 제가 수련하는 것을 방해해요.

해풍을 천 번씩 수련해야 하는데.

늘 수련을 하려고 하면 다른 일을 시켜서 방해를 해요.

최근에는 잠 잘 시간을 줄이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 번을 다 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제가 잠을 줄이고 수련을 하는 걸 삼촌이 알게 되었어요.

맞았어요.

막는 법을 배워서 그런지 오래 버텼어요.

화가 난 삼촌이 도끼를 들었어요.

쓸모없는 녀석은 죽어도 된대요.

대인께서 그러셨죠?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고.

제가 재능이 있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럼 재능이 없는 약자들은 저 사람들이잖아요? 쓸모없는 것도 저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더는 약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쉬웠어요.

다 죽였어요.

다 죽이고 나니 조금 미안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요.

무덤을 만들어 주고 있을 때 어떤 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저를 제대로 키워 주신대요.

대인께선 저를 책임질 수 없다고 하셨죠?

그래서 이분을 따라가려고 해요.

감사했습니다. 대인.

해풍은 잘 쓸게요.

“허허.”

추묵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탓이구나. 내 탓이야.”

편지를 읽는 내내 충격, 경악, 불신을 경험하다가 마침내 후회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지 말던가.

아니면 위험하더라도 그날 유준을 데려갔어야 했다.

사람은 얼마든지 맹목적으로 변할 수 있거늘.

어째서 재능 같은 소리를 해서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단 말인가.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던데……. 그것도 헛말이구나. 내가 헛살았어.”

유준은 길을 잘못 들었다.

고작 열 살에 행한 살인.

것도 십 단위가 넘는 숫자를 한 번에 죽였으니 다시 정도(正道)를 걷기는 요원할 것이다.

추묵환은 먹먹한 가슴을 두드리며 일어나 유준을 위해 준비해 온 새 옷과 간식 보따리를 지팡이의 앞에 두었다.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하지만 이젠 놔주어야 한다.

추묵환은 그렇게 쓸쓸히 돌아섰다.

***

“할아버지? 무슨 고민 있으세요?”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추묵환은 고개를 갸웃하는 소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니다. 그저 옛 생각이 나서.”

“어! 그 유준 형 생각하셨죠!”

“……은근히 날카롭구먼! 그래 이 녀석아. 그 녀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말해 줘요. 지금 그 형은 어디에 있는데요?”

소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글쎄다.”

추묵환은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날처럼 하늘은 유난히 새파랗고 맑았다. 하늘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반대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꼬.”

***

하남에 위치한 낙양은 고대로부터 중요한 땅이었다.

하, 상, 주로 이어지는 왕조의 수도 역할을 했으며 후한 때는 동탁에 의해 불바다가 되었다가 조조와 조비 부자에 의해 다시 부흥했다.

황하강의 중류 양가호(楊家湖)가 보이는 동북 쪽의 언덕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인부들이 뼈대를 세우고 전각을 지었다. 기왓장을 나르는 인부만 수십, 이미 완성되어 가는 전각에는 공예의 장인(匠人)들이 잔뜩 모여 화려한 솜씨를 뽐낸다.

어디로 보나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게 분명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어색한 한어(漢語)였다.

공사장 인근의 높은 오 층 전각 위.

창밖으로 공사장을 내려다보던 외팔이 사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팔에는 화려한 가죽 장신구를 잔뜩 걸쳤고, 머리엔 이민족 특유의 띠를 두른 사내였다.

키가 매우 컸고, 팔도 길었다.

등에는 나무꾼들이 쓸 법한 거대한 외날도끼를 비스듬하게 메고 있었다.

“전사는 이런 곳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드넓은 땅을 내달리며 하늘과 땅, 자연으로부터 품성을 배우고 거칠게 싸워야 강해진다.”

사내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상석(上席)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역시 출신은 못 속이는군요. 몽고의 한때 잘 나가던 장군으로서 저런 답답한 곳은 마음에 들지 않나보군요?”

“흥.”

“하지만 막상 완성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바뀔 겁니다. 어마어마한 돈과 재원들이 투입되고 있어요. 저곳은 이 나라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거점이 될 것입니다. 한왕이 반란을 일으켜 준 덕분이에요. 이렇게 낙양을 장악하고,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녹색의 관복. 화려한 옥요대.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했다.

상석에 앉은 자는 환관이었다.

환관은 고자.

남성(男性)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남자란 뜻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특이했다.

왼쪽 손에 엄지손가락 하나를 제외하곤 손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눈에서는 살기와 염기(艶氣)가 뒤섞여 기묘한 눈빛을 뿜어냈다.

어떤 면에서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 자이혼. 앉으세요. 난 그대가 필요합니다.”

자이혼은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잠시 환관을 바라본 뒤, 자리에 착석했다.

“후후, 여기 모인 분들은 제가 왜 여러분을 모았는지 알고 계시나요?”

회의장에 착석한 사람은 십여 명.

꽤나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은 늙은이도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아이 참, 모르는 척하시기는. 당연하지 않나요? 우리의 원수들을 드디어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드디어……!”

“그 천하의 원수를!”

“그게 정말이오, 왕 공공?”

왕 공공이라 불린 자.

환관 왕진은 기분 좋게 웃으며 미리 준비한 서찰을 펼쳤다.

“오늘 공식적으로 동창에서 넘어온 서류랍니다. 후후, 은자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발견되었다고 하는군요. 동창에서 파악한 바로는 그 마을에 유명 인사들이 숨어 있고, 그중 한 명이 장강용왕 추묵환이랍니다.”

“추묵환! 쳐 죽일!”

회의장에 모인 자들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날 보내 주시오. 왕 공공! 내가 추묵환의 머리를 들고 오겠소!”

“앉으세요.”

“난 자신 있소. 산속에서 신선놀음이나 했던 늙은이는 나에게 상대도 안 된단 말이오!”

“녹림마왕. 앉.으.세.요.”

환관 왕진이 뚝뚝 끊어가며 말하자 살벌한 분위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어…… 음…….”

녹림마왕은 우물쭈물하다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무척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분한가요, 녹림마왕?”

“아……니오.”

“후후, 그러셔야죠. 기껏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는데 복수도 못 해서야 되겠어요?”

왕진은 자신의 잘린 손가락들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장강용왕에게 원한이 있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조심해요. 난 시끄러운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꾸 그러면 쫓아낼 거예요.”

“끄응.”

녹림마왕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왕진은 회의에 참석한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나를 믿고 복수를 맡긴 것 아니었나요? 장강용왕 추묵환, 흑신의, 만수마왕 종조기, 일흉대기 광사로, 일야회주에 검선까지. 모두 대단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그대들은 그자들의 일생일대 대적이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원수는 있다.

특히 무림강호란 곳은 은원(恩怨)이 그물처럼 얽힌 곳이 아니던가.

오늘 회의장에 모인 자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은자촌 사람들의 일생일대 대적들.

환관 왕진이 그 모두를 찾아 모은 것이다.

“그대들이 각자 복수의 대상을 찾으려 했다면 아마 십 년은 더 걸렸을 테죠. 그들은, 거창한 이름값 만큼 능력이 있어요. 게다가 복수를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저들은 강하니까요. 말해 보세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게 누구죠?”

“왕 공공……이오.”

“맞아요, 저예요.”

‘차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왕진이 섭선을 펼쳐 입을 가리며 웃었다.

새카만 섭선에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이 염기를 흩뿌렸다.

“오직 나만이. 황실의 실세이자 차기 황제폐하의 교육 담당관인 이 왕 공공만이 그대들의 복수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저에게 맡겨요. 그럼 여러분의 복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당당한 선언엔 확신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자들 중 몇 명은 우려를, 대다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을 보냈다.

“그런데 붉은 악귀는?”

그때 우려를 표하는 사람 중 하나였던 자이혼이 질문을 던졌다.

“무쌍귀 말인가요?”

“그렇게도 불리더군.”

자이혼에게 있어 철천지원수인 장기린.

그는 군부에 있을 때는 붉은 악귀로 무림강호에 나오고 나선 무쌍귀로 불렸다.

“있는 것 같습니다. 직접 확인은 못 했지만 여러 정황이 있어요.”

“그렇군. 그럼 우리도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분?”

왕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대천 자이혼이 그분이라. 혹시 대역적 텐챠이를 말하나요?”

“대역적……? 흥, 그렇다.”

자이혼은 성질을 부리려다 꾹 눌러 참으며 답했다.

“그 사람을 왜 찾죠?”

“붉은 악귀가 있다면 여기 있는 자들로는 역부족이다. 모두가 다함께 덤벼도 안 돼.”

단호한 말투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몽고 달자 놈!”

“건방지군.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는 건가!”

“그깟 애송이를 우리가 두려워할 것 같아?”

회의장에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힘을 자신하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그럴 만한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우습군.”

자이혼은 비웃었다.

“두 사람은 하늘의 신께서 내린 숙적이다. 붉은 악귀의 상대는 푸른 늑대만이 할 수 있어. 다른 자들은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다르단 말이다.”

“조용.”

시끄럽게 들끓으려는 회의장을 왕진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확실히, 그의 무용담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리고 제가 따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는 황실에서 탄생한 괴물이에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황실……?”

“무쌍귀가?”

왕진은 빙긋 웃으며 자이혼을 달랬다.

“자이혼, 걱정마세요. 텐챠이는 찾아보도록 하죠. 확실히 쓸 수 있는 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하지만 나도 강한 사람들을 준비해 두었어요. 무쌍귀 못지않게 강한 자니 혹시 텐챠이가 합류하지 못하더라도 걱정할 것 없어요.”

“무쌍귀 만큼 강한 자……? 훗, 그럴 리가.”

“아뇨, 정말이에요.”

왕진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대들은 명태조 주원장이 황실에서 비밀스럽게 행했던 신수(神獸)계획을 알고 있나요?”

“신수……?”

“후후, 기대해도 좋아요. 무쌍귀는 그때 만들어진 신수 중에 하나. 그리고 난 그 신수 계획을 얻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나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왕진은 빙긋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선 거대한 건물이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고 있었다.

활짝 펼친 검은색 섭선 뒤로 불길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우리에게도 신수가 있어요. 그것도 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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