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5화 (164/686)

2권 10화

제6장 대천문(代天門)(6)

“둘이라고?”

자이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악귀가 둘이나 있다는 건가?”

“그렇지요.”

자이혼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다시 묻지. 붉은 악귀가 둘이라고?”

“다시 대답하지요. 그렇답니다.”

왕진은 자이혼이 당황하는 모습이 못내 즐겁다는 듯 쾌활하게 웃었다. 자이혼은 버럭 소리쳤다.

“헛소리!”

“본 공공은, 실속 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붉은 악귀가 누군지 알고나 지껄이는 건가.”

“말조심하세요. 말투가 너무 천박하군요.”

왕진으로부터 서늘한 위협이 가해졌다. 자이혼은 눈을 부릅뜨고,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하늘 신께서 내린 천하의 원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우리 푸른 초원의 전사들이 바보라서 악귀를 두려워한 줄 아는가! 그는 피투성이 악귀이며, 또한 죽음의 신이다. 정병 일 만 명이 있어도 막을 수 없는 무적자란 말이다.”

회의장 안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쯧쯧, 허풍이 심하군.”

“힘이 모자랐으니 적이 두려울 수밖에.”

“싸움에서 진 게 부끄러우면 적을 과장하는 법. 당연한 일일세.”

으득―.

자이혼은 이를 갈았다.

그의 충혈된 두 눈이 회의장 안에 있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멍청이들. 붉은 악귀만 없었어도, 너희는 지금쯤 명나라가 아니라 북천맹의 나라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막강한 푸른 늑대 텐챠이.

신묘한 하시르에 패력의 우르칸, 거기에 자이혼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이름이 없지 않은가.

자이혼은 실제로 붉은 악귀만 없었어도 십삼 년 전의 대 계획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마라. 붉은 악귀는 비록 적일지라도, 너희 같은 자들이 함부로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이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백에 눌려 입을 꾹 다물었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차르륵―.

왕진의 섭선이 맑은 소리를 냈다.

“자이혼. 나는 무쌍귀를 폄하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장기린은 대단한 사람이지요. 실제로 이 나라를 한번 구한 적이 있는 구국의 영웅이 아닙니까? 그렇죠?”

왕진은 섭선을 다시 ‘탁, 탁’ 소리 내어 접으며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자이혼을 진정시켰다.

“그렇다.”

“본 공공이 한 말은 그저 그만큼 우리 문(門)도 강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이혼 그대와 북천맹이 약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으음.”

“후후, 본 공공을 믿으세요. 우리 신수들이 얼마나 강한지. 조만간 그 증거를 보여 드리도록 하겠어요.”

자이혼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러 가지로 불쾌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왕 공공, 그럼…….”

고요한 회의장의 공기를 뚫고 한쪽에 착석해 있던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짧은 머리에 사내답게 각진 얼굴, 그는 양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를 덮는 검은색 철갑주를 착용한 자였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선 복수를 앞둔 흥분이 새어 나왔다.

“말씀하세요, 남도화.”

“우리는 곧바로 그 마을을 공격하는 것입니까? 이제 주변에 알려 싸울 힘을 모아도 되겠습니까?”

“아뇨. 좀 더 기다려야지요.”

남도화라고 불린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왜 기다려야 합니까?”

“이런, 이런. 남도화 소협. 그대는 조금 전에 본 공공이 자이혼과 나눈 대화를 못 들었나요?”

“무쌍귀 말입니까?”

“그래요.”

“하지만 왕 공공께선 우리에게 무쌍귀 같은 자가 두 명이나 더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요.”

“그럼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남도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왕진이 눈에 이채를 띈 채 말을 이었다.

“본 공공의 말을 믿나요?”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습니다.”

“후후후, 기분 좋군요.”

왕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답해 주겠습니다. 본 공공이 설명해 주지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는 법이 없으니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손자공이 한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알아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적은 힘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모두의 원수들이 모여 있으니……. 강력한 고수가 십여 명인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나 착각하고 있군요.”

왕진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정도면 지금 기다릴 필요가 없지요. 당장이라도 밀어붙여서 저들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왕진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왕진을 바라봤다.

“허나 적들은 단지 그 십여 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 각각의 인맥이 있고, 또한 그들을 지키는 조직도 있습니다.”

“조직이라고요?”

“그 망할 마을을 박살내 버리려는 우리와 반대되는 조직이지요. 그 구심점에 누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허나 동창과 내가 정찰을 보낼 때마다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차단을 하더군요. 하오문이나 안휘성에 있는 남궁세가가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만.”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동요했다.

“쯧, 군사 십만 명 정도를 보내서 쓸어버리면 좋으련만.”

왕진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린 뒤 말을 이었다.

“현재 명나라 시국이 뒤숭숭하여 군사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 문(門)에는 작전이 필요한 겁니다. 저들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고, 완벽한 복수를 하기 위한 작전. 은자촌에 있는 모두가 피를 토하며,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는 계략!”

왕진의 말은 한 글자마다 살기와 집착이 넘쳐흐른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들 모두 원한이 깊지만, 환관 왕진에게는 못 따라가겠다고.

그러니 믿을 수 있었다.

저 정도로 원한이 깊다면, 어떤 원한이든 은자촌에게 한 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왕 공공을 믿고 기다리지요.”

남도화를 시작으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진을 믿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왕 공공께선 조금 전에 ‘문’이라고 하신 겁니까? 문파를 뜻하는 그 문이요?”

“아차! 설명을 아직 안 했던가요? 후후, 그렇습니다. 바로 들었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왕 공공은 문파를 갖고 계셨습니까?”

“후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우리가 곧 새로운 문파가 될 거라는 뜻이었어요.”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더더욱 당황했다.

“왜 당황하나요? 걱정 마세요. 본 공공은 우리 문(門)때문에 그대들에게 지금 있는 문파에서 나오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를테면 비밀결사 같은 거예요.”

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의 중심으로 걸어 나왔다.

“잊지 말아요. 우린 복수를 위해 모인 것이에요.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 힘이 부족하여 갚지 못한 복수! 그 모든 걸 행해 주는 것이 우리 비밀결사 대천문(代天門)입니다.”

환관 왕진의 낭랑한 외침은 모두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천문이라…….”

“대신할 대(代)에 하늘 천(天)인가.”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문파?”

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요즘은 하늘이 바쁜지 천벌을 내려 주지 않더군요. 천벌도 우리끼리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천.

천벌을 대신 내린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감명을 받은 듯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따를 것이오.”

“나도 왕 공공을 따르겠소!”

“내 복수는 그대에게 맡기리다!”

열한 명의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 포권을 취했다.

유일하게 포권을 취하지 않는 한 사람, 자이혼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후후후, 좋습니다. 좋아요, 우리 모두 원한을 갚고 축배를 드는 그날까지 힘냅시다.”

“오오!”

“천벌을 위하여.”

왕진이 손을 들어 올렸고, 자이혼을 제외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벌을 위하여!”

***

무림강호를 아는 사람에게 안휘성을 물으면 백이면 백, 한 곳을 대답한다.

남궁세가.

천하 오대세가 중의 한 곳이자, 관과 무림을 통틀어 많은 고수를 배출해 낸 무(武)의 명가(名家).

십삼 년 전에는 후계 문제로 꽤나 복잡한 일이 있었으나,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가문을 좀먹던 외세 세력들을 모조리 척결했고, 새로운 후계자를 중심으로 좀 더 민중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정한 협(俠)의 가문이 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개편을 감행한 것이다.

대협 남궁창천은 새로운 후계자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사람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궁세가는 항상 대문을 열게 되었다.

안휘성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고,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이야기를 들었다.

가뭄이 들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나서서 친히 수로를 개척했고, 흉년이면 남궁세가의 재산을 풀어 빈민을 구제했다. 남는 땅은 모조리 빈민들에게 소작을 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

산적이나 도적떼가 창궐하면 관군보다 앞서서 그들을 몰아낸 것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는 어떠한 이득도 따지지 않았다.

처음엔 저러다가 곧 세가가 망하겠다고 걱정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증명되었다.

때문에 안휘성 사람들은 남궁세가를 숭상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남궁세가의 보호를 받기를 원했으며, 뭔가 물건을 살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남궁세가가 운영하는 상회(商會)의 물건만을 구입했다.

남궁세가가 개편한 지 삼 년째 되는 순간, 남궁세가는 이제까지의 이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문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새로운 후계자 덕분이었다.

장중보옥처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게 아니라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보통 민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안휘성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관가(官家)보다 남궁세가를 먼저 찾아간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제 일 년 남았구나.”

남궁세가의 적통 후계자. 남궁휴는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시장 골목을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장사를 하지 않는 시간의 시장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장사하는 물건엔 포대기가 다 덮여 있었고, 나무 상자가 잔뜩 쌓인 뒷골목은 적막함을 가득 띈 채 어두웠다.

“예전 같으면 이곳도 위험했겠지.”

남궁휴는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남궁세가가 민중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지 십 년이다.

빈민은 줄었고, 범죄도 줄었다.

예전 같으면 위험해서 나다니지 못했을 장소가 안전한 장소가 되어 갔다.

처음엔 범죄 예방을 위해 다니던 것이 이젠 남궁휴의 새로운 취미가 될 정도였다.

‘이게 다 객주님 덕분입니다.’

이제 남궁휴의 나이는 서른 셋이었다.

과거 처음 만났을 때의 장기린의 나이보다 더 많아졌건만, 남궁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장기린이 어째 점점 더 커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작은 호롱불이 걸려 있는 객잔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가 안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탁. 탁. 탁.

지팡이로 앞을 짚으면서.

‘맹인?’

처음엔 객잔의 주인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소년……?’

덩치는 꽤 크지만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엔 어려 보였다.

남궁휴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둡고 고요한 골목에서 두 눈에 하얀 백태가 낀 소년이 남궁휴를 응시하며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남궁세가의 후계자이신가요?”

“날 알고 있니?”

“다행이다. 매일 이곳을 산책한다고 듣긴 했는데 못 볼까 봐 걱정했어요.”

씩 웃는 소년의 얼굴은 너무나 순수했다.

남궁휴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 소년은 분명 순수함이 가득한데, 왠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남궁세가로 찾아오지 그랬니.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데.”

“그래선 안 돼요. 방해를 받거든요.”

소년이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비틀어 은빛의 칼날을 뽑아냈다.

“너……?”

남궁휴는 오른손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 가져갔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상대는 고작 이름도 모르는 십오 세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다.

그에 비해 남궁휴는 대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가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년에게선 위험한 냄새가 났다.

“살수?”

“음……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다른 분의 칼입니다.”

“……누가, 시킨 거냐.”

남궁휴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어떤 쳐 죽일 놈이 애한테 살행을 시켜? 엉?”

“헤에, 좋은 분이시네요.”

소년은 다시 한번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남궁휴는 가슴이 따끔하고 아린 듯한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해요. 저는 당신의 검술을 배우러 왔어요. 그러니 막을 수 있다면 막아 주세요.”

맹인 소년의 검이 거센 파도처럼 남궁휴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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