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6화 (165/686)

2권 11화

제7장 태동(胎動)(1)

소호는 몸을 낮춘 채 조용히 집중했다.

천장 대들보는 돌덩이처럼 딱딱했고 숨을 쉴 때마다 먼지 맛이 나는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상대는 ‘괴물’이었다. 정면으로는 도저히 승부할 수 없었다.

‘모은다. 축적한다. 힘을 끌어 모은다.’

소호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몸을 웅크린 상태에서 허벅지로 모이는 힘.

등 쪽 어깨에서 시작되어 손가락 끝까지 자르르 울리는 혈액의 고동.

그 모든 것을 모으고 모아서 한 점으로 분출시키는 것이다.

‘왔다!’

마침내 목표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시간, 똑같은 속도의 걸음걸이였다.

소호는 거기서 한 호흡 더 참았다.

아니나 다를까 ‘목표’는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소호는 번개처럼 아래로 뛰쳐나갔다.

공간이 일직선으로 잘리는 느낌이었다. 양발로 대들보를 박차고, 한껏 뻗은 오른손이 상대의 등을 쫓았다.

‘성공했……!’

손가락 끝이 옷자락에 닿는 듯한 느낌도 잠시, 목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걸음을 더 걸어가서 손끝에서 멀어졌다.

휘리릭.

목표의 넓은 소맷자락이 눈앞에서 펄럭였다.

“엇?”

소호는 탄탄한 손바닥에 정수리를 붙잡혔고 그대로 짓눌렸다.

바닥이 급속도로 다가왔다.

놀라서 양팔을 벌린 게 화근이었다.

마치 바닥에 내팽개쳐진 개구리마냥, 소호는 무릎을 꿇은 채 양팔을 벌려 절을 하는 자세로 착지했다.

“오냐.”

소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절을 하려고 기다린 거냐.”

“으으으!”

소호의 목표, 장기린은 정수리에서 손을 뗐다.

소호는 부루퉁한 얼굴로 일어서서 무릎을 툭툭 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공평해요.”

“그런가? 내 생각은 다른데.”

“아버지를 어떻게 붙잡아요!”

소호는 분해서 소리쳤다.

“난 나가서 놀고 싶다구요!”

“저번처럼 또 업혀서 들어오려고?”

“으으!”

“약속은 약속이다. 내 옷자락을 붙잡으면 나가 놀도록 해. 그땐 말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만. 전에 네 어머니와 이야기 하지 않았었나? 넌 계속 어머니를 걱정시킬 셈이냐?”

소호는 눈을 떴을 때 등짝을 때리던 진휘연의 슬픈 눈을 떠올렸다.

“그건……. 아니에요.”

“때가 되면 네가 나가기 싫어도 나가게 될 거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장기린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소호는 아버지의 말은 다 이치에 맞는 소리라는 게 더욱 열 받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이거 가능은 한 거예요?”

“물론.”

소호는 장기린과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정말로?”

“정말이다.”

장기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단, 내가 피하지 않고 맞상대 한다면.”

“엥? 그건 또 뭐예요.”

“오늘처럼 기습을 하면 난 피할 거다.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

소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장기린을 살폈다.

“혹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죠? 정말로 가능해요?”

“네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신체 능력을 볼 때, 옷자락을 잡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방법의 문제일 뿐이지.”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격려가 아니라 진지한 평가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소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휴우, 좀 더 노력할게요. 그래서…… 오늘은요?”

소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성급해. 무작정 사각지대만 노린다고 공격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 있는 공격을 해야지.”

“자신 있는 공격이었어요!”

“이 공격은 반드시 상대에게 통한다는 그런 확신을 갖고 움직였냐?”

“……아뇨.”

“그래. 그래서다.”

장기린은 무심하게 말했다.

“하(下) 하(下) 중(中).”

“중?”

소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난번엔 하하하였는데! 이번엔 뭐가 중이에요?”

“시점.”

소호는 진지하게 고민했고, 이내 답을 도출해 냈다.

“아! 기다린 거!”

“그래. 지난번보다 한 호흡 기다리더군. 좋은 자세다. 상대를 읽고 그에 맞춰 호흡을 조절해라. 또 다른 충고할 점은 움직일 때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라는 것이다. 생각의 속도와 몸의 속도가 일치하면 좋다.”

“으음. 내가 숨은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 넌 은신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하다.”

소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곰곰이 오늘 들은 내용들을 되뇌었다.

“반 박자. 모든 걸 쏟아붓는다. 쏟아붓기. 쏟아붓기…….”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소호가 분함을 담아 외쳤다.

“기다려요, 아버지. 꼭 성공해서 밖으로 당당히 나가 놀 거니까!”

소호는 그 말만 남기고 후다닥 도망쳤다.

장기린은 그런 소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좀처럼 아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웃음이다.

“지는 걸 싫어하고 열정적이군. 누굴 닮은 건지.”

쾌활하고 발랄한 진휘연일까, 아니면 평생을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장기린일까.

“둘 다인가.”

장기린은 작게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떠나갔다.

***

소호는 은자촌의 가장 중심부에 살고 있는 광사로의 집으로 향했다. 장기린으로부터 평가 당하는 사이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광 할아버지!”

일흉대기(一凶大器) 광사로.

그는 은자촌 십로 중에 다섯 번째로 나이가 많고, 다른 십로들에 비해 무공은 약하지만 본인이 지닌 대장 기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중의 전재였다.

소호는 오늘도 희한한 물건들이 잔뜩 걸려 있는 광사로의 작업실 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작고 마른 체구에 창백할 정도로 얼굴이 하얀 소년.

주기옥이 광사로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늙은이, 화기는 함부로 만들어선 안 되는 거야. 국익(國益)을 해치고 나라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 수 있는 대죄(大罪)란 말이야.”

“멍청한 놈! 그런 고리타분하고 겁쟁이 같은 생각 때문에 이 나라가 발전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라. 화기(火器)는 한 시대를 풍미할 기술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런 걸 무기랍시고 벌벌 떨기만 하니까 활용이 안 되지.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는데! 이걸 한번 봐라.”

광사로는 옆에 있던 작은 철구(鐵球) 끝 심지에 불을 붙여서 기옥에게 휙 던져 주었다.

“우왁?”

“안 터지니까 땅에 두고 한번 봐라.”

“응?”

기옥은 철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심지가 타들어가길 잠시, 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화려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우와악?”

“멍청아! 잘 봐! 지금이다!”

광사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내부에서 뭔가가 펑펑 터지고 있지만 철구 밖으로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둥그런 철구 옆에 꽂혀 있는 짧은 철 막대가 한 바퀴 휙 돌더니 땅을 내리쳤다.

“응?”

펑. 탁. 펑. 탁.

폭음이 터질 때마다 철 막대가 한 바퀴 돌아 땅을 내리쳤다.

그러니 철구가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움직인다.

“어? 움직이네?”

“그래! 화약이 터질 때 생기는 화력(火力)을 한쪽 방향으로 유도하면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이다!”

“화약을 넣는 만큼 움직이는 거야?”

“폭죽 형태로 작게 만들어서 넣어야하지만. 그래, 그런 거다.”

기옥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지만 안에 들어 있던 화약이 다 떨어졌는지 철구는 잠시 후에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신기하네.”

“이 위대함을 알겠느냐!”

광사로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신기하긴 한데. 근데 별거 아니잖아. 시장 통에 파는 장난감도 이 정도는 움직인다고. 그, 팽이 같은 거.”

“이 위대한 철구를 감히 팽이 따위에 비교하다니!”

기옥이 발끈했다.

“팽이가 어때서! 난 얼마 전에 처음 봤는데 신기했다고! 끈으로 치면 칠수록 더 빨리 돌아서 계속 돌게 할 수 있다니까?”

“끄응.”

“이건 금방 죽잖아!”

시대를 앞선 발명품이 팽이에 밀리고 있었다. 기옥은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철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거 만들면 잡혀가서 처형 당한다니까?”

“결국 그 이야기인가?”

광사로는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크핫! 죽으면 죽는 거지.”

“뭐? 목숨이 아깝지 않아?”

“쯧쯧, 어린놈이 왜 벌써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느냐. 당장 내일 죽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다 죽으면 그만인 게 사내가 아니더냐.”

광사로는 호기롭게 껄껄 웃었다.

“그게 아니라……히익!”

걱정 반 분노 반으로 따지고 있던 주기옥은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소호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기겁하며 옆으로 넘어졌다.

“기옥아! 즐거워 보이네!”

“어어, 소호……형?”

“히힛, 잘 됐어! 즐거워 보인다!”

소호는 기쁜 마음으로 주기옥의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

그 사건 이후, 주기옥은 기절해 버린 게 부끄러웠는지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건강해진 것이다.

“소호야. 저놈이 귀찮게 매일 찾아온다. 정 와서 놀 것 같으면 내 일이라도 도우라고 설득 좀 해다오.”

“응? 광 할아버지. 기옥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마음에 들긴 무슨. 시간 아까우니 일손이나 도우란 거지.”

소호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겁쟁이 기옥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광 할아버지가 솔직하지 못해서 항상 저렇게 말해. 매일 오고 싶을 때 오라는 뜻이야.”

“……그런 거야?”

“응.”

광사로가 소리쳤다.

“그런 거긴 뭐가 그런 거야! 안 와도 된다!”

“히힛, 부끄러워하시긴.”

소호는 광사로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광 할아버지. 그, 전에 보여 줬던 것 중에 몇 개 줄 수 있어?”

“어떤 거 말이냐?”

“토끼 사냥 때 쓴 거랑, 적왕이 흥분했을 때 썼던 거.”

“그걸 어디에 쓸 거냐?”

광사로의 눈빛이 엄중해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헛되이 쓰이는 일에 민감했다.

“아버지한테 이겨 보려고.”

“뭐? 촌장한테?”

광사로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가 촌장이면 위험할 일은 없겠군.”

“그렇지!”

“그런데 무공으로 이겨야 하는 거 아니냐?”

“아냐. 아버지가 내가 가진 걸 다 쏟아부으라고 했다고. 그럼 우리 마을 할아버지들의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거잖아?”

“크핫! 그렇지, 그렇지. 우리는 얼마든지 네 힘이 되어 줄 거다, 소호야.”

광사로는 흥이 돋은 듯 불길이 활활 타는 듯한 눈빛으로 성큼성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랑, 이거. 아, 싸움의 종류가 어떤 거랬지?”

“내가 아버지 옷을 붙잡으면 이겨.”

“촌장의 옷이라……. 어렵구만. 어려워.”

광사로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불타오르는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어이, 꼬맹아! 거기서 겸자(鉗子)랑 화연(譁然) 좀 가져와 봐라.”

“그런 걸 왜 나한테 시켜.”

기옥은 투덜거리면서도 어려운 단어를 정확히 알아듣고 물건을 가지고 왔다.

“자. 잘 들어라. 소호야.”

광사로는 소호를 앉혀 두고 물건의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고, 소호도 눈을 반짝이며 모든 것을 흡수했다.

“좋아! 왠지 느낌이 좋아!”

소호는 광사로의 작업실에 이어 대석의 집에 들렀다. 미미와 깜돌이가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필요한 목재들을 얻었고, 요즘 명상을 하고 있는 시간이 늘어난 섭주해의 집에도 들러 계획을 다시 한번 상의했다.

이틀 후, 준비를 끝낸 소호는 이른 아침에 풍운객잔의 안채 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의 아침은 항상 똑같다.

찰박거릴 만큼 물이 흐르는 돌길.

중심에 위치한 우물.

우물물을 퍼 담는 커다란 두레박과 나무 의자. 그 위에서 감자를 깎고 있는 장기린.

“후우.”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된 몸을 이완시켰다.

소호를 발견한 장기린이 감자를 깎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지그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감자 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아버지. 도전할 거예요.”

소호가 자신감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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